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정오 무렵, 사진가 이정환씨의 ‘우연한 의도’가 열리는 '갤러리 브레송‘을 찾았다.
이정환씨의 사진은 처음이라 궁금하기도 했지만,

‘우연한 의도’라는 상반된 제목과 함께 페북에 올린 사진 한 장에 끌렸던 전시였다.

일이 있어 개막식엔 못 들리고, 그 이튿날 이른 시간에 찾았는데, 마침 이정환씨도 있었다.






먼저 작가노트부터 읽어 보았는데, 첫 문구에 ‘삐딱이 기질이 다분하다’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문제의식은 당연한 것이지만, 사진을 둘러보니 공감되었다.

무차별적인 도시개발에 대한 분노가 곳곳에 도사렸다.





그의 지난 사진들은 보지 못했지만, ‘미아리 이야기’, ‘골목은 살아있다’, ‘북촌’, ‘사라지는 교남동’

등을 발표한 것으로 보아 도시재생 문제에 따른 장소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진듯했다.

사진에 나타난 공간들은 대부분 우연히 발견한 것이라지만, 늘 찾아왔던 대상이라 의도된 사진이나 마찬가지다.






추억의 공간이기도 했던 ‘동대문 운동장’ 자리에 마치 우주선같이 버틴 DDP건물 찍은 사진 한 장이 모든 걸 말해주었다.

이질적으로 보이는 서울시청사 역시 유령도시처럼 보였다.





어릴 때부터 살아왔다는 미아리 전경의 사진에서는 그나마 아련한 향수가 밀려났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긴 하지만, 아직은 골목골목의 정취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멀리 버티고 있는 아파트 무리가 점령해 오면 그마저 끝이라는 듯 코딱지 같은 건물들이 겁먹은 듯 웅크리고 있었다.






그의 전시는 망가진 서울만 찍은 것이 아니라, ‘표석을 찾아서’, ‘기억’, 아일랜드‘ 등 네 가지로 분류되고 있었다.

그 중 제주도에서 찍은 ’아일랜드‘는 평범한 풍경이었지만, 4,3의 원혼이 떠도는 듯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웠다.

카메라를 잡은 사진가의 마음에서 일었던 느낌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는 풍경조차 삐딱하게 보고 있으니, 타고 난 삐딱인 것 같았다.

모든 사진에서 사라짐에 따른 회한이 서려있었다.







그런데, 이정환씨의 이력을 살펴보니 유별났다.

영화제작자에서 칼럼리스트 등 다방면에 재능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영화에서는 컴퓨터 그래픽 1세대라고 했다. 그러니 사진적 대상을 보는 카메라아이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망가짐에 대한 아쉬움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 있는 전시가 될 것 같다.





전시장에서 김남진관장을 비롯하여 오윤석, 강레아씨를 만나기도 했는데,

밥 먹으러 가자는 이정환씨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따라갔다.

전시장에서 와인도 몇 잔 얻어 마셨는데, 소주를 두병이나 깠으니 낮술로 좀 과하지 않나 싶었다.





밖으로 나오니, 아직 살아남은 박근혜잔당의 발악하는 스피커 소리에 귀 고막이 터질것 같았다.

너무 시끄러워 무슨 소리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는데, 이런 소음은 법에 걸리지 않나?

미제를 너무 좋아해, 차에 달고 다니는 성조기도 꼴볼견이었다. 분명 정신병자들 같았다.



 


액자집에서 전시 준비에 바쁜 박종우씨를 만났고,

다시 전시장에 들려 석현혜, 김동진, 이재갑씨를 차례대로 만났는데,

뜻밖에도 정영신씨가 등장했다. 일이 있으면 서로 연락할 때가 많지만,

이처럼 우연히 만날 때도 더러 있는 걸 보니 소통에 다소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반갑기도, 술도 거나해 빌어먹는 너스레를 좀 떨었더니, 그가 대꾸하는 애교가 정겹다.

“제발 아는 체 좀 하지 마세요” 아는데 어찌 모른 척 하리오.





그나저나 작가의 형편이 여의치 않아 팜프렛도 만들지 못했는데, 술까지 얻어먹었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뒤늦게 들은 이야기지만, 몇 점이라도 팔렸다니 다행이다 싶다.





이 전시는 31일까지 열리니, 한 번 들려보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6일 정오 무렵, ‘류가헌’에서 황규태 선생을 뵙기로 약속했다.
점심같이 먹자는 선생의 연락에 찾아 나섰는데, 좀 늦어버렸다.
그 곳에서 황규태선생 전시가 있는 것으로 여겼으나, 문선희씨 '묻다'란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장엔 아무도 없었는데, 의외의 사진을 보며 차분히 감상할 수 있었다.





문선희씨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어나, 사진가의 문제의식이 돋보였다.
조류 인플루엔자로 살 처분된 가축의 매몰지를 찾아 다니며 찍었는데,
섞어가는 땅의 디테일이 마치 한 폭의 추상화처럼 아름답기도, 섬뜩하기도 했다.
인간의 잔혹성과 환경오염 현장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는데, 사진이 그 답을 묻고 있었다.

12월 3일까지 전시가 열리니, 시간내어 한 번 볼만한 전시다.



 


황규태선생을 찾아 2층에 올라가니, 거기서 기다리고 계셨다.
메시지를 보내고 계셨는데, 전화번호를 잘 못 알아 남의 전화에 메시지를 계속 보냈다.
황송하기 그지없었으나, 멋쩍은 웃음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 한정식 선생께도 연락되어 같이 자리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황규태 사단장의 멋진 찝에 편승할 기회가 생겼다.
내 좋아하는 음식을 아신 듯, “돈까스가 좋으냐 중국집이 좋냐”고 물었다.
두 선생님 계신데 내가 결정하는 것이 난처했으나, 빼갈 생각에 중국집이 좋겠다고 말했다.
동네의 가까운 중국집에 갈 줄 알았는데, 세검정의 ‘하림각’으로 가셨다.





지름길인 청와대 길로 들어섰는데, 언제나 드라이브 코스로는 멋진 길이다.
문정부 들어서 쓸데없는 검문을 폐지해 시민들의 호응을 얻고 었으나,
아직까지 청와대 주변에 서성이는 기관총 든 경찰의 모습은 여전했다.






위협적이고 꼴 볼견 풍경이 지나 칠 때마다 걸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정식선생께서 그 문제를 지적하셨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얼마든지 방위할 수 있지 않냐?’는 거다.
지켜보는 국민만이 아니라, 경호받는 당사자도 기분 좋은 풍경은 아니다.






하해와 같은 사단장님의 은혜로 고급 청요리집에서 오랜만에 목에 때 벗겼다.
유산슬 에다 빼갈까지 곁들인 과분한 점심을 먹었다.
커피는 ‘류가헌’에 와서 마시라는 조예인씨의 배려에 다시 돌아왔다.
난 자판기 스타일이라 커피 맛은 잘 모르지만, 냄새는 죽였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탁자에 두 권의 사진집이 올려졌다.
이한구씨의 ‘군용’과 박종우씨의 ‘DMZ’로 모두 국방부에서 소장해야 할, 질 높은 사진이었다.
이한구씨의 ‘군용’사진집은 오래 전에 본 사진이지만,
이번에 독일에서 출판 된 박종우씨의 ‘DMZ'사진집은 두 선생께서도 감탄하셨다.
12월 26일부터 ‘류가헌’에서 열릴 박종우씨의 “DMZ'사진전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 있는 전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사단장께서 입 호강, 눈 호강 다 시켜주면서, 하사금까지 내려주셨다.
다들 겨울의 쪽방이 추워 고생하는 줄 알지만, 사실은 겨울보다 여름이 더 힘들다.
겨울은 방이 작아 전기장판과 담요만 있으면 걱정 없지만,
더운 여름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30만원을 주시며 오리털 침낭을 꼭 사야한다고 당부하셨는데,
그 돈으로 동자동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실까 걱정스러우신 모양이다.
그러나 침낭은 그 날 오후 ‘나누미’에서 쪽방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되어있었다.
침낭은 쪽방 사람들 보다 노숙하는 친구들이 더 절실한 물건인데 말이다.






그 날 나누미 행사장에서 침낭을 받아 깔아보니 사이즈가 내 침대와 똑 같았다.
그러나 담요 덮고 자유롭게 자는 것이 좋지, 굳이 침낭에 묶여 잘 필요는 없는 듯 했다.
노숙하는 친구 중에 옷이 제일 허술한 친구에게 건네주기 위해 챙겨두었다.





그러나 사단장께 받은 하사금 사용처를 아직까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오리털파카’를 사 입는 게 뜻을 받아들이는 거지만, 옷은 있는 옷만 해도 죽을 때까지 입고도 남는다.






그 돈으로 정영신씨와 장터 여행이나 떠났으면 좋겠으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엉뚱한 일이 생겨버렸다.


오래전부터 고환에 통증은 있었으나 잠간 잠간이라 견뎠는데,
이젠 통증이 심하게 지속되고 붓기까지 해 병원에 가보아야 했다.
여지 것 병은 모르는 게 약이라며 모든 검진 자체를 거부해 왔는데, 걱정스럽다.
난치병이라면 진통 치료만 받을 작정이다.

아무튼 별일 없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임진강


박종우展 / PARKJONGWOO / 朴宗祐 / photography
2016_0513 ▶ 2016_0528 / 공휴일 휴관



박종우_비무장지대 Ⅰ_아카이벌 디지털 프린트_57×85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30506b | 박종우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6_0516_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_10:00am~07:00pm / 공휴일 휴관



사진·미술 대안공간 스페이스 22

SPACE 22

서울 강남구 강남대로 390 미진프라자 22층

Tel. +82.2.3469.0822

www.space22.co.kr


임진강 '분단의 강'에 관한 풍경기록 ● 임진강은 분단의 강이다. 이 땅의 분단으로 인해 물줄기가 나뉜 것이 비단 임진강뿐만이 아니건만 이 강처럼 민족의 한을 품고 흐르는 물줄기는 없다."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 뭇 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가니 /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50년대 북쪽에서 만들어진 노래에 나오듯 북한 사람들 눈에도 임진강은 눈 앞에 둔 고향을 갈 수 없어 '원한 싣고 흐르는 강'이다.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임진강변의 생경한 풍경은 당연스런 풍경이 되었고 그게 그대로 굳어지며 임진강의 이미지가 되었다.


박종우_비무장지대 Ⅱ_아카이벌 디지털 프린트_57×85cm_2009


2009년 9월 초순, 경기도 연천의 임진강변을 지나던 중, 수 백 명의 군인들이 얼굴에 하얀 마스크를 착용하고 줄을 지어 강변을 수색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임진교 다리 앞에는 '임진강 실종사고 합동지휘소'가 차려져 있었다. 전날 북한에서 사전 통보를 하지 않고 임진강 상류에 위치한 댐을 방류하는 바람에, 갑자기 불어난 강물로 인해 야영객들이 실종된 사고였다. ● 그 때까지 내가 임진강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북한 쪽에서 흘러온 강물이 비무장지대를 통과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며, 저 아래 하류 어딘가에서 한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빠져나간다는 것이 전부였다. 발원지가 북한 땅이라면 거기는 어디쯤인지, 지류와 지천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주변 풍경은 어떠한지, 남쪽으로 내려온 후의 강변에는 왜 그토록 여기저기 철조망들이 둘러쳐져 있는지, 그야말로 임진강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 7년 전 임진강변에서 군인들이 실종자를 수색하는 비현실적인 장면을 우연히 마주쳤을 때, 나는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기게 되었는지 궁금했고 그 강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 날부터 2011년까지 2년간, 나는 집중적으로 임진강을 찍었다. 그리고 2012년부터는 가끔씩 찾아다니며 강의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2010년,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휴전 후 처음으로 비무장지대 내부를 기록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애초의 계획은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DMZ 내 모든 GP(일반전초)를 포함하여 전체 지역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촬영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터진 천안함 사건 때문에 모처럼 얻은 기회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진행 중인 작업에서 그대로 손을 떼기엔 처음 현장에서 마주쳤던 충격과 그 모습을 그대로 기록해두고픈 바램이 너무 컸다.


박종우_연천군 남계리_아카이벌 디지털 프린트_57×85cm_2016


젊은 날부터 여러 나라의 구석구석을 떠돌았던 나는 소수민족들의 사라져가는 문화가 아쉬워 그 흔적들을 기록해왔다, 정작 내 땅에서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모든 문제의 근원인 '분단'과 그로 인해 변해버린 '흔적'을 찾는 것은 이 나라에 발붙이고 사는 사진가로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기왕 시작한 일을 더 벌이기로 작정하고 「비무장지대」 외에도 「임진강」, 「한탄강」, 「NLL」, 「한강하구」, 「민통선」, 「남방한계선」, 「용치」 등 '분단의 풍경'에 관한 여러 작업을 동시다발적으로 이어갔다. 이 책에 실린 임진강은 그 여러 프로젝트의 첫 번째 결과를 내놓는 것이다. ● 임진강을 기록한다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간인 통제구역에 닿아 있어 대부분이 출입금지 지역이고 미확인 지뢰지대도 많다. 운이 좋아 강에 접근한다 하여도 곳곳이 군사보안과 관계되어 있어서 자유롭게 카메라를 댈 수가 없었다. 특히 강의 북쪽은 군의 허가를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다. 내 나라 땅이지만 찍고 싶을 때 마음대로 찍을 수 없는 강이 바로 임진강인 것이다.


박종우_파주시 율곡리_아카이벌 디지털 프린트_108×186cm_2015


임진강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국경을 따라 흐르는 강'이다. 동해안 원산만에 가까운 산악지대에서 발원하여 아호비령산맥과 마식령산맥 사이 250여 킬로를 흘러 한강과 합쳐지고 서해로 빠져나가는 이 강은 비무장지대를 관통하여 남쪽으로 내려온다. DMZ 지역은 임진강 전체에서 뛰어나게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구간이기도 하다. 비무장지대를 남하한 임진강은 한탄강을 받아들이면서 돌연 방향을 바꿔 서쪽으로 흐른다. 남과 북의 경계를 따라 평행으로 흐르는 이 구간에서 임진강은 군사적으로 주요한 자연경계를 이루었다. 남쪽 땅을 흐르는 임진강은 전체 길이의 절반에 못 미치며 그 중 다시 절반 정도의 강변에 철조망이 둘러쳐진 채 접근이 통제된다.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 중의 하나이건만 강변으로 다가가는 일조차 쉽지 않은 것이다. ● 촬영을 위해 임진강 주변을 다니다보니 전방지역이라 제대로 된 지도를 찾을 수가 없었고 천 년 이상의 역사를 담고 있는 강변의 수많은 유적지들이 그대로 버려진 채 현대의 참호 속에 묻혀버리거나 농경지로 뒤바뀌는 곳이 많아 안타까웠다. 가까이는 해방 무렵부터 저 멀리 삼국시대까지 역사 속에 남겨진 지명들 하나하나를 사료에서 찾아가며 지도로 만들어간 작업은 임진강의 기구함을 알게 되는 시간 여행과도 같았다. ● DMZ를 넘어온 임진강이 한탄강과 합류하여 서쪽으로 흘러가는 선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 남과 북의 실질적 국경과 거의 일치한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이 선에는 미군들에 의해 캔사스 라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가상의 경계선 구실을 했다. 그러나 그 이전의 역사로 올라가면 임진강은 삼국시대 이래 끊임없이 국경이었고 전쟁터였다. 지금도 임진강 양안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서있는 고구려와 백제의 보루는 그 전쟁의 시기를 말없이 전하고 있다. 이 전쟁터에서 고구려 광개토왕은 백제군을 대파시켰고 신라 진흥왕은 강의 남안을 점거하여 고구려와 대항했다. 신라 문무왕도 이 강을 건너 평양으로 진격했다. 나당연합군의 김유신이 소정방의 당군을 구원하기 위해 북상했던 길도 이곳이었다.


박종우_파주시 동파리_아카이벌 디지털 프린트_57×85cm_2011


그나마 임진강이 평화로운 모습을 찾았던 시기는 조선시대였다. 지금은 쓸쓸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임진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하게 수운이 이뤄지던 강이었다. 서울의 마포나루와 임진강 고랑포 사이에는 큰 돛단배들이 물자를 가득 싣고 오갔고 거기서 다시 작은 배로 갈아타고 훨씬 북쪽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조선의 선비들 사이에선 임진강 유람과 뱃놀이가 하나의 유행이었고 특히 중국 적벽부의 예를 따라 임진강 적벽을 배로 구경하고 시를 짓는 놀이를 많이 했다.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미수 허목을 비롯하여 겸재 정선, 다산 정약용이 이 대열에 끼었다. ● 그런 모습을 다시 보게 될 날은 언제쯤일까? 남쪽 땅에서 임진강은 매우 유려하게 흐른다. 양쪽에 철망을 두르고 있지만 강물은 어느 한곳 머뭇거림이 없이 유장하게 흘러 한강과 만나고 다시 바다로 빠져나간다. 초평도 앞 덕진산성에서 부드러운 곡선으로 굽이치는 임진강을 바라보면서 나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강변에 나와 물장구치며 살아가는, 그런 강의 모습을 꿈꾼다. ● 끝나지 않은 전쟁이 60년을 넘어서면서 임진강을 터전으로 삼고 살아온 사람들은 이제 많이 사라졌다. 가끔 강 근처에서 눈에 띄는 사람들이라야 도시에서 온 낚시꾼들이나 군인들이 대부분이다. 이번 작업에서 임진강을 풍경 위주로 기록하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천 년 전 국경의 강이 오늘날에도 똑같이 '경계를 따라 흐르는 '으로 남아있는 현실은 역사의 반복을 증명한다. 그런 땅에서 나고 자란 임진강 주변의 주민들은 이 강이 분단의 강, 한의 강이라는 인식을 넘어 희망의 강, 통일의 강으로 변하기를 염원한다. 하지만 그건 주민들의 바람일 뿐, 직접 만나는 임진강의 모습은 그저 슬픈 얼굴일 뿐이다. ● 내가 기록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임진강의 모습이다. 단언컨대 지금과 같은 임진강의 모습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 저 철조망이 모두 걷히고 임진강이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는 날이 오면 한때 저 아름다운 강이 겪었던 분단의 아픔을 증거할 수 있도록 오늘의 슬픈 풍경을 기록해둔다. ■ 박종우



Vol.20160513a | 박종우展 / PARKJONGWOO / 朴宗祐 / photography


 

7월3일 오후7시, ‘갤러리 브레송’에서 김상훈씨의 ‘살기 품은 풍경’전이 개막되었다.
전시와 함께 눈빛 사진가선 열네 번째 사진집 ‘가자전쟁-미로의 벽’도 출간되었다.

가자지구의 참상을 기록한 사진들은 포화에 물든 전장의 긴장감이 가득했다.
분쟁지역의 아픔에 앞서 한 사진가가 목숨을 걸고 기록한 장면 장면들이라 존경심마저 일었다.

 

전시장에는 김남진, 김보섭, 엄상빈, 이규상, 박종우, 신현림, 이규철, 박순기, 장 숙,

곽명우, 채승우씨 등 50여명의 사진인들이 사진을 관람하며 전시를 축하했다.

나는 김상훈씨를 처음 알았다.
신문, TV는 물론 사진잡지 한 권 사보지 않았으니, 사진뿐 아니라 모든 정세에 어두웠다.
10여일 전 아내에게 등 떠밀려 페이스북에 발 들여놓으므로, 이 전시도 알게 된 것이다.

덕분에 사우들을 만나 술 한 잔 했는데, 사진상의 무성한 뒷이야기에 부화가 치밀었다.

아마추어 단체의 공모전 비리논란만도 부끄러운데, 프로들의 사진상까지 한몫한 것이다.

하기야 여지 것 수상자 명단이 오를 때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란 생각은 떨칠 수 없었다.

작품의 질은 차지하고 인맥으로 엮여온게, 오랜 사진사와 같이 하기 때문이다.

한 때는 원로사진가들이 편 가르기를 하더니, 이젠 그의 직계 제자들이 이어받았다.

어떤 원로사진가는 영향력 있는 큐레이트를 앞세우며, 모두들 끼리 끼리 논다.

그 기득권에 밀려난 아웃사이드들만 설 곳이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진가들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나, 왕따가 두려워 말 못할 뿐이다.
나 역시 모두들 가까운 분들이라 망설였으나, 늦었지만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다.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가?
제발! 사진찍는 사람들 쪽 팔리는 일은 그만하자.
이젠 소신 있게 일 하는 능력 있는 운영자들이 나서주어야 한다.

김상훈씨처럼 목숨 걸고 찍는 유능한 사진가들에게 힘 실어주는 사람 말이다.

돈 명예, 죽고 나면 다 무슨 소용인가?
제발 우리 사진들을 넓은 안목에서 껴안아주자.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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