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5월, 강릉 /  빈순애씨

 

단오제의 꽃으로 상징되는 무녀 빈순애(賓順愛, 62세)씨의 삶은 파라만장하다.

열일 곱 살에 신이 내려 단골무녀 신석남 수양딸로 들어갔는데, 어릴 때부터 서낭당이 놀이터였다고 한다.

강아지 목에 달려 있는 방울을 빼앗아 사철나무에 달아 흔들면서 춤을 추었다.

또 아기 포대기 띠를 쾌자처럼 만들어 놀기도 하고, 돗자리를 가지고도 놀았다.

 

나중에 자신의 시어머니가 된 신석남씨가 굿을 하면 어른들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학교에 가지 않고 굿을 구경했단다. 이런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이 내림굿을 해주라고 권했다고 한다.

당시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의 빈순애씨는 굿하는 소리가 너무 좋아 끝내 학교에 가지 못했다.

 

빈씨는 이듬해 18세의 어린나이에 신석남 무녀의 아들 김명인과 결혼하게 된다.

동해안 세습무들은 무녀와 양중이 짝을 이루어야 굿을 할 수 있어, 일찍 결혼시키는 풍습에 따른 것이다.

그 때부터 빈순애씨는 시어머니에게 ‘세습무’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김명익씨는 29살로, 남편 역시 고등학생 때 갑자기 앞을 보지 못하다가

장구, 꽹과리를 치면서 눈이 밝아졌다고 한다.

신석남씨는 아들 내외와 석달을 함께 살면서 빈순애씨에게 설법 문서를 주고 사설을 외우도록 했다.

 

“시어머니께서 사설을 외우라고 했으나, 귀동냥으로 익히려니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였어요.

겨울에 목을 틔우려고 눈 쌓인 대관령에 가서 무가를 목이 터져라 불렀으나,

못 한다고 구박도 많이 받고 울기도 많이 울었죠.”

 

빈씨는 푸너리 장단, 청보 장단, 제마수 장단 등 장단을 익히는데 만도 3년이 걸렸다.

각 굿거리마다 무녀들이 나와서 춤을 추며 무가를 부르는 것이 동해안 굿의 특징인데,

무녀가 한 거리를 맡으려면 그 거리의 무가를 완벽하게 소화해야 했다.

가수 지망생들이 피나는 노력을 하듯이 무녀들도 그것을 뛰어넘는 강도로

혹독한 수련기간을 거치며 무명의 설움을 겪어야 했다.

 

“심청굿은 부르는데 4시간 이상 걸립니다. 동해안 굿의 가락은 현란한 만큼 익히기도 아주 까다롭죠.

사물놀이패들이 와서 배워가기도 하고, 아예 양중이가 사물놀이패로 진출하기도 했어요.

무녀가 굿을 잘하려면 무가도 잘해야 하지만, 청중들을 웃기고 울릴 줄도 알아야 돼요.”

한 마디로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23살 때 생활이 어려워 시어머니 신석남으로부터 독립하여 시백부 김해철씨가 사는 양양으로 갔다.

양양에 이주하여 남편은 악사로 활동했으나 빈씨는 임신으로 활동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75년경에 시누이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거의 같은 시기에 자신의 딸도 죽었다.

이후 죽은 딸이 빈순애씨의 몸에 선녀로 들어왔고, 죽은 시누이도 꿈에서 책을 가져다주면서

자기 대신 무속의 길로 나가라고 말해 주었다고 한다.

 

빈순애씨는 동네 풍어제에서 처음으로 무업을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굿에 대한 학습에 들어갔다.

28세 때 다시 빈순애씨의 몸에 신이 내렸다.

그러나 시어머니 신석남씨는 강신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남편 역시 이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남편에게 사정하기도 했다는데, 세습무는 부르지 않고 ‘강신무’만 불러 36세에 내림굿을 받았다.

 

2016년 5월, 강릉  / 빈순애씨

 

양양에 사는 큰 시아버지 첫째 부인은 세습무지만,

둘째 부인인 박월순씨가 강신무라 강신과 관련된 것을 배우게 되었다.

이때 빈순애씨는 개인 신당을 속초 청호동에 모시고 손님도 받았다.

그런 중에도 빈순애씨는 시어머니 신석남씨의 세습무 굿을 전승하려 노력하여 조교임명장도 받게된다.

신석남씨가 1992년 작고하자 시어머니를 이어 2000년 강릉단오제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은 것이다.

 

빈순애씨는 신이 내려 내림굿을 받았지만, 신어머니가 없었다.

신에 대한 관심은 많았지만, 철저히 시어머니 세습무 굿을 전승하고자 했다.

현재 강신무들이 진행하는 굿도 설법은 세습무 굿을 이용하였는데,

그게 세습무 굿이 강신무가 진행하는 굿의 전형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빈순애씨는 요즘은 생계상 이유로 강신무 활동에도 관심이 많다고 한다.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서 받는 보조금과 연금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요즘은 풍어제가 옛날처럼 자주 있지 않아 굿을 통해 살림을 꾸려 가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세습무로는 생활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강신무 쪽은 벌이도 괜찮지만, 장단이 굿거리장단으로 단순해 굿하기도 쉽다고 한다.

이전에는 세습무도 역술을 배웠으며 손님도 받았단다.

물론 세습무 중에 손님을 받지 않는 사람도 있으나, 시어머니도 신당을 꾸며 손님을 받았다.

지금은 보유자로 지정되어 손님 받기도 조심스럽다고 한다.

 

이젠 빈순애씨의 딸 김은영씨가 대를 이어 굿을 하고 있다.

 일찍부터 딸의 마음이 흔들려 무속을 가르치려 했지만, 남편의 반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1999년 남편이 죽은 후에야 딸 스스로 무업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사위도 세습무 집안 출신으로 악사로 나가려는 것을 빈씨가 막았다고 한다.

 

빈순애씨 말에 의하면 강신무에 대한 옛날 명칭은 점쟁이, 꽃무당, 앞상쟁이란다.

세습무는 큰무당, 큰지모라고 했다. 무당이란 말을 싫어해 무속인이라는 말은 최근에 생긴 말이다.

장구잽이, 화랭이의 경우도 지금은 악사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집에는 신장, 즉 장구와 징을 모셔 놓고 굿을 다녀와서 신장에게 빈다고 한다.

그리고 가을 한 철은 단골집으로 ‘양하러’ 즉 시주, 동냥을 다녔다.

그러면 단골집에서는 찹쌀이나 콩을 무당에게 주었다고 한다.

빈씨가 시집오기 전까지만 해도 세습무들은 이렇게 살았다고 한다.

자신의 시어머니인 신석남씨는 삼척 건덕에서 덕산 쪽으로 시주하러 많이 다녔는데,

당시 세습무는 누구나 다 그랬다고 말한다.

 

빈순애씨는 타고난 끼로 굿판을 주름잡는다.

빈씨가 엉덩이를 흔들며 굿판에 나서게 되면 관중석이 떠들썩해진다.

타고난 신기와 재치로 인기를 몰고 다닌다. 그녀에게 타고난 끼는 큰 재산이다.

동해안굿이 활기 넘치는 축제로 자리 잡는 데는 빈순애씨의 공도 크다.

누구나 즐겁게 굿에 동참할 수 있도록 만드는 빈순애씨 만의 장기다.

 

사진, 글 / 조문호

 

2016년 5월, 강릉 / 딸 김은영씨(42세)

 




2016 강릉단오제가 음력 55일인 9일부터 강릉시 남대천 단오장에서 열렸다.

 

지난 10일 들린 단오굿 제단은 화려한 종이꽃과 무당의 복식들이 일단 눈길을 끌었고,

신위를 모신 제단 아래는 아낙들의 정성으로 소지가 올려지고 있었다.


축원굿과 부정굿, 군웅 장수굿 등 다양한 단오굿으로 집안의 평안과 생산의 풍요로움,

무병장수와 조상의 숭배와 영혼들의 천도를 간절하게 빌고 있었다.

 

강릉 단오 굿은 대대로 내려오는 세습무당이 벌이는 굿판으로, 사화선, 빈순애, 신성녀,

박금천, 신길자, 이순덕, 김은영, 신희라, 한민경 등 수 많은 무녀들이 돌아가며 굿을 하고 있었다.

 

단오기간 내내 굿을 하려니, 축원굿의 수도 많이 늘었지만, 무가가 아닌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과부타령인데, 시집 간지 일 년이 못되어 남편을 잃고 모진 시집살이를 하다

중이 된다는 내용이었으나, 흥미로웠다.

 

그리고 강릉 단오 굿은 타악기로만 연주되는데, 보통 두 대의 꽹과리와 장구, , 바라로 짜여 있다.

세습무당에 의해 전승되어 온 단오 굿이 어느 지역 무악보다 뛰어난 음악성을 보여주는 것은

양중이들이 어머니의 배속에서부터 소리를 익혀 왔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타고 난 무악의 경지였다.

특히 양중이 김명대씨는 장구잽이로, 김정희씨는 꽹과리로, 각각 우리나라 최고의 타악기 주자인데,

그 신명을 따를 자가 없다.

 

또 하나 재미있는 볼거리는 김명대, 김정희, 두 양중이가 펼치는 액맥이 가무극이었다.

굿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굿에서의 악가무극은 오래된 것이고, 다양한 예술장르가 발전하는 모태이기도하다.

 

관객들을 이끌어가는, 그 가무극이 얼마나 웃기는지, 모두들 배꼽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굿판을 떠나오며 양중이 김명대는 무당이기 전에 타고난 광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글 / 조문호

















































































 


 

나른한 봄볕이 내려쬐이는 지난 24일의 인사동거리는 분주했다.

인사동거리는 외국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가방가게도 바빴고, 아이스크림도 불티났다. 
낙원상가 옆으로 관광버스가 줄지어 선 것도

이젠 인사동의 일상적인 풍경이 됐다.
외국인들에게 인사동이 어떻게 보일지 늘 조마조마하다. 

 

세월호여파가 인사동까지 밀려 왔나보다.
인사동외곽은 경찰의 경계로 삼엄했다.

 

'아지오'에서 정영신, 전인미, 김은경씨를 만났고,

거리에서는 동창들과 어울린 이종승화백도 만났다.
늘 바삐 오가는 김명성씨를 '허리우드'에서 만났고,
공윤희, 최일순씨도 만났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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