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

손은영/ SONEUNYOUNG / 孫銀英 / photography

2023_0706 2023_0831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27_Ed.2/10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80×110cm_2020

손은영 홈페이지_soneunyoung.com

인스타그램_@_young_eye

 

주최,후원 / 서울대학교 유전공학연구소

 

초대일시 / 2023_0706_목요일_11:30a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_10:00am~04:00pm

 

 

서울대학교 유전공학연구소

Seoul National University

Institute of Molecular Biology and Genetics

서울 관악구 관악로 1 서울대학교 1051

imbg.snu.ac.kr

 

밤에 본 집 손은영은 서울과 군산 등 한국의 도시 주변의 자리한 작고 납작한 집들을 촬영했다. 어두운 밤으로 둘러싸인 집의 외관을 인공의 빛이 환하게 비춰주고 있어서 마치 인물을 촬영하듯 하나씩 집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로인해 집은 인격을 부여받은 존재가 되어 자립한다. 누군가의 초상처럼 자리한 낮은 집들은 낡고 누추한 대로 기꺼이 사람의 보금자리를 기품 있게 만들어 보인다. 가능한 자신의 정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는 이 정직한 집은 가장 기본적인 집의 외관과 구조만을 뼈처럼 드러낸다. 지붕과 벽, 창문 이외의 다른 장식은 거의 없는 집이다. 도로나 길가와 인접한, 그렇게 무방비로 노출된 집들은 출입구를 숨긴 체 밋밋한 벽만을 창백하게 보여줄 뿐이다. 다만 몇 개의 창이 있고 외부의 시선과 접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구조물이 창문으로 붙어 일종의 방어벽을 만들고 있다. 이 어설프고 불안한 시설물은 기능적인 역할보다는 심리적인 방어기제로 작동하는 편이다. 기이한 색상의 페인트로 칠해진 벽은 그만한 강도를 지닌 지붕 색과 강렬한 대조를 이루면서 너무 얇고 평면적으로 펼쳐져있다. 벽은 그 집에 사는 누군가의 등을 연상시킨다. 혹은 타자의 시선에 대책 없이 드러나 버린 살처럼 민망하면서도 관능적으로 빛난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37_Ed.3/15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0

사진이란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다시 보여주는 일일 텐데 그렇게 자리한 대상 자체가 지닌 묘한 시각적인 힘을 작가는 날카롭게 찍어낸다. 비록 더없이 소박하지만 충분히 흥미로운 구조와 형태, 매력적인 색채를 품고 있는 레디메이드로서의 이 건축물/집의 외관은 그 자체로 당당한 회화작품처럼 다가온다. 흡사 색채들의 콜라주로 이루어진 색면 회화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름의 조형적인 매력을 간직한 오브제를 선명하고 밀도 있게 건져 올리는 감각이 돋보인다. 이 사진은 그러한 작가의 안목이랄까, 미에 대한 묘한 감수성의 결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사진에 들어와 박힌 대상보다도 그것을 다시 보여주는 작가의 시선, 안목, 조형감각이 우선하는 사진이라는 생각이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45_Ed.2/5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20×160cm_2020

고층 건물 아래에 마지못해 끼여 있거나 허름한 골목길 모퉁이 어딘가에 뜬금없이 박힌 이 작은 집들은 길옆에 바짝 붙어 서서 각박한 생애의 고단함을 스스로 방증하고 있다.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다소 생뚱맞은 색채와 기이한 형태가 역설적으로 빚어내는 조형도 정형화된 질서에서 벗어난 낯선 미감을 발화한다. 그것은 소외되고 주변부화된 것들의 간절한 반짝임이고 이는 집과 창문으로 발광하는 따스한 빛이 포개지면서 보다 강화된다. 지붕과 벽,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몇 개의 창문만이 집을 집이게 한다. 이 집들은 현재 번화한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가옥구조이자 아파트와 고층 건물의 현란함 속에서 뒷걸음질 친, 지난 시간대의 집들이자 서서히 사라져가는 건축이다. 이상하고 키치적인 건물이자 주어진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필사적으로, 불가피하고 요령껏 만든 집이다. 그래서인지 사진으로 다시 보게 되는 이 집들은 현실감이 줄어들고 마치 영화나 드라마세트장과도 같은 느낌을 부여한다. 사람이 거주하는 현실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거의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장면이다. 밤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기에 그러한 느낌은 보다 더 고양된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53_Ed.2/10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80×110cm_2021

동시에 이 사진은 평범한 주변의 일상 풍경이 특별한 존재로 탈바꿈 하는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작가는 일상적으로 접하는 현실 안에서 어딘지 이상한 파열음을 내는 순간, 장면을 만났고 이를 관찰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익숙한 공간 안에서 마주한 집의 외관에서 어떤 낮설음과 이상한 욕망과 충격을 건져 올려 찍는다. 눈에 보이는 광경을 넘어선 다른 어떤 것을 암시해주는 순간을 사진으로 재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찰나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가깝다. 작가는 밤에 유독 특별한 순간, 장면이 되어버린 것을 건져 올리고 일상과 일상 너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느낌이 사진 속에서 공존하도록 배려한다.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늘상 현실의 풍경을 바라보지만 그 안에 감춰진, 그것이 두르고 있는 독특한 순간의 모습은 잘 보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란 그것을 보게 하는 이들이고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일상속의 비일상, 현실 속의 비현실, 사물 속의 꿈, 풍경 속의 또 다른 세계가 이어져있는 것을 보는 일, 보게 하는 일이다. 작가는 그렇게 현실계에 은밀하게 숨겨진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55_Ed.2/5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20×160cm_2020

도시 공간에 자리한 모든 사물들은 침묵하는 부동의 것들이다. 몸은 있지만 입을 가지지 못해 발화하는 음성은 없지만 그래서 고막에 와 닿는 소리는 없지만 분명 사물은 표면과 질감으로 인간의 말과는 다른 말을 건네기도 한다. 문법과 규칙이 소거된 그 상형문자 같기도 한 이상한 문자, 말은 차갑고 완고하게 사물의 피부에 문질러져있다. 낯선 집의 외벽은 다양한 흔적과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잔뜩 서려있고 그것과 함께 했던 누군가의 체취와 지문이 저부조의 층을 만들며 눌려있다. 그래서 사물의 피부에 눈을 주면 사물의 생애는, 그 역사는 매개 없이 그대로 다가와 안긴다. 무수한 사물들로 채워진 도시는 그런 의미에서 거대한 텍스트이자 관능적인 몸들이다. 시선으로 읽고 마음으로 상상하는 텍스트로서의 풍경이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사물들 속에서 사는 일이고 사물을 관찰하는 관찰자가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자신을 둘러싼 공간, 환경을 질문하는 일이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61_Ed.2/5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20×160cm_2021

작가는 적극적으로 그 도시의 내부로 잠입하면서 무엇인가를 관찰하고 찾아낸다. 그녀가 찾아낸 것은 어둠 속에 박힌 작은 집들이다. 밀폐된 벽을 성처럼 두르고 소박한 불빛을 등댓불처럼 방출하는 그 집들의 벽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삶의 뒷면을 보여줄 뿐이다. 앞이 부재한, 따라서 표정이 지워진 뒷모습은 보는 이의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그것은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져야 하는 정면보다 더 정직하다. 집이란 공간도 그 내부의 인테리어나 살림살이보다 그 모든 것을 보자기처럼 죄 감싸버린 벽에서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을 볼 수 있다. 작가는 그 벽 앞에서 들리지 않는 음성을 듣고 보이지 않는 집 안 사람들의 몸의 놀림을 보고 있다. 상상하고 있다. 침묵으로 절여진 집의 외벽이란 경계를 마주하면서 그 피부와 피부 너머를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64_Ed.2/10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60×120cm_2021

인간의 자취가 사라진 이 빈 풍경에는 이상한(?) 건물과 집의 내부에서 부드럽게 빛나는 불빛을 전해주는 창문만이 무거운 침묵 속에 놓여있다. 풍경이라기보다는 차갑고 즉물적인 정물의 느낌을 받는다. 다만, 보는 이들은 밝은 창문으로 인해 살림살이의 흔적, 사람의 자리를 은연중 상상하게 한다. 햇빛이 모였던 창이 밤이 되면 다시 안의 빛을 밖으로 방사한다. 그것은 막막하고 절대 암흑의 공간에 고립된 집들이 외부에 보내는 구원의 신호와도 같다. 생각해보면 모든 집들은 타인에게는 무척이나 완강하고 폐쇄적이다. 사람들의 최종 귀착점은 결국 각자의 집이지만 그것은 지극히 사적이고 그만큼 내밀하고 고독하다. 그래서 타자의 집은 타자만큼, 그보다도 타자적이다. 더구나 전통사회와 같은 공공의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 모호한 공동체가 무너진 이후 도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타자에 대한 의구심과 경계심을 보이면서 이를 집의 구조를 통해 반영한다. 아파트 공간이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아파트는 기계와 같은 기능 복합체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85_Ed.2/10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60×120cm_2021

반면 손은영이 사진으로 담은 집은 단독주택이자 현재의 거주 공간에서 낙후되어 밀려나고 퇴락한 것들, 빈한했던 지난 시절의 흔적을 아직도 간직한 것들로서 가난하고 소박한 살림을 숨기지 않는다. 벽으로 감싸인 납작한 집들은 방이 있음을 암시하는 창문과 그 안에서 사람이 살고 있음을 발신하는 불빛이 새어나온다. 작가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 저런 집들이 존재하고 그 집에 분명 사람이 살며 생을 영위하고 잠이 들고 꿈을 꾸고 내일을 도모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는 작가가 보여주는 세상의 이 집들, 밤을 배경으로 고독하게 직립한 집의 외관을 통해 그 안에 있는 누군가의 삶과 생애를 기억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이 사진들이 "상처 입은 인간에 대한 위로"가 되고 싶다고 한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89_Ed.2/5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20×160cm_2021

사실 작가는 이 빈집들을 촬영한 다음 후보정을 통해 창에 조명을 기입했다. 그래서 흡사 실제 전기불빛이 퍼지는 듯한 허구를 만든다. 집들은 정면에서 빛을 받고 있다. 지붕과 벽이 어둠 속에서 돌출하듯 밀고 나온다. 이 집들은 주변 풍경으로부터 고립되어 있거나 밀려나온 듯하다. 주변 풍경에 비해 이질적이고 생경한 외형을 간직하고 있는 어색하면서도 안쓰러운 이 집들은 또한 그런 사람의 초상, 생애를 대리한다. 반면 볼품없어 보이는 집의 외관과는 달리 작은 창문을 통해 나오는 조명의 불빛은 마냥 환해서 무척이나 당당하다. 그것은 자신의 가난에 기죽지 않는 자존심으로 견디고 있는 매 순간을 연장시킨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49_Ed.3/15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0

이처럼 작가는 이미 존재하는 도시의 풍경, 작은 집을 오브제 삼아 흥미로운 풍경, 정물을 구성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레디메이드미학과 연루되면서 절묘한 구성과 기이한 형태, 매력적인 색채들의 조화로, 이상한 조합으로 만들어낸 예기치 못한 미이고 조형이다. 사진이 란 이미 존재하는 것의 피부에 달라붙어 이를 떠내는 일이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너무 낯설고 이상한 아름다움을 무의식적으로 건져 올리면서 사진/회화의 구분을 무의하게 가로질러 가는 시각이미지를 선사한다. 벤야민이 언급한 것처럼 인간의 길들여진 시선과는 다른 사진이라는 기계적 시선으로 인해 가능한 초현실적인적인 힘을 누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진은 가장 보편적이고 익숙한 사진에서 출발하지만 동시에 그 비근한 소재에서 찾아낼 수 있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지점을 예민하게 지각시켜주는 사진이다. 무엇이라 설명하기 힘들고 규정하기 어려운 묘한 느낌과 모종의 기운이 어둠 속에서 밀도 있는 공기의 층으로, 몸으로 휘감기는 안개처럼 잔뜩 피어오르고 있다는 생각이다. 작가는 바로 '그것'을 찍고 싶었던 것 같다. 박영택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33_Ed.3/15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0

현대인들을 일컬어 집 잃은 존재 homeless being 라고 한다. 집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집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가 살기 위하여 지은 건축물 등을 말한다. 단지 생명 유지가 집의 역할의 전부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집이란 한 인간의 태어나고 성장하는 생물학적인 장소이자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사회의 규범과 질서를 배우고 세상을 알아가는 사회적 장소이다. 이와 더불어 집은 모든 개인적인 행위들이 일어나는 지극히 일상적 장소이기도 하다. 이처럼 주거 공간, 즉 집으로 불리는 건축물은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07_Ed.2/10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80×110cm_2020

집은 인간이 거주하는 물리적인 공간이지만 개인의 경험과 정서가 결합하면서 가족 구성원과 추억을 공유하고 미래의 꿈을 함께 하는 삶의 중요한 터전이다. 즉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인간 실존의 본질이자 존재의 기본적인 특성을 집에 거주하는 것으로 보았다. 집은 단순히 우연히 살게 된 가옥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에든 있는 것이거나 교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의미의 중심인 것이다. 따라서 집은 외부와 나를 구분 지어주는 경계이기도 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75_Ed.2/10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80×110cm_2021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집은 이런 정서적이고 정신적 의미보다는 경제적 가치의 척도가 되어버렸다. 젊은 세대는 삶의 목표를 집을 마련하는 것에 두었고 집을 마련하기 위해 일을 한다고 대답한다. 점점 갈수록 생업에서 돌아와 내 몸 편히 쉴 수 있는 집을 마련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집의 가치가 인간 실존의 문제보다 상위에 군림해버렸다. 몇 평의 집에 사는지, 자가인지 월세인지, 아파트인지 연립인지, 강남인지 어느 동네인지 등에 따라 한 인간의 능력과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었고, 부모 세대는 자식에게 집을 물려줄 수 있는지에 따라 능력의 지표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46_Ed.3/15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0

우리는 어떤 집을 욕망하는가. 비록 집이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건축물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삶에 있어서 가족 구성원들의 필수적인 정서적인 교류 공간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하면서 '밤의 집'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바슐라르가 지적한 대로 실제로 사람들이 거주하는 모든 공간은 본질적으로 집이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다고 했듯이 다양한 형태의 집들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기존에 생각하던 '전형적인' 주거 공간과는 달리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밤의 집'에서 일관되지 않는 거주 구조를 보여주고 싶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직업으로 인해 가족과 떨어져 지냈던 기억이 있어서 가족에 대한 애착과 온전한 가정에 대한 그리움이 적지 않았다, 어둠 속에 자리를 잡은 집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 사는 가족이 보이는 듯하다. 비록 화면에는 사람은 부재하지만, 창문 밖으로 새어 나오는 빛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족 간의 대화가 들리는 듯했다.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지만 엄마의 뱃속과 같이 평온하면서 가장 사적이고 소중한 공간으로 보이도록 충만한 색감을 많이 사용하였다. 밤의 공간 속에서 찬연한 익명의 집들은 아름답게 빛나는 존재의 집으로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 '밤의 집'은 소유의 대상으로 전락한 집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고 현재를 살아가는 집 잃은 영혼을 위로하는 따뜻한 빛을 담아내고 싶었다. 손은영

 

은폐된 잉태

 Concealed Conception

박설미展 / PARKSEOLMI / 朴雪美 / photography

 2022_1116 ▶ 2022_1122

박설미_은폐된 잉태 26_피그먼트 프린트_172×115cm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0)2.733.1045

www.grimson.co.kr

 

불분명한 생성적 사진  1. 어둡고 침침한 화면에는 희미한 빛 그리고 희박한 색채들이 안개처럼 자욱하다. 뭉개진 색채의 더미 같기도 하고 대상이 지워진 모종의 흔적을 애매하게, 조바심 나게 안기는 사진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사진이 지닌 명료한 지시성이나 재현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도 유심히 들여다보면 검은 덩어리, 유선형의 흔적이 어렴풋하게 화면의 어느 면을 채우고 있거나 그것들이 기우뚱거리면서 돌아다니는 듯한 착시가 인다. 이른바 둥근 달걀을 촬영한 사진임을 사후적으로 깨닫게 된다. 작가는 이 사진이 닭이 알을 낳으면 보이지 않는 깊숙한 둥지의 내부로 손을 밀어 넣어, 손의 감각만으로 더듬거리면서 따스한 알을 꺼내던 어린 시절의 흥미로운 경험, 기억의 소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그 유년의 기억이 상당히 강렬하게 작가의 무의식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완벽한 형태를 지닌 둥근 알, 생명체의 따뜻한 온기, 둥근 알을 조심스레 움켜쥐던 촉각적 경험 등이 오래 살아남아 여전히 작가의 어느 기억과 심성의 자리를 만들어 놓았던 모양이다. 우리는 유년의 경험과 기억으로 형성된 존재들이라 여전히 과거에 의해 자리 매김 된 현재를 사는 이들이다. ● 작가는 어린 시절 친구의 집에 놀러 가서 달걀을 둥지에서 꺼내던 추억을 되살려 이를 작업했다. 그러니 이 사진은 사실 무엇인가를 재현하기 무척 곤란한 작업이다. 유년의 기억을 이미지로 사진으로 보여준다는 것이 가능할까? 이때 사진은 그런 흔적으로만 어렴풋하게 문질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달걀을 손에 잡았을 때의 원초적인 감각, 가장 민감하고 깨지기 쉬운 생명의 벽인 달걀 껍질에 대한 조심스러움과 공포심, 닭으로부터 알/새끼를 훔친다는 죄 의식 등 여러 혼재된 감정이 얼룩진 기억이자 경험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복합적이고 불분명한 것을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명확한 대상으로 고정시키는 일반적인 사진으로는 분명 부족했다고 여겼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좀더 자유로운 표현법을 찾는 한편 중첩된 감정과 생각의 타래를 겹쳐놓기에 다중노출 촬영이 효과적이고 손쉬운 방법론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설미_은폐된 잉태 05_피그먼트 프린트_172×115cm_2022

2. 둥근 알의 형태에는 무엇보다도 시각적인 밀도가 있다. 단단하고 둥글고 매끄럽고 무색인 달걀은 물체성을 최대한으로 살린 조각의 기원이 된다. 둥근 구체에 가까울수록 보다 물체성이 강해지며 시각적으로 단순명료한 것 역시 물체성이 그만큼 강하게 인지된다. 불가침입적으로 불투명성을 띠어야 하고 촉각성이 강하고 검거나 희거나 무채색일수록 물체성이 높아지는 편이라고 한다. 달걀이 그렇고 달항아리가 그렇다. 아마도 작가에게는 이 알이 주는 시각적인 밀도 높은 형태미가 원초적인 미감으로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알이 지닌 이 형태의 완벽함과 밀도는 깨지기도 쉬워서 매우 역설적인 편이다. 양면성을 지닌 알의 순수한 모순이다. 그와 동시에 알은 생명의 기원이다. 이 신비함은 사실 모든 자연현상에 적용되겠지만 작가의 경우 달걀을 손에 쥔 체험으로 인해 그 경이로움은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 작업 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흔적을 구하기 위해 달걀 대신 오리알을 사용하거나 혹은 플라스틱 모형에 점토를 덧붙이고 채색을 입히는 등의 처리를 통해 둥근 알의 형태를 만든다. 여기에는 회화적이며 조각적인 행위가 구현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대략 오전 12시 전후의 시간대의 자연광에서 촬영하면서 빛의 파장을 섬세하게 담아내고자 했다. 배경으로는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를 차분하게 자아내며 흡수성이 강한 한지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전체적으로 흐릿하고 모호한 사진 안에서 구분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이러한 흔적은 또한 앞에서 언급한 의도의 불가피한 결과물이다. 동시에 달걀에 대한 작가의 추억은 생명에 대한 인식으로도 파생되어 나간다. ● "생명의 온기는 응축된 생성의 에너지이자 모든 존재의 시작이다. 또한, 혼돈과 단절의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발아되는 삶의 역동이다. 자연의 경험으로 싹틔워진 온기는 즉각성의 밀도를 띤 아름다운 감정을 솟구치게 하며 내가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살아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작가노트) ● 닭이나 오리 혹은 모든 새의 자궁으로부터 나온 알은 깨어져야 하는 것으로 운명지어졌다. 그래야 하나의 생명체가 가능하며 그것이 존재한다. 작가는 어린 시절 손에 쥐어진 갓 낳은 달걀의 온기가 자신에게는 신비로운 체험이었으며 이는 생명체가 지닌 존재의 의미가 급속하게 사라지고 생태계의 위협과 인공지능, 유전자조작과 생명 복제 시대로 치닫는 오늘날 인간의 욕망에 대한 반성과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의미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런 여러 생각들이 지금의 작업을 태동시킨 원인이 된 셈이다.

 

박설미_은폐된 잉태 07_피그먼트 프린트_172×115cm_2022

3. 작가는 불분명하지만 분명히 감성으로 느끼는, 형태 없는 그 무엇을 재현대상으로 삼았다. 물론 그 매개는 알이다. 그렇다고 알 자체를 보여주는 일은 결코 아니다. 달걀로 인해 전해진 온기와 생명의 신비, 그리고 그로인해 번지는 여러 상념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명확하게 대상화할 수 없는 감성적 대상을 특정한 매체를 통해 재현하는 것이 예술이고 사진일 수 있다. 여기서 사진은 희박한 과거의 기억과 그 기억 속에 또렷이 남은 감각의 상처, 무의식적이고 직감적인 작가의 감성에 의해 포착된 내재적 존재를 문제 삼는다. 사진은 그 미묘한 작가의 감성적 톤을 떠내는 작업이 된다. 사진적 방법을 이용하는 창작행위를 통해 그것을 실행하는 일이 작업이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사진은 어떤 조짐이나 기미, 흔적을 지닌 징후로서의 사진이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사진은 불안한 경계로 나뉘고 흔들리며 중첩된 흔적들로 자욱하다. 약간의 차이를 지닌 색들이 불길한 어둠을 가르고 출몰한다. 검은 덩어리를 연상시키는 물체가 설핏 등장하거나 시야를 가로막거나 모서리에 걸쳐있거나 진동하는 듯하다. 통상 사진이 대상을 고정시키는 데 반해 이 사진은 유동적이고 암시적인 모종의 기운으로 채워져있다. 작가가 경험한 신비스러운 느낌의 재현을 위한 모호한 실루엣이고 빛이고 색채이자 덩어리이다. 따라서 관객이 볼 때 이 사진은 알 수 없는 난해한 자취이자 수수께끼일 뿐이다. 여기서 사진은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 자리한다. 작가가 사용하는 다중노출 기법 역시 하나이자 모두인, 하나이기도 하고 여럿이기도 한 이미지를 한 자리에 중첩 시킨 것이자 동시에 이질적인 시간과 공간이 한 화면에 지층처럼 포개진 흔적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작가의 사진은 과거와 현재, 기억과 상상, 부재와 현존, 보이는 영역과 비가시적 영역이 공존하는 표면이 부유하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사진, 이른바 생성적인 사진이다. ■ 박영택

 

박설미_은폐된 잉태 10_피그먼트 프린트_172×115cm_2022

생명의 온기는 응축된 생성의 에너지이자 모든 존재의 시작이다. 또한, 혼돈과 단절의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발아되는 삶의 역동이다. 자연의 경험으로 싹틔워진 온기는 즉각성의 밀도를 띤 아름다운 감정을 솟구치게 하며 내가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살아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어린아이의 손에 쥐어진 갓낳은 계란의 온기는 신비이며 관조로 상상된 세계의 위대함 앞에서 두 생명체의 존재 물음이 사라진 내밀한 결합으로 무한으로 향한다. 몸에 흐르는 기억은 삶의 지층이며 무의식의 수맥이 되어 세계를 상상 속에서 체험할 수 있게 한다. ● 현재적 기억은 감정과 감각의 동반이다. AI의 변곡점을 넘어서 일상성에 Al와 함께 호흡하는 지금, 전 인류와의 네트워크 사이에서 오히려 고독해졌다. 고독과 소외에 휩싸여 외로운 군상 속에 내던저져 있음을 인식할 때 기억은 더욱 선명해진다. 평온의 가치와 의미를 잃고 편리를 쫒은 세계는 회색화 되어 불안으로 드러낸다. 불안은 피할 수 없는 고통으로써 인간실존의 본래성과 고유성을 찾아 삶을 통찰하게 한다.

 

박설미-은폐된 잉태 15_피그먼트 프린트_172×115cm-2022

메마른 감성, 굳어가는 심장을 본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시작된 AI 기술은 급속히 진화한다. 인간과 Al가 공생한다는 이상 아래 AI는 인간의 복제물이 되어가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AI로 인한 인간의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을 넘어 AI에 감각과 감정을 배양하려는 시도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의 영혼과 감정을 실제, 가상, 모의, 인조의 다중세계로 이끈다.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성은 물론 아무런 목적없이 무심히 운행하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자연 섭리까지 위협한다. AI에 대한 성과가 거듭될수록 인간은 환호하지만, 은폐에는 칠흑 속의 악몽이 도사리고 있다. ● 인간은 고유의 시각과 세계를 지닌 의식과 무의식의 존재이다. 인간은 예측 불가한 상황에서도 판단과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유연성이 있다. 삶, 감정의 흔적을 채우는 숭고한 미지의 여백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사유, 고뇌, 깨달음으로 얻은 묵직한 눈물로 붓칠을 하더라도 죽음의 순간까지도 다 채울 수 없는 미완성의 성역이다. 인간은 AI에 의해 감각과 지각의 잠식으로 인간의 존엄과 신성한 영혼을 점령당하는 것은 아닐까? ● 오늘날 인간은 AI를 잉태하고 AI는 인간을 잉태하고 있다. ■ 박설미

 

박설미_은폐된 잉태 25_피그먼트 프린트_172×115cm_2022

Obscure Generative Photography  1. On the dim screen, faint light and sparse colors resemble a thick fog. Like a pile of crushed colors, a photograph vaguely shows certain traces of the subject being erased. It is far from the clear referentiality or reproducibility of usual photographs. Still, if you look closely, you feel an optical illusion as if black masses or traces of some streamlined shape are vaguely filling a corner of the screen, or they are wandering around in an oblique shape. We realize later that this is a photograph of a so-called round egg. Seolmi Park says that this photograph originates from the recall of memories, an interesting experience from childhood of a chicken laying an egg. She pushed her hand into the invisible, deep inside of the nest, and fumbled with her hand to pull out the warm egg. It seems that childhood memory was deeply ingrained in her subconscious. The perfect oval shape of the egg, the warmth of a living thing, and the tactile experience of carefully grasping the egg—all this has persisted and still lingers in traces of the artist's memory and corners of her heart. We are beings formed by our childhood experiences and memories, still living in the present, set by the past. ● Seolmi Park worked on the photo by recalling her childhood memories of going to a friend's house to play and taking eggs out of the nest. Therefore, it is difficult to say that this photograph is actually a reproduction of something. Is it possible to communicate childhood memories with images or photographs? Perhaps the photograph can only dimly embody traces of reality. It must have been a memory and experience with mixed emotions, such as the primordial sense of holding an egg in one's hand, caution and fear for the eggshell, the most sensitive and fragile covering of life, and the guilt of stealing the egg/baby from the mother hen. Hence, may she not have thought that an ordinary photograph is not up to the job of capturing the complex and ambiguous phenomenon as a distinct object in a square frame? In the process of searching for a method of more free expression, the multiple exposure technique has become an effective and easy methodology for overlapping threads of multi-layered emotions and thoughts.

2. The shape of a round egg has visual density above all else. Hard, round, smooth and colorless eggs are the origin of the sculpture that makes the most of objecthood. The closer it is to a round sphere, the stronger the objecthood becomes, and visually simple and clear things also have a strong objecthood. It is said that imperviously opaque, strongly tactile, and black, white, or achromatic colors tend to have higher objecthood. Eggs and moon jars are just like that. Perhaps to Seolmi Park, the morphological beauty and high visual density of this egg is regarded as the original aesthetic sense. However, the perfection and density of the egg's shape are easy to break, which makes them paradoxical. It is a pure contradiction of an egg with two sides. At the same time, eggs are the origin of life. This mystery actually applies to all natural phenomena, but for Seolmi Park, her wonder seems to have endured long after holding an egg. Looking into the work process, the artist first models a round egg shape by using a duck egg instead of a chicken egg to obtain the desired image/traces, or by adding clay to the plastic model and coloring it. A pictorial and sculptural act is involved here. And she shoots it in natural light around noon to capture the wavelength of light delicately. For the background, hanji, Korean traditional handmade paper with good absorbency, is used to create a soft, gentle atmosphere. But it is difficult to distinguish all of these in the overall blurry and ambiguous photograph. Nevertheless, these traces are also an inevitable result of the aforementioned intentions. At the same time, the artist's memories of eggs are also linked to her perception of life. ● "The warmth of life is the condensed energy of becoming and the beginning of all beings. Also, it is the dynamism of life that germinates even in the terrible pain of chaos and separation. The warmth sprouted from the experience of nature spurts out beautiful emotions with the density of immediacy and makes me feel that I am alive in the most human form." (Artist's Notes) ● Eggs from the wombs of chickens, ducks, or any bird are doomed to be broken. Only then is it possible for a living being to exist. The artist reminds us that the warmth of a newly laid egg held in her hand as a child was a mysterious experience, and this provided an opportunity to reflect on human desires and the dignity of life in today's era of threats to the ecosystem, artificial intelligence, genetic manipulation, and cloning, because of which the meaning of the existence of living things is in rapid decline. Such contemplations have become the background for the present work.

3. Seolmi Park has taken as the object of representation something that is formless and unclear yet clearly felt. Of course, the medium is an egg; however, that does not mean she is simply depicting the egg itself. What she intends to express is the warmth transmitted through eggs, the mystery of life, and the various thoughts that arise from it. Art and photography can depict, through specific media, emotional objects that cannot be clearly objectified. Here, photography is concerned with the faint memories of the past, the scars of the senses that remain in those memories, and the inner being captured by the photographer's unconscious and intuitive sensibility. Photography is the work of retrieving the subtle emotional tone of the artist. In other words, the art of photography is practiced through a creative act using the photographic method. As a result, photography becomes a medium for expressing signs with certain forebodings, indications, or traces. As mentioned earlier, photography is divided by unstable boundaries, thick with swaying and overlapped traces. Colors with slight differences cut through the ominous darkness. An object reminiscent of a black mass seems to appear briefly, obstruct the view, sit on the corner, or vibrate. Whereas a photograph usually fixes an object, this photograph is filled with a kind of fluid and suggestive energy. It is an ambiguous silhouette, light, color, and mass for the reproduction of the mysterious feeling that the photographer experienced. Therefore, to the audience, this photograph is only an abstruse trace and an indecipherable mystery. Here, photography is located at the boundary between meaning and meaninglessness. The multiple exposure technique used by the artist is also a superimposition of images in one place, creating images that are simultaneously one and all, one and several images. At the same time, it can be seen as a trace of heterogeneous time and space stacked on one screen like geological strata. Therefore, Seolmi Park's photographs are so-called generative photographs, which show the floating state of the surface where the past and present, memory and imagination, absence and presence, and the visible and invisible coexist. ■ Youngtaik Park

The warmth of life is the condensed energy of becoming and the beginning of all beings. Also, it is the dynamism of life that germinates even in the terrible pain of chaos and separation. The warmth sprouted from the experience of nature spurts out beautiful emotions with the density of immediacy and makes me feel that I am alive in the most human form. The warmth of a newly laid egg held in a child's hand is a mystery, and in the face of the greatness of the world imagined through contemplation, the question of the existence of the two living beings disappears, leading to infinity in an intimate union. Memories flowing through the body are the stratum of life and become the veins of the unconscious, allowing us to experience the world in our imagination. ● Present memory is accompanied by emotions and sensations. ● Now that we have passed the early stages of AI and breathe with Al in our daily lives, we have become rather lonely in the network that connects mankind around the world. When we recognize that we are thrown into a lonely crowd surrounded by loneliness and alienation, our memories become clearer. The world, which has lost the value and meaning of tranquility to pursue convenience, is desaturated and exposed as anxiety. Anxiety is an unavoidable suffering that leads us to insight into life in search of the intrinsic nature and uniqueness of human existence. ● I see dry emotions and hardening hearts. ● AI technology, which started for human convenience, is rapidly evolving. Under the ideal that humans and Al can coexist, AI is becoming a human clone. Beyond the desire to overcome the limits of the human body by using AI, human desire has led to an attempt to cultivate senses and emotions in AI. These attempts lead the human soul and emotions into multiple real, virtual, simulated, and artificial worlds. This threatens not only human identity and dignity but also the majestic and beautiful providence of nature that runs without aim. The more successful AI-related achievements are, the more humans cheer. But a nightmare in pitch black lurks behind the cover. ● Humans are conscious and unconscious beings with their own perspectives and worlds. ● Humans have the flexibility to make judgments and reasoning in unpredictable situations. There is a sublime unknown blank space that fills the traces of life and emotions. It is an unfinished and sacred realm that cannot be filled even at the moment of death, even if human beings paint it with tears laden with contemplation, agony, and realization. Wouldn't AI, by engulfing our senses and perception, encroach on human dignity and our sacred souls? ● Today, humans conceive AI, and AI conceives humans. ■ Seolmi Park

 

Vol.20221116b | 박설미展 / PARKSEOLMI / 朴雪美 / photography

Destruction = Creation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2022_0617 ▶ 2022_0717 / 월요일 휴관

 

김상표_디오니소소춤2_캔버스에 유채_162.2×260.6cm_202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료 / 2,000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자하미술관

ZAHA MUSEUM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5가길 46(부암동 362-21번지)

Tel. +82.(0)2.395.3222

www.zahamuseum.org

 

김상표-아나키즘에 기반 한 회화 ● 김상표는 자신의 작업이 아나키즘 사상을 기반으로 한 그리기라고 설명한다. 나는 그가 쓴 비교적 긴 작가론, 자기 작품에 관한 논리를 접했다.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고 동시대 미술과 사상에 관한 전방위적인 관심이 폭넓게 드리워진 글이었다. 그는 자신의 논리를 그림을 풀어내고자 한다. 여기서 그의 생각과 주제는 선험적으로 드러나 있고 이후 그림은 그것을 표상하는 차원에서 사후적으로 몸을 내밀고 있는 것 같다. 다분히 선언적인 그의 회화론을 보여주는 그림은 인간의 몸과 얼굴을 암시하는 격렬한 선, 몸짓만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사각형 화면의 틀을 따라 선이 이동하는 모종의 흐름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것은 즉흥적인 감정의 발산이나 순간적인 몸의 충동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그래서 마치 몸과 감정을 그대로 찍어내는 듯한 그리기에 가까워 보인다. 작가는 자신의 몸을 화폭에 실제 낙관하듯이, 온몸을 휘둘러 흔적을 남긴다. 그것은 기존 그림의 일반적인 모드에서 다소 비껴나 있는 편이다. 사실 무의식에 맡겨 그림을 그린다거나 기존의 제작방식에서 벗어나려는 다양한 시도는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너무나 흔하게 접해온 것들이다.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속성 자체가 탈전통, 탈재현이었고 이후 미술은 지속적으로 기존의 미술 개념과 방법론을 끊임없이 반성, 부정해오면서 매 순간 미술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질문해온 역사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은 지금도 지속되는 한편 많은 작가들은 그러한 새로움을 어떻게 독특한 방법론과 단단하면서도 매력적인 조형의 힘으로 주물러 놓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오고 있다고 본다. 그것이 없으면 부정이나 새로움은 사실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김상표_운명교향곡_카산드라 베델 1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0

김상표는 자신의 신체의 흐름을 통해 단숨에 그리며 지우거나 덧칠을 하지도 않는다. 붓을 부분적으로 사용하긴 하지만 대부분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그리는데 온몸을 주어진 화면에 투기하듯, 퍼포먼스를 하듯 그린다. 이른바 핑거페인팅이자 액션페인팅 내지 마치 화면 안에서 춤을 추거나 검도나 태극권을 하듯 화폭 위에 물감을 문지르고 다닌 형국이다. 물론 그것은 결국 물감을 묻힌 손가락 힘의 강약에 따른 차이로 인한 여러 표정들이다. 읽을 수 있는 문자의 체계가 지워진 채 위에서 아래로, 혹은 사선 방향으로, 혹은 원형으로 돌린 선들의 교차만이 남아있는 혁필화를 보는 듯도 하다. 혁필화는 근래와 와서 부르는 이름이고, 본래 이름은 비백서였다. 이는 비로 쓴 자국처럼 희끗희끗하게 붓 자국이 드러난 글씨체를 지칭한다. 붓끝이 잘게 갈라지고 필세가 비동飛動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는 버드나무나 대나무로 쓰는 비백서는 근대에 와서 가죽이나 두꺼운 천 조각에 여러 가지 색의 안료를 묻혀서 그림이나 문양과 함께 그린 혁필화로 발전했다고 한다. 보통 납작한 죽필竹筆을 종횡으로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곡선, 파선波線, 직선을 자유롭게 구사한 것인데 먹색 하나만으로도 풍부한 농담과 색의 차이, 선의 온갖 형세를 다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하여간 순간적으로 그어나간 혁필화 선의 자취를 유심히 보면, 선과 색의 풍부한 변화상을 만끽할 수 있다. 김상표의 그림에서 어느 부분이 그런 인상을 강하게 준다. 하여간 손가락으로 캔버스 화면에 빗질을 하듯, 할퀴듯, 긁어대듯 그리고 있다. 물감을 칠해서 덮거나 채워 넣는 게 아니다.

 

김상표_NIRVANA-교장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0

"서예필법과 검법이 녹아든 붓질과 열 손가락의 본능적인 할큄이 캔버스를 훑고 지나가는 가운데 선과 색이 얼기설기 얽혀서 불규칙한 흐름이 형성된 패턴이 나의 공감각과 공명하는 어느 순간, 내 몸이 스스로 그리기를 멈춘다. 이처럼 리좀적 접속을 통해 도달하려는 목적지는 사전에 설정되어 있지 않고 과정을 통해서 늘 잠정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결국 나의 회화는 수행성으로서의 퍼포먼스에 다름아니다." (작가노트) ● 작가는 특정 동작을 취하고 있는 인간의 몸, 그러니까 춤을 추거나 격렬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신체 내지 커다란 얼굴을 형상화하고 있다. 색과 선이 한 몸으로 이루어지고 그리기와 칠하기의 구분이 없다. 물론 재현회화는 아니다. 물감을 그대로 화폭에 문지르고 다니거나 북북 그어대거나 휘젓고 다니는 등 다양한 방향과 강약의 조절을 통해 선의 풍부한 표정을, 물감의 물성이 지닌 색다른 표정을 보여주는 편이다. 그렇다고 완전한 추상도 아니다. 여전히 인간의 흔적이 어른거린다. 작가의 손가락, 몸의 움직임 혹은 붓을 부분적으로 이용해 신속하게 칠해놓은 흔적이 선, 색채, 물감의 질료성 그리고 인간의 몸과 얼굴을 동시다발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바탕칠이 되어 있지 않은 하얀 캔버스 천은 그 위에 올려지는 손가락의 힘과 속도, 압력을 버티면서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에 발생 되는 여러 자취를 생생하게 기록한다. 나로서는 얼굴을 보여주는 그림이(418코뮨-PJL) 흥미로웠는데 핑거페인팅이 지닌 맛을 보다 적절히 통어해서 추려낸다면 묘한 에너지를 지닌 얼굴이 불현듯 떠오르는 그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봤다. 무엇보다도 조형의 예리한 추려냄이 필요해 보인다.

 

김상표_앤솔러지 1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0
김상표_사랑예찬-꿈_캔버스에 유채_162.2×521.2cm_2021

작가의 얼굴 그림은 많이 그려지지 않은, 그리다 만 얼굴, 그리고 이내 지운 얼굴, 그릴 수 없는 얼굴이다. 마치 사라져가는 인간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도 같다.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듯하는 손가락과 붓질에 의해 얼굴을 그리고 있기보다는 얼굴을 자해하고 두들겨대고 있다. 보여주기보다는 삭제하고 은폐시키는 것도 같다. 여기서 재현 대상과 이미지의 고리가 끊어지고 있다. 얼굴은 온통 뭉개져 있거나 물감과 거칠게 짓이긴, 문지른 흔적뿐이어서 다분히 모호하다. 몇 번의 격렬한 신체의 움직임, 손가락의 운동은 얼굴과 인간의 형체를 가까스로 만들어 보이다가 이내 지워내고 있다. 그 얼굴은 무엇이라 규정하기 어렵다. 누군가를 연상시키다가 이내 좌절하고 인간의 얼굴을 보여주다가도 그저 맥없이 사라져 버린다. 사실 모든 이미지란 그런 것이다. 이미지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것은 실제가 될 수 없다. 실제를 보여주다가도 이내 사라져 버리고 실제에 가 닿지 못하고 추락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가 없이는 세계를 재현할 수 없다. 김상표의 그림은 바로 그러한 미술의 경계와 운명 안에서 작업을 하고자 하는 것 같다. ■ 박영택

 

Vol.20220617b |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손은영의 ‘밤의 집’은 보는 사람에 따라 생각하는 바가 다 다르다.

모든 작품이 다 그렇지만, 관람자의 눈높이나 생각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밤의 집' 손은영 사진집 표지 / 눈빛출판사 / 값 12,000원

 

 

며칠 전 정영신의 ‘장에가자’ 전시에서 다음 전시작가 손은영씨 작품을 알게 되었다.

전에 본 사진과는 또 다른 울림이 있었는데, 마침 인사동 갈 일이 생겨 충무로부터 들렸다.

사진전이 막을 올리는 날이라, 손님 몰리기 전에 빨리 보고 올 속셈이었다.

 

텅 빈 전시장에서 사방을 돌아보니 각양각색의 집들이 마치 무대세트 처럼 정렬되어 있었다.

인적 끊긴 집의 형태에서 텅 빈 무소유를 느끼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어떤 이는 밤의 집에서 사람의 체취나 온기를 느낀다고도 했으나

인간애가 담긴 삶의 공간으로서 보다 문명비판적 시각이 더 앞섰다.

 

요즘 치솟는 아파트 가격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집값 아니더냐?

벌집 같은 아파트 한 채가 몇 십억을 호가하니, 이미 집은 주거공간에 앞서 부의 상징이다.

사진을 보는 분의 평가도 다르듯이, 보는 입장에 따라 달라 보일 수밖에 없다.

 집 없는 서민의 입장에서는 납작한 지붕의 슬라브 집이 꿈의 궁전처럼 보일 것이고,

돈 많은 부자의 입장에서는 측은하면서도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정작 작가는 아무런 단정 없이 감상자들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내가 볼 때 손은영의 ‘밤의 집’은 기록에서 예술로 승화시킨 작업이다.

단순한 집의 외관을 통해, 삶의 회억에서 부터 사회적 경제논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각을 이끌어내며 반성의 단초를 제공한다.

 

마치 건축도면처럼 깔끔하게 보정한 작업에서 엿볼 수 있듯이,

차거운 톤을 이룬 밤의 색조와 집의 조형미가 어우러져 인간에게 보내는 경고 같았고.

집에 대한 향수도 집에 대한 욕심도 아닌 물질문명에 망가진 인간의 자화상이었다.

하나의 도구로 사진을 채용했을 뿐, 작가의 묵시적 메시지다.

 

작가는 한 때 고성에서 산불 난 집을 찾아다니며 찍은 적도 있고, ‘길에서 만난 사람’도 찍었다.

사람조차 집을 배경으로 한 사진이 많았는데, 유독 집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불 타버린 건물의 앙상한 자취를 특유의 인화로 황량한 느낌을 강조하기도 했고,

이 땅에 의지해 살아 온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과 강인한 정신력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작업은 또 다른 시도였다.

창으로 흘러나오는 불빛에서 희망의 여지는 남겨두었으나

어둠 속에 감도는 무거운 침묵, 바로 그 것이 이 사진의 매력이다.

 

작가의 창작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다.

여린 여성의 입장에서 밤 고양이처럼 밤에만 쫓아다녔다.

나즈막한 슬라브 집들을 초상사진 찍듯 다박다박 찍어 낸 것이다.

마치 파파라치가 사람 몰래 촬영하듯 남의 집들을 밤에만 기록했다.

그리고는 집의 조형미에 따라 도식화시켰다.

 

티끌 한 점 남기지 않는 후 보정 작업으로 사적인 감정이 개입할 여지를 없애 버린 것이다.

색깔도 창백한 톤으로 정리하는 등, 인간과의 연결고리나 단서조차 말끔히 지워버렸다.

집에서 번져오는 희미한 불빛으로 여운을 남겼는데,

그 여운은 작가가 부여잡고 싶은 실오라기 같은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손은영씨처럼 작업 한다고 한 번 가정해 보자.

늦은 밤까지 기다리다 지쳐 술부터 한 잔 마셨을 것이다.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집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빠진다.

 

다들 깊이 잠든 늦은 시간에 공부하느라 머리를 싸맨 학생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집은 불꽃 튀기는 사랑의 전쟁을 벌이는 곳도 있을 것이다. 

 

달콤한 생각에 이르니, 옛날 파출소 부근에서 민방위 보초 서던 시절이 떠오른다.

한 밤 중 보초서다, 신음소리에 끌려 보았던 귀가 막힌 장면이 생각나서다.

한 쌍의 야생마 같은 부부의 뒤틀린 몸짓과 거친 숨결에 온 몸이 달아올랐다.

그 깊고 오묘한 장면 장면을 어찌 세치 혓바닥으로 다 이야기 하겠나?

 

갑자기 이런 잡스러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잡놈은 잡것만 생각나고, 돈에 중독된 놈은 돈만 생각나고,

새로운 것을 찾는 작가는 오로지 작품만 생각한다는 말이다.

 

바로 손은영씨가 보여 준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낸 집은 무언의 시대적 증언이다.

물질문명에 의해 인간성이 상실된 오늘의 사회상이고, 묵시적 가르침이다.

비록 후 보정이라는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지만, 생각이 한 발자국 앞 선 것이다.

일 년 넘게 고생하며 이룬 손영은의 또 하나의 성과다.

 

미술평론가 박영택씨는 손은영 ‘밤의 집’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사진은 가장 보편적이고 익숙한 사진에서 출발하지만

동시에 그 비근한 소재에서 찾아낼 수 있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지점을

예민하게 지각시켜주는 사진이다. 무엇이라 설명하기 힘들고 규정하기 어려운

묘한 느낌과 모종의 기운이 어둠 속에서 밀도 있는 공기의 층으로,

몸으로 휘감기는 안개처럼 잔뜩 피어오르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 전시는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10일까지 열린다.

전염병으로 전시장 다니기가 불편하시다면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눈빛사진가선 시리즈66호 손은영의 ‘밤의 집’ 사진집을 보라.

 

사진, 글 / 조문호

 

임영숙展 / LIMYOUNGSUK / 林英淑 / painting

2020_0520 ▶︎ 2020_0525 / 화요일 휴관

 

임영숙_밥_장지에 채색_140×107cm_202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80516f | 임영숙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화요일 휴관

 

 

갤러리 인사아트

GALLERY INSAART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6(관훈동 119번지)

Tel. +82.(0)2.734.1333

www.galleryinsaart.com

 

임영숙-색채의 향연 ● 작은 쌀알은 바다처럼, 대지처럼 광막하고 홀연하게 퍼져있고 그 위로 다양한 꽃들과 소나무, 바위, 집 등이 모여 정원을 만들고 풍경을 이룬다. 장지에 깊이 있게 침윤되어 올라온 채색은 맑고 명징한 표정으로 특정 형상을 힘껏 밀어올리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식물의 아름다운 자태에 대한 선과 색의 극진한 공양과도 같아 보인다. 하얀 그릇 위로 수북이 담긴 밥 안에서 꽃들이 마냥 피어오르는데 그 일부분만이 환하게 확대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근작의 특징은 그런 시선과 거리의 차이에 의한 비현실적인 공간, 낯선 감각을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바탕이 되는 밥만이 가득 표면을 채우는가 하면 마치 바위나 산처럼 커진 밥알들이 포개져있어서 좀 더 낯설고 생경한 장면, 환영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러한 연출도 돋보이지만 여전히 이 그림은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엿보이는 자연에 대한 태도, 그것의 이미지화와 민화에서 엿보이는 기복적인 그림의 힘들을 골고루 탑재하면서 완성도 높은 채색화의 한 수준에 겨냥되어 있다는 점이 우선된다는 생각이다.

 

임영숙_밥_장지에 채색_107×140cm_2020

 

임영숙_밥_장지에 채색_114×163cm_2020

 

임영숙_밥_장지에 채색_114×163cm_2020

 

임영숙_밥_장지에 채색_52×145cm_2020

 

임영숙_밥_장지에 채색_87×116cm_2020

 

임영숙_밥_장지에 채색_87×116cm_2020

 

그림 속의 꽃들은 색을 전달하는 매개가 된다. 그러니 이 그림에서는 색채가 결정적이다. 색은 특정 형상을 감싸고 지시하고 육체를 만드는 동시에 그것의 질감, 감수성을 피부에서 또렷하게 발아시키는 장소성이 된다. 색이 단지 칠해져서 표면을 마감하는 선에 머물지 않고 그 색의 힘이 빛처럼 방사되어 특정 존재의 밀도 높은 실체감이나 실존성을 호명하는 차원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채색화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채색은 현상적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체험을 야기하는 선으로 번진다. 우리 민화가 보여주는 채색이나 한복의 색, 오방색 등이 모두 그럴 것이다. 생을 유지하는 한 그릇 밥과 모든 생명의 근원인 자연, 그러한 자연에 대한 동경과 인간적인 생의 간절한 희구를 표상화한 전통회화를 응용하고 이를 전적으로 맑고 깨끗하면서도 강한 색의 힘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이 작가의 그림이다. 자존감 넘치는 색들의 향연이고 합창과도 같다. ■ 박영택

Vol.20200520a | 임영숙展 / LIMYOUNGSUK / 林英淑 / painting

 

영혼의 집 The house of souls


황인란展 / HWANGINRAN / 黃仁蘭 / painting
2019_0403 ▶︎ 2019_0416


황인란_영혼의 집-바람을 담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60.6cm_201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60922h | 황인란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0)2.733.1045

www.grimson.co.kr



순수와 아름다움을 지닌 얼굴 ● 그림이 무척 서늘하다. 캄캄하고 짙은 배경을 뒤로 물리고 꽃과 나뭇잎이 무성한 풍경이 병풍처럼 자리하고 있다. 전면에서 인공의 조명이 강렬하고 환하게 비추는 듯하다. 그 어딘가에 젊은 여자의 측면상이 주로 박혀있다. 비교적 깨끗하고 예쁜 여자의 얼굴은 다소 어둑하게 가라앉아있는 듯하다. 우울하다고나 할까 혹은 알 수 없는 근원적인 비애감 같은 것이 뼈 속까지 스며든 눈빛이다. 하여간 저 얼굴에서는 인간이 몸에서 풍기는 비릿함이 가셔져 있다. 무표정인지 혹은 모든 감정을 죄다 소진시킨 상태를 보여주려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여성성을 품고 있는 고혹적인 표정이기도 하다. 청순함과 가련함 등의 다소 상투형 수사를 동반하는 표정 말이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저와 같은 여성의 얼굴 표정은 비교적 익숙하게 형상화되어 왔다. 마치 영원할 것처럼 부동의 자세를 취한 여자의 몸 가까이에는 부산하고 급박한 새의 놀림이 배회한다. 그것은 적막을 깨고 정적인 화면에 문득 활력을 심어주는 편이다. 후경으로 밀려난 자연풍경과 그 앞에 자리한 여자의 육체 사이에 유일한 움직임을 만들어 흔들고 있다. 환청처럼 새의 울음과 날개짓 소리, 그로인해 바람이 갈라지는 파동이 들릴 것도 같다. 식물성과 동물성, 지상에 저당 잡힌 존재와 자유로운 비상의 존재, 화려한 꽃의 자태와 기하학적인 옷의 패턴, 뜨거운 색과 차가운 색, 물감과 연필 등 황인란의 화면은 다분히 이원적인 요소들 간의 길항과 긴장감이 팽팽하다. 그것은 순간 흔드는 것은 여자의 눈/눈빛과 그에 어울리는 표정이다. 저 눈빛과 시선은 특정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시선이거나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하고자 하는 시선과도 같다. 낮게 내려 깐 눈이거나 슬쩍 감은 듯한 혹은 어딘가를 응시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보지 않은 그런 눈이다. 생각이 너무 많은 눈이거나 외부에 의해 견인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눈빛, 아니면 오로지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가늠하기 곤란한 시선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 같은 눈!


황인란_영혼의 집-선악의 저편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18


캔버스에 아크릴릭과 연필을 이용해 공들여 그린 이 지극한 그리기는 우선 그림의 가장 기초적인 소묘에 충실하다. 작가는 재현의 능력과 기술을 유지하면서 이를 아주 납작하게 화면에 밀착시켰다. 원근이나 거리감이 뭉개진 화면은 매우 평면적이 되면서 주로 선묘적인 테크닉에 의한 기량을 만끽시킨다. 캔버스에 아크릴릭으로 물감의 층이 얇게 올라간 후에 그 피부 위를 다시 연필로 규칙적이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차곡차곡 쌓아가는, 덮어가는 선의 궤적은 정교하면서도 낯설다. 이 둘의 조화는 과연 얼마나 효과적일까? 그런데 이는 작가의 성향에 기인해 보인다. 붓질에 의해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해내지 못하는 영역, 충분치 못한 부분을 연필로 촘촘히 마감해야만 하는 필연성이 있다. 사실 연필이 개입되는 특정 부분은 여자의 얼굴과 옷 사이로 드러난 팔과 같은 살이다. 전체 화면은 물감에 의해 점유되고 도포되지만 인간의 살, 여자의 피부만은 물감의 층에 의해 덮여지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가능한 순수함과 깨끗한 상태에서 다른 배경과 차별화되어야 하는 지점이다. 물감이 차마 침범하지 않고 비워둔 영역이고 예리한 연필선의 간결하고 최소한의 접촉에 의해서만 표현을 허용한다.



황인란_영혼의 집-바람을 담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1×181.4cm_2019


근작은 채색의 농밀함을 동반해 이전보다 회화성이 보다 진하게 감촉된다는 느낌이다. 붓의 터치와 약간의 질감도 동반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민화에서 차용한 듯한 구성과 상징성이 짙은 도상의 연출로 인해 서사성이 보다 자연스럽고 짙게 내려앉아 있다. ● 작약이나 모란꽃이 무성하고 자지러지게 피어있고 울울한 잎사귀들이 바글거리는 숲은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젊은 여자는 그로부터 빠져나와 무관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있거나 외면하고 있다. 머리 근처에서 성가시게 하는 새 역시 여자의 관심을 빼앗지는 못한다. 이 고독하면서도 대단한 자존감을 지닌 젊은 여자는 자기만의 영역 안에서 비타협적인 왕국을 도모한다. 여자의 얼굴 표정이 그것을 방증한다. 착하고 선하면서도 자신의 기준에 충실한 원칙주의자의 얼굴이다. 따라서 여자의 희고 맑은 얼굴은, 연필의 선에 의해 조율된 효과로 자신의 이상을 선언하는 상징성 짙은 텍스트에 해당한다



황인란_영혼의 집-푸른 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90.9cm_2019


어찌보면 황인란의 그림은 다분히 도상적인 그림에 해당한다. 여자, 새, 꽃, 숲이란 몇 가지 기호들이 결합되어 지속적으로 배열을 조금씩 달리하면서 모종의 서사를 직조한다. 저 기호들은 단어가 되고 그림은 문장의 형식을 취한다. 또한 문장과도 같은 그림들은 상징성 짙은 이미지를 거느리면서 출현한다. 그 그림들은 자신의 자화상에 해당되어 늘상 자신의 삶을 추스르는 경계의 지점에서 작동한다. ● 그렇다면 작가의 그리기는 다분히 수행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실천적인 작업인 셈이다. 작가는 "우리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추구해야만 할 인간으로서의 어떤 당위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도덕성에 근거한 선함의 추구라고 말하고 싶다"라고 한다. 그러니 이 작가의 작업이 어떤 맥락에서 출현하는지 알 것도 같다.



황인란_영혼의 집-세계의 끝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65.1cm_2019


결국 작가의 그림은 그러한 선함과 아름다움의 실현에 방점이 놓여 있다는 생각이다. 활짝 핀 꽃과 잎들로 무성하고 울창한 정원, 그 어딘가에 위치한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과 마냥 조심스러운 자세, 영혼의 상징이자 지상계와 천상계를 떠도는 새들은 화면 안에서 작가가 상정한 순수와 아름다움의 세계를 가설한다. 이 가설에는 특히 성실하고 극진한 공력이 희생처럼 얹혀져있다. 그림을 그리는 방식에서 이미 그 종교적인 수행성은 마치 의식처럼 실현되고 있다. 꼼꼼하고 치밀하고 정성을 다하는 사실적 묘사, 그리고 물감에 만족하지 못하고 연필 터치를 통해 온몸으로 밀고 나가 선 하나하나로 이루어야만 하는 경지가 있는 것이다. 전적으로 이 작가의 성정에서 출현하는 그림이자 자신이 설정한 생의 원칙에서 나오는 그림이기에 그렇다. 바로 이 점이 황인란 회화의 엄격함과 반듯함을 이루는 근간이 된다. ■ 박영택



황인란_봉인된 시간-침묵의 알레고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연필_112.1×162.2cm_2018


작가로 산다는 일은 – 오랜 침묵과 긴 노동, 건조한 호흡 등을 요하는 고되고 힘든 과정이지만 아름답고 숭고한 일이다! (2019년 봄) ■ 황인란



Vol.20190403h | 황인란展 / HWANGINRAN / 黃仁蘭 / painting


손으로 글 쓰는 건 생각을 몸으로 드러내는 일이죠

필기구로 쓰면 글 잘써져
초안·교정작업 땐 만년필로
책 읽으며 밑줄 칠때 ‘행복’모은필기구다써보는게내인생목표중의하나


 

박영택 경기대 교수가 연구실에서 자신이 모은 필기구들을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필기구를 좋아하지 않나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필기구에 애착이 많았습니다.”

 박영택 경기대 미술경영과 교수(51)의 필기구에 대한 애정은 차고도 넘쳤다. 샤프펜슬이 처음 등장했을 때 스스로가 ‘환장했었다(?)’고 회상할 정도다. 독특하고 예쁜 연필과 볼펜, 만년필 등 그가 지금까지 수집한 필기구는 600여점. 명품 <몽블랑> 만년필을 비롯해 원고지에 연필로 직접 작품을 쓰는 유명 소설가 김훈씨가 애용한다는 <파버카스텔(Faber-Castell)> 연필 등등 종류도 다양하다.

 “수집 자체가 목적은 아니에요. 20대 후반부터 제 마음을 사로잡는 디자인과 색상의 필기구들을 자연스럽게 모은 거예요. 다 쓴 필기구도 버리지 않다 보니 여기까지 이르렀네요.”

 그는 꼭 명품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번 대형서점에 들렀을 때 눈에 띄는 필기구를 한두개씩 사 모은 것. 학생들에게 ‘취향’이 널리 알려져 스승의 날 선물로 그가 좋아하는 청색 볼펜 등을 선물받을 정도다. 심지어 자녀들도 어버이날엔 그에게 필기구를 선물한다.

 미술평론가라는 직업상 글쓰는 일이 잦은 그에겐 필기구가 더더욱 친숙한 벗이다. 그는 초안을 잡을 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게 아니라 필기구로 쓴다. 그 다음 본격적인 글은 컴퓨터를 이용하지만 컴퓨터에서 작성한 글을 인쇄한 뒤 교정할 때는 연필이나 만년필을 쓴다.

 “필기구를 손에 잡으면 글이 훨씬 잘 나갑니다. 책을 읽으며 밑줄 칠 때는 행복하고요. 그래서 필기구가 참 매력적이에요.”

 그는 필기구를 통해 자신의 손으로 글 쓰는 일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필기구로 글쓰기란 자신의 생각을 몸(손)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손으로 직접 쓴 글씨를 ‘육필(肉筆)’이라 하듯이 필기구를 통한 글쓰기는 곧 몸이 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글씨에는 자신만의 분위기나 개성이 담겨 있다는 것. 특히 그는 미술평론가답게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그는 그림에 나타난 화가의 붓질만 봐도 그 화가의 솜씨와 내공을 알 수 있단다. 육필 역시 그와 비슷하다는 설명이었다.

 뒤 이은 그의 말에는 필기구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긴 듯 싶었다.

  “제 인생의 목표 중 하나는 제가 모은 필기구들을 다 쓰고 죽는 것입니다.”



 [농민신문]수원=강영식 기자 river@nongmin.co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