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부터 내 길이 있는 게 아니라 가다 보면 내 길이 되는거야

 

생각나는 데로 만들고 그리며, 작품이란 틀 자체를 깨부수는

김을의 김을파손죄전이 조계사 옆 ‘OCI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김을은 기존의 타성을 깨기 위해 늘 새롭게 생각하며 다양한 작업을 시도하는 작가다.

전시장 1층에 설치된 작업실에는 수많은 망치가 벽에 걸려있었다.

붓이 있어야 할 곳에 망치가 있다는 것은 자신의 창작이란 망치로 깨부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장난감 같은 다양한 오브제를 비롯한 수많은 드로잉 작품이 삼 개 층에 빽빽이

전시되었는데, 누구처럼 특정한 주제도 없고 일관된 방식도 없다.

닥치는 데로 만들거나 그리고, 아니면 사정없이 파손한다.

작업을 일로 보지 않고 즐기는 놀이에 가깝다.

 

전시장 곳곳에 갖가지 인형 형상이나 머리가 어지럽게 늘려 있고,

목마나 수레가 놓여있기도 해, 마치 어린이집이나 놀이터에 온 기분이다.

인형의 신체를 분해하여 다시 조립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다양한 행위들이 어린이처럼 자유롭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심각한 척 그렸으나 능청스러운 익살이 있고, 세상을 향한 야유도 엿보인다.

이러한 것들을 적절히 버무린 균형감이 김을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중요한 요체다.

 

작품 하나하나의 섹션 구성이나 형식이 작품 전체에 걸쳐 프랙털처럼 등장하기를 거듭한다.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느낌으로 변형시킨 작품에서 우상파괴적 태도를 드러내기도 한다.

요란한 놀이를 통해 그동안의 사색을 오브제나 드로잉으로 표출해 내는 것이다.

 

작가를 빼닮은 민머리와 미소가 있는가 하면, 앙증맞도록 귀여운 인형도 곳곳에 늘려 있다.

물신적 욕망을 드러내는 인형 같은 오브제도 어쩌면 확장된 드로잉인 셈이다. 

그의 작품은 조미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싱싱한 날것 같다.

 

작가는 무엇을 그릴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그림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목표라지만, 작업에 임하면 여전히 갈등한다. 드로잉 곳곳에 등장하는

“나의 그림이 개지랄을 떨고 있다, 넌 무조건 지옥행!, 그림 이 새끼" 등의 글귀 들이 말한다.

그뿐 아니라 그림을 집어던지는 사람, 날아가다 처박혀 벽으로 흘러내리는 그림, 

잘 마무리하다 냅다 긋고 찢은 캔버스까지 각양각색이다.

이와 같은 행위들이 작가의 진솔한 마음을 말해주는 민낯인 것이다.

 

어쩌면 김을파손죄란 주제 자체가 김을의 미술 행위를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제도화된 틀이나 속박으로부터 벗어 나려는 자유로운 행위 자체가 김을 작업의 핵심인데,

선택한 오브제나 드로잉을 파손해가며 만들었다는 자체는 창작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한때는 동판을 부조처럼 오려 붙인 뒤 아크릴 물감으로 칠하는 자화상 연작을 그렸고,

자신의 뿌리를 가계사에서 찾는 혈류 연작도 발표 했다.

이는 자기 내면에 대한 성찰에서 가족 또는 핏줄의 내면으로 영역을 확대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인생의 슬픔이나 한을 산이라는 자연 공간에서 해방시키려는 ‘이산 저산’을 발표하기도 했다.

 

작가의 뇌리와 감성의 망에 걸려 탄생한 김을파손죄는 오는 64일까지 열린다.

 

사진, / 조문호

 

 

 

김을파손죄

김을展 / KIMEULL / 金乙 / mixed media

2022_0407 ▶ 2022_0604 / 일,월요일 휴관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기획 / OCI 미술관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_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

(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틀을 깨는 망치 뻥을 잡는 감옥원래부터 내 길이 있는 게 아니라 가다 보면 어찌어찌 내 길이 되는 거야 (장기하와 얼굴들 5집 타이틀곡 「그건 니 생각이고」 中) 있는 줄도 몰랐던 길 어쩌다 걸으면서 사명인 척, 어영부영 짜깁던 걸 남다른 맥락인 척, 집히는 대로 욱여넣고 깊이가 아득한 척… 구석구석 덧붙이고 부풀리고 포장하며 인생 살다 보면 질소 과자 욕하기도 뭐하다. 성공한 사족은 '신화', 그르치면 '뻥'이라 부른다. 극적인 일화, 각별한 영감, 근사한 작업관… 뻔한 기대에 김을은, 저서 어딘가에 박힌 글귀로 답했다.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내가 그린 건 맞긴 한데…기억이 없다. 에스프레소나 한 잔 마셔야겠다." ● 갈 길 간다. 거짓말 한 켤레, 신화 한 벌 없는 벌거숭이로. 의도, 필요, 정치, 계산, 담합? 미주알고주알 누가 뭐라든 우직하게. 우직한 벌거숭이. 그가 김을이고, 그게 드로잉이다.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작업의 예행', '과정', '에스키스', 드로잉의 지위는 한동안 그랬다. 시험 삼아 해 본 게, 뜻밖에 근사한 경우가 있다. 신다 버릴 작정으로 산 신발, 욱해서 쏘아붙인 별명, 급히 휘갈긴 글씨인데. 팔 걷고 각 잡고 용쓸 땐 나오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연습 삼아 그렸는데 본론보다 나으면? 그럼 그게 본론이다. 드로잉은 그렇게 광복한다. 자세 풀고 힘 빼고 각오를 놓아야 비로소 고개를 내미는, 또 다른 매력과 맥락을 인정받은 것. 너울대는 갑판에서 칼끝으로 두어 점 떠 혀끝이나 달래던 생선 살이, 마침내 '활어회'라는 이름을 달고 차림표에 정식으로 오른 셈이다. 그래서 김을의 드로잉은 우선 '싱싱한 날것'이다. 힘주어 다듬기 전이다. 포장도 미처 못 했다. 거짓을 바를 겨를도 없다. 이 태도를 그는 '솔직', '정직'이라 한다. ● 흰 종이에 건식 재료로 선을 그어야 드로잉인가? 글씨, 조각, 움직이는 놀이 기구, 너덜너덜 곳곳이 찢긴 캔버스… 그에겐 정해진 꼴도, 도무지 딱 맞는 상자도 없다. 회화, 조각, 사진, 영상, 다른 틀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아 억지로 끼울 수 없다. 그는 말한다. "이미지/텍스트/입체/평면? 죄다 수단일 뿐, 특정 화법에 집착하는 건 바보"라고. ● 예쁘고 멋진 선을 그어야 수십 년 경력의 대가인가? 삐뚤빼뚤한 글씨 "나는 그림을 정말 못 그리는 화가다". 그의 어느 드로잉 속 글귀이다. 잘 그린 드로잉? 드로잉은 '어느 틀에도 종속되지 않기'인데, '규격을 두르고 잣대에 아첨하는 드로잉'이라니. '뜨거운 냉커피'같은 건가? 예쁘게 쌓는 솜씨보다 쌓은 걸 깰 깡에 반한다. 바삭하게 잘 구운 도자를 살피며 새벽녘 흐뭇했던 늙은 도공이, 도로 몽땅 꺼내어 오밤중 망치질이다. 생각이 바뀐 모양. 늘 새롭게 생각하기. 틀 깨기. 타성 깨기. 작품을 망치 삼아. 그게 김을의 드로잉이다. ● '예비', '실험', '유예'와 같은 드로잉의 속성은 본래 '보조', '과정', '미완성'과 늘 맞닿았다. 차라리 그 어떤 형식과 생각의 틀에도 호락호락 팔짱 끼지 않고, '밀당'과 '어장관리'를 거듭한다. 신기하게도 그제야 영원한 '썸'을 타며 자립한다. 태도, 형식, 내용 삼면으로 그가 매일 자유로우려는 이유이다.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

검정 쇠창살에 가둔 흰 캔버스. "억울해. 그저 '하얀 거짓말'인데." 푸념하듯 삐딱한 자세가 사뭇 능청스러우면서도, 맥락 어딘가 뼈가 씹힌다. 감옥에 갇힌 그림? 죄와 벌엔 성역이 없다. 거짓을 일삼고 양심과 순수성을 훼손하는 양치기 예술, 피노키오 예술은 「Jail」, 감옥행이렷다. ● 전시장 복판에 솟은 오두막 「Twilight Zone Studio」. 그의 작업실이다. 쉰 개가 넘는 '틀을 깨는 망치'가 벽면 하나 가득 들어찼다. 이번 전시의 대표 아이콘이긴 한데, 그래도 저걸 다 쓰려면 그는 꽤나 오래 살아야 할 듯싶다. ● 오락실에 어울릴 듯 심상찮은 모양새의 「Drawing Machine」. 관객이 힘차게 페달을 구를 때마다 팡팡! 종이에 그림을 찍는다. 옆구리의 작은 창 너머로 분골쇄신하는 일꾼 김을 인형이 엿보인다. 이어 나무망치를 두들기고 손바닥만 한 도장을 쿵쿵 찍어본다. 드로잉 완성. 다만 놀이터의 분위기와 호쾌한 타격감이 전부가 아니다. 김을의 머리 실루엣을 따라 박힌 글귀 "Drawing is Hammering". 그리지 않아도 드로잉, 흰 종이(묵은 틀)에 망치질(깨기)도 드로잉이다. '꼭 그려야만 하는 게 아니구나', '고정관념을 쳐부수는 거구나'. 드로잉의 의미와 범위를 아울러 겪는다. 묵은 생각의 틀 '파손'하기. '틀을 망치는 망치'. 그게 바로 김을의 드로잉이다. ● 뿐만 아니다. 전시장 곳곳에 '김을'이 도사린다. 목마와 수레의 머리, 인형의 얼굴, 그림과 조각 곳곳에 등장하는 남자. 눈길을 사로잡는 쏙 빼닮은 민머리와 미소. 여유와 당당함이 반씩 맺힌 입가의 두 줄 주름. 때론 앙증맞고 귀엽게, 가끔은 조자룡 헌 창 쓰듯 매섭게 붓을 찔러대는 성난 아티스트로. 부연이 필요 없는 김을의 분신이다.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

'심각 vs 익살' 밸런스 게임. 능청스레 둘을 버무린 이 균형은 그의 작업 전반을 꿰는 주요한 리듬이다. 작품 하나하나, 각 섹션의 구성, 전시 전체에 걸쳐 프랙털처럼 등장을 거듭한다. 아기자기한 수레에 달린 해골 나사가 눈길을 끈다. 망치와 감옥은 장난감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요란한 놀이터와 일 년 치 사색을 나직이 내건 벽이 공존한다. ● 줄타기는 단순한 유희이면서 김을의 화법이고, 또한 관객의 몰입 창구이다. "네~에. 그냥 장난이에요-오. 그림 그리기 싫을 때. 이놈¹을 끌면, 그림 그려주니까. 하하-" 붙들고 캐물어도 그의 작업 설명은 대개 한 줄 내외. 나머지는 작업과의 오붓한 동행이 갈음한다. 귀엽고 사납다. 북적북적 황량하다. 초롱초롱 멍하다. 당당히 숨는다. 천진난만 골똘하다. 매몰차게 포근하다. 포복절도 숙연하다. 눈길로 리듬을 타다 어느새 첨벙! 상상 웅덩이에 담근 발을 빼며 뒤늦게 정신이 든다. '쥐락펴락', '롤러코스터', '일희일비'야말로 김을의 대서사에 몸을 싣는 드럼비트이다. 줄곧 무겁고 진중하거나 그저 키치하고 장난스러운 태도는 결국 뻣뻣하고 단조롭기 마련. 오래가지 못한다.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

"그림 이 새끼" ● 작업 곳곳에 등장하는 글귀가 심상찮다. 뿐인가? 그림을 집어던지는 사람, 날아가다 철퍼덕 처박혀 벽 타고 흘러내리는 그림, 그림과 아웅다웅 핏발 선 눈겨룸, 잘 마무리하다 냅다 긋고 찢은 캔버스까지…유독 그림에 모질고 야멸차다. 노골적인 푸대접에 대놓고 찬밥이다. '화가 맞아?' 싶다. "작품을 망치 삼아", 앞서 김을의 드로잉을 이렇게 소개했다. 작품은 그에게 신줏단지도, 열 손가락 자식도 아니다. 외려 쓰다 내던지곤 툭하면 또 찾는 늙은 망치이다. 실컷 써먹으면 그뿐. 애지중지 품고 안달복달 목맬 이유가 없다. 귀중과 유용은 다르다. 그림은 수단이다. 도구이다. 부산물이다. 확실히 '내 그림은 맞는데 기억이 없을' 법하다.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

"PAINTING is PAIN" ● 왜 하필 드로잉인지 알 만하다. '생각은 깊게, 그림은 대충' 하려고. 목표는 발목 잡고, 집착하면 매몰되니까. 괴로우니까. 새빨간 바탕의 경고문 "아트조심"을 작업실 한복판에 떡 걸어둔다. 하루의 절반을 그림과 진하게 끌어안고선, 나머지 절반을 새삼 내외하며 안전거리를 지키는 태도야말로 무엇보다 드로잉스럽다. ■ 김영기 ¹ 끌면, 그림 그리는 동작을 반복하는 자동차 장난감

Vol.20220403c | 김을展 / KIMEULL / 金乙 / mixed media

 

Maxiature(맥시어쳐)

 

윤성필展 / YUNSUNGFEEL / 尹聖弼 / installation 

2022_0210 ▶ 2022_0308 / 일,공휴일 휴관

 

윤성필_맥시어쳐(maxiature) 20-1_ 레진에 우레탄 도장_36×46×38.5cm_2020

 

초대일시 / 2022_0210_목요일

관람시간 / 10:00am~05:00pm / 일,공휴일 휴관

 

 

표갤러리

PYO GALLERY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5길 18-4

Tel. +82.(0)2.543.7337

www.pyogallery.com

 

공공조형물은 작품일까? ● 조각가 윤성필. 사실 그가, 입주 현장에 납품한 건 작품이다. '원래 건물만 한 작품'을 코끼리만 하게 줄인 '미니어처(Miniature)'이다. 사실 그가, 전시장에 출품한 건 공공조형물이다. '원래 주먹만 한 공공조형물'을 수박만 하게 키운 '맥시어처(Maxiature)'이다. '윤성필의 공공조형물'은 작품이다.

 

윤성필_맥시어쳐(maxiature) 20-2_ 레진에 우레탄 도장_35×25×25cm_2020
윤성필_맥시어쳐(maxiature) 20-3_ 레진에 우레탄 도장_27×43×41cm_2020

큰 곳엔 큰 게 맞잖아 ● 어릴 때 즐겨 보던 '전대물 '은 레퍼토리가 또렷했다. 패한 악당은 분에 떨며 몸집을 키워 거대 괴수로 변신, 절치부심 다시 덤빈다. 웬만한 건물은 허리춤 어깨춤일 만치 우람한 체구에 그냥 맞서다간 주인공들의 합동 장례로 종영할 판. 준비성 하난 알아주는 김박사가 진작 개발한 거대 로봇에 탑승해 지구를 지켰고, 덕분에 필자도 이 글을 남길 수 있다. ● 거대 괴수, 말하자면 그건 악당의 '맥시어처(Maxiature) '이다. 불을 쏘던 악당은 불기둥을 뿜으며 온 동네를 굽고, 날개 달린 악당은 더 큰 날개를 퍼덕이며,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도 고집스레 정체성을 간직했다. 결국 크기만 달랐다. 개과천선 상냥한 괴수로 거듭날 리도 없고, 괜한 재등장에 두 번 왕복으로 얻어터질 뿐 역할은 한결같았다. 그렇게 러닝타임을 배로 불리며 뿌듯이 산화한 괴수들이야말로 콘텐츠의 숨은 주역이었다.

 

윤성필_맥시어쳐(maxiature) 20-4_ 레진에 우레탄 도장_31.5×55×33.5cm_2020
윤성필_맥시어쳐(maxiature) 20-5_ 레진에 우레탄 도장_27×31×31cm_2020

'애초 큰 몸집으로 싸우지, 왜 사서 고생?' ●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 의문이었다. 로봇에 타기 전에 때려잡지 않고? 라디오가 잘 안 들려 설거지에 지장이 막대한 듯, 줄기찬 물음을 싹둑 자르며 대충 뭉개는 엄마. "원래 컸는데, 줄여서 왔어. 그냥 오면 들키잖아?" 돌이켜 보면 일리가 있다. '사람 크기로 줄인' 괴수 옷을 입고 열연할 스턴트맨을 위한 미니어처(Miniature)이기도 하니까. ● 자랑스레 떠벌리고 다닌 건 그때부터였다. '집채만 한 괴수를 줄인 게 악당'이라고. '악당을 부풀리면 거대 괴수'라는 또래의 통론과 으레 맞섰지만 결론은 매한가지였다. '레드 원(센터는 대개 붉은 쫄쫄이 1호의 몫이었다)'은 서로 자기 차례라고. 괴수의 미니어처이든 악당의 '맥시어처'이든, 크기만 다르고 그냥 계속 악당이라고. 그리고 니 차례라고.

 

윤성필_맥시어쳐(maxiature) 20-6_ 레진에 우레탄 도장_41×15.5×17cm_2020
윤성필_맥시어쳐(maxiature) 20-7_ 레진에 우레탄 도장_29×50.5×47cm_2020

(모 빌딩 앞) "아 저거? 공공조형물 아니고요, '원래 건물만 한 내 작품'을 코끼리만 하게 줄였죠. '미니어처'야." (모 전시장에서) "아 이거? 작품 아니고요, '원래 주먹만 한 내 공공조형물'을 수박만 하게 키웠죠. '맥시어처'야." "그럼, 건물 앞은 작품, 화이트큐브엔 공공조형물…이에요??" ● '야외조형물, 옥외조형물, 환경조형물, 공공조형물, 조형예술품, 조형시설물…' 정리하다 만 수많은 명칭이 난립한다. '조형'은 확실한 공통분모인 모양이다. '문화예술진흥법 제9조'는 '건축물에 대한 미술작품의 설치'를 규정한다. 시행령 제12조 4항은 이 '미술작품'을 '조형예술물'과 '공공조형물'로 구분한다. 전자의 예시로 '회화, 조각, 공예, 사진, 서예, 벽화, 미디어아트 등', 후자는 '분수대 등 미술작품으로 인정할 만한 것'을 든다. 즉, 전시회에 출품하는 미술품 일반은 '조형예술물', 건물 곁에 우뚝 선 시설물 형식은 '공공조형물 '이다. ● '공공'은 '대중 혹은 불특정 다수의 사안'에 '광장성'까지 포함한 넓은 의미이다. 공간이든 사람이든 통제되지 않은 주변과의 "티키타카" 상호작용을 고려해, 또한 법령 상 용어를 존중해, 본문에서는 예시 가운데 '공공조형물'로 지칭한다.

 

윤성필_맥시어쳐(maxiature) 20-8_레진에 우레탄 도장_44×43×21.5cm_2020
윤성필_맥시어쳐(maxiature) 20-9_ 레진에 우레탄 도장_39×23×23cm_2020

'시각 공해'라며, 주변과 도무지 합이 맞질 않는 무분별한 공공조형물을 지적하는 기사가 적지 않다. 광장의 얼굴이라면, 작가 특색과 예술성을 지키는 선에서 '시각적 쾌(快)'라는 보편적 미감도 얼마간 채워야 마땅하다. 지역 명물일지 흉물일지는 우선 두 가지에 달렸다. 공공조형에 임하는 예술가 각자의 태도와 양심이 첫째요, 시스템 의 편향 자정과 포용력, 공정/투명성 담보가 둘째이다. 필요성 공감과 절차적 신뢰, 대중의 이해와 지지, 지역사회의 협조 등 사회자본은 공공조형이나 문화예술계를 넘어 시민사회 전 분야의 텃밭이므로, 굳이 셋째로 꼽아 봐야 손가락 낭비이다. ● 그런데 첫손에 꼽은 '태도와 양심'은 예술가들끼리도 말이 갈린다. "공공조형물이 작품이냐?", "작업은 뒷전이요, 돈에 혼을 판다.", "공생을 저버린 기금 사냥꾼이다.", "큰 일꾼일세. 미술계 말고 산업계의.", "예술가는 무슨, 장사꾼이지."… 평온한 게 어쩌면 더 이상하다. 일반 미술품 매매시장과 다른 메커니즘에, 작지 않은 금전적 이해까지 얽혔으니.

 

윤성필_맥시어쳐(maxiature) 20-10_레진에 철가루 페인트 도장_48×33.5×33.5cm_2020
윤성필_맥시어쳐(maxiature) 20-11_ 레진에 우레탄 도장_58.5×20.5×15cm_2020

작품과 공공조형물을 칼같이 나눌 수도 있다. 다만 각은 살펴 가르마를 타야 한다. '생산을 설계/운용/지속하는 경영자로서의 작가'인지, '창작력 발현 주체로서의 예술가'인지. 경영자로서의 작가는 생산을 꾸리고, 작업을 잇고, 발상을 전략적으로 실현한다. 더 복잡한 절차, 더 가혹한 검증, 더 큰 외부 자본, 더 많은 이해 관여를 무작정 내칠 수 없다. 비율과 모양새의 차이는 있으나, 사실상 모든 작가는 이 두 속성을 아울러 지닌다. 아니면, 본디 예술가가 아니거나, 애초 살아남지 못할 테니. ● 논쟁은 대개, 경영자와 예술가, 가르마를 탄 게 누구의 손인지 서로 불명확한 가운데 번진다. 물론 작품과 공공조형물이 별개인 '예술가'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다만 예술가 윤성필은 단언한다. '다 내 작품'이라고. '크기만 다르다'고. '딱 그 차이'라고. 크고 작은 조각일 뿐이다, 그에겐.

 

윤성필_미니어쳐(miniature) 20-01_레진_38×27×27cm_2020

"야~ 야~ 마감이 이게 뭐야. 작업 안 살잖아. 다시 칠하자. 안 돼 이거." "지진 나도 안 쓰러져? 확실해? …근데, 두 번 나면?" ● 막바지 작업이 한창인 공방. 손바닥만 한 플라스틱 조각을 다듬어도, 수십 장 철판을 대문짝만 하게 오려도 줄곧 "작업 조심해, 작업."이다. 전시장에 갈 작품과 입주 현장에 깔 공공조형물을 막론하고. 크든 작든 일단 착수하면, 될 때까지 온종일 매달린다. 두어 시간 쪽잠에 누렇게 뜬 눈동자를 굴리며 며칠이건 몇 달이건. 시집 장가보낼 때 "보람차다." 대신 "힘들어.", "아까워.", "두 개는 못 해." 곡이 날만 하다. 호부호형에 한 맺힌 홍길동이 부러워 울 만치, 들인 놈 내놓은 놈 적서 차별이 없다. 열 손가락 모두 친자식이다. ● 힘겹게 실린 '작품'이 공방을 나선다. 웅장한 뒤태를 멀거니 바라보는 그를 다독인다. "아까워요?" 머뭇거리다, 고개를 가로젓는다. "큰 곳엔 큰 게 맞잖아." ■ 김영기

 

Vol.20220210a | 윤성필展 / YUNSUNGFEEL / 尹聖弼 / installation



미술계 핫팩


얼마 전 인터뷰 촬영이 있었습니다.

‘팔십 명도 아닌 여덟 명 일정 맞추는 게 뭔 대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모처럼 입주 작가 전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한 달에 채 하루나 날까 싶은 귀한 시간이었지요.


늦가을로 접어들어 실내에도 제법 냉기가 서렸건만, 촬영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온기와 웃음이 넘쳤습니다.

누군가 최신형 핸드폰을 자랑스레 매만지자,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며 맞은편 작가가 실토합니다

“얘한테 넘어가서 나도 바꿨어요.” 그러자 신을 냅니다.

“선생님도 폰 바꾸셔야겠네! 공모전에 쓸 사진도 찍고, 아이디어도 바로 메모하고 얼마나 좋아~”


어제 같이 밥 먹은 작가, 서로 열흘 만에 본 작가도 있을 텐데 서로 모르는 근황도, 장난에 농담에 거리낌도 없습니다.

단독 인터뷰를 앞두고 심호흡에 여념이 없는 어느 작가. 떼 지어 문틈으로 엿보던 다른 작가들이 키득거립니다.

“진지 너무 잡수셨네. 평소처럼 해 평소처럼.” 생업과 작업, 서로 다른 일상으로 바삐 엇갈리는 와중에도

오며 가며 삼삼오오 다져 온 친분과 우정이 또렷이 느껴집니다.


입주 작가 생활에 친분이 늘 긍정적일 순 없겠지요.

파벌이 생겨 ‘친목질’을 부를 수도, 특정 작가 간 갈등의 빌미가 되어 오히려 작업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터뷰 때 “웃고 떠들다가도, 언뜻언뜻 서로의 작업을 보면 자극받곤 한다.”


“먼저 와서 나중에 일어나는 누군가를 보면, 전시 소식에 들뜬 모습을 볼 때면,

‘열작’에 박차를 가해야겠다 늘 다짐한다.”라며 주억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면 아마도 이게 바로 시너지이며

입주 작가 생활을 하는 또 하나의 큰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약력 한 줄 늘어나는 것 말고도 말이지요.


그리고 이번 《2020 CRE8TIVE REPORT》는 여덟 명이 그 시너지를 여러분께 자랑하는 자리입니다.

불안정한 위치, 불분명한 방향, 불확실한 태도…거대 사회 속 왜소한 현대인 대부분이 느끼는 자신일 것입니다.


김선영 작가는 이런 스스로를 외면하는 대신 부릅뜨고 마주보려 애씁니다.

알 수 없는 동네, 쓰임을 잃고 널브러진 무언가, 흔들리고 움츠러든 풍경들은 생김새가 단지 사람이 아닐 뿐

일종의 자화상입니다.


어떤 작가나 작업은 종종, ‘내면을 담았다’는 둥, 딱히 와닿지 않는 설명으로 외면받거나 오해를 사곤 합니다.

 ‘나를 닮은 녀석’이라 보면 쉽습니다. 나약한 내 꼴과 속과 겁을 꿋꿋하게 응시하는 작업이지요.

작품을, 같은 박자로 닳고 늙고 성숙하는 분신으로 애틋하게 바라보기에 그런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김선영의 ‘성숙’은, 불안을 깨고 밟고 피하는 게 아니라,

마주하고 감싸 안아 원동력으로 키울 수 있는 자신감입니다.

세상 생김새가 모두 그럴싸한 건 아닙니다.

사랑은 불멸 아닌 필멸이고, 봄꽃 가을꽃은 서로 만날 겨를이 없으며, 달의 뒤통수를 볼 수도 없습니다.


김수연 작가는 세상을 반죽해 입맛대로 다시 빚어냅니다.

사랑은 다시 다듬어 더욱 굳건히 하고, 개나리가 코스모스를 만나며,

보름달 같은 대가들의 숨은 그늘을 전면에 꺼냅니다.


‘대가’라 하면 으레 유명세나 웅장한 작업이 떠오릅니다.

이를테면 색색의 조각들이 기하학적으로 공중에 사열한, 칼더의 ‘모빌’같은 것들 말입니다.

누구나 아는 그의 작업 말고, 작업실은 어떤 모양새일까요?

어쩌면 빨강 검정 노랑이 공중을 둥둥 떠다니고, 원색을 사냥해 오와 열이 잘 맞게끔 꼬치에 끼워 익히고,

잘 익은 녀석을 다듬어 ‘모빌’로 출고했을는지도 모릅니다.

달의 뒷면엔 절구에 걸터앉은 토끼들이 ‘담배 타임’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처럼요.


김천수 작가는 사진을 전공한 ‘정규 사진가’입니다.

그리고 그의 진짜 관심은, 반듯하고 진지한 정통보단 그 주변의 ‘삐침머리’나 ‘허점’을 기웃거립니다.

테러 현장 디지털 사진의 데이터 일부를 ‘테러하여’ 기괴하게 변형합니다.

카메라 센서 오류로 흔들린 사진을 바닥에 깔고,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재개발 현장에서 쓰는

먹줄을 가져와 먹선을 칩니다.


무척 낡고 바랜 스키장 사진, 색이 날아가고 곳곳이 박락된 표면을 계속 바라보면 문득 불꽃놀이라도 하는

광경처럼 색다르게 다가옵니다. 최근에 찍은 사진입니다. 폐 건물에 덩그러니 남은 ‘사진을 사진 찍은’ 것입니다.

낚였다 헛웃음을 칠 게 아니라, 데이터를 마치 재료나 오브제처럼 사용하고,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유린하며 유희하는 그의 엉뚱함과 과감함에 주목해 봅시다.


각자가 사는 서로 다른 세상, 땅을 디딘 사람 수만큼의 세상을 콜라주한 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 아닐까 합니다.

이질적인 것들, 서로 다른 눈높이와 원근, 모순과 갈등이 마치 원래 한 덩어리의 장면인 것처럼 천연덕스레 얽혀 있지요.


염지희 작가는 서로 다른 시공의 사람과 풍경, 시집을 읽으며 받은 영감 조각들을 하나의 장면으로 직조합니다.

시선도 스치지 않고 각자의 시간을 사는 인물들, 소실점을 소실하며 뒤섞여 버리는 풍경을 엮었음에도

의외로 화폭은 자연스럽습니다.

적당히 성글게 짠 화면 곳곳 틈새를, 감상자 저마다의 경험과 상상으로 채우며 이야기를 만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별 기억 조각’과 ‘기억 덩어리’는 좀 다릅니다.


임지민 작가의 작업은 일종의 ‘기억 타래 memory collage’입니다.

실타래와 달리 기억 타래는 알 수 없는 논리-그렇다고 또 ‘무논리’는 아닌-로 뒤얽혀 있습니다.

기억 조각들은 분명 내 것임에도 때론 낯설고 새삼스럽습니다.

한 몸이었던 기억이 파편화하고, 다른 기억에 치이고 짓눌리며,

정처 없이 떠돌다 색과 맛이 변하고, 심지어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건만 다른 기억에 가리었습니다.

굴절되어 전혀 새롭게 현재로 소환되기도 합니다.


‘손’은 기본적으로 강한 지시성 의도성을 띠는 대상인데,

특히 그의 작업 전반에서 인물과 정황을 제시 혹은 암시하는 효과적 장치로 활약합니다.

상황을 그대로 담거나, 처지 혹은 감정을 우화적으로 풀어내는 등 기억 못지않게 변화무쌍 다채로운 표현도 돋보입니다.

수십수백 년 발길이 닿지 않은 원시림이나 웅장한 산세는 경이롭습니다.

전형적인 멋이죠. 반면 정재원 작가는 자연의 이면적인 매력을 찾아냅니다.


인적이 끊긴 재건축 현장은 을씨년스럽습니다. 주차 문제로 옥신각신하던 주민,

자전거 타다 넘어진 아이의 울음으로 번잡했던 시절이 불과 수 년 전일 텐데,

적막과 바삭한 낙엽 울음, 퀴퀴한 바람이 대신 들어찬 그곳의 첫인상은 사뭇 쓸쓸하고 공허합니다.

한편 미처 함께 이주하지 못하고 유기된 원래 주인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듭니다.

잎새는 더욱 짙어지고 수풀 사이로 이름 모를 온갖 식물들이 기다렸다는 듯 티격태격 세를 겨루기 시작합니다.

활기가 떠난 곳에 싹튼, 또 다른 활기입니다.


자연과 인간의 각축일 수도, 인간 사회의 이해관계 틈새에서 건진 자연의 어부지리일 수도 있지만

이 ‘역설적 황홀’은 여전히 그곳을 지킵니다.


그림을 보다 보면 가끔은, 장면을 열어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정진 작가의 그림은 곳곳을 열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페이스트리 빵처럼 물리적 그림 층을 지녔지요.

뚫린 틈새로 엿보이는 또 다른 레이어는 보다 과감한 재료와 형식 변화도 너끈히 어루만지며

마치 한 화면의 확장처럼 자연스레 소화합니다.


틈새 너머 무한한 다른 시공을 암시하며 내용은 무궁무진 다방향으로 전개합니다.

만화에서 본 듯한 효과선을 회화 연출에 적극 활용하고, 동서양의 캐릭터나 설화를 거리낌 없이 호출합니다.

한정된 면적의 캔버스는 이들의 상호작용으로 의미 밀도를 블랙홀처럼 계속 높입니다.

우주의 끝을 찾듯 회화의 의미, 역할, 가능성의 끝을 구도하는, ‘다채널 회화 실험실’이라 불러도 좋을 듯합니다.


구석, 그늘, 언저리, 이면, 부작용, 모호함…정철규 작가의 눈길은 초점에서 소외된 것들을 어루만집니다.

‘사랑’ 하면 따뜻하고 황홀한 이미지부터 떠오르지 엇나간 혹은 과도한 ‘사랑이 부르는 갖은 부작용’이

주인공을 맡는 건 드물지요. 사랑은 때때로 상위 구조나 권력의 변호인이나 전위대, 하수인 노릇을 합니다.


“널 생각해서, 다 너 잘 되라고 이러는 거야!”

선의를 가장한 강요, 따뜻한 윽박지름에 도리 없이 아스러지는 연약한 존재들이 식물이나 돌멩이 등

작은 물체로 무대 중앙에 섭니다.

잊히고 버려진 것들은 트로피로 환생해, 오히려 이젠 ‘모시고 기릴’ 대상이 됩니다.

분명함을 강요받던 자신은 스스로 어중간하고 모호한 색상을 더욱 ‘분명히’ 합니다.

미묘한 사람답게 감 색도 배 색도 아닌 중간색에 당당히 머뭅니다.


가끔은 아이러니하게 다가옵니다. 작업만 보면 이번 기수 작가들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서로 다릅니다.

그러면서 또 어느 때보다 서로 잘 살려줍니다. 일종의 ‘인문학적 색채 대비 효과’같은 걸까요?

부디 이 화기애애의 불씨엔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대로 고이 모셔다 미술계에 활기를 주는 큰 불씨,

9기 여덟 입주 작가 모두 서로 다른 색상과 모양새의 미술계 핫팩이 되길 기원합니다.


김영기 (OCI미술관 선임큐레이터)





2018 낙산 아랫동네 이야기의 “가을 봄 여름 그리고 겨울”이
이화마을 일대와 ‘아지트문화갤러리’에서 내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지난 9일 방문했으나, 늦장 부리다 뒤늦은 소식이 되었다.






사진가 김수길씨가 2010년부터 이 전시를 기획하여 참가하고 있으나,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동안 도시재생 문제로 지역민들의 갈등이 시끄러웠으나, 이화동 낙산마을 자체를 처음 가 본 것이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로 나와 물어물어 낙산공원으로 향했는데,
마로니에 공원에는 젊은이들의 거리공연이 흥을 돋우고 있었다.
도보로 약 10~15분 거리라, 산책하기 좋은 코스였다.






이화동은 벽화가 그려진 골목에 카페, 공방, 호프집, 식당 등 다양하게 들어서 있었다.
여기 저기 조형물과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다, 성곽길이라 분위기가 좋았다.






천사 날개가 그려진 벽화 앞에서 사진을 찍는 이도 있고,
도처에 옛날 교복을 걸쳐 입은 학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산 모양이 낙타를 닮아서 ‘낙타산’으로도 불리는 낙산공원은 옛 모습대로 복원한 성곽 따라 역사 탐방로가 이어져 있었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도 일품이었다.






벽화마을에 관광객이 몰려드는데 불만을 품은 주민들이 몰래 벽화를 지우거나
붉은 페인트로 휘갈긴, 마을 관광화를 반대하는 글귀도 보였고, 계단에 그려진 벽화를 지운 흔적들도 역역했다.
마을 재개발 과정에서 일어나는 내부 갈등이 상처로 남아 있었다.






2006년 서울시가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진행한 ‘낙산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화동에 벽화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 따라 그려진 벽화와 계단 위 그림은 국내 관광객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등지의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알려져 관광 코스로 자리 잡았으나,
동네 사는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낙산 아랫동네 이야기인 ‘가을 봄 여름 그리고 겨울“전은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열렸는데,
이화동 삶의 이야기가 빨래 줄에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사진가 김수길씨를 비롯한 출품작가들의 사진이 저 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김수길 작



낙산마을페어 뿐만 아니라 “낙산실빛음악회”도 열렸고, 대학로에서는 서울아트마켓 국제공연예술제도 열리고 있었다.
사람사는 이야기인 낙산 아랫동네 이야기는 내일까지니, 일요일 데이트 코스나 산책 코스로 이화동을 정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사진을 감상하고 있으니, 반가운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김수길씨가 나타났고, 조해인시인도 왔더라.





김수길씨가 차린 술상에 목을 적시기 시작했는데,
‘아지트문화갤러리’ 관장인 양한모씨와 “ART & SHARE" 대표 김영기씨도 만났다.






양한모씨가 직접 갈아 준 커피에다 중화요리까지 골고루 영양 보충한 하루였다.
늦게는 인천 사는 권양수씨가 나타나 심심찮게 만들었다.
사진가 김수길씨 덕에 낙산 구경 한 번 잘했다.


사진, 글 / 조문호





















김수길작


김수길작



김수길작


김수길작




양한모작



김수길작

























한윤정

Gaze & Trace


 물건 말고, ‘사건’에도 생김새가 있을까? 한윤정은 세상을 가득 채운 무형의 것들을 빤히 바라보면(gaze) 각도에 따라 실루엣도 비치고 색상도 들어오며 언뜻언뜻 그 결마저 엿볼 수 있음(trace)을 귀띔한다.

 

평생 머리 위에 이고 살면서도 깨닫지 못할 뿐, 별이 서로 부둥켜안고, 부풀고, 터지고, 흩날리는 저 밤하늘만 해도 이미 ‘사건의 생김새’이다. 있는 대로 부릅떠도 시커먼 허공에 희끗한 점 몇 개가 고작이라면 가시광선의 한계, 보는 방법의 문제에 불과하다. 감마선, X선, 자외선, 중성자선, 자기장, 중력장⋯ 갖은 각도로 뜯어보고 색을 입힌 게 바탕화면 단골 테마인 천문 사진들이다. 수채물감처럼 번진 성운, 긴 팔 휘날리는 나선은하, 그 귀퉁이 어느 한편의 ‘지구’라는 약간의 부스러기마저 서사의 궤적이며 동시에 내용이다. 이렇듯 물건과 사건의 경계는 칼 같지 않다. 사건의 아주 짧은 단위, 극히 좁은 구간의 스냅샷을 편의상 ‘물건’으로 부를 따름이다.

 

그 부스러기 지구에도 숱한 사건이 들끓는다.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들고, 베스트셀러와 유행어가 뜨고 번지며, 갖은 군상이 피고 진다. 데이터가 모이고 쌓일수록 그 판세는 제법 해상도를 차리고 점차 모양새가 읽히기 시작한다. 한윤정은 이 모양새를 추슬러,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작품을 빚는다. 홍채의 색상 값은 입체의 요철로, 지문의 흐름은 음파의 고저로, 가뭄에 신음하는 땅은 그 가쁜 심박을 도형으로 치환한다. 말하자면 자연의 문맥, 사회의 줄거리, 인류의 사연을 장노출로 담은 디지털 초상이다.

 

‘데이터’는 각지고 건조하고 단단할 것만 같은데, 그의 작업은 촉촉하고 말랑말랑하다. 사건은 정착할 줄 모르며, 변덕이 끓어넘치는 때문이다. 감상자의 홍채와 지문은 서로 겹칠 겨를 없이 저마다 뜻밖의 모양, 갖은 색상, 판이한 소리로 화답한다. 다이얼을 돌리면 수온이 오르내리고, 시간이 뒷걸음질 친다. 툭툭 밀친 돌멩이를 타고 멜로디는 늘 새로이 출렁인다. 보여 주는 방법 또한 시시각각 자란다. 버전업을 거쳐 모델은 거듭 성숙하고, 새로운 기술의 접목은 이 내러티브의 싱싱한 새 단면을 또 한 꺼풀 들춘다.

 

김영기 (OCI미술관 큐레이터)




 

시선과 흔적


 W. 칸딘스키는 소리를 색으로, 색을 소리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예를 들어 언어가 달라도 같은 인류로서 공유하는 삶이 있다면 거기에 같은 개념의 단어가 존재하듯이, 오감의 각각 다른 감각들 사이에도 공유하는 영역(=공감각)이 있다는, 즉 오감에는 지구상의 사람들의 언어들처럼 일대일 대응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어떤 색에 대응하는 소리를 찾아내는 일종의 ‘번역’이 가능하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공감각은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우리가 더 주목해야할 사실은, 칸딘스키가 그 ‘공감각’의 공유부분이 단지 말초적인 오감들 사이에만 걸쳐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정신적 영역, 영혼의 통합적 영역에 까지 관여되어 있다고 믿은 점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음악을 동작으로 바꿀 줄 안다. 춤을 추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대일 대응되는 공감각을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없고, 리듬이나 감정 등 다른 요소에 의해 매개되고 또 어떤 때는 정신적이거나 초현실적 감각에 의해 소통되는 번역이다.

 

미디어아티스트 한윤정의 이전 작업들 중에서 많은 경우는 형태와 운동을 사운드로 전환 혹은 번역하는 작업이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발표해 왔던 일련의 작업들은 그러한 경향성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sound tree ring>(2013)은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악기’라고 부를 만하며, 형태가 소리로 번역되고, 조형으로 작곡이 가능하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one> (2009)이나 <color note>(2007)는 관객의 개입이나 새롭게 설정된 연주코드에 의해 다른 규칙이 생성되도록 유도하고, 궁극적으로는 이를 통해 이미지의 생태계가 형성되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최근 작업에서 한윤정은 이전의 추상적이거나 보편적 원리보다는, 각 개체의 생체정보를 통해 생명의 내적정체성을 드러내는 작업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인터렉티브 설치 작품인 <손끝소리>(Digiti Sonus)는 개인의 지문을 3D프린터로 입체조형화하고, 그 나선형 패턴을 따라 마치 레코드판의 트랙에서 기록을 읽어내는 것처럼 소리가 발생되도록 고안하였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한 개인의 ID이기도 하고, 혹은 정체성의 상징으로도 통하는 지문에 내재된 생체의 비밀스런 코드를 매개로 해서, 그 본인=관객으로 하여금 ‘생의 심연으로부터 호출된 예기치 못했던 자신’과 만나고 놀고 소통하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이번 OCI미술관 전시에서 지문 대신 홍채를 이용한 인터렉티브 설치 작품 <Eyes>를 선보인다. 이 일련의 작품에 사용되는 지문 혹은 홍채에서 얻은 생체정보에는 게놈지도보다 훨씬 복잡하고 방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끈이론이 암시하는 것처럼 우주의 파동과 입자, 중력과 양자력, 전자기력 등이, 그리고 이런 것들의 시작과 끝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면, 생명이 탄생하고 진화해 왔던 시간은 실로 일부에 불과하고, 빅뱅이나 물질진화(material evolution) 등 너무 장대한 스케일의 시간이 그 속에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지의 자기정체성과 만나고 놀고 소통하기 위한 이 작품이 실제로는 우리를 전혀 낯선 우주와 맞닥뜨리게 할 수도 있다.

 

지문 혹은 홍채에는 우리들 인간의 과거의 내력이 축약/코딩되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작가는 물론 이 작품을 대하는 관객의 마음에도 존재한다. 그것은 그 신비한 모양이, 공감각의 경우에서처럼 일대일 대응방식이 아니라, 수학적이거나 임의로 설정된 다중코드에 의해 번역되고, 그 결과와 대면하고 소통하며 나아가서는 공감하는 일을 통해, 우리는 개개인의 삶에 대한 보다 높은 차원의 인식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자신의 생체정보의 골짜기에서 울려나오는 사운드의 잔향(殘響 : sound reverberation) 속에서, 예기치 못했던 자신의 기이한 모습에 놀라게 된다. 관객은 미지의 심연으로부터 자신을 자각하고 공간에 체현되는 자신과 만나고, 지금까지 자신이 본 적이 없었던 마음의 내면이거나 생의 뿌리였다는 생각에 경이로운 감정으로 몰입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시뮬레이션이고 환영이다. 원래 세상에는 가짜는 아닐지라도 오독되는 정보가 더 많다. 정글이나 자연계에서도 생명체들은 생존을 위해 가짜정보를 생산하거나 위장하고, 나아가 생명체의 내부에서도 면역체계와 바이러스의 정보전쟁이 일상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수행된 ‘형태에서 사운드로의 전환‘도 일대일 대응하는 단어를 번역하듯 하지 않았으므로 오역일 수도 있고, 말하자면 관객이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환영일 수도 있다. 특히 새로운 방식의 정보는 오독되는 것이 숙명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 환영도 우리의 그림자들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처럼 자신의 생체정보가 읽히고 변환되고 반향하는 공간 속에서 자신의 심연으로부터 발신되는 그림자와 만나고 공감하는 일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한윤정은 매우 과학적인 태도로 작업하는 작가이다. 그의 작업세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디지털 시선’과 그것을 통한 ‘가시화’이다. ‘디지털 시선’이란 가시광선에 의해 한정되는 시야를 넘어, 데이터로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곳에까지 인식의 범위가 확장된다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적외선, 각종 전파 그리고 심지어 이제는 중력파까지, 센싱(sensing)에 의해 수치로 표시되는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모든 영역이 ‘시선’의 대상이다.

 

한윤정이 이번에 선보이는 또 하나의 작품 <Drought in California and Korea>(한국과 캘리포니아 가뭄)은 두 지역 가뭄의 관계성을 파악하기 위한, 디지털 시선에 의한 가시화작업이다. 1980년대부터 관심을 끌었던 과학적 가시화(scientific visualization)는 말 그대로 과학연구의 수단으로 추구되었던 미션이다. 가시화는 자잘하게 흩어진 생각들을 하나로 모아서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유효한 작업이다. 예를 들면 지구환경이나 온난화 등의 문제를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기 위한 가시화가 그것이다.

그런데 ‘가시화’는 미술의 중대한 사명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있거나, 있다고 믿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 그것들을 가시화하는 것. 대표적으로 교회와 사원에 수없이 그려지거나 조각된 신상들이 그 대표적 사례들이다.

한윤정은 이 작업에서 촬영과 측정한 각종 데이터를 디지털처리하고, 한국과 캘리포니아 두 지역에서 일어나는 같은 종류의 현상에서 차이점과 유사한 점 그리고 관계성을 발견해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작업으로 측정된 데이터 혹은 해석된 결과가, 전술한 지문이나 홍채처럼, 장대한 지구의 역사가 빚어낸 생체정보의 연장선상에서 설명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가이아이론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두 지역은 서로 다른 생리적 특성을 지닌 개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이 전시의 타이틀을 ‘시선과 흔적’이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이처럼 자연과 우주의 내면과 순환 관계, 그리고 시간이 만들어낸 흔적에 숨어있는 내러티브는 새로운 의식의 탐험, 감상자의 자각을 위한 스토리텔링이다. 이 작가처럼 인체의 생체정보로부터 새로운 예술의 내러티브를 모색하거나, 존재의 출발점으로부터 먼 여정의 흔적을 통해 우주와 자연과 나를 각성하도록 인도하는 작업이야말로, 우리시대의 예술이 세상에 기여하는 가장 의미있는 발걸음이라고 생각된다.

 

이원곤  (미디어예술론 / 단국대학교 교수)




 

오선영

Rainbow Forest


 알록달록 큼직한 롤리팝 사탕 하나 쥐어 주니 서럽게 흐느끼던 하늘도 뚝 그친다. 세어 보니 더도 덜도 말고 딱 일곱 빛깔, ‘빨주노초파남보’가 틀림없다. 그래서 무지개(rainbow)라 불렀다. 음성 언어는 이야기를 장면으로, 수백 가닥을 일곱 다발로, 다시 이들 모두를 달랑 한 마디로 수렴하곤 한다. 속된 말로 ‘싸잡아 퉁치려’ 든다.

 

무지개. 그 어감이 왠지 발그레하고, 감빛이 돌고, 샛노랗고, 푸르께하며, 거무죽죽하다. 달착지근한 과일향이 솔솔 풍기니 하늘도 울다 문득 반쯤 덥석 베어 문다. 오선영의 언어는 발산한다. 단어 하나가 움터 장면들이 줄지어 꽃피고 이야기 향기가 사방으로 물씬 퍼진다. 널브러진 몇 조각 연분홍 꽃잎으로 장미 반 찔레 반 동화 속 덤불숲을 두르고, 녹 투성이 열쇠 하나로 해 질 녘 외진 저택의 휘황한 대문 너머 빛바랜 설화를 열어젖힌다.

 

일반적으로 ‘이미지’란 대상을 호출하는 시각적 단서에 가깝다. 복숭아 그림은 복숭아의 초상이다. 그러나 오선영의 복숭아는 복숭아면서 못다 핀 장미 꽃망울이고, 도자기로 구운 물감 덩어리이며 펑 터진 가슴의 잔해이기도 하다. 애써 코앞에 따다 놓은 달은 봐도 봐도 그냥 달일 뿐이다. 적당히 사이도 두고, 때론 흐린 날도 있고, 침침히 달무리도 져야 토끼가 방아도 찍고, 두꺼비도 뛰고, 사자도 산다. 오선영은 이야기를 잘 빚어 실루엣을 차려 잡는 대신, 이토록 넓게 펴 바르고 불규칙하게 부서뜨린다. 그물이 촘촘하다고 대어를 낚는 게 아니다. 낭만 어부 오선영은 흔적과 자취를 굵게 꼬아 성글게 얽은 회화 그물로 더욱 씨알 굵은 이야기 뭉치를 포획하려 든다.

 

이야기가 한바탕 들끓으며 사방으로 튄 흙탕물 자국 같은 그림들은 경쾌하고 산뜻하면서 즉흥적이고 또한 격정적으로 다가온다. 두께가 주는 마티에르를 과감히 반납한 오선영의 터치는 단지 특유의 섞임과 결을 통해 물성을 인증하곤 한다. 수정할 겨를 없는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승부. 에스키스를 거듭하고, 순서를 가다듬고, 색상을 저울질한다. 너덜거리는 작업 진행 수첩은 ‘계획적이지 않아 보일 계획’으로 빽빽하다. 무심한 몰입의 중첩은 묘사를, 철두철미한 가늠은 즉흥과 격정을 낳는다니 사뭇 역설적이다.

 

김영기 (OCI미술관 큐레이터)

 


틈이 만드는 끊임없는 틈, 입 벌린 상처, 미끄러지는 기표


“문자는 야생에서 볼 수 없다”

– Sigmund Freud, Die Traumdeutung, 1899.

 

우리는 ‘말하는 존재’(parlétre)다. 말(언어)은 자신과 세계의 의미를 고정하는 도구다. 하지만 이 고정은 강제적이고 편의적인 고정이기에 우리는 늘 말의 실재(the Real)를 파악하는 데 실패한다. 결국 로고스(λόγος, 말, 이성)로는 온전한 실재에 다가설 수 없다. 이것이 말이 가진 불가능성이다. 작가 오선영은 바로 이 지점을 감지한 듯하다. 작가는 “잔인한 인간사를 각종 미사여구로 풀어내는” 신화, 전설, 우화, 동화 등의 고전 환상문학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특정 소재와 그것의 의미를 고정하는 단어에 주목한다. 익히 알고 있듯이, 고전 환상문학에서는 숲, 정원, 저택, 장미, 화살, 별, 시체, 고양이 등과 같은 특정 소재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이 소재들은 성향이 다른 작품에서 거듭 등장함으로써 그 내적 의미의 깊이와 너비를 확장해 나간다. 이 소재들은 문학작품에서 문자(기표;記標)라는 형태로 잠시 잠깐 의미(기의;記意)에 고정된다. 하지만 이 소재들이 내포하고 있는 암시, 은유, 상징 등은 문자의 일상적 의미를 초과하여 범람하고, 결국 임시적 고정점은 의미의 물결을 따라 한없이 떠밀려간다. 언어를 뛰어넘어 대상에 도달할 수 있는 신적 직관을 갖고 있지 않은 ‘말하는 존재’는 실재에 접근할 수 없는 유한성(말; 언어)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기에, 결코 대상의 실재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언어와 실재 사이에 있는 메꿀 수 없는 틈, 그 ‘입 벌린 상처’에서 오선영의 작업은 시작된다.

 

단어의 정령(精靈) 불러내기

오선영의 작업은 한마디로 ‘단어 속에 숨죽이고 숨어 있던 정령(精靈)을 불러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먼저 오래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전해 내려오다 하나의 텍스트로 자리 잡은 고전 환상문학을 집어 든다. 그리고 거기서 자주 등장하는 상징성 있는 명사를 수집하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지시하는 대상이 가시적으로 존재하지만 상상 속에 추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순간 설레게 하는 명사”를 하나씩 수집해 나간다(작가노트). 이 명사들은 가시적인 대상을 지시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사실상 어떤 대상이라기보다는 추상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수집 행위에는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성, 기표와 실재의 불일치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붙어 있다. 작가는 이렇게 수집된 명사들의 이미지를 맥락 없이 화면 안으로 불러온다. 그럼으로써 무의미하게 분절된 한 편의 이야기를 완성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어떤 의미도, 서사적 맥락도 없는 작가의 이야기가 마치 특정한 사건을 내포하고 있는 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감상자에게 긴장감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왜 맥락 없는 이미지의 조합들이 사건이 되고, 긴장감을 불러올까? 소쉬르(Saussure) 이래로, 단어나 상징 그 자체에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또는 상징과 상징 사이에서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오선영이 맥락 없이 나열한 (수집된) 단어의 이미지들도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서 파생되는 어떤 의미가 하나의 새로운 사건을 발현시키며 이야기 구축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은 사실 의미 형성의 일반적인 구조적 분석일 뿐이다. 오선영의 작업은 여기에서 한 단계 더 심층으로 들어가야 한다.

 

흔들리는 기표, 끊임없는 생성되는 틈; 단어의 역사성과 기표의 불완전성

(감상자에게 긴장감을 일으키는) 이 새로운 사건을 심층적으로 분석해보면, 내적 작동 기저와 외적 작동 기저가 결합하면서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내적 작동 기저는 작가가 수집한 ‘단어(명사)의 역사성’과 언어라는 ‘기표의 불완전성’이고, 외적 작동 기저는 작품에서 드러나는 ‘유동적 표현성’으로 보인다. 이 내외적 작동 기저가 오선영 작업을 독특한 지점으로 이끄는 동력으로 기능한다고 판단된다.

내적 작동 기저 중 하나인 ‘단어의 역사성’은 작가가 선택하는 문학작품의 특성과 맞닿아있다. 여기서 작가는 현재에서 한걸음 물러난다. 오선영은 역사성을 가진 고전 환상문학(전설, 신화, 우화, 동화 등)을 택하고 거기에서 특정 단어를 추출한다. 그래서 그 단어들에는 역사성이 스며있다. 작가는 자신이 추출한 단어가 “19세기 라파엘 전파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These were] symbolized reminiscent of nineteenth century’ Pre-Raphaelite paintings.)”라며, 자신은 “도상학적으로 작품을 정밀하게 구성했다(My paintings elaborated iconography)”고 말한다(석사학위 작업론). 그의 작업에는 역사성과 고전성이 깔려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가 과거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학 장르(고전 환상문학)와 그것에서 추출한 단어들, 그리고 도상학적 접근. 이러한 과거를 향하는 역사성은 서정적/고전적/장식적/표현주의적인 작가의 외적 표현성과 맞물리며 어딘가 낯설지 않은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오선영의 작품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것은 이러한 조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내적 작동 기저, 즉 ‘기표의 불완전성’이 이 낯설지 않은 작품을 일순간 낯선 “신비한 풍경”으로 변화시킨다. 여기서 작가는 현재에 서 있다. 기표(문자, 혹은 기호로서 이미지)는 늘 불완전하다. 기표는 그 기표의 앞과 뒤에(혹은 주변에) 존재하는 기표들에 의해 의미가 확정될 뿐이며, 언어의 창고에 있는 ‘대체 가능한 기표’(동의어)에게 언제든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늘 흔들린다. 그리고 기의와 기표 사이에 상상적 관계(임의적 연결 가능성, 은유나 상징)로 인해 틈을 가지게 된다. 이 틈은 다른 기표들과 관계 맺으며 끊임없는 또 다른 틈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기표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작가는 추출한 명사(단어) 중 “순간 떠오르는” 명사들을 조합하거나, 뉴스, 잡지에서 우연히 보게 된 동시대 사건의 이미지들과 결합하면서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때 이 ‘기표의 불완전성’, 그 멈추지 않는 흔들림과 끊임없이 생성되는 틈은 ‘단어의 역사성’으로 인한 발생하는 진부함(cliché)을 걷어내고, 임의적이고 가변적이며 변화무쌍한 새로운 사건을 출현시킨다. 우리가 그의 작업을 클리셰로 느끼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끊임없이 틈을 만들며 흔들리는 기표들의 관계, 그 기표의 분절적 관계가 들려주는 새로운 열린 이야기를 듣기(보기) 때문이다.

 

녹아내린 완결과 미결 사이의 장벽; 유동적 표현성

오선영의 작업은 완결과 미결 사이의 장벽을 녹이면서 우리 앞에 놓인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사건으로 이끄는 외적 작동 기저라 할 수 있다. ‘유동적 표현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외적 작동 기저는 사건의 전개를 열어놓듯이 작업의 완결을 열어놓는다. 그리다만 듯한 화면, 무심코 칠한 듯한 붓자국, 흘러내리는 물감, 비어 있는 캔버스의 공간, 간략하게 그린 듯한 스케치……. 작가의 작품은 (관례상) 미결된 상태로 우리를 마주보고 서 있다. 하지만 이 미결된 상태는 결코 미완성이 아니다. 계획된 미결이기 때문이다. 즉흥적으로 보이는 오선영의 표현 방식은 사실 치밀한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 그는 작업을 위해서 꼼꼼하게 사전 스케치를 하고, 표현 방식과 그것이 가져올 예상 효과를 적는다. (나는 공들여 스케치하고 관련 내용을 꼼꼼하게 적은 작가의 스케치 노트를 직접 보았다.) 이러한 계획된 미결은 그의 작업을 완결된 느낌으로 만든다. 작가의 표현성은 묘사와 물성연구를 가로지르고, 완결과 미결을 넘나들고, 스케치와 채색을 동일 선상에 놓는다. 이 유동적 표현성은 ‘단어의 역사성’과 ‘기표의 불완전성’과 맞물리며 화면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사건을 미결인 채로 영원히 열어놓는다.

작가의 유동적 표현성은 평면을 넘어 입체로도 향한다. 하지만 일반적 입체는 아니다. 그가 추구하는 입체는 (은유적으로) ‘평평한 입체’다. 그의 작업 중에는 도기(陶器) 기술을 사용한 입체 작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다면체 형태로 ‘여러 평면들’이 결합한 구조물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여전히 입체가 평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작가는 평면 작업에서 두꺼운 임파스토(impasto) 없는 평평한 표현성(flatness)을 추구한다. 이러한 특성이 고스란히 입체로 전이(轉移)되면서 소위 ‘평평한 입체’로 이어진 듯 보인다. 작가는 말한다. “그림과 도자기가 장식적인 부분, 낭만적인 부분이 혼용되는 경우가 있고, 다른 재료이지만 서로 레퍼런스(상호 참조)가 된다.” “이질적인 면들[특성들]이 상호작용하는 듯하다.”(작가 인터뷰) 두 양식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의미다. 이러한 평면과 입체라는 이질적인 양식의 상호작용은 완결과 미결을 넘나드는 유동적 표현성에서 파생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오선영은 이번 전시에서 하루를 시간 순서에 따라 전시하면서 “일상으로 침투하는 낭만적 풍경”을 선보인다. 그가 보여주는 하루는 틈을 끊임없이 만들며 기표를 끊임없이 미끄러트리는 유동하는 하루일 것이다. 완결과 미결의 경계 없는 열린 하루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하루에 목격자로 초대하는 오선영의 초대장을 쥐고 있다.
 

안진국(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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