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최민식선생께서 돌아가신 지가 벌써 10년이 되었다.

최민식 선생 서거10주기를 맞은 심포지움이 지금 다시, 최민식을 바라보다는 제목으로

지난 20일 오후4시부터 부산 F1963도서관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부산광역시부산문화재단이 주최하고 SOOYOIL이 주관한 이날 심포지움에는 이광수교수의

최민식 사진의 작품성: 평론가와 대중의 평가 차이를 중심으로란 발제로 열렸다.

사진가 이동근씨의 사회로 진행된 심포지엄 패널로는 사진가 김문호, 문진우, 강제욱씨가 나섰고,

20여명의 사진인들이 참석했다. 참가한 사진가 중에는 박태진, 배정선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눈에 띄었다.

 

  고 최민식선생은 50여년에 걸쳐 민중의 삶을 기록해 온 우리나라의 대표적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전통적 스트레이트 사진으로 15만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한 평생 작업해 온 휴머니즘이 대중에게 큰 감동을 일으키며,

한 시대를 증언한 훌륭한 사진가로 자리매김했으나, 최민식선생의 사진세계를 제대로 조명한 자리가 없었다.

 

  서거 10주기를 맞아 최민식 선생의 작품세계와

이를 둘러싼 다양한 관점을 나누며 토론하는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열쇠구멍으로 본 도둑사진이라거나 소재주의라는 몇몇 사진가들의 잘못된

비판에 따른 해명은 물론 평소 선생의 삶에 따른 여러 가지 이야기도 나왔다,

루카치가 말한 전형을 통한 예술의 가치를 이룩하며 카타르시스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루카치가 말한 예술은 인간의 삶을 명료하게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사회적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부분에서도 정확하게 일치했다.

선생의 사진만큼 노동운동이나 여러 가지 사회적 쟁점에 사용된 분도 없었다.

박정희정권 초기에는 빈민사진으로 외국원조를 얻는데도 일조하는 사회적 기여도 했다.  

대신 북한으로 흘러들어가 악용되기도 했지만...

한참 후에는 선생을 주축으로 김문호씨가 리얼포토’(사진집단 사실)를 창립하여

사회적 참여에 적극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평론가말로는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중적이고 통속적으로 수준이 낮다지만,

페널로 나선 강제욱씨는 예술이 인문학 위에 있지 않다며,

한 평생 인간애를 다룬 최민식선생의 사진 자체가 사회사적 의미고 작품성이라고 말했다.

나 역시 공감하는 말로, 객관성을 요하는 사진의 재현보다 작가의 주관이 우선되는 표현이라면

사진보다 미술에 해당된다는 생각이다. 카메라나 붓은 대상을 표현하는 도구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찍히는 사람에게 허락 받지 않고 찍은 열쇠구멍으로 본 사진이라 비하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생각해야 한다. 유학에서 돌아 온 이들에 의한

새로운 사진조류가 형성되기 이전의 사진가들은 거리의 스냅 촬영이 일상적이었다.

순간 포착으로 자연스러운 표정이나 동작을 잡아야하는데,

본인에게 물어 본다는 자체가 셔터찬스를 놓치는 것이다.

오죽하면 원로사진가인 고 임응식선생은 초대전 작가와의 만남에서

대표작 구직을 연출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작가의 주관을 높게 평가하는 시류가 빚은 촌극이었다.

 

  요즘이야 초상권문제가 크게 작용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초상권 운운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골 노인들마저 초상권을 말하는 오늘의 현실도 문제다.

사진이 악용되어질 때 초상권을 거론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심도가 얕은 준망원 렌즈를 표준렌즈보다 더 많이 사용하는 것도 탓할 문제는 아니다.

사람을 찍어 부각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렌즈가 105미리에서 130미리 정도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 아니던가?

오히려 유행처럼 광각렌즈로 대상을 왜곡하는 게 더 문제다.

어떤 렌즈에 의해 어떤 방법으로 찍던 그것은 작가가 추구하는 접근방법일 뿐이지,

정해진 원칙이 어디 있는가? 작가마다 접근방법이 다르듯이,

작가의 개성에 따른 개성적인 사진이 많이 나오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닌가?

 

  사람을 찍는 사람에게 소재주의라는 말도 터무니없는 비방이다.

나 역시 소재주의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그러면 그런 사진은 누가 기록할 것인가?

 

최민식 사진상 부정심사 의혹을 밝히는 자리에 불려 나온 당시 운영위원장과 심사위원

문제는 열쇠 구멍 사진이라며 최민식선생을 비방한 자들이 최민식 사진상을 운영하는 자리를 차고앉아,

선생이 주창했던 휴머니즘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터리 사진에다 상을 주며 끼리끼리 단물을 빨아 먹었다는

사실이다. 사태가 확대되어 최민식 사진상 자체가 없어지게 상황까지 갔는데, 최민식 사진상

부정 심사 의혹을 밝히는 자리에 나와 상의 권위를 위해 가난한 친구에게 주었다는 개소리를 지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몰상식하고 염치없는 인간들이 대학 사진 교수나 힘 있는 자리에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최민식선생은 열 네 권의 개인사진집을 낼 정도로 열심히 기록한 사진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로 개인사진집을 낸 분이다.

사진평론가 였던 고 이명동 선생께서도 최민식선생 사진을 극찬했다.

뛰어난 직감력으로 대상과 거리의 개념을 없애는 독자적 시각이라며,

인간의 내면적 리얼리티 핵심에 접근한다고 말했다.

 

  1967년도 영국사진연감에서 스타작가로 지명하며, 선생의 사진으로 특집을 만들 정도였다.

국내외로 유명도가 높아, 그때부터 동료나 선배 사진가들의 시기와 질투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러한 훌륭한 성과를 무시하는 후배들의 비방에 기가 막힐 뿐이다.

 

  발제자와 패널의 많은 의견과 해명도 있었으나, 귀가 어두워 자세히 알아 듯 지 못해 죄송스럽다.

나 역시 발언할 시간을 주었으나 관중공포증으로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해 이 면을 빌어 말한다.

 

  나는 최민식선생 때문에 사진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선생의 모든 사진관에 동조하지만

선생과 같은 어프로치는 하지 않는다.

때로는 거리 스냅도 하지만, 모르는 분의 사진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찍힌 사람의 이름을 밝힌다. 이름 없는 사진은 유령사진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대상 속으로 들어가 작업한다.

 

  최민식 선생을 알게 된 것은 70년대 중반인데, 평소 음악을 좋아 하셔서 선생은 우리 집 단골손님이셨다.

어느 날 휴먼사진집 한 권을 선물로 주셨는데, 받아보니 너무 감동적이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힘이 더 강하다는 생각에 사진을 시작했는데, 때로는 후회스러웠다.

한곳에 빠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이다.

사진을 하며 장사는 항상 뒷전으로 밀려났는데, 매일같이 가게를 종업원에게 맡기고 다녔으니,

잘 되던 가게지만 손님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선생께서 별일 없는 날엔 주 촬영 무대인 자갈치시장에 나오셨다.

한 번은 촬영하는 중에 선생과도 가까운 분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은 것이다.

같이 장례식장 부터 가자는 말에 한마디로 거절했다.

죽고 나서 가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며, 그 시간에 사진이나 열심히 찍으라고 말했다.

내가 죽어도 문상오지 말라며, 죽고 나면 말짱 도루묵이라 했다.

선생은 카톨릭 신자였으나,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현실적인 분이셨다.

 

  촬영이 끝날 무렵에는 남포동의 음악다방을 거쳐 우리 집에 들리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술을 많이 드시진 않았지만, 젊은 손님들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사진 하는 분보다 화가나 음악인들과 자주 어울렸다.

 

  어느 날 최민식선생께서 부산에 사진학원을 차리면 어떻겠냐는 질문에 귀가 번쩍 띄었다.

사진학원을 차리기 위해 급매물로 나온 확대기 세대와 기자재부터 구입해 놓고 서울로 시장조사를 간 것이다.

서울 낙원동에서 민태영씨가 운영하던 한국사진학원3개월 수강 신청을 하고 세밀하게 알아 본 것이다.

가르치는 커리큘럼도 신통 찮았지만, 사진학원 운영이 어려웠다.

그 사진학원은 그나마 군대 사진병으로 갈 수 있는 특전이라도 있어

현상유지라도 한다는 말에 의욕이 꺾이고 말았다.

 

  결국 사진학원은 포기하고 사진 작업에만 매달렸는데,

월간사진황성옥대표의 요청으로 월간사진클럽 부산지부를 창립하게 된 것이다.

지도교수로 최민식선생과 김복만선생을 번갈아 모셨으나, 작업에는 도움 되지 않았다.

찍어 온 사진들을 살펴보며 트리밍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번은 서울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같은 회원이었던 김석중씨와 야간열차를 타고

상경한 적이 있었는데, 최민식 선생을 나무라며 밟고 넘어서야 한다는 당돌한 이야기를 했다.

그 친구도 초창기에는 정신병동을 찍어 사진집을 만들기도 했는데,

그 이후에는 김아타로 이름까지 바꾸며 표현주의로 돌아섰다.

 

  결국 가게를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가 처음으로 나간 곳이 월간사진이었다.

최민식선생은 서울 오실 때마다 만났으나, 수시로 원고청탁을 하는 등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한번은 서울 올라와 인쇄소 맡겨야 한다며 사진 프린트 잘 하는 곳을 물었다.

당시 인사동에 작업실이 두었던 김영수씨를 연결해 주었는데, 비용이 만만찮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선생의 사진 프린트는 콘트라스트가 너무 강했다.

콘트라스트가 강하면 사진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사진 계조가 고르지 못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오래된 습성이라 잘 고쳐지지 않았는데, 사진집 찍을 때마다 애로가 많았단다.

 

  삼년 후 월간사진을 그만두고, ‘한국사협회지편집장으로 갔을 때는선생의 예술론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 당시 원고지 40매에 가까운 원고를 매달 우편으로 보내왔는데,

선생의 독서량이 상당하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한번은 지방에 촬영하러 갔다가 카메라 가방 채 몽땅 도둑맞은 적도 있었다.

너무 난감하여 카메라바디와 렌즈 번호를 적어 분실공고를 회지에 게재했는데,

최민식 선생께서 며칠 뒤 서울 오실 때, 안 쓰는 카메라가 있었다며

니콘FM 바디와 105미리 랜즈 하나를 갖다 준 것이다.

사진 찍는 사람이 잠시라도 카메라가 없으면 안 된다는 선생의 말씀에 코끝이 찡했다.

선생의 사진에 대한 열정은 진작 알았으나, 인정이 많다는 것은 그 때 처음 알았다.

 

  선생을 만나며 지켜 본 바에 의하면 나와 공통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인간을 향한 주제의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음악을 좋아하거나 무엇이든 한 번 시작하면 포기하지 하는 것도 똑 같았다.

예술가들의 풍류에서 빠질 수 없는 화류도 마찬가지다.

 

  한 번은 사진클럽 회원 중에 혼자 사는 여성회원 한 분이 있었는데,

식사나 한 번 같이하자는 편지를 보낸 것이 화근이 된 것 같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혼자 사는 처녀가 아니라 같은 회원 분과 동거를 하고 있었는데,

성격 급한 그 친구가 최민식선생께 전화를 걸어 사진판에서 매장 시키겠다고 겁을 준 모양이다.

그래서 나에게 말 좀 해달라며 장문의 편지를 적어 보낸 것이다.

별 문제는 없었지만, 지금으로 치면 미투의 원조가 아닌가 생각된다.

연서를 보낸다는 자체가 얼마나 로맨틱한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주절주절 생각나는 대로 적다보니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다시 한 번 선생의 명복을 빈다.

 

사진, / 조문호

 

교통통제 중인 시민군. 이창성 사진 / 눈빛 제공

이창성씨의 ‘나는 시민군이다’사진전이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에서 열리고 있다.

’5·18 기념재단‘과 ’눈빛출판사‘가 5,18, 43주년을 기념하여 선 보이는 생생한 기록 사진전이

지난 17일 오후4시 개막식을 가졌다.

 

금남로에서 교통 통제하는 시민군. 이창성 사진

슬픈 역사적 기록이 40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광주 외는 한 번도 전시회를 가진 적이 없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지만, 그 첫 전시가 인사동에서 열려 더 반가웠다.

 

시민군들. 이창성 사진

사진전 개막 시간에 맞추어 갔으나 이미 전시장은 관람객으로 북적였다.

보도 사진가 이창성씨를 비롯하여 당시 시민군 방송 요원이었던 차명숙씨와

'금남로 광수 1호'로 지목되었던 화제의 인물 차복환씨도 와 계셨다.

 

교통통제 중인 시민군. 이창성 사진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와 '인덱스갤러리' 안미숙관장을 비롯하여 전민조, 장남원, 김문호, 김녕만,

윤세영, 정영신, 곽명우, 김 헌, 이명옥씨 외는 모르는 분이 더 많았다.

 

전시 작품은 중앙일보 사진 기자였던 이창성씨가 광주에 투입되어 찍은 흑백 30점과 컬러 10점이었다.

5·18 전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민군’으로 압축되었다.

 

방석모와 총기로 무장한 시민군. 이창성 사진

관람객 틈 사이로 사진들을 들여다보니, 눈물이 나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사진들도 많은데, 누가 그들을 폭도라 할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꽃다운 청춘이라 더 가슴이 미어졌다.

 

의사가 동승한 시민군 구호 지프가 광주 시내를 돌고 있다. 이창성 사진

시민군은 훈련된 군사 조직이 아니라 계엄군 과잉 진압에 맞선 자위 조직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사진들은 계엄군이 물러간 이후의 기록이었는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논란이 되어 온 북한군 투입설이나 불온 세력, 부랑 집단이라는 억지를 단숨에 불식시켰다.

 

취재 중인 이창성 기자, 광주 1980. 5

지금까지 외국 기자들의 활동은 영화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국내 기자들의 취재 활동에 대해서는 평가절하된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이창성씨가 찍은 사진이야말로 5·18에 머물지 않고, 시민군의 활동상을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더 높게 평가된다.

 

이창성씨는 개막식에서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야간 교전중이라 기자들이 숙소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며, 당시의 현장을 지키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했다.

새벽녘에야 시민군 지휘부를 찾아가 설득한 결과 어렵사리 취재 허락을 받아 냈다고 한다.

시민군 지휘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현장에 뛰어든 공식 시민군 사진가가 되었는데,

역사적 현장을 기록해야겠다는 투철한 사명감이 그를 사지로 내몬 것이다.

 

“나는 역사의 기록자로서 현장에 있었을 뿐이다. 혼신의 노력을 쏟았던 것은 1980년 5월이 내게 부여한 의무였다.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만 시민군 사진들은 대부분 젊은이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순전히 그들의 희생 덕분이다.”고 말했다.

15년 전 '눈빛출판사'에서 '28년만의 약속'이란 사진집을 펴낸 것도 전민조씨의 권유와 소개로 성사되었다며,

찍은 사진 2300컷 중 공개하지 못한 사진을 보완하여 다시 사진집을 출간하고 싶다는 뜻도 밝혔다.

 

당시 동료였던 고래 사진가 장남원씨는 '전시된 사진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숨어 찍은 사진이 아니라 대부분 정면에서 찍은 사진'이라며, 이창성씨의 투철한 기자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당시 방송요원이었던 차명숙씨는 발표된 사진 대부분이 외국 기자가 찍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찍어도 내놓을 수 없는 엄격한 상황에서 당당히 발표한 용기가 대단하다고 했다.

 

한때 북한에서 남파된 '광수1호'로 지목되었던, 실제 인물 차복환씨도 나와 그날을 회고했다.

기관총으로 무장된 페퍼포그 차량에 올라탄 채 카메라를 째려보는 문제의 사진은,

당시 이창성 기자에게 사진을 찍지 말라며 화를 낸 장면이었다고 했다.

 

금남로 광수 1호로 지목되었던 시민군 차복환 씨 1980. 5. 22 광주. 이창성 사진

2008년 이창성 사진집 ‘28년 만의 약속’을 펴낸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는 인사말에서

“그동안 논란 되어온 북한군 투입설이나 불온세력이란 억지를 불식하는 전시가 될 것이다. 그리고 5,18은 광주만의 행사가 아니라 전 국민의 행사가 되어야 한다"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듯 모든 진상은 사진 속에 다 있다고 했다.

 

한 장의 사진이 백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진실을 알려 주었다.

 

전시는 5월 29일까지 열린다. 꼭 관람하시어 그 날의 아픔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이창성'28년 만의 약속' 사진집 표지/ 눈빛출판사/ 가격35,000원

 

5,18 영령을 추모하는 날이라 뒤풀이는 생략했지만, 전시관계자들은 '부산식당'에서 만찬의 시간을 가졌다.

 

 

[2023,5,19작성]

브레송 기획전,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아홉 번째 강제욱이 지난 21갤러리 브레송에서 개막되었다.

 

김남진 관장이 기획한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우리 시대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지난해  8월 양승우씨를 그 첫 번째 사진가로 내세우며 시작되었다.

 

사진비평가 이광수 교수가 작가론을 쓴 본 기획전에는 양승우씨를 비롯하여 강재구, 김동진, 김은주, 서준영, 최치권, 모지웅, 박찬호, 강제욱씨 등 모두 아홉 명이 선정되었다. 매월 한 차례씩 한 작가의 지난 사진에서 부터 현재 작업에 이르기까지 전체 작품을 재조명하는 전시다.

 

시대의 목격자로서 인간 중심이라는 기본적인 정신을 계승하며 사회 부조리와 인간관계의 불합리와 모순에 분노할 줄 아는 사진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마지막 작가로 참여한 강제욱씨는 ‘The Lost Land’, ’‘민국(民國) 100’, ‘The Wall’,  ‘The Planet’, ‘Thinguniverse’ 20여 년 동안의 작업을 주제별로 보여주었다.

 

사진가 김영호씨의 사회로 시작된 강제욱개막식에는 부산에서 올라 온 이광수교수의 시원한 사진비평이 있었다.

 

강제욱은 역사를 우주의 시간 속에서 찾는다. 이성과 논리가 아닌 우연과 감성의 시간 속에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미 지나 버린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역사를 사진의 시간 속에서 재현하고 있다.” 명쾌한 이교수의 강의는 귀머거리에 가까운 내 귀에도 속속 들어왔다.

 

강의가 끝날 무렵, 사진가 김문호씨가 이번 기획전에 대한 전체 평가를 물었더니,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을 점검할 좋은 기회였다며,

사진이 너무 자극적이고 독한 사진이 많았다고 한다. 관객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변사가 우는 격이라고 말했다.

 

한바탕 웃고 넘어갔으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밋밋한 화면에 변화를 주어 시선을 끌기 위한 방법이겠으나, 마치 유행처럼 너도 나도 어둡고 자극적인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만의 어법에 고민하며, 진정성 있는 접근이 우선돼야 할 것 같다.

 

이어 강제욱 작가가 작업에 대한 과정과 앞으로의 지향점을 들려주었고, 기획전을 마무리하는 김남진 관장의 소회도 들었다.

 

아무튼,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기획전은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사진의 얼개를 살펴볼 수 있는 장이었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현역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두루 돌아보는 좋은 전시였다.

내가 보기로는 첫 전시였던 양승우론과 두번째 강재구론, 그리고 마지막 전시인 강제욱론이 인상적이었다. 

이 전시는 4월30일까지 열리니, 시간나면 한 번 가보시라.

 

전시를 추진한 김남진 관장의 노고야 말할 것도 없지만, 시종일관 작가론을 써가며 먼 길을 오간  이광수 교수의 노고와 열의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열정적인 분으로 우리나라 사진계에 보석 같은 존재다.

 

지난 2016년에는 매달 두 차례씩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국내 주요 사진가를 인터뷰하여 작가론을 쓰전시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이듬해 결과물로 한국현대사진가 열두 명의 작가론을 묶은 카메라는 칼이다눈빛출판사에 펴내기도 했다.

 

카메라는 칼이다1부는 시대와 시간을 기록하다로 강정효, 권 철, 신동필, 최영진이 참여했고, 2사람과 역사를 바라보다는 김문호, 김보섭, 문진우, 이재갑, 이영욱, 조문호가, 3부인 파인아트 에는 고정남, 이수철의 사진을 논했다.

 

그 외에도 인도 사진가 일곱 명과 최민식선생을 비롯한 한영수, 김기찬, 이주용, 이재갑, 노순택, 조문호 등 국내 사진가 일곱 명의 논문을 마무리하여, 곧 두 권의 논문집도 출판한단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제대로 된 국내 사진가론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진학자들이 잘 알려진 외국 사진가들만 반복해가며 짜깁기하지만, 정작 국내 사진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대주의에 빠지지 않았다면, 밑천이 짧아 그런걸까?

 

이광수씨는 부산외국어대학에서 인도사를 연구하는 교수로 정년을 일 년 가까이 남겨두고 있다. 전공인 인도사는 물론 정치평론에서 사진 비평에 이르기까지 팔방미인인데, 사진으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진 비평에 힘을 쏟고 있다.

그의 그침 없는 바른 말에 주눅 들어, 이단아처럼 기피하는 기득권 세력도 있다. 끼리끼리 사진판을 좌지우지해 온 그 자들의 짓거리가 더 웃긴다.

 

강제욱론 전시 개막식에 함께한 사진가는 김문호씨를 비롯하여 이윤기, 정영신, 김영호, 정윤배, 나인석, 김동진, 서준영, 모지웅, 최치권, 오철민, 고옥룡씨 등 많은 분이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이광수씨는 인도사 유튜브 강의 동영상을 찍기 위해 일찍부터 왔다는데, 일이 끝난 후 나에게 페북 메시지를 보내왔으나, 또 뒷북을 쳤다.

페북은 컴퓨터에서만 볼 수 있어 밖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뒤풀이는 충무로 김삼보에서 했는데, 모처럼 반갑고 즐거운 술자리가 되었다.

이교주의 통쾌한 구라에 술이 술술 넘어갔다.

 

술자리에서 최민식선생 아카이빙을 위한 프로젝트를 맡았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해 주었다.

모처럼 최민식 선생의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번에 마무리한 내 사진 논문은 철학자 니체와 관련이 있다는 말도 했다.

니체라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거나 신은 죽었다정도밖에 모를 정도로 무식한데,

어떻게 관련 있는지 공부 좀 해야겠다.

무려 2년에 걸쳐 논문을 썼다는데, 이 원수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부산행 열차를 타기 위해 밤 열시 무렵에야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몇몇은 맥주집으로 이차를 간단다.

매번 아무런 대가도 없이 먼 길을 달려와 애쓰시는 모습이 너무 고맙고, 안 서러웠다.

 

술이 취해 집으로 돌아와 습관적으로 컴퓨터를 열어보니, 페북에 글이 올라왔다.

부산 가면서 취중에 올린 글 걑은데, 진짜 내가 오래 살아야 한다.”란 열한 자가 적혀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맞는 말이다. 그가 없으면 한국 사진의 미래는 없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김문호씨의 豊裏眞景(풍리진경)’ 사진전 개막식이 

지난 15일 오후6시 전북도립미술관서울관“(인사아트6)에서 많은 분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되었다.

 

사진집 제목으로 내 건 豊裏眞景이란 풍요로움 속의 이면 정도로 생각할 수 있으나,

풍요로운 현대 문명을 누리는 감춰진 그 속에 진짜 경치가 있다는 것이다.

죽음으로 다가가는 디스토피아에 관한 이야기다.

 

개막식에는 사진가 이수철씨의 사회로 사진비평가 이광수씨와 '갤러리브레송' 김남진 관장의

사진의 이해를 돕는 찬사와 김문호씨의 사진작업에 대한 인사말로 이어졌다.

 

이광수교수는 '작가는 과거의 기억을 되새김하면서 현재를 보지만,

결국 사력을 다해 죽음으로 퇴보하는 물질문명의 미래를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풍리진경' 김문호 사진집 표지 / 눈빛출판사 / 160페이지 양장 / 가격 35,000원

모처럼 인사동에서 볼만한 전시가 열렸으나,  20(월요일)까지라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

시간을 낼 수 없거나 지방에 계시는 분은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풍리진경' 사진집을 보면 된다.

 

그날 전시 개막식에는 부산과 장흥에서 오신 이광수교수와 무영스님 등 멀리서 온 분도 계셨다.

 

그리고 30여 년 전 같은 리얼포토맴버였던 안해룡, 김봉규씨를 비롯하여

김남진, 성남훈, 서준영, 정장식, 이수철, 이동준, 제이슨 김, 이윤기, 곽명우,

최인기, 안미숙, 한금선, 정영신, 이주영, 김영호, 전형근, 임계제, 타이거 백

장경호, 최석태, 임경일, 조명환, 유근오, 안원규, 김수길, 이지연, 김영복,전활철씨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많은 분이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전시 뒤풀이는 인사동 사동면옥에서 시작하여 '유목민'으로 이어졌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인사동 벽치기 골목이 모처럼 사진가들로 흥청댔다.

 

전시 오프닝과 뒤풀이에서 찍은 사진이 너무 많지만,

 참석한 분이라면 두루 살펴보며 그날을 기념하시라.

 

사진, / 조문호

 

김문호의 豊裏眞景(풍리진경)’ 사진전이 지난 15일 전북도립미술서울관“(인사아트6)에서 시작되었다.

전시와 함께 '눈빛출판사'에서 풍리진경 사진집도 나왔다.

 

'풍리진경' 김문호 사진집 표지 / 눈빛출판사 / 160페이지 양장 / 가격 35,000원

 

사진집 제목으로 내 건 豊裏眞景이란 뭘까?

사진집에 작가 노트는 물론 촬영장소나 날자 등 아무런 정보가 없다,

나름의 독해력을 요구하는 불친절함은 있지만,

고주알 메주알 변명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보다 백배 낮다.

 

풍리진경이란 풍요로움 속의 이면 정도로 생각할 수 있으나,

풍요로운 현대 문명을 누리는 감춰진 그 속에 진짜 경치가 있다는 것이다.

죽음으로 다가가는 디스토피아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가 채집한 잿빛 살풍경은 생각의 늪으로 끌어들인다.

시멘트로 뒤덮인 아파트나 산업현장의 침울한 이미지가 마치 멸망의 묵시록으로 다가왔다.

아파트 건물 사이로 내려앉는 태양은 지구의 종말을 예고하는 장엄한 서사같았다.

 

편리한 것만 좋아하는 인간의 욕망이 불러낸 눈앞의 현실이다.

작가는 무분별한 생산과 소비로 황폐화되어가는 환경을 추적하며, 인간들의 각성을 요구했다.

 

이번 '풍리진경'에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혹시 인간 멸종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하기야! 몸은 살아 남았지만, 인간성이 파괴된 지는 오래다.

그의 작업은 피폐한 문명에 앞서, 인간성을 잃어가는 현실에 더 주목한 것 같다.

 

사진가 김문호는 40년 넘게 인간과 문명에 천착하며 작업 해 왔다.

그의 사진 작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문명비판이다,

한때 찍었던 초상 사진이 인간에 대한 애정의 눈길이었다면

온더 로드는 인간이 만든 문명에 대한 사유로 넓혀졌고,

그 사유는 대상에 대한 고민으로 연결되었다,

그다음에 보여 준 ‘Shadow’ 성시점경에서 더 구체화되었다.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객관성을 주관적으로 바꾼 대표적 사진가다.

김문호의 관심적 대상은 무엇을 찍느냐가 아니고, 사실을 어떻게 사유하느냐다.

그가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정신이다.

이미지를 포착하는 결정적 순간이나 미학적 형상성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기는 정신이라는 것이다.

 

 풍리진경 사집집 서문 말미에 쓴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의 글이다.

 

사진가 김문호는 무슨 연유에선지는 모르겠으나, 도시의 풍요로움, 자본주의의 발전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그렇게 되기에는 분명 여러 고정점이 있을 것이다. 그 고정점들을 중심으로 그는 시간의 변화와 역사의 흐름을 풍요로움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본 것이다. 그 풍요로움 속은 무엇일까? 인간관계의 상실일 수도 있고, 잃어버린 고향일 수도 있고, 정겨운 이야기일 수도 있다. 작가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자신의 이런 생각을 나누던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간다고, 결국, 사람들은 릭셔리한 외제 차를 타고 질주하지만, 그것은 이미 다 깨져버린 껍데기일 뿐이라고, 그러니 작가 보기에 그들이 가는 곳은 결국 시멘트 덩어리 숲이고, 그 덩어리 너머로 붉은 해만 떨어질 뿐인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되새김하면서 현재를 보지만 결국, 미래를 보는 것이다. 과거를 보니 현재 서 있는 위치가 보이고, 결국, 미래가 보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사진가 김문호의 풍리진경은 미래에 관한 이야기다. 찬란한 유토피아가 아니고, 스산한 디스토피아의 미래. 발전으로 여기지만, 사력을 다해 죽음으로 퇴보하는 저 휘황찬란한 물질문명의 미래 말이다

 

전시는 20(월요일)까지다.

 

사진,  / 조문호

 

 

 

 

 

2021.10.1

지난 28일은 많은 화가들이 방문해 주셨다.

원주에서 김진열씨가 올라와 김진하, 이태호, 김정헌씨가 모여 역적모의 하는 ‘이모집’으로 안내했다.

 

그 자리는 김수영시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그림전을 협의하는 오찬 자리였다.

‘흐린 세상 건너기’로 건너가 차 한잔하고 전시장에 돌아오니, 사진가 최정균씨가 와 계셨다.

 

이 분은 나와 동갑인데 무슨 비결이 있는지, 나보다 10년은 젊어 보인다.

그리고 전시장 올 때마다 봉투를 내 놓으며, 좋은 전시를 어찌 그냥 볼 수 있냐고 하신다.

그 보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뒤이어 류연복, 박진화, 손기환, 이인철, 정복수, 박문종씨 등 화가들이 전시장을 방문해 주셨다.

 

그날은 학고재에서 개막된 박영균의 ‘보라색 언덕 너머’와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정비파의 ‘한라에서 백두까지’ 목판화 전시까지 겹쳐

겸사겸사 서울 나들이를 하신 것 같은데, 다들 그리웠던 얼굴이었다.

 

문 닫은 전시장에서 숨겨 둔 와인으로 마시는 술맛은 더 좋았다.

발동 걸린 술자리가 ‘사랑채’로 이어졌는데,

술안주로 내놓은 나물에 취했는지 한 사람 한 사람 쓰러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김진열씨가 어지럽다며 일어나더니, 류연복, 이인철씨까지 다락방에 더러 누웠다.

 

화단의 술 판을 휩쓸던 역전의 용사들이 차례대로 무너진 사건은 오랫동안 구설수에 오를 것이 틀림없다.

그 와중에 정복수씨는 내 초상화까지 그렸는데, 마치 지명수배된 범죄자 형상이었다.

 

그 다음 날인 29일에는 일찍부터 구중서선생을 비롯하여 장봉숙, 서정란 시인이 오셨다.

어려운 걸음을 하신 구중서 선생께서 식사하러 가자는데, 어찌 나 몰라라 하겠는가?

 

더구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온데다 전시장에서 만나기로 한 선약까지 있었다.

대전의 이석필씨에게 연락받은 김문호씨가 먼저 전시장으로 올라왔지만,

잠시 기다리게 하고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두 분 식사하는 자리에 끼어 술만 홀짝홀짝 마셔야 했다.

그런데, 밥 값 내려고 따라 나섰는데 구중서 선생께서 계산해 버렸다.

그렇다면 차라도 대접해야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마음에 걸려 찻집은 따라갈 수 없었다.

그나저나 술을 급하게 마셨더니 일찍부터 취해버렸다.

 

헐떡이며 4층까지 올라갔는데, 다들 식사하러 가고 없었다.

‘마중’에 갔다던 이석필씨와 김문호씨는 간판을 잘못 보았다며 개성만두집에 앉아 있었다.

 

이차로 자리 잡은 ‘유목민’ 골목에서는 조명환, 기국서, 장 춘씨가 합석했고,

김기덕, 유진오, 김발렌티노도 만났다.

 

30일엔 사진가 하재은씨를 비롯하여 김문경, 윤현선, 김석철씨가 찾아오셨다.

운현선씨가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 동영상을 만들어 보여 주는데, 너무 멋지더라.

‘유목민’ 골목에서는 사진가 권양수, 박윤호씨를 만났는데, 외국에 나갔던 안애경씨도 오셨다.

 

뒤늦게는 화가 강지현, 이현숙씨와 어울려 술 한잔했다.

강지현씨는 이현숙씨 초상화를 그려 오셨더라. 다들 페이스북에서 가까워진 사이 같았다.

 

노재학, 임경일씨가 차례대로 오가기도 했고, 김이하 이승철씨는 맞은 편에 자리 잡았다.

 

이틀 만에 올리던 보고서가 삼일만에 올리게 된것은

술로 점차 기력이 쇠진해가는 징표이오니 널리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아무튼 전시장을 찾아 주신 많은 분에게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코로나로 답답한 세상을 산지가 이년이 넘었으나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다들 외출을 자제하며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나 책은 잘 보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엔 책이 잘 팔린다는 이야기도 나왔으나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하기야! 나 역시 모르는 것은 인터넷에서 뒤져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신문 한 장 보지 않는 판에...

 

지난 8일 오후 여섯시 무렵 정영신씨와 함께 ‘눈빛출판사’ 예술산책이 있는 ‘경의선 책거리’에 갔다.

부산에서 이광수교수가 올라 오셨는데, '눈빛출판사 이규상씨와 사진가 김문호씨도 와 있었다.

격리기간 중에 약속한 일이라 달력에 동그라미까지 쳐두고 기다린 날이었다.

 

모처럼 반가운 분을 여럿 만났는데, 전시장 아닌 책방에서 만나는 기분은 또 다르다.

새로 나온 따끈 따근한 사진집을 살펴보는 설레 임을 알랑 가 모르겠다.

초딩 때 방학 책 받아보는 그런 기분 말이다.

시인이며 무용평론가이고 서양화가인 고)김영태선생의 '초개일기'가 서거14주기를 맞아 나왔고,

마지막 사진집이 될지도 모르는 한정식선생의 ‘가을에서 겨울로’도 눈에 밟혔다.

 

힌두교사 깊이 읽기/ 이광수 지음 푸른역사/ 2만 5000 원

이광수교수로 부터 ‘푸른역사’에서 펴낸 ‘힌두교사 깊이 읽기’란 책도 한 권 선물 받았다.

그 책은 힌두교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힌 책인데, 불교를 제대로 알려면 힌두교부터 알아야한단다.

힌두교를 모르는 불교 공부는 반쪽짜리라는 말에 더 관심이 생겼다.

불교가 인도의 역사에서 태어나 항상 힌두교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변화했기 때문이란다.

 

이광수교수는 정치평론에서부터 사진평론에 이르기 까지 다방면에 해박하지만,

국내 유일의 힌두교사 전공자로 부산외대에서 인도학을 가르치고 있다.

너무 많이 알아 구라나 글 빨이나 아무도 당할 자가 없다.

오죽하면 교수가 아니라 교주로 부르겠는가?

 

책 1부에서는 '힌두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고,

2부는 힌두교 형성 과정의 역사를 통해 힌두교 기원을 찾았다.

힌두교가 체계화되고 불교가 발생하는 과정을 살펴 본 것이다.

3부에서는 힌두교가 세 가지 전통을 흡수 통합하는 과정과,

힌두교의 구동 장치로서 바르나(카스트)를 분석했다.

 

뒤이어 힌두교의 특징 중 하나로 꼽히는 관용 그리고 관용과 뗄 수 없는

박해와 개종이 힌두교에서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었는지를 구명했다.

30여 년의 연구를 통해 "힌두교가 형성되고 변화해 온 모습과 성격을

인도사의 흐름에 따라 역사학적으로 분석했다"고 한다.

"상상으로 그려진 힌두교에 힌두교 본연의 색을 입혔다“는

'푸른역사' 신간 ‘힌두교사 깊이 읽기’를 강력 추천한다.

 

그리고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는 경영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임대료가 비싼 ‘디지털미디어시티역’에 있는 지금의 사무실을 없애고 파주로 옮긴단다.

이제부터 사진집 출판도 엄선해 줄여나가야 할 처지라는 말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 사진의 대표출판사인 ‘눈빛출판사’가 이럴 진데 군소출판사야 어찌 버티겠는가?

책 사보지 않는 풍토는 사진집을 펴내야하는 사진가들에게 고스란히 되돌아간다.

다들 필요한 책들을 살펴보고, 이제부터라도 책보는 것을 생활화했으면 좋겠다.

 

길거리는 많은 젊은이들이 오갔지만, 책거리에 널린 책방을 찾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이규상씨 따라 ‘경의선’이란 술집을 찾아갔다.

다섯 명이라 두 테이블에 나누어 앉을 수밖에 없었지만, 모처럼의 정겨운 자리였다.

술도 담배도 자가 격리 후 보름 만에 맛보는 터라 입에 짝짝 달라붙었다.

 

고기 굽는 데는 따를 자 없는 김문호씨가 구운 삼겹살로 입 호강을 했는데,

술만 취하면 나이 값을 못하는 내 버릇은 여전히 고쳐지지 않았다.

어찌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뱉을 수 있단 말인가? 요즘처럼 남자 수난시대에...

또 하나 신기한 것은 흡연자가 별로 없는 판에 네 사람 모두 골초라는 점이다.

밖에서는 피우고 안에서는 마시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이차로 간 ‘홍대포’집에서는 주량을 초과해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이 원수를 살아생전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술김에 간크게도 택시를 불러 세웠는데, 거침없는 말에 삐쳤는지 정동지 입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신이시여! 굽어 살피소서.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갤러리 브레송’에서 기획한 ‘The Last Dreamer’ 섹션2가 열리고 있다.

‘갤러리브레송’과 ‘스마트협동조합’이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한

본 전시는 김지욱, 남영주, 모지웅, 류엘리, 변성진씨 등 젊은 사진가 다섯 명이 참여했다.

 

김동진, 김문호, 김장욱, 안명현, 최치권씨가 참여한 섹션1은

지난 10월21일부터 30일까지 열린바 있다.

 

‘The Last Dreamer’는 코로나에 주눅 들어 사는

사회현상을 형상화한 사진가들의 시각적 연대기다.

 

김남진관장은 ‘코로나 사태 전후에 새롭게 제작되거나

미발표 상태에 있던 작품들을 모아 재구성했다고 한다.

작가들의 창작 의욕을 높이고 창작 활동의 공백을 최소화하는 등

관람객들에게 코로나의 장기화에 따른 위로와 희망을 전하고자 기획되었다.’고 한다.

 

섹션1에서는 코로나19 상황에서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망을 돌아보고,

새로운 방향을 정립하려는 시도였다.

섹션2에서는 세상과 사회에 시선을 돌린 일군의 작가와는 달리

인간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불안과 우울을 극복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

 

이번 기획전에 대한 안내를 보아 대략의 내용은 알았으나,

요즘에는 전시장에 잘 다니지 않는다.

사람 모이는 장소에 가지 않기로 한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또 하나 이유는 나이값 좀 하라는 주위의 충고도 한 몫 했다.

전시장 사진찍어 리뷰까지 올려주는 짓을 왜 하냐는 것이다.

소개하는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욕한다는 것을 모르냐?고 되물었다.

맞는 말이지만, 성질이 모질지 못해 끌려온 것이 사실이다.

 

지난 2일 ‘갤러리 브레송’을 찾게 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정영신씨와의 약속에 따라 차를 가지고 그 녀를 데리러 갔다가

입구에 서 있던 김관장에게 붙들려 버린 것이다.

그 날이 2부 개막식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갔는데,

어찌 정영신씨만 데리고 나올 수 있겠는가?

 

전시만 보고 포스팅은 하지 않기로 했으나, 습관적으로 찍은 사진 때문에 또 올리게 되었다.

전시장에는 김문호씨와 이윤기, 곽명우씨 등 잘 아는 사진가도 여럿 보였다.

전시작가인 모지웅씨로부터 사진집을 받았는데, 마음은 편치 않았다.

책은 절대 공짜로 받지 않기로 했지만, 거절하는 게 더 어려웠다.

 

전시작들을 돌아보니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벽에 걸린 이미지가 주는 불안감이었다.

 

성 소수자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지웅의 ‘More’,

자신의 불안한 모습을 드러낸 류엘리의 ‘Blue Portrait’,

대면의 자유를 갈구하는 남영주의 ‘코로나 시대의 사랑’,

욕망과 속박을 선이라는 매개를 빌려 몸에 투영한 변성진의 ‘hide & seek or YOU’,

깊은 내면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김지욱의 ‘미궁’ 등,

각기 다른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정신적으로 피로한 시기에 열린 좋은 전시였다.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The Last Dreamer’ 섹션2는 오는 10일까지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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