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은 일찍부터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서울역 가는 지하철을 타려면 은평평화공원을 거쳐야한다.

그 곳에는 세월호 아픔에 휩쓸려 간 김관홍 잠수사를 추모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운평사람들이 마련한 자리였다.

고 김관홍 잠수사의 4주기 추모제 세월호 기억과 약속

오는 17일 저녁7시 참여연대 1통인카페에서 열린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민간잠수사로 실종자 수색에 참가했던 김씨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하는 등 진상 규명을 위해 노력해왔다.

참사 당시 구조하지 않고 수색도 못한 현장을 목격했으나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고인은 국정감사장, 청문회장, 광화문 광장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정부의 기만적 태도를 비판하며 진실을 폭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현장 수색 이후 잠수병을 앓아 온 김씨는 더 이상 잠수도 못하고

대리운전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4년 전 세상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제 그가 염원했던 명예회복과 세월호 진실규명만이 그가 평안히 영면하는 길이다.

 

아픔도 쉽게 잊어버리는 무심한 세상, 그를 통해 다시 한 번 세월호를 되돌아보았다.

고 김관홍 잠수사를 기억하며,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다.

 

은평평화공원은 시원한 저녁시간에는 사람이 많아도, 낯 시간은 비교적 한산하다.

마스크로 무장한 몇몇이 시간을 보내거나, 화초에 물주는 관리인 뿐이었다.

 

많은 분들이 고 김관홍 잠수사를 기억하며. 그의 영면을 빌어주길 바란다.

 

사진, / 조문호

 

30일까지, 청운동 류가헌서, 사진집 출판기념전


2017년 07월 28일 (금) 16:59:01 조문호 기자/사진가 prees@sctoday.co.kr

 


사진가 김봉규의 ‘팽목항에서’사진집 출판기념전이 오는 30일까지 서울 종로구 청운동 ‘류가헌’에서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한계레’사진기자 김봉규씨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2014년 4월16일 전남 진도 팽목항으로 달려 간 후,

40여 차례 넘게 팽목항과 동거차도를 방문 기거하며 기록했다. 기자로서의 냉철한 시각보다 인간으로서의 처절한 심정으로 찍었다.

객관성을 우선하는 신문사진과 주관을 우선하는 사진가로서의 갈등도 보였다.



▲김봉규 사진가.ⓒ조문호 사진가.


수많은 기자들과 사진가들이 팽목항을 촬영했겠지만, 김봉규씨는 마치 친자식을 떠나보낸 듯한 비통한 마음으로 아파하며 찍었다.

사진가로서의 소명도 중요하지만, 인간으로서 더 아팠다.

다큐멘터리사진에서 제일 중요한 덕목이 대상 속으로 들어가 이루어내는 공감인데,

김봉규의 평목항 전시가 빛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공감이었다.

스스로 아파야 그 아픔이 사진에 드러나고, 보는 이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봉규의 사진을 덕목과 공감으로 평한 사진가 김문호씨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눈빛사진가선 50. 팽목항에서 표지



“다큐사진의 무게, 혹은 삶의 무게, 사진가가 찍는 대상인 당신이 곧 내가 되고 당신과 내가 우리가 되고,

그 "우리"를 "인간"이라는 단어로 환치할 수 있을 때, 가장 진정성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큐멘터리 사진의 무게를 이루는 것, 그것은 대상과 사진가와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공감"(compassion)의 무게일 것이다.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덕목 "공감", 다큐멘터리 사진에 진정성의 무게를 만들어주는 덕목, "공감".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사람 같지 않은 사람, 사람 되기는 그른 사람"이라 하고,

그것이 결여되어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진정성이 없는 사진"이라고 말한다.

김봉규의 팽목항 사진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 그것은 단순히 슬퍼하는 유족들에 대한 동정을 넘어서

바로 우리가 적어도 지금 살아 숨쉬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체감해야 할 "공감"일 것이다.

사진이 이렇게도 이렇게 막막할 수 있다니...”



▲동거차도 앞바다를 찾은 단원고 안주현 학생의 어머니 김정혜 씨_2016년 4월 22일 오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사진기자 김봉규씨가 유가족의 울부짖는 모습이나 시신이 인양되는 비참한 모습이 담긴 직설적인 표현을 비켜간 의도가 무엇이겠는가?

가족처럼 차마 보여 주기 싫었던 것이다. 그 것만 으로도 사진가가 얼마나 아파하며 그들과 동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사진들은 ‘객관적 앵글’로 찍힌 신문용 사진이 아니라, 한 인간의 감정에 충실한 ‘주관적 앵글’의 사진이다.

오히려 직설적인 화법보다 간접적인 화법이 더 강하고 여운이 오래간다는 것도 증명했다.



▲동거차도_2017년 3월 22일 오후



세월호가 침몰하는 평목항에 달려가 처음 맞은 동거차도의 밤은 적막감과 긴박감이 뒤섞여 있었다. 사진집 표지에 실린 사진처럼,

조명탄에 비친 가라앉는 세월호의 선수가 마지막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어둠의 농도로 하늘과 바다를 구분하며 어렴풋이 먼 섬의 능선들이 드러났지만, 긴박한 비극의 현장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사람이나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조명탄만 흘러내렸다.

그 사진이 운명의 첫날밤에 맞딱뜨린 김봉규의 처절한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인양되는 세월호_동거차도 사고해역_2017년 3월 24일 오후



넋을 잃은 듯 절망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먹구름이 뒤덮은 칠흑 같은 바다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뒷모습들이 마치 지옥의 묵시록처럼 무겁게 다가왔다.

가끔 어두운 바다를 배경으로 부표나 십자가, 노란 리본들이 부각되기도 했으나, 대개가 침울한 슬픈 풍경이다.

마치 유령이 나올 듯이 음산하며, 불쌍한 원혼들이 바닷가를 멤 도는 착시현상마저 생겼다.

중요한 것은 사진 곳곳에 작가의 분노가 똬리 틀고 있었다.



▲팽목항_2014년 4월 27일 오후



“여기에 실린 김봉규의 사진들은 대체로 비극의 슬픔과 분노를 적막 속에 감추고 있다.

감춘다기보다는 감춤으로써 표출되고 억누름으로써 드러난다. 이 억누름은 힘을 가해서 얻어지는 물리적 억누름이 아니라,

드러나지 못해서 아우성치면서 심층에 잠겨있는 것들의 드러남을 허용하는 여백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한다.

이 억누름과 드러남은 고통스런 분열의 과정인데 그 과정을 통해서 인칭의 국면은 힘겹게 전환되면서

인칭들 사이에 새로운 의미가 빚어지고, 대상은 보이기 시작한다“고 소설가 김훈은 해설했다.



▲팽목항_2014년 6월 2일 오후



이러한 작업을 이루어 낸 사진가 김봉규씨의 집념과 열정에 대해 몇 가지 부언하려 한다.
그를 처음 만난 건, 90년대 초반 ‘사진집단 사실’에 함께 하면서다. 그는 사진이라면 물 불 가리지 않았고,

이루어내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당시는 다큐 사진가로서 살아남으려면 최선의 직업이 사진기자였다.

밥벌이로 작업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가 평소 관심 가진 ‘시사저널’주간지를 택했다.

사진기자 모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시사저널’ 주필 방에 들어가 통사정한 것이다. 끈질기게 자기의 포부를 밝혀 특채가 되었다.

그 뒤 ‘한겨레’신문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사진 찍는 일 외에는 전혀 한 눈 팔지 않았다.

대개가 취미사진가를 위한 강좌나 촬영지도 같은 부업을 갖지만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로지 사진이었다.



▲팽목항_2014년 7월 9일 오후



이 ‘팽목항’ 작업 역시 사진 작업에만 몰두하는 그의 열정과 끈기가 이루어낸 성과다.
우리가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세월호의 현장을 통한의 시어처럼 기록해 남긴 것이다.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나고 가슴이 미어지는 장면 장면들이다.



▲팽목항_2014년 11월 18일 오후


세월호는 천재가 아닌 인재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 인재가 삼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인양작업을 시작한 후 하루 만에 올라 온 세월호가 인양하는데 왜 3년씩이나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박근혜가 탄핵되고 세월호가 인양된 것은 정말 우연일까?

특검도 밝히지 못한 박근혜 7시간의 행방이며, 세월호 수사를 방해했다는 우병우 구속신청기각도 석연치 않다.

정권은 바뀌었으나, 범죄 집단 같았던 기득권의 뿌리가 여전히 깊다는 이야기다.



▲팽목항에 설치된 분향소. 2015년 12월 20일 오후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이데올로기조차 뛰어넘는 게 사람의 생명이요 인간의 존엄성 아니겠는가?

이제부터 하나하나 밝혀,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어린 영혼들의 원한을 풀어주자.

이 김봉규의 팽목항 전시와 사진집 출판을 계기로 빠른 시일 안에 진실이 밝혀지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세월호 앞에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전시문의:‘류가헌’(02)720-2010

*사진제공=눈빛출판사



팽목항_2014년 7월 9일



사진가 김봉규의 ‘팽목항에서’사진집 출판기념전이 오는 30일까지 청운동 ‘류가헌’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가 시작된 지난 7월25일 오후6시경 '류가헌'을 가기위해 경복궁역에서 걸어 갔더니 너무 더웠다.

가는 도중 전람회를 다녀오던  엄상빈씨를 만났고, 전시장에는 사진가 김봉규씨를 비롯하여 이규상, 이상엽,

한금선, 곽명우, 이규철, 강제훈씨 등 여러 명이 모여 있었다. 반가운 분들 만나 이야기 나누며 곡차도 한 잔했다. 



▲김봉규 사진가.ⓒ조문호



첫 눈에 보인 사진은 작가가 평목항을 처음 찾은 동거차도의 밤이었다.

사진집 표지에 소개되었듯이, 조명탄에 비친 가라앉는 세월호의 선수가 마지막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어둠의 농도로 하늘과 바다를 구분하며 어렴풋이 먼 섬의 능선들이 드러났지만, 긴박한 비극의 현장은 적막에 휩싸였다.

사람이나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조명탄만 흘러내렸다.

그 사진 한 장이 운명의 첫날밤에 맞닥트린 김봉규의 처절한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수많은 기자들과 사진가들이 팽목항을 촬영했겠지만, 김봉규씨는 친자식을 떠나보낸 듯한 비통한 마음으로 아파하며 찍었다.

사진가로서의 소명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 마음이 더 아팠던 것이다.

다큐멘터리사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대상 속에서 이루어내는 공감인데, 김봉규의 평목항 전시가 빛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공감이었다. 스스로 아파야 아픔이 사진에 드러나고, 보는 이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김봉규시의 '팽목항에서'사진집 표지 (가격 : 12,000원)



김봉규의 사진을 덕목과 공감으로 평한 사진가 김문호씨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다큐사진의 무게, 혹은 삶의 무게, 사진가가 찍는 대상인 당신이 곧 내가 되고 당신과 내가 우리가 되고,

그 "우리"를 "인간"이라는 단어로 환치할 수 있을 때, 가장 진정성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큐멘터리 사진의 무게를 이루는 것, 그것은 대상과 사진가와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공감"(compassion)의 무게일 것이다.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덕목 "공감", 다큐멘터리 사진에 진정성의 무게를 만들어주는 덕목, "공감".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사람 같지 않은 사람, 사람 되기는 그른 사람"이라 하고,

그것이 결여되어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진정성이 없는 사진"이라고 말한다.

김봉규의 팽목항 사진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 그것은 단순히 슬퍼하는 유족들에 대한 동정을 넘어서

바로 우리가 적어도 지금 살아 숨쉬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체감해야 할 "공감"일 것이다.

사진이 이렇게도 이렇게 막막할 수 있다니...”




  ▲팽목항_2014년 11월 18일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사진기자 김봉규씨가 유가족의 울부짖는 모습이나 시신이 인양되는 비참한 모습이 담긴 직설적인 표현을 비켜간 의도가 무엇이겠는가?

가족처럼 차마 보여 주기 싫었던 것이다. 그 것만 보아도 사진가가 얼마나 아파하며 그들과 동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사진들은 ‘객관적 앵글’로 찍힌 신문용 사진이 아니라, 한 인간의 감정에 충실한 ‘주관적 앵글’의 사진이다.

오히려 직설적인 화법보다 간접적인 화법이 더 강하고 여운이 오래간다는 것도 증명한다.


넋을 잃은 듯 절망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먹구름이 뒤덮은 칠흑 같은 바다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뒷모습들이 마치 지옥의 묵시록처럼 무겁게 닥아 왔다. 가끔 어두운 바다를 배경으로 부표나 십자가, 노란 리본들이 부각되기도 했으나,

대개가 침울한 슬픈 풍경이다. 마치 유령이 나올 듯이 음산하기까지 하여 불쌍한 원혼들이 바닷가를 멤도는 착시현상마저 생겼다.

그리고 사진 곳곳에 작가의 분노가 똬리 틀고 있었다.



▲팽목항_2014년 6월 2일



“여기에 실린 김봉규의 사진들은 대체로 비극의 슬픔과 분노를 적막 속에 감추고 있다.

감춘다기보다는 감춤으로서 표출되고 억누름으로서 드러난다. 이 억누름은 힘을 가해서 얻어지는 물리적 억누름이 아니라,

드러나지 못해서 아우성치면서 심층에 잠겨있는 것들의 드러남을 허용하는 여백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한다.

이 억누름과 드러남은 고통스런 분열의 과정인데 그 과정을 통해서 인칭의 국면은 힘겹게 전환되면서 인칭들 사이에

새로운 의미가 빚어지고, 대상은 보이기 시작한다“고 소설가 김훈은 해설했다.



▲팽목항_2014년 4월 27일



이 작업을 이루어 낸 김봉규씨의 사진가로서 집념과 열정에 대해 부언하려 한다.
그를 처음 만난 건, 20여 년전 ‘사진집단 사실’에 함께 하면서다. 그는 사진이라면 물 불 가리지 않았고,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당시는 다큐 사진가로서 살아남으려면 최선의 직업이 사진기자였다.

밥벌이를 겸해 작업을 할 수 있는 길이 사진기자인데, 그가 평소 관심 가져 온 ‘시사저널’ 사무실을 찾아 간 것이다.

사진기자 모집이 있은 것도 아닌데, ‘시사저널’ 주필 방에 들어가 통사정한 것이다. 끈질기게 포부를 밝혀 관철시켰다.

그는 후회없이 최선을 다해 일했고, 그 뒤 ‘한겨레’신문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사진 찍는 일 외에는 한 눈 팔지 않았다.

대개가 취미사진가를 위한 강좌나 촬영지도 같은 부업을 갖지만,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로지 사진뿐이었다.


 


이 ‘팽목항’ 작업 역시 사진 작업에만 몰두하는 그의 열정과 끈기가 이루어낸 성과다.
우리가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세월호의 현장을 통한의 시어처럼 기록해 남긴 것이다.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나고 가슴이 미어지는 장면 장면들이다.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이데올로기조차 뛰어넘는 게 사람의 생명이요 인간의 존엄성 아니겠는가?

이제부터 하나하나 밝혀내어,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어린 영혼들의 원한을 풀어주자.

이 김봉규의 팽목항 전시와 사진집 출판을 계기로 빠른 시일 안에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세월호 앞에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아래사진은 전시 열림식에 다녀 간 분들의 모습이다]



























‘만화인행동’과 ‘연극미래행동네트워크’가 주최하고 ‘416연대’가 주관한
세월호 참사2주기, ‘세월호 그림그리기’가 지난 4월9일 오후1시부터
광화문 세종대왕상 앞에서 진행되었다.

만화인들과 시민들이 함께하는 304점의 세월호 그림그리기는
준비된 4절 켄트지와 크레파스. 마카 등의 재료가 사용되었다.

이 날 행사에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그 날의 아픔을 화폭에 새겼다.

옆 자리에는 세월호 참사 2주기, 희생자들을 ‘잊지 않겠다.’라는
뜻을 담은 ‘약속콘서트’도 준비되고 있었다.

‘기억하자 4·16 투표하자 4·13’이라 쓴 팻말도 등장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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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은 장경호씨가 기획한 2015 한국현대형상회화전이 열리는 날이다.

80년대 미술운동의 뿌리였던 '한국현대형상회화'전도 어언 30년이 되었다.

우리의 역사적 시대현실에 대한 자각과 인간적 삶의 바탕인 이 형상전은

오로지 장경호씨의 집착에 의해 오늘까지 이어졌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작하는 날이 하필이면 울 엄마 제삿날이라 정선에서 지낼 제사를 서울로 옮겨가며 전시장을 찾았다.

전시를 이끄는 신학철선생이나 장경호씨가 형제처럼 지내는 사이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그들의 신작들을 학수고대해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학철선생의 작품들은 오래 걸리는 대작들이기도 하지만, 긴 세월 아내 병수발하다 상까지 당해 그림 그릴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분이다. 그림이 비싸게 팔려도 작품이 없어 돈 내고 기다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

더구나 두 달 전에 그리는 작품을 봤는데,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장경호씨는 워낙 칼 같은 성격의 지우기를 반복하는 작가라 완성작을 만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부터 제사 상 차릴 준비하느라 부산을 떨다, 오후6시 무렵에야 아내와 함께 전시장을 찾았다.

통의동에 있는 갤러리 '팔레 드 서울'을 나는 늘 빨래 터로 부른다. 무식한 놈의 기억법이다.

경복궁 지하철역에서 빨래터로 가다 정희성시인과 강고운시인을 만나 함께 갔다.

 

전시장에는 출품작가 신학철, 장경호, 이샛별, 성병희, 차혜림, 황세준씨를 비롯하여 이수호, 성완경, 김정대,

성기준, 배성일, 손기환, 이기정, 이선엽, 노광래, 최석태씨 등 많은 분들이 삼삼오오 모여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전시는 신학철선생의 신작 '한국현대사 광장'이 전체 작품들의 중심을 잡아 주고 있었다.

촛불시위에 몰린 군중 속에 똬리를 튼 인체가 마치 거대한 성지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강한 꿈틀거림을 느꼈던지, 내 식으로 말한다면 그 용트림하는 엉덩이에 깔려 죽고 싶었다.

아마 보수 꼴통의 미술평론가가 평했다면 이 시대 최고의 선동적 작품이라 말 했을 것 같다.

 

그리고 장경호씨의 '코리아환상'은 인체 부분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진실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성병희씨의 '아무도 모른다'는 '친절한 금자씨'가 연상될 정도로 끔찍하게 느껴졌다.

사람 목숨을 하찮게 생각하는 권력자들을 풍자하고 있었다.

 

회화 형식을 빌었지만, 마치 사회의 진실을 기록하고 파헤치는 다큐멘터리 사진 같았다.

오는 8월11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꼭 한 번 보아야 할 전시로 생각된다.

 

 

 

사진, 글 / 조문호

 

 

아래는 전시장에서 만난 분들과 뒤풀이를 기록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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