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집
전은희展 / JUNEUNHEE / 田銀姬 / painting
2013_0619 ▶ 2013_0624
전은희_오래된 집-만석동_한지에 채색_162×454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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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619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3층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전은희의 회화-오래된 집들을 배회하다가 이름 없는 이름들에 마주서다 ● 전은희의 그림은 재현적이고 문학적이고 서사적이다. 이런 그림에서 주제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그림 전체의 성격을 함축하거나 암시하는 경우가 많고, 그림 전체를 구분하면서 하나로 연이어주는 연결고리로서의 계기로 작용하기 쉽다. 어떤 식으로든 작가의 그림을 읽는데 결정적이거나 최소한 암시적인 실마리 역할을 한다. 그림들 각각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렇게 다른 그림들에 어떤 일관성을 부여해주는 보이지 않는 계기이며, 상호보완적이고 보충적인 계기로서 작용한다. 그렇게 이 그림은 저 주제를 부르고 저 주제는 이 그림을 싸안는다. ● 벽, 공간의 기억(2009).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있다. 불통의 벽이고 단절의 벽이다. 그 벽은 벽 자체라기보다는 비유적인 벽이다. 불통의 느낌과 단절의 느낌을 벽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그려진 벽 그림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이따금씩 하늘이 그림 속에 들여질 때조차 하늘은 오히려 벽의 요지부동을 강조할 뿐이었다. 그렇게 작가의 벽 그림은 인간관계에 대한 실존적 자의식의 표상이고 표출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벽 자체에 시선이 머문다. 이처럼 벽 자체에 시선이 꽂히면서 반전이 일어난다. 불통과 단절의 계기로만 보였던 벽이 허물어지면서 자기를 내어준다. 벽은 알다시피 평면이다. 그 위에 그림을 그린 도화지와 같고, 삶의 흔적을 아로새긴 해묵은 노트와 같고, 시간의 지층이 켜켜이 내려앉은 빛바랜 사진첩과 같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의 유년시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온 모습이 어슷비슷한 탓에 작가가 그린 삶의 흔적은 쉽게 공감을 얻는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벽 그림은 실존적 자의식으로부터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목가적인 감성 사이의 스펙트럼을 아우른다.
전은희_DOORPLATE_한지에 채색_41×32cm×80_2013
The written story(2009). 그렇게 작가는 삶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표면적으론 타자의 삶의 흔적이지만, 그러나 그 흔적은 어느 정도 작가 자신의 삶의 흔적이기도 하다. 타자의 삶의 흔적에서 타자를 보고 자기를 본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자기가 타자가 되고 타자가 자기가 된다. 감정이입을 매개로 자기와 타자가 동일시되는 심리적 공감 내지 동화현상이 일어나는 것. 그때 나는 지금 여기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때 그곳에 있었던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인가. 사라졌다면 어디로 어떻게 사라진 것인가. 사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숨어든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게 깃든 것인데, 이처럼 깃들게 해주는 계기가 흔적이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말하자면 그때 그곳에 있었던 나의 흔적이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마주한 자리에 정작 타자는 없다. 다만 허물어진 벽이나 내려앉은 지붕이 있을 뿐. 마당의 경계 너머로 웃자란 풀밭이 있을 뿐. 박제가 된 시간을 증언하듯 멈춰선 행글라이더 모형이 있을 뿐. 그렇지만 그 벽이며 지붕, 풀밭이며 모형에 타자의 삶의 흔적이 아로새겨진다. 타자는 말하자면 사물들에 자신의 삶을 흔적으로 남겨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사물들엔 존재의 흔적이 아로새겨지고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기술된다. 바로 텍스트들이다. 작가는 그 텍스트들이 들려주는 무언의 이야기를 헤집고 발굴하고 채집하고 분류하는 무슨 문헌학자 같고 고고학자 같다.
전은희_바람벽_한지에 채색_130×400cm_2013
산책자의 시선(2010). 보기에 따라서 문헌학자와 고고학자는 룸펜과도 같다. 보들레르와 발터 벤야민이 산책자 내지 만보가로 명명했던 룸펜은 특히 도시유목과 관련해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마치 유유자적하는 소요유에서처럼 의식의 끈을 반쯤 내려놓고 도시며 도시의 변방을 어슬렁거리고 기웃거린다. 그렇게 어슬렁거리고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도시의 세부들이 보이고 세목들이 눈에 들어온다. 흔히 삶을 길에다 비유한다. 어떤 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길을 그저 번거로운 과정이며 번잡한 수단으로 본다. 길 자체가 이미 삶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당연 삶 자체가 이미 목적이듯 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어슬렁거리고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사람들이 버린 사물들이 보이고, 사물들에 아로새겨진 사람들의 흔적이 보인다. 그러므로 그 사물들이며 삶의 흔적을 발굴하고 기록하는 작가의 행위는 일종의 도시회화 내지 도시유목의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 부재한 공간, 소리 없이 흐르는 시간(2011). 작가는 도시 중에서도 주로 변방을 어슬렁거리고 재개발현장을 기웃거린다. 도시면서도 도시 같지 않은 공간이며, 실제로도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공간이며, 도시기능이 일시적으로 멈춰선 잠정적인 장소들이다. 그 공간이며 장소들은 말하자면 화려한 도시의 인공불빛 아래 가린 도시의 그림자에 해당하고, 가능하다면 숨기고 싶은 도시의 폐부에 해당한다. 그 자체가 도시의 숨길이면서도 동시에 트라우마의 온상이기도 하다. 미셀 푸코는 실제로는 있는데 정작 사람들의 의식 속에선 그 존재의미가 지워진 장소를 초장소며 없는 장소를 뜻하는 헤테로토피아라는 말로서 명명한 적이 있다. 억압의 계기들이 해소되지 않은 채 차곡차곡 쟁여지는 그곳은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잠재력으로 인해 도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혁명의 계기로까지 여겨진다. 도시의 변방이며 재개발현장이 바로 이런 헤테로토피아에 해당할 것이다. 그곳에서 도시의 기능은 일시적으로 멈춰선 상태라고 했다. 아마도 그렇게 일시적으로 멈춰선 상태는 영원히 멈춰 설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차하면 도시를 수선할 수도 있었을 혁명의 계기는 한갓 흘러간 유토피아의 꽃노래로나 기억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 공간에 정작 타자는 없다. 그러나 타자는 자신의 타자성 혹은 존재감을 이처럼 치열하게 그리고 쓸쓸하게 그리고 멜랑콜릭하게 아로새겨 놓았다. 바로 소리 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무심하게 지나치는 줄로만 알았던 시간 속에, 미래를 기약하는 시간 속에 새김질해 넣었다.
전은희_고립_한지에 채색_162×130cm_2013
변방풍경(2012). 작가는 이처럼 변방풍경을 그린다. 타자가 타깃이면서도 정작 타자가 부재하는 풍경을 그린다. 타자성이 흔적을 매개로 타자를 강력하게 증언하는 흔적들의 풍경을 그리고 타자들의 풍경을 그린다. 이 모든 풍경의 지점들을 지지하는 것이 아마도 일종의 변방의식일 것이다. 자신을 의식적으로 변방 위에 세우고 경계 위에 세우는 것이다. 이런 변방의식 내지 경계 위의 자의식이야말로 작가의 작업을 뒷받침하는 인문학적 배경이며 실천논리를 위한 초석이 아닐까. 변방풍경을 그린다는 것, 변방에서 정작 치열한 삶의 흔적을 냄새 맡는다는 것(변방이라고 해서 그 자체가 곧 삶의 변방은 아닐 터), 부재 위로 존재의 흔적을 밀어 올린다는 것,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언하고 증명한다는 것, 수런거리는 소리를 그림으로 옮겨 그린다는 것, 이런 암시적인 지점 지점들이 어우러져서 이제는(아님 머잖아) 아카이브로나 남겨질 담벼락이며 골목길, 연탄재와 뽑기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변방(아님 변방의식)은 기억을 의미하기도 하고, 기억을 통한 의식의 확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여운이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기시감을 아우르는 기억의 확장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전은희_끊어진관계_한지에 채색_162×130cm_2013
Doorplate, 오래된 집(2013). 먼저, 오래된 집을 보자. 작가는 진작부터 벽과 함께 집을 그렸고, 변방풍경과 더불어 오래된 집을 그렸었다. 그 집은 살핀 바와 같이 그저 집이 아니었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오래된 집은 대개 빈집이거나 버려진 집이기 쉽다. 그리고 그렇게 비고 버려진 집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부재하는 것들을 그린 것이고, 부재하는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존재론적이고 서정적인 환기력을 그린 것이다. 부재하는 존재의 풍경을 그린 것이고, 부재하는 것들이 흔적 위로 자기를 밀어올린 삶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 풍경은 이처럼 사실은 삶의 풍경인 탓에 정체성 문제에 연동된다. 실존적 조건과 인간관계에 대한 부조리한 상황인식으로 유명한 비토 아콘치는 언젠가 자신의 작업과 관련해 내 집에서 나가달라고 주문한 적이 있다. 여기서 작업은 집의 메타포고 존재의 메타포고 자의식의 메타포고 정체성의 메타포로서 제시된다. 자신을 교회(집)에 비유한 예수가 교회에 득시글거리는 상인들을 채찍질로 내친 행위에서도 역시 집은 같은 의미를 의미한다. 그렇게 작가는 오래된 집을 매개로 타자의 흔적을 찾고, 타자의 흔적 위에 포개진 자신의 흔적을 찾는다. 그에게 집은 말하자면 존재의 집이었고 자의식의 집이었던 것이다. ● 그리고 작가는 도시의 변방을 어슬렁거리다가 아마도 우연하게 문패(혹은 명패)에 시선이 가닿았을 것이다. 집과 함께 사물을 그리던 작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문패가 있는 집들은 현재 주인이 살고 있는 경우도 있고 주인이 없이 버려진 집인 경우도 있다. 여하튼 작가는 일일이 집들을 방문하면서 문패를 그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고, 이로써 타자를 그리던(흔적과 부재를 매개로 타자를 암시하던) 단계에서 타자와 직접 만나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또 다른 단계로의 이행을 감행하고 있다. 이런 타자와의 직접 대면이나 관계 맺기가 추후 작가의 작업을 이끌 방향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수가 있겠다.
전은희_해질녘_한지에 채색_130×120cm_2013
전은희_정리_한지에 채색_81×65cm_2013
주지하다시피 문패(혹은 명패)에는 집주인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 이름들은 무슨 의미인가. 꼭 그렇지는 않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 사회인이며 생활인이 된다는 것, 정상적이고 제도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이름을 상실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 이를테면 군대나 감옥에서 이름 대신 특정 넘버로 개인이 호명되는 것도 이런 사실의 인식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루이 알튀세는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제도가 개인을 호출하고 호명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진보와 보수, 좌익과 우익 같은. 그런가하면 이름은 곧잘 직종이나 직함으로 대체되거나 약칭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변(이 아무개 변호사)이나 김셈(김 아무개 선생님) 같은. 이처럼 개인의 이름은 규율에 묻히고 이데올로기에 묻히고 직능에 묻힌다. 무슨 말이고 무슨 의미인가. 사회적인 삶 속에서 나는 페르소나(페르소나의 원래 뜻은 가면이다)에 의해 대리 수행될 뿐, 정작 나 자신의 정체성의 입지는 줄어들고 덩달아 이름으로 호명될 수 있는 여지도 그만큼 쪼그라든다. 그렇게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줄어든다. 제도의 관점에서 개인의 이름은 그저 거추장스런 장애물일 뿐이다. 누가 개인에게(그리고 개인의 이름에) 관심을 갖는가.
전은희_추운 봄_한지에 채색_81×65cm_2013
전은희_이사_한지에 채색_73×53cm_2013
이름 하면, 누구든 어릴 적 다정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이름으로 호명되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시인 김춘수도 꽃을 꽃이라고 불러줄 때 그 때 비로소 나는 꽃에게 그리고 꽃은 나에게 의미 있는 무엇이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자면 개인이 이름 대신 규율로 이데올로기로 직능으로 호명될 때 나는 너에게 그리고 너는 나에게 결코 의미 있는 존재로서 가닿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이로써 작가는 어릴 적 다정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던 누군가의 호명이 그립고, 서로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나는 너에게 그리고 너는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서 거듭나고 싶다. ■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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