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풍경 Prosaic Landscape
노충현展 / ROHCHOONGHYUN / 盧忠鉉 / painting
2013_0613 ▶ 2013_0731
노충현_산책 a walk_캔버스에 유채_162×227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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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613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공휴일_10:00am~05:00pm
국제갤러리 K1KUKJE GALLERY K1
서울 종로구 삼청로 54Tel. +82.2.735.8449
www.kukjegallery.com
노충현 : 회화의 대위법 ● 이번 국제갤러리의 개인전에서 노충현은 2013년에 그린 두 개의 시리즈를 전시했다. 이 두 개의 시리즈는 한강 시민공원과 고수부지 주변을 무대로 하여 그 전 해 여름 장마 기간 의 풍경과 같은 해 겨울의 폭설에 덮인 풍경을 다루고 있다. 그는 이번 전시의 제목을 지난 2005년 3월 관훈갤러리에서의 전시와 2011년 6월의 조현화랑에서의 전시를 위해 사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살-풍경』이라고 붙였다.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기간 동안 작가가 고수하고 있는 이 주제 속에는 대상에 대해 느끼는 혹은 작가가 그것에 부여하는 '거리감'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을 극적 소격(疏隔)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도시와 세계로부터 스스로 이격(離隔)된 상태로 볼 것인지는 해석에 따라 다를 것이다. 둘 다 아니라면 그것은 회화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거리', 다시 말해 그리는 행위의 흔적으로 남겨진 물질적 표면이라는 낯선 결과에 의해 생겨난 거리감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 번의 전시를 하는 동안 노충현은 몇 번인가 이 '거리감'의 회화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그 동안『살-풍경』역시 도시의 가라앉은 자리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회화가 만들어내는 고유한 감정의 공간으로, 그리고 다시 계절과 사건들의 흐름에 의해 쓸려가고 다시 쌓이는 시간의 경험에 이르기까지 매번 그 풍경이 가리키는 감정의 주조(主調)를 조금씩 바꾸어 왔다. 『살-풍경』은 을씨년스럽고 스산한 풍경을 의미하지만, 여기서의 접두어인 '살'은 노충현의 회화 안에서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그것이 '삶'이나 '살'(flesh)처럼 진한 감정이나 두터운 기억이 충전되어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탄식이나 외침처럼 들린다. 오히려, 그것은 화살의 '살'처럼 어디론가 빠르게 소멸되어 버릴 것 같은 풍경의 수식어다. 전혀 움직일 것 같지 않은 '현재'이지만 그것은 빠르게 어디론가 소멸되어 간다. 노충현의 회화는 느리고, 고요하며, 텅 비어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덧없고, 투명하며, 잡을 수 없는 순간을 가리키고 있다.
노충현_유수지의 밤 a night in the reservoir_캔버스에 유채_182×259cm_2013
화폭에 그려진 장소들은 사람이 거의 없는 한강의 고수부지와 그 주변의 풍경들이다. 이 장소들에 이르기 위해서는 삶과 현실의 밀도와 중압감을 피할 수 없는 도시를 지나쳐와야 한다.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은 거대한 도시로부터 방금 걸어 나온(혹은 그 중심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이다. 이곳은 도시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변방이자 '설명하기 힘들만큼' 탈-맥락화된 공간이다. 이 장소들은 여전히 이 도시가 원래 어떤 곳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원시적 조건들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이 공간에는 항상 많은 물이 흐르고, 겨울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사라진 텅 빈 공간에 눈이 쌓인다. 게다가 폭설이나 장마의 계절에 이 공간들은 더 더욱 무의미한 영역, 영점의 장소, 혹은 도시의 바깥(혹은 '자연')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무의식의 공간이 된다. 작가가 2005년부터 전시를 통해 보여준 한강 시민공원의 다양한 사물들, 예컨대 테니스 코트, 수영장, 고수부지 위의 가건물들, 제방 같은 대상들이 무의미하면서도 이입을 일으키는 한적하고 고립된 풍경을 만들어냈다면, 그리고 2006년의「자리」라는 제목의 전시에서 망원렌즈로 끌어당긴 듯한 특정한 실내공간의 클로즈-업 화면들이 소외와 고립의 감정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켰다면, 2011년 이후 다시 한강으로 돌아온 작가의 시점은 대상으로부터 한층 더 뒤로 물러서 있다. '뒤로 물러섰다'고는 하지만, 이 작품들에는 대상의 클로즈-업이 아닌 작가 자신의 마음을 응시하는, 오히려 더 집요하게 풍경을 바라보는 태도가 강조되어 있다. 이 '응시'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충현은 사진을 사용한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사진으로 기록한 뒤 다시 그것을 자신이 본 혹은 보았다고 믿는 것에 가까워질 때까지 수정한다. 페인팅의 과정에서 이러한 사진적 기억의 참조는 직접적 응시를 왜곡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페인팅은 눈에 의존하는 대신 어떤 기억, 대상에 대한 반복적 경험과 수정의 기억에 대해 반응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변형된 것은 응시가 아니라 응시하고 있는 우리 자신인 것이다. 그는 2011년경부터 한강 주변의 계절적 변화를 관찰해 왔다. 그리고 십여 년 가까이 그가 보아 온 동일한 장소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장마와 폭설, 이 두 개의 테마들은 이때부터 그가 다루어 온 특별한 기후적 현상이다. 그리고 그는 예의 이것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은 뒤, 작업실로 돌아와 자신이 본 것과 사진에 나와 있는 이미지들을 비교하며 캔버스에 그려왔다. 사진의 참조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 번째로 그것은 기억의 보완이며, 두 번째로는, 이것이 더욱 중요한 이유인데, 사진 자체가 우리의 시선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노충현_저너머 over there_캔버스에 유채_91×116.5cm_2013
한강 고수부지에 내리는 폭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것은 공간의 깊이를 갑자기 평면화 한다. 사람들은 폭설이 내리는 강을 보면서 안도와 불안감을 느낀다. 그것은 뿌리 깊은 향수와 같다. 폭설이 여전히 이 거대한 공간을 채워주는데서 오는 안도감과 그것이 여전히 그 공간을 이해할 수 없는, 오래 전부터 기억하고 있던 공간으로 되돌려 놓는데 대한 불안감이 그것이다. 노충현의 그림 속에서 폭설은 거리감 대신 이 안도와 불안감의 평면적인 병치로 바뀐다. 이 그림들 속에서 눈은 일종의 기호로 다루어지고 있다. 하늘에서 흩뿌려져 내리는 눈발은 화면의 어두운 부분들 위에 간간히 표시되어 있을 뿐 그 외에는 거의 생략되어 있다. 2013년 작「폭설」에는 한 가운데에 거대하고 어두운 건물이 그려져 있다. 폭설이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그 건물 위로 떨어지는 흐릿하게 초점이 나간 듯한 회색의 반점들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것을 제외한 전면과 배경의 공간이 밝은 회색의 면들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 그려진 것은 '폭설'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생략의 감정이다. 그것은 잘 환기되지 않는, 그러나 환기를 불러일으키는 기억의 대상들 가운데 하나다. 폭설은 역설적으로 거의 그려지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판단과 참조들의 배치에 대해 우리의 응시를 이끌어낸다. 우리는 폭설에 대해 생각하고, 곧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노충현이 그리고 있는 것은 아주 느리고 짧은 순간이다. 누구나 그것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지만 동시에 아무도 그것을 명확히 기억해내지 못한다.
노충현_편의점 convenience store_캔버스에 유채_112×145.5cm_2013
눈에 덮인 풍경은 매우 특별한 빛을 만들어낸다. 이 빛은 단순한 백색의 면이 아닌 많은 색채와 광선들의 혼재처럼 보인다. 폭설의 색은 이 풍경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소리와 마찬가지로 극도로 제한된 대역에서의 복잡한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두운 푸른색이나 밝은 옥색, 혹은 검은색에 가까운 청회색 등은 모두 이 폭설이 내리는 장소의 특이성에 연관되어 있다. 특히 밤에 바라본 설경인 경우,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힘들 정도로 그 빛은 주관적 기억의 형태로 남는다. 노충현이 그린 고수부지의 밤의 설경들은 특이한 기억, 또는 기록의 과정을 담고 있다. 다른 풍경들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일차적으로 카메라에 의해 기록된 풍경들이다. 그러나 사진으로 촬영한 낮의 이미지들과 달리, 밤의 풍경들은「밤」연작에서 보듯 플래시의 광원에 의한 대비와 생략, 노출의 부족, 인화 혹은 디스플레이의 부적정과 같은 우발적 요소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이 풍경을 그리는데 있어 사진을 일차적 참조로 활용하고 있는데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풍경을 인지하는 이제는 고착되어 버린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많은 경우 밤의 풍경을 사진이 기록하는 방식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보아 온 대상과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본 대상을 구분하지 않을 만큼 사진적 이미지에 자연스럽게 의존한다. 특히 밤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카메라의 '야간 해상도'와 '밤눈'의 조합된 이미지로 존재한다.「유수지의 밤」이나「밤눈」은 사진 이미지를 거꾸로 유화로 옮겨놓은 것이다. 우리의 뇌리 속에 각인되어 있는 밤의 사진적 빛은 여기서 다시 회화의 색채로 재해석된다. 폭설의 밤은 마치 오래 방치되어 붉은색이 날아가 버린 사진의 잔영처럼 뒤로 끝없이 물러서는 푸른빛에 의해 지배되지만, 조금만 다가서면 그것은 물감의 흐름과 터치들로 인해 다시 시선을 사로잡는 긴장관계를 드러낸다. 회화의 시간성은 사진이나 드로잉과 달리 느리고 동시에 순간적이다. 회화의 물질성은 역설적으로 그것의 지연(delay)과 순간성에서 비롯된다. 회화는 사진이 생성해낸 기억을 물질성과 지연으로 변환한다. 회화는 사진을 (시선의) 기록이 아닌 (시선의) 생산으로 바꾼다.
노충현_눈위의 드로잉 drawing on the snow_캔버스에 유채_91×65cm_2013
장마는 폭설과 정반대되는 감각들을 동원한다. 그것은 물의 흔적으로 가득 찬 공간, 그리고 너른 강물 위로 떨어지는 장맛비의 낮은 소음들을 떠올린다. 노충현의 그림들에서 장마철의 대지는 아직 잠기지 않은 흙더미들과 수풀의 휘어진 움직임들 사이로, 흐릿한 수면의 반사와 그 위로 가라앉아 내리는 빛의 산란으로 인해 추상적인 밝은 면으로 그려진다. 이 밝은 면은 대기 중의 습기로 인해 산란하는 빛에 기인하기도 하고, 대지와 수면 그리고 대기를 동일한 투명성 안에 가두는 화면의 프레임에 의해 강조되기도 한다. 겨울의 설경과 달리, 장마의 풍경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시점으로 그려져 있다. 흡사 강둑이나 그 주변의 건물 3, 4층 높이에서 클로즈업을 한 이미지들처럼 보인다. 특히「여름의 끝」연작에서 화면은 고수부지의 빗물로 채워진 수영장 공간과 직선으로 구획해 놓은 울타리에 의해 커다랗게 사선들로 나뉘어 있다. 풍경은 멀어지는 대신 망원렌즈로 본 것처럼 가파르게 들려있다. 이로 인해 화면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심리적 거리와, 그 못지않게 수면의 반사하는 빛을 수직에 가까운 화면 전체에 채우는 이중적 인지효과가 생겨난다. 장마에 의해 물에 덮인 고수부지 수영장의 바닥은 추상적인 구획선만을 남긴 채 모두 밝은 면으로 환원됨으로써 여름의 끝을 알리고 있다. 동일한 방식으로 그린「수몰」연작들 역시 마치 TV 뉴스의 헬기 촬영장면처럼 위에서 줌-인으로 본 홍수와 물 밖으로 윗부분을 드러낸 나무들을 그려놓고 있다. 이들 가운데 몇몇 작품에서는 수몰의 장면에서, 겨울의 폭설과 반대로, 푸른 톤이 날아가 버린 필름의 핑크빛 잔상만을 남기고 있다. 역시 여름의 습기와 햇빛에 의해 변색되고 노광된 낡은 필름의 잔상들처럼 보인다.
노충현_장마 raniy season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2008~13
노충현의 작품은 특정한 음역대의 소리를 떠올린다. 이 소리는 일종의 배경음 같은 것으로, 아주 높거나 낮은 피치의 소리의 입자들로 가득 차 있어 거의 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로는 고요에 가깝다. 그것은 느리지만 순간적이며, 먼 곳에서 들려오는 날카롭고 조밀한 도시의 소음들이 조용한 바람소리나 강물의 흐름에 의해 뒤덮여 약간 먹먹해진, 대기의 희박함이 만들어내는 소리다. 이 소리로 인해 그의 작품 속의 풍경들에는 한적하지만 예민하고, 옅지만 강렬한 공기가 채워진다. 어쩌면 그것은 배경음이라기보다는 풍경 그 자체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것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좁은 배경음의 영역은 그것이 만들어내는 세계의 독자적 배치를 통해 이 세계를 다른 세계들로부터 구분한다. 한 음계에 속한 세계는 다른 세계로 반복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온도에 속한 세계의 배치 역시 다른 온도들에 속하는 세계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1°C의 차이로 세계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된다. 장마나 폭설과 같은 계절적 현상은 세계의 차이와 특이성을 드러내는 가장 급진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진자운동에서처럼 장마와 폭설은 이 온도 주기의 양 극단을 이룬다. 이 두 개의 끝에서 노충현은 한강 시민공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노충현_수몰 flooded_캔버스에 유채_80×80cm_2013
풍경화는 세계의 은유로부터 시작된다. 노충현의 회화 속에는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 그가 지난 10여 년 간 그려온 한강 주변의 풍경 속에는 동시대의 도시와 사회, 세계 안에서 발견되는 삶의 조건들에 대한 대위법적인 관념들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것은 불안과 고요, 밀도와 한적함, 의미와 무의식, 정상과 탈-맥락 같은 것들이다. 풍경화가 세계의 은유를 생산하는 과정은 관객이 그것을 자신의 세계, 혹은 자신이 예상한 (예상했다고 믿는) 세계와 동일시함으로써 완결된다. 폭설과 장마의 계절에 한강 시민공원 주변을 그린 노충현의 그림들은 이 도시에서의, 세계에서의 삶에 대한 예외적인 도상적 사유의 순간을 제시하고 있다. 세계는 완벽한 실재이면서, 동시에 관념이다. 그것은 정치적, 물질적, 의미론적 관계들로 포화되어 있지만 동시에 초월적, 무의식적, 비-유기적 관계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들은 자연을 넘어서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연의 일부를 이룬다. 노충현의 회화를 통해 한강 시민공원은 이러한 대위법의 더할 나위없는 무대가 되었다. 비록 폭설과 장마의 계절에 우리가 그곳에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그 시간들이 만들어내는 세계를 우리의 것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 유진상
Vol.20130630f | 노충현展 / ROHCHOONGHYUN / 盧忠鉉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