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저녁 무렵, 동자동 골목에 두 노인이 나와 계셨다.
이홍렬(78), 김원호(73)씨 였는데, 두 분 다 당뇨로 고생하는 분들이다.
막걸리 한 병을 보약처럼 아끼며,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드시며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팔았지만, 배우기 위해서도 몸을 팔았어." 
이홍렬씨는 ‘네가 청량리 사창가를 찍었지만, 이런 것은 모를 것’이란 투의 말씀이셨다.






이 분은 황해도에서 피난 오신 분인데, 자유당 말기의 청년 시절을 아현동 모 여대 부근에서 사셨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양동 등 도심의 음침한 뒷골목을 휘저으며 살아 일반인들이 모르는 것을 많이 보고 살았는데,

그 당시 등록금 마련을 위해 몸을 팔았던 여대생들 이야기를 했다.

돈이 필요한 여대생을 남자들과 연결시켜주는 뚜쟁이들의 벌이도 좋았다고 한다.





하기야, 그 당시는 어려운 고학생들이 많았던 시절이라, 여대생들 일자리 얻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지난한 매춘의 역사를 아무도 탓할 수 없겠으나, 아마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젠 역전 부근에 밀집된 사창가는 사라졌지만, 도처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일들이라, 별의 별 일이 다 있을 것이다,

크게 보면 돈보고 결혼하는 자체도 몸 파는 것에 다름 아니겠는가?





이 날은 ‘식도락’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한 시간 후에 세월호 리본을 만들기로 되어 있었다.
허구한 날 자는데도 졸음이 와, 한 시간만 잘 생각이었는데 일어나보니 오후3시였다.

하는 수 없어 컴퓨터를 열어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나 기웃거렸는데, 저녁거리가 없었다.

아침 겸 점심은 밥을 먹고, 저녁은 빵으로 때우는데, 지난 토요일 늦잠으로 빵 배급을 못 받은 것이다.

서울역에 있는 마트에서 일주일 분량의 빵을 사러 일어서려는데, 시나리오작가 최건모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전화였으나, 술 생각이 간절했던 터라 반갑게 맞았다.






동자동 ‘태향반점’에서 탕수육을 안주로 소주 한 잔 했다.
이 친구는 가끔 만나지만, 내 블로그를 샅샅이 보아 동자동 근황을 잘 알고 있었다.

힘이 미치는 한 도와주려 무던히도 애쓰는 고마운 친구다.

하는 일은 시나리오 작가지만,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어 사회기록과 관련되어 내가 모델이 되기도 했다.





노총각으로 힘겹게 살지만, 제 하고 싶은 일 열심히 하는 것 보니 참 보기 좋았다.

어쩌면 내가 동자동으로 들어오게 된 계기도 그가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찍은 처참한 동자동 기록을 본 후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다.






모처럼 만나 ‘인사동은 왜 나가지 않느냐?’, ‘여기서 언제까지 작업할 것이냐?’는 등 여러 가지 물어보았으나,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에 더 집중하기 위해 못갈 뿐이고, 여기가 마지막 자리 같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소주 한 병으로는 좀 아쉬웠지만, 담배를 피울 수가 없어 일어나야 했다.





남은 탕수육을 내일 먹으려고 싸 달랬는데, 방으로 가져 갈 겨를이 없었다.
커피 한 잔 마시려 매점으로 갔는데, 매점 앞에 이홍렬, 김원호씨가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김규수씨가 있었다. 안주를 펼쳐놓으니, 최건모씨가 막걸리를 사왔다.





덕분에 이홍렬씨의 몸 팔아 공부한 여대생들 이야기도 들었고, 김원호씨 사는 이야기도 들었다.

김원호씨는 젊은 시절 사고를 자주 쳐 교도소를 들락거려, 교회전도사가 사람 만들려고 그에게 시집왔다고 한다.

요즘은 서울근교의 기도소에서 사시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들린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김규수씨가 만나면 밤일도 하냐고 물었는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셨다.

그 몸으로 어려울 것 같았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거시기는 몇 센티냐? 어떻게 하느냐?‘등 원초적인 질문의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이 날은 처음부터 몸 파는 이야기가 나와서인지, 몸이 비비 꼬이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다들 독거로 외롭게 사니, 그리울 수밖에...






김규수씨는 힘든 일하다 다쳤다며, 큼직한 파스를 붙여 놓은 허리를 보여주었는데,

아마 밤일을 과격하게 치루어 다친 영광의 상처가 아닌지, 그렇다면 상대가 누군지도 궁금했다.

자기의 거시기는 가늘고 길어 여자 배꼽으로 나온 다는 우스게 소리도 했다.

지금은 마티아라는 세례명으로 착하게 살며 ‘식도락’의 설거지도 돕지만,

이자도 한 때는 교도소를 제집처럼 들락거린 별이 일곱 개나 되는 장군이다.






김용만, 홍홍임, 박희봉씨 등 여러 명이 애로영화의 액스트라 처럼 등장하였다가는 사라졌지만,

스토리가 음란비디오보다 훨씬 진해, 방으로 도망쳐야 했다.
“주여~ 더 이상 휴지에 말라죽는 자손들이 없도록 하소서”

사진, 글 / 조문호



















 

청량리 588’.

조문호 지음|이광수 해설|눈빛|136쪽|1만2000원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동 588번지. 그곳에 있던 사창가의 별칭이었다. 청량리역 주변이어서 그렇게들 불렀다.

사진작가인 저자는1984~1988년 이곳에 살면서 그곳 ‘삶’을 앵글에 담았다.

처음에는 사진기를 들이대다가 따귀도 맞았고, ‘어깨’들에게 몰매를 맞고 쫓겨나기 일쑤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곳 아가씨들도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인간’으로 대하는 사진가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미소까지 지었다.

그렇게 한컷한컷 찍힌 사진들은 ‘사창가’ 하면 먼저 떠오르는 선정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거기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광수 부산외대 교수는 이렇게 해설을 붙였다.

“사진가 조문호는 사람을 일로 보지 않았고 시공간 속에 살던 사람을 보았던 것이다. 누구는 부모 잘 만나 공주로 지내던 시절, 누구는 구로공단에서 기계보다 더 기계 같은 공순이로 살고, 누구는 588에서 창녀로 살아갈 수밖에 없던 현실 속 사람을 보았다. 멀리 시골에서 돈 한 푼 없이 올라온 후 가난한 부모와 동생들 먹여 살리기 위해 별의별 일 다 해 보다가 결국 이곳으로 흘러 들어와 삶을 꾸역꾸역 이어 가는 사람들이다. 어깨 위에 놓여진 가난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는 그 청량리역과 닮은 삶이다.”

 

▶1980년대, 아직까지 이곳은 금붕어 어항 같은 유리방이 아니었다. ‘신흥 여인숙’이란 간판 아래 나란히 앉은 여인들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다.

 

▶침침한 뒷골목, 전등 아래 다리를 꼬고 앉은 여성의 모습에서 삶의 비릿함이 느껴진다.

 

▶해가 나면 이곳도 여느 동네와 다를 바 없다. 가게 일을 보는 사람, 삼삼오오 모여 잡담하는 사람, 종종걸음으로 제 갈 길을 가는 사람.

처마 밑 고드름이 밤새 추위를 말해준다.

 

▶날이 채 풀리지 않았던가 보다. 햇살은 환하지만 두 발은 연탄화덕에 바짝 다가가 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세탁소 간판이 정겹다.

 

▶까만 밤 환한 불빛 아래 원피스를 차려 입은 여성이 문 밖 행인을 향해 추파를 던진다. 이번엔 통할까.

행인이 이미 지나쳐 온 앞 가게 여성의 표정이 대조적이다.

 

▶늦은 밤 문을 연 야식 리어카 앞에서 호객이 한창이다.

저자는 “가난이 지겨워 무작정 상경해 돈을 벌려고 곳곳을 떠돌았지만, 결국 사창가까지 떠밀려 오게 되었다며

슬피 울던 정숙이의 고운 눈망울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면서 “세월에 파묻혀 간,

그 시절 장면 장면들은 우리 사회사의 중요한 기록이고 증언이며 역사였다”고 썼다

 

 

1985.6 / 전농동588번지

“놀다 가세요~”

거짓 사랑을 구걸했지만 지나치는 이의 반응은 차가웠다.

“야- 니가 좋아서 잡는 줄 아니, 돈이 좋아 잡는다”

체념 섞인 그 녀의 절규가 듣는 이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전농동을 기록한 오래된 필름 파일을 뒤적이다 그 소녀를 다시 보았다.

그녀를 잊은 지도 어언 30여년의 세월이 되었나보다.

 

참 착하고 예쁜 소녀였다.

그토록 꿈 많은 소녀가 거기까지 가게 된 건, 가난한 부모 만난 죄 뿐이다.

그 때는 나라까지 가난했으니, 시대적 사회적 희생양에 다름 아니다.

 

그녀 이름은 김정숙이었다.

 

그 때 나이 한참 고운 이십대였으니 이제 오십대의 아낙이 되었을 게다.

가난이 지겨워 무작정 상경해 돈 벌려고 곳곳을 떠돌았지만,

결국 사창가까지 오게 되었다며 슬피 울던 정숙이의 눈망울이 아직도 선하다.

 

그러나 몸은 망가져도 살기는 그 곳이 더 편했다고 했다.

끼니 걱정하지 않고, 돈까지 엄마한테 보내 줄 수 있어 그냥 산다고 했다.

다 견딜 수 있으나, 변소 구더기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의 멸시를 견딜 수 가 없다고 했다.

 

몸 파는 창녀일지라도 하나의 직업인으로 보아주는 사회인식을 바꾸게 하자고 설득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인권을 되찾자는데 공감해 사진작업에 많은 힘을 보태기도 했다.

동등한 사람으로 봐 주는 깨어난 세상을 바라며 5년 동안 뛰었으나, 결국 실패했다.

 

90년 2월, 그 사진들을 모아 전시회를 가졌으나 주인공인 그녀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언론들은 일제히 들고 나와 사람대접 받게 해 달라는 그녀들의 목소리 보다

매춘이란 호기심에 무게를 둔 선정적인 나팔을 불어재꼈다.

 

그래서 그 전시 이후로 전농동 기록필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쳐 박아 두었다.

사진집출판 제의도 거절했다. 또 하나의 춘화 같은 이야기 거리로 변질될 것도 두려웠으나,

행여 잘 사는 그녀들의 삶이 발목 잡힐 수 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에 파묻혀 간, 그 시절 장면 장면들은 우리 사회사의 중요한 기록이고 역사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 본인들이야 알아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때가 된 듯 싶다.

아무튼 이 사진집 출간을 계기로 그 때 못한 그녀들의 목소리도 전하고 싶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한 번 만나고도 싶다.

 

​“정숙아! 혜련아!” 나의 연인이기도 동생이기도 했던, 그 때 그 사람들이 보고 싶다.

당신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첩을 보게 되면 연락 한 번 주렴.

내 비록 거지 처지일지라도 소주 한 잔 살께...

디 행복하게 잘 살기 바란다.




2014. 12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