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강룡권선생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방콕하니, 편하긴 해도 무료해 미칠 지경이다.

덕분에 정영신씨 수행비서 노릇은 착실히 하는 편인데. 볼 일이 있다며 같이 가잔다.

새로운 일거리가 생겨 가야한단다.

 

스튜디오에는 독립운동 탐사자료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는데,

자전거 사학자로 알려진 고 강룡권 선생 유품도 있었다.

무려 열다섯 박스나 되었는데, 생전에 사용한 카메라와 녹음기를 비롯하여

탐사에 나선 매일 매일의 기록들이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 자료를 보며 새삼 그 분의 공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십 년 동안 자전거로 만주 벌판의 항일유적지를 찾아다닌 것이다.

현장을 목격한 분들을 인터뷰하고, 사진으로 빠짐없이 기록했다.

선생께서 찾아낸 것의 대표적인 것이 대종교 3종사 묘소인데,

많은 독립운동 사료가 그분의 노력에 의해 밝혀졌다.

 

연길시에서 출발하여 도문, 목단강, 호림, 상지, 하얼빈,

길림, 장춘, 대련으로 돌아오는 22,000리 길을 답사했다는데,

거리로 치면 지구를 한 바퀴 이상 돈 것과 맞먹었다.

‘분투는 천직,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라는 글을 좌우명처럼 여겼지만,

1999년 단둥 답사지에서 과로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연변사회과학원 연구원이었던 선생은 ‘동북항일운동유적답사기’,

‘죽은 자의 숨결, 산자의 발길’, ‘홍범도장군’ 등 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에 의해 수많은 항일 투쟁사가 밝혀졌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본받아야 할 분이 틀림없다.

 

며칠 전, 저녁 무렵에는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예쁜 여인과 함께 있으니, 녹번동 ‘풍년 집’으로 오라는 것이다.

 

요즘은 호흡이 가빠 가급적 술과 담배를 자제하지만, 어찌 사모님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예쁜 여인과 함께 있다는데...

 

식당에는 ‘스마트협동조합’ 서인형 이사장도 함께 있었는데, 여인은 잘 모르는 분이었다.

첼리스트인 류필립씨라는데, ‘스마트협동조합’ 조합원이라고 했다.

천명의 악단을 만들 것이라는 야심찬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덕분에 즐거운 만찬의 시간을 즐겼는데,

그 녀의 소망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거리두기로 오나가나 독거의 외로움은 깊어만 간다.

다들 꼼짝을 안 해 만날 수도 없지만, 만나도 눈인사나 나눈다.

매일같이 모여 앉은 부랑자들은 주위의 시선도 따갑지만,

나 역시 감염에 일조하는 것 같아 어울리기를 꺼린다.

 

몇 달이 넘도록 주눅 들게 하는 ‘코로나’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다.

무더운 쪽방에서 도망쳐 와 녹번동 정영신씨 집에서 지내다,

생각나면 돌아가는 반복된 나날을 보내는데,

컴퓨터와 노는 게 유일한 소일거리가 되어 버렸다.

 

지난 24일은 인삼드링크 받아가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공원은 한가했으나, 입구에 진을 친 병학이 아지트는 여전했다,

그 날 낯선 노숙자 한 사람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머리를 많이 다쳤다.

먹는 게 없는데다 술기운에 몸을 가누지 못해서다.

 

신고 받은 119 대원이 달려왔으나 그들이 할 일은 없었다.

머리가 찢어져 병원에 옮겨야 했으나, 당사자가 손을 내저었기 때문이다.

한 푼도 없는 거지 치료비를 누가 낸단 말인가?

상처를 꿰매야 하지만, 머리에 붕대만 감아놓고 떠나 버렸다.

 

무덥고 갑갑한 붕대 따위는 이내 벗어 던져버렸다.

술로 소독하려는지 연신 술만 퍼마셨다. 삶에 애착이 없어 보였다.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고통은 피할 수 없다.

무소유의 자유도 눈앞에 닥친 고통 앞에서는 개소리에 불과하다.

 

어떤 놈은 돈을 쌓아두고도 돈 욕심에 눈이 벌겋게 설치는데,

아무 것도 없이 살아도 기초생활 수급비도 못 받아 먹는 불쌍한 신세다.

불공평한 현실을 탓해봤자 무엇에 쓰겠는가?

 

그들과 달리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는 원희룡씨를 길에서 만났다.

원씨는 후원자로부터 도시락을 받아와 전해주기도 하고,

고물을 주워 모아 파는 등 무슨 일이던지 닥치는 대로 한다.

한 푼이라도 벌어 자기만 바라보고 있는 시골가족 생활비를 보내기 위해서다.

 

할 일없이 혼자 사는 독거나, 방황하는 부랑자에 비한다면 선택받은 삶이다.

인삼액기스는 받았냐며 쪽방촌 정보부터 알려준다.

이제는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줄 세우지 않아 언제든지 찾아 가면 된다.

진즉부터 그렇게 하면 될 일을 한 번에 끝내려는 속셈에 고집 부린 것이다.

 

상품을 주는 물품보관소에 들렸더니, 직원들 뿐이었다.

나누어 준지가 며칠 되었건만 많은 물건이 남아 있었는데,

다들 바깥출입을 하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영양이 부족한 쪽방 노인들에게는 좋은 선물일 텐데...

 

상자에는 ‘제일제당’에서 보낸 ‘통째로 갈아 넣은 인삼 한 뿌리’라고 적혀있었다.

진짜 인삼을 갈아 넣었는지 뜨물 같은 흰 액체에서 인삼 맛까지 났다.

과분한 선물인 것 같았으나, 노숙자는 이런 혜택도 받을 수 없다.

그들은 몸 생각을 하지 않아, 줘도 좋아하지 않는다.

외로운 쪽방사람들은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윙윙 되돌아가는 선풍기 바람 맞으며 티브이 채널만 돌리고 있다.

가끔 인삼 액기스로 몸보신도 하겠으나, 그 넘치는 정력은 어디다 쓸까?

각자도생하는 세상, 혼자 재미있게 노는 방법이나 연구해야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서울역 11번 출구로 나가는 후암동에 멋진 사진전문갤러리가 생겼다.

사진기획자 이일우씨가 사진창작지원 사업을 비롯한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해 개관한 전시장인데, 내가 머무는 쪽방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정영신씨와 함께 가기위해 미루다보니, 23일에서야 갈 수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 듯이 같은 후암동이지만 낯설었다.

쪽방촌에서 3-4백 미터에 불과한 거리지만, 바닥이 달랐다.

 

신진작가 지원전으로 정예진씨의 “Masquerade ;

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라는 제목의 사진전이었다.

개관전이라면 유명작가를 내세우는 전례에 비해 신선하게 다가왔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묵직한 느낌의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로데스크한 느낌을 주는 초상사진들이 압도했다.

젊은 야성이 꿈틀거리는 이미지에서 인간의 심리적 불안과

욕망의 찌꺼기가 스물 스물 기어 나왔다.

 

타인의 초상을 통해 스스로의 고민과 욕망을 드러냈는데,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의 고민은 시대가 만들어 낸 모순이었다.

자유분방한 초상사진이 주는 울림이 강열했다.

 

난, 전시작가 정예진씨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

사람은 물론 이력 한 줄 아는 바 없는, 말 그대로 신진작가다.

경험 많은 중견이면 뭐하고, 오래 찍은 원로면 무슨 소용있겠는가?

생각이 신진작가에 미치지 못하는데...

 

그 사진에서 청춘의 고민과 심리적 불안을 엿볼 수 있었고,

넘치는 욕망의 에너지를 읽을 수 있었다.

정체성의 가면을 쓰고 이중적 삶을 살아야 하는 암울한 현실을 대변한

작가노트에 적은 아래 말이 작품 창작의 계기를 잘 말해준다.

 

“세상은 나와 다른 모습으로서의 삶을 강요하였다. 나는 내가 아니었다.

이것이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진들은 젊은이의 고민과 욕망이 범벅된 외침이었다.

 

전시가 열리는 곳은 천장이 높아 고풍스런 분위기를 풍겼는데,

마치 정예진씨 전시를 위해 만들어 진 공간처럼 잘 어울렸다.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고 나가려니, 낯익은 분이 반겨주었다.

오래 전 ‘스페이스22’에서 여러차례 뵌 분인데, 큐레이트로 일하는 오혜련씨였다,

기어이 차 한 잔 하고 가라지만,

관장 이일우씨가 갤러리 보수공사 하느라 정신없었다.

 

일손을 놓게 할 것 같아 도망치듯 빠져 나와 버렸다.

이제 가까운 곳에 오붓한 데이트 코스 하나 생겼으니,

눈 먼 할멈이라도 한 분 꼬셔야겠다.  꿈도 야무지지만...

 

글 / 조문호

 

‘Korea Photographers Gallery‘ 개관전

정예진씨의 “Masquerade ; 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

전시기간 : 2020_0616_0707

관람시간 : 11:00am~06:00pm / 공휴일 휴관

KP갤러리 : 서울 용산구 소월로2나길 12(후암동 435-1 B1)

Tel. +82.(0)2.706.6751 / kpgallery.co.kr

 

6.25 전쟁 70년에 펼친 사진집 "끝나지 않은 전쟁 6.25"

 

[스크랩] 오마이뉴스 / 박 도 / 20. 6. 24

 

남진하는 인민군 (1950.6)

 

6,25전쟁 70년

 

낙동강변의 시신(1950년 9월).

 

2020년 올해는 6.25전쟁이 일어난 지 꼭 70년 되는 해다.

그 전쟁을 체험한 세대는 이미 대부분 세상을 떠났거나, 아니면 고령이다.

그때를 생생히 증언할 분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이야기다. 나는 6.25전쟁을 체험한 마지막 세대다.

또한 나는 6.25전쟁 사진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과 맥아더기념관 등지에서

수천 장의 사진을 수집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때의 이야기를 이 기사에 남기고자 한다.

1950년 내가 여섯 살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내 고향 구미는 6.25전쟁 초기 최대 격전지였던 낙동강 다부동전투의 배후지였다.

당시 정부에서는 전황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 시민들은 인민군 진주 직전

혹은 주둔 이후에야 피란을 떠났다.

우리 가족은 구미 북녘 김천 쪽에서 '쿵쿵' 대포소리와 '뚜뚜뚜' 따발총소리

그리고 고약한 화약 냄새를 맡으면서 피란봇짐을 쌌다.

남자들은 가재도구를 담은 피란봇짐을 지게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인 채 종종걸음으로 무작정 남쪽으로 떠났다.

뙤약볕 속에 애써 낙동강 나루까지 갔지만 그곳에 이미 진주한 인민군들이 호통을 쳤다.

"남조선 인민들, 미제 쌕쌕이(폭격기)한테 불벼락을 만나기 전에 날래 살던 곳으로 돌아 가라우."

 

기총소사로 들길에 나딩굴고 있는 피난민 시신들 (1950.8.25)

 

우리 가족은 하는 수 없이 낙동강을 코앞에 두고 발길을 돌렸다.

우리 가족이 살던 마을로 돌아오다가 구미 광평동 사과밭을 지날 무렵,

미 공군 F-84 세이브제트기(일명 '쌕쌕이') 공습(기총소사)을 정면으로 받았다.

그러자 우리 가족들은 가재도구를 모두 팽개친 채 과수원으로 달려갔다.

남자어른들은 사과나무에 올라 매미처럼 나무둥치를 껴안았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사과나무 그루터기 사이의 땅콩밭에 납작 엎드렸다.

그때 나는 여섯 살 어린이로 미군 전투기의 무서움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그 전투기가 떨어뜨리는 폭탄과 내뿜는 기총소사 순간을 보려고

땅콩밭에서 일어났다가 할머니께 뒤통수를 된통 쥐어 박혔다.

한 30분 정도의 쌕쌕이 공습이 끝나자 여기저기 피란민 시신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과수원에 숨어 다행히 무사했다.

 

광복4주년 기념식을 준비중인 한국군최고지휘관들 신성모 국방장관, 손원일 해군제독,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리우 자유중국 사절단장, 신태영 장군 등이 보인다. (1949.8,15)

 

지천으로 흩어져 있던 시신 더미들

 

그해 가을 피란에서 돌아오자 동네사람들 상당수가 보이지 않았다. 전쟁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사람 중에는 팔이나 다리를 잃은 사람도 있었다.

그때 숱한 젊은이들이 입대했지만 상자 속 하얀 유골로 돌아왔다.

그때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씀했다.

"네가 군대에 갈 때는 38선은 없어지고 통일이 될 거다."

하지만 그 손자가 군에서 전역한 지 벌써 50년이 지났다.

이즈음에는 내 손자뻘 젊은이들이 38선 대신에 6.25전쟁 이후 새로 생겨난 휴전선을 사이 둔 채

동족끼리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아직도.

마침 6.25전쟁 70돌을 맞아 사진전문 눈빛출판사에서 <끝나지 않은 전쟁 6.25>이라는

사진집을 펴냈다. 이 사진집을 펼치자 70년 전 6.25전쟁의 참상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표지

이규상 (엮은이) / 눈빛아카이브 / 432면 / 칼러 양장 / 3만8000원

 

미군과 소련군이 서울과 평양에 진주하는 모습, 탱크를 앞세우고 거침없이 남하하는 인민군 모습,

산길 들길 아무데나 지천으로 흩어져 있던 시체더미들,

쌕쌕이(전투기)들이 염소 똥처럼 마구 쏟아 떨어뜨리는 장면,

포화에 쫓겨 가재도구를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피란민 행렬,

흥남부두에서 후퇴 수송선에 오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

굶주린 채 죽음의 행렬을 하는 국민방위군 모습, 학살된 양민을 젓갈 담듯 매장하는 장면...


나는 눈물어린 눈으로 이 사진집을 봤다.

그때의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하늘에서는 전투기의 굉음과 폭격소리로,

산과 들에서는 멀리서 가까이서 들려오는 대포소리와 기관총소리,

논이나 밭 그리고 들길 도처에 누에처럼 널브러진 시신들,

전투기들의 융단 폭격으로 온전한 건물 하나 없이 온통 폭삭 주저앉은 도시와 마을...

그리고 탱크 캐더필러(바퀴)가 돌진해 오는 소리들이 쟁쟁하게 들려왔다.

사진 한 장은 백 마디 웅변보다도 더 강하게 진실을 말해준다.

아무리 기억력이 비상해도 사진 이미지를 뛰어넘을 수 없다.

 

57미리 무반동총, M1소총으로 전투하는 유엔군

 

새삼 돌이켜보는 인간의 무지함

 

불나방은 제 무리가 불에 타죽는 것을 빤히 보고도 자신은 예외라고 여기고

불에 뛰어들다 끝내 타죽고 만다.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떤가? 전임 대통령이 무리한 장기 집권 끝에 비극적인 최후를 당한 것을 보고도

자기만은 예외라고 같은 길을 거듭하다가 똑같은 최후를 맞았다.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건 역사에 대한 각성과 배움이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나라일수록 역사를 아끼고, 사랑하며, 올곧게 기록해 쌓아가고 있다.

한 역사학자(김성식)는 <내가 본 서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국 사람은 역사를 아끼며, 프랑스 사람은 역사를 감상하고, 미국 사람은 역사를 쌓아간다."


서구인들은 사소한 것이라도 역사가 있으면 이를 아끼고 그대로 보존하며

원형을 손상치 않고자 심지어 건물의 먼지를 닦는 것도 주저한다.

그들은 조상의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있는 바른 역사를 일깨워주고자 그대로 보존한다.

이는 역사를 모르는 이들은 하등동물처럼 거듭 시행착오를 거듭 하거나

역사의 시계 침을 되돌려 놓기 때문이다.

 

흥남부두에서 유엔군 수송선을 기다리는 젊은 부부(1950년 12월)

 

분단의 서막 그리고 죽음의 행렬

 

그럼, 6.25 70주년을 맞아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끝나지 않은 전쟁 6.25> 사진집 일부를 소개한다.

①미군 소련군 서울 평양 진주 : 이 장면은 우리나라 분단의 시작이요, 6.25전쟁의 출발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소련은 서로 손을 잡은 연합국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세계대전에서 승전 이후 두 나라는 적대관계로 돌아섰다. 그 최전선이 한반도 38선이었다.

그래서 38선은 화약고로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었다.

 

평양에 진주하는 소련군 (1945.8)

 

서울에 진주하는 미군 (1945.9)

 

②죽음의 행진 국민방위군 행렬 : 6.25전쟁 중,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현역군인과 경찰, 학생을 제외한 17세부터 40세까지 청장년 50만 명으로 국민방위군을 조직했다.

이들을 남으로 후퇴시키면서 그들에게 돌아갈 피복 값과 급식비를 군 고위층이 착복했다.

그래서 징집된 국민방위군 상당수는 얼어죽거나 굶어죽었다. 그들의 죽음 행렬이다.

 

후퇴하는 국민방위군 행렬

 

③장진호 작전 중 동사한 미 해병대 : 1950년 미 해병대의 장진호 전투는 적을 형편없이 깔보고

기후도 산악 지형도, 곧 전쟁의 기본인 천문과 지리도 무시한 무모한 졸전이었다.

적진 깊숙이 진출했던 미 해병대는 중국군과 추위를 맞닥뜨리자 속수무책으로 후퇴했다.

그 과정에서 숱한 동사자가 발생했다. 그들은 '추위가 적군보다 무섭다'는 말을 남긴 채

총 한 발 쏘지 못하고 그대로 동사했다. 그래서 미군은 아직도 그런 트라우마가 남아 있을 것이다.

 

장진호 전투중 동사한 미해병대 시신들

 

④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 1953년 정전이 됐지만 아직도 휴전상태로

한반도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판문점 정전 회담장 (1965)

 

사진집 <끝나지 않은 전쟁 6.25>은 모두 432쪽, 300여 장의 사진으로 

6.25전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6.25전쟁 당시 종군기자들이 남긴 사진이 많다. 

하지만 그 사진들을 '어떤 맥락에서 보여주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이 사진들을 정리 편찬한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의 안목에 경의를 표한다.

 

전선 시찰 중 유엔군 소속 기자와 인터뷰하는 이승만 대통령(1950년 9월 9일)

 

나는 감히 이 사진집을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들에게 물려줘야 할 

'6.25전쟁 비망록 및 징비록'이라고 감히 말씀 드린다. 

이 사진집은 우리 겨레가 길이 보존해야 할 사료가 되리라 믿는다. 

전쟁을 예방하고 대비하는 자만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남한 주민들이 인민군 탱크를 환영하고 있다(1950년 7월)

 

끝나지 않은 전쟁 6.25

이규상 (엮은이) / 눈빛아카이브 / 432면 / 칼러 양장 / 3만8000원

 

 

 

Masquerade ; 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

 

정예진展 / JUNGJEJIN / 丁藝振 / photography

2020_0616 ▶︎ 2020_0707 / 공휴일 휴관

 

정예진_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22_100×67cm_2020

 

 

초대일시 / 2020_0618_목요일_01:00pm

Korea Photographers Gallery 개관展

관람시간 / 11:00am~06:00pm / 공휴일 휴관

 

 

KP 갤러리

Korea Photographers Gallery

서울 용산구 소월로2나길 12(후암동 435-1 B1)

Tel. +82.(0)2.706.6751

kpgallery.co.kr

 

 

한국 사진예술의 발전과 정체된 국내 사진문화의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설립된 Korea Photographers Gallery (이하 K.P 갤러리)가 2020년 6월 16일 신진작가 정예진의 『Masquerade ; 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 전시를 시작으로 오픈합니다. 서울사진축제 예술감독, 대구사진비엔날레 큐레이터 등 전시기획자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이일우 기획자가 설립한 K.P 갤러리는 동시대 사진예술의 역할과 방향에 대해 고민을 바탕으로 사진인들을 위한 창작지원 사업, 국제교류사업, 학술행사개최, 예술가 매니지먼트 등 사진문화 발전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입니다.

 

정예진_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01_155×100cm_2020

 

정예진 작가의 『Masquerade ; 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전시가 2020년 6월 16일부터 7월 7일까지 K.P 갤러리에서 개최됩니다. Masquerade 는 '가면무도회', '진실, 또는 진심을 숨기고 가면을 쓰다' 의미로 이번 전시에서 정예진 작가는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정체성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담은 22점의 초상사진을 소개합니다.

 

정예진_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03, #02, #04_155×100cm×3_2020

 

정예진_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18, #08, #05_155×100cm×3_2020

 

'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 라는 작가의 고백처럼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들은 개인의 의지와 달리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매 순간 다양한 정체성의 마스크를 바꾸어 쓰며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과 그 속에 감춰진 개인들의 욕망을 담고 있습니다. K.P 갤러리 개관 전시이자 첫 번째 신진작가 지원사업으로 정예진 작가를 초청하여 개최되는 이번 전시는 사진 속 인물들의 숨은 이야기와 그들이 지닌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욕망을 소개하고 우리들 마음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을 바라보고 성찰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 K.P 갤러리

 

정예진_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14, #10, #12_155×100cm×3_2020

 

정예진_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07, #06, #16_155×100cm×3_2020

 

'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 ● 심한 우울증을 겪던 18살의 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모아 둔 수면제를 모두 삼켰다. 하지만 어떤 상황도 변하지 않았고 결국 난 도망치듯 고향과 부모님을 떠났다. 새로운 곳의 삶은 한 순간 내게 심리적 안정을 주기도 했지만 내게 감쳐진 나의 내적 불안감은 시간이 지나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현실에서의 삶은 내가 원하는 나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와 다른, 원하는 않는 다른 내 모습으로서의 삶을 강요하였다. 나는 내가 아니었다. 이것이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 나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내 속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나는 친구에게 우연히 구입한 사진기로 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의 모습에 나의 생각과 감정, 그들을 바라보는 내 욕망을 투영하였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고민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 현실의 삶은 여전히 나의 생각과 괴리가 있고 아직도 여전히 아프지만 사진은 내게 위안을 준다. 사진을 통해 나를 찾고 싶다. ■ 정예진

 

Vol.20200616e | 정예진展 / JUNGJEJIN / 丁藝振 / photography

쪽방은 외롭고 뜨거운 감옥 이라지만, 이제 불안하기 까지 하다.

고령자 많은 종로 쪽방 촌에 코로나 확진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더구나 감염 경로조차 알 수 없다는데, 남의 일이 아니었다.

코로나가 취약계층을 파고든다는 점은 불길한 징조다.

 

클럽 등 유흥주점과 대형 물류센터의 집단감염도 큰 부담이지만,

사회 취약계층이 집중된 쪽방 촌이나 고시원 같은

사각지대에서 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수많은 노약자가 희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제는 돈의동 쪽방 촌을 소독하는 장면이 티브이에 방영되었다.

동자동 방역은 언제 하는지, 대책은 있는지 궁금했다.

녹번동에서 돌아와, 등짐 풀기가 무섭게 내려왔다.

서울역쪽방상담소에 알아보기 위해서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무더운 날씨라 축축 늘어졌다.

 

새꿈어린이공원이 가까워오니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왜 이리 그리운지 보고 싶은지, 못 맺은 운명 속에 몸부림치는

병들은 내 가슴에 비가 내린다박재란의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용성이 엄마 황춘화씨가 술이 취해 청승맞게 부르고 있었다.

병들은 내 가슴에 비가 내린다는 대목에서는 비가 아니라 눈물을 쏟아냈다.

먼저 떠난 용성이 생각에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만 것이다.

 

요즘은 가급적 술자리를 피하나, 이 장면에서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이른 시간부터 마셨는지, 그늘을 비켜 선 술자리는 햇볕에 노출되었고,

여기 저기 빈병이 나 딩굴고 있었다.

 

마스크 쓴 나를 알아본 유정희씨가 막걸리 두병만 사달라고 눈을 깜빡였다.

먼저, 자리를 그늘로 옮기고 쓰레기부터 치우라고 했다.

막걸리 두병에 소주 한 병, 그리고 꽈배기 하나를 사 주었다.

단돈 오천 원에 일곱 명이 희희낙락이다.

 

제 버릇 개 못 주듯, 카메라를 끄집어냈다.

서럽게 우는 황씨를 습관적으로 찍찍 갈기니, 카메라 싫어하는 차군이 손사래 친다.

처음 보는 낮선 사내는 자기를 찍어달라며 얼굴을 들이댄다.

이럴 때는 집어넣는 게 상책이다. 싫어하는 자가 있으면 통사정해도 찍지 않는다.

 

눈물을 거둔 황씨가 막걸리를 따라주었는데, “이 술을 어쩔까?” 망설여졌다.

일 할 것인가? 퍼질 것인가? 이 술 한 잔이 하루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어울려 마시다보면 코로나 감염을 걱정하지만,

어쩌면 접근하기 싫어하는 부랑자 자리가 안전지대인지도 모른다.

한 참을 망설였지만, 그만 일어섰다.

 

동자희망나눔센터로 자리를 옮겨 동자동 방역 대책을 알아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단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그들을 탓할 수는 없지만, 맨날 뒷북 치는 행정인걸 어쩌랴!

 

힘없이 돌아오는 발길에 황춘화씨 노래가 겹쳐진다.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건만, 창살 없는 감옥인가 만날 길 없네"

 

 

사진, / 조문호

 

 

 

징그러운 코로나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이 비정한 세상에 함께 어울리는 것을 거부하며 방구석으로 몰아넣는다.

세상사는 방법과 질서를 하나하나 바꾼다.

 

쪽방 사람들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들 꼼짝 하지 않으니, 사람만나기가 어렵다.

노숙인은 한결같지만,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게 낫다.

 

날씨까지 정신 나갔는지, 한 여름을 방불케 한다.

4층은 달구어진 옥상 열기에 찜질방이 되어버렸다.

다들 팬티만 입고 살아 벌써부터 십구금이다.

 

옆 방 사는 김씨는 교도소에서 지내는 게 더 편하겠단다.

차라리 코로나에 걸려 죽고 싶지만,

사람대접 한 번 받아보지 못한 게 억울해 죽을 수도 없단다.

 

사람들 발길이 줄어든 공원도 낯설기 그지없다.

거리는 담배 피우러 나온 회사원만 서성일 뿐, 한적하다.

골목 구석에서 외로움 달래는 자의 술잔만 허허롭다.

 

이제, 무료급식과 모든 지원이 줄어들어 살기도 힘들어졌다.

슈퍼마켓은 문 열었지만, 빈민들을 위한 푸드마켓은 문 닫은 지 몇 달째다.

아랫 공원은 거지들 들락거리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가 버렸다.

 

코로나 핑계로 줄이고 생략해, 외롭고 배고파 못 살겠다.

 

코로나가 사람들 정신 차리게 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여지 것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었으나, 코로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또 하나 신통한 것은 빈민들 줄 세우는 일도 사라졌다.

 

몇 년동안 길들이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나팔 불었지만 쇠귀에 경 읽기더니,

코로나가 ‘서울역쪽방상담소’ 직원들 버르장머리를 고쳐 버렸다.

지금처럼 하면 될 걸, 왜 그렇게 고집 부렸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 역시 쪽방에만 처박혀 있으니 할 일이 없어졌다.

별 일 없는 동자동보다 녹번동 정영신씨 집에서 개길 때가 더 많아졌다.

올 여름엔 정선에서 무너지기 직전인 집이나 수리할 작정이다.

 

녹번동에서 편한 밥 얻어먹자니, 사모님께 알랑방귀를 뀌어야 살아남는다.

청소나 설거지는 물론, 궂은 일은 모두 내 차지다.

식모 아니, 식부의 설음을 알랑가 모르겠다.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하다 그릇 깨는 일은 다 반사고,

너무 열심히 해, 할 때마다 팬티가 다 젖는다.

그보다 더 귀찮은 것은 담배 피우러 밖으로 들랑거리는 일이다.

 

누군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는 소리라지만,

길 잃은 사나이의 비애를 여인네들이 어찌 알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아버지의 시대로부터 From Father's Times

 

이선민展 / LEESUNMIN / 李宣旼 / photography

2020_0605 ▶︎ 2020_0628 / 월요일 휴관

 

이선민_윤병천 뉴라이트 전자, 1942년생_C 프린트_150×120cm_201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31119c | 이선민展으로 갑니다.

이선민 홈페이지_www.sunminlee.net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룩스

GALLERY LUX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7길 12(옥인동 62번지)

Tel. +82.(0)2.720.8488

www.gallerylux.net

 

 

이선민 작가는 한국 사회의 가족 구성원과 그들의 삶의 방식이 묻어나는 공간을 사진으로 포착하고, 이로써 구현된 내러티브를 통하여 자신의 호기심을 사회학적 차원으로 확장해가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 전시 『아버지의 시대로부터 From The Father's Times』는 오랜 시간 동안 손으로 정교한 기술을 연마하며 변함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노년기에 접어든 아버지의 모습에 주목한다. 주로 1930년대부터 1950년대 사이 태어난 이들의 삶은 변화무쌍한 한국의 근현대사를 지나왔다. 해방과 한국전쟁, 혁명과 쿠데타, 유신 등 격동의 시대를 '몸'으로 살아낸 이들의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건의 생생한 기억들을 넘어선다. 작가는 그들의 초상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연마한 숙련된 기술뿐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관부터 자신의 생에 대한 책임감까지 선연히 포착한다. 또한 초상 사진 배경으로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오브제들을 응시하며 아버지의 아버지가 손에서 손으로 전한 장인 정신들을 반추한다. 켜켜이 책이 쌓인 건축가의 오래된 서가와 50년 동안 광장시장을 지킨 유비상회와 그 안에 수북이 쌓인 원단들, 성수동 금속 제조 공장에 빽빽이 쌓여있는 수많은 물건들과 커다란 시계, 4대째 이어온 대장간의 망치 등. 작가는 노년기에 접어든 아버지와 오랜 시간 함께한 공간을 담은 사진으로 그들의 삶의 정체성을 반추해보는 시간을 마련한다. 나아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시간들을 조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갤러리 룩스

 

이선민_송병도 상원 ENG, 1958년생_C 프린트_150×120cm_2018

 

 

오래된 공간, 기억의 시간들 ● 「아버지의 시대로부터」작업은 오랜 시간동안 한 가지 일을 연금해온 노년 남성들에 대한 초상 작업이다. 사진 속 인물들은 다난한 한국의 근현대사가 변화무쌍하게 펼쳐졌던 시대를 연금술사로서 또 아버지로서 살아낸 이들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번 「아버지의 시대로부터」의 작업은 격랑의 시대를 살아온 노년 세대에 대한 초상인 동시에 이들이 연금한 기술과 가치와 그 살아온 시대를 이들 스스로의 서술을 통하여 반추하는 기억하기의 시간이 되기도 할 것이다. ● 이 작업의 시작은 2015년 「연금술사」란 가제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디지털화와 기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모든 것이 속전속결로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오랜 시간 한 땀 한 땀 손으로 정교한 기술을 연마하며 변함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능숙한 연금술사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보고 싶었다. 현자를 찾아가 질문을 던지는 순례자처럼 이들이 연금한 것들을 직접 바라보고 그들이 붙잡은 가치에 대하여 또 지금까지의 삶의 여정은 어떠하였는지 들어보고 싶었다. 무슨 질문을 하고 또 무슨 대답을 들을지는 미지수였다. 막연히 그들의 오래된 작업 공간에서 그동안 나의 윗세대와 나누지 못했던 오래된 궁금증들에 대해 질문하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던 것이다. ● 첫 만남은 3대째 수제맞춤 양복점을 경영하고 있는 테일러 이경주님이었다. '종로 양복점'이라는 가게 이름처럼 종로에서 대대로 양복점을 운영하고 있는 분이었다. 처음 양복점을 방문했을 때 장식장에 걸려있는 양복들보다 그 위에 나란히 세워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촬영을 마치고 인터뷰를 하며 두런두런 그의 과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50년 동안 양복을 만들어온 그에게 그 기술을 가르쳐 준 것은 그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그가 독립할 때 본가로부터 들고 나온 것은 달랑 종로양복점이라 쓰여진 간판 하나였다. 그에게 양복 만드는 기술은 부모에게 받은 유일한 유산이며 동시에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가업의 계승이라는 책임감보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더 절박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그 말 속에 그가 감당해야했던 것들이 묵직한 무게감으로 전해졌다. 또 한 가지 인터뷰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할아버지는 일본에 있는 양복 학교에서 양복을 배웠고 그의 아버지는 만주에 있는 유명한 일본 양복 회사에 취직하여 양복 기술을 배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가 태어난 곳은 만주였고 해방이 되자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와 할아버지가 하시던 종로 양복점을 운영했다고 한다. 이렇듯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하에서 일본으로 만주로 이주를 감행하며 기술을 습득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가업을 세워갔던 것이다. 이 종로 양복점의 연대기가 연금술사라는 작업의 가제를 「아버지의 시대로부터」라는 제목으로 변경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태어난 년도를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을 해방둥이라고 소개하였다. 평범하게 보이는 그의 테일러로서의 삶은 이러한 시대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었고 결혼하여 이사를 10번이나 다니면서도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종로 양복점의 간판만은 계속 가지고 다닐 정도로 이 '종로 양복점'이라는 말에는 그의 전 삶의 정체성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이선민_정현, 연극배우, 전 극단 민예 대표, 1945년생_C 프린트_150×120cm_2016

 

 

이번 작업을 함께한 인물들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 사이에 출생한 세대들이다. 해방 전후로 출생하여 전쟁을 실제로 경험한 세대이며 이들이 독립하여 직업을 가지고 결혼하고 자식들을 키우며 살아온 60, 70년대는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로 얼룩진 시기였다. 해방과 전쟁, 혁명과 쿠데타, 유신 등 요즘 젊은 세대들은 역사 교과서에서나 접한 사건들을 이들은 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세대이다. 그렇기에 이들이 겪은 전쟁과 가난과 이주의 기억들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들 뇌리에는 여전히 생생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 이번 작업의 인물 중 88세로 최고령자인 1932년생 김원하님은 14살 때 일본에서 해방을 맞았고 바로 고향인 포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18살에 6.25 전쟁이 발발했고 비행기 폭격으로 집의 유기공장이 모두 불타버려 온 가족이 경주로 피난을 떠났다. 20세에 장남으로서 6남매를 대표하여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하여 생계에 도움이 될 약학을 전공한 후 서울로 상경하여 제일향료회사와 종근당에 근무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45년간 황학동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그가 서울로 이주하여 경제활동을 시작한 30살 무렵인 1960년대에는 4.19혁명과 5.16 군사쿠데타를 목격하였고 70년대에는 유신과 대통령 암살, 12.12 군사 쿠데타를 목격했으며 80년대에는 광주항쟁과 민주화 항쟁과 대통령 직선제 등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지나왔다. 이 모든 시대적 사건들을 겪으며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중학교 때 6.25전쟁이 일어나 집이 폭격 당했던 일과 기차에 매달려 피난 갔던 일과 고등학교 때 남의 집에 입주하여 과외를 하며 고학했던 때라고 대답했다. 종로 양복점 이경주 사장님도 6.25 전쟁이 일어나 온 가족이 피난갔던 일이 살면서 가장 기억나는 사건이었다고 회상했다. 이것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당시 5살 어린 아이였음에도 아직도 그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다고 하였다. 이렇듯 이 노년 세대들에게 '전쟁'과 '가난', 그리고 '이주'라는 키워드는 가장 힘들었던 기억이자 극복해야 할 절박한 문제였다는 것이 작업을 함께한 분들의 공통된 진술이다. ● 10여 년 전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도 이 분들과 비슷한 1935년생이다. 나의 아버지도 「아버지의 시대」작업의 인물들처럼 전쟁과 가난을 겪었고 홀 홀 단신 고향인 부산에서 서울로 이주하여 낯선 땅 서울에서 생존을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았다. 이처럼 '전쟁'과 '가난', 그리고 '이주'라는 키워드는 「아버지의 시대로부터」 모델이 된 노년 세대들에게 공통분모와 같은 기억이다. 1999년부터 2004년에 걸쳐 작업했던 초기작 「여자의 집」 사진에서는 명절에 모인 여러 세대들의 시선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교차한다. 그 수평을 달리던 시선들이 이번 노년 세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로서 사진가의 눈에 보여지고 들려지기 시작하였다. 이 세대는 이러한 시대적 환경을 극복하는 데에 온 에너지를 집중하고 생활인으로서 가장으로서 좌우 돌아볼 겨를 없이 앞만 보고 나아갈 수 밖에 없었던 세대였구나 하는 생각에 미치기도 하였고 '취미도 못 가져봤고 이거저거 돌아보고 살 정신 없었다' 는 말속에서 이 노년 세대들이 통과해야 했던 절박한 삶의 여정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였다.

 

이선민_강영기, 동명 대장간, 1952년생_C 프린트_120×150cm_2015

 

 

「아버지의 시대로부터」작업은 사진 속 노년의 인물들이 평생에 걸쳐 연금한 일들과 지켜온 가치와 그 살아온 시대를 조명하고 있다. 수 십 년의 시간이 응축된 그들의 공간과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공간과 하나가 된 듯 익숙한 이들의 모습들 그리고 그 공간을 채운 오래되고 손때 묻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응시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오래된 물건들과 평생 연금한 기술과 가치가 어떻게 다음 세대로 흘러가는지 그들의 시간을 천천히 따라가 보려 한다. ●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진이 올려진 테일러 이경주님의 장식장 안에는 이들에게 전수받은 기술로 만든 양복들이 차곡차곡 걸려 있다. 이것들을 배경으로 서있는 노년의 테일러를 바라보며 그가 전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몸으로 부딪치며 겪어왔던 세월을 생각한다. 또 그가 지켜온 것들은 무엇일까도 생각해 본다. 켜켜이 책이 쌓인 건축가의 오래된 서가와 50년 동안 광장시장을 지킨 유비상회와 그 안에 수북히 쌓인 원단들, 성수동 금속 제조 공장에 빽빽이 쌓여있는 수많은 물건들과 커다란 시계, 4대째 이어온 대장간의 망치 등 이들의 오래된 오브제들도 천천히 바라본다. 종로 양복점과 유비상회 사장님의 50년을 이어오고 있는 오래된 우정도 떠올려 본다. 컴퓨터도 없었고 기계화도 되지 않았던 시절 몸과 손으로 일구고 지켰던 이들의 시간들이 이 공간에 가득히 흐르고 있다. 나의 아버지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손에서 손으로 전수한 정신과 기술들도 함께 말이다. 「아버지의 시대로부터」작업은 마치 오래된 서가에서 한 권 한 권 책을 꺼내 읽듯 천천히 이 이야기들을 읽어가려 한다. ● 이렇듯 이번 「아버지의 시대로부터」작업은 노년 세대들의 시간을 기억해주는 작업이다. 이들 노년 세대가 감당해온 삶의 네러티브와 그 기억이 담긴 공간을 응시하고 경청하는 것이다. 1996년 『황금투구』란 제목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나는 아버지를 시이저에 비유하여 바라보았다. 25년이 지난 지금 내 딸이 그 당시의 나의 나이와 비슷해질 제법 많은 시간들이 흘렀다. 「아버지의 시대로부터」작업은 지금 세상에는 없지만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와 비로소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업을 하며 익숙한 내 아버지의 포우즈와 문장들이 보여지고 들려졌다. 그렇게 나는 나의 아버지의 삶으로 초청되었고 그 시대와 대화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시대로부터」작업이 아버지의 세대와 동시대의 또 다른 세대들과 나누고자 하는 담론에 다름 아닐 것이다. ■ 이선민

 

이선민_이경주 종로 양복점,1945년생_C 프린트_120×150cm_2015

 

 

Old Spaces, A Time for Recollection ● The project 「From the Fathers' Times」 is a portrait of older generation of men who have devoted numerous years into their line of work. The men featured in the photos are those who have lived through some difficult periods of modern Korean history as alchemists and fathers. This is why 「From the Fathers' Times」 project is not only a portrait of the older generation who have witnessed the country's turbulent past, but also a way to remember their skills and the values they hold through their own narrative. ● The project took off through the working title 「The Alchemists」 in 2015. With digitalization and mechanization quickly taking over and changing the society, I wanted to meet the skilled alchemists who were unaffected by the new shift in society and still put in long hours to perfect their skillsets. I also wished to hear their stories. Like a pilgrim who goes to the wise man to ask questions, I too wanted to see for myself what they were working on and listen to the values they were holding onto and their life's journey. I went into this not knowing what kind of questions to ask, nor what kind of answers to expect. I vaguely saw this as an opportunity to converse with the older generation and ask them questions that I longed to know the answers to in their old workspace. ● The first model I met was Mr. Gyeongju Lee, a tailor and owner of a tailor shop that had been run by his family for three-generations. Like the shop's name 'Jong-no Tailor Shop,' the store was located in Jong-no. When I first visited the tailor shop, the first thing that caught my eyes was not the suits that were hanging up, but the pictures of the owner's father and grandfather. After the photoshoot, Mr. Lee shared some of his past with me in an interview. He started off by saying that he had been making suits for 50 years and was taught by his father. The only thing he took with him when he first left home was a sign that had 'Jong-no Tailor Shop' written on it. For him, having the skillsets to make suits was the only thing that he inherited from his parents and the only way to make ends meet. After hearing this story, I thought that he may have had a stronger sense of responsibility towards being a father than inheriting his family shop. I could also feel the pressure he had to endure in his words. Another interesting part of the interview was when he told me that his grandfather had learned how to tailor suits by attending a tailoring school in Japan while his father acquired his tailoring skills by working for a famous Japanese tailor shop in Manchuria. As a result, Mr. Lee was born in Manchuria, but after Korea's liberation, his father moved the family to Seoul to run the Jong-no Tailor Shop that was originally run by his father before him. Even before Mr. Lee was born, Mr. Lee's grandfather and father had risked migrating from Japan to Manchuria to learn the skillsets to support their family and start a business due to historical events. The chronicles of Jong-no Tailor Shop was the reason behind the changing of the working title of 「The Alchemists」 to 「From the Father's Time」. When we first started the interview, I had asked him when he was born and he introduced himself as a 'Liberation Baby,' someone who was born in 1945, the year of Korea's liberation. Underneath his life as an ordinary tailor, he had undergone a rough period in Korean history and had to move around 10 times even after he got married. However, he always carried the shop's sign 'Jong-no Tailor Shop' with him, showing how much weight these three words held in his life. ● The men featured in this project were all born from the years 1930s to 1950s. Most of them were born during the time of Korea's liberation from Japan and directly experienced the Korean War at a young age. By the time these men found a steady job and settled down to raise a family, they were faced with the turbulent political periods of the 60s and 70s. This generation of men witnessed periods of history that the young generation today can only see in textbooks. This may be why even though many years have passed, the men can still recall vivid memories of the war, poverty and migration. ● The oldest model in this project was Mr. Wonha Kim, a 88 year-old who was born in 1932. He was fourteen in Japan when Korea was liberated and managed to go back to his home in Pohang. At eighteen, the Korean War had begun, and due to a plane bombing, his family's factories all burned down, forcing them to evacuate to Gyeongju. As the eldest son of six children, he was the only one who was able to get a college education. After choosing to study medicine to support his family, he moved to Seoul and worked for Cheil Perfumery Company and Chongkundang Pharmaceutical Company. He later opened his own pharmacy in Hwanghak-dong and has been running it for the past 45 years. When he first started working in Seoul at the age of thirty, he had to witness the April 19 Revolution and military coup of the 1960s. He also had to live through the Yushin regime and the assassination of President Park in the 1970s, another military coup in December 12, 1979, and the Gwangju Uprising, the fight for democracy, and the change to a direct presidential election system in the 1980s. When asked at which point in life he had felt the most devastated, Mr. Kim answered the time in middle school when his house was bombed during the Korean War, which led his family to barely hang onto a running train and evacuate and when he had to live in someone else's house and tutor other students to support his family in high school. Mr. Lee, the owner of Jong-no Tailor Shop had also replied that the memory of his family fleeing for shelter during the Korean War was the most striking to him. He added that even though he was only 5 years old at the time, it was such a shocking incident that he still had a vivid memory of it. For the older generation that took part in this project, war, poverty, and migration were common keywords that came up that reminded them of the most difficult times in their lives and as pressing issues that they desperately wanted to resolve. ● My late father, who passed away around 10 years ago, was born in 1935, similar to the men mentioned above. Like the men featured in the project 「From the Fathers' Times」, my father underwent the war, faced poverty and came to Seoul alone from Busan to make a living. Like mentioned above, memories of the war, poverty, and migration became a common theme for the models in this project. Working on this project took me back to my first project 「A Woman's House」, which I worked on from 1999 to 2004. The photos taken show how the different generations feel somewhat distant from each other when they gathered during the holidays. After working on this project did I finally understand why there was such a distance. This generation of men had spent all their time and energy to overcome the difficult times to make a living and support their families. I was able to acknowledge how rough their life's journey was when they said that they were not able to afford the time to enjoy a hobby or to just stop and take a look around. ● 「From the Fathers' Times」 project casts light on the works and values that the older generation have lived by and the periods in history that they underwent. The photos portray the decades old workplace with the men there, looking like they have been a part of the space from the beginning, filled with old, personal objects. Furthermore, this project will slowly follow how the men's old objects and lifelong skillsets and values will be passed on to the next generation. ● Inside the display cabinet that has the photos of Mr. Lee's father and grandfather above, there are suits hanging inside, which were made with the skills Mr. Lee learned from father and grandfather. As I looked at the old tailor who stands in front of this background and also hear his stories, I was able to get a glimpse of the years of life he had to endure and also think about what was it that he held onto. Additionally, I captured moments in an architect's old bookshelf full of books, the 50-year old Yubi Store located in Gwangjang Marketplace that is also full of fabrics, the metal manufacturing factory full of many objects and the large clock in Seongsu-dong, the blacksmith's hammer that was passed down for four generations, and their other old objects. I also thought of the 50 years of friendship between the owner of Jong-no Tailor Shop and the owner of Yubi Store. Their workplaces are made up of all the hours that they spent doing everything by hand, without the help of computers or machineries. The space is also filled with the spirit and skills that have been handed down for generations. I plan on depicting their stories slowly, like reading one book after another from an old bookshelf. ● Thus, 「From the Fathers' Times」 is a project to remember the lives of the older generation. The project focuses on listening to the older generation's narrative and capturing the spaces that hold their fondest memories. In my first exhibition 『The Golden Helmet』 in 1996, I compared my father to Caesar. 25 years have passed and now my daughter is almost the same age as I was back then. 「From the Fathers' Times」 is also a story I share with my late father. I saw similar poses and heard similar phrases that reminded me of my father during this project. Time has passed and I am now invited to listen to my father's past stories and connect with his generation. I hope for the viewers of different generations to experience such a connection through this project. ■ Sunmin Lee

 

 

Vol.20200605f | 이선민展 / LEESUNMIN / 李宣旼 / 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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