이청운 화백이 청운을 꿈을 안고 상경한 지도 어언 반세기가 가깝다.

그가 화단에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은, 71년 구상회 공모전에서 금상을 받으면서 다,

그리고 데뷔한 지 10년 만에 중앙미전에서 특선을 받으며 재 부상한다.

이때부터 화단의 주목을 받았으나, 시련도 따랐다.

 

박통 때인 1970년대 말에는 독제에 항거하는 ‘현실과 발언’에 합세해 혼이 난적도 있다.

정의감을 억누를 수 없어 참여했지만, 그가 표적이 된 것이다.

 

어리숙한 이화백을 만만하게 본 정보당국은 그를 납치해 무려 50일이나 감금해 버렸다.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출감하자 말자 낯설고 먼 프랑스로 떠난 것이다.

마지못해 선택한 외유에서 의외의 성과도 얻었다.

바로 살롱도톤느 전에서 1등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가 주로 그렸던 그림 소재는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낸 부산 바닷가 풍경이었다

애수에 젖은 풍경들은 질퍽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어둡지만 서정적인 바다가 바로 이청운의 그림 세계다.

 

그가 아프기 전에 부산 청사포로 화실을 잠깐 옮긴 적이 있었다.

비릿한 바닷가 추억을 떠올리며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림의 완성도 보지 못한 채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그에게는 항상 10년이라는 변곡점이 따랐다.

병마와 싸운 지도 이제 10년이 가까워오니, 곧 일어날 것으로 믿는다.

 먼지 덮인 미완의 작품이 빛을 발할 날이 머지않을 것 같다.

 

지난 20일, '청운이형 병문안 가자'는 연락을 김명성씨로부터 받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에다 몸도 편치 않았지만, 누워만 있을 일은 아니었다.

코로나가 시작되며 가지 못했으니, 그를 본 지도 3년이 넘어 버렸다.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 응암역에 내렸는데,

약속 장소인 서부경찰서 앞에는 김명성씨와 조해인씨가 먼저 와 있었다.

뒤이어 송상욱, 김영복, 전활철씨가 줄줄이 나타났다.

 

화실에는 부인 이상랑 여사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긴 세월동안 간병하느라 고생해서 그런지, 곱던 얼굴에 주름이 졌다.

대조적으로 이청운씨는 동자 같은 미소를 띠며 반갑다고 손을 흔들었다.

마치 양산박에 등장하는 무대의 모습이 연상되는 그런 표정이었다.

 

이청운 화백이 지병으로 자리에 누운 지도 어언 십 년이 가깝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제 이청운 화백도 변할 때가 된 것 같다.

살신성인,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아내 덕이지만,

미완의 그림을 두고 눈감지 못하는 이화백의 절박함도 더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듯, 어찌 하늘이 감동하지 않겠는가?

 

처음 병문안 갔을 때, ‘5년만 더 그릴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하소연 했는데,

소망을 이루고 싶은 집념에 십 년을 버텨낸 것 같다.

병상에 누워  곳곳에 걸린 미완의 그림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구상과 고민을 했겠는가?

이제 훌훌 털고 일어나 미완의 그림에 혼을 불어넣을 때다.

 

털고 일어나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면, 구상한 것을 에이 아이가 완성케 하면 안될까?

 

어두운 잿빛 화실의 풍경 자체가 이청운의 오래된 자화상 같다.

이젤은 어두운 뒷골목에 버틴 전봇대 같기도 하고, 삽살개가 다리를 치켜든 정겨움도 연상되었다.

 

뒤 늦게 뮤지션 김상현씨가 등장했다.

그 역시 중병으로 투병하는 처지지만,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힘들게 찾아온 것이다.

전에는 아코디온을 메고 와 셀브루의 우산을 연주했는데, 얼마나 애잔하고 슬펐는지 모른다.

그때가 생각났는지, 청운의 표정은 아쉬운 감이 역력했다.

평생을 음악과 함께 살아 온 상현씨 역시, 힘들어 악기를 가져오지 못한 심정이 어떻겠나?

 

물감이 짓이겨져 걸려 있는 팔레트 행렬도 정겹고,

이젤에 기대어 화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등대 또한 얼마나 불을 밝히고 싶겠는가?

모든 게 정지된 풍경이지만, 그 자체가 이청운의 삶이고 색깔이었다.

 

김명성씨는 이청운 미완의 작품 전을 열겠다고 말하지만, 안쪽에 누운 이 화백 들을까 걱정되었다.

긴 세월 눈 감지 못한 이유가 뭔 데, 자존심 상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들 화실에서 나왔지만 그냥 헤어질 수 없어, 서부경찰서 후문 쪽에 자리 잡은 마포나루로 갔다.

푸짐한 갖가지 해산물이 나왔는데, 인사동 낭인들 술자리에 어찌 소리가 없을소냐?

‘부용산’으로 시작한 음유시인 송상욱 선생의 흘러간 노래는 아련한 추억을 불러들였다.

 

'내 이름은 순이' 라는 노래인데, 가사 내용이 대폿집 작부의 신세타령이었다.

"내이름은 순이랍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에레나예요. 그냥 그냥 십팔번으로 통한답니다

술이 좋아 마신 술이 아니 랍니다. 괴로워서 마신 술에 내가 취해서 고향에 부모형제 내동생이 보고파 웁니다.

그 날밤 극장 앞에서 그 역전 캬바레에서 보았다는 뜬소문도 거짓이예요"

 

오랜만에 듣는 송상욱선생 노래도 흥겹지만, 술상 두드리는 젓가락 반주가 더 죽였다.

 

사진, / 조문호

 

 

 

서인사마당 주차장 가는 '인사11'에는 생태탕으로 유명한 부산식당이 있다.

80년도 초반부터 출입했으니, 내가 들린 요식업종 중 가장 오래된 가게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귀천이나 사동집도 남았지만, 술과 인연이 닿는 집은 부산식당이 유일하다.

 

지금은 사동집주인인 송점순씨만 살아계실 뿐,

부산식당조성민씨나 귀천의 목순옥씨는 세상을 떠나 아들이나 조카가 운영하고 있다.

그렇지만 음식 맛은 그대로 전승되어, ‘부산식당생태탕은 애주가들의 사랑을 받아 온 술안주다.

 

그리고 밥도 언제나 새로 지은 고슬고슬한 밥을 내놓았다.

맛은 있어도 음식이 늦어 손님들의 불만과 독촉도 따랐지만,

아무리 빨리 달라고 난리를 쳐도 눈도 깜빡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밥이나 생태탕을 먹게 되면 모든 불만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어쩌랴!

 

지금은 인정 많던 부산식당주인장 조성민씨는 가고 없지만,

16년 전 인사동 사람들전시 때 찍은 초상사진만 남아 부산식당트레이드마크처럼 벽에 걸려있다.

 

지난 18일은 건축가 임태종씨로 부터 부산식당에서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다.

오후 다섯 시 무렵, 정동지 따라 갔더니 임태종씨를 비롯하여 인천의 김광원씨도 와 계셨다.

김광원씨는 처음 만났으나, 정영신씨 장터 사진을 소장한 사업가란다.

모든 것이 작품을 꾸준히 소장해 준 임태종씨 덕분이었다.

 

그동안 나의 인사동 사진을 비롯하여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등 여러 점을 컬랙션 했는데,

그 날도 정영신의 장터 사진 두 점을 사겠다고 했다.

사진을 사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밥과 술까지 사주어 황송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런 독지가가 있는 덕에 가난한 예술가가 어렵사리 연명할 수 있는 것이다.

 

좀 있으니, 양산에서 일하는 공윤희씨도 나타났다.

한때 인사동 지킴이로 불린 그는 양산에 살지만, 틈만 있으면 나타나는 몇 안 되는 인사동 물귀신이다.

요즘은 몸이 아파 약 먹는 처지라 술을 마실 수 없으나,

이런 반갑고 고마운 자리에 어찌 술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부산식당의 오래된 늦장 부림도 여전했다.

밥부터 주었으면 술보다 밥을 먹었을 텐데, 생태찌개를 반쯤 먹어서야 밥이 나왔다.

금방 지어낸 밥이라 맛있기는 하지만, 인내력 없는 사람은 열 받기 십상이다.

 

그 날은 김광원씨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땅값 비싼 인천 송도에서 농사짓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분은 공들인 것만큼 돌려주는 농사의 미덕을 예찬하는 분으로,

주변에 몰려드는 쓰레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단다.

공터만 보이면 갖다 버리는 못된 인간들의 습성은 어디나 똑 같았다.

 

그는 경찰 간부 출신으로 섬에 들어가 번데기 장사를 했던 이야기에서부터

여태 살아온 이야기를 구구절절 들려주었는데,

진정성있는 처신으로 손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에 돈을 벌 수 있었다고 한다.

 

이차로 늘 마중으로 옮겼으나, 더 이상 술을 마실 수 없어 먼저 일어나야 했다.

인사동의 술자리는 늘 아쉽기만 하다.

 

사진, / 조문호

 

 

 

  사람도 풍정도 다 바뀐 삭막한 인사동을 아직도 미련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실 날 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인사동을 기록해 왔지만,

마지막 끈이었던 아지트마저 막혀, 더 이상 인사동에 대한 기록을 접기로 했다.

 

  간혹 봐야 할 전시가 있거나 볼 일이 있으면 들리기는 하지만,

이전처럼 인사동 거리를 스냅하여 포스팅 하는 일을 그만 둔지는 제법 되었다.

 

  그렇다고 인사동을 좋아했던 오랜 정마저 어찌 끊을 수가 있겠는가?

마치 마음 변한 연인을 못 잊듯,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꺼내든다.

 

  며칠 전에는 갈 곳도 만날 이도 없는 인사동을 무작정 찾아 나섰다.

인사동 정취가 사라져 낯설기 그지없는 인사동 거리를 하릴없이 거닐었다.

 

  외국 관광객만 보일 뿐 반가운 사람은커녕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궁녀가 꽃이 되었다는 쌈지 담벼락의 능소화가 그나마 눈 익은 풍경이었다.

 

  강민 시인을 비롯한 많은 풍류객들이 변해가는 인사동을 한탄했으나,

세월 따라가는 것을 누가 붙잡을 수 있겠나?

 

  또 다른 젊은이들이 새로운 인사동 문화를 만들어 갈 테지만,

인사동이 미술의 중심지인 이상 발길을 끊을 수는 없었다.

 

  전시개막식에서 반가운 인사동 풍류객을 만날 수도 있고,

다양한 전시를 볼 수 있는 것만도 인사동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그 날도 차마 그냥 갈 수 없어, 볼만한 전시를 찾아나섰다.

마침 갤러리밈에서 정정엽의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이 열리고 있었다.

 

텅빈 전시장에 들어서니 천장에서 바닥으로 늘어뜨린 긴 설치작이 눈길을 끌었다.

광목천을 캔버스 삼은 그림에는 크기도 생김새도 제각각인 수많은 벌레가 그려져 있었다.

 

  여성·생태주의 대표작가인 정정엽의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전에는

벌레외에도 그녀의 대표작인 팥과 콩 시리즈 등 23점이 전시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구상이자 추상이었다. 콩과 팥을 한 알 한 알 구상화처럼 그렸지만,

캔버스 전체를 바라보면 추상 또는 반추상이었다.

 

  콩과 팥은 때론 거대한 파도가 되기도 하고, 때론 빤짝이는 별이 되었다.

사소한 것에 담긴 생명력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콩이지만, 작은 한 알의 콩이 삶과 우주를 지탱하는 소중한 생명의 씨앗임을 말했다.

 

  그 한 알 한 알에 녹아든 농부의 땀은 노동의 가치를 말했고,

주변에 널린 평범한 것과 약한 존재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특히 새로 선보인 벌레에 대한 재발견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편견의 껍질을 벗은 벌레의 모습은 흉한 미물이 아니라 신비롭고 품위 있는 모습으로 승화되었다.

 

  미술평론가 심은록은 정정엽의 작품은 생명의 고귀함과 숭고함을 드러내며

우리의 편견을 한 꺼풀 벗겨낸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818일까지 열린다.

 

사진, / 조문호

 

 

지난 23일 늦은 오후, 모처럼 인사동을 사랑한 한량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조준영 시인이 비용의 많은 부분을 감당하며 두 달에 한 번씩 자리를 만들어 왔는데,

지난번 모임에는 인사동에 정나미가 떨어져 가지 않았다.

 

변해버린 인사동도 인사동이지만 싫은 사람이 생겨서다

그렇지만 재차 연락해 온 조준영씨의 전화를 깔아뭉갤 수는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적대다 끝날 시간이 되어서야 약속 장소인 ‘바다슈퍼’로 갔는데,

양산에서 온 공윤희씨와 화가 장경호씨는 가버리고 없었다.

 

술자리엔 조준영씨를 비롯하여 전활철, 최석태, 전강호, 노광래,

정영신, 김이하, 김 구, 김수길씨 등 아홉 명이 남았는데, 고정 맴버에서 선수교체도 있었다.

 

‘바다수퍼’라는 술집은 처음 가보았는데, 손님이 제법 북적였다.

조개에 물려 조개탕은 싫어하지만, 우동사리를 안주로 소주 한잔했다.

전활철, 최석태씨 까지 일어 선 파장의 술자리라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최석태씨가 간다는 ‘흐린 세상 건너기’로 건너갔더니,

최석태씨는 물론 장경호씨와 김영진씨도 그곳에 있었다.

김영진씨는 ‘나무화랑’에서 전시 중이었으나, 가보지 못해 죄송스러웠다.

 

요즘은 인사동에 거리를 두기 시작하며 전시장 출입도 가급적 삼가한다.

‘ 인덱스’에서 열리는 중요 사진전 외에는 일체 가지 않았다.

 

전시만 보면 될 텐데, 메주 알 고주 알 올린 전시리뷰가 거슬린 모양인데,

고맙다는 인사는 커녕 욕까지 먹어, 뭐 대주고 뺨 맞는 격이었다.

 

이젠 나잇값도 해야 할 때라, 전시장 출입을 자제하니 일이 줄어 너무 편했다.

 밀쳐 둔 내 일에 전념하기 위한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긴 세월 찍어 둔 인사동 사진들을 정리해 책도 마무리해야 하고, 오래된 필름 정리에서부터

동자동 작업 등 죽기 전에 마무리할 일이 태산 같아, 남의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귀천’이 있는 인사동14길은 젊은 사람이 몰리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곳곳에 반가운 분들이 콩깍지처럼 끼어 있었다.

 

담배 피우러 나갔다가 옆집 ‘삼화령’ 안을 들여다보니 소리꾼 김민경씨와 배성일씨가 앉아 있었다.

너무 반가워 합류했는데, 이런 게 인사동의 매력 아니겠는가?

 

벽치기 골목 ‘유목민’을 아지트로 삼으며, 이 골목은 한동안 발길이 뜸해졌는데,

‘흐린 세상 건너기’나 ‘삼화령’은 수십 년 된 오래된 가게다.

 

정희성 시인을 비롯한 원로작가들이 가끔 들리는 곳으로, 그중 인사동의 풍류가 남은 곳이다.

 

소주를 마신데다 ‘흐린 세상 건너기’에서 내놓은 약주를 마셨더니, 속이 거북했다.

이젠 술도 아무 술이나 마시지 말라는 신호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참새방앗간 ‘유목민’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유목민’에서 운명철학가 신단수씨를 만나는 행운도 누렸다.

 

술을 깰 겸 콜라를 한 병 시켰는데, 콜라 값도 계산하지 않고 병 채로 들고 와 버렸네.

치매도 이런 치매는 곤란하다. 이 나이에 무전취식으로 종로경찰서 갈 수야 없잖은가?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풍류가 사라진 지 어제오늘 만의 일은 아니건만, 새삼 인사동 노래를 부른다.

인사동 풍류란 인사동에 시냇물이 흐르던 조선시대 서화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8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철학자 민병산선생을 비롯하여 천상병, 박이엽, 강민 시인 등의 문객들이 명동과 관철동을 거쳐 인사동으로 넘어오며 풍미했던 낭만 말이다.

 

인사동에 돈 바람이 분 것은 전통문화거리로 지정되기 훨씬 이전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살기 힘든 사람들이 집에 숨겨 둔 골동이나 고미술품을 팔려고 가져 나오며 비롯되었다.

오래된 집안 가보를 팔아 쌀을 사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지,

당시 정보장교로 한국에 와 있던 막 뮐러는 한 달 봉급으로 두 트럭이나 되는 골동을 사 모으기도 했단다.

보관 창고에 임금의 옥쇄가 발에 차였다는 때로, 인사동의 골동상들이 떼돈을 벌던 시기였다.

배에 가득 실은 골동품을 일본으로 내다 판 매국노 같은 장사꾼도 있었다.

 

골동상이 얼마나 많은 돈을 주물렀으면, ‘금당살인사건이라는 끔찍한 일도 생겨났다.

79에 벌어진 금당 살인사건은 진귀한 골동품이 있다며 금당주인을 유인한 후,

안주인과 기사에게 현금 오백만원을 갖고 나오도록 만들어, 세 사람 모두 죽여 암매장한 사건이었다.

그 일로 인사동 고미술상이나 중계상 삼천여명이 조사를 받았고,

그중 76명은 그 사건과 관계없는 일로 구속되는 등 인사동 고미술상에 큰 회오리바람을 일으켰지만, 그때뿐이었다.

 

고미술품과의 인연을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사동은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그 야바위 같은 뒷거래가 은밀히 이루어진다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모호하고 도굴품까지 늘렸으니,

장사꾼에서 장사꾼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가격이 엄청나게 불어나는 등 희한한 일이 많았다.

케이비에스에서 방영한 진품명품이란 프로도 일조했다.

 

고미술품 전성시대는 안으로 곪았지만, 관광 시대로 접어든 88년부터는 밖으로 곪기 시작했다.

인사동 자체가 잡동사니 거리로 변한 것이다.

흐르는 세월 따라 변하는 인사동을 누가 잡겠냐마는, ‘구하산방’, ‘통문관’, ‘명신당필방’, ‘수도약국’,

통인화랑’, 이문설농탕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노포가 곳곳에 살아있는 곳이 아니던가?

 

뭐니 뭐니해도 예술 중심지인 인사동에 예술가들이 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예술로 빌어먹는 가객들이 콩깍지 속 콩알처럼 주막에 틀어박혀 개똥철학으로 목청 높인 적도 아득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인사동 골목 문화를 만들어 온 예술가들의 풍류가 새벽 안개처럼 사라지고 있다.

 

그나마 오 가며 들렸던 벽치기 골목에 참새방앗간 하나 있었으나, 얼마 전 젊은 매니저가 들어 오며 제동이 걸려버렸다.

늙은이들이 있으면 젊은 사람이 오지 않는데다, 안주 하나에 술 한 병 시켜 놓고 세월을 죽이니 무슨 장사가 되겠는가?

인사동이야 노 예술가들의 출입이 잦아 여태 살아남았지, 다른 지역은 노인들 출입이 통제된 지 오래다.

 

인사동 골목골목을 찾아보면 술 마실 곳이야 없겠냐마는, 사람을 만날 장소 즉 이산가족 상봉소가 사라져 걱정이다.

아무리 그렇지만 전시를 여는 화랑이 밀집해 있는 이상, 등 돌릴 수도 없는 일이 아니던가.

마땅히 갈 곳도 없는 인사동 골목을 배회하다 발길을 돌리는데, 이젠 지인들의 전시 뒤풀이에서 만나는 방법뿐이다.

 

 

비싼 점포세 내가며 늙은 예술가들을 반길 곳은 없으므로

참새 방앗간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생각된다.

 

인사동을 출입하는 예술가들이 힘을 모아 인정과 예술이 살아 넘치는 곳을 한 번 만들어 보자.

십시일반 역할을 분담하여 술만 마시는 곳이 아니라 작품을 싸게 거래하거나

시 낭송회나 여러가지 토론회를 갖는 등 하나밖에 없는 예술가들의 둥지를 만들자.

 

인사동을 방황하다 외롭게 떠나가신 강민시인과 심우성선생이 그리워진다.

 

사진, / 조문호

 

 

 

 

 

실종의 소설가 구중관 형이 소설제목처럼 영원히 실종되어 버렸다.

팔순이 넘도록 홀로 적적하게 지내더니 산천이 들썩이는 이 화창한 봄날, 하늘나라로 떠났다.

천상의 선녀 만나러 떠난 것일까?

 

중관형이 여주로 이사한 뒤로 늘 궁금하던 차에, 난데없는 부고가 날아들었다.

뇌경색을 일으켜 조카의  간병을 받았으나, 며칠 지나지 못한채 운명하셨다고 한다

 

중관 형의  빈소를 인사동 '사가연'에 마련한 사람은 '시네갤러리' 노광래 관장이었다.

지난 달 유목민에서 치른 신성준 선생 장례처럼, 여기 저기 알려 인사동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비싼 장례식장보다 잘 다니던 술집을 빈소로 정하여 고인의 삶과 연결시켰다.

 

요즘은 일로 인한 스트레스인지, 갈 때가 되었는지 몸이 예전 같지 않다.

힘들어 온 종일  누워있지만, 중관형이 떠나는 마지막 길은 마다할 수 없었다.

더구나 마지막 볼지도 모를 배평모씨가 삼천포에서 온다는데 어찌 누워 있겠는가?

 

빨리 갔다 와서 쉬는 게 나을 것 같아 일찍부터 나섰는데, 길에서 잘 아는 노숙거사를 만났다.

"어딜 그리 황급히 가는가? 술 한 잔 하고 가시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노숙거사는 행색은 거지지만 표정은 부처 같았다.

마신 술이 약인지, 두들겨 많은 것처럼 쑤시던 몸이 가뿐해 졌다. 

알콜 중독증세일까? 아니면 노숙거사의 신 끼가 작동한 걸까?

준비한 조의금에서 파랑새 한 장 빼내 적선했다.

 

찾아 간 인사동 시가연‘에는 상주인 조카 구정현씨와 잘 모르는 분만 있었다.

마이크 잡고 노래한 적이 어저께 같은데, 그 자리를 영정사진이 대신하고 있었다.

절을 올리며 중관형의 명복을 빌었으나 마음은 찹찹했.

살고 죽는 것이 이리 간단한 것이던가?

 

중관형과 양평장에서 만난 일들을 떠 올리며 혼자 홀짝거리고 있으니, 반가운 분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노광래씨를 비롯하여 이준기, 김형구, 배평모, 김철환, 임해리, 임계재, 박상희, 이만주씨 등 많은 분이 모여들었다.

 

소설이 안 팔려 작가폐업술집 냈던 배평모씨는 만난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쩌렁 쩌렁한 목소리 들으니 기가 철철 넘쳐 백수는 무난할 것 같았다. 

평소 귀가 어두워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기차 불통을 삶아 먹었는지 잘들리다 못해 귀가 멍멍했다.

앞 사람과 조가 맞아 쉼없는 구라를 풀어대는데, 그 시끄러운 와중에도 졸리기 시작했다.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들은 이야기로는, 요즘 죽는 사람이 유독 많은 것은 윤석열이 때문에 홧병이 나 죽는단다.

결정적으로 잠을 깨운 이야기는 비아그라 이야기였다.

 

 비아그라를 많이 먹은 한 인간이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시신의 거시기가 튀어 올라 관 뚜껑이 닫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 죽은 자의 친구가 나타나 ! 너그 마누라 왔다고 하니, 관 뚜껑이 쑥 내려갔다"는 설렁한 개그였다.

 

영정사진을 거두어 여주로 내려갈 준비하는 것을 보고서야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 들어 부쩍 주변 분들이 많이 돌아가신다.

인사동과 관련된 분만 해도 신성준선생을 비롯하여 박구경시인 등 줄줄이 돌아가셨는데,

아직 사망신고 잉크도 마르지 않았는데, 또 돌아가신 것이다.

 

살아남은 자는 가슴 아프지만, 그 길은 천국 가는 영생의 길이 아니던가?

이젠 장례문화도 초상집이 아니라 잔칫집으로 바뀌어야 한다.  

비싼 장례식장보다 사정에 맞게 치루고, 춤추며 노래부르는 신나는 굿판을 만들자. 

 

중관형!  봄바람에 실려 꽃길따라 훨훨 날아가, 좋은 세상만나길 축원드립니다

 

사진, / 조문호

 

 

 

 

지난 17일 오후5시 무렵, 인사동 사람들의 정기모임이 인사동 유목민에서 열렸다.

 

두 달 만에 열린 이번 모임에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이명희, 정복수, 조해인, 유근오, 장경호, 정영신,

임태종, 공윤희, 안원규, 임헌갑, 최유진, 임경일, 김발렌티노 등 15명이 참석했다.

 

모처럼 만난 반가운 자리였으나 좌석이 여러 곳으로 나뉘어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분도 있었는데, 마침 최유진씨로 부터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을 맞아 위령 종루를 보수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는 27일 오후4시부터 인사동 서원빌딩 14‘615남측위원회회의실에서 종루 보수 모금 확산을 위한 이규수교수의 '관동대진재와 조선인 학살, 그 망각과 기억의 소환'이란 특강이 열리니 많은 참석을 바랍니.

 

이 일은 오래 전, 김의경, 심우성선생께서 성금을 모아 일본 관음사 경내에 종과 종루를 세웠으나, 지금은 훼손이 심해 보수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가신 심우성선생을 대신하여 연극연출가 최유진씨가 모금위원장을 맡아 발 벗고 나섰다고 한다.

 

2023년은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이지만, 그 참혹한 역사를 기억하고 원혼들을 진혼하기 위한 시설이 아직 우리나라에는 없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59년 양심적인 일본 시민들이 그 학살 현장에서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위령제를 올리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단다.

 

1985년 그곳의 위령 팻말을 본 한국 문화예술인들이 나서서 대한민국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희생자 기림 시설인 보화종루를 일본 관음사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1999년에는 일본 시민들이 조선인 희생자들의 위령비를 종루 옆에 세우고, 한일 양국 시민들의 추모문화제도 계속 열었다고 한다. 이렇게 역사적 의미가 깊은 사적 가치를 지닌 보화종루가 오랜 세월과 잦은 지진으로 훼손과 파손이 심해져 붕괴 위험에 처한 것이다.

 

이에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을 맞아 과거 이 종루를 건립하고 보수해왔던 원로 문화예술인들의 후배와 자녀 세대 문화예술인이 중심이 되어 다시 한 번 양국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개보수하여 시설을 보존하려 한다.

 

학살피해 100주년이 되는 오는 9 10일은 추도문화제도 함께 개최하여 상생의 뜻깊은 전통을 이어가고자 하오니, 뜻있는 분들의 많은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사진, / 조문호

 

 

  

 

철학자 신성준 선생께서 지난 4일, 뇌출혈로 돌아가셨습니다.

빈소를 지킬 가족이 없어 인사동 ‘유목민’에 임시 분향소를 마련하였습니다.

2월 5일은 '유목민'에서 조문이 가능하고, 2월6일은 노광래씨의 '시네갤러리'로 옮깁니다.

생전에 좋아하신 약주 한 잔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고인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아래는 고인의 생전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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