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 김석종씨의 전시작처럼 비사진적인 작품을 사진으로는 보지 않는다.
이러한 작품들은 회화의 영역에 가깝지만, 단지 찍는다는 이유로 사진에 분류되고 있다.

사실 회화와 사진의 경계마저 허물어진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사진을 활용하는 박불똥씨나 안창홍씨 같은 화가들도 있다.

이미 사진계도 주관에 의한 파인아트가 대세로, 그림보다 울림이 더 큰 작품들도 나오고 있다.
그 방면의 대표적인 국내 작가로는 원로 황규태선생이 선구자 격이다.
그 다음 꼽을만한 중진 몇몇 중의 한 사람이 김석종씨 인데, 이 분은 항상 아웃사이드라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학맥이나 지연이 안 닿아 그런지, 사진판에 줄을 설줄 모르는지, 그 많은 사진상 한 번 받아본 적 없고,

한국사진을 대표하는 기획전에도 번번이 빠져있다. 이게 한국 사진판의 현주소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작업하고 있고, 작품들도 여전히 잘 팔리고 있었다.
매기가 없어 작품이 잘 안 팔리는 요즘에 닷새 만에 아홉 점이 팔려 나갔다.
가격형성도 거품 빠진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20R 정도의 규격으로 열장만 뽑는 작품이 200만원이면 그의 커리어에 비해 싼 것이다.

김석종씨의 청담동 ‘갤러리 두’ 초대전인 ‘Sea Lights’는 7년 가까이 작업해 왔다고 한다.

그는 한마디로 빛을 자유자재로 요리하는 마술사였다. 여러 가지 노출의 변화로 빛을 포개기도 하고,

섞어 올려서 만들어낸 다양한 질감이나 색감이 그림 빰 칠 정도였다.

물체를 빛 에너지로 환원시키는 작업의 일환이라는데,

에너지를 충돌시키고 확장시켜 자기만의 바다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전시는 10월20일까지 이어진다.

사진,글 / 조문호








[전시장 및 주변 스케치]













[김석종의 만인보]

 

인사동 전각 전문갤러리 앞에 앉은 육명심선생 / 조문호사진



망망한 티베트 고원지대를 서성대는 노년의 한 사진가를 떠올린다. 그는 아득한 세월 저편의 기억을 더듬는다. 아버지는 스님이었다. 어려서 짧은 명줄 길우려고 절로 보냈다. 스무살만 넘기자고 했는데 영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이제는 집안에 대가 끊길 판이었다. 어렵게 설득해서 장가를 들였단다. 하지만 두 달도 안돼 집을 나가버렸다(말하자면 어머니는 씨받이였던 셈이다). 요 밑에 쪽지 하나 남겼더란다. 밝을 명(明)자 마음 심(心)자. 명심이 일곱살 때 어머니가 그랬다. “네 아비가 그예 서방정토로 가셨구나.” 아들은 황혼녘이면 아버지가 가셨다는 서쪽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가 인생의 황혼녘인 일흔살이 되어 서쪽나라 티베트를 찾아간 거였다. 사진작가 육명심(84)이다. 불교의 우주관에서 서방정토의 중심인 ‘수미산’으로 불리는 성산(聖山) 카일라스가 있는 곳. 티베트의 깊은 영성이 단박에 그를 사로잡았다. 고산병에 쩔쩔매면서도 히말라야 언저리에 있는 티베트 고원과 ‘오래된 미래’의 인도땅 라다크, 부탄을 10여년 떠돌았다. (세 곳 모두 티베트불교 문화권이다). 그가 이번에 티베트 순례의 여정을 담아 펴낸 사진집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글씨미디어)을 보니 ‘거장’이라는 말이 허투루 나온 게 아니다.

하늘과 맞닿은 티베트 산악과 광야, 궁핍에 주눅들지 않는 사람들의 삶, 순례자들의 경건한 영혼, 길가의 돌무더기와 강아지 한 마리, 그리고 피어나는 흙냄새와 룽타(티베트 서낭당 깃발)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까지 딱 붙잡아낸 경지다. 마치 점묘화같이 아련한 흑백 사진 속으로 현세에서 내세로 이어지는 어떤 영원의 길이 나있는 느낌이다. 흔히 보는 화려한 오색 빛깔 민속이나 산악풍경을 담은 티베트 사진과는 격이 다르다. 그렇지만 그는 1년 전 티베트 전 지역을 동서로 횡단한 뒤로 길었던 영혼의 여행을 접었다. 이 순정한 땅마저 속절없이 망가뜨리는 개발의 광풍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서다.

그건 이 땅에서도 익히 봐온 모습이다. 1960년대 이래 ‘인상’ ‘백민’ ‘장승’ ‘검은 모살뜸’으로 사라져가는 기층과 토속의 삶과 문화를 담아내 한국 사진역사에 뚜렷하게 획을 그었다. “민중이 깎은 장승이 바로 백민(기층민), 우리 토박이들의 얼굴이더라고. 무를 장에다 박아 놓으면 장아찌가 되듯이 천지조화와 풍토가 곰삭아 우러난 게 장승의 매력이지. 너무 쉽게 내다버린 우리 얼굴이고 정신성이랄까.”


 

육명심이라면 단연 ‘예술가의 초상’을 꼽기도 한다. 10여년 동안 찍은 당대 최고 예술가 70명의 꾸밈없이 솔직한 모습의 사진은 그 자체가 보석이다. 대표적인 게 미당 서정주인데,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양손을 소매에 끼고 ‘햇빛 속의 갈맷빛 등성이’에 쪼그려 앉아 있는 모습에서 ‘팔할은 바람이 키운’ 미당 삶의 내면과 시세계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거다. 어찌보면 뒷간에서 쭈그리고 앉아 볼일 보는 것 같은 모습의 이 사진을 미당도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사람의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았다”고 평하는 대로 그야말로 깐깐하고 대쪽 같은 인상의 박두진 시인, 앞섶을 풀어헤치고 파안대소하는 고은 시인, 반나체로 미치광이처럼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레 스님 중광, 동백림 간첩단사건의 고문 기억이 각인된 듯한 천상병 시인 등의 사진은 당대의 명장면으로 지금껏 회자된다. “그들의 거실을 지나 안방 깊숙이 들어간 사진이다. 당대의 소중한 정신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그가 중·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순전히 독학의 늦깎이로 사진을 하게 된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성장기 내내 스님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아들까지 절에 뺏길 수 없다는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로 뜻을 꺾었다. 끝까지 독신을 고집하다가 서른세살이 돼서야 결혼을 했다. 그런데 아내가 혼수품으로 카메라를 가져왔다는 거다. 신혼여행지에서 처음으로 카메라 조작법을 배워가며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은 지 반년 만에 첫 전국 촬영대회에 나갔다. 처음에는 남들이 찍는 것만 지켜봤다. “잘 관찰해서 남들과 똑같이 안 찍으려고.” 그게 바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육명심의 카드’다. “예술이란 도매금에 넘어가지 않는 것, 통념의 쳇바퀴에서 최대한 멀리 빠져나오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이었을 거다. 육명심과 그의 후배 사진가 황헌만의 경북 문경 장승 촬영길에 동행했다. 그랬는데 대사진가 육명심이 ‘똑딱이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거였다. “하하. 이것도 필요없어. 눈으로 찍고 마음에 걸어두는 사진도 있는 법이지.” 그는 1박2일 동안 정말 한 장의 사진도 안 찍었다. 그러니 ‘사진계의 선승’이란 말도 듣는다. 더 특별한 일화가 있다. 그가 1982년 당대 고승이었던 성철 스님 사진을 찍겠다고 무작정 해인사 백련암에 쳐들어갔다. 사진은커녕 3000배를 하지 않으면 누구도 만나주지 않던 성철 스님이 웬일인지 그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사진은 뭐 하러 찍을라카나?” “스님, 만약 부처님 생전에 사진술이 있었더라면 세상의 불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스님이 씨익 웃더란다. “그럼 한번 찍어봐라.” 여기서 그의 대답이 예상밖이다. “안되겠습니다.” 당시 신장이 좋지 않던 성철 스님의 눈두덩이가 좀 부어 있었다. “그렇다고 사진을 안 찍어?” “예. 나중에 다시 와서 찍겠습니다.” 그 후 다른 사진작가가 먼저 성철 스님의 사진을 찍은 걸 알고 다행으로 여겼다고 한다. “카메라로 찍는 사진이 아니고 내 눈으로, 마음으로 찍은 사진, 정말 천하무구의 사진 한 방을 남겼지.”

그가 대학에서 28년 동안 변함없이 가르친 사진론이 있다. “잘 찍으려 하지 말고 자기 것을 찍어라.” 1998년 대학에서 정년퇴직하면서 모든 직책을 싹 그만뒀다. 강남구 역삼동의 오피스텔 10층에 작은 작업실을 내고 들어앉았다. “정년이야말로 마지막 주어진 찬스거든.” 이번에 가보니 사무실이 그대로 하나의 선방이었다. 나무 바닥 한가운데 참선용 좌복이 놓였다. 그는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3시에 일어난다. 1시간 동안 참선을 하고 40분간 포행(산책)을 한다. 오전에 2시간을 더 수행한다. 산중의 스님들과 똑같이 15년을 꼬박 지켜온 일과다. 벌써 다음 작업에도 돌입했다. 이번엔 우리 삶에 오래된 앙금처럼 가라앉아있는 일상의 불교를 찍겠단다. “인생을 마무리하는 작업이 되겠지. 보다 성숙하고 심화되고 나다운 삶을 찾아내려고 해. 삶과 사진이 하나의 도(道)가 되는 것, 그 생사일여(生寫一如)의 작업이 될 거야.”

 

 

[경향신문]
김석종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80년대 대표 민중미술작가로, 제주 4.3항쟁의 아픈 역사를 드러내기도 한

서양화가 강요배씨의 소묘전이 2월19일부터 3월30일까지 소격동 학고재에서 전시된다. 

80년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30여년 동안 목탄으로 그린 돌하르방 드로잉 등 50여점을 선보인다.
지난 2월19일 오후5시부터 개막된 오프닝파티에는 박제동, 신학철, 박불똥, 장경호, 김정헌, 김석종씨 등

여러 지인들이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김석종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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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자칭 ‘또라이’ 산악인 사진쟁이 안승일(68)은 (‘만인보’가 소개한 적이 있는) ‘또라이’ 산악인 글쟁이 박인식이 백두산 가자고 꼬드기는 통에 인천항에서 배를 탔다. 북한땅 삼지연으로 해서 장군봉에 가야지, 그까짓 중국 쪽으로 가는 게 무슨 백두산이냐고 투덜투덜대면서 난생처음으로 천문봉에 올라갔다.

그랬는데, 백두산과 천지를 보는 순간 확 밀려드는 경외감으로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리고 말았단다.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이 산’에서만 ‘저 산’을 제대로 보는 이치로, 한반도에서 보면 중국 장백산이고 중국 쪽에서 찍어야만 진정한 백두산이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는 거다. 안승일은 이때부터 꼬박 20년 세월을 백두산에만 매달려서, 백두산 사진만 줄기차게 박았다.

아예 백두산 하늘 아래 첫동네 이도백하에 작업실을 차리고 1년 중 8개월 이상은 백두산을 헤매고 다녔다. 간첩질로 오해한 ‘변방참’(국경수비대 초소부대)에 체포된 일도 여러 번이다. 날씨도 좋았는데 그만큼 봐줬으면 얼른 찍고 갈 일이지, 왜 그리 오랫동안 국경을 어슬렁대느냐는 거였다. 나중에는 그 군인들과 도수 높은 중국술을 나눠마시며 두터운 우정을 쌓았다.

 

 

 

백운봉에 두어달 텐트 치고 틀어박히고, 용문봉 무단 입산자 통제소에 강아지 한 마리 데리고 석 달씩 얹혀 살기도 했다. 겨울철은 수은주가 영하 30~40도까지 꼬나박는 천지 주변 눈구덩이에서 “곰처럼” 동면했다. 눈보라 땜에 밖에 못 나가면 천막집에서 김치전 부치고, 눈 녹인 물로 커피 타 마시고, 멸치 육수 내서 칼국수도 해먹었다. 일출 하나 건지려고 서백두 청석봉 산마루에 눈구덩이를 파고 들어앉은 게 “100번에서 1000번 사이”란다. 한번은 30m 높이의 산불감시용 철탑에 올라갔다가 사진기를 떨어뜨려 박살이 났다. “내가 안 떨어졌으니 됐지 뭐.” 헬기를 빌려 타고 항공사진을 찍는 호사도 누렸다. 그게 다 지금은 10년지기, 20년지기가 된 한족 동무들 덕이란다.

 

그런 안승일 사진에는 백두산 장기체류자가 아니면 찍을 수 없는 장면들이 수두룩하다. 백두산은 기상변화가 워낙 심해 하늘이 허락하는 ‘진경의 순간’은 눈깜짝할 새 휙 사라져버린다. ‘그 순간에 딱 거기에 있기’가 바로 그의 사진 찍는 방법이다. 테크닉은 두 번째다. 그는 사진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내가 이 사진을 정말 찍은 건가. 어릴 적부터 왼쪽 다리를 살짝살짝 저는 안승일은 일찌감치 산에다 마음을 뺏겼다. 중학교 때는 사진에 취미 붙여 삼각산을 오르내렸다. 건국대 원예과 2학년 중퇴, 서라벌예대 사진과도 잠깐 다니다 말았다. 대신 틈만 나면 사진기와 등산장비를 걸머지고 입산했다. ‘옆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던 시절이었으니 가는 데마다 신고를 당해 경찰서에 끌려갔다.

결혼을 하고는 충무로에 스튜디오를 내고 광고사진을 찍어 돈을 아주 잘 벌었다. 어느 날 500만원이 든 묵직한 돈배낭을 메고 아버지께 갔다. 그때 경기 시흥 달동네, 20여㎡(6평)짜리 아버지 집이 100만원쯤 했다. 평생 철도원으로 산 아버지가 호통쳤다. “야 이놈아. 집을 늘릴 게 아니라 네 사진집을 만들어야지.” 첫번째 사진집 <山>이 그렇게 나왔다. 경제적 여유가 생긴 뒤로는 산 밑에 방을 얻어 몇 년씩 작업하는 식으로 <삼각산> <한라산> <굴피집>을 냈다.

 

 

안승일은 체크무늬 남방셔츠에다 후줄근한 점퍼만 고집한다. 어머니 장례식도 검정 점퍼 하나 걸치고 치렀다. 1998년 부산에서 북한의 김용남과 함께 백두산 2인전을 열었다. 마침 부산에 들른 김대중 대통령이 전시장에 왔는데, 양복 입기 싫어서 서울로 내뺐단다. 평생에 딱 한 번 소위 정장차림이란 걸 해봤다. 2001년 평양에서 남북공동사진전을 열었을 때다. “김정일 형님 오신대서 악수하고 사인도 받으려고” 넥타이 매고 기다렸다. 딱 30분 동안. 전시회에 김정일은 안 왔다. 그의 산사진 열정과 함께 산악계와 사진계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얘기다.

안승일이 백두산에 바친 건 세월과 열정만이 아니다. 젊어서 광고사진 찍어 벌어둔 부동산까지 거의 모두 털어넣었다. 아직도 옛날 사진기에 필름 넣어 찍는 안승일 사진은 무쇠솥에 장작불로 갓 지은 밥과 같다고 박인식이 말해줬다. 가령 여느 사람이 때깔 고운 조모락지 승용차라면 그는 커다란 바윗돌을 한 차 가득 싣고 며칠이고 달릴 수 있는 대형트럭이라고도 했다.

 





안승일은 “감히 백두산의 영혼을 찍고자 했다. 더불어 백두산에 숨쉬는 민족혼도 담으려 했다”고 힘차게 말한다. 이번에 그 대단한 사진들 수만컷 중에서 추리고 추려낸 60점을 서울 인사동 한복판 아라아트센터에 내걸었다. 지난 20일부터 다음달 18일까지 예정으로 열고 있는 전시회 제목이 ‘불멸 또는 황홀’이다. 혼자서 3300여㎡(1000평)나 되는 5개층 9개 전시실을 모두 채웠다. 초대형 사진들이 많아서 안승일의 평생 산동무인 고령산악회 늙수그레한 회원들이 노련한 암벽등반 솜씨로 천장에 자일을 걸고 매달리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덕분에 산행 때 걷는 위치에 따라 조망이 달라지듯, 중정이 뚫린 여러층을 오르내리며 아주 특별한 백두산을 만날 수 있다. 산에 간다고 누구나 다 산을 보는 게 아니듯, 이토록 다각적이고 다양한 입체감,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백두산 사진은 여태껏 못 봤다. 아무리 백두산에 가봤자 이런 풍경 못 본다.



안승일은 민족의 조종산(祖宗山)인 백두산에서 마늘 먹고 사람이 되어 단군을 낳았다는 곰에 더 가까워졌다(그의 별명이 백두산 곰이다). 그런 애니미즘 신앙을 가졌던 고대 사람 같달까. 전시회 개막식 날, 원래부터 머리가 하얗게 센 ‘백두’의 안승일이 사람들 앞에서 “이제 더 이상의 백두산 사진은 없다. 통일이 될 때까지 더는 백두산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진 재주가 아무리 좋단들 어느 누가 그런 미친 짓을 해? 산에 구덩이 파고 먹고 자면서 사진 찍을, 그런 놈 없어!”

안승일은 백두산 사진작업이 통일을 위한, 통일 후의 민족화합에 초점을 두었다고 했다. 감상적 통일론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찍은 백두산 사진은 우리 모두가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걸 뼈저리게 말해준다. 그러니 ‘통일대박’을 말씀하는 이, 거기 가서, 백두산을 봐야 한다. 안승일은 이번 전시가 끝나면 처음 산사진을 시작했던 삼각산을 찍겠단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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