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松賢) 이필언 화백이 25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오는 23일부터 ‘인사아트프라자’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가 한평생 골몰해 온 돌담 배경의 작품이 중심에 설 예정이다. 1980년 프랑스 파리 뱅따도르 미술관에 전시하며 '르 피가로'지의 호평을 받은바 있는 대작 '농악'도 모습을 더러 낸다.

 

이필언 作 '나무 위에 아이들

이 화백은 국내화단을 대표하는 중진이자 집념의 예술가다. 그는 우리 고유의 건축양식인 담에 천착하여 독창적인 조형세계를 구축했다. 한국적 정서가 깃든 화면에 감각적 채색과 신선한 구도를 보여주는 이화백의 작품은 전통의 문화와 현대적 기법이 공존하는 이미지를 창조해 낸다. 그는 60여년 회화와 조각을 병행하며 부조적인 회화작품을 선보여 왔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며 한국 고유의 ‘담(牆)’을 테마로 한 작품은 국내는 물론 유럽에서 주목 받았다.

 

이필언 作 '소달구지'

그의 ‘담’은 단순한 경계를 넘어 사색과 풍류의 멋을 지닌다. 또한 ‘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시간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는 형이상학적 존재이며, 우리 고유의 것을 담아내며 구상과 반추상을 접목시키고 있다. 이 화백은 "서울 남가좌동에 살던 어린시절, 동네가 빠르게 변화하는데 돌담만은 거기 그대로였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며 "조선시대 고궁과 같이 낡은 돌담에도 그만의 고풍스러움이 있어, 그 맛에 빠져 돌담을 그리게 됐다"고 되짚었다.

“내가 외국에서 상을 여러 번 받았지만, 전부 한국적인 미(美)다. 남(서양)의 것을 흉내만 내서는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 그런데 일부 젊은 화가들은 서구 사상에 경도되어 우리 것을 외면하고 상업화에 치우쳐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필언작 춘하추동 농악

이필언 화백은 1941 경남 언양 출생으로 한 때 부산 동아대학교 예술대학에 출강하기도 했으나 4년 만에 전업 작가로 돌아섰다. 그의 작품성은 국내외 화단에서 일찍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67년 국전 입선 이후 11회 연속 국전에 이름을 올렸고, 다수의 민전에서도 수상을 거듭했다. 그러면서 해외 작품전에서의 초청도 잦아졌다. 프랑스의 최대 작품 공모전 중 하나인 '르 살롱'전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정점을 찍었는데,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 해 굶어죽더라도 예술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담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 건 아니었다. 해녀 등 인물화를 주로 그렸다. 그러다 문득 세월의 변화 속, '옛 맛'이 깃든 대상을 배경 삼자는 생각이 들어 돌담에 집착하였다고 한다. 20여 년 동안 담에 천착하며 조각에도 매진했다. 그러던 중 10년 전에는 위암 수술로 인해 큰 고비 맞기도 했지만, 예술에 대한 집념은 그치지 않았다.

 

이필언작 '산골'

이번전시에 내놓은 최신작 ‘산골’을 보면 캔버스 위에 닥죽을 붙여 입체감을 살리고, 형상적 부조와 한글로 조형미를 창출한 후 아크릴 물감으로 색을 입혀 마무리하고 있다. 전통의 소재에 색채와 구성, 입체감 등으로 현대성을 더하고 있다.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리는 '25년만의 외출'전은 오는 29일까지 열린다.

 

글 / 조문호

 

이필언작 '해녀'
이필언작 '자화상'
이필언 화백

 

 

 

[김석종의 만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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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송현(67)을 만났더니 이번에는 뜬금없이 비둘기 친구 얘기를 하는 거다. 2년 전쯤 조계사 마당에서 왼쪽 다리가 성치 못한 비둘기를 만나 ‘왼다비’라는 이름을 붙여줬다고 한다. 때때로 땅콩이나 쌀 한 줌씩 가져다 모이를 주면서 친해졌는데 요즘 두 달째 왼다비를 보지 못했단다. “마지막 만났을 때 괴로운 표정을 짓더라고. 아마 죽음을 앞두고 하직 인사를 한 거 같아.”

송현은 하나의 테두리로 규정하기도, 이해하기도 난해한 사람이다. 시인, 소설가, 아동문학가, 한글운동가, 한글기계화연구가, 한글자형(글꼴)학자, 칼럼니스트, SS이론창안자, 라즈니쉬연구가, 방송인, 명상가…. 이처럼 다양한 직함에다 청산유수의 ‘구라’로 한 경지를 더한 희귀한 기인이다.

송현에게는 사람들의 눈길을 확 잡아끌 만한 히든카드가 하나 있다. 그가 30년 연구로 집대성했다는 송현의 섹스 이론(SS이론)이 그거다. 한때 한국SS이론연구소 홈페이지 접속자가 10만명이 넘으면서 ‘SS교주’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여기서는 그 민망한 신통술을 전할 수가 없으니 기대하지 마시라. 다만 그가 “성이란 서로 상대방의 가려운 데를 시원하게 긁어주는 것” “아름다운 악기를 숨막히게 연주하는 예술의 경지” 같은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는 정도만 밝히고 넘어가련다.

과거 괴짜, 예인, 방외지사 등 방랑과 기행의 고수들이 진을 쳤던 인사동이 송현의 활동무대였다. 이를테면 ‘인사동파’ 출신이다. 하고 다니는 외양에서도 사뭇 튄다. 색깔만 다른 ‘모택동 모자’를 100개 넘게 사놓고 바꿔 쓰고 다닌다. 새로 산 셔츠와 바지를 이리저리 가위질해서 입는 것도 송현 스타일이다. 늘 메고다니는 큼지막한 가방이 50개가 넘는단다. 그런 한결같은 모습으로 거의 40년을 인사동 거리를 누비고 다닌 그다. 나이 든 지금도 그 차림새와 과장되게 파안대소하는 모습은 하나도 안 변했다.

이제는 10년도 더 지난 얘기지만 송현은 세상이 다 알도록 떠들썩한 재혼으로 못 말리는 기인 행각의 정점을 찍은 바 있다. 서른한 살에 이혼하고 혼자 살던 송현이 쉰여덟 살 되던 해 ‘샘이깊은 물’이라는 여자잡지에 원고지 80장에 달하는 ‘공개구혼장’을 실었다. 외모와 경력과 건강상태와 가족상황과 취향과 재산상태까지 구구절절 소개하는 글이었다. 너무나 솔직하고 진지해서 흥미진진했던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동아대 국문과 출신으로 중·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미당 서정주의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했다. 공병우 박사와 인연이 돼서 교사를 그만두고 (주)공병우 타자기 대표이사를 지냈다. KBS 라디오와 TV 그리고 몇몇 케이블 TV에서 ‘행복’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 진행, 어린이 잡지 월간 ‘굴렁쇠’와 월간 ‘디자인’의 편집주간, 서울예술신학대학의 문예창작과 교수 등을 했다. 총각 교사 시절 네 살짜리 딸아이가 있는 이혼녀를 사랑해서 결혼해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고 살다가 헤어졌다. 그 기간에 세 권의 시집을 포함해 50여권의 책을 썼다. 그중 그림동화 <도깨비학교 문고>는 100만권 이상이 팔린 밀리언셀러다.

그 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행복한 재혼의 조건이다. ‘…저의 큰 소망 하나는 풀을 빳빳하게 먹인 하얀 옥양목 홑청을 한 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도 바라는 것이 스물여섯 가지나 됐다. 외모는 남에게 호감을 주는 정도면 족하다, 이혼의 쓰라린 상처가 있는 여자를 원한다, 제 손으로 키운 자식이 딸려 있기를 바란다, 멸치 젓갈과 조용필 노래와 바바리코트 입기를 좋아하는 여자면 좋겠다 등등.

그런데도 반응이 엄청났다. 무려 650여명으로부터 청혼이 쇄도했다고 한다. 그중 한 통의 편지가 송현의 눈길을 붙잡았다. 그 여인과 1년의 데이트 끝에 ‘새혼’을 했다. 재혼이라는 어감이 달갑지 않아 새로 혼인한다는 뜻으로 그가 만든 말이 새혼이다(새혼은 네이버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다). 그의 이런 조어벽은 시도 때도 없이 발동한다. 새혼한 아내와 ‘나따사함’(나흘은 따로, 사흘은 함께 산다는 뜻의 조어) 부부로 살았다. 살림을 합치지 않고 남편은 서울에서, 아내는 수원에서 지내며 서로의 집을 오가는 방식이다. 송현의 새혼은 KBS TV <인간극장>에 5부작으로 소개됐다.




송현은 일생 사상가 함석헌, 한글학자 최현배,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만든 공병우, ‘뿌리깊은 나무’ 발행인이었던 한창기, 교육자이자 동화작가 이오덕 같은 대단한 사람들을 직접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한 걸 늘 자랑삼는다. 특히 공병우 박사와 10년 넘게 한글기계화운동과 한글자판통일운동을 함께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는 지금도 공병우식 자판이 과학적이고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컴퓨터 표준자판이 비과학적이라고 자주 열을 올린다. “세벌식이야말로 가장 정확하고 빠르며 간편한 한글 자판 방식이다.” 하지만 이미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진 터여서 그의 외로운 싸움은 좀 무모해 보인다.

송현의 또 다른 스승은 그에게 강한 영감을 준 인도의 명상가 라즈니쉬다. 그는 어느날 라즈니쉬가 꿈에 나타나 ‘비말까르띠’(‘순수’ 또는 ‘본질’을 뜻하는 범어)라는 법명을 주고 제자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거의 믿거나 말거나식 구라로 보이지만 그가 하도 진지하게 얘기 하니 살짝 믿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는 <젊은 날에 만나야 할 영적 스승 라즈니쉬>, <라즈니쉬예술론>이란 책도 썼다. 어쨌든 송현은 이 스승들의 기일에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단식을 한다.

송현의 장안평 사무실에는 ‘한글문화원’과 ‘무향선원(無向禪園)’ 간판이 달려 있다. 그는 자신이 정신세계의 유목민이자 자유인이라고 말한다. 그가 내세우는 것이 ‘지여처다주의’, 다른 말로는 ‘무향주의’다. 지여처다는 ‘지금, 여기서, 처음 만난 것처럼, 다시 못 만날 것처럼’을 줄여서 명명했다. 지여처다를 독서법, 명상법, 사랑법, 화법, 심지어 수영법까지 이리저리 활용한다.

그는 요즘 사랑과 공부, 두 가지에 몰두하고 있다. 사랑과 공부의 목적은 행복. 그걸 위해 ‘송현의 행복대학교’와 ‘송현의 행복대학원’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은 주로 인터넷으로 강의를 한다. 대학과정을 마쳐야만 대학원 강의를 들을 수 있단다. 전공과목이 ‘잘하는 법’ 딱 한 가지라고 했다. 지여처다는 그걸 이루는 수행법이다. 얼마 전 제자의 도움으로 충북 제천에 수련원도 열었다. “사람은 평생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계속 성장해야 한다. 특히 부부는 함께 성장하지 못하면 통할 수 없다. 당신이 멈춰선 순간에도 갠지스강은 천리만리 흘러가고 있다.”


경향신문 / 김석종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안승일씨의 ‘불멸 또는 황홀’ 백두산사진전 개막식이 지난 24일 오후6시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열렸다.

전시장은 작품 감상하러 온 축하객들과 내빈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박인식씨의 사회로 진행된 개막식은 대부분의 시간을 내빈들의 인사와 축사에 할애해야 했다.
시인 민 영선생을 비롯하여 송 현 시인, 산악연맹 이인정회장, 원로언론인 임재경선생, 김종규이사장,

행위예술가 무세중씨, 서양화가 김용태씨,‘아라아트’ 김명성대표, 방송인 전유성씨, 김영환의원,

박원순시장의 축사가 이어진 후 안승일씨의 인사말이 있었다.

 

"남들은 다들 고생했다고들 하지만 자신은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송 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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