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터데이



박신흥 글·사진|눈빛|160쪽|1만5000원

흑백사진 속 열 살 남짓 아이는 이제 쉰 살 어른이 됐을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세로쓰기 신문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잡지 '선데이서울'이 표지가 보이도록 꽂혀 있다. 껌과 개비 담배를 함께 파는 가난한 좌판이다. 엄마는 잠깐 자리를 비운 모양이다. 아이가 손님 없는 가게를 지키고 앉아 작은 손에 연필을 쥐고 낡은 공책에 글씨를 쓰고 있다. 이번 받아쓰기 시험엔 꼭 백점을 맞겠다는 듯 표정이 자못 진지하다.

1970년대 사진 속 풍경은 아련한 추억으로 달려가게 한다. 수도 시설 없는 서울 변두리 달동네에 '물차'가 오는 날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1.8t 트럭에 실려온 물을 받으러 판잣집 주민이 다 모였다.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커다란 물통 두 개를 양손에 든 아이, 젖먹이를 업고 나온 엄마, 어린 동생을 안은 여자아이의 활짝 웃는 얼굴에서 힘들어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삶의 힘을 읽을 수 있다. 변변한 놀이 시설은 없지만 말타기 놀이를 하며 친구들과 함께 뛰노는 아이들 모습은 건강해 보인다. 동무 등 위에 올라타려고 달려온 아이 얼굴엔 장난기가 그득하다.


 

엄마 대신 가게에 앉아 공부하는 이 아이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가난해도 꿈이 있던 시절이다. 1976년 경기도 부천. /눈빛 제공

 

버스 옆을 두드리며 '오라이'를 외치던 여(女)차장의 무표정한 얼굴, 졸업식날 검은 교복에 허연 밀가루를 뒤집어쓴 남학생들의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다. 한갓 고단한 시대였다고, 단지 고통의 나날이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40여년 전 서울·경기·강원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은 작가는 "모두가 어려웠다. 그러나 꿈을 안고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이제 그 시절이 그립다. 그때가 자랑스럽다"고 썼다. 1970년대 일상을 담은 사진집이다. 어제가 있기에 오늘이 있다.

 

조선일보 / 이한수기자

 

 

박신흥 킨텍스 상임이사 개인 사진전 'Yesterday'

 

박신흥 킨텍스 상임이사가 13~18일 서울 정동갤러리에서 개인 사진전 'Yesterday'를 갖는다.

1970년대 경기도 일대 서민들의 생활상을 필름 카메라 렌즈로 서정적으로 담아낸 47점이 전시된다. 주요 작품으로는 일하러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 말로만 듣던 카메라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까까머리 어린이, 오빠들이 하던 '턱걸이'를 흉내 내는 아이들 등이 공개된다. 작품의 제목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당시의 생활상이 따뜻한 아날로그의 감성으로 표현됐다


박신흥 이사가 1975년에 찍은‘턱걸이’. 한 여자 아이가 오빠들이 하던 턱걸이를 안간힘을 쓰고 흉내 내고 있다.

 

박 이사는 "70년대 학창시절에 사진기자를 꿈꾸며 찍었던 작품들"이라며 "이제는 우리 마음속에만 그려지고 보기 힘든, 이야기가 담겨있는 장면들을 골라 전시회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사진 / 곽명우

 

 

부부 장돌뱅이 사진가

 

정영신·조문호 부부 사진가를 볼 때마다 나는 세상의 어느 부부가 저렇게 붙어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대부분의 부부들이 쉰 살을 고비로 데면데면 살아간다는데 이들은 언제나 일심동체의 부부애를 과시한다. 나는 그것을 이들이 세계사진사에서 보기 드문 부부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전국의 장터를 함께 순례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래서 그들의 금슬의 반은 5일장을 돌면서 형성된 동료의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조문호 사진가는 지금까지 반평생은 사진을 찍고 반평생은 술집에 앉아 있던 사람이다. 그런 그를 만년에 장터로 이끈 이가 정영신 사진가다. 소설가이기도 한 정영신은 30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5일장 모두를 촬영한 근력 있는 사진가다. 전국 522곳의 5일장을 사진으로 기록하였다. 그동안 호기롭게 살아온 조문호 형이 운전기사를 자청하며 마지막 장터까지 함께 돈 것도 그러한 저력과 끈기에 기가 질렸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의 5일장은 소통의 공간이었다. 장터는 단순히 물건을 구매하거나 교환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대처의 소식을 듣거나 인근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정보를 교환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광장이요 공공공간이었다. 게다가 동학혁명이나 3·1운동도 장날을 계기로 전개되었다 하니 5일장의 사회적 의미는 지대한 것이었다.

 

1970-80년대 고도 경제성장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왔다. 경제성장의 주역이었던 윗세대들은 당신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오늘의 경제대국을 이뤄놓았다고 자랑하지만 오히려 교묘하게 가난해진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도 부인해선 안 될 것이다.

남들은 100년 200년 걸려 이뤄온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우리는 불과 2-30년 동안 해치우면서 우리의 전통은 불도저로 밀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시인 김수영식으로 말하면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은 것일진대 우리는 남겨두어야 할 것들을 사정없이 솎아내 버렸다. 가족이 해체되고 경조사를 함께해 온 친척이 사라졌으며, 약자를 배려하고 슬픔과 고통을 함께하던 미풍양속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오로지 능률과 성과 그리고 경제적 부(富)만이 인간사의 가치기준이 되어 버렸다.

 

5일장은 서구형 대형 할인마트처럼 대량으로 상품이 거래되던 곳이 아니라 5일간의 일용한 양식과 물품을 장만하던 소박한 유통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의 강점은 서구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인간들 간의 교류와 정(情)이라는 무형의 물품이 함께 유통된다. 5일장은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기보다는 외래문화와 경제적 효율성을 앞세워 온 사회에서는 적합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최근 개점한 이케아 쇼핑몰 앞에 줄선 사람들을 보라. 그러니 어디 조문호의 스산한 장터 사진이 보여주듯이 5일장인들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허리 굽은 노인들만의 시장으로 방치해 둔 것이다. 다행히 요즘은 아파트 단지에도 매주 장이 서는 것을 보면 ‘전통시장 살리기 운동’이 비관적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탕아가 뒤늦게 뉘우치고 귀가하듯이 비로소 전통으로의 복귀가 시작된 것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승리자보다는 패배자를, 강자보다는 사회적 약자를, 가해자보다는 피해자를 기록하는 사진 장르이다. 따라서 사회의 음지와 사라져가는 것들을 찍는 다큐 사진가의 삶은 고난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다큐 사진가가 즐겨 감수해야만 하는 숙명인 것이다. 숙명에 충실한 사진가만이 소멸되어 가는 것들에 새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정영신·조문호 부부는 공교롭게도 둘다 다큐 사진가이므로 그들의 생활이나 작업이 두 배로 힘들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남들은 정년퇴임할 나이에 걸핏하면 멈춰 버리는 고물자동차를 타고 그들이 장돌뱅이처럼 장터를 돌며 찍으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그것은 우리 민족의 전통과 정체성이 아직 거기에 끝물처럼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금슬은 보너스다.

 

 

ㅡ 이규상 출판인, 눈빛출판사 대표


 

지난 26일 아내 정영신과 함께 약수동의 이명동선생 댁을 찾았다.
몇 일전 선생님께서 전화를 하셨으나, 년 말의 바쁜 일정에 밀려
26일 오찬을 함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찾아뵈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매번 밥값이나 찻값을 선생님께서
내셨는데, 이 날은 꼭 저가 사겠노나고 다짐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씰데없는 소리 하지마라. 니가 므슨 돈이 있노?”

일식집에서 초밥을 맛있게 먹은 후, 찻집에서 오래된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들은 아무리 들어도 재미있는 한국사진의 이면사인데,
이 날은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선생님! 오늘은 선생님께서 바람피웠던 옛날 이야기 좀 해주이소.”
“어! 내가 뭔 바람을 피워?”
“동아일보 계실 때, 신문사 주변의 다방 마담은 모두 선생님꺼라 던데 예!”
“다방마담들이야 다 그렇고 그런 상대이지 연애 걸 상대는 아니지.
딱 한사람, 서울대학병원에 근무하던 간호사가 있었지”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그 간호사를 너무 좋아해 엄청 찾아 다녔다고 하신다.
그녀의 집안이 너무 가난해 여러 가지 도움도 많이 주었지만,
결국은 파독 간호사로 갈 수 있도록 주선해 줄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다.
그 길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을 왜 몰랐겠는가마는...
마음 여린, 선생님의 잊혀져가는 옛 이야기에 코끝이 찡해졌다.

대개의 사람들이 잊혀져가는 오래된 연인이 한 사람 쯤은 있을게다.
가끔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거나 보고 싶기도 하겠지만, 그게 말처럼 잘 되지 않는다.
뭔가 마음이 허전해 가는 황혼기에 접어들면 옛 연인이라도 한 번 만나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대관절 산다는 것이 뭔지?....”


사진, 글 / 조문호

 

 

 

 

 

 








 

 

 

도쿄 최대의 환락가 ‘가부키쵸’의 20년을 밤낮으로 기록한 한국인 사진작가가 있다. 그 화려한 공간을 메꾸어 온 시간은 물론, 소외된 자들의 체온까지 고스란히 담아낸 사진집 <‘가부키쵸’, 고단샤>는 일본 최고의 권위있는 출판상 중 하나인 고단샤의 ‘고단샤 출판문화상 사진상’을 수상했으며, 2013년 그가 내놓은 포토에세이 <텟짱, 한센병에 감사한 시인, 사이류사>는 2014년 도쿄 북페어 지금 꼭 읽어야 할 책 30권에 선정되기도 했다. TV출연은 물론, 그의 사진이 실리지 않은 일본의 시사지가 없을 정도다. 보도 사진가,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활동하며 ‘한국인 사진가로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들어가는 다양한 공적을 남겨온 사진작가 권철(1967년생). 그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자신을 아껴 마지않는 일본을 떠나, 대한민국의 관문이라 그가 표현한 제주에서 일 년의 경유 생활(?)을 마치고, 이제 막 서울 한복판에 새 둥지를 틀었다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권철 씨의 향방이 궁금하다.    

 

 

동문시장 정신지


 
사진가 보고 왜 스나이퍼라 부르지?

일본인들은 그를 저격수 사진가라 부른다. 해병대 저격수 출신이라는 배경도 그렇거니와, 쉽게 타협하지 않고 한번 시작한 일은 ‘제대로’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격에 제법 어울리는 별명이다. 경상도 남자 천성을 타고나, 말수도 없고 무뚝뚝하다 못해 차가워 보이기까지 하는 그이지만, 권철의 사진에서는 체온이 느껴진다. 무시무시한 일본 가부키쵸 야쿠자의 사진에서도, 지진으로 모든 것이 폐허가 된 마을의 풍경에서도, 한센병 회복자인 텟짱의 일그러진 얼굴에서도, 보여지는 것은 욕망과 절망을 뛰어넘은 살아있음에의 ‘감사함’이다.  

 

권철과텟짱 <텟짱등에 업힌 작가>


 
어쩌다 사진을 시작했나?

원래는 토목공학과 출신이다. 하지만 대학 다니며 배운 것은, 다리를 놓고 도로를 만드는 사람들이 돈을 벌면 벌수록 우리가 사는 세상이 부실해진다는 부조리가 전부였다. 주위의 바람대로 대학을 나와 한국에서 취직했다면 나 역시 세상을 부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장사꾼이 되어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런 일에 가담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1994년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 학교에 들어갔다. 일본에 가자마자 한국에서는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같은 해 일본에서는 한신대지진도 있었다. 나의 스승 히구치 켄지(1937, 일본 피폭노동자 탐사보도 사진작가)는 평생 끈질기게 원전에 관한 사진을 찍고 있는 분인데 그를 비롯한 좋은 스승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위)가부키쵸 호스트 그룹(아래)가부키쵸 야쿠자


        

가부키쵸 사진 중에서도 야쿠자 사진이 유명하다. 도대체 그런 장면들을 어떻게 담아냈는지?

1996년부터 찍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무서워서 찍을 엄두도 안 났다. 주머니에 칼을 차고 양손에 철봉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 장도 못 찍고 들어오면 억울해서 잠이 안 왔다. 한 대 맞더라도 내일은 꼭 촬영하리라 다짐하며, 짝사랑에 빠진 청년처럼 매일 밤을 설치다가 결국은 성공했다. 물론 위협도 당하고, 잡혀서 야쿠자 사무실에도 끌려간 적도 있다.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카펫 위에 ‘오야붕(두목)’이 앉아 있었는데, 거기서 맞기도 많이 맞았다. 그런데 아무리 겁을 줘도 내가 또 찾아가고 몇 마디 대화 끝에 나의 신분이 ‘사진을 배우는 유학생’이라는 걸 알고는 ‘끈질긴 놈’ 하며 웃어넘기더라.



‘가부키쵸’라는 공간이 가지는 특성을 끌어내기 위한 작가만의 노하우가 있었나?

가부키쵸는 일본의 심장부다. 정치, 경제, 문화, 모든 것이 권력과 욕망의 지배 하에서 돌아가는 곳이다. 야스쿠니신사도, 일본 최대 규모의 재일조선인 밀집지역도 모두 다 한동네에 있다. 365일 야쿠자와 경찰이 충돌하고,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여성들과 노숙자 꼬마들이 공존하던 그 골목 한쪽에 내 20년의 삶도 있었다. 처음에는 흑백사진 작업을 주로 했었지만 결국 모든 작업을 컬러로 마무리했다. 모든 것이 흑백논리에 의해 돌아가는 곳이라, 아무래도 흑백보다는 컬러가 나을 법 싶었다. 그러면서 가부키쵸라는 공간에 온도를 불 어넣게 된 것 같다. 가로 36mm 세로가 24mm인 카메라의 작은 파인더에 공간이 가진 시간성을 넣는 것 또한 어려운 작업. 그건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내 책상 위에는 늘 세 개의 달력이 있다. 작년, 재작년의 오늘 이 순간, 이 장소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며 작업을 한다. 공간이 가지는 역사성은 그렇게 발품을 팔며 꾸준히 작업해야 사진에 표현되는 것 같다.   

 

쓰촨성 대지진 엄마와 아기

 

        

보도사진가와 다큐멘터리사진가의 차이점은 뭔가?

보도 사진가는 ‘사실’을, 다큐 사진가는 사실을 치고 들어가 그 안에 내재하는 ‘진실’을 찍는 것이 일이다. 보도 사진은 사건이 남과 동시에 콘셉트가 정해지지만, 다큐는 그렇지 않다. 진실은 쉽게 보이지 않으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다큐 사진가의 역할이고 사명이다. 한 순간이 한 장에 담겨야 하는 사진이라는 매체에 진실을 담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나는 한때 남들이 흔히 말하는 잘 나가는 프리랜서 보도 사진가였다. 전 세계를 누비며 찍은 보도 사진을 팔며 도쿄 한복판의 호화로운 아파트에서 최고의 장비를 모자랄 것 없이 다 갖추고 살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버는 것도 쓰는 것도 한 순간, 배가 부르면 부른 대로 욕심이 생기는 것이 인간이고 나 역시 그 경험을 했다. 하지만 2008년의 어느 날, 내 삶에 커다란 트라우마가 찾아왔다. 그 일을 계기로 보도사진가의 길은 접었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왜 찍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에 오랫동안 괴로워하며 사진을 찍을 수도 쳐다볼 수도 없었던 시간이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의 운명을 바꾼 2008년, 무슨 일이 있었나?

2008년 중국 쓰촨성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8만 명의 희생자가 났다. 아비규환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폐허가 된 마을의 모습을 보도하기 위해 전 세계 사진가들이 쓰촨성에 모였다. 프레스 라인 안쪽에 프레스센터가 있었는데, 그 수많은 사진가들이 노트북을 펼치고 앉아 ‘니 사진이 좋다, 내 사진이 좋다.’ 해가며 죽은 사람들 사진에 핏자국 선명하게 포토샵 작업을 하고 있었다. 라인 바깥쪽 세상에선 생존자들이 슬픔에 절규하고 있는데 말이다. 몰래 프레스 라인을 넘어가 마을에 잠입했다. 그곳에서 3일을 보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람들을 찍었다. 지진이 있고 5일 후의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시내에 있는 아동병원을 향했다. 후문에서 진을 치고 있는데 위급해 보이는 한 아동 환자가 들것에 실려 들어왔다. 몸에 모포를 두르고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두 다리가 없었다. 간신히 목숨만 붙은 채 들것에 실려가던 아이가 빤히 고개를 돌려 자포자기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루쇄)라고 하는 열두 살 여자 아이였다. 무너진 건물에 몸이 끼어 탈출하지 못하던 그녀를 구할 길은 두 다리를 절단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열악한 구조환경 속에서 의사도 아닌 군인들이 톱으로 마취도 없이 꼬마의 다리를 절단했고, 절규하다 쓰러지기를 반복하는 어머니와 딸은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고 기적처럼 재회했다. 병원에 실려온 아이의 어머니는 나에게 딸의 잘려나간 다리를 보여주며 찍으라 했다. 이것을 꼭 찍어서 세상에 보여주라며 오열했다. 눈물 때문에 파인더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는 울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울면서 사진을 찍었던 적이 있었나 싶다. 결국, 그 사진을 데이즈 재팬(DAYS JAPAN)을 비롯한 일본내 사진 주간지들이 대서특필했고, 그들은 내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의 돈을 루쇄의 사진과 바꿔갔다. 하지만 그 후로 나는 보도 사진을 찍지 않았다. 상업 사진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을 피사체로 하는 사진을 찍어 팔며 나 홀로 안이하게 살아가기에 세상은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다큐 사진 역시 피사체와 작가의 숙명적인 과업과도 같은 것인데, 그 과정에서 사진작가만 상업적으로 득을 본다면 그것은 부조리한 일이 아닌가? 사진에서는 늘 피사체가 갑이 되어야 한다. 피사체를 통해 작가가 박수갈채를 받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판단했다. 

 

왼쪽) <가부키쵸> 눈빛출판사 2014(오른쪽)<텟짱, 한센병에 감사한 시인> 눈빛출판사 2014


 
한국에서도 출판된 <텟짱-한센병에 감사한 시인, 사이류사>은 어떤 책인가?

텟짱(1924-2011 본명 나가미네 도시조, 한센병 회복자이자 시인)을 만난 것은 큰 축복이었다. 1997년 한센병 회복자들이 격리 생활을 하는 라쿠센엔이라는 요양원에서 자작시를 발표하던 그와 처음 대면했다. 일그러진 얼굴에 누가 봐도 거부감을 일으키는 첫인상의 소유자이지만, 오랜 시간 같이 호흡하고 거리감을 좁혀가면서 이렇게 맑고 귀엽고 천재적인 사람이 어떻게 이 산골에서 평생을 처박혀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1년 87세의 나이로 텟짱이 돌아가시기까지 그와 함께했던 기나긴 여정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것(편견과 차별)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텟짱은 내 사진을 통해 세상에 한센병 회복자의 존엄성을 알림과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보이지 않는 것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었다. <텟짱, 한센병에 감사한 시인(눈빛출판사)>은, 그들과 세상 사이에 존재했던 벽을 허물기 위해 오랜시간 나와 텟짱이 가슴을 맞대고 공동으로 작업한 책이다. 여태까지 본 피사체의 눈빛 중에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을 꼽으라면 단연 텟짱의 눈빛이다. 텟짱은 한센병의 치료제인 프로민의 과잉 사용으로 한쪽 눈을 잃었고 남은 한쪽도 시력이 없었다. 하지만 방에 누워 있다가 가끔 내 쪽을 보며 “곤짱~, 야키니쿠 이코우카(우리 불고기나 먹으러 갈까)?” 하며 귀엽게 말씀하시던 목소리가, 그 맑은 눈빛이 지금도 아련하다. 생전에 나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는 텟짱이다. 이제는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텟짱이 책으로나마 한국 독자들을 만나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한다. 이제 더 이상의 한센병 환자는 없다. 지금 살아계신 분들은 ‘환자’가 아니라 ‘한센병 회복자’라 부르는 것이 맞다. 평생 그분들이 가슴에 안고 살아왔을 슬픔을, 가시기 전에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일본을 떠난 이유?

내가 만일 아직도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더라면, 나는 아직도 일본에서 일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뒤늦게 나타나 나를 구제해 준 아내 덕에 결혼해서 첫아들이 태어났는데, 딱 100일 만에 동북 대지진이 일본을 덮쳤다. 곧바로 후쿠시마로 달려가 취재를 했고, 찍어 온 사진을 도쿄 한복판의 공원에 모아 놓아 전시하며 누구보다 빨리 사람들에게 피해의 참상을 알렸다. 하지만 사진가이기 이전에 책임져야 할 갓난아기가 있는 처지가 되고 보니, 일보다는 가족이 먼저였다. 더는 도쿄에 남아있을 수가 없어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한국에 짐을 풀자마자 곧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20년 전, 한국을 떠나던 해에 무너진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과거의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의식 수준이다.



제주생활은 어땠나? 앞으로의 계획은?

욕망이 지배하는 가부키쵸에서 20년을 보내고 한국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제주가 보였다. 사실은 가족과 함께 쉬고 싶어 찾아온 곳이 제주도였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해녀 할머님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다시 카메라를 들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제주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사진으로 찍어왔고 앞으로도 찍어가겠지만, 내가 찍어야 했던 제주의 현실은 상상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평생을 일구어 온 할머님들의 땅과 바다가 중국의 거대 자본의 손에 하나 둘 팔려 나가고 있다. 제 땅과 바다를 아무렇지도 않게 중국인에게 팔면서도 극단적인 무공포증에 사로잡혀있는 듯하다. 빼앗긴 것과 팔아버린 것은 엄연히 다른데, 대책 없이 중국 자본의 물꼬가 터져버린 제주에서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태연했다. 자본과 정책과 의식의 병폐로 말미암아 뒷전으로 밀려나는 해녀들의 마지막 물질(해녀들의 잠수 작업)을 기록하기 위해 함께 물에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 아마도 빠르면 다가오는 봄과 여름 사이에 제주에서 취재한 내용을 담은 사진집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2015년은 한·일수교 50주년과 동시에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특별한 해이다. 10년 이상 작업해온 야스쿠니신사에 관련된 사진집 출판이 예정되어있고, 나머지는 차례차례 해 나갈 예정이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할 일이 너무나 많을 것 같은 서울. 새롭게 펼쳐진 캔버스에 뭘 그려나가게 될지 나 역시도 기대된다.


“내가 좋아서 해왔던 일에 관해 이야기하며 누군가와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게,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꺼? 아입니꺼? 하하하.”

인터뷰를 마친 그가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일본인들이 사랑한 사진작가 권철의 마력이 매력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작은 것에 감사해 하며 늘 낮은 곳에 조용히 포복하고 앉아, 보여지는 것의 뒤편에 숨겨진 진실과 쉽게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그는 진정한 저격수 사진가다. 얼마전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내와 전전긍긍하며 찾아낸 서울시의 한 옥탑방에 이제 막 세 식구가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 군더더기 없는 소박한 시작으로 주어진 매순간에 감사하며 이 시대를 기록하는 진정한 ‘꾼’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를 만나니, 오랜만에 참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가?  
[MK뉴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10주기 회고전, 내달 5일부터 DDP에서

 

 

 

 

(서울=연합뉴스) 장하나 기자

 

 

'20세기 사진 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프랑스 출신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1908∼2004)의 10주기를 맞아 국내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재단과 매그넘이 주최하는 이번 전시는 '영원한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다음 달 5일부터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내 디자인전시관에서 열린다.

지난 2005년과 2012년 등 카르티에 브레송 사후에 국내에서 몇 차례 전시가 열렸지만 이번은 그동안 국내에서 열린 전시 중 최대 규모라는 게 주최 측의 설명이다

 

전시는 '얼리 워크 인 모마 1947'(Early Work in MoMA 1947), '영원한 풍경', '순간의 영원성' 등으로 나뉘어 구성된다.

 

 

생 라자르 역 뒤에서, 파리, 1932. ⓒHenri Cartier-Bresson/Magnum Photos

 

 

카르티에 브레송은 1947년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작가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사망한 것으로 잘못 알고 준비한 회고전을 계기로 세계적인 사진작가로 발돋움한다.

 

이 당시 작품을 선보이는 '얼리 워크 인 모마 1947' 섹션에서는 1930년대 초 우연히 사진을 배운 것을 계기로 촬영에 몰입한 카르티에 브레송의 자유롭고 규정되지 않은 초창기 미공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영원한 풍경' 섹션에서는 자신을 향한 마음의 눈, 풍경 속 사람들, 도시 풍경 등으로 나뉘어 구도와 형태에서의 미적 구성을 엿보게 한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마르셀 뒤샹, 새뮤얼 베케트, 앙리 마티스 등 20세기 주요 인물을 거장의 눈으로 구성한 초상 사진도 '순간의 영원성' 섹션에서 다수 선보인다.


화가 앙리 마티스, 방스, 프랑스, 1944. ⓒHenri Cartier-Bresson/Magnum Photos

 

 

카메라의 시대적 변천을 살펴볼 수 있는 카메라 70여 점도 함께 전시된다.

주최 측은 "상당수는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들"이라며 "그동안은 동적인 작품들을 국내에 선보였다면 이번에는 정적인 가운데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미학이 드러나는 작품들로 골랐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3월 1일까지. 일반 1만2천원, 청소년 8천원, 어린이 7천원.

☎ 02-735-4237.

손은 육체의 거점(據點)이다.
손은 얼굴보다 정직하다.

손은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을 본능적으로 잡는 경우가 많다.
어느 시인은 “손이 했던 모든 것을 추억한다”라고 했다.
손은 사랑의 상징이기도 하면서 운명처럼 서로 멀어졌거나
가까워질 때도 손을 먼저 갈망하는 경우가 많다.
서로 먼저 이해를 구하고 용서하면서
손을 먼저 내미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전민조 사진집-손에 관한 명상』(눈빛) 중 작가노트

 

 

전민조 '가족' 서울 독산동 2006.2/ 전민조 '도봉산 선인봉 코스' 1990.10/ 전민조 '서울 청운동' 1979.11 (왼쪽부터 시계방향)

가족끼리 포갠 손, 점자책을 읽는 맹인의 손, 밧줄을 부여잡은 등산객의 손, 환자의 손을 잡은 수도사의 손, 트럼프를 잡은 도박하는 손, 사진 찍지 말라며 가리는 전직 검찰총장의 손…. 포켓북 사이즈의 이 흑백 사진집에는 참으로 많은 손들이 나옵니다. 눈을 마주친 것도 아니고, 손을 볼 뿐인데 문득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가만히 주위 사람 손을 들여다봅니다. 내밀어 잡아 봅니다.

사진전문 출판사 '눈빛'에서 한국 현대 사진가들의 사진집 ‘눈빛사진가선’ 1차분 10종을 냈습니다. 『구본창-DMZ』『김금순-동해남부선』『민병헌-잔설』『변순철-전국노래자랑』 등 10인의 사진집 10권입니다.

중앙일보 /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지난 12일 인사동 ‘양반댁’에서 이명동선생님을 모시는 사진가들의 오찬 모임이 있었다.

이명동 선생을 비롯하여 육명심, 한정식, 황규태, 이완교, 구자호, 전민조, 유병용,

이기명씨 등 열명이 모여 정겨운 환담을 나누며 또 한 해를 떠나 보내는 아쉬움을 달랬다.

그 날은 돌아가며 차례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육명심선생의 제안으로

사진에 관한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대구사진비엔날레’ 운영위원장을 맡았던 구자호선생으로 부터 여러 가지

그 뒷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고, 이완교씨는 파리비엔날레에 초대되었던 당시의 보람과

애로를 말했다. 그리고 육명심선생은 몇일 후에 티벳 작업을 정리한 사진집이 나온다는

말씀을, 한정식 선생은 지병에서 해방되어 사진촬영을 다녀 온 말씀을 하셨고,

이기명씨는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제주 해녀’ 프로젝트 대한 뒷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전민조씨는 역사박물관에 소장된 작가들을 초대한 심포지움에 대한 이야기를,

유병용씨는 내년 5월에 있을 개인전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아내 정영신과 600여개 오일장 순례를 마감하고, 그 보고서 형식의 전시를

올 연말에 하기로 했으나, 출판이 지연되어 내년 1월20일로 연기되었다는 말을 했다.

마지막으로 황규태 선생 차례가 되자 황선생의 말씀이 걸작이었다.
“나는 할 말도 없고, 조형! 그 팔팔이나 하나 줘요”


사진,글 / 조문호

 

 

 

 

 

 

 

 

 

 

 

 

 

 

 

 

 

 

 

 

 

 

 

 

 

 

 

 

 

 

 

 

 

 

 

 

 




 

1985.6 / 전농동588번지

“놀다 가세요~”

거짓 사랑을 구걸했지만 지나치는 이의 반응은 차가웠다.

“야- 니가 좋아서 잡는 줄 아니, 돈이 좋아 잡는다”

체념 섞인 그 녀의 절규가 듣는 이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전농동을 기록한 오래된 필름 파일을 뒤적이다 그 소녀를 다시 보았다.

그녀를 잊은 지도 어언 30여년의 세월이 되었나보다.

 

참 착하고 예쁜 소녀였다.

그토록 꿈 많은 소녀가 거기까지 가게 된 건, 가난한 부모 만난 죄 뿐이다.

그 때는 나라까지 가난했으니, 시대적 사회적 희생양에 다름 아니다.

 

그녀 이름은 김정숙이었다.

 

그 때 나이 한참 고운 이십대였으니 이제 오십대의 아낙이 되었을 게다.

가난이 지겨워 무작정 상경해 돈 벌려고 곳곳을 떠돌았지만,

결국 사창가까지 오게 되었다며 슬피 울던 정숙이의 눈망울이 아직도 선하다.

 

그러나 몸은 망가져도 살기는 그 곳이 더 편했다고 했다.

끼니 걱정하지 않고, 돈까지 엄마한테 보내 줄 수 있어 그냥 산다고 했다.

다 견딜 수 있으나, 변소 구더기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의 멸시를 견딜 수 가 없다고 했다.

 

몸 파는 창녀일지라도 하나의 직업인으로 보아주는 사회인식을 바꾸게 하자고 설득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인권을 되찾자는데 공감해 사진작업에 많은 힘을 보태기도 했다.

동등한 사람으로 봐 주는 깨어난 세상을 바라며 5년 동안 뛰었으나, 결국 실패했다.

 

90년 2월, 그 사진들을 모아 전시회를 가졌으나 주인공인 그녀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언론들은 일제히 들고 나와 사람대접 받게 해 달라는 그녀들의 목소리 보다

매춘이란 호기심에 무게를 둔 선정적인 나팔을 불어재꼈다.

 

그래서 그 전시 이후로 전농동 기록필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쳐 박아 두었다.

사진집출판 제의도 거절했다. 또 하나의 춘화 같은 이야기 거리로 변질될 것도 두려웠으나,

행여 잘 사는 그녀들의 삶이 발목 잡힐 수 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에 파묻혀 간, 그 시절 장면 장면들은 우리 사회사의 중요한 기록이고 역사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 본인들이야 알아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때가 된 듯 싶다.

아무튼 이 사진집 출간을 계기로 그 때 못한 그녀들의 목소리도 전하고 싶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한 번 만나고도 싶다.

 

​“정숙아! 혜련아!” 나의 연인이기도 동생이기도 했던, 그 때 그 사람들이 보고 싶다.

당신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첩을 보게 되면 연락 한 번 주렴.

내 비록 거지 처지일지라도 소주 한 잔 살께...

디 행복하게 잘 살기 바란다.




2014. 12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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