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일부터 4월1일까지 정선 귤암리 ‘동강생태체험전시관’에서 동강할미꽃 축제가 열렸다.
축제 부대행사로 정영신의 ‘장터 사람들’과 조문호의 ‘산골 사람들’사진전도 있었다.
작은 규모의 사진전이지만, 기회가 닿는 분들을 위한 정보차원에서 소식을 올렸는데,
많은 분들이 와 주셨다. 태백은 그리 멀지는 않지만 서울과 부산에서 오신 분도 있었다.
다들 반갑고, 고마웠다. 볼 것도 먹을 것도 없는 초라한 잔치에 와 주신 그 따뜻한 마음이...




전시된 산골 사람들’사진은 큰 쪽이 140cm쯤 되는 네 점을 액자 없이 벽에 붙였고,
정영신의 ‘장터 사람들’ 열 점은 다양한 크기의 액자라 이젤 위에 올렸다.
바람 불면 이젤이 넘어지기에 사진전 부스를 별도로 만들었는데, 손님 맞을 자리가 되어 주었다.




여지 것 우리 동네 일이면 아무 조건 없이 사진을 내 걸었는데,
이제부터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경비를 안 받으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 끼질 우려도 있지만,
있는 사진으로 대충 채우니 제대로 된 전시도 보여줄 수 없었다.




귤암리 인심이 야박하다며 타박하기도 했으나, 어쩔 수 없다.
공과 사는 구분할 수밖에 없는데, 부스 하나 정도의 전시라면 평균 하루 50만원 정도의 비용을 받는다.
한 사람 전시라도 사흘이면 백오십만원을 받아야 했는데, 전시 작가에게 주는 식권 한 장 없었다.



좋아하는 자판기 커피마저 매번 천원 주고 사먹어야 했는데,
그것도 돈 받고 파는 사람이 이웃집 아낙이라, 내가 더 부끄러웠다.
참여 작가는 밥을 주기로 되어 있다지만, 구걸하는 것 같아 그냥 사 먹었다.
대개 찾아 주신 손님들이 밥과 술을 샀지만, 더러는 내가 대접해야 할 손님도 있었다.
두 사람이 나흘 동안 아무 일도 못한 채. 돈만 써야하는 자체가 한심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밥값, 술값을 많이 내 주신 사진가 박병문, 이광수, 이정환씨께 감사드린다.

이정환씨는 제자 성유나씨와 함게 왔는데, 통풍으로 다리까지 절며 온 어려운 걸음이었다.
그리고 부산에서 오신 이광수교수는 내가 교주로 존경하는 분이라  송구하기 그지없었다.

동강할미꽃 축제에 온 것이 아니라, 그림바위마을에서 열리는 ‘산골 사람들’사진전을 보러 오셨지만,

가까운 지역민도 잘 찾지 않는 전시를 보기위해 멀리서 오셨으니, 더 고마웠다.




사실은 보름 전에 올 예정이었으나, 서로의 사정에 의해 전시가 끝나는 날 오게 된 것이다.

더욱이 아내와 함께 온다기에 더 기다려졌다.

저토록 기가 세고 거침없는 양반을 꼼짝 못하게 하는 분이 과연 어떤 분일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힘으로 기를 제압하지는 않을 테니, 아마 한 수 위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아내인 유재희씨를 만나보니 첫인상도 좋지만, 상대를 참 편안하게 했다.

가끔 의미 있는 말을 한마디씩 툭툭 던졌지만, 별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려 깊은 분 같았다.

너무 잘 어울리는 부부인 것 같았다.

이성적인 아내와 감성적인 남편의 차이나, 말 잘하고 하지 않는 차이처럼,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어 오히려 좋을 것 같았다,

문제는 두 분 모두 기가 세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광수씨가 집에서는 기를 죽이는 것 같았다.




이틀 동안 가리왕산휴양림에 여장을 풀고 등산도 하며 오붓한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첫 날은 사진가 박병문씨와 함께 민물탕 잘하는 ‘짐포리식당’에서 한 잔하고,

그 이튿날은 사진가 이정환, 성유나씨와 함께 그림바위마을에서 열리는 ‘산골 사람들’사진전을 보러 갔다.

그림바위예술발전소 관장이며 화가인 김형구씨 내외가 반갑게 맞아 주었는데,

전시를 보고 와서는 ‘국일관’에서 백숙을 안주로 또 한 잔했다.




이광수, 유재희씨 내외 분을 비롯하여  이정환, 성유나, 하재은씨는 부산과 서울에서 와 주셨고, 

태백에서 온 박병문씨와 정선 읍내의 신주호, 김수복, 최원희, 최성준, 김형구씨 등

많은 분들이 동강할미꽃 축제장에 들려 사진전을 축하해 주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올 해로 열 두 번째 맞는 동강할미꽃 축제가 지난 30일부터 4월1일까지

정선 귤암리 ‘동강생태체험전시관’에서 열렸다.
사실, 이 축제가 열린지는 오래되었지만, 주민들의 축제에 대한 몰이해로
상춘객을 끌어 들일 수 있는 좋은 여건에도 불구하고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




이맘 때면 동강할미꽃 찍으러 전국에서 몰려오는 사진인들 숫자 또한 적지 않아
그들을 염두에 둔 축제 기획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다.
어린이 사생대회나 할미꽃사진전 등 간단한 행사들만 반복되는 

축제라기보다 동네잔치에 가까운 수준이다.




초창기에는 강변과 산길로 이어지는 동강할미 상여 길 연출, 섶 다리 재현,
조문호의 ‘신명’ 설치전 등 여러 가지 볼거리로 야심차게 추진하기도 했으나,
번거롭다는 주민들의 반대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 개인 사진전이나 부탁하면 걸어 주었지만, 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주민들과 읍내 있는 분들까지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가능하면 축제 개막식은 봄나들이 겸 꼭 참석했다.




그러나 세월에 알려지며, 주말 상춘객이 늘어나자 그만 돈벌이에 맛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손님의 지갑을 열게 하는 것이라야 동네에서 만들어 파는 음식이나
재배한 동강할미꽃 화분 파는 게 고작인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그런데, 오랜만에 봄나들이 한 상춘객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다른 식당에서는 그냥 주는 좌판기 커피를 천원에 팔거나 음식이 비싼 거야
안 사먹으면 되지만, 목마르면 물은 마셔야 할 것 아닌가?



축제장 어디에도 생수대나 물 마실 곳을 마련해 두지 않은 채,
작은 생수 한 병을 천원에 판매한 것이다.
돈보다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군청에 민원을 제기하겠다는 분들이 여럿 있었다.




장사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기본적인 물이나 커피를 비싸게 팔면 모든 음식이 바가지란 인상부터 주게 된다.
돈만 알지 장사의 기본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 동네 터줏대감 이야기로는 장사해 남은 돈으로 일한 사람들 바닷가 회 먹으러 가는 것이 고작이란다.
'정선군청'이나 '강원랜드'에서 후원하는 금액만도 충분한데, 그 지원금은 다 어디에 쓰는지 모르겠다.




축제가 열리는 귤암리가 어떤 곳인가?


산 높고 물 깊은 두메산골 귤암리가 인심 좋은 동네로 소문났으나,
동강 댐 백지화로 생활환경이 바뀌며 변하기 시작했다,
다들 새집 짓고, 집집마다 티브이 안테나가 들어서며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
이제 인심 좋기는커녕, 야박하기 짝이 없는 동네가 되고 말았다.



귤암리 만지골의 지하수 분쟁은 이년 넘도록 이어지고 있다.
주민들을 ‘신판 봉이 김선달’이란 소리까지 듣게 하는 이 분쟁 역시
이주민에 대한 원주민의 갑 질에 다름 아니다.
‘고래 싸움에 세우 등 터진다’는 말처럼 나까지 물 사용에 지장을 받고 있다.




옛날에는 낯선 사람이 귤암리를 찾으면 뭘 먹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없는 살림이지만 옥수수나 감자를 삶아 대접하는 등 인심 좋기로 소문난 동네였다.
깊은 산골이라 사람 만나기가 힘들 때라 반가워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마을 어귀에는 ‘인심 좋은 귤암리’란 표석이 세워져 있다.




내년 부터는 동강할미꽃축제가 새롭게 태어나길 간절히 바란다.


축제기획 자체를 재정비하고, 최소한의 방문객 편의는 제공되어야 한다.
제일 먼저 해결할 것은, 이곳은 버스가 하루에 네 번밖에 다니지 않는 산골이라,
축제기간 동안 정선터미널에서 축제장까지 매 시간마다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운행하라.
둘째, 축제장 서너 곳에 물을 마실 수 있는 음료대를 설치하라.
셋째, 동전 넣고 커피나 음료를 뽑을 수 있는 좌판기를 비치하라.




이런 기본적인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한, 동강할미꽃 축제의 미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못 오게 막을 작정이다.

아래 사진은 축제기간 동안 있었던 이런 저런 모습이다,

사진, 글 / 조문호



















































































































 

 


331일까지 정선 그림바위 예술발전소에서 열려...

 

 

스크랩 /  서울문화투데이 / 2018년 03월 19일 (월) 00:09:37

정영신 기자 press@sctoday.co.kr


 

다큐사진가 조문호의 산골 사람들사진전이 지난 32일부터 31일까지 정선 그림바위 예술발전소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된 사진들은 급속한 근대화에 빠르게 망각되고 훼손된 우리네 삶과 문화가 잊혀져가고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이 담겨있다.   그리고 우리네 것을 지키야 한다는 작가의 애착도 느낄 수 있다. , 사람, 생명에 대한 사랑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어,

나이 드신 분에게는 옛 것에 대한 추억을, 젊은이에게는 옛 것의 소중함과 새로움을 안겨 준다.




 

이 사진들은 동강이 수몰될 위기에 처해 있던 1990년도 무렵부터 촬영된 사진이다.

한국환경사진가회에서 자연생태환경을 기록하기 위해 귤암리 만지산 중턱에 캠프를 마련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동강의 생태환경과 동굴, 야생화, 조류, 어패류 등 각기 전문분야 사진가들로 구성되어 투입되었을 때,

회장을 맡았던 그는 생태환경에 앞서 그 땅에서 평생을 살아 온 주민들에 더 주목한 것이다.


그는 인본을 외치며 평생 사람만 찍어 온 사진가다.

강보다 사람부터 살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타 환경단체와 다른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긴 세월의 땜 건설 논란으로 빚더미에 올라 선 농민들부터 살리자며 피해보상을 주장한 것이다.




 

그때 시작된 작업은 한국환경사진가회에서 발행한 동강환경사진집, 그리고 동강 백성들포토에세이 집이 나오며 일단락되었으나,

다른 사진가와는 달리 그는 정선 만지산 캠프에 눌러 앉은 것이다.

주민들과 살아 온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았기에, 이 전시가 주는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200011월경 그는 현지주명 400여명과 함께 명동성당 부근 천막촌에서 농성에 들어 간 것이다.

그러나 추운 날씨의 야외 노숙이란 결코 만만찮았다고 한다.

당시 자신이 관리하던, 충무로의 한국현대사진가회사무실과 강의실 탁자를 치우고,

나이 많은 분들을 모아 잠자리를 차린 것이다.

동시에 지하철 충무로역과 혜화역에서 동강 백성들사진전을 열며,

동강에 투신자살한 수동마을 김진수씨의 사연과 사진을 담은 유인물을 명동으로 오가는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동강현실 알리기에 온 힘을 쏟았다.



 

각 언론사에 알리는 보도 자료를 만들어 보내며, 심지어 청와대 김대중 대통령에게 동강백성들사진에세이 집과 함께

현 실정을 알리는 글을 보낸 것이다.


그 이튿날 문화일보사회면 톱으로 동강 살렸으면 주민도 살려라는 헤드라인을 단 기사로 크게 알려진 것이다.

자살로 이어지는 주민들의 피폐한 현실과 명동성당 앞에서 투쟁하는 농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도된 것이다.

더 반가운 것은 청와대로부터 수몰지역대책위원장을 맡은 가수리의 이영석씨 등 주민대표를 부르는 연락이 왔고,

보상안으로 주택 건설비 보조, 비닐하우스 건설비 등 실질적인 지원약속을 받아 낸 것이다.


 

그 때의 기분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이 좋았으나, 지금 생각하니 후회스러운 점도 많다고 한다.

순식간에 오래된 농가들은 흔적을 감추기 시작했고, 집집마다 티브이 안테나가 들어서며 순박한 산골사람들의 인심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당시의 구옥이란 캠프로 사용하던 집만 남았고, 국적불명의 양옥집들로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돈이 사람을 망치는 상황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들만 힘든 원시의 삶을 살라고 할 수 있겠냐며 말꼬리를 감추었다.



 


동강 댐이 취소되고 보상이 이루어진 후, 4년 동안 기록한 농민들의 삶이 바로 이번에 선보이는 산골 사람들이다.

2004눈빛출판사두메산골 사람들사진집이 나오며 열린 서울 전시는 호응을 받았으나,

정작 주민들이 살고 있는 산골분교를 찾아다닌 순회전은 별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14년의 세월의 먼지를 떨쳐내고 다시 전시되자, 주민들도 다시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의 정겨운 산촌 풍경이 반가운데다, 그 때 찍힌 집은 물론 디딜방아, 쇠죽가마, 물지게에서 비롯하여

농기구까지 사라지거나 바뀌어 버린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때 찍힌 가족이나 이웃들도 대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 살아 온 삶의 기록이 역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당시 출판된 사진집 서문에 조문호-두메산골 사람들의 초상을 쓴 미술평론가 박영택교수는 이렇게 적었다.

 

두메산골 사람들의 삶의 풍경을 기록한 사진들은 뼈저린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새삼 우리네 선조들의 삶의 모습을 환영처럼 떠올리게 한다. (중략)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평생 살았을 장소에 앉아 있거나 우연히 산 속에서 만난 사람 앞에서 잠시 멈춰서 있다. 초라한 의복에 대부분 무표정하고 무심한 자락을 온 몸에 드리우고 있다. 전형적인 시골사람들의 초상이다. 작가는 감정과 과잉의 표현을 자제하고 즉물적으로, 객관적인 시각을 가능한 유지한 채 인물에 근접했다. 그 인물은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 하지만 사실 우리가 아는 것은 매우 피상적인 수준일 것이다.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많은 것을 감추고 있는 것이 사진이다. 정면은 워낙 많은 것을 품고 있다. 우리가 이 정면에 쓰여 있는 데이터를 제대로 읽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진지한 독해가 요구되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희노애락과 감정의 표현이 물기를 잃어 바짝 말라버린 듯한, 그러나 모든 것들을 넉넉히 받아들일 표정이 얼굴에 충만하다. 얼굴은 가장 인간적이다. 얼굴은 한 개인의 정체성의 표식이자 문화적, 사회적 징후이다. 얼굴은 세상의 끝이고 시작이다. 평생을 자연에 순응하며 세상과 등지고 살아왔을 이 이름 없는 민중들의 삶과 역사는 무엇이며 어떻게 말해져야 할까? 그들이 땅을 경작하고 식량을 채집하며 강하고 질긴 목숨을 꿋꿋하게 이어온 그 내력이 우리네 전통이고 역사였음을 이들의 얼굴과 몸에서 다시 확인해보는 일은 새삼 한국인의 정체성을 사유해 보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조문호의 사진은 비로소 그들의 소멸과 망각 이후에 유일하게 남아 그들의 삶의 언어를 묘석처럼 제공해 줄 것이다.“

 

이 전시는 31일까지 이어진다.
















전시일시 :  2018년 3월2일~3월 31일

전시장소 :  G갤러리(033-563-9591)

정선군 화암면 소금강로 1029 (그림바위예술발전소)















지치고 병든 육신이 좀처럼 풀릴 낌세를 보이지 않는다.
고드름축제장의 정영신씨 장터전시 끝내며 앓게 된 몸살이 이젠 목과 가슴까지 압박한다.
부득이 병원에 끌려 갈 수밖에 없었는데, 심한 흡연도 일조한 것 같다.
죄목으론 자기신체 학대 죄라지만, 그게 내 업이라면 업인데, 어쩌겠는가?

그동안 미술감독 안애경씨 와의 ‘서서울호수공원’ 미팅 약속,
‘브레송갤러리’에서 열린 이광수교수의 사진비평집 ‘카메라는 칼이다’ 출판기념회,
‘스페이스22’에서 열린 박하선 사진전개막식, 강민시인을 비롯한 원로문인들과의 오찬 약속 등 빵구낸 일만도 수두룩하다.

다가오는 금요일은 무조건 병원을 탈출할 계획을 세워두었다.
동자동에서 해야 할 일도 한둘이 아니지만, 화암 ‘G갤러리’에서 열리는 ‘산골 사람’전에도 가보아야 한다.

전시 작가란 자가 사진들만 전해주고 전시장에 가보지 못했으니, 김형구관장 뵐 면목이 없다.
그리고 귤암리 ‘동강할미꽃축제’에도 상의할 일이 있다며 만나자고 한다.
이젠 전시 같은 가시적인 일은 만들지 말고, 즐거운 작업에만 전념하기로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사다.

이번 일만도 힘겹게 벌어 병원비로 날리고 만 셈이니, 사는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원래부터 돈과는 연이 없었으니, 손해 볼 일은 없겠지만, 돈 때문에 병을 만들지 않았는가?
옛속담처럼 국 쏟고 뭐 데는 격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달, 정선 화암의 ‘G갤러리’ 김형구 관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는 3월 2일부터 말일까지 내 사진전을 열고 싶다는 것이다.
정선에 적을 두고 있으며 귀찮다는 이유로 거절할 수 없어, 있는 사진으로 하겠다고 답했다.





정선에서 하는 전시라 이 지역 사람들을 찍은 산골 사람들이 적합할 것 같았다.
이 사진은 2000년도 무렵 촬영하여, 2004년도에는 서울을 비롯하여
당사자들이 사는 산골 분교를 찾아다니며 순회전을 했으나, 정작 화암은 하지 못했다.
당시 동면 화암리에 사시는 전동욱씨도 촬영했으나 한사람 밖에 없어 못했는데, 잘 된 것 같았다.
당시 84세였으니, 아직까지 살아 계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선 집에 보관한 그 당시 사진들이 잘 보관되었는지도 궁금했다.
필요한 사진은 다시 만들어 이 곳 저 곳 출품하기도 했으나,
처음 만든 사진은 천장 위에 처박아 두어,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14년 동안 맞바람이 통하는 천장 위에서
부엌 아궁이의 거스름까지 뒤집어썼으니 온전한지 걱정스러웠다.
고드름 축제가 끝나면 다시 오기도 힘들 것 같아 일단 G갤러리에 전해주어야 했다.






지난 17일 전시장을 정영신씨에게 맡겨두고, 사진 챙기러 만지산 집에 갔다.
사다리 타고 올라가 먼지 자욱한 액자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 청소하다 보니
온몸이 시커멓게 변해버렸다.
그런데, 먼지를 털어내고 포장을 뜯어보니, 모든 사진들이 그때 그대로였다.
단지 액자로 만든 미송나무만 색이 바랬는데, 오히려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분명, 만지산 산신령님이 도운 것 같았다.





30점 중에 20점을 챙겨두고, 다시 축제장에 나가려니 정영신씨 전화가 걸려왔다.
시간 되어 전시장 문을 닫았으니 ‘아우라지식당’으로 오라는 것이다.
아우라지 식당은 곤드레 밥이 맛있는 집이라, 시장기에 부리나케 달려갔다.
가보니 정영신씨를 비롯하여 천연 염색하는 유재순씨와 군청 문화관광과 팀장인 전상현씨도 있었다.






전상현씨를 보니 밥보다 술이 더 땡겼다.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며 소주를 까다보니 정량을 초과해 버렸다.
뒤늦게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남계원씨도 나타났으나, 그 역시 술이 취해 혀가 꼬였다.
그의 술 취한 모습을 처음 보는데, 아주 위트 있는 재미난 친구였다.






나 역시 신이나 돼지 목 따는 소리로 ‘봄날은 간다’를 불렀는데,
식당 주인아주머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평소에 그토록 점잖던 분이 어떻게 저렇게 바뀔 수 있냐는 것이다.
술이란 간을 키우는 약이기도 하지만,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술자리가 끝난 후 증산에 있는 모텔까지 가야하지만, 음주운전을 할 수 없었다.
유재순씨 방에서 세 사람이 끼어 잤는데,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 녀에게 술이 취해 덮칠 수도 있다는 말을 했더니 덮치면 더 좋다는 것이다.
정영신씨가 있으니 안심했겠지만, 나의 엽기적인 행각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이틀 날은 사진전시장 옆의 눈썰매장에서 연날리기 대회가 벌어지는 날이다.
다시 만지산으로 들어 가 야외에 걸 이젤을 몇 개 챙겨오니, 전정환군수가 전시장에 와 있었다.
기념사진 찍으며 화암에서 열릴 ‘산골 사람들’전시에 초대도 했다.
별도의 오프닝 행사는 없으나, 술 마시기 좋은 날을 택해 서울과 정선의 문화예술인들을 모아
다양한 생각들을 한 번 들어보는 좌담회를 마련하고 싶다고 했다.




봄바람 휘날리는 술잔에 꽃잎 띄워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자만 확정되면 페이스 북에 올려 관심 있는 작가들을 모아 볼 작정이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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