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속의 방

전항섭展 / JEONHANGSUB / 全項燮 / sculpture

2013_0814 ▶ 2013_0902 / 월요일 휴관

 

 

 

전항섭_나무속의 방Ⅰ_소나무_260×260×220cm_2013

초대일시 / 2013_0814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아라아트센터AR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견지동 85-24번지Tel. +82.2.743.1643

www.araart.co.kr


I. 그 방은 경건하다. 텅 빈 숲, 산실 혹은 태실, 선방, 해우소, 관과 같은 공간을 연상시킨다. 공기조차 정지된 듯 사물 없이 간결한 그곳은 영혼을 담은 우주이자 이승과 저승이 접하는 길목, 육신의 생멸현상이 이루어지는 현장처럼 아득하다. 생명의 발아점과 깨달음의 발화점과 변화의 발생점이 거기 있는 듯하고, 어머니 품처럼 단아한 아늑함도 느껴지고, 한편으로는 물질과 육신의 흔적조차도 남아있지 않은 메마른 장지로도 보인다. 뿐인가, 지혜를 얻지 못한 중생, 아집에 집착하는 존재들이 홀연히 이주해와 멸집(滅執)을 위해 고행하는 집 같기도 하다. 따라서 이곳은 나무라는 구체적 물질로 만들어졌으나 존재에 대한 관념을 담지하는 추상적인 어떤 세계로 여겨진다. ● 전항섭의 작업재료인 나무에도 앞에서 언급한 방과 유사한 성질이 선험적으로 배어 있는 것 같다. 긴 시간 땅속에서 어둠과 습열을 몸으로 흡수한 뒤 제 껍질과 살을 찢으면서 바깥 대기로 싹을 내밀고, 그렇게 올라온 대지에선 온 몸을 비틀며 뿌리로부터 수분을 힘겹게 빨아올리고, 뜨거운 땡볕과 차가운 삭풍에 부대껴야 비로소 생존할 수 있는 고된 태생적 생장과정이 그렇다. 힘듦과 아픔으로 체내에 비축한 에너지를 타 생명들을 위해 아낌없이 소모하고 비운 뒤, 삭거나 썩어서 사라지거나, 불태워져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모성을 품은 겸허한 존재. 그런 나무가 전항섭의 작업에서 작가의 내면을 현실로 전치해내는 중요한 소재이자 질료로 조각언어화 된다. 나무가 작가의 마음과 몸에 의해, 또 다른 상징과 표현으로 내면적 서사를 견인해내는 기제가 된 것이다. 이런 경건한 생명성을 깨달은 전항섭이 나무를 작업재료로 선택했음은 작업의 주제를 적확하게 드러내려는 작가로서는 당연한 것이다. ● 전항섭은 근작에서 이런 나무의 습성을 자신의 몸과 마음에 일치시켜 온전히 받아들이고 뱉어냈다. 나무가 가진 본래의 상태에 자신의 몸과 호흡을 싣고서 능숙한 기술과 기교를 줄였다. 표현의 힘을 과도하게 작용시키지 않고 나무의 본성에 자신의 조형을 의탁한 것이다. 이는 지난 30여 년을 나무만을 주재료로 작업해 온 전항섭이 이제 나무에 대해서 어떤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의 반증 같다. 그만큼 근작에서 전항섭은 욕심을 버리고 나무와 조각의 관계를 더 졸하고 순연하게 연결해냈다. 그의 의도에 비례할 만큼의 나무의 표정이 거기 남았다. 근작이 담백해 보이는 건 이 때문이다.

 


전항섭_나무속의 방Ⅳ_소나무_217×210×68cm_2013

 

 

전항섭_나무속의 방Ⅵ_참죽나무, 참나무_128×90×36cm_2013

I I. 이번 전시에서 전항섭은 나무를 다루는 어법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의 특성을 드러낸다. 2003년 김종영 조각상 수상기념 전시를 가진 뒤 오랜 침잠기를 거치고 난 이후, 오랫만에 변모된 형식으로 구축하는 대형나무판재의 「나무속의 방」 연작과, 그 방의 안팎에서 의미소로 기능하는 씨앗, 꽃, 동물, 사람(산모, 어머니) 등 전통적인 나무조각법으로 깎아 낸 소형작품들인 「상 像」 연작의 표현방식이 그것이다. 전자의 덜 다듬어진 날 것의 텍스쳐를 살린 건축적 직선 구조와, 잘 다듬어진 유연한 곡선의 맛으로 밀도 높게 완결된 후자의 유기적 결합과 설치방식이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조형적 맥락이라 하겠다. ● 우선 근작의 중심축인 새로운 형식의 대형작품을 보자. 소나무 원목을 대략 10cm 두께에 길이가 2m가 넘는 커다란 직사각형판재로 켠 뒤 모서리를 결합해서 건축물이나 가구처럼 만든 방이다. 표면을 끌의 흔적만 살짝 남기는 정도로 간단하게 다듬어서 작가의 손맛보다는 나무자체의 질료성이 두드러진 상태에서 결합된 둔중하고 우직한 구조물이다. 누각이나 정자처럼 사방으로 난 문에 실내가 푸른색으로 칠해진 엄격한 정방형의 「나무속의 방-1」, 선홍색으로 외부 앞면이 따뜻하게 칠해져서 입구와 출구가 꺾어지게 연결되는 통로로 태실(혹은 산실)같은 비의적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나무속의 방-2」, 숲속의 해우소나 관처럼 적요하게 긴 입방체로 서 있는 「나무속의 방-3」, 그리고 뻥 뚫린 공간에 티벳의 '마니차 瑪尼車'를 유추케 하는 회전얼개를 설치해서 돌리며 '업장소멸 業障消滅'의 기원을 형상화 한 「나무속의 방-4」 등의 시리즈가 있다. ● 이 대형의 구조물들은, 과거 전항섭이 구사하던 굵은 기둥의 근골 조립방식과 전통적 소재(물고기, 새, 창살, 여인)들을 연결하던 대작들의 이미지 서술방식에서 이탈한 채, 아무런 소재도 설명도 묘사도 없이 실내외 비어있는 공간으로 제시된다. 여기에서 나무는 대상을 재현하는 재료의 역할에서 벗어나서 직접적으로 상징의 의미소로도 기능한다. 이 조립의 방식은 가공이 덜 된 듯(보이지만 엄밀하게는 작가의 의도에 부합될 정도로 가공된) 거칠게 보이는 나무의 원초적 맨얼굴로 작가의 관념을 묵시적으로 함유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나무를 다양하게 다듬고 표현하며 작가의 체취와 조형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키던 과거에 비하면 이 방식은 낯설다. 나무자체가 소재이자 주제이기도 하고, 나무와 작가와 세계를 넘나드는 존재론적인 관계성에 대한 사유가 강조되어 보이기도 한다. 기존의 완결된 조각의 마스터피스적 완성도보다는 작가와 관객이 작품을 경험하는 프로세스와 환경을 더 중요하게 노출하는 새로운 시도라서 그럴 것이다. 이런 변모는 조각에 대한 전항섭의 인식과 태도가 기존의 입장에서 또 다른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 단서다. ● 이 작업을 통해 전항섭이 말하려는 것은 나무로부터 나오고 나무로 돌아가는 생명의 순환과 궤적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무속의 방'은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현장임과 동시에, 나무를 중점적인 음소로 다루는 전항섭이 지향하는 정신적 거주지다. 벽도 지붕도 바닥도 넓고 굵은 소나무판으로 둘러쌓여 스스로 능동적인 생명성을 지향하는 이 투박한(?) 물리적 공간은, 상징으로서의 '방'과 거기서 잉태되는 작가의 경험적 서사를 아우르며 일종의 '샤먼 shaman'적 '소도 蘇塗'와 같은 깨달음과 수행의 장소성을 환기시켜 준다. 개념으로부터의 일탈, '불립문자'와 같은 비논리적 직관이 서려있는 '무위적 인위'의 제작의도가 그 작품들의 바탕에 있고, 그런 나무의 물질성을 강조시키며 동시에 구체적인 내용을 소거한 것은 전항섭이 지향하는 생명에 대한 관념을 증폭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전항섭_나무속의 방-像18_대추나무_51×29×12cm_2013

작가의 감성과 능숙한 표현력이 어우러지는 조각에서 이런 내면적 통찰이 기존의 조형방식을 무화시키며 드러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대부분의 조각은 재료를 깎고, 주조하고, 왜곡하고, 형태화하고, 구조화 하는 인위적 가공으로 작가의 체취와 미적 감각을 최대한 드러내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작가의 최소한의 관여와 개입으로 질료자체의 고유한 물질성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환경으로 스며드는 이런 '텅 빔'의 체험적 프로세스는, 기존조각의 궁극적 결과물인 형태나 매스가 아닌 건축적 조각공간으로 생태적 느낌을 발생시켜 준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이는 최근 전항섭이 나무에 대한 배려를 통해 그의 의식의 흐름을 작위성 없이 드러내는 어법으로 작품진술방식을 전환하는 과정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언어를 통해서라야만 세계를 사유하고 인식하는 인간존재에 대한 적확한 비유를 한 셈이다. 이를 인용해서 조각가 전항섭에게 적용해 본다면 전항섭에겐 '나무'가 '존재의 집'인 셈이다. 삶의 반은 보편적 인식의 세계에 있고 나머지 반은 조각가로서 나무를 통해서만 세계를 수용하고 표출하기 때문이다. 그런 전항섭의 존재의 집인 「나무속의 방」엔 그가 살아온 모든 시간들이 녹아있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기억과, 앞으로 다가올 삶에 대한 지향성도 동거하고 있다. 그래서 그 방은 만물을 낳고 품었다가 떠나보낸 어머니 품처럼 허허롭게 비어 있기도, 동시에 모든 존재들이 숨을 쉬는 숲처럼 울창하게 가득 차 있기도 하다. 거기에 자신에 대한 성찰이 있을 터, 나무가 단순한 재료의 의미를 넘어서서 자연스럽게 의식을 담는 존재의 집이 되는 건 당연하다. ● 기하학적인 형태의 「나무속의 방」 연작과 함께 동반되는 이번 전시에서의 두 번째 소재와 형식은 전통적 조각기법에 의해 완결된 약 30여 점의 소품들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씨앗, 꽃, 동물, 사람 등의 반추상화 된 「나무속의 방 - 상像」 연작인데, 하나하나가 작가의 감정과 표현욕망이 직접적으로 이입된 완결도를 보여준다. 유연한 곡선으로 변주된 형태. 숙련된 기량과 손맛. 그리고 앞서 설명한 근작의 건축적 빈 직선공간과 대비되는 속이 가득 찬 양괴감의 여성적 생성 이미지가 거기에 있다. 어머니, 새, 꽃, 씨앗 등의 분명한 대상성을 지닌 이 반쯤은 사실적인 형상들은, 앞서 설명한 추상적 명상공간의 엄격함과는 달리 '나무속의 방'이란 모태에서 생성된 결이 고운 유기체들이다. 그 방에서 생명을 얻고 생장해서 바깥으로 독립 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 영혼이 그 방에 안치되어 다시 환생하는 운명적 관계의 인연들. 그런 관계와 현상에 자신을 대입하며 전항섭은 자신도 회귀해야 할 자연, 그 나무속의 방을 묵묵히 숙고하며 긴 잠행으로 소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 이 소품들은 대작들과는 상대적인 특징을 보여주지만, 다시 대작들과 조응하며 전시를 하나의 구조로 맥락화 하고 작가의 내러티브를 리드미컬하게 변주해 준다. 전자가 없는 후자만의 전시라면 뭔가 김이 빠졌을 듯하고, 후자가 없는 전자만의 전시라면 감상의 재미는 반감되었을 듯하다. 이 「상 像」 연작들은 이 전시에서 액센트로서 감초역할 뿐만 아니라 중심적 역할도 동시에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설정은 전항섭의 기획적 마인드와 작가적 연륜을 반증해 주는 긍정적 예라 하겠다. 다만 이를 인정하면서도 필자가 사족처럼 떠올린 게 있다면, 이 전시가 두 가지 어법으로 대비되는 서술방식과 설치효과에 의존하지 않고 대작만의 묵직한 덩어리로 절대적인 침묵의 분위기를 연출했으면 어떤 긴장감을 불러 왔을까, 라는 기대와 의문이었다. 어쩌면 이미 그의 계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전항섭_나무속의 방展_아라아트센터_2013

I I I. 근작에서 확인했듯 전항섭의 추상적 관념이나 미의식은 내밀한 그만의 것이면서도 동시에 조각의 '한국성'이란 큰 명제의 연장선상에 있기도 한 것이다. 한국성은 전항섭이 지난 30여 년간 지속해 온 작업의 한 궤도였다. 전항섭은 1980~90년대를 맹렬히 관통하던 조각그룹 '한국성, 그 변용과 가늠'의 주축멤버였다. 이 그룹은 한국현대조각에서 전통성과 현대성, 서구 조각과는 달리 독자적인 우리의 미의식과 정서를 탐구하고 거기에서부터 한국적 조각의 주체성을 찾고자 했던, 우리 현대조각사에서 중요한 단체였다. 그러니까 지난 시기 '한국성'이라는 명제는 전항섭 작업의 중요한 준거였던 셈이다. ● 그러면 조각에서 한국성이란 무엇일까. 그동안 미술 전반에서 '전통의 현대적 변용'이라든가 '전통성과 현대성의 만남'등 인구에 회자하는 논의들이 있었지만, 실제로 작품을 통해서 볼 수 있었던 건 주로 과거의 소재나 형식 차용이 대부분이었다. 아니면 전통적 이미지의 시각적 환기력 정도가 거기에 덧붙여질 정도였다. 그만큼 전통이란 것이 눈에 보이는 요소로 단순하게 인식되었던 것이었다. 전항섭을 비롯한 이 그룹의 중요작가들은 이런 단순한 접근법에서 벗어나 전통적 요소들의 당대적 문화와의 연관지점에서 발생하는 현상을주목했다. 당대를 구성하는 미의식과 삶의 방식과의 관계성을 탐구하고, 거기에 근거한 주체적 입장에서 한국성이란 개념을 새로운 조각형식의 씨앗으로 동시대 현실에 적용시키려 했다. 그리고 이는 전항섭에게 있어서도 작가적 독자성과 작업세계의 근골중 주요한 하나로 지금까지 견인되어 왔다. ● 그러나 근작에서 전항섭은 한국성이란 이 특수한 명제를 과거에 비해 모호하게 작품의 측면으로 슬쩍 밀어놓은 채 그의 태도를 드러낸다. 이미 정해진 미적 범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현상들을 보고 느끼는 게 가능해져서 그런 듯하다. 자신에게 축적된 틀로부터 벗어나서 열린 태도로 조각형식에 대한 실험을 진행했단 의미다. 그 결과 전항섭의 이런 변모가 이번의 근작을 통해 한국성이란 추상적 개념을 더 강한 맛과 냄새로 드러내는 것 같다. 비유하자면 숙성된 된장의 색다른 조리법으로 기존의 요리와는 다른 더 깊은 맛을 찾아낸 것이라 할까. 재료나 소재도 그렇지만 조각의 기존 장르개념에 구애됨이 없이 접근하며,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말하는가를 증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전항섭의 근작에서 질료와 형식으로부터 작업주제를 이끌어 내는 이 색다른 언술방식이 바로 그런 동시대적 한국성의 지점에 도달한 한 예라고 생각된다. ● 새로운 시도는 대중성이나 상업성에 앞서는 작업행위의 핵심이다. 거기에 기준한다면 기존의 작업에 대한 '아프락삭스'적 자기갱신에서 도출한 근작의 모험적 시도가 조각적 회로를 더 넓게 열어 놓은 게 이번 전시에서 전항섭의 가장 큰 수확일 듯하다. 「나무속의 방」엔 그의 경건한 자연관과 세계관이 오롯이 앉아 있고, 다른 쪽엔 자기형식에 대한 진지한 도발도 함께 있다. 모던하다. 뻔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묵직하다. 그게 매력적이다. 하나만 보아도 좋은데 이들을 함께 볼 수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다음전시를 어떻게 풀어낼 지 벌써 기대가 되는 건, 시각만을 넘어서서 즐길 수 있는 이런 감상의 묘미 때문이다. ■ 김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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