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진전문출판사인 ‘눈빛출판사’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

사무실을 외곽으로 옮겨가고 유일한 직원이었던 성윤미씨가 그만두고 이규상대표가 북치고 장구치는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초판 천부 찍던 사진집이 오백부로 줄어들었고, 그마저 엄선해서 출판해야 한다니 33년 전통의 출판사가 고사 직전에 몰렸다. 안 팔리는 다큐멘터리 사진집만 냈으니, 여지 것 버텨낸 것만도 용하다 싶다.

 

사진출판사로서 오로지 한 길을 걸어 온 '눈빛출판사'의 궤적은 한국사진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정작 보아야 할 사진인들이 책을 사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언젠가 유명 사진가의 집을 방문하여 서재를 본 적이 있었는데, 국내에서 출판된 사진집은 보이지 않고 비싼 수입서적만 잔뜩 꽂혀 있었다. 그러면서 '눈빛출판사'에 자신의 사진집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650여종에 이르는 많은 사진집을 출판했으나 베스트셀러 한 권 없다.

프랑스 사진가 크리스 마커가 북한 모습을 담은 사진집 '북녘 사람들'이 3,000부 팔렸고, 이경모선생의 사진집 '격동기의 현장'이 1만부, 김기찬 사진집 '골목 안 풍경'이 7000부 정도 팔린 것이 대박 친 사진집에 속한다.

 

만약 ‘눈빛출판사’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사진이 어떻게 되었을까? 살아남을 수 없는 불모지에 뛰어들어 온 힘을 기울여 온 ‘눈빛출판사’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 다큐멘터리사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땅의 역사와 삶의 흔적을 남기려는 투지가 없었다면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진가 개인 파일에서 잠자다 잊혀 지거나 사장되었을 것이다.

 

‘눈빛출판사’는 긴 세월동안 다큐멘터리사진을 발굴하여 출판해 왔고, 역량 있는 신진작가를 배출해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분야인 다큐멘터리사진을 부흥시켰다. 그 고마운 출판사를 위해서보다 사진가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사진집은 사 보아야하지 않겠는가? 대중성 없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몰락은 사진가 스스로의 자업자득인 셈이다.

 

그런데 다큐멘터리 사진집 출판에 이변이 생겼다. 이강산 시인이 준비한 사진집 ‘여인숙’이 선주문 형식으로 진행된 ‘텀블벅 펀딩’에 283명의 후원자가 몰려들어 천 팔백 육십 만원을 후원했다고 한다. 물론 그중에는 사진인도 있었겠지만, 일반인들의 사진에 대한 관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큐멘터리 사진집 출판에 전례가 없었던 일로,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 일이었다.

 

 

그리고 어린이를 겨냥한 서적은 꾸준히 잘 팔린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곤충사진가 이수영씨의 곤충사진집에서 나오는 인세는 그가 작업하는 경비뿐 아니라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도 꾸준히 들어온다고 했다. 그 뿐 아니라 이십 년 전 정영신씨가 글을 쓰고 정영신씨 사진으로 유성호씨가 그림을 그린 ‘시골장터 이야기’(진선출판사)는 23쇄에 이를 정도로 꾸준히 팔리는 품목이다. 6개월간의 판매부수를 정산한 인세 백여 만원이 지난 7월에 보내왔다는데, 정영신씨에게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는 책이다. 다큐멘터리사진집으로 그런 수익을 얻는다는 것은 요원한 꿈일까?

 

작년에는 정영신씨가 ‘길 위의 인문학’ 공모에 선정되어 작업비를 지원받았으나, 2차에서 탈락하여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하게 될 ‘어머니의 땅’ 사진집제작에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정말 운이 없는 출판사다. 나 역시 그동안 작업해 온 노숙인은 책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을 것이 뻔해 출판하자는 제안은 커녕 꿈도 꾸지 못했는데, 우연히 ‘이숲’출판사에서 출판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의외의 출판계약으로 편집까지 마무리한지가 오래되었지만, 서둘 필요는 없다고 했다. 책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책으로 하여금 노숙인들 생활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 하기에 지원 없는 출판은 무의미했다. 적어도 찍힌 사람에게는 책 한 권씩이라도 전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다행스럽게도 출판사에서 지원 신청한 ‘노숙인’이 종이책 부분 우수출판물로 선정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받았다.

 

정영신씨의 ‘어머니의 땅’사진집이 나오는 9월23일부터 10월 4일까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전시를 한다는데, 나도 꼽사리 끼어 인사동거리에서 가두 전시를 할 작정이다. 일반인은 전시장에서 놀고 노숙인들은 거리에서 노는 잔치판을 한 번 만들어 볼 생각이다. 기대하시라!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6일은 경북 성주장을 찾아 나섰다.

성주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게 사진계 전설로 통하는 이명동선생이시다.
삼 년만 있으면 백순을 맞는 이명동선생 고향이 바로 성주가 아니던가.
소 판돈 몰래 들고 나와 카메라 구입했던 그 현장이다.






선생께서는 고향 조카들에게 부탁하여, 성주 참외까지 보내주는 자상하신 분이다.
그 짱짱하시던 선생님께서 사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외출도 않으시고,
이젠 몸도 많이 수척해 지셨다.
한 번 찾아뵙는다는 것이 차일피일 미루어 왔는데, 성주에 당도하니 갑자기 죄책감으로 밀려드네.






그런데, 3년 만에 들린 성주장은 엄청난 변화를 맞고 있었다.
그 고색창연한 장옥의 정겨움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구조물로 바뀌어 버렸다.
그동안 가볼만한 장터로 성주장을 빼 놓지 않고 소개해 왔는데,
이젠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추억이 되고 말았다.






오래된 문화를 깡그리 말살하는 사람의 머리구조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지 한 번 파헤쳐보고 싶어진다.
문제는 돈 들여 장옥을 바꾸었지만, 장사가 잘되기는커녕 장사꾼들의 불만만 더 높았다.
손님은 날로 줄어드는데다, 도저히 정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터를 한 바퀴 돌아본 후,
행여 추억의 자락이라도 만날까 장터 주변을 맴돌았다.


골목 한 모퉁이에서 노부부가 열심히 텃밭을 파내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텃밭을 왜 파내냐고 물었더니.
“자식들이 찾아와도 차댈 곳이 마땅찮아 주차 공간 만든다”고 하셨다.
골목이 좁아 텃밭이라도 깎아내어, 자식들 편하게 주차하라는 배려였다.






차 댈 곳이 없어 자식들이 자주 오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애틋한 마음을 자식이 알기나 할까?






도식화되어가는 농촌의 모습을 성주장에서 다시 확인할 뿐이지만,
마냥 자식만 기다리며 사는 시골 노인들의 외로움이 더 가슴에 묻힌다.
이젠 주변 환경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정마저 메말라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부모 없는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시골에 부모님이 계시다면 전화라도 자주 드리자.
이러다, 죽기 전에 가족 해체되는 세상 올까 두렵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2월11일 전라북도 완주의 운주장터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곳은 곶감으로 유명한 마을이지만 장터에 사람들이 별로 나오지 않았다.
장꾼 몇 명이 모닥불을 쬐다 낯선 사람들의 출현에 관심을 보였다.
내 나이 또래 쯤 돼 보이는 박모씨가 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어라?”
“서울서 왔심더”
“에이 공갈치지 말아요. 촌사람 같은데....”
“서울서 왔지만, 주소지는 정선이고요”
“그럼 그렇지! 서울사람이 그럴 리가 없지”

내 꼬락서니가 영락없는 시골 노인 행색인데다,
신발마저 시골사람들이 신는 두툼한 장화였으니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을 게다.

 



두 번째 질문이 이어졌다.


“저 사진 찍는 여자는 누구여?”
“내 마누라요”
“또 공갈치네! 딸 같은데..”
“진짜요. 나이가 내 보다 어려서 그렇지...”
“아따 아제 재주도 좋소이, 돈은 좀 있는가베?”
“한 푼 없는 신용불량자로 전락한지가 오래됐소.”
"에이~"
 신용불량자란 말도 거짓으로 들렸는지 고개를 흔들며 또 물었다.  

 

“운주장은 왜 찍는 당가?”
“운주 뿐 아니라 전국장터를 다 찍으러 댕기요”
“거기 드는 돈은 어디서 나는디, 나랏돈이여?”
빚내서 돌아다닌다면 또 믿지 않을 것 같아 이번엔 거짓말을 했다.
“나라에서 큰 돈 받아, 새마누라까지 얻었지요”
좀 부러워하는 걸 보니 진짜 거짓말은 믿는 눈치였다.

진실은 거짓말로 들리고, 거짓말이 사실로 들리는 요지경 세상이다
불신이 만연한 세상 탓인가? 아니면 내 꼬락서니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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