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땅
이갑철展 / LEEGAPCHUL / 李甲哲 / photography
2016_0316 ▶ 2016_0329


이갑철_타인의 땅_부산_젤라틴 실버프린트_11×14inch_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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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나우GALLERY NOW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39(관훈동 192-13번지) 성지빌딩 3층

Tel. +82.2.725.2930

www.gallery-now.com



타인은 어디에 있는가사실, 사진보다는 말(사진설명)이 더 요란스러운 법이다. —수전 손택, 『사진에 관하여』 중에서 이갑철의 사진은 프레임 안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독자로 하여금 프레임 밖에서 완성하라고 권유한다. 이것은 세련된 방식이다. 사진이 소통이라면, 소통하는 사진은 완성된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완성하도록 만든다. 사진이 촉발시킨 이야기를 독자로 하여금 매듭짓도록 하는 이야기 방식은 독자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이런 사진 앞에서 독자는 제2의 사진가로 거듭난다. 좋은 시나 그림이 그렇듯이, 좋은 사진은 전시장이나 서점이 아니라 그 사진과 만나는 독자에 의해 완성된다.


이갑철_타인의 땅_합천_젤라틴 실버프린트_11×14inch_1985



『타인의 땅』은 묻는다. 타인은 누구인가. 타인의 땅이란 무엇인가. 타인의 땅에 사는 자는 또 누구인가. 선명하지만 무거운 질문—새삼스럽고도 불편한 문제 제기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진은 사진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은 독자와 만날 때 살아난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혜안을 빌리자면, 사진은 사진설명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 한 장의 사진에 대한 여러 편의 글, 여러 사람의 논평이 없다면 사진이 설 자리는 매우 좁아진다. 사진에 대한 오독과 오해가 많지 않다면 사진가의 활동 영역 또한 협소해진다. 사진설명은 '요란스러워야' 한다. 이 글은 거의 삼십 년 만에 재발간(1988년 동명의 전시회가 열렸고, 그때 얇은 도록이 나온 적이 있다)하는 『타인의 땅』에 대한 사진설명이고자 한다. 하지만 가능하면 프레임 밖으로 나가 어슬렁거리려 한다. 1980년대 이갑철 사진이 '가능하면 사진 밖으로 나가는 것이 좋다'고 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제목에서 말하고 있듯이 사진가의 의도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한 컷 한 컷의 사진은 독자의 상상력을 사진 바깥으로—1980년대라는 시대 상황으로 향하게 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독자의 사유를 '타인의 땅'이라는 주제 안으로 강하게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짧은 사진설명은 가능한 한 사진의 외곽으로 나아가려 할 것이다. 이갑철의 1980년대 사진들은 몇 개의 덩어리로 범주화할 수 있다. 분단 상황과 농경공동체의 붕괴, 권위주의 시대, 그리고 이제 막 산업화, 도시화 시대로 편입된 갑남을녀의 일상 풍경. 그러니까 『타인의 땅』은 1980년대 한국사회의 풍경이자 한국인의 초상이다. 다시 말하자면, 1980년대 한국사회를 살았던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타인의 땅에서 살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타인은 누구인가. ● 1980년대까지 타인은 정치적 대상이었다. 군부 독재 혹은 그 배후로 지목되는 미국. 타인의 땅에서 타인의 정체를 밝히고 또 타인의 일부를 '법으로 응징'했지만, 타인의 땅은 그대로였다. 타인의 땅에 사는 사람들도 그대로였다. 백성에서 국민으로, 민중에서 시민으로 재탄생하지 못했다. 타인의 땅에서 살아가던 대다수 한국인이 정치적 상상력에 매몰되어 있던 사이, 타인의 땅은 세계 경제의 시장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타인의 땅은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장터로 변모하고 있었다. 타인의 땅은 더 거대한 타인의 땅으로, 타인의 땅에 사는 사람들은 민중에서 소비자로 변하기 시작했다. 우루과이 라운드, 세계무역기구와 함께 열린 1990년대에는 이른바 대중소비사회가 도래했다. 소비가 미덕이고, 소비자는 왕이었다. ● 「타인의 땅」으로부터 삼십 년이 흘렀다. 이제 타인은 폭력적 아버지에서 시장을 움직이는 경제적 아버지로 바뀌었고, 그 땅은 거대한 시장으로 탈바꿈했다. 타인의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여러 개의 탈을 바꿔 써야 했다. 국민, 백성, 유권자, 민중, 시민, 대중, 다중.(또 있다. 1퍼센트, 99퍼센트, 정규직, 비정규직, 기혼자, 비혼자, 실업자, 청년실업자, 명예퇴직자) 그러는 사이 타인이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왔다. 권력과 자본으로 대표되는 타인이, 돈의 논리와 힘의 논리를 우선하는 타인이 우리 의식 깊숙이 자리잡았다. 타인의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타인이 된 것이다. 자본과 권력이, 시장과 국가가 지시하기 전에 우리 안의 타인이 먼저 명령했다. 학벌이 우선이다, 성공해야 한다, 취직해야 한다, 외모가 최고다, 아파트부터 사야 한다,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 오래 살아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 안의 타인은 괴물이 되어 갔다. 뻔뻔함과 무기력증을 먹고 사는 괴물.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폐기처분하고, 그 자리에 배타적 소유와 소비를 들어앉힌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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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이 장황해지고 말았다. "사진보다는 말(사진설명)이 더 요란스러운 법"이라는 수전 손택의 지적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사진은 언제나 어떤 맥락에 삽입되기 때문에 —신문이나 잡지, 사진집, 포스터, 액자, 최근에는 컴퓨터나 스마트폰 화면— 맥락에 따라 사진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진의 맥락은 미디어에 의해서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도 엄연한, 아니 시간이 훨씬 더 강력한 맥락이다. 이갑철이 한 세대 전인 1980년대에 촬영한 사진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만나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 경제적 맥락, 미디어적 맥락뿐만 아니라 시대적 맥락에 유의하면서 사진설명을 새로 써야 한다. ● 『타인의 땅』은 거듭 묻는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지난 삼십 년간, 과연 무엇이 달라지고, 또 무엇이 달라지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갑철 사진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아프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그의 질문이 미사여구(美辭麗句)가 아니기 때문이다. 질문을 위한 질문이 아니고 절실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갑철의 저 근원적 질문은 그의 사진 스타일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사진은 대부분 스냅 사진이다. 피사체를 정지시키거나,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찍은 연출 사진이 아니다. 거리에서 순식간에 포착한 장면들이다. 이갑철에게 카메라는 권총이다. 늘 장전되어 있고 늘 휴대하고 다니는 총기. 그는 언제 어디서나 발사할 수 있다. 한 세기 전, 사진가 강운구(姜運求)가 이갑철을 미국 서부의 총잡이에 비유한 바 있다. "이갑철은 동양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다." 보기 드문 찬사였다. "사진보다는 말이 더 요란스러운 법"이라는 손택의 발언은 사진이 사회 변화에 적극 기여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손택은 "사진이 지닌 최고의 소명은 인간에게 인간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사진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침묵하고 있는 사진으로 하여금 입을 열게 하는 것이 독자의 몫이다. 독자 자신의 사진설명이다. 독자에 의해 사회적 맥락에 다시 자리잡는 사진—그래서 우리는 사진보다 사진설명이 더 많아야 한다. 사진보다 사진설명이 더 필요하다. ● 지난 이십여 년 사이, 사진도 놀라운 변화를 거듭해 왔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카메라에서 스마트폰으로, 현상과 인화에서 전송과 공유로. 듣기 좋게 말해 사진의 민주주의가 만개하고 있다. 하지만 사진이 많아진다고 해서, 누구나 다 사진가가 된다고 해서 사진의 사회적 역할이 확대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다큐 사진의 정체성, 다큐 사진가의 작가정신은 오히려 퇴색하고 있다. 사진 역시 '돈의 논리'에 포섭되고 말았다. ●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사진은 어디로 갔는가. 인간과 삶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표현하는 사진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진은 어디 있는가. 타인에 대한 질문은 곧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이다. 타인의 땅에 대한 탐구는 결국 우리 삶의 터전에 대한 탐구다. 이갑철이 이십여 년 전 거리에서 속사(速射)로 포획한 한국인의 초상이 우리에게 묻는다. 다시 묻는다.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삶과 사회인가. 『타인의 땅』이 독자인 우리에게 새로운 사진설명을 요구한다. 우리가 이십여 년 전, 저 사진 속의 누구라면, 우리는 저 사진 한 컷만으로도 저마다 눈물 어린 자서전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자서전이라면, 결말의 문장은, 단언컨대, 과거가 아니고 미래시제일 것이다. 이문재 ■ 이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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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명동 그리고 이 도시 저 도시의 무수한 골목길 - 고작 카메라 한대 둘러매고 도시를 배회하던 사냥꾼은 어둠이 내리는 어스름 녘이면 지친 몸을 이끌고 밝은 동네 어둡고 비좁은 골목길로 들어선다. 서서 먹는 대포 집에서 국수 한 그릇, 막걸리 한잔으로 하루의 피곤을 내려놓고 몸과 마음을 일깨운다. 오직 가난한 가슴으로 만나야 했던 그 시절, 그 도시 _ 하얗게 오버랩 되는 아련한 불빛, 그 소리, 그 냄새들에서 스쳐 지나간 그곳, 그대들의 향취. 집으로 가는 길, 싸늘한 도시 한 켠에 따스하게 반짝이던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들이 내가 살던 달동네에도, 단칸방에도 빛나고 있었다. ● 이 사진들은 1985부터 1990년 까지 약 5년 정도 촬영된 것이다. 이 작업을 하게 된 계기는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 사진집을 보고 내가 받은 감동 때문이었다. 1958년에 출판된 『미국인들』이 보여주는 개인적, 보편적 진실의 힘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더욱 또렷해졌고 이것이야말로 지금 해야 할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서 이 시대에 살고, 보고, 느낀 것을 많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느끼는 객관적 시각이 아닌 나라는 개인의 주관적 시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이 시대의 현상들, 정치, 경제, 문화, 내가 살아가는 주변의 현실들을 보도하거나 증언하지 않고 오직 나 자신의 느낌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러나 내 작업 또한 『미국인들』이 그러했듯 내가 숨 쉬고 살아가는 한 시대의 보편적 진실이 '나'라는 매체를 통과하며 사진 속에 담길 것이라 확신했다. ● 젊은 날 고향을 떠나 서울과 우리나라 곳곳을 다니면서 느끼게 된 전반적 생각은 나와 그리고 처지가 비슷한 사회적 약자와 빈곤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현실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땅이 아니라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는 남들 같은 '타인의 땅' 임을 느꼈다. 2013년, 우리는 지금 누구의 땅에 있는가? (작가노트 중 일부 발췌) 타인의 땅, 우리들의 땅 ● 할수록 어려운 것이 사진이었습니다. 사진을 조금 안다고 느끼게 되면서 더욱 막막하고, 더욱 괴로운 것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 이 현실이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무엇이며, '시대의 현실' 이란 무엇일까? 이 두 가지의 이율배반적인 논리를 어떻게 아픔 없이 해명하며, 극복할 수 있을까? 철학은 긴 사설만 늘어놓고, 예술은 시끄럽게 소란스럽기만 합니다. 나에겐 꿈속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문 밖의 소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타인의 땅' 에서 뜻을 잃고 오고가는 나그네들이 아닐까요? 정말 나의 가슴을 두드리고, 나의 피부를 쓰라리도록 하는 사진은 무엇인지? 이 번민이 계속되는 한 나의 사진은 방황을 멈추는 날까지 계속되는 숙명이겠지요. ■ 이갑철



Vol.20160316g | 이갑철展 / LEEGAPCHUL / 李甲哲 / photography


 

수요일만 되면 별 볼일 없어도 인사동에 나가고 싶어진다.

전시장들은 새로운 작품들로 교체되고, 거리에선 반가운 인사동 사람들을 쉬 만날 수 있어

모처럼 인사동 기운이 충천하기 때문이다.

지난 27일엔 사진가 변홍섭씨와의 오찬약속을 수요일로 잡아두어, 일찍부터 작정하고 나올 수 있었다.
변홍섭씨는 정선같이 한적한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며 자문을 구해왔으나

내가 사는 곳은 이미 관광지화 되어 추천할 수가 없었다.

‘툇마루’에 식사하러 가서는 음유시인 송상욱선생을 만났고,

‘귀천’에 차 마시러 가서는 민속학자 심우성선생을 만났는데, '귀천'엔 빈 자리가 없었다

인사동거리에서는 사진가 이갑철, 육명심씨, 시인 강 민, 이행자, 서정춘씨, 소설가 구중관씨,

서양화가 안창홍, 이종송씨, 미술평론가 윤범모씨, 사진평론가 최건수씨, 무이도 예술촌장 정중근씨,

예당국악원 조수빈원장 등 많은 분들을 만났다.

평소 인사동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기란 고작 한 두 사람에 불과한데,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분들을 만난다는 것은 그의 대박수준이다.

그러나 대개 술을 마시고 집에 가는 길이거나, 금주령이 내려 진 분들이 많아 술 한 잔 하자는사람이 없었다.

무더운 날씨의 낮 술에 취하면 힘들 것 같아 점심식사 때부터 사양했지만,
막상 그냥 지나치려니 맹숭하고 허전했다.
그래도 반가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니 여한은 없었다.

사진,글 / 조문호

 

 

 

 

 

 

 

 

 

 

 

 

 

 

 

 

 

 

 

 

 

 

 

 

 

 

 

 

 

 

 

 

 

 

 

 


 

몇 일 동안 컴퓨터와 씨름했더니, 온 몸에 좀이 쑤셨다.
하던 일을 잠깐 멈추고, 산책삼아 인사동으로 나갔다.

 

무작정 걷고 싶었으나, 수요일 오후라 전시장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썩 발길 잡는 전시는 없었다.
사진전도 두 군데나 있었으나, 동명이인이거나 아마추어 전시였다.

'인덱스'에서는 최건수씨를, '가나스페이스'에서는 김가중, 곽명우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보였으나, 마음이 바빠 그냥 지나쳤다.
인사동 거리에서는 사진가 이갑철, 이상일씨도 만났다.

 

두 시간 동안 전시장과 인사동거리를 쏘다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전시장마다 아는 분도 있고, 술과 음식이 즐비했지만 마다했다.
인사동나와 이 날처럼 술 한 잔 없이 돌아간 적은 없었다.

 

가고싶은 술집도 술 벗도 없으니, 차라리 우리집 주막이 더 나은 듯 했다.

인사동의 낭만도 전설이 되어가는 요즘, 왜 인사동을 못 잊고 떠돌까?
늘 고향 같았고, 고향 동무 같은 벗 들이 있었으니까...

 

 

사진,글 / 조문호


 

 

 

 

 

 

 

 

 

 



 

 

다큐사진가 이갑철씨 '제주 1980’

한국인의 역동적인 신명과 삶의 기운을 포착해온 다큐사진가 이갑철(56)씨가 1980년대초 찍었던 제주 작업을 처음 대중 앞에 내놓았다. 서울 강남의 사진대안공간 스페이 22에서 1일 막을 올린 <바람의 풍경, 제주 천구백팔십>이란 제목의 개인전이다.

84년 첫 개인전 <거리의 양키들>로 데뷔하기 전인 79~84년 그가 제주에서 찍은 사진 48장을 선보인다. 뭍의 관광객들이 막 몰려들던 그 시절 제주의 여러 빛바랜 풍광들이 눈에 감기는 작품들이다. 작가는 섬의 풍광과 사람들 틈새로 스며드는 바람의 흔적들까지 포착했다. 언덕에 서서 수평선을 향해 옷을 휘날리며 기원하는 중년 남자의 모습과 잔디밭을 걷는 아녀자의 너풀거리는 옷자락 등이 바람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2002년 사진계를 뒤흔든 전시 <충돌과 반동> 이래 작가의 등록상표가 된 흔들리는 화면과 기울어진 사선 구도, 초점 없이 흩어지는 대상 등의 특징이 초창기 사진 속에 이미 엿보인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씨는 “제주에서 마음을 강하게 끌었던 게 바람”이라며 작가노트에 썼다. “바람은 끌고 당기는 힘의 역항을 이루며 제주섬 어디에나 내재되어 있었다. 그 긴장감이 좋았다…이 사진들은 삼십여년 전 내가 바라본 바람의 풍경들이다.”


서울 청량리 588 사창가의 80년대 풍경과 삶을 담은 조문호씨, 84~86년 찍었던 이태원 유흥가 작업을 풀어낸 김남진씨의 전시에 이은 80년대 재조명 흐름의 하나다. 이씨는 지난달부터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1년간의 부산 작업을 모은 <침묵과 낭만> 전시도 하고 있다. 열화당에서 이번 전시와 같은 제목의 사진집(80쪽)도 나왔다. 전시는 24일까지. (02)3469-0822.

[한겨레]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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