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사이

KKHH(강지윤+장근희)展 / KANGJIYUN+JANGGUNHEE / mixed media

 

2013_0904 ▶ 2013_0917 / 월요일 휴관

 

 

KKHH_적당한 사이를 위한 퍼포먼스_2013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KKHH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3_0904_수요일_06:00pm

본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시행중인『Emerging Artists: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의 선정작가 전시입니다.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주말_11: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99SPACE99

서울 종로구 견지동 99-1번지Tel. +82.2.735.5811~2

space99.net


이 글은 KKHH(강지윤+장근희)의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 관찰자로 참여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들은 관계를 이롭게 하는 방법에 대해 탐구하며,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모아 관계와 관련된 기억, 습관, 방법들을 떠올리게 하고 그것을 명언과 같은 하나의 어구로 만든 뒤, 그 어구에 상응하는 몸짓을 고안하여 하나의 안무 혹은 체조와도 같은 상황극을 연출하였다. KKHH는 지난 2013년 8월 2일「네오룩」'post board'에 이 워크숍 및 퍼포먼스의 참가자를 모으는 단기알바 게시글(No. 5429)을 올려 519명이 이 글을 조회하였고 그 중 8명이 참여하여 몇 차례 워크숍 후 하나의 퍼포먼스를 완성하였다. 아래의 글은 그 퍼포먼스의 순간을 옆에서 본 것을 기록하고, 그에 대한 단상을 적은 것이다.

 


KKHH_적당한 사이_2채널 영상_00:08:15_2013

관계를 그리는 단계별 운동법 ● KKHH의 근희씨로부터 연락을 받은 지 한 달 쯤 뒤, 몇 번의 실험적인 워크숍 끝에 본격적인 워크숍 날짜가 잡혔다는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걸려온 근희씨 전화 속 목소리가 밝다. 그 사이에 금천예술공장에서 학생들과 진행한 워크숍에서 몇 가지 방법들을 시험하고 사람들을 다시 모아 워크숍을 시작했다고 한다. 작업의 모양이 갖춰지고 있는 것 같았다. ● 학생들과 한 워크숍이 궁금하다하니 영상을 볼 수 있는 곳을 알려주었는데(www.kkhh.org), 학생들치고는 담담한 듯 정갈한 연기와 단문으로 써낸 글이 썩 멋들어져 보였다. 말과 말이 얽히듯 설킨 전선을 조심스럽게 건너가며 내뱉는 한 구절과 그들이 '말'을 새긴 라이트박스를 들고 서있는 모습이 꽤 시적이다. 근희씨는 이렇게 학생들과 한 워크숍이 작업의 방향을 잡아가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본 작업에 버금가게 학생들과 한 워크숍은 전체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고 여겨진다. 제한된 공간과 구성원이란 조건 때문에 작업은 조금 더 집중력을 갖게 된 것 같았고 그들이 과거에 수행한 언어 발견 작업이 몸의 발화로 이어지는데 하나의 형식적 실험으로써 가교가 만들어 진 것 같았다.(그들의 지난 작업 역시 위에서 소개한 www.kkhh.org 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워크숍 본편의 장소는 독산유수지였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파란 바깥과 달리 유수지 아래는 어두컴컴하고 습했다. 바닥은 물기와 진흙으로 질척거렸고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는 비린 흙냄새와 날벌레가 섞여있었다. 주황색 불빛이 벽을 비추는 구석에, 전혀 관계가 없는 8명의 군상이 스포트라이트를 마주하고 듬성듬성 서 있거나 배회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행동과 말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낸 어구와, 그에 상응하는 어떤 몸짓이었다. 몇 번의 연습 끝에 카메라의 불이 켜지자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 선 채 조각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다비드의 역사화에 그려진 사람들처럼 딱딱하고 비장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들, 그 얼굴 아래 2013년 한국 여느 거리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옷차림이 이 공간과 그들의 몸 위에 오히려 낯설 만큼 어색하게 걸쳐져 있었다. ● 누군가 갑자기 한숨을 내뱉듯이 대사를 읊으며 한 발자국을 떼어놓았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스칠 듯 다가가자 서있던 사람은 마치 숨이 불어넣어진 듯 몸을 움직이며 그만의 대사를 읊는다. 그렇게 하나 둘 마치 전구에 불이 켜지듯 움직임이 시작되고, 스칠 때 마다 한사람이 다른 한사람을 잡거나 세우거나, 기대며 둘만의 춤을 춘다. 그리고 이것은 각자의 대사와 제스처에 따라 여러 경우의 수를 만들면서 점점 커다란 군무를 이뤄간다. 대사와 몸짓은 반복되지만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문맥에 놓여진다. ●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이 군무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동선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누가 말을 시작할지 누구에게 다가갈지 알 수 없는 채로 이어진다. 매끄럽게 계산된 것처럼 움직이는 것 같지만 동선이 점차 복잡해 질 때쯤 조심스러운 발걸음은 좀 더 조심스럽게 되며 서로 부딪치지 않으려는, 서로가 서로를 발견할 때 주고받는 눈빛과 눈치, 붙잡아 세울 때 손길에서 느껴지는 찰나의 머뭇거림과 얌전한 몸짓이 끊임없이 연습해도 언제나 익숙해 지지 않는 관계의 속성, 막연한 상대성을 떠올리게 한다. 적정함이나 기준이란 무엇인지, 측량할 수 없는 그것. 참여자들은 이 워크숍을 시작하기 전에 컵에 물을 적정하게 따르는 하나의 워크숍을 거쳤다고 하는데, 그러한 적정성의 애매함처럼 약속된 행위들 속의 적절함도 접촉의 찰나 속에서 애매하고 위태하게 균형을 맞춰가고 있다. 망치지 않으려 하는 조심스러움과 배려 속에서. 마치 우리가 매일 만나거나 혹은 처음 보는 누군가와 그러하듯이. ● 시간이 지나며 참여자들의 얼굴, 팔과 다리가 땀과 습기로 번들거린다. 계속해서 반복되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관계의 운동은 누군가가 발길을 멈추면서 서서히 잦아들다가 전부다 멈춰버리게 된다. 영화「폴록」에서 작업이 언제 끝나는 줄 아느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당신은 사랑이 언제 끝나는 줄 아느냐고 되묻던 에드 해리스의 무심한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게 예측 불가한 순간에 당연한 듯 하나의 운동, 춤, 연극, 관계는 끝을 맞는다.

 

 


KKHH_적당한 사이를 위한 드로잉_2013


끝없이 반복될 것 같은 무의미한 몸짓이 끝날 무렵 기둥 위에 앉아있던 비둘기가 펄럭이며 그 위를 날아갔다. 그 너머로 사람들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물기와 먼지로 더러워진 회색 콘크리트 벽 위로 일렁거렸다. 마치 동굴 같다고 생각했을 때,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를 그린 삽화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나카자와 신이치가『예술인류학』에서 인류가 마음을 발견한 과정을 약술한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언어를 만들게 된 순간도. ● 10만 년 전 신인(新人)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출현하는데 이들의 특이점 중 하나는 어두컴컴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 어떤 종교적이거나 예술적이라 불릴만한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 곳에서 자기 마음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며 내면의 세계가 확대되어 가는 경험을 했다. 그러면서 마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작용이 일어났고 이런 작용이 생명체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이룬 '유동체' 때문에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는 점인 '망상'이 생긴다. 망상이란 그에 따르면 '마음의 내면에서 생각한 것과 외부 세계의 현실 사이에서 대응 관계를 발견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며, '머릿속에 발생하는 이미지나 사고가 과잉 상태가 되어 외부 세계에서 대응물을 찾을 수 없게 된 상태'를 말한다. ●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의 감각기관이 포착하는 외부 세계의 현실과 마음속에 일어나는 움직임을 되도록 맞추려는 것도 일어나는데 이렇게 현실과 마음의 작용을 대응시키는 사영 관계가 종교나 예술과 같은 형이상학적 세계를 일구도록 한다. 이러한 환상성의 세계를 토대로 인간은 이미지를 만들지만 동시에 그러한 이미지를 토대로 실제 세계를 살아가며 다른 사람의 마음 역시 추측하고 그에 조응하며 원만한 관계를 만들고자 한다. ● 폭발적인 이미지를 제어하며 사물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외부의 현실과 충돌이 별로 없는 대응 관계를 형성하고 그를 통해 합리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세계를 사회관계를 만들어 것. 이것이 자신의 세계를 다른 사람의 세계와 맞추어 나가는 타협의 과정이며, 사회화의 과정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 마음의 활동을 심층으로 가라앉히며 행동하는 사이에 나타나는 것이 언어라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 세계를 이루는 구조로 작용하는 것이다. 인류학의 시작은 언어로부터 출발해서 그 구조의 합리성을 통해 인간 활동 기저에 내포된 어떤 방법론을 추론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발전했다. 이런 면에서 마음이라는 인간의 본성과 그를 다스리며 하나의 전체 안에서 조화로운 구조를 형성하는 움직임은 거의 동시에 태어나며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도 주저하게도 만들면서 인간사라는 복잡한 무늬와 그림을 그려낸다.

 


KKHH_적당한 양의 물_워크샵_2013

 

 

 

 

KKHH_모두를 위한 적당한 양의 물_2채널 영상_00:16:00_2013

 


관계 안의 문법을 읽으려는 KKHH의 작업 속에서는 인간의 이러한 본성과 관습 안의 반복적이고도 간절한 움직임에 대해 다시금 그를 표현하고 사영하려는 다른 차원의 '표현'을 엿볼 수 있다. 과거의 예술이 인간의 원천적인 마음의 움직임을 터뜨리며 문법 이전의 상태, 이미지를 투영했다면 지금의 예술은 그러한 본질과 사회적 관계 안의 긴장까지 의식하며 어떤 구조 자체를 표현하고자 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또는 심지어 어떤 구조 자체가 마음의 모양을 결정하는 역전적 상황을 의식하며 그에 주목한다. 표현은 이미지로 나타나지만 이제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방식, 그를 표현하는 문법과 그를 통해 생겨난 언어와 행동거지, 표현법을 하나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마음과 그로부터 발화되는 소리를 함께 담아내보려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음이라는 유동체가 고착되는 과정의 질서를 추출하여 보여주고, 그 안의 반복적인 움직임, 운동들을 살펴보며 우리 시대의 마음과 언어, 본질과 구조 사이의 관계와 그것이 절묘하게 혹은 어긋나게 교호하는 순간을 묘사한다.

 

 


KKHH_이로운 사이를 위한 피크닉_2013

 

 

KKHH_이로운 사이를 위한 피크닉_기록_2013

그들의 작업은 분명히 일상의 자잘한 편린을 소재로 하거나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지만 점차적으로 그것이 생겨나는 모양새, 그것이 출발하는 어떤 구조적 상태를 넌지시 비춤으로써 우리를 둘러싼 일상의 구조를 찾아가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약간의 일정한 법칙을 통해 가시화함으로써 우리에게 그 구조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그러한 구조 안에서 생겨나는 행동이나 상황, 말 속, 그 이면에 감추어지고 눌려진 마음의 구겨진 주름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때문인지 그들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담담한 움직임이나 말투 속에서는 아련한 감정들이 미약하게 풍긴다. 잊을 수 없는 마음의 냄새들이 정련된 움직임 속에서 비뚜름하게 나타났다 사라진다. 가끔은 차라리 잊어버리고 싶은 이런 걸 보여주는 이런 예술가들. 고약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또한 어딘가 애매해져버리는 마음이다. ■ 김진희

들여다 보기 LOOK INTO

                                     성병희展   

                                                

                                                  2012_0727 ▶ 2012_0810
 

                                                                    성병희_눈-비-물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1×168cm_2012

 

 

 

갤러리 빔 GALLERY BIIM

서울 종로구 화동 39번지 Tel. +82.2.723.8574 www.biim.net

 

 

 

고통과 상처로 드러난 소녀의 초상 ● 성병희의 근작은 예전의 구체화된 인물에서 점차 상징적인 표현의 형식을 띄고 있다. 전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던 세부적이고 서술적인 표현 어법들은 더욱더 간단명료해지고 보다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형태로 변모해 있다.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 상징적인 표현들이, 어떤 상황이나 설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더 명쾌하고 직접적으로 다가서고 있다. 그녀가 그리는 인간들은 늘 불안과 상처로 쫒기는 불안의 눈빛을 하고, 외부의 강압으로 침묵을 강요 당하거나 ,자신 스스로 만들어 낸 허무에 다시 잠식 당하는 불완전한 인간들을 표현해 왔다. 그들은 타인이자, 자기 자신이며,내부적 허무와 외부에서 오는 또다른 허무에 의해 무너져내리고 상처 받는 이중의 고통을 받는다.

 

 
 
성병희_호기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73cm_2011
 
 
성병희_들여다보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1×168cm_2012
 
 
성병희_붉은 방석_종이에 아크릴채색, 환조_73×55×36cm_2012
 

 

 

이번 작품들에서는 한 소녀이자, 여인이자 인간으로서의 상처와 그 상처에서 기인한 혈흔과 고통의 흔적들이 호소하는 듯한 눈과 손을 통해서 표현된다. 마치 수화 같기도 한 손의 동작들은 몸이나 얼굴과 하나라도 된 듯이 합쳐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이를 가늠 하기 어려운-아이 같기도 하고 어른 같기도 한- 묘한 느낌의 인물들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어둠을 은근하면서도 뚜렷하게 낱낱이 보여준다. 그러한 것을 더욱 돗보이게 하는 표현 방법으로 알비니즘(백색증)에 가까운 창백한 얼굴색과 그와는 대조적인 손과 눈의 붉은 색은 그 그림에서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이 보이지만,그것은 나 이기도 하고 우리 이기도 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그것이 그녀가 갖고 있는 힘일 것이다. 매우 절제되고 제한된 표현으로 오히려 더욱더 풍부한 이야기를 표현하는 역설의 방법. 그것이 지금의 그녀가 추구하는 표현 방법인 것이다.

 

 
 
성병희_비행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8×131cm_2012
 
 
성병희_뿔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8×131cm_2012
 
 
성병희_비행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1×168cm_2012

 

 

 

어떠한 시대적 상황이나 이데올로기 속에서도 그녀가 일관되게 관심을 갖고 표현하고자 한 것은 인간 이었다. 그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구체적인 한 인물에 대한 치열한 탐구로 했었던 90년대나 자기자신의 이야기를 마치 내밀하고 구체적인 일기장을 공개한 듯 한 2010년의 작품이나 보다 관념적이고 몽환적으로 변모한 2012년의 작품이나 모두 ,이 지상의 삶을 살아가야하는 인간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끌어안고 가려는 애정어린 시선이 있다. 여러 시대적, 개인적 상황을 지나 현실적인 무게를 지니고 그 시선이 닿는 곳이 어딘지 계속 따라가 보고 싶다. ■ 류수원

 

 

 

 


 

현대사회 얽히고설킨 인간관계 화폭에


   


 누드를 통해 인간의 희노애락을 담아 온 서양화가 이주리씨(42)가 26일까지 전북도립미술관(관장 이흥재) 서울관에서 '던져짐-살다' 展을 연다.

'살다'라는 주제로 작업을 이어온 그는 이번 전시에서도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점점 소외돼가는 인간의 모습을 담았다.

그림 속에는 근육질의 남성들이 한데 뭉쳐있다. 머리카락 하나 없는 민머리와 함께 피부 톤은 피한방울 흐르지 않을 것처럼 차가운 회색이며, 금방 폭발할 것 같은 근육들이 뒤틀려있다. 이 몸들 사이를 비집고 숨어버리고 싶어 하는 듯 서로를 의지하는 모습처럼 비추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삶을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서로 뒤엉킨 채 밀치고 짓밟기도 하는 현실의 모습을 가감 없이 그려낸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작품 제목은 '살다'이다.

그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물질·자본화 되어 가는 현대사회에서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자아를 잃어가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뭉칠 수밖에 없는 역설적인 현실을 환기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다치고 피 흘리며 결국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우리들의 삶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서로 뒤엉켜 있는 모습은 마치 무중력 상태 같기도 하고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 유유히 떠 있는 듯 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눈앞에 쉽게 드러나는 표정이 아니라, 몸을 통해 드러나는 마음속의 표정을 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숨어있다.

그의 작품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대상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얼굴은 모호하며,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 이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이며 소비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는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고, 기계문명의 발달과 획일화된 소통에 의해 소외당하고 있는 인간들은 점점 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원광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2회의 개인전을 개최한 그는 우진문화공간 청년작가 전시 및 해외연수 지원과 청년작가위상 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전북인물작가회, 한국평면회화회, 전북시대미술연구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고 전북도의 해외전시지원사업에 선정돼 오는 10월 미국에서 '버질아메리카 초대전'을 열 예정이다.

 

 

[전북일보 / 2013.8.23 / 김정엽기자]


이주리 展

be living - live (산다-살다)



살다_150x150cm_Oil on Canvas_2013
 
 
인사아트센터 제1전시장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
 
2013. 8. 21(수) ▶ 2013. 8. 27(화)
Opening 2013. 8. 21(수) pm 6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 (인사동길 41-1) | T.02-720-1757  
www.insaartcenter.com

 
 


살다_162.2x130.3cm_oil on canvas_2013

 


인간의 내면 세계인 무의식은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 실체를 파악하기는 무척이나 어렵지만, 그 무의식의 과정을 일상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꿈이다. 우리는 꿈속에서 겪은 상황을 깨어난 뒤, 의식적으로 파악해 보려 하지만 그것은 매우 파편적으로 등장하여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꿈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간혹 옷차림이나 무엇을 들고 있었는지 생각할 수 있으나 그 얼굴을 기억하려하면 역시나 모호해서 전체적으로 불명료한 이미지로 남게 된다. 이주리의 남성들이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고, 그들의 육중한 몸이 가볍게 공간을 유희하듯이 부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의 작품은 꿈과 같은 무의식의 세계를 암시한다. 또한 이주리의 무의식의 세계, 즉 내면에 자리잡은 남성들은 우선 나신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사회적 정체성을 살필 수 없다. 그들은 한국인의 페르조나가 지향하는 이미지, 물질 중심적 이미지로 투사된 외모가 아니다. 이는 소비 사회에서 사람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치장된 외모를 벗어던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여성 작가인 이주리가 페르조나를 벗어던지고 바라본 내면의 세계 속에서, 자아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을 마주보게 되었을 텐데 왜 혼자있는 여성이 아닌 다수의 남성들의 이미지와 마주하게 된 것인가? 조금 시간을 들여 융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외적 인격인 페르조나와 달리 내적 인격은 자아가 내면세계와 관계를 맺는 징검다리와 같은 것으로서 나(자아)와 무의식의 더 깊은 층을 이어주는 매개자이다. 내적 인격이란 심혼(心魂, Seele)이란 말로 대체될 수 있는데, 심혼은 의식을 자극하는 무의식의 심리적 실체이며, 매우 여성적인 여성은 남성적인 심혼을, 그리고 매우 남성적인 남성은 여성적인 심혼을 가지고 있다고 융은 말한다. 이부영의 설명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구분된다. 남성과 여성은 심리적으로 서로 다른 관심과 특성을 나타내고 사회적으로도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도록 요구되어 왔다. 그렇게 사회적 요구에 맞추어가는 가운데 남성과 여성의 무의식에는 남성과 여성의 페르조나에 대응하는 또 하나의 내적 인격이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남성의 무의식에는 여성적 인격이, 여성의 무의식에는 남성적 인격이 내적 인격으로 자리하게 된다. 융은 남성의 여성적 심혼을 아니마(Anima), 그리고 여성의 남성적 심혼을 아니무스(Animus)라고 불렀다. 이 아니마, 아니무스는 남성과 여성의 의식에서 억압된 것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 조건인 원형으로서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일례로 남성이 남성 호르몬 뿐아니라 여성 호르몬을 가지고 있고, 여성에게도 남성 호르몬이 있는 것은 이런 원초적 조건의 생물학적 토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살다_162.2x112.1cm_oil on canvas_2011

 
그러므로 이주리의 작업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바로 그녀의 남성적 심혼인 아니무스 이미지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작품에서 아니무스는 왜 집단적으로 등장하는가? 이에 대해 융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물학적 단계에서 여성의 주된 관심은 한 남자를 붙들어두는 일이지만, 남성의 주된 관심사는 여성을 정복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본래의 성질상 남성은 하나의 정복에 머물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은 여성의 의식이 보통 한 남자에 국한되는 반면 남성의 의식은 한 여자라는 개인적인 것을 넘어서 확장하는 성향을 띠며 때로는 모든 개인적인 것을 거역한다. 그런데 무의식에서는 그 반대인 가능성이 있다. 남성의 무의식의 아니마상이 비교적 뚜렷한 윤곽을 보이는데 비해서 여성의 무의식의 아니무스상은 불명확하고 다수의 인격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작가 이주리는 “물질이 정신성을 지배하고, 기계문명의 발달과 획일화된 소통에 의해 소외당한 인간들이 대중 속에 휩쓸려 자신의 얼굴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서 이렇게 본질을 상실해가는 한국의 현대 사회에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회의와 성찰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되찾기를 희망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의 희망처럼 먼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로인해 그녀의 내적 인격인 아니무스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녀의 아니무스를 찾는 작업은 우리가 페르조나를 따라가느라 의식적으로 무시했던 심혼의 목소리를 찾게 할 것이다. 또한 외적 인격과 내적 인격의 조화롭지 못함으로 인해 삐걱되던 삶의 공허함을 서서히 채워줄 것이다.

이현경(미술비평) 포토저널 기사 부분

 


살다_162.2x130.3cm_oil on canvas_2013

 


살다_97x162.2cm_oil on canvas_2013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

 

개인전 12회 | 2013 (be living-live)인사아트센터 제1전시장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서울 | 2013 (PLATFORM 개관기념 초대전) 갤러리 숨 ,전주 | 2012 (vergil america 초대전) space WOMB,New York | 2011 (살다-지우다) 사뽀 갤러리 무료대관기획전, 전주 | 2010 (살다) 우진문화공간 청년작가초대전, 전주 | 2010 (던져짐-살다)수도권전시지원, 인사갤러리,서울 | 2009 (grayish-살다)공유 갤러리 초대,전주 | 2008 (살다)전북예술회관 (살다) 전주 | 2007 (초대) 東내미술관,전주 | 2006 (침묵) 전북예술회관,전주 | 2002 (크로키 초대전) 얼화랑,전주 | 1998 전북예술회관, 전주

 

 














































2013 인사미술공간 전시공모 당선작 세 번째 전시


차혜림 개인전 < 밤의 무기들 >

 


● 전시기간: 2013. 8. 23(금) – 9. 14(토) *오프닝: 8월 23일 오후 6시
● 전시장소: 인사미술공간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 창덕궁길 89 문의 TEL 02-760-4722
● 전시관람: 11:00 am - 7:00 pm (월요일 휴관), 관람료 없음
● 주 최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은 오는 8월 23일(금)부터 9월 14일(토)까지 <밤의 무기들> 차혜림 개인전을 개최합니다. 이번 전시는 시각 예술계의 미래를 책임질 역량을 갖춘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창작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차세대예술인력육성지원 사업(AYAF)의 일환입니다. 올해는 허수영, 정지현, 차혜림, 김용관, 백현주 등 총 다섯 명의 작가가 선발되었으며, <밤의 무기들>차혜림의 개인전은 허수영(5월), 정지현(6월)에 이은 세 번째 전시입니다. 인사미술공간에서 소개하는 신진작가의 개인전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 드립니다.



▶ 1층 전시전경, 2013



□ 전시 서문

(글 / 이단지 _ 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
 
 
세계의 틈은 필연적으로 만나지기도 하고, 우연히 나타나기도 한다.


“나에게 주어진 집인 동시에 덫이며, 보호구역이자 수용소이며, 모든 것들의 외부이자 심연 속에 존재하는

익명의 별인 밤은 작업이라는 매혹의 대상 앞으로 항상 나를 데려다 놓았다.”

_작가 노트 중

 
 
차혜림이 지속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창작의 배경은 우리의 앎이 닿을 수 없는 어떤 세계의 그림자이다. 실재(實在)로써 현현되기 전의 중간상태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파편으로 엮어내기도 하고(paraxis: 중간스토리_공간해밀톤. 2010), 주인이 없는 어느 낯선 공간에 들어가 사건의 흔적들을 이어 붙이고, 무대를 증폭시키려 했던 실험(교환 X로의 세계_잠원동 10-32번지. 2011)을 진행하기도 한다. 동시에 이러한 시도들은 소설의 형식으로 집필되기도 하며, 이번의 경우처럼 다음 전시의 실마리가 되어 자기 오마쥬(hommage) 적인 지시들로 이어지고 확장된다. 전작들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이성적 원칙의 부조리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나아가 보이지 않는 세계의 범위를 확인하기 위해 의식의 균열을 벌리고 관찰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인사미술공간에서 소개되는 <밤의 무기들>은 상당히 상징적이다. 이번 전시는 구체적인 낮의 표상 너머, 그 이면의 시간인 ‘밤’을, 의식의 실존을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상정한다. 차혜림이 빚어낸 익명의 오브제와 운동하는 이야기들은 낮의 빛(이성의 지각)이 잔상으로 남아 현실과 비현실이 중첩되듯 모호한 상태에서 태어난 것들이다. 어둠 속에서 새롭게 호명된 모든 사물과 이미지, 이야기들은 논리적인 기승전결의 나침반을 파악하기에 실패하며 현재의 시간과 무관하게 앞 뒤를 구분하기 어렵다.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작업들은 거대한 좌대에 설치된 여러 가지의 상징들인데, 작가는 이것을 나열하듯 펼쳐 놓고 <밤의 무기들>을 여는 서사의 시작으로 “림보(Limbo_성경에서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 머무는 보류된 수용소로써의 공간)”의 상태를 제시한다. 세 개의 다른 조각을 이어 붙여진 레코드 판과 분절된 신체로써의 귀, 여러 개의 렌즈가 하나의 구조에 달라붙어 있는 안경, 맹인에게 길을 안내하는 개 등은 결론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실패의 차원, 미끄러짐에 대한 묘사이다.

 


▶ voix off 나무, 레코드판, 아크릴, 낙엽_가변크기_2013



1층의 풍경이 어떤 중성적인 플랫폼과 같이 지시된 파편의 나열로 구성되어 있다면 지하 전시장은 기묘한 설정이지만 관객에게 이야기의 흐름으로 더욱 다가가게 한다. 전진하듯 운동성을 암시하는 형태를 띈 보조 구조물 위에 걸린 회화들은 “기묘하다”는 표현처럼, 그것이 마치 스스로 생명을 가진 듯한 제스츄어로 연출되고 있다. 전시장의 한 쪽 벽면에 빛으로 일렁이는 커튼과 같은 연극적인 상황은 보는 이로 하여금 화면 속 내러티브에 대한 객관적인 거리를 놓쳐버리게 하고 마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세계로의 이행을 위한 장치(bridge)로써 설치된 회화들은 낮과 밤을 가늠할 수 없는 풍경과 화면 속 인물들이 몰두하고 있는 행동이 부각되면서 더욱 모호하게 번져간다. 이번 전시에서 회화의 이미지는 보다 적극적으로 관객을 가담자 혹은 목격자로 전치시키기 위해 오브제 그 자체의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이것은 앞서 말한 현실적 상황(일반적인 사물 또는 작품을 보는 시각)과 달리 비현실적 틈(환영으로의 회화와 내러티브에 의해 컨트롤되는 관객의 심리)의 능동적 확장, 그것들의 대치상황으로 이해된다. 커튼의 은폐와 회화의 발언, 이중의 코드는 이성의 바깥에 존재하는(존재한다 여겨지는)균열의 경계를 시각적인 재현으로 전달한다.

이 모든 경계의 모호함들은 2층 전시장에서 봉합과 결합의 장면으로 희석되는데, 그것은 다른 세계에서 발굴되어 박물관의 한 켠에 안착 되듯이 놓여짐으로써 다시 한번 보는 이의 시선과 거리를 넓혀간다. 일상적인 오브제들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덩어리들은 얕은 모래가 쌓여있는 제법 긴 테이블 위에 올려진다. 긴 테이블은 세 개의 방처럼 나누어진 인사미술공간 전시장에서, 문이 있었을 법한 뚫린 구조에 놓이고 구획의 안과 밖, 두 개의 공간을 가로지른다. 방과 방 사이의 하얗고 커다란 애드벌룬은 그 자체로 본질적인 불안감을 낳기도 하지만, 한편 팽창하는 에너지를 중재(仲裁)하며 가로 막고 있는 껍질 내부의 보이지 않는 현상을 인지하게 한다.

 


▶슬픔에 갇힌 눈 안경렌즈, 안경테_가변크기_2011



우리는 우리의 현실에서, 또는 구전 되어 온 많은 신화에서 끊임없이 안으로 침잠하는 자유로운 심연의 ‘밤’을 그리워해왔다. 가능성의 영역, 응축되고 압축된 세계,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 닿을 수 없는 거리, 결핍과 과잉의 과정들이 기준점에 도달하지 않는 거리, 닫힌 상황에서의 탈출,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이 축적되어 쌓이는 공간으로서 명명된 ‘밤’은 적어도 작가에게는 회복과 소생의 순간이며 창작을 촉발시키는 리듬이 된다. 세계의 틈은 이렇게 안간힘의 붙잡음으로 만나지기도 하고, 우연히 나타나기도 한다.



눈꺼풀이 닫힌 지점에서 시작되는 밤의 이야기들은 물 위에 투영된 일그러진 이미지와 같이 모험적일 수 밖에 없다. 손에 닿으면 일그러지기 일쑤인 밤의 그림자는 빛 아래에서 느낄 수 없었던 모든 촉각의 다발을 곤두세우게 만든다. <밤의 무기들>에 등장하는 많은 상징과 장면들은 논리의 분산을 맹목적으로 지향한다거나, 양가의 합의점을 찾기 위한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기를 거부한다. 다만 그것은 이성의 세계와 그 이면들이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마주하게 함으로써 벌어진 틈만큼의 공간을 대체하는 여러 기호들을 고안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문의
Tel +82-(0)2-760-4722
Mail : ias@arko.or.kr

Facebook : http://www.facebook.com/iasarko#!/InsaArtSpace





2013 OCI YOUNG CREATIVES
강동주_이미정展

 

2013_0816 ▶ 2013_0905 / 월요일 휴관

 

강동주_51초/324초의 달_먹지, 종이_20.3×30cm_2013

초대일시 / 2013_0816_금요일_05:00pm

강동주展 /『부도심_청량리 영등포 청량리』

이미정展 /『위로는 셀프』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강동주-음예의 접면으로 음예의 접면을 그리는 방법 ● 01. 신예 미술가 강동주(1988-)는, "무엇을 언제 어떻게 어디서 누구의 손으로 그릴 것인가?"라는 동시대 공통의 질문을 마주한 채, 포스트-미디엄의 상황(post-medium situation)에 부합하는 문제적 형식으로 '그리기'라는 행위를 재정의·재발명해내고자 애쓴다. ● 02. 어떤 신인 화가가 제 주제-물(subject matter)을 찾았다고 하면, 그건 평생에 걸쳐 진행될 화업(畵業)의 대주제를 구체적 주제로 포착했다는 것과 함께, 그를 표현할 최적의 질료와 형식을 찾았다는 뜻이다. 강동주의 경우, 최종 형식을 강제해내는 작업 내용은, 음예(陰翳)의 도시 공간 혹은 도시 공간의 음예적 접면(interface)이다. 그리고, 그를 구현하는 최적의 재료는, 특별한/특정한 프로토콜을 따르는 연필과 먹지와 종이, 그리고 유채와 캔버스다. (비고: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1886-1965」에 따르면 음예란, "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을 뜻한다.) ● 03. 2010-2011년에 전개한「퍼레이드」연작에서 작가는 도심의 방진막을 주제 삼아 가리는 것과 가려지는 것을 동시에 그려내고자 노력했다. 사진기로 방진막을 촬영하고, 그를 유화로 옮겨 그렸다. (타인으로부터 받은 방진막 사진을 유화로 옮겨 그린 예외적 경우도 몇몇 있다.)「안강중학교」「서울 송파구 석촌동 236-06 고암빌딩」「경기도 연천군 철산면 초성리 kcc」등 장소를 적시하는 제목을 단 그림들은, 작가에겐 회화적 탐구―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접면을 주제로 삼은―의 출발점이자 미적 종부돋움의 발판이 됐다. ● 04.「퍼레이드」연작이 지닌 모호함에 관해 다소 불만족을 느끼던 작가는, 2012년「볼 일이 없어서 볼 수 없는 것의 처지」란 몹시 자명하고 다소 지루하고 우스운 연작을 전개했다. 장시간 버스를 타야했던 일상에서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뒷통수들을, 바로 앞자리에 앉은 사람의 머리로 한정해 가르마 부분만 드로잉으로 옮기고 버스 번호와 드로잉 번호, 제작 날짜와 시간(예컨대, 첫 드로잉의 제목은「720-1 01.15 08:15」)을 적어 넣었다. (비고: 이 버스 안 드로잉은, 이동 중이기는 하지만 특정한 공간적 제약을 작업의 일부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시공간 특정성을 띠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05. 작가 강동주의 남다른 작업 특성―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접면을 적절한 음예의 방식으로 기록하는―이 도드라지기 시작한 것은, 2012년 개인전 『정전』에서였다. ●『정전』 작업 1부 : 2012년 5월 3일 20시부터 4일 20시까지 전시 장소인 누하동 256번지의 유리창을 중간 지대(접면)로 삼은 화가는, 매시간 유리창에 비춰진 맞은편 주택가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빛의 궤적을 먹지 드로잉으로 옮겼다. (비고: 먹지에 남은 드로잉과 먹지 위에 놓은 백지에 남은 드로잉과 먹지로부터 전사된 이면의 드로잉, 세 가지 모두 작업이지만, 갤러리 공간엔 먹지 드로잉만을 제시했고, 백지의 이면에 전사된 드로잉―빛을 음예로 전치시켜 놓은―은 전시 홍보물에 인쇄된 모습으로만 공개했다.) ●『정전』 작업 2부 : 누하동 256번지 유리창 뒷면에 덧붙여져 있던 나무판을 비가시성을 일으키는 가로막이의 접면으로 해석한 작가는, 이를 뜯어내 전시 작품의 일부로 삼기로 작정한다. 나무판 철거 당일, 기존에 전개한 25시간 드로잉(5월 3일부터 5월 4일까지)의 작업 시간을 총합한 약 258분간, 떼어낸 판재의 표면에 조각칼과 망치로 이날 풍경의 움직임을 아로새겼다.

 

 


강동주_155분 37초의 하늘_No. 6, 11, 16, 21, 26, 46, 51, 86, 126_

캔버스에 유채_22.7×15.8cm×156_2013_부분

2012년 5월 25일 오후 7시 종로구 누하동 256번지에서 조명을 끈 채 손전등 불빛으로 개막한 전시는, 6월 8일까지 이어졌고, 전시 관람 시간은 오후 7시에서 10시로 제한됐다. ● 06. 2013년 8월 개막 예정인 두 번째 개인전『부도심』을 위해 작가 강동주는,「빛 드로잉」「달 드로잉」「하늘 회화」세 가지 연작을 전개했다. 이 세 연작은 실상 하나의 프로젝트로서, 부도심 지역을 관통하는 자동차 여행의 비디오 촬영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작가는 청량리 재개발 구역에서 출발해 영등포를 거쳐 다시 청량리에 도달하기까지의 동선을 계획하고 그에 따라 보름달이 뜨는 2013년 2월 25일 일몰시간인 6시 28분부터 승용차(쏘렌토)로 이동하면서, 좌우 거리의 풍경과 하늘의 풍경을 비디오카메라 석 대로 촬영했다. (세부 이동 경로는 다음과 같다: 청량리 - 동대문 - 종로 - 광화문 - 충정로 - 아현 - 신촌 - 합정 - 양화대교 - 영등포 - 양화대교 - 합정 - 신촌 - 아현 - 충정로 - 광화문 - 종로 - 동대문 - 청량리.)

# 세부 동선

01. 청량리역-용두역=1.92km

02. 용두역-청량리역 금강제화=845m

03. 청량리역 금강제화-청량리 삼성화제=2.31km

04. 청량리 삼성화제-용두동 대우 아이빌 오피스텔= 1.08km

05. 용두동 대우 아이빌 오피스텔-동대문역=1.75km

06. 동대문역-종각 파고다 어학원=2.44km

07. 종각 파고다 어학원-광화문=640m

08. 광화문-충정로=1.13km

09. 충정로-충정로 삼거리=879m

10. 충정로 삼거리-신촌역=2.25km

11. 신촌역-서교동 사거리=2.1km

12. 서교동 사거리-양화대교 북단교차로=732m

13. 양화대교 북단교차로-영등포 코스트코=2.96km

14. 영등포 코스트코-영등포 유진투자증권=1.08km

15. 영등포 유진투자증권-영등포 로터리= 1.51km

16. 영등포 로터리- 영등포 신동아 아파트=1.73km

17. 영등포 신동아 아파트-선유고등학교=2.21km

18. 선유고등학교-서교동 첨단 빌딩=3.29km

19. 서교동 첨단 빌딩-신촌 현대 백화점= 1.57km

20. 신촌 현대 백화점-아현 감리교회=2.08km

21. 아현 감리교회-광화문 교보타워=2.5km

22. 광화문 교보타워-종로5가역=2.18km

23. 종로5가역-용두동 사거리=2.67km

24. 용두동 사거리-청량리역=1.37km

25. 청량리역-전농 뉴타운=2.1km

26. 전농 뉴타운-청량리역=1.7km

총 2시간 35분 37초 동안 47km 이동

06-1.「빛 드로잉」은 좌우 거리를 촬영한 비디오 기록(총시간 2시간 35분 37초) 가운데 왼쪽을 촬영한 기록을 보면서 그 빛의 궤적을 122cm×30cm 크기의 먹지로 옮겨 그린 결과로, 먹지 위에 놓은 백지에 직접 그린 드로잉, 그 이면에 전사된 드로잉, 먹지 드로잉, 이 세 가지 모두가 작업이 된다. 그러나 이번에도 전시장엔 먹지 드로잉만이 제시되고, 백지에 전사된 드로잉은 드로잉북으로 묶여서 전시 기념 도록으로 한정 제작될 예정이다. 먹지 드로잉의 총 장수는 26장이고, 각 장에 기록된 시간은 총 6분이다. (비고: 가로 길이 122cm의 먹지를 6등분 하고, 각 1면에 1분 분량의 빛을 기록했다.)

 

 


강동주_청량리역-용두역 1.92km, 영등포 유진투자증권-영등포 로터리 1.51km,

전농 뉴타운-청량리역 1.7km (전체 47km 중)_종이에 먹지_30×122cm×3_2013

 

06-2.「달 드로잉」은 좌측 거리를 촬영한 비디오 기록에 등장한 보름달을 좇아 기록한 결과다. 영상 기록 속에서 달이 등장하는 횟수는 모두 22회고, 등장하는 시간은 총 5분 24초다. 달을 옮겨 그릴 때, 1초의 등장 시간을 지름 0.33cm의 크기로 환산했다. 고로, 최장 86초간 등장한 달을 기록한 경우, 지름 28cm의 큰 달로 환산·기록됐고, 최단 1초간 등장한 경우 지름 0.33cm의 작은 달로 환산·기록됐다. (비고: 처음엔「빛 드로잉」에 달빛을 포함했으나, 나중에 재작업하면서 달빛을 분리, 별도로「달 드로잉」을 제작하게 됐다. / 낱장의「달 드로잉」이 22점이고, 모든 달을 244×122cm 크기의 대형 드로잉으로 총합한「5분 24초의 달」은 1점이다. /「5분 24초의 달」에 기록된 달의 지름은 106.92cm「324초×0.33cm」다.)

# 달이 등장하는 구간과 지속 시간

01. 제기동 약 시장 4초=1.32cm

02. 충정로-아현 1초=0.33cm

03. 3초=0.99cm04. 10초=3.3cm

05. 2초=0.66cm

06. 양화대교 51초=16.83cm

07. 영등포 진입 6초=1.98cm

09. 3초=0.99cm

10. 78초=25.74cm

11. 9초=2.97cm

12. 84초=27.72cm

13. 6초= 1.98cm

14. 7초=2.31cm

15. 5초=1.65cm

16. 6초=1.98cm

17. 8초=2.64cm

18. 16초=5.28cm

19. 2초=0.66cm

20. 영등포신세계백화점 1초=0.33cm

21. 1초=0.33cm

22. 17초=5.61cm

총 달 출몰 시간 324초 =106.92cm

 



06-3.「하늘 회화」는 2013년 2월 25일 일몰시간인 6시 28분부터 총시간 2시간 35분 37초 동안, 청량리 재개발 구역을 출발해 영등포를 거쳐 다시 청량리에 도달하기까지의 여행 과정에서 하늘만을 촬영한 영상을, 1호 크기(22.7×15.8cm)의 캔버스 156개로 옮겨 기록한 결과다. 색면 추상 회화처럼 뵈지만, 어디까지나 직해주의에 따른 리얼리즘 회화다. (비고: 마지막 캔버스는 화면의 일부가 백면 그대로인데, 이는 해당 영상이 채 1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 07. 소결: 강동주의 작업 세계에서 가시성의 빛과 비가시성의 어둠이 전치되는 순간, 그 시공의 접면에 대도시 서울의 음예가 스민다. 재창안된 회화의 방법으로 포착한 (2013년 2월 15일 6시 28분부터 9시 3분 37초까지의) 거리의 빛과 하늘의 빛과 달의 빛이 (재)교차할 때, 서울 부도심의 어떤 음울한 정조가 시적으로 되살아난다. ● 07-1. 작가는 신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정전』에서의 작업이 빛을 새긴다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새기는 감각과 지워나가는 감각이 공존했다." 이번 전시에서 (예전과 달리) 가시성의 어둠과 비가시성의 빛이 대두하는 한 까닭이겠다. ● 07-2. 빛이 어둠을 어둡게 하고, 어둠이 빛을 밝힐 때, 그 가운데 어디쯤에서 음예가 찰나(刹那)의 힘을 발한다. ■ 임근준

 

 


                                                                         이미정_Pull & Push series_나무에 아크릴채색_가변크기_2013


가치(價値)의 해체를 위한 다양한 전술들 ● 사회에서 '공공의 선'으로 함의하는 것들은 칭찬받고 격려된다. 공중에서 흩어지는 칭찬의 언어를 지나 유치원을 다니면서 스티커를 받고 초등학생이 되어 공책에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고, 상장을 받으면서 칭찬은 구체화 되고 강화된다. 칭찬을 의미하는 '별 스티커'와 '참 잘했어요' 도장은 역으로 맘대로 복도를 뛰어가던 아이, 글씨를 개발새발 쓰던 아이에게는 트라우마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리는 것, 욕망을 표출한 순간 선생님의 격려가 가득 담긴 '참 잘했어요' 도장 같은 칭찬의 도구들은 눈앞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칭찬의 도구들은 사회를 공공선으로 이끄는 이미지이지만, 그 공공을 위하여 개인이 수행해야 할 임무나 억눌러야 할 억압의 표상이기도 한 것이다. 이미정이 다루는 이미지들은 '칭찬'과 결부되어 있다. 물론 한눈에 봐도 스마트한 이 작가가 결핍의 욕망을 표출하고 있는 것은 아닐 터, 그것은 오히려 자신이 그토록 열망하고 순종해왔던 것들에 대한 강력한 반발 혹은 거부를 표상한다. ● 칭찬하는 명칭이나 대상이 기재되어 있지 않았지만 황금색 봉황이 그려진 거대한 상장은 동네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을 때 서툴게 세워주던 가림막에 걸려 있다. 이력서에 붙은 사진에서는 얼굴이 도드라져 보이게 하고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듯, 견고한 배경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얼마든지 교체되는 배경막으로 상장을 위치시킨다. 작가는 '든든한 배경'이라 생각하는 것이 실은 '평면적이고 연약한 구조'임을 노출시키고 있다. 상장의 물질적이며 구조적인 허약함을 노출시킴으로써 '수상(受賞)'이 개인의 사회적 욕망을 부추기지만 실은 인간적 욕망을 억압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상 받을 만한 일을 수행한 사실에 대한 물질적 증거인 '상장'의 허약한 실체에「The Wall」이라는 제목을 부여함으로써 이 작가의 세계 일면이 언어적 유희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 또한 드러낸다.

 

 


                                                                                   이미정_명언짓기#6_화선지에 먹_28×70cm_2011


촘스키(Noam Chomsky)는 인간이 사물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방법에는 문화적 요인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인간이 새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내리는 판단은 비록 의식한 것이 아닐지라도 전략적으로 평가를 내리고, 평가의 결과는 어떤 행동을 실행에 옮기는 기준이 된다. 정신에 구축한 도덕적 체계는 실체를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새로운 상황에 적용되는 모든 판단의 토대가 된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할 때, 살아가면서 나쁜 짓을 할 때조차 스스로 기분내키는 대로 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기 어려운 것은 도덕적 가치의 기본 틀에 맞추기 위해 상황을 재해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도덕적 가치를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법과 다른 체계 안에서 인간의 행동양식을 지배하는 규율은 도덕과 유관하며, 억압기제로 작용한다. 결국 상을 받을 만하고, 칭찬받아 마땅하고 모두가 지켜야 할 것들은 역으로 자아존중감을 해칠 수 있고, 자신을 억압할 수 있으며, 별반 쓸모없는 것들일 수 있다. ●「자가수상을 위한 단상」이나「자가수상을 위한 무대」는 구체적으로 사회가 규정한 '공공 선'을 개인적인 일에 위치시킴으로써 그 사회성을 무화시킨다. 동상이나 트로피를 올려놓는 대(base)를 재현한「자가수상을 위한 단상」의 나무 좌대는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에 선 '네 번째 좌대'를 연상시킨다. 주변의 군주나 영웅상과는 달리 비어 있는 좌대에는 힘없는 구조물이 올려지기도 하고 지원한 일반인이 돌아가며 동상처럼 서기도 한다. 강인한 영웅주의의 자리에 위치한 존재들에 주목하는 이 좌대처럼 이미정의 좌대는 '아무 것도 아닌' 개인을 위치시킨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처럼 국기를 향해 인사도 하고 국민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볼 수도 있는 나무로 만든 '허접한' 좌대는 '높이'를 통해 구분짓는 사회의 장소적 허구성을 폭로한다.

 

 


                                                                            이미정_자가 수상을 위한 단상_나무_52×62×62cm_2012

 


「자가수상을 위한 무대」는 둥근 나무의자의 뒷배경으로 상장에서 흔히 발견되는 무궁화 도상 좌우로 일상의 기물들이 입시도안집에서 볼 수 있는 디자인을 위한 편화(stylization)로 제작되어 걸려 있다. 드릴, 망치 등 공구에서부터 화가들이 사용하는 파레트에 이르기까지, 사물들이 마치 컴퓨터 바탕의 이모티콘처럼 널려 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이 잘한다고 생각하는 어떤 일을 떠올리며 그것과 연관된 사물을 '클릭'하여 나무의자 위에 놓고 엔터를 치듯 획득하면 된다. 그 다양한 물건들에는 성인용품과 게임 아이템까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소유하고 싶어 하거나 직업을 의미하는 모든 것들이 망라되어 있다. 이를테면 공부를 잘해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거나 좋은 기업체에 취업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은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조직의 선택을 의미한다. 합격자명단이 굳이 발표되는 것도 그러한 선택의 주도권이 조직에 있음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시장의 한 벽면을 차지한 수많은 사물들은 아주 가볍게 커서만 옮기면 되는 컴퓨터 화면 속 세계 같지만 눈앞에 실재하며 사물을 만지게 한다. 누구라도 선택할 수 있고 획득할 수 있는 그 무대는 입시미술을 경험한 사람에게 학교에 의해 선택되어진 개인이 아닌, 학교를 선택하는 개인으로서의 쾌감을 맛볼 수 있게 할 것이다. ●「자가수상을 위한 무대」는 작가의 이전 작인「레드콤플렉스」와의 연결점을 보여준다. 나무의자 위에 사물을 선택하여 목에 걸거나 들고 선 인물의 광배가 되는 무궁화는 황금빛 찬란하다. 그런데 무궁화의 중심에 있는 술이 발기한 남근처럼 발칙해 보인다. 한국 사회에서 국가주의와 연계하여 가장 숭고하다고 생각하는 대상과 금기시하는 성(性)적인 이미지와의 결합은 '공공의 선'이라 규정한 것이 얼마나 개인의 억압을 기반으로 하는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놀이적인 속성, 금기와 숭고함의 결합은 전통사회에서 가치를 부여하던「문자도」나「행실도」를 변형한「구직을 위한 8덕(八德)」과「백명의 소녀를 그린 그림」에서 구체화된다.

 

 


                                                            이미정_구직을 위한 8덕(八德)_효, 제, 충, 신_C 프린트_72×40cm×8_2013_부분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는 전통사회에서 나라를 존재케 하는 가장 주요한 덕목이며 도덕률이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취업 전까지는 부모님께 딱 붙어 살 수밖에 없는「효」, 서슬퍼런 귄력 앞에 무조건 쥐 죽은 듯 비굴한 굴복의 자세로 이루어진「충」과 경쟁을 위해 우정도 버린 채 밟고 서거나, 대기업에의 취업을 소원으로 이루어진 '문자도'는 88올림픽으로 한창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워졌을 때 태어난 1988년생 작가가, 88만원 세대라는 자각 아래 20대의 현실을 투영하였다는 사실에서 과거의 정형화한 도상으로부터 현재진행형의 사건에 대한 비판적 도상을 획득하였다는 의미를 가진다. ● 소년들에게 바른 사회생활을 가르치는 '행실도'를 소녀들에게 금기시하는 것을 가르치는 도상으로 이용한「백명의 소녀를 그린 그림」에서는 가치를 '전복(顚覆)'시키는 방식의 유쾌함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쾌락을 지향하고 낭비하는 삶,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고 오직 자신의 삶을 사는 삶,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인 오르가즘을 획득하는 삶, 무모하고 과시적인 삶"을 권장하는 사회를 재구성하였다. "주체(법)와 지식의 대상(억압)에" 도전하고 해체하는 방식은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이 직시한 것처럼 침묵이나 비실존과는 다른 격렬한 전투이다. 산업화와 근대화를 지나 현재적 아노미와 경제적 공황에 가까운 글로벌한 시대에, 변화하는 의식의 와중에서 전통적 가치와 서구적인 모럴 사이에 위치한 동아시아의 여성으로서 당착한 문제점들을 동아시아의 가치관을 묘사한 틀을 빌어 해체하는 것이다. ● 이러한 금기에의 도전은 만다라(mandala)라는 도상을 통해 합법적인 위치를 갖는 성적인 이미지를 강화함으로써 불편한 현실의 관계를 드러내는「합일」시리즈와「Pull & Push」시리즈와 같은 '성'을 개념으로 한 사회적 쓸모가 약한 놀이기구를 발명함으로써 더 노골화된다. 은유, 상징, 내밀함 등으로 표상되던 개념은 작가의 손을 통해 그림, 기구, 이미지로 노골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실재'하는 존재가 된다. 사용된 재료들은 싸구려 합판에 그린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합판 중에서도 고가의 것이다. 젊은 작가의 경제력에 비하면 과한 편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데, 최대한 양질의 재료를 사용한다는 것 또한 작가가 선택한 개념이다. 쓸모없는 것을 생산하는데 가장 좋은 재료라니. 실생활에서 유용성이 떨어지는 물건을 만드는 데 들이는 공력과 시간 그리고 경비는 무모한 것으로 치부될 수 있다. 실질성과 효용성을 가치로 두는 세계를 '전복'시키는 것은 외부의 이미지에서부터 속살까지 통일되어 있다.

 

 


                                                                    이미정_자가수상을 위한 무대_나무에 아크릴채색_가변크기_2013_부분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은 현대가 '불안의 시대'인 것은 그 어떤 견해와도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관여나 참여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나아가 물고기는 물 밖에 나와야 물을 의식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오늘날 텔레비전과 신문지상의 뉴스가 객관적 사실의 전달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사건이 등장할 때까지 반복되는 자기복제 기제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현대 기계사회의 미디어에 대한 맥루한의 통찰은 우리 사회의 흐름을 조정하거나 진행하는 에너지에 대해 유용한 이해의 틀을 제공한다. 푸코(Michel Foucault)가 경계했던 사라지라는 선고, 침묵하라는 명령, 비실존을 긍정하라는 명령인 '억압'이 이러한 뉴스의 틀과 연계되어 이미지를 통해 확고해지는 것 또한 확인한다. ● 오랜 세월 이미지를 틀 지우는 것들에 대한 반발 혹은 상상력의 규제에 도전해온 미술가들의 힘은 자본주의 시대에 현저히 약화되었다. 물론 군주나 절대적인 권력의 주체가 해체된 현대사회에서 국적이나 물리적 실체가 없는 자본은 부정할 대상을 설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한계도 있다. 이미정의 발칙하고, 도전적이며 순전히 놀이를 위한 놀이기구는 '공공의 선'과 먼 거리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은 공공의 선을 위해 매우 유용한데, '가치'라는 이름으로 규제된 삶의 법칙들을 무화시키는 놀이의 존재를 우리에게 각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 성적인 이미지가 넘쳐남에도 주체 없는 이미지만 존재하며 여전히 '성' 자체에 대해서는 금기를 갖고 있는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가 신장하고 자본을 지닌 엘리트가 사회적 책무를 잊고 자신의 욕망을 펼쳐나가던 서구 근대의 모습과 닮아 있다. 주체적 삶을 위하여 땅에서 벗어나 지식을 소유하였지만 노동에서 소외된 88만원 세대, 88년생의 삶은 연대(連帶)와 유대(紐帶)라는 대안을 통해 확립될 수 있음을 '8망(八亡)'의 도상이 되어버린 '구직을 위한 8덕(八德)'에서 본다. 이 젊은 작가의 발칙하고 거칠어 보이는 작품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세상은 보여지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때문이다. ■ 조은정


2013 갤러리 룩스 신진작가 지원전

2013_0724 ▶ 2013_0902


이은종展 / 2013_0724 ▶ 2013_0805초대일시 / 2013_0724_수요일_06:00pm
양호상展 / 2013_0807 ▶ 2013_0819초대일시 / 2013_0807_수요일_06:00pm
원범식展 / 2013_0821 ▶ 2013_0902초대일시 / 2013_0821_수요일_06:00pm

후원 / 고은사진미술관협찬
협찬 / 토요타포토스페이스_포토뷰_신지스튜디오클럽_드림액자_그린아트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공휴일_11:00am~07:00pm


갤러리 룩스GALLERY LUX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Tel. +82.2.720.8488
www.gallerylux.net


2013 갤러리 룩스 신진작가 공모전 심사평 ● 이번 공모전 역시 작년과 유사한 수준이었다. 그중에서 3명의 작품을 선정했다. 비교적 수월하게 수상자를 결정한 셈이다. 그만큼 다른 작업들과 차별화된 수준을 보여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응모자들의 포트폴리오에 대한 불만을 말하고 싶다. 매우 성의 없는 포트폴리오 자체는 이미 자신의 작업을 선보이는 기본적인 태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방증이다. 명료하고 핵심적인 작가노트, 그리고 자신의 베스트 작품만을 선별해서 깔끔하게 제시하는 것조차 부담스럽다면 이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이 갤러리 룩스의 신진작가공모는 사진작업(혹은 사진을 활용한)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망각하고 제출하는 경우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벌써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절실하고 성의 있으며 최선을 다해서 응모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심사위원의 이견이 별로 없을 만큼 선정된 3명의 작품 수준은 고른 편이다.

 


원범식_건축조각 Archisculpture 013_포토그래픽 프린트_100×70cm_2012

 

 

 

원범식_건축조각 Archisculpture 08_포토그래픽 프린트_100×70cm_2012

 

 

원범식_건축조각 Archisculpture 010_포토그래픽 프린트_120×170cm_2012

 



원범식의 건축물을 연결한 기이한 건축풍경사진이 흥미로웠다. 흑백의 명료한 톤으로 이질적인 건축물의 외관을 연결해서 만든 기이한 풍경이자 동시에 무척 회화적인 요소도 가득했다. 그것은 거대하고 새로운 조각이기도 했다. 이 건축조각 사진은 대도시 '판타스마고리아'의 콜라주에 해당한다. 그것은 인간의 환상, 욕망이 잘 구현된 아케이드이자 여러 정치·역사·사회적 환영을 표상하는 도시의 파편들을 수집, 봉합해 만든 거대한 조형물이기도 하다. 그렇게 이루어진 건축사진은 작가가 수집한 건축양식의 총체이자 동시에 그것의 분열증적 집합에 따른 기이한 욕망의 착종과 어질한 대도시의 환영을 동시에 안겨준다.

 


양호상_Stereogram #001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00×80cm_2012

 

 

 

양호상_Stereogram #002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00×80cm_2012

 

 

양호상_Stereogram #003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00×80cm_2012

양호상의「Stereogram」시리즈는 강렬하고 어른거리는 색채 속에 묻힌 옷 사진이다. 특정한 기호와 디자인을 보여주는 옷은 동일한 색채의 배경 속으로 스며들어 은닉되다가 문득 걸려든다. 사진의 평면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옷이라는 오브제와 그 배경의 구분자체를 무화시키는 한편 새삼 패션의 프린팅과 패턴, 색채를 통해 특정 시간대의 역사와 기억을 은연중 건드리는 사진이다. 명료한 정보를 제공하고 특정 형태를 기록하는 사진을 무력화시키는 옵 적인 장치도 흥미롭다.

 

이은종_공원 14_파인아트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80×120cm_2012

 

 

이은종_공원 09_파인아트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80×120cm_2012

 

 

이은종_공원 05_파인아트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80×120cm_2012

이은종은 흑백적외선 사진을 통해 공원풍경을 촬영했다. 비현실감이 감도는 이 공원은 인간의 욕망이 자연을 길들이고 관리하는 차원에서 생겨난 이상한 자연의 힘과 분위기를 야룻하게 보여준다. 그러기위해 적외선 사진은 요구되었을 것이다. 인간은 볼 수 없는 적외선 광선의 힘으로 그려진 일상의 풍경은 그래서 새롭고 낯설고 괴이하다. 인공의 자연인 공원이 무엇인지를 섬세하고 정교한 기법으로 들추어내고 있는 시선이 주목되었다. ● 선정하고 보니 이 세 명의 사진가들의 작업은 저마다 다른 개념적 시선과 함께 그것을 드러내는 기법의 편차를 통해 결국 자신이 대면하는 세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한편 그 이면을 들여다보는 '사시적'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앞으로의 정진을 기대한다. ■ 박영택_구성수


나무속의 방

전항섭展 / JEONHANGSUB / 全項燮 / sculpture

2013_0814 ▶ 2013_0902 / 월요일 휴관

 

 

 

전항섭_나무속의 방Ⅰ_소나무_260×260×220cm_2013

초대일시 / 2013_0814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아라아트센터AR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견지동 85-24번지Tel. +82.2.743.1643

www.araart.co.kr


I. 그 방은 경건하다. 텅 빈 숲, 산실 혹은 태실, 선방, 해우소, 관과 같은 공간을 연상시킨다. 공기조차 정지된 듯 사물 없이 간결한 그곳은 영혼을 담은 우주이자 이승과 저승이 접하는 길목, 육신의 생멸현상이 이루어지는 현장처럼 아득하다. 생명의 발아점과 깨달음의 발화점과 변화의 발생점이 거기 있는 듯하고, 어머니 품처럼 단아한 아늑함도 느껴지고, 한편으로는 물질과 육신의 흔적조차도 남아있지 않은 메마른 장지로도 보인다. 뿐인가, 지혜를 얻지 못한 중생, 아집에 집착하는 존재들이 홀연히 이주해와 멸집(滅執)을 위해 고행하는 집 같기도 하다. 따라서 이곳은 나무라는 구체적 물질로 만들어졌으나 존재에 대한 관념을 담지하는 추상적인 어떤 세계로 여겨진다. ● 전항섭의 작업재료인 나무에도 앞에서 언급한 방과 유사한 성질이 선험적으로 배어 있는 것 같다. 긴 시간 땅속에서 어둠과 습열을 몸으로 흡수한 뒤 제 껍질과 살을 찢으면서 바깥 대기로 싹을 내밀고, 그렇게 올라온 대지에선 온 몸을 비틀며 뿌리로부터 수분을 힘겹게 빨아올리고, 뜨거운 땡볕과 차가운 삭풍에 부대껴야 비로소 생존할 수 있는 고된 태생적 생장과정이 그렇다. 힘듦과 아픔으로 체내에 비축한 에너지를 타 생명들을 위해 아낌없이 소모하고 비운 뒤, 삭거나 썩어서 사라지거나, 불태워져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모성을 품은 겸허한 존재. 그런 나무가 전항섭의 작업에서 작가의 내면을 현실로 전치해내는 중요한 소재이자 질료로 조각언어화 된다. 나무가 작가의 마음과 몸에 의해, 또 다른 상징과 표현으로 내면적 서사를 견인해내는 기제가 된 것이다. 이런 경건한 생명성을 깨달은 전항섭이 나무를 작업재료로 선택했음은 작업의 주제를 적확하게 드러내려는 작가로서는 당연한 것이다. ● 전항섭은 근작에서 이런 나무의 습성을 자신의 몸과 마음에 일치시켜 온전히 받아들이고 뱉어냈다. 나무가 가진 본래의 상태에 자신의 몸과 호흡을 싣고서 능숙한 기술과 기교를 줄였다. 표현의 힘을 과도하게 작용시키지 않고 나무의 본성에 자신의 조형을 의탁한 것이다. 이는 지난 30여 년을 나무만을 주재료로 작업해 온 전항섭이 이제 나무에 대해서 어떤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의 반증 같다. 그만큼 근작에서 전항섭은 욕심을 버리고 나무와 조각의 관계를 더 졸하고 순연하게 연결해냈다. 그의 의도에 비례할 만큼의 나무의 표정이 거기 남았다. 근작이 담백해 보이는 건 이 때문이다.

 


전항섭_나무속의 방Ⅳ_소나무_217×210×68cm_2013

 

 

전항섭_나무속의 방Ⅵ_참죽나무, 참나무_128×90×36cm_2013

I I. 이번 전시에서 전항섭은 나무를 다루는 어법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의 특성을 드러낸다. 2003년 김종영 조각상 수상기념 전시를 가진 뒤 오랜 침잠기를 거치고 난 이후, 오랫만에 변모된 형식으로 구축하는 대형나무판재의 「나무속의 방」 연작과, 그 방의 안팎에서 의미소로 기능하는 씨앗, 꽃, 동물, 사람(산모, 어머니) 등 전통적인 나무조각법으로 깎아 낸 소형작품들인 「상 像」 연작의 표현방식이 그것이다. 전자의 덜 다듬어진 날 것의 텍스쳐를 살린 건축적 직선 구조와, 잘 다듬어진 유연한 곡선의 맛으로 밀도 높게 완결된 후자의 유기적 결합과 설치방식이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조형적 맥락이라 하겠다. ● 우선 근작의 중심축인 새로운 형식의 대형작품을 보자. 소나무 원목을 대략 10cm 두께에 길이가 2m가 넘는 커다란 직사각형판재로 켠 뒤 모서리를 결합해서 건축물이나 가구처럼 만든 방이다. 표면을 끌의 흔적만 살짝 남기는 정도로 간단하게 다듬어서 작가의 손맛보다는 나무자체의 질료성이 두드러진 상태에서 결합된 둔중하고 우직한 구조물이다. 누각이나 정자처럼 사방으로 난 문에 실내가 푸른색으로 칠해진 엄격한 정방형의 「나무속의 방-1」, 선홍색으로 외부 앞면이 따뜻하게 칠해져서 입구와 출구가 꺾어지게 연결되는 통로로 태실(혹은 산실)같은 비의적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나무속의 방-2」, 숲속의 해우소나 관처럼 적요하게 긴 입방체로 서 있는 「나무속의 방-3」, 그리고 뻥 뚫린 공간에 티벳의 '마니차 瑪尼車'를 유추케 하는 회전얼개를 설치해서 돌리며 '업장소멸 業障消滅'의 기원을 형상화 한 「나무속의 방-4」 등의 시리즈가 있다. ● 이 대형의 구조물들은, 과거 전항섭이 구사하던 굵은 기둥의 근골 조립방식과 전통적 소재(물고기, 새, 창살, 여인)들을 연결하던 대작들의 이미지 서술방식에서 이탈한 채, 아무런 소재도 설명도 묘사도 없이 실내외 비어있는 공간으로 제시된다. 여기에서 나무는 대상을 재현하는 재료의 역할에서 벗어나서 직접적으로 상징의 의미소로도 기능한다. 이 조립의 방식은 가공이 덜 된 듯(보이지만 엄밀하게는 작가의 의도에 부합될 정도로 가공된) 거칠게 보이는 나무의 원초적 맨얼굴로 작가의 관념을 묵시적으로 함유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나무를 다양하게 다듬고 표현하며 작가의 체취와 조형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키던 과거에 비하면 이 방식은 낯설다. 나무자체가 소재이자 주제이기도 하고, 나무와 작가와 세계를 넘나드는 존재론적인 관계성에 대한 사유가 강조되어 보이기도 한다. 기존의 완결된 조각의 마스터피스적 완성도보다는 작가와 관객이 작품을 경험하는 프로세스와 환경을 더 중요하게 노출하는 새로운 시도라서 그럴 것이다. 이런 변모는 조각에 대한 전항섭의 인식과 태도가 기존의 입장에서 또 다른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 단서다. ● 이 작업을 통해 전항섭이 말하려는 것은 나무로부터 나오고 나무로 돌아가는 생명의 순환과 궤적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무속의 방'은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현장임과 동시에, 나무를 중점적인 음소로 다루는 전항섭이 지향하는 정신적 거주지다. 벽도 지붕도 바닥도 넓고 굵은 소나무판으로 둘러쌓여 스스로 능동적인 생명성을 지향하는 이 투박한(?) 물리적 공간은, 상징으로서의 '방'과 거기서 잉태되는 작가의 경험적 서사를 아우르며 일종의 '샤먼 shaman'적 '소도 蘇塗'와 같은 깨달음과 수행의 장소성을 환기시켜 준다. 개념으로부터의 일탈, '불립문자'와 같은 비논리적 직관이 서려있는 '무위적 인위'의 제작의도가 그 작품들의 바탕에 있고, 그런 나무의 물질성을 강조시키며 동시에 구체적인 내용을 소거한 것은 전항섭이 지향하는 생명에 대한 관념을 증폭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전항섭_나무속의 방-像18_대추나무_51×29×12cm_2013

작가의 감성과 능숙한 표현력이 어우러지는 조각에서 이런 내면적 통찰이 기존의 조형방식을 무화시키며 드러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대부분의 조각은 재료를 깎고, 주조하고, 왜곡하고, 형태화하고, 구조화 하는 인위적 가공으로 작가의 체취와 미적 감각을 최대한 드러내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작가의 최소한의 관여와 개입으로 질료자체의 고유한 물질성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환경으로 스며드는 이런 '텅 빔'의 체험적 프로세스는, 기존조각의 궁극적 결과물인 형태나 매스가 아닌 건축적 조각공간으로 생태적 느낌을 발생시켜 준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이는 최근 전항섭이 나무에 대한 배려를 통해 그의 의식의 흐름을 작위성 없이 드러내는 어법으로 작품진술방식을 전환하는 과정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언어를 통해서라야만 세계를 사유하고 인식하는 인간존재에 대한 적확한 비유를 한 셈이다. 이를 인용해서 조각가 전항섭에게 적용해 본다면 전항섭에겐 '나무'가 '존재의 집'인 셈이다. 삶의 반은 보편적 인식의 세계에 있고 나머지 반은 조각가로서 나무를 통해서만 세계를 수용하고 표출하기 때문이다. 그런 전항섭의 존재의 집인 「나무속의 방」엔 그가 살아온 모든 시간들이 녹아있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기억과, 앞으로 다가올 삶에 대한 지향성도 동거하고 있다. 그래서 그 방은 만물을 낳고 품었다가 떠나보낸 어머니 품처럼 허허롭게 비어 있기도, 동시에 모든 존재들이 숨을 쉬는 숲처럼 울창하게 가득 차 있기도 하다. 거기에 자신에 대한 성찰이 있을 터, 나무가 단순한 재료의 의미를 넘어서서 자연스럽게 의식을 담는 존재의 집이 되는 건 당연하다. ● 기하학적인 형태의 「나무속의 방」 연작과 함께 동반되는 이번 전시에서의 두 번째 소재와 형식은 전통적 조각기법에 의해 완결된 약 30여 점의 소품들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씨앗, 꽃, 동물, 사람 등의 반추상화 된 「나무속의 방 - 상像」 연작인데, 하나하나가 작가의 감정과 표현욕망이 직접적으로 이입된 완결도를 보여준다. 유연한 곡선으로 변주된 형태. 숙련된 기량과 손맛. 그리고 앞서 설명한 근작의 건축적 빈 직선공간과 대비되는 속이 가득 찬 양괴감의 여성적 생성 이미지가 거기에 있다. 어머니, 새, 꽃, 씨앗 등의 분명한 대상성을 지닌 이 반쯤은 사실적인 형상들은, 앞서 설명한 추상적 명상공간의 엄격함과는 달리 '나무속의 방'이란 모태에서 생성된 결이 고운 유기체들이다. 그 방에서 생명을 얻고 생장해서 바깥으로 독립 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 영혼이 그 방에 안치되어 다시 환생하는 운명적 관계의 인연들. 그런 관계와 현상에 자신을 대입하며 전항섭은 자신도 회귀해야 할 자연, 그 나무속의 방을 묵묵히 숙고하며 긴 잠행으로 소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 이 소품들은 대작들과는 상대적인 특징을 보여주지만, 다시 대작들과 조응하며 전시를 하나의 구조로 맥락화 하고 작가의 내러티브를 리드미컬하게 변주해 준다. 전자가 없는 후자만의 전시라면 뭔가 김이 빠졌을 듯하고, 후자가 없는 전자만의 전시라면 감상의 재미는 반감되었을 듯하다. 이 「상 像」 연작들은 이 전시에서 액센트로서 감초역할 뿐만 아니라 중심적 역할도 동시에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설정은 전항섭의 기획적 마인드와 작가적 연륜을 반증해 주는 긍정적 예라 하겠다. 다만 이를 인정하면서도 필자가 사족처럼 떠올린 게 있다면, 이 전시가 두 가지 어법으로 대비되는 서술방식과 설치효과에 의존하지 않고 대작만의 묵직한 덩어리로 절대적인 침묵의 분위기를 연출했으면 어떤 긴장감을 불러 왔을까, 라는 기대와 의문이었다. 어쩌면 이미 그의 계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전항섭_나무속의 방展_아라아트센터_2013

I I I. 근작에서 확인했듯 전항섭의 추상적 관념이나 미의식은 내밀한 그만의 것이면서도 동시에 조각의 '한국성'이란 큰 명제의 연장선상에 있기도 한 것이다. 한국성은 전항섭이 지난 30여 년간 지속해 온 작업의 한 궤도였다. 전항섭은 1980~90년대를 맹렬히 관통하던 조각그룹 '한국성, 그 변용과 가늠'의 주축멤버였다. 이 그룹은 한국현대조각에서 전통성과 현대성, 서구 조각과는 달리 독자적인 우리의 미의식과 정서를 탐구하고 거기에서부터 한국적 조각의 주체성을 찾고자 했던, 우리 현대조각사에서 중요한 단체였다. 그러니까 지난 시기 '한국성'이라는 명제는 전항섭 작업의 중요한 준거였던 셈이다. ● 그러면 조각에서 한국성이란 무엇일까. 그동안 미술 전반에서 '전통의 현대적 변용'이라든가 '전통성과 현대성의 만남'등 인구에 회자하는 논의들이 있었지만, 실제로 작품을 통해서 볼 수 있었던 건 주로 과거의 소재나 형식 차용이 대부분이었다. 아니면 전통적 이미지의 시각적 환기력 정도가 거기에 덧붙여질 정도였다. 그만큼 전통이란 것이 눈에 보이는 요소로 단순하게 인식되었던 것이었다. 전항섭을 비롯한 이 그룹의 중요작가들은 이런 단순한 접근법에서 벗어나 전통적 요소들의 당대적 문화와의 연관지점에서 발생하는 현상을주목했다. 당대를 구성하는 미의식과 삶의 방식과의 관계성을 탐구하고, 거기에 근거한 주체적 입장에서 한국성이란 개념을 새로운 조각형식의 씨앗으로 동시대 현실에 적용시키려 했다. 그리고 이는 전항섭에게 있어서도 작가적 독자성과 작업세계의 근골중 주요한 하나로 지금까지 견인되어 왔다. ● 그러나 근작에서 전항섭은 한국성이란 이 특수한 명제를 과거에 비해 모호하게 작품의 측면으로 슬쩍 밀어놓은 채 그의 태도를 드러낸다. 이미 정해진 미적 범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현상들을 보고 느끼는 게 가능해져서 그런 듯하다. 자신에게 축적된 틀로부터 벗어나서 열린 태도로 조각형식에 대한 실험을 진행했단 의미다. 그 결과 전항섭의 이런 변모가 이번의 근작을 통해 한국성이란 추상적 개념을 더 강한 맛과 냄새로 드러내는 것 같다. 비유하자면 숙성된 된장의 색다른 조리법으로 기존의 요리와는 다른 더 깊은 맛을 찾아낸 것이라 할까. 재료나 소재도 그렇지만 조각의 기존 장르개념에 구애됨이 없이 접근하며,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말하는가를 증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전항섭의 근작에서 질료와 형식으로부터 작업주제를 이끌어 내는 이 색다른 언술방식이 바로 그런 동시대적 한국성의 지점에 도달한 한 예라고 생각된다. ● 새로운 시도는 대중성이나 상업성에 앞서는 작업행위의 핵심이다. 거기에 기준한다면 기존의 작업에 대한 '아프락삭스'적 자기갱신에서 도출한 근작의 모험적 시도가 조각적 회로를 더 넓게 열어 놓은 게 이번 전시에서 전항섭의 가장 큰 수확일 듯하다. 「나무속의 방」엔 그의 경건한 자연관과 세계관이 오롯이 앉아 있고, 다른 쪽엔 자기형식에 대한 진지한 도발도 함께 있다. 모던하다. 뻔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묵직하다. 그게 매력적이다. 하나만 보아도 좋은데 이들을 함께 볼 수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다음전시를 어떻게 풀어낼 지 벌써 기대가 되는 건, 시각만을 넘어서서 즐길 수 있는 이런 감상의 묘미 때문이다. ■ 김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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