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보다
강영길 사진展

 

2013.6.26 ▶ 2013.7.2

 


강영길_눈부신 외로움_컬러인화_180×270cm_2006



초대일시_2013.6.26_수요일_06:00pm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70번지


"바다 보다" - 의미를 넘어선 이미지 ● 눈을 감아도 보이는 바다가 있다. 하늘을 닮은 바다. 바다를 품은 하늘. 그 사이를 가르는 얄궂은 수평선 하나. 그곳은 나의 바다. 답답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면 문득, 바다가 그립다. 바다 앞에 서고 싶다. 그곳이 동해든지, 남해든지 다를 건 없다. 그저 삶에 지쳐 희미해진 마음의 수평선을 되새기면 그걸로 족하다. 끝없이 길-게 이어지는 수평선 위로 요동치는 내 마음을 펼쳐본다. 바다 앞에서 나는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 헛된 고민들이 부서지고 또 부서진다. 마치 파도처럼.

 


강영길_이를 수 없었던 기억_컬러인화_100×150cm_2006

 

 

강영길_부산바다_컬러인화_100×150cm_2007

디지털이 범람하는 오늘날 사진은 예술가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굳이 예술을 운운하지 않아도 너무나 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짐작하건데 사진가들에게 사진이란 단순히 찍어서 기록해두는 행위, 그 이상이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새롭고 낯선 풍경 앞에서도 사진기를 꺼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제한된 시간 속에서 한 순간이라도 헛되이 흘리고 싶지 않다면 사진기는 이미 거추장스럽다. 홀연히 나타나 사라지는 인상은 필름이 아닌 가슴에 남겨야 하는 법이다.

 


강영길_제주바다_컬러인화_100×150cm_2006

 

 

강영길_동해바다_컬러인화_40×60cm_2006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사진들. 오래 전에 잃어버린 내 필름을 누군가 인화한 것 같은 느낌이다. 작가는 말한다. 존재하지 않았을 기억을 담고 싶었다고. 본래 사진은 빛에 수동적으로 반응하고, 셔터 속도만큼의 순간을 기록할 뿐이다. 하지만 그에게 사진이란 단순히 펼쳐진 인상을 기록하는 도구가 아니라, 상상력과 사색의 흔적을 표현하는 매체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정서를 섬세한 감각으로 철저히 추적하고자 한다. 한 번도 보지는 못했으나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는 그런 기억을 포착하기 위해. 만약 누군가 그에게 극한의 외로움을 단 한 컷의 이미지로 보여 달라고 청한다면 그는 「눈부신 외로움」을 꺼내 보일 것이다. 계획된 즐거움을 연상시키는 수영장이란 공간 속에서 부유하는 이미지 앞에서. 그는 눈부시게 외로운 타인의 기억을 경험한다.

 


강영길_제주바다_컬러인화_40×60cm_2006

 

 

강영길_제주바다_컬러인화_40×60cm_2006

의미를 넘어선 이미지. 영원한 순간. 거짓된 진실. 한없이 그리운 타인의 기억을 쫓아 바다 앞에 섰다. 찬란한 나의 바다여. 하늘을 꿈꾸는 바다. 바다를 탐하는 하늘. 산 자들의 바다. 죽은 자들의 하늘. 그 사이를 가르는 영혼의 숨결. 그곳은 나의 바다, 보다. 가다. 서다. 앉다. 수평선 위로 이를 수 없었던 기억들이 출몰한다. 마치 태양처럼. ■ 권혁주


FOREST, 멈춰선 시간

류재현展 / RYOUJAIHYUN / 柳在賢 / painting

2013_0626 ▶ 2013_0721 / 화요일 휴관

 

 


류재현_ROAD2013-10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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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626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화요일 휴관


통인옥션갤러리TONG-IN Aucti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6번지 통인빌딩 5층

Tel. +82.2.733.4867

www.tongingallery.com


모종의 자장력을 느끼게 하는 작은 일렁임 ● 1.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힘들이지 않고 그리는 회화에 익숙해졌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는 우직한 작가보다는 별반 힘들이지 않고도 그런 효과를 내는 작가가 재치 있어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모던 차용이니 패러디니 하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그런 미적 유희에 기꺼이 동참해 왔다. 그러한 미적 유희에서 볼 때 작가 류재현의 작품은 정반대다. 치밀한 묘사력과 정확한 눈으로 사물을 응시하며 '그림다운 그림'을 그리는 데 충실 한다. ● 고도의 수공을 요구하는 그의 작품은 단순한 소재인 풀과 나무를 그리는 작업이다. 그리고 대작이라기보다는 숲길을 중심으로 풀과 숲을 그린 소품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소품이란 단순히 그림의 크기를 지시하는 것일 뿐, 그림 속에 담긴 내용과 정신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밀도감으로 화면을 장악하고 있다. 온통 연두색과 녹색이 빼곡히 채워진 숲길로, 숲 속에서 숲 바깥에서, 숲과 숲끼리, 그리고 자연성에 관한 것이다. 자연의 특징을 한마디로 압축하여 보여주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자연을 표현하는데, 녹색과 연두 빛에 깊이 감추어진 바람결에 떨리는 풀들의 작은 일렁임까지 감지할 수가 있다.

 


류재현_ROAD2013-8_캔버스에 유채_60.6×91cm_2013

2. 숲길은 누구나 소재로 삼을 수 있고 작가에 따라 자기의 방식으로 그릴 수 있으므로 그런 것을 그린다는 게 별로 새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 다만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그렸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만큼 어떤 소재를 완성도 깊게 조형화 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류재현이 숲길에 공들이는 노력이나 자세는 구도자처럼 처연하고 진지하다. 시간과의 싸움과도 같은 작업방식이 때로는 너무 무심하게 보일지라도, 그러한 태도가 모든 것을 초탈 한 듯 여유로워 보이지만 그것은 자연을 음미하면서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과 경외를 지닌 작가의 속 깊은 관찰과 표현 방식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 그의 숲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비장하고 더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먼 곳으로 마음들이 한꺼번에 쓸려가는 듯한, 모종의 자장력에 이끌려 들어간다. 현실적 의미의 삶도 근원적 의미의 삶도 모두 텅 비어 자취를 감춘 듯한, 숲과 풀잎에는 인적 없는 적막함과 고요함이 있을 뿐이다. 풀잎 하나하나를 묘사하면서 어느덧 극사실적 표현이 손에 익어 자연과 사물을 단순히 정밀묘사 하는데 그치지 않고, 등장시킨 대상으로 하여금 자연 너머의, 또한 자연 내면의 의식과 모습을 발췌해내고 있다.

 


류재현_ROAD2012-19_캔버스에 유채_50×72.7cm_2012

짜임새 있는 구도, 안정된 토운, 정확한 데생력 등을 통해 그의 화면은 자연의 일부가 투영된 것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소우주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들은 비록 자연의 한 부분으로부터 출발하기는 하였지만 그림 자체가 갖는 완결된 공간성은 특정한 자연의 재현을 넘어서서 보다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자연을 느끼게 한다. ● 작업방식을 보자면, 연두색과 녹색의 숲은 무수한 가느다란 선과 터치로의 자잘한 붓질로 채워져 있고 부드러운 모필로 그어댄 선들이 한 땀 한 땀 바느질한 것 마냥 캔버스를 메우고 있다. 그래서 표면은 잔잔하면서도 변화무쌍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데, 자칫 단조롭게 보일 수 있는 화면은 그런 조심스러운 붓질과 유채의 견고함으로 고요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짙게 우려내고 있다.

 


류재현_ROAD2012-22_캔버스에 유채_50×72.7cm_2012

캔버스 검은 밑 색을 바탕으로 겹겹이 올려진 작은 붓질은 때론 숲의 기운이 되고, 때론 침묵의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무수한 터치의 반복과 겹치고 중첩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화면에 원래 발라두었던 검정색 바탕이 미세한 틈으로 보여 진다. 그 틈 사이로 내밀한 호흡이 느껴지며 화면은 오묘한 현(玄)의 깊이로 다가온다. 치열한 붓질의 반복적 과정이 오히려 적막한 사유의 세계를 열어줌은 매우 역설적이다. 그것은 마치 무수한 붓질을 통해 나온 녹색의 향연은 결코 인상파의 외광처럼 느껴지지 않고 작가의 심흔(深痕)의 투영으로서 감지된다. 투영을 숲과 바람의 빛을 통해서 성취하되 이것들의 내면에서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려는데 관련시키고 있는 것이다. ● 낯선 숲의 무수한 가지들과 잎 새들 속을 비집고 들어가 그것들의 율동에 따라 생각하며 그것들에다 자신을 투영해 넣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결국 그는 일상의 세계와 공감하고 공명하려는 감정이입을, 심리적으로가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혹은 존재론적으로 처리하는데 도달하고 있다. 거기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의식과 시각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에 의해서 훼손되고 변질돼버린 자연의 원상회복과 황폐하고 마멸된 인간 심성의 근원 회복이 동시에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화면은 단순한 자연풍경이라고만 말 할 수 없으며, 자연에 등장하는 대상과 빛깔들은 작가 자신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그리고 수시로 생성되는 의식의 컬러하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늘 그리워하고 돌아가고자 하는 자연의 숨결이 내밀하게 숨 쉬고 있으며, 자연에 대한 신앙과도 같은 열정이 화면 속에 육화된 생명력으로 재탄생되는 순간과도 같은 것이다.

 


류재현_ROAD2013-3_캔버스에 유채_50×72.7cm_2013

3. 요즘 젊은 작가들은 지나친 수공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관람자의 통념을 뒤집는 예술적 트릭은 관람의 유희로 연결된다. 새롭고 빠른 것에 대한 조급함이 대세인 미술계에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작가들은 신선한 호기심을 발동시킨다. 작가 류재현의 숲길 그림은 복잡하고 환경이 오염된 시대에 삶의 버거움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인간의 원초적 삶과 문명에 대한 근원과 진정한 느림의 미학을 진실로 느끼게 해주는 그림이다. ■ 김선태

 


류재현_ROAD2013-11_캔버스에 유채_72.7×116.7cm_2013


        거북이, 물고기 그리고 나 turtle, fish and I
주혜령展 / JOOHYERYOUNG / 朱惠令 / sculpture.installation

2013_0626 ▶ 2013_0701

 

 


주혜령_거북이_합성수지, 우레탄 도장_가변설치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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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INSA ART CENTER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82.2.736.1020www.insaartcenter.com


개인의 주관적인 시점에서의 자신은 유일무이한 범상치 않은 존재임이 분명하다. 허나 개인을 사회라는 무수한 개체의 집합 안에서의 한 점으로 인식하고, 철저하게 제 3자의 입장에서 해석하게 되면, 그 점 하나하나는 전혀 특별하지 않은 '평범'그 자체일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타인에 의해 정의 내려지는 개체로서의 관점과 개개인의 의식에 자리 잡은 주체로서의 관점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이다. 개체로 인식된 자아가 평범하지만 명확히 보여 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면, 주체로서의 자아는 분명한 형체가 없는 혹은 허구일지도 모르는 망상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주혜령_거북이_합성수지, 우레탄 도장_가변설치_2013

 

 

주혜령_거북이_합성수지, 우레탄 도장_가변설치_2013

나의 작업은 이러한 유형의 자아와 무형의 또 다른 자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순수하게 작가 자신을 모델로 행해지는 나의 작업은 거창한 시대의 이데올로기나 사회적 모순을 담기보다는 한 사람의 일상의 표정 또는, 살아가는 한 장면만을 소소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관객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사람의 얼굴이 만들어진 작업을 보게 되며, 그것은 길을 걷다가 익명의 누군가를 그저 스쳐지나가는 정도의 특별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들에게 내 일상의 모습은 하등 의미심장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듯 긴장감 없는 시선으로 시작되는 나의 작업은 지루하고 관성적인 일상이라는 영역에서의 삶과, 그 속에서의 작은 일탈을 만화적 상상으로 풀어낸다.

 


주혜령_물고기_합성수지, 무발포우레탄, 우레탄 도장_가변설치_2013

 

주혜령_물고기_합성수지, 무발포우레탄, 우레탄 도장_가변설치_2013

이러한 작업을 통해 나에게는 특별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 즉 상상속의 특별한 나와 일상의 평범한 나를 동시에 제시함으로써 관객들은 자신들과 연결되지 않은 무관심의 대상인 나의 형상과 그 안에 나의 주관적 견해로 구성된 이야기 사이에서의 괴리를 보게 된다. 여기서 나타나는 괴리감은 보는 이들에게 유형의 자아와 무형의 자아의 존재를 확인하게 하고, 한발 더 나아가 이를 그 자신들에게 대입시키게 함으로써 분명히 공존하지만 좀처럼 닿을 수 없는 꿈과 현실의 평행선상에 놓이게 만드는 것이다. ■ 주혜령

 

 


주혜령_소섭이랑 혜구랑_합성수지에 우레탄 도장_20×30×15cm_2013


오래된 집

전은희展 / JUNEUNHEE / 田銀姬 / painting

2013_0619 ▶ 2013_0624

 

 


전은희_오래된 집-만석동_한지에 채색_162×454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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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619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3층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전은희의 회화-오래된 집들을 배회하다가 이름 없는 이름들에 마주서다 ● 전은희의 그림은 재현적이고 문학적이고 서사적이다. 이런 그림에서 주제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그림 전체의 성격을 함축하거나 암시하는 경우가 많고, 그림 전체를 구분하면서 하나로 연이어주는 연결고리로서의 계기로 작용하기 쉽다. 어떤 식으로든 작가의 그림을 읽는데 결정적이거나 최소한 암시적인 실마리 역할을 한다. 그림들 각각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렇게 다른 그림들에 어떤 일관성을 부여해주는 보이지 않는 계기이며, 상호보완적이고 보충적인 계기로서 작용한다. 그렇게 이 그림은 저 주제를 부르고 저 주제는 이 그림을 싸안는다. ● 벽, 공간의 기억(2009).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있다. 불통의 벽이고 단절의 벽이다. 그 벽은 벽 자체라기보다는 비유적인 벽이다. 불통의 느낌과 단절의 느낌을 벽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그려진 벽 그림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이따금씩 하늘이 그림 속에 들여질 때조차 하늘은 오히려 벽의 요지부동을 강조할 뿐이었다. 그렇게 작가의 벽 그림은 인간관계에 대한 실존적 자의식의 표상이고 표출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벽 자체에 시선이 머문다. 이처럼 벽 자체에 시선이 꽂히면서 반전이 일어난다. 불통과 단절의 계기로만 보였던 벽이 허물어지면서 자기를 내어준다. 벽은 알다시피 평면이다. 그 위에 그림을 그린 도화지와 같고, 삶의 흔적을 아로새긴 해묵은 노트와 같고, 시간의 지층이 켜켜이 내려앉은 빛바랜 사진첩과 같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의 유년시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온 모습이 어슷비슷한 탓에 작가가 그린 삶의 흔적은 쉽게 공감을 얻는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벽 그림은 실존적 자의식으로부터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목가적인 감성 사이의 스펙트럼을 아우른다.

 


전은희_DOORPLATE_한지에 채색_41×32cm×80_2013

The written story(2009). 그렇게 작가는 삶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표면적으론 타자의 삶의 흔적이지만, 그러나 그 흔적은 어느 정도 작가 자신의 삶의 흔적이기도 하다. 타자의 삶의 흔적에서 타자를 보고 자기를 본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자기가 타자가 되고 타자가 자기가 된다. 감정이입을 매개로 자기와 타자가 동일시되는 심리적 공감 내지 동화현상이 일어나는 것. 그때 나는 지금 여기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때 그곳에 있었던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인가. 사라졌다면 어디로 어떻게 사라진 것인가. 사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숨어든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게 깃든 것인데, 이처럼 깃들게 해주는 계기가 흔적이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말하자면 그때 그곳에 있었던 나의 흔적이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마주한 자리에 정작 타자는 없다. 다만 허물어진 벽이나 내려앉은 지붕이 있을 뿐. 마당의 경계 너머로 웃자란 풀밭이 있을 뿐. 박제가 된 시간을 증언하듯 멈춰선 행글라이더 모형이 있을 뿐. 그렇지만 그 벽이며 지붕, 풀밭이며 모형에 타자의 삶의 흔적이 아로새겨진다. 타자는 말하자면 사물들에 자신의 삶을 흔적으로 남겨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사물들엔 존재의 흔적이 아로새겨지고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기술된다. 바로 텍스트들이다. 작가는 그 텍스트들이 들려주는 무언의 이야기를 헤집고 발굴하고 채집하고 분류하는 무슨 문헌학자 같고 고고학자 같다.

 


전은희_바람벽_한지에 채색_130×400cm_2013

산책자의 시선(2010). 보기에 따라서 문헌학자와 고고학자는 룸펜과도 같다. 보들레르와 발터 벤야민이 산책자 내지 만보가로 명명했던 룸펜은 특히 도시유목과 관련해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마치 유유자적하는 소요유에서처럼 의식의 끈을 반쯤 내려놓고 도시며 도시의 변방을 어슬렁거리고 기웃거린다. 그렇게 어슬렁거리고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도시의 세부들이 보이고 세목들이 눈에 들어온다. 흔히 삶을 길에다 비유한다. 어떤 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길을 그저 번거로운 과정이며 번잡한 수단으로 본다. 길 자체가 이미 삶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당연 삶 자체가 이미 목적이듯 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어슬렁거리고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사람들이 버린 사물들이 보이고, 사물들에 아로새겨진 사람들의 흔적이 보인다. 그러므로 그 사물들이며 삶의 흔적을 발굴하고 기록하는 작가의 행위는 일종의 도시회화 내지 도시유목의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 부재한 공간, 소리 없이 흐르는 시간(2011). 작가는 도시 중에서도 주로 변방을 어슬렁거리고 재개발현장을 기웃거린다. 도시면서도 도시 같지 않은 공간이며, 실제로도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공간이며, 도시기능이 일시적으로 멈춰선 잠정적인 장소들이다. 그 공간이며 장소들은 말하자면 화려한 도시의 인공불빛 아래 가린 도시의 그림자에 해당하고, 가능하다면 숨기고 싶은 도시의 폐부에 해당한다. 그 자체가 도시의 숨길이면서도 동시에 트라우마의 온상이기도 하다. 미셀 푸코는 실제로는 있는데 정작 사람들의 의식 속에선 그 존재의미가 지워진 장소를 초장소며 없는 장소를 뜻하는 헤테로토피아라는 말로서 명명한 적이 있다. 억압의 계기들이 해소되지 않은 채 차곡차곡 쟁여지는 그곳은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잠재력으로 인해 도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혁명의 계기로까지 여겨진다. 도시의 변방이며 재개발현장이 바로 이런 헤테로토피아에 해당할 것이다. 그곳에서 도시의 기능은 일시적으로 멈춰선 상태라고 했다. 아마도 그렇게 일시적으로 멈춰선 상태는 영원히 멈춰 설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차하면 도시를 수선할 수도 있었을 혁명의 계기는 한갓 흘러간 유토피아의 꽃노래로나 기억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 공간에 정작 타자는 없다. 그러나 타자는 자신의 타자성 혹은 존재감을 이처럼 치열하게 그리고 쓸쓸하게 그리고 멜랑콜릭하게 아로새겨 놓았다. 바로 소리 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무심하게 지나치는 줄로만 알았던 시간 속에, 미래를 기약하는 시간 속에 새김질해 넣었다.

 


전은희_고립_한지에 채색_162×130cm_2013

변방풍경(2012). 작가는 이처럼 변방풍경을 그린다. 타자가 타깃이면서도 정작 타자가 부재하는 풍경을 그린다. 타자성이 흔적을 매개로 타자를 강력하게 증언하는 흔적들의 풍경을 그리고 타자들의 풍경을 그린다. 이 모든 풍경의 지점들을 지지하는 것이 아마도 일종의 변방의식일 것이다. 자신을 의식적으로 변방 위에 세우고 경계 위에 세우는 것이다. 이런 변방의식 내지 경계 위의 자의식이야말로 작가의 작업을 뒷받침하는 인문학적 배경이며 실천논리를 위한 초석이 아닐까. 변방풍경을 그린다는 것, 변방에서 정작 치열한 삶의 흔적을 냄새 맡는다는 것(변방이라고 해서 그 자체가 곧 삶의 변방은 아닐 터), 부재 위로 존재의 흔적을 밀어 올린다는 것,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언하고 증명한다는 것, 수런거리는 소리를 그림으로 옮겨 그린다는 것, 이런 암시적인 지점 지점들이 어우러져서 이제는(아님 머잖아) 아카이브로나 남겨질 담벼락이며 골목길, 연탄재와 뽑기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변방(아님 변방의식)은 기억을 의미하기도 하고, 기억을 통한 의식의 확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여운이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기시감을 아우르는 기억의 확장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전은희_끊어진관계_한지에 채색_162×130cm_2013

Doorplate, 오래된 집(2013). 먼저, 오래된 집을 보자. 작가는 진작부터 벽과 함께 집을 그렸고, 변방풍경과 더불어 오래된 집을 그렸었다. 그 집은 살핀 바와 같이 그저 집이 아니었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오래된 집은 대개 빈집이거나 버려진 집이기 쉽다. 그리고 그렇게 비고 버려진 집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부재하는 것들을 그린 것이고, 부재하는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존재론적이고 서정적인 환기력을 그린 것이다. 부재하는 존재의 풍경을 그린 것이고, 부재하는 것들이 흔적 위로 자기를 밀어올린 삶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 풍경은 이처럼 사실은 삶의 풍경인 탓에 정체성 문제에 연동된다. 실존적 조건과 인간관계에 대한 부조리한 상황인식으로 유명한 비토 아콘치는 언젠가 자신의 작업과 관련해 내 집에서 나가달라고 주문한 적이 있다. 여기서 작업은 집의 메타포고 존재의 메타포고 자의식의 메타포고 정체성의 메타포로서 제시된다. 자신을 교회(집)에 비유한 예수가 교회에 득시글거리는 상인들을 채찍질로 내친 행위에서도 역시 집은 같은 의미를 의미한다. 그렇게 작가는 오래된 집을 매개로 타자의 흔적을 찾고, 타자의 흔적 위에 포개진 자신의 흔적을 찾는다. 그에게 집은 말하자면 존재의 집이었고 자의식의 집이었던 것이다. ● 그리고 작가는 도시의 변방을 어슬렁거리다가 아마도 우연하게 문패(혹은 명패)에 시선이 가닿았을 것이다. 집과 함께 사물을 그리던 작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문패가 있는 집들은 현재 주인이 살고 있는 경우도 있고 주인이 없이 버려진 집인 경우도 있다. 여하튼 작가는 일일이 집들을 방문하면서 문패를 그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고, 이로써 타자를 그리던(흔적과 부재를 매개로 타자를 암시하던) 단계에서 타자와 직접 만나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또 다른 단계로의 이행을 감행하고 있다. 이런 타자와의 직접 대면이나 관계 맺기가 추후 작가의 작업을 이끌 방향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수가 있겠다.

 


전은희_해질녘_한지에 채색_130×120cm_2013

전은희_정리_한지에 채색_81×65cm_2013

주지하다시피 문패(혹은 명패)에는 집주인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 이름들은 무슨 의미인가. 꼭 그렇지는 않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 사회인이며 생활인이 된다는 것, 정상적이고 제도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이름을 상실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 이를테면 군대나 감옥에서 이름 대신 특정 넘버로 개인이 호명되는 것도 이런 사실의 인식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루이 알튀세는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제도가 개인을 호출하고 호명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진보와 보수, 좌익과 우익 같은. 그런가하면 이름은 곧잘 직종이나 직함으로 대체되거나 약칭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변(이 아무개 변호사)이나 김셈(김 아무개 선생님) 같은. 이처럼 개인의 이름은 규율에 묻히고 이데올로기에 묻히고 직능에 묻힌다. 무슨 말이고 무슨 의미인가. 사회적인 삶 속에서 나는 페르소나(페르소나의 원래 뜻은 가면이다)에 의해 대리 수행될 뿐, 정작 나 자신의 정체성의 입지는 줄어들고 덩달아 이름으로 호명될 수 있는 여지도 그만큼 쪼그라든다. 그렇게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줄어든다. 제도의 관점에서 개인의 이름은 그저 거추장스런 장애물일 뿐이다. 누가 개인에게(그리고 개인의 이름에) 관심을 갖는가.

 


전은희_추운 봄_한지에 채색_81×65cm_2013

전은희_이사_한지에 채색_73×53cm_2013

이름 하면, 누구든 어릴 적 다정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이름으로 호명되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시인 김춘수도 꽃을 꽃이라고 불러줄 때 그 때 비로소 나는 꽃에게 그리고 꽃은 나에게 의미 있는 무엇이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자면 개인이 이름 대신 규율로 이데올로기로 직능으로 호명될 때 나는 너에게 그리고 너는 나에게 결코 의미 있는 존재로서 가닿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이로써 작가는 어릴 적 다정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던 누군가의 호명이 그립고, 서로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나는 너에게 그리고 너는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서 거듭나고 싶다. ■ 고충환


마음 心 ma-um shim

오로빈展 / OHROBIN / 吳櫓彬 / photography

2013_0619 ▶ 2013_0702 / 월요일 휴관

 

 

오로빈_Walden_e1/3, lamina, 피그먼트 프린트_40×30inch_2013



초대일시 / 2013_0619_수요일_05:00pm
후원 / 드림인컴퍼니㈜기획 / 정은빈(Project 2.0)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가나아트 스페이스GANA 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3층Tel. +82.2.734.1333

www.ganaartspace.com


보기 위한 탐험 ●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우리가 사는 매일과 연관이 있다. 그리고 그 하나의 대상을 보기 위해 작가는 다른 모든 것, 특히 명료함을 버림으로써 다시 오롯한 대상의 맑은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초점이 없는 흐릿한 시선을 통해 작가는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고 있는 듯 하지만 실상은 진짜의 모습, 실체를 바라보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다. 전체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하나의 객체와 교류하기 위해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보이는 면면의 에너지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 같다. 이러한 작가적인 탐구는 아직 진행 중으로 보이지만 그의 삶의 방향과 목표를 연관지어 보면 그가 찾으려는 진정한 대상의 의미가 더욱 명료하게 드러난다.

 


오로빈_Walden_e1/3, lamina, 피그먼트 프린트_30×40inch_2013

 

 

 

오로빈_Otaru_e1/3, lamina, 피그먼트 프린트_20×30inch_2013

오로빈_Otaru_e1/3, lamina, 피그먼트 프린트_20×30inch_2013

작가는 사진으로 소통하는 한편, 아이들의 꿈을 지원하기 위해 활동하는 사회독지가이다. 사회적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의 꿈을 이루기 위한 기회를 제공하고 마음을 연결하는 일이 그가 매일의 일상을 보내는 모습이다. 어른들이 지워 준 결핍의 상황에서, 물리적인 현실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이겨내야 하는 아이들의 마음에 다리를 놓기 위해 작가는 스스로 아이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또한 일대 다의 대응이 아닌 일대 일의 수평적인 바라봄은 사람 사이, 마음 사이를 연결하기 위한 작가만의 낮은 자세로서 그의 작품에도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오로빈_Distant_e1/5, lamina, 피그먼트 프린트_8×10inch_2013

 

 

 

오로빈_Distant_e1/5, lamina, 피그먼트 프린트_8×10inch_2013

 

 

 

오로빈_Distant_e1/5, lamina, 피그먼트 프린트_8×10inch_2013

본다는 행위는 사실은 내가 알고 있는 인지의 지식을 바탕으로 시각적인 해석을 결론짓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오늘날의 절대적 지식은 존재하는 것인가? 많은 사상가와 철학자, 예술가들이 질문하고 답을 찾고 또다시 질문을 던짐으로써 진리를 향한 연구와 나아감을 멈추지 않고 있다. 작가 또한 그러한 구도의 열에 방향성을 두고 있다고 보여진다. 작가는 대상을 바라봄에 있어서 오감으로 인식되는 것들을 지워가는 작업을 한다.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찾아 그것과의 수평적인 다리를 놓으려 하는 반복적인 인내의 단계를 꾸준히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과 닿고, 세상과 닿고, 보다 큰 본질과 닿기 위해 한없는 신뢰와 애정으로 바라보고 관찰하는 그의 연구는 이제 막 자신만의 시선을 담고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 정은빈

 

 

 


오로빈_You_e1/5, lamina, 피그먼트 프린트_8×10inch_2013

진정으로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또, 진정으로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처음에는 혼란스럽게 느껴졌던 이 말이, 언제부터인가 고맙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과 듣고 싶어 하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들을 되짚어 보면, 결국 우리 본래의 자신과 만나게 된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금 왜 사진을 찍고 있고, 계속 찍을 것인가? 본래 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젠 사진을 통하여 만나게 될 누군가에게, 그의 자신을 발견하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 사진을 통하여, 사랑을 전하고 싶고, 감사를 전하고 싶고, 깨달음을 전하고 싶다. ■ 오로빈

    상생-합, 금이야기...

이철규展 / LEECHOULGYU / 李喆奎 / painting

2010_1110 ▶ 2010_1115

 

 

이철규_상생-합(相生-合)_닥펄프, 순금박_122×122cm_2010

초대일시_2010_111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4층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이철규의 미의식의 핵심은 내재적 초월로 향하는 도정에 관한 것이다. 이 도정의 대전제는 대아(大我)인 나와 외부세계인 자연과 온갖 대상, 즉 객체가 분리되지 않은 하나라는 깨달음이다. 사실 세계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다만 나만 있을 뿐이다. 아니, 나 또한 없었다. 애초에 텅 빔의 적막무짐(寂寞無朕)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나의 살결에 무언가가 만져지고 생생한 느낌이 있다면 진정세계와 나는 하나이기에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여기 일상, 세련된 서구에서 속계(俗界)라고 폄하하는 이곳이 바로 무등(無等)의 선계(仙界)가 아니겠는가? 이철규는 이곳, 너와 내가 평범하게 살고 있는 이곳이야말로 무등의 선계라고 파악한다. 이것이 내용면에서 파악한 2010년까지 진화한 그의 세계관이다. 또한 이철규는 철저하게 살아있는 세계를 구현한다. 일말의 죽음의 속성도 없다. 이점은 아주 중요하다. 이철규의 예술은 차안과 피안의 나눔 없는 부즉불리의 세계인 동시에 삶을 위한 예술이고, 일상과 생활과 감상과 의지가 한 몸이 되는 세계다. 소나무의 질박함, 그 옛적 조선의 무명씨 예술가들이 발휘했을 그 삶의 광희(狂喜)가 물고기로 변해 이철규의 손끝에서, 육신에 각인되어있는 유전자에 의해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 찬란한 부즉불리의 정신은 결코 이생의 도피처로서의 예술이 아니다. 아내나 자식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그저 행했던 자연스러운 행동양식이자, 전깃불 없던 긴 밤의 동무이자, 다가오는 미래의 불안의 무게를 현재의 즐거움으로 극복하려는 수수한 마음이다.

 


이철규_상생-합(相生-合)_닥펄프, 순금박_122×122cm_2010

 

 

 

이철규_상생-합(相生-合)_닥펄프, 순금박_122×122cm_2010

이철규의 테크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예술노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철규는 초기에 비교적 널리 알려진 하이 테크니션이었다. 동양화의 임모나 사생의 기본을 십 수년 다진 뒤에, 전국 산수를 유람하며 산수화를 그렸다. 마치 만인보 시를 쓰듯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들의 인물을 살펴 그렸다. 둘째, 자기 형식의 구축을 위해 십 수년을 매진했다. 그가 추구한 양식은 유불선과 서구 모더니티가 갖는 순수주의, 동양정신의 체현인 묵향의 서필이 한데 모여 조화를 이루는 전통의 현대적 해석이 구현하려는 목적이었다. 이철규는 그런데 근래 몇 년 전부터 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기의 삶과 분리된 형식에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라는 대전제가 바로 그것인데, 형식 그 자체만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은 자기 삶을 앗아간다. 그래서 그는 자기 삶과 자기 형식이 일치될 순 없을까 물었다. 자기 삶이 빠진, 단순한 형식만의 추구는 맹목이요, 또 형식미가 결여된 채 자기 삶만을 주장하는 것은 치졸하기 짝이 없다. 바로 실존적 예술의 확립이야말로 최근 몇 년간 이철규가 천착했던 진정한 주제의식이다. 그리고 앞서 서두에서 길게 설명했던 지금 여기에 사는 자기 삶의 솔직 담백한 드러냄이 이번 전시의 진면목이다. 이번 작품은 그가 오랜 여정을 지나오며 겨우 찾은 불타세존 같은 삶의 깊이라 할 수 있다. 이철규는 삶의 예술, 자기 인생과 일치하는 형식, 자연과 자기 주체가 하나되어 화해된 세계, 현시대에서 찾을 수 있는 전통의 의미, 혁신의 본질을 끊임없이 추구해왔다. 그리고 그 조화미의 완성이 이번 전시에서 매우 두드러진다고 느낀다. 그러나 오래지 않은 미래에 현재를 뛰어넘어 이제껏 기존에 없었던 형식을 그가 반드시 구축해낼 것이라고 믿는다. ■ 이진명

 

 


이철규_상생-합(相生-合)_닥펄프, 순금박_115×85cm_2010

 

 

 

이철규_상생-합(相生-合)_닥펄프, 순금박_122×122cm_2010

 

 

 

이철규_상생-합(相生-合)_닥펄프, 순금박_42×34cm_2010

 

 

이철규_상생-합(相生-合)_닥펄프, 순금박_60×60cm_2010

서양화가 김성로초대전이 지난6월 12일부터 오는 17일까지 관훈동 원빌딩4층 '갤러리 각'(02-737-9963)에서 열린다.

 

 

김성로 화백의 '아름다운 세상'

이번 전시에서 보여 주는 김성로의 그림은 생동감있는 색체의 변주와 감성적 표현이 치열하게 진화하고 있는 해체적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한다. 작가가 뚜렷하게 보여주는 풍부한 문화적 생명력은 함축된 시적 정서의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내가 그의 그림을 쉬지 않고 추적하는 커다란 의미며 이유이기도 하다. 목판위에 그려진 야생적 자연 속에서 살아있는 생명감 넘치는 질서로 조합되고 구성된 그의 그림 '‘아름다운 세상'은 온통 산소(酸素oxygen)로 넘치고 있는 신선함이 살아있어 오래오래 뇌리에 흔적을 남긴다. 영원한 그리움이 담긴 한 편의 아름다운 시(Poetry)인 동시에 몽환적인 꿈의 세계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은유적인 이야기와 전설이기도 하다.

 

/ 손소운 孫素雲

 

 

 

김성로의 “What are you?"

김성로의 “What are you?" 연작에서 그는 무아지경을 인간의 두개골을 통해 보여주는데, 두개골은 죽음의 상징이며 인간의 존재의 무상함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죽음의 상징인 두개골은 인간의 삶과 죽음의 상관관계를 조망하고 삶의 덧없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김성로는 인간의 원초적인 탄생과 소멸에 대해 언급해, 작품을 보는 관객에게 스스로의 삶과 죽음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고 삶을 가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오늘날 관객은 작품 속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작품을 완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즉 관객의 감상 없이 작품은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관객과의 소통이 중시되기에 김성로의 작품 역시 관객에게 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돌아보도록 종용하는 작품이 되었을 때 의미를 갖는 것이다. 관객과 소통하는 그의 작품은 관객의 삶과 죽음을 반영하기에 더욱 빛을 발한다.

글 / 김 효 선 (갤러리 각 큐레이터)

 

 

 

 


 

우리민화협회 제6회 회원전인 "마음의 그림으로 힐링하다, 민화+ Healing"전이 지난 6월5일부터 오는18일까지 아라아트센터 3층전시장에서 열린다.

6월12일 오후5시에 열린 오프닝에는 참여작가외 많은 내빈이 참석하였는데, 이만주, 편근희, 노광래씨도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전시회 및 행사내용 : 민화특강, 체험행사

참여작가 :

서공임, 김미경, 김미정, 김석태, 박은아, 신창복, 이명수, 이순임, 이재심, 정미혜, 조윤희, 조태진, 최은경, 한복희, 김경미, 김영순, 노진경, 박정민,

서현자, 이경희, 정해진, 차정숙, 최종호, 최희숙, 김영주, 양혜리, 윤형랑, 윤호영, 권준성, 권희숙, 김선회, 김경란, 김승민, 김화정, 노종심, 박동채,

박수현, 서오정, 유현숙, 이순주, 최영애, 강선주, 김미숙, 김연금, 김영희,  박경란, 송미영, 신주영, 오미정, 우미애, 이경숙, 이은하, 이춘하, 장수정,

장현희, 최미희, 최승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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