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21

지난 17일은 정선에 다녀왔다.

매년 명절을 앞두고 성묘도 할 겸 연례 행사처럼 갔지만,

이번에는 어머니 묘를 이장해 굳이 갈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주소지가 정선으로 되어있어 재난지원금을 정선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제사장도 보고 신세 진 분들에게 선물이라도 전할 겸 정영신씨와 정선에 간 것이다.

 

서울서 챙겨 온 선물을 전하러 아랫 만지골의 최영규씨 댁부터 들렸다.

마침 두 내외가 집에 있어 직접 전해 줄 수 있었는데, 최영규씨 인사가 걸작이다.

“이제 모친 무덤을 파갔으니, 선물을 주지 않아도 되는데 왜 가져 왔냐?”는 것이다.

‘십여 년을 해 온 일인데 어찌 그만둘 수 있냐?“고 답했지만, 듣기는 좀 그렇더라.

 

마침 일하러 오기로 한 일꾼들 주려고 가마솥에 곰국을 잔뜩 끓여 놓았는데,

펑크를 냈다며 곰국이라도 한 그릇 하라며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아침 식사도 하지 않고 달려 온 터라 한 그릇 맛있게 얻어먹었으나,

이놈의 차 때문에 반주 한 잔 못 걸치는 심정,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윗만지골 창수네 집도 들렸다.

그 집에는 일찍부터 손님들이 찾아와 음식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선물만 전하고 떠나려 했더니,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라며 통 사정이다.

지난 번에 방황하는 아들 창수 주라고 카메라 한 대를 맡겨두었는데,

”창수가 너무 좋아한다“며 고마워했다.

아무튼 사진에라도 재미를 붙여 마음을 다잡았으면 좋겠다.

 

장 볼 일이 있어 서둘러 정선 읍내로 나갔다.

정선 장날로 맞추어 갔는데, 이렇게 서울과 정선의 물가 차가 큰지는 미처 몰랐다.

서울보다 시골이 물가가 더 비싸다는 이야기야 들었지만,

그것도 공산품도 아니고 시골에서 재배하는 농산물 가격 차이가 이리 심할 수 있단 말인가?

재래시장도 아니고 정선 축협 하나로마트와 서울 은평구 ‘하모니마트’의 가격 격차가 말이다.

 

그렇다고 장 보지 않을 수도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필요한 것만 골랐다.

손이 오므라들어 많이 샀다고 생각했는데도 지원금은 남았다.

덕분에 추석빔으로 신발가게에서 신발까지 한 켤레 얻어 걸쳤다.

주인에게 정들었던 헌 신발도 싸 달라고 했더니,

“구멍 난 쓰레기를 왜 가져가냐?‘는 타박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새 신발을 신어보니 너무 가벼워 날아갈 것 같았다.

한 판 뛰어도 좋을 것 같아 ”사모님! 블루스나 한번 땡기시죠“라며 능청을 떨었다.

 

언제 올지도 기약 없는 정선을 떠나오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선과의 연을 이어갈 것인지 끊을 것인지를 논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더 두고 보기로 세월에 맡겼지만, 마음은 이미 떠난 것 같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6일은 정선 만지산에 계신 어머니를 하늘문납골당에 모시는 이장 날이다.

하루 전 정영신과 함께 정선 귤암리로 갔으나, 쉼 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13년 전 어머니 장례 때도 장대 같은 비가 내려 난장판이 된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비에 가려 지척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딸이 타고 오던 승용차가 개울에 빠져 병원에 입원 하는 등 한 바탕 난리를 쳤다.

쏟아지는 소나기를 뚫고 산 위까지 시신을 옮겨야 하는 상여꾼들의 고생은 말할 것도 없고, 흙 또한 흙이 아니라 찰떡이었다.

찰흙이 장화에 달라붙어 발이 떨어지지 않아 걸음조차 제대로 옮길 수 없었다.

어떻게 장례를 치뤘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고향 선산을 두고 정선 만지산에 안장할 것을 제안한 나는 가족 볼 면목도 없었다.

어머니께서 생전에 내 죽으마 절대 너거 아부지 옆에 묻지 마라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을 믿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미워 한 말을 곧이곧대로 옮겼으니 하늘이 난리법석을 친 것 같았다.

어머니 말씀을 거스를 수도 없었지만 가까이 모시고 싶은 욕심도 한 몫했다.

 

오래된 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것은 그때처럼 비가 내려 걱정이 되어서다.

날씨 때문인지 오기로 한 가족들도 당일 새벽에 오거나 원주 화장터로 바로 오겠다며 일정을 바꾸어 버렸다.

아무튼, 일할 분들이 오기로 한 아침에라도 비가 그쳐주길 바랄 뿐이었다.

 

만지산에 오후 세시 쯤 도착했으나, 불 난 집은 보기도 싫어 곧바로 창수네 집부터 들렸다.

이선녀씨는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란 노랫말처럼 일터에 가지 않고 술판을 벌여 놓았다.

집안 버팀목이었던 창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창수마저 오락가락하고 있으니 일하기 싫은 모양이다.

그 많은 자기 땅을 놀려두고 다른 집에서 일해주며 사는 것도 사람이 그리워서다.

술 한잔하며 하는 하소연에는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새처럼 중국까지 날아간 꿈을 꾸었는데, 중국 군중들로부터 큰 환대를 받았단다. 꿈마저 그녀 이름처럼 동화적이다.

그 꿈을 꾼지 얼마 후, 창수 아버지가 농어촌공사에 남기고 간 빚 2억을 갚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방치한 역전 땅이 공원 부지로 바뀌며 정선군에서 보상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금방 찐 옥수수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권했으나, 차 때문에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늦기 전에 머물 방을 부탁해 놓은 최영규씨 댁으로 옮겨가야 했다.

아랫만지로 내려가니 지척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때까지 읍내 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민박집에 가기위해 후진을 하다, 오래전 딸이 빠진 개울 가림막에 부딪혀 뒤 범프가 찌그러졌다.

 비에 대한 징크스 액땜이라며 스스로 위안했다.

 

몇 년 만에 들어가 본 최연규씨 민박집은 놀부 대궐집처럼 지어 놓았다.

방이 네 개인데다 마루 한가운데 노래방 기계와 술상까지 있으니, 모여 놀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일찍부터 잠잘 준비를 하는데, 차 소리가 나며 최영규씨 내외가 들어왔다.

정선에서 오는 길에 술과 안주까지 사 온 것이다. 술잔에 만지산 비화를 담아 낄낄거렸다.

 

난, 최영규씨를 대궐 같은 놀부집에서 흥부같이 사는 사람'이라 말한다.

동년배기도 하지만 만지산 사는 분 중에 유일한 친구다.

오래전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시어 전화로 묏자리 좀 빌려 달라 했더니, 두말없이 마련해 주었다.

상여꾼 모으는 일에서 부터 그 초상집 난장판 정리를 다 해준 사람이다.

내가 해줄 수 있었던 것은 사진 작품 한 점 선물한 것뿐이다.

그날도 민박 사용료를 주었더니, 가족이 오지 않아 받을 수 없다며 돌려주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보니 다행스럽게도 비가 그치고, 앞산에 걸린 구름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겼다.

좀 있으니 동생 창호가 도착했고, 뒤이어 이장을 맡은 업체에서도 도착했다.

 

 

산신제와 어머니께 간단한 예를 올린 후 땅을 팠으나, 비에 젖어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만약 육탈이 되지 않았다면 원주 화장장까지 가야 하는데, 화장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마침 한순식씨가 일하러 가지 않아 굴삭기를 불러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굴삭기 사용료를 주었으나, 기어이 받지않겠다고 우겨 식사라도 하라며 운전석에 묻어두었다.

 

관을 열어보니 다행스럽게도 육탈이 완전하게 되어 유골만 남아 있었다.

일하는 분이 정성스럽게 유골을 수습하여 현장에서 간이화장을 할 수 있었다.

 

급히 가족들에게 원주 화장장으로 오지 말고 일산 납골당으로 오라는 연락을 했다.

시간이 줄어들어 서둘 필요도 없이 천천히 고양시 하늘문납골당으로 갈 수 있었다.

가는 길에 '횡성한우직매장'에 들려 아침 겸 점심을 동생이 샀는데,

부드러운 육질의 쇠고기가 입에 착 달라붙었다. 횡성한우가 왜 비싼지 이해되었다.

 

납골당 하늘문을 찾아가는 긴 시간은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그 동안 한 달에 두 번씩 갈 때마다 어머니를 보살피기는 했으나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곳에서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가족들도 일 년에 한 차례는 어머니 뵈러 왔는데, 생전에 지극히 좋아한 막네 손녀 은겸이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남달랐다.

가족들도 처음에야 강변길 따라가는 정선 풍경이 좋았겠지만, 서너 시간의 운전 길이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다들 운전 하느라 정동지가 유골함을 안고 가는 것도 편치 않았다.

 

납골당 하늘문에 도착해 보니 많은 가족이 나와 있었는데, 이 얼마 만의 반가움인가?

누님 조영희, 형님 조정호, 동생 조진옥을 비롯하여 형수 김순화, 매부 김종성, 조카 조향, 조웅래, 조은겸,

박홍전, 박유정 등 일이 있어 못 온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와 있었다.

예쁜 녀석들이 아줌마가 되어버린 조카들 모습에서 세월의 빠름을 절감했다.

 

진주청국장‘하던 누님이 장사를 접었다는 소식도 전해 주었다.

진주에서 여의도로 여의도에서 강남으로 옮겨 온 수십 년의 사업이지만 건물 개축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코로나 시국인지라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고 당분간 폐업에 들어갔단다.

식당 일이 진저리가 날 만도 한데, 누님은 일이 없으니 몸이 편치 않다며 불만이다.

 

매년 기일마다 납골당에서 모이기로 약속하는 걸 보니, 가까이 모신다고 해서 자주 뵙는 것도 아니었다.

, 납골당 마저 가족들이 추억하기 위한 공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자연과 융화된 육신 따라 유골도 자연으로 돌려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토록 혼줄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리 삐딱한 생각만 하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를 안치하며 차례대로 영원한 안식을 기원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사진 / 혜선스님

 

정영신씨가 아산 김선우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단다.

엊그제 정선화재 현장에 찾아 온 선우씨가 일을 흐리멍텅하게 처리하는 나를 보며 한 말 중에 할 말을 잃게 했던 말은 무슨 일이던지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사람이 우선이지만, 원칙이라는 말에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여지 것 줄 창 주장해 왔던 일도 원칙이 아니던가? 그동안 가까운 지인들 까지도 원칙을 어기는 잘못된 일은 공개적으로 공격하여 많은 분들이 등을 돌리지 않았던가? 잘못한 일에 남과 내가 어디 있겠는가? 다들 듣기 좋은 소리만 하고 잘못된 일은 두루 뭉실 넘어가니 세상이 이 지경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이번 일은 돈 즉, 스스로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라 좋게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지난 17일 아침, 정영신씨와 정선 만지산 화재 현장으로 떠났다. 당장 기거할 컨테이너 박스라도 구해야 했지만, 다음 날 보험사 직원과 손해사정사가 만나자고 했기 때문이다. 지난 번 화재 현장에 갔을 때는 윤인숙씨가 보험 던 게 없다고 했는데, 뒤늦게 확인한 바로는 본인은 탈 수 없지만, 피해자에게 보상해 줄 수 있는 손해보험이 있다는 연락을 한 것이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그때 꼼꼼히 증거 자료를 찾아 두어야 하는데, 이미 일부의 폐기물은 버려졌고, 남은 것도 포크레인으로 헤집어 찾기가 어려워 진 터라 걱정되었다.

 

 

 

화재 난 다음날 현장에 갔을 때도 불 탄 현장에 포크레인이 와 있었는데, 어떻게 화재원인도 규명하지 않고 현장을 헤집어 놓았는지 모르겠다. 보험금을 받아내려면 어떤 자료를 어떻게 소명해야 하는지를 몰라 아들 햇님이에게 손해사정사 한 분을 연결해 달라고 부탁해 둔 것이다.

 

 

 

정선으로 가다 양평 쯤에서 ‘성심건업’이라는 이동주택 제작소가 있어 한 번 들려 보았다.

농막에서부터 크고 작은 다양한 견본주택을 만들어 놓았는데, 생각보다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건축허가 없이 갖다 놓으려면 6평짜리 농막밖에 없지만,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주택형 농막은 최하가 2천만원 대였다. 심지어 일억이 넘는 이동주택도 있었다. 완전 우물 안 개구리인 셈이었다.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주변인들이 보내 준 성금이 천만원이나 들어 와 그 돈으로 농막이 아니라 ‘예술창고’라는 집을 지을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고 나왔는데, ‘예술창고’를 제대로 지으려면 손해보상을 한 푼이라도 더 받는 방법밖에 없었다. 마침 윤인숙씨가 정영신씨에게 전화를 걸어 와 불난 방안에 명품가방이나 돈 나가는 물건이 많았다고 진술하라며 부추겼지만, 집에 없는 명품을 어떻게 거짓말 할 수 있단 말인가? 명품보다 우리에게 더 가치 있는 것은 필름 원판이라며 자위했으나, 손해사정사 말도 손해배상 규정에 필름은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동안 전시하고 남은 작품도 집안 창고에 수 없이 많았는데, 그 사진 판매금액을 책정해 배상을 청구하란다. 사진은 원판만 있다면 다시 제작할 수 있지만, 필름이 없으면 사진을 만들 수가 없는데, 이런 개떡 같은 보상법이 어디 있는가?

 

 

 

배상한도가 일억이라는데, 그런 식으로 산출하려면 아무리 계산해도 얼마 받지 못할 것 같았다. 손해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지경인데, 이제 보험사를 상대로 싸워야 할 문제가 남았다.

 

 

 

일단 정선 집보다 읍내부터 들렸다. 올해는 농사를 짓지 않기로 했지만, 빈 땅에 노력이 덜 가는 옥수수라도 심으려면 모종도 사야하고 농기구도 구입해야 되기 때문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듯 마침 정선장이었다. 나물이 많이 나는 요즘 철에는 정선장에 엄청 많은 인파가 몰렸으나 코로나 때문인지 장터가 썰렁했는데, 이제 정선장도 봄날은 간 것 같았다.

 

 

 

비는 부슬부슬 왔지만 필요한 물건들을 산 후, 아침 겸 점심을 먹기 위해 ‘정선아우라지’식당에 들어가 곤드레밥을 시켰다.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주며, 올 해는 작년보다 손님이 더 없다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

 

 

 

만지산 집에 도착하니 산 위로 구름이 몰려다녔다.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꺼낼 수밖에 없었는데, 카메라앵글 속에 불난 화재 현장이 나오니 또 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가까이 가보니 철재는 모두 수거해 갔고, 나머지 폐기물도 일부 치우고 없었다. 타다 남은 책들만 폐기물 자루에 담겨 길가에 첩첩이 쌓여 있었다.

 

 

 

옥수수 심을 땅에 잡초를 뽑고 있는데, 정영신씨가 아산 김선우씨가 손님 한 분을 모시고 정선으로 오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단다. 제2의 공유공간 만드는 일에서 부터 할 일이 태산 같은 사람이 만사를 제쳐두고 그 먼 길을 온다기에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 좀 있으니 잘 아는 농막 짓는 분을 모시고 찾아왔는데, 화재현장을 둘러보며 타다 남은 잔재들에 관심을 가졌다.

 

 

 

마침 귤암리 노인회장 이었던 서덕웅씨도 오셨다. 얼마 전 최종열씨에게 회장직을 넘겨주었다며, 내일 아침 노인회 회의에서 작은 성의나마 도울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위로해 주었다

 

 

 

김선유씨가 모셔 온 건축 전문가에게 들어보니, 집 짓는 일이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먼저 밭을 택지로 용도변경부터 해야 하고 설계도면 등 인허가 과정이 까다롭다고 했다. 정화조 설치에서부터 준비해야 할 과정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집 지을 장소와 임시 기거할 농막 위치까지 알려주었는데, 당장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며 서둘 일은 아니라고 했다. 우선 당사자 간의 합의가 우선이지만, 보상받을 예산이 정해져야 시작할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창수 엄마로 부터 올라 오라는 연락을 받아 정동지 더러 손님 모시고 먼저 올라가라고 했다. 일찍부터 저녁상을 준비해 두었는지, 가자말자 빨리 오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비 오고 흐린 날 파종을 마무리해두어야 잘 자랄 것 같아 먼저 식사하라고 말했는데, 선우씨가 데리러 오기 까지 했다. 좌우지간,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보아야 하는 더러운 습관 때문에 여러 사람 힘들게 한다.

 

 

 

식사 후에 윤인숙씨와 합의하기 위한 요구조건이나 앞으로의 복안을 설명하며 환담을 나누기도 했는데, 아산까지 가야 할 선우씨 일행은 먼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술이 한 잔 들어 간 창수엄마 이선녀씨 노랫소리가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노래자랑에 나가도 손색없는 실력인데, 서덕웅씨가 정선 아리랑도 한 번 부르라고 부추겼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 든다”

 

 

 

한 바탕 놀고 나니 서덕웅씨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부터 정영신씨의 일이 시작되었다.

요즘 그녀가 하고 있는 ‘길 위의 인문학’ 프로젝트였다. 얼마 전 어머니 인터뷰 대상을 장터에서만 찾기에 사연이 많은 만지산 이선녀씨가 어떠냐고 권한 적이 있었는데, ‘맞다“고 맞장구 쳤다. 이 번 기회에 인터뷰를 하려고 장비까지 챙겨 온 것이다.

 

 

 

예전에 이선녀씨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만지산에서 있었던 시집살이였다면 이번에는 시집오게 된 내력과 우리가 몰랐던 또 다른 애환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흥미로웠지만, 먼저 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요즘 들어 술만 마시면 신체적 장애가 생기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이제 술도 그만 마시라는 신호일까? 아니면 그만 살라는 말일까? 아무튼 다리에 힘줄 땡기는 통증까지 찾아와 곤욕을 치르다 잠들었는데, 인터뷰는 잘 끝냈는지 모르겠다.

 

 

 

그 다음 날은 오전 일곱 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창수가 아침 먹으라며 깨웠다. 덕분에 일찍부터 일 할 수 있어 좋긴했는데, 밖에 나와 보니 구름이 여전히 장관을 이루었다.

 

 

 

호박 심을 구덩이를 파고 있었는데, 귤암리 노인회장 최종열씨가 찾아 와 성금이라며 이십만원을 전해 주었다. 나는 주민등록이 서울 동자동으로 되어있어 이곳 주민이 아닌지라 줄려면 귤암리에 주민등록을 옮겨놓은 정영신씨에게 주어야 할 돈이었다. 나중에 만나면 전해주겠지만, 성의를 고맙게 받아 들였다.

 

 

 

마침, 윤인숙씨가 해선스님께서 한 번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바로 찾아 갔는데, 절 쪽에서 보는 우리 집 전경도 근사했다. 스님께서는 불 난 밤에 이 곳 절에서 지켜보며 핸드폰으로 사진과 동영상까지 찍었다고 했다. 불난 현장을 보지 못해 궁금했는데, 스님 덕에 그날의 생생한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사진 / 혜선스님

 

십여 년 전에 보여 드린 적 있는 ‘한국불교미술대전’ 전집 이야기도 꺼내시며, 그 때 갖고 싶었지만 한 질 뿐인 책이라 차마 사고 싶다는 말을 못 꺼냈는데, 차라리 샀더라면 불에 타지 않았을 거라며 안타까워 하셨다. 그 책은 이십 여 년 전, 이년에 걸쳐 사진을 찍어 원고를 제공했으나 출판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천만 원이 넘는 원고료를 받지 못한 책이 아니던가? 도록도 마지막 남은 책이었지만, 이제 필름까지 타 버렸으니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사진 / 혜선스님

 

보살님이 내 온 차를 마시며 내 의중을 물어 오셨다. 짐작컨대 옆집 윤인숙씨가 쓰리쿠션을 친 것 같았다. 그래서 윤인숙씨 에게 이야기하듯 소상하게 말을 전했다. 두 집이 본래 한집이었던 집을 잘라 판 것이 문제였다며, 여간 불편하지 않다고 하소연 했다.

 

 

 

우리마당을 자기네 주차장처럼 사용하는 거야 그럴 수도 있지만, 여러 마리의 개가 오가며 여기 저기 똥을 싸거나 농작물을 짓밟는 등 피해를 주어왔고, 그물망을 쳐 방목하는 수많은 닭소리 조차 또 하나의 공해였다. 그리고 수시로 찾아오는 손님들도 문제라고 말했다. 화재 난 그날도 네 사람이 찾아와 밤늦도록 고기를 구워 술을 마셨다는데, 매번 그냥 오는 손님이 아니라 그들이 받아들이는 영업의 일환이었다. 얼마전 불 난 집 터 옆에 있는 밭을 사서 농막까지 만들어 두었으니, 지금의 집터는 양보하고 그 쪽으로 옮겨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우선 불편에 앞서 오래전부터 구상해 온 복안도 설명했다. 내가 펴낸 ‘동강백성들’ 포토에세이 집과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집을 바탕으로 동강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동강사람들’ 자료관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소유한 400여 평으로는 땅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옆집의 가축 방목이나 영업행위가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집 지을 여력이 없어 땅과 자료만 정선군에 넘겨주면 건축은 정선군에서 추진하는 기획안까지 만들어 놓았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그 정도의 요구면 충분히 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일하러 내려 왔더니, 보험회사 직원이 찾아와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뒤 이어 아들이 선임해 준 손해사정사 김민수씨도 도착했다. 김민수씨는 물증을 찾기 위해 불난 현장을 헤집기 시작했는데, 나와 정동지 모두 동원되어 그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이미 대부분의 흔적들이 소실된 후라 별로 찾아내지 못했다.

 

 

 

김민수씨가 찾은 중요한 것은 120필름 열다섯 장이 붙어 있는 비닐 파일이었다. 내가 찾은 것으로는 화가 강찬모씨 그림으로 추정되는 캔버스 천을 비롯하여 일세기가 지난 뷰카메라 필름케이스 가림막으로 보이는 알미늄 철판만 주웠을 뿐 필름용 카메라와 암실장비 등의 부품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외는 85년‘동아미술제’ 대상받은 상장 잔재와 불타다 남은 나무액자 조각뿐이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주워 보관하고 있는 90년도에 전시했던 11X14인치 규격의 ‘전농동588’ 사전첩 일부는 소중한 물증인 셈이다. 이웃 주민이 기념으로 챙겨 간 ‘87민주항쟁’ 사진첩 일부도 다시 받아와야 할 처지가 되었다. 더 이상 찾아내기가 힘들어 찾은 자료만 촬영해 두고 맡겨놓았다.

 

 

 

일 억 정도 보상받으려면 3억 정도의 자료가 나와야 한다며 보상 받게 될 금액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소견을 상세히 들려주기도 했다. 윤인숙씨 더러 불난 집터를 양보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 살 의향이 없냐고 물어 본 모양인데,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며 잘라 말했다고 한다. 소실된 집기나 비품 명세를 적을 용지를 전해주며 다시 연락하겠다며 김민수씨도 떠나버렸다.

 

 

 

우리도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 올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해자나 마찬가지인 윤인숙씨가 피해보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보험사에 떠넘기며 일체의 대꾸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주위에서 변호사를 선임해야 한다는 충고를 끈임 없이 했지만, 이웃의 정리를 생각해 마다하지 않았던가?

 

 

 

운전 중에 아산의 김선우씨가 정영신씨에게 전화를 걸어 와 변호사를 선임해야 할 이유를 조목 조목 이야기하며 다시 설득하는 것 같았다. 변호사가 선임되어야 소실된 자료의 중요함을 변호해 보험사로부터 적정한 보험금을 받아 낼 수도 있지만, 배 째라는 윤인숙씨의 재산추적까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영신씨는 나더러 의견을 물어 왔지만, 법적으로 갈 생각은 없기도 하지만, 피해 입은 땅이 정영신씨 땅이니 당신이 판단하라고 미루었다.

 

 

 

사실상, 화재현장에는 그동안 정영신씨가 전시해 온 장터 작품도 모두 보관해 두는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기도 했지만, 그 집 땅 역시 정영신씨 소유나 마찬가지다. 5년 전 내가 동자동으로 들어오며 정영신씨와 이혼할 때, 돈이 없어 위자료 조로 넘겨 준 땅이기 때문이다. 당시 양해각서만 작성해 두고 아직까지 명의 이전을 못해 준 것은 신용카드대금 천 백오십 만원을 연체하여 채권추심사인 ‘미래신용’에 땅이 압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몇 개월 전 ‘신용회복위원회’에 채무 조정을 신청해 정해진 납입금을 여섯 차례 납부했으니, 머지않아 압류만 풀리면 등기 이전해 주어야 할 땅인지라 그가 결정할 문제였다.

 

 

밤늦게야 도착해 잠들었는데, 이틀 날 다시 김선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나도 들으라고 전화소리가 들리도록 외장 스피커를 켜두어, 전화내용을 상세히 엿들을 수 있었다.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며, 왜 원칙을 지키지 않느냐며 나무라는 말에 더 이상 고집부릴 수가 없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휴일인 부처님 오신 날이지만, 정선으로 떠난다는 것이다. 버리려고 쌓아 둔 타다 남은 포대기들을 실고 와 뒤져보기 위해 트럭을 대절했다는 것이다.

 

 

 

‘공유공간 마인’에 내 전시를 유치했다는 연유로 저토록 자신의 일처럼 지극정성으로 돕는데, 어찌 뒷짐만 지고 있을 수 있겠는가? 결국 모든 걸 김선유씨에게 위임한다며 두 손 들고 말았다. 밤늦게는 포대를 다 실고 돌아왔다는 전화를 걸며 트럭 대절비나 부대비용은 나중에 청구하겠다는 것이다. 마치 자기 일처럼 흥분하며 적극적으로 나서서 끝장을 보고 마는 대단한 여장부였다.

 

 

 

김선유씨에게 큰 빚을 지게 되었는데, 다 끝난 인생 말년에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다들 마음 상하지 않고 일이 잘 마무리되어 약속대로 정선 만지산에 멋진 ‘예술창고’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도움 주신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 드린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정선 가는 길에 만지산 이선녀씨로 부터 두릅을 얻어왔다.
집에 키운 두릅을 망쳐 사러 갔으나, 돈을 받지 않아 신세지게 되었다.
그런데, 얻어 온 량이 적지 않아 정영신씨가 주변 분들과 나누어 먹겠단다.
냉장 보관할 곳이 없어 빨리 전달해야 한다기에 고사떡 나누듯

육등분해 택배기사 노릇을 자청한 것이다.




전해 드릴 분 명단을 받아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돌았는데, 그 일도 예삿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강남에 계신 한교수님 댁에 가는 일이었다.
요즘 몸이 편치 않아 집에만 계시기에 한번 찾아뵙고도 싶었던 터다.
어렵사리 전해드리기는 했으나, 퇴근 시간대에 걸려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남은 두 곳은 은평 지역이라, 하는 수 없이 정영신씨 집 부근으로 불러 모았는데,
시간이 지체되어 서인형씨를 한참 기다리게 만들었다.
무슨 대단한 선물한다고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좌우지간, 콩 한쪽이라도 나누어 먹는 정영신씨의 극성은 알아주어야 한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저녁이라도 한 끼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마침 정선에 두고 왔던 가방을 찾아왔는데,
그 안에 든 통장 속에 재난지원금이 40만원 들어 와 있었다.
매번 얻어먹기만 하다 모처럼 술 한 잔 대접할 기회가 온 것이다.
아들까지 녹번동 ‘풍년식당‘으로 불러 두릅 전달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며느리와 손녀까지 만날 기회가 될 줄이야 미처 예상치 못했다.




손녀 하랑이가 이젠 걸음도 제법 잘 걸었다.
그 전에 만났을 때는 엄마 손에 끌려 다녔는데, 이젠 손녀가 엄마를 끌고 다녔다.
한 가지 걱정스러운 것은 벌써 핸드폰을 갖고 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뭘 보는지 한 번 잡으면 그곳만 집중해 심각한 폐해가 우려되었다.




아들 햇님이는 임대료 마련이 어려워 정의당 은평사무실을 철수했다는 안 좋은 소식을 전했고,
서인형씨는 오는 27일 ‘스마트협동조합’ 개소식을 갖는다는 반가운 소식도 주었다.
좌우지간, 원님 덕에 나팔 불다보니, 내가 취해버렸다.

사진, 글 / 조문호
























89년 귤암리 옛집에서 촬영한 최종대, 이선녀부부


정선 최종대씨는 만난 지가 25년이 넘은 오랜 인연으로 이웃을 넘어 동생처럼 가까웠던 사이었다.

그러나 2년 전 지하수 사용에 대한 이웃과의 분쟁에 휘말려 등 돌리고 말았다. 그가 주도한 갑질을 용납할 수 없어서다.




그런데, 작년 말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뒤늦은 부고로 장례조차 지켜보지 못해 어쩔줄 몰랐는데, 이야기를 듣고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최종대씨는 하루에 담배를 서너 갑씩 피우는 골초로, 운명하기 전부터 심한 장애를 겪었다고 한다.

변을 당하기 하루 전에는 장모 생신을 맞아 가족들과 진주를 갔는데, 차 안에서 눈물을 그리도 많이 흘렸다고 한다.

아마 죽음을 예견한 것 같았다.




돌아와서도 얼굴 붉혀가며 악착스럽게 살아 온 지난날이 후회스러운지,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술 좋아 하는 아내에게 술 좀 줄이라고도 부탁하고, 내가 보고 싶다는 등 평소에 하지 않던 말을 많이 하더란다.

그러더니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켜 손도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임종한 것이다. 


 

정말 인생무상이란 말을 절감했다.

떠나기 전에 따뜻하게 다독여 주지 못한 게 한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집안 일은 누가 꾸려 갈 것이며, 그 많은 농사는 어쩔지 걱정스런 일이 하나 둘 아니었다.

더구나 큰 아들 창수는 정신병을 앓아 병원을 들락거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생긴 것이다. 아들 창수가 언제 정신병을 앓았냐는 듯 멀쩡해진 것이다.

아버지가 하던 일을 하나하나 챙겨가며 어머니를 돕는다고 했다.

해마다 엄청나게 짓는 고추 농사를 그만두고, 손이 덜 가는 유기농에 전념하기로 했단다.



농장이름도 엄마이름을 딴 ‘선녀농원’으로 지어 새로운 삶을 예견하게 했다. 남편 잃고 자식 살린 셈이다.

이선녀씨는 남편을 떠나보낸 슬픔도 잠시 뿐,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지난 4월 25일은 정선에 땅 뒤집으러 갔다가 카메라와 지갑이 든 가방을 두고 와 

십 여일 동안 사진 한 장 제대로 찍지 못하고 가슴 조려왔기에 빨리 정선 갈 날만 기다렸다.



5월5일 야채 파종하러 갈 때는 정영신씨가 따라 붙어 마치 야외 나들이 하는 기분이었다.

두릅 철이라 두릅 따러 간 것이다. 신세진 분들과 나누어 먹을 심산인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 운전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기름 값이 경유 1리터에 970원까지 내려 간 것이다.

예전에 전국 장터 쫓아다닐 때는 1500원까지 올랐는데, 그때 비하면 공짜나 마찬가지다.

살다보니, 코로나 덕도 보나 싶다.




평창장에서 야채 모종을 산 후, 만지산에 도착하니 오전 10시쯤 되었다.

열흘 전에 핀 탐스러운 도화꽃과 배꽃은 시들시들하고, 새롭게 핀 철쭉이 맞이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쩔까?” 갑작스런 더위에 두릅이 다 피어버린 것이다.

어차피 양이 적어 창수네 두릅을 사기로 했지만,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예전에는 정선 가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즐기며 여유롭게 지내다 왔는데,

요즘은 서울에 예쁜 여자 숨겨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바삐 설치는지 모르겠다.

죽도록 일만하고 돌아와, 이젠 정선 가는 게 두려워진다. 아마 동자동에 살며 생긴 조급증인 것 같았다.




평창장에서 구해 간 야채 모종부터 옮겨 심었는데, 그 날은 보슬비가 내려 모종에 물줄 일은 덜었다.

하던 일을 끝내고 창수네 집으로 올라갔는데, 창수엄마가 반가워 어쩔 줄 모른다.

나야 운전 때문에 술 마실 처지가 못 되지만, 술 마시며 하는 이야기가 눈물겹다.




처음 시집왔을 때, 낮 시간의 중노동이 끝나도 밤에 디딜방아 찧는 일도 일상의 하나라고 했다.

시아버지가 막걸리와 콧등치기를 좋아해 옥수수를 비롯한 여러가지 곡식을 찧었는데,

체중이 가벼워 디딜방아가 올라가지 않았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큰 돌을 등짐에 짊어지고 밟으라고 시켰다는데, 찧고 나면 온 몸이 파김치가 된다는 것이다.




구절구절 지나간 이야기보다 앞으로 살아 갈 이야기가 더 기대되었다.

여지 것 일에 치이고 남편 눈치 보느라 못 푼 신명을 다 풀 것 같아서다.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이선녀씨로 부터 두릅을 전해 받았는데, 두릅 값을 기어이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전에 못 전한 조의금을 겸한 두릅 값인데, 정말 입장 난처했다.




“우리 사이는 돈이 오 가는 사이가 아니지요”라는 창수엄마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래요. 다음에 맛있는 거 많이 사오리다. 부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맑은 날 사진은 4월25일 찍은 사진이고, 흐린 날 사진은 5월5일 찍은 사진.

아래는 삼년 전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린 창수엄마 이선녀씨 이야기랍니다. 
  http://blog.daum.net/mun6144/4251


















정선 만지산 골짜기에 사는 이선녀씨의 인생은 드라마 보다 더 극적이다.
이제 나이 육십에 불과하지만 한 세기 전에 살았던 것처럼 살아 온 이야기가 전설 같다. 옛날 영화에 ‘여자의 일생’이란 제목도 있었지만, 마치 이선녀씨를 일컫는 말 같다. 남자 만나기에 따라 여자의 운명이 바뀐다는 이야기겠으나, 요즘 세상은 ‘남자의 일생’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도 생각된다.

그녀가 귤암리 윗만지산 골짜기까지 시집오게 된 사연만 풀어도 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라 ‘나무꾼과 선녀’로만 요약해야겠다. 삼대를 만지산에서 살아 온 최종대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이만평 가까이 되는 산비탈 농지를 두 내외가 다 일군다. 힘쓰는 일이야 남편이 하겠지만 왠만한 일은 모두 이선녀씨 몫이다. 날만 새면 밭에 나가 살았으니, 지금 성장한 자식 셋 모두가 밭에서 일하다 낳았다. 시아버지가 며느리 치맛자락에 아이를 받아 툇 줄도 자르지 못한 채, 방으로 뛰어가는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라. 산후조리란 말은 사치에 불과하고, 애기를 낳아서도 광주리에 담아 밭에서 키웠다.


한 번은 둘째아들 용순이가 심하게 아파 13킬로미터가 넘는 정선 읍내까지 약을 사러 나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갈 때와 달리 갑작스런 폭우가 쏟아져 강물이 범람해 돌아 올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자식을 살려야겠다는 모정은 약을 비닐로 머리에 동여매고 노도처럼 밀리는 강물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6킬로미터의 험난한 물길을 헤칠 땐 주변사람들이 하나같이 살아날 수 없다고 발을 굴렀지만, 귤암리 근처에 도달하여 나무뿌리를 잡고 기어 나오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정말 ‘지성이면 감천’이 아닐 수 없다.

40여년이 넘도록 외지 나들이 한 번 하지 못한 채, 죽도록 일만 하고 살았으나, 아직까지 그 지긋지긋한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얼마나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던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늙어 버린 것이다. 갈퀴손과 주름진 얼굴이 그의 한 많은 삶을 고스란히 증명해 주었다. 그 힘든 삶을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술의 힘이었다. 시아버지로부터 배운 술은 고달픔을 잊게 하는 유일한 벗이 되어주었다. 소주를 한 홉들이 잔으로 들이키는 그의 주량은 아무도 따르지 못한다. 그리고 몸 빠르게 일하는 것처럼 노는 신바람도 보통이 아니다. 10여 년 전 이선녀씨의 여동생이 찾아와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얼마나 신명이 넘쳤던지, 천정에 구멍이 뻥뻥 뚫려나갔다. 무슨 놈의 춤이 손가락으로 천정을 찌르는 요상한 춤을 추었는데, “멀리 기적이 우네~”라며 천정을 뚫어댔다.


밤늦게 이웃 동네에서 술이 취해 돌아오다 정신을 잃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란다. 말이 이웃동네이지 산을 넘어야 하는 먼 거리인데, 한 번은 어두운 산길을 걷다 구덩이에 빠져 그만 잠들어 버렸다고 한다. 마치 어머니 품속처럼 포근했다는데, 잠결에 손님 이제 문 닫아야 하니 일어나 가시야지요란 말이 들렸다고 한다. 눈을 떠보니 새벽녘이고 자기가 빠진 곳은 장례를 치루기 위해 파 놓은 무덤이었다고 했다.

 

놀 때는 화끈하게 놀고, 일 할 때는 몸 아끼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그의 사려 깊은 인정 또한 따를 자가 없다.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무언가를 못 먹여 안달이고 못주어 안달이다. 이웃에 경조사가 생겨도 손 걷어 부치는 성미라 일이 일사천리다.

 

작년에는 이웃에 살던 노성수씨가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은 일도 있었다. 한 밤중에 두 내외가 술이 취해 집으로 들어갔는데, 방문이 열리지 않아 유리창을 깨어 손을 집어넣었다고 한다. 문고리를 연 것 까지는 좋았는데, 손을 빼다 그만 유리에 동맥이 끊기는 어이없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다른 방으로 들어간 아내를 아무리 불렀지만, 술 취해 잠든 아내가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새벽 무렵에서야 현장을 목격한 아내가 이선녀씨에게 다급하게 전화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고 한다. 겉옷 입을 틈도 없이 득달같이 달려갔으나 이미 피를 모두 쏟은 상태라 손을 쓸 여지가 없었다. 갑자기 남편을 잃은 부인을 다독이며 모든 뒷바라지를 이선녀씨가 다 했다. 얼마나 많은 피를 분수처럼 쏟아 부었던지, 천정에서부터 온 방은 피로 굳어 있었다. 그 응고된 피가 비료 포대에 몇 자루나 나왔다고 한다. 피로 얼룩진 방을 다 닦아내는 청소에서부터 모든 일을 그가 도맡아 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처럼 만지산 선녀로 통한다.

한번은 농기구 빌리려 그녀 집에 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만 못 볼 장면을 보고 말았다. 이곳은 외 딴 산이라 사람들이 오가지 않으니, 아무데서나 소변을 보기도 하고 더우면 찬물을 뒤집어쓰기도 하는데, 무더운 날씨라 혼자 목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보고 깜짝 놀란 그녀가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얼핏 본 모습은 한 마리 백조가 날개를 퍼덕이며 갑자기 비상하는 바로 그런 자태였다.

 

, 이선녀씨를 생각할 때마다 선녀와 나무꾼이란 설화가 먼저 떠오른다,

목욕하러 지상에 내려 온 이선녀를 나무꾼 최종대씨가 옷을 숨겨 사는 것은 아닐까?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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