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몽 hybrid dream
이한수展 / LEEHANSU / 李漢洙 / photography.painting.installation
2013_0801 ▶ 2013_0812
![](https://t1.daumcdn.net/cfile/blog/220B323951F86B1E23)
이한수_무제(tattoo)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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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801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관훈갤러리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2,3층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문신, 각인, 체험, 공간적 소통 ● 최근 그의 전시를 돌아보면 꾸준히 지속되는 몇 개의 키워드를 찾아낼 수 있는 것 처럼 보인다. 키치적인 것, 외계인과 SF적 가상의 공간, 문신, 심지어 라일리언이라는 사이비 종교단체까지. 그의 관심은 우리 사회가 키치적인 것을 그 태생적 자연적 환경으로 가지고 있다는데 대한 첨예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키치적인 것을 가치평가 절하하기 이전에 있는 그자체로 제시하는 것과 전적으로 상업화된 지상의 논리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서의 SF적인 요소의 도입과 외계적인 것에 대한 즉 전적으로 이질적인 타자로서의 포스트 휴머니즘적인 외부성에 대한 관심이 키치적 문화의 긍정을 통한 도약으로 연결된 것이다. ● 가나아트 스페이스에서 열린 2007년 전시 『씨 플러스 스윙바이 C+swingby』(2007)는 『플래시백Flashback』(2006),『우로보로스의 꿈』(2006)의 연장이다. 『씨 플러스 스윙바이 C+swingby』(2007~2011)에서 은빛 구두를 신고 흰 원피스를 입고 별밤의 성좌 속에 서있는 사진작품속의 여성은 SF영화에서 봄직한 외계인과 함께 신적 영역을 상징하는 후광을 간직한 여인으로 존재한다. 자화상인 우주모를 착용한 자신과 크리스탈구를 든 외계인이 나란히 서서 변주되는 사진작업 연작 외에 상업적 문신 패턴에서 차용한 용, 국화, 선녀, 연꽃, 달과 포효하는 호랑이, 인도풍 비천상, 메두사 유형의 거미여인과 같은 팬시하고 장식적인 아이콘들을 사용한다. 이런 아이콘들은 더 이상 탈주의 여지 없이 완전히 상업화된 문화라는, 어떤 보이지 않는 신체 표면에 균열을 내는 금과도 같은 꿈의 '표시mark'이다. ● 『LED Painting 시리즈』(2006~7)에서 이한수는 현란한 형광색의 둥근 바탕에 LED소자로 큐티한 형상이 반짝이는 자그마한 일련의 작업들과 함께 보여주었다. 이 화폭에 LED소자로 수놓인 문신 문양으로는 목련, 국화, 장미, 큐피트, 용, 천녀, 불상, 호랑이 등이 사용되었다. 서곡Prelude과도 같이 시작되는 1층에서는 이같은 모티프를 LED소자로 작업한 둥근 캔버스 열점과 외계인과 인물들을 우주공간에 병치한 이심적 구성을 보여주는 큰 규모의 사진작업 수점이 전시되었다. 두 명의 인물을 병치시킨 유형화된 사진작업은 동아시아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함께 문신으로부터 느껴지는 인간의 욕망, 각각 개인의 휴머니티에 대한 실체에 대한 타자화된 성찰을 느끼게 한다. 또한 그의 레이저 설치작업들은 다양하게 설치된 조형물을 연속적으로 통과해 나가는 공간적 경험을 통해 미적 체험이 얻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작가들과 구별되는 특이성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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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수_무제(봉황)1301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25×100cm_2013
『씨 플러스 스윙바이C+swingby』(2007)에서 가나아트 스페이스의 이층 구석엔 역시 망막을 자극하는 안료를 그대로 사용한듯 빨갛고 파란 형광성의 색채로 구성된 도막도막 잘려져나간 플라스틱 용의 설치가 있다. 구석에 쌓여진 현란한 색채의 한 무더기의 용의 사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자크 라캉 (Jacques Marie Emile Lacan)이 말하는 거울상 자아의 직면일까? 그의 작업이 보다 깊은 신화적 맥락에 닿아있다는 점에서, 나는 무엇보다 세계가 그의 눈 앞에서 산산조각나는 것을 본, 그리하여 그자신의 자아selfhood가 완전히 조각나는 것을 경험한 파트모스섬 Island of Patmos의 요한의 비전vision을 떠올리게 된다. 묵시록에서 기술되는 바 그것은 어떤 심리적인 것과 우주적인 것이 맞물리는 절대적 경계에 대한 하나의 시각이자 비전이다. ● 「미지의 역습Unknown strikes back」(2005) 여기저기 꽂힌 형광등, 도막도막 잘린 용의 컬러플한 사체corpses. 이것은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 거울상의 가차없는 부서짐인가? 혹은 용처럼 리드미컬하게 꿈틀대는 어떤 시간적 지속들의 절단인가? 이것을 전통적인 제례적인 의미에서의 일종의 괴물 살해로 간주할 수 있을까? 괴물은 무엇이며 부수고 태어나는 것은 무엇일까? 이한수의 작업에 있어 괴물은 무엇보다 문화적인 혼종적 실체이며, 문화 자체이다. 이 괴물은 그의 작업에 있어 주체와 대상 사이에 있는 감각지각의 형상화로서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의 도래로서, 마치 SF 영화나 공상과학 소설에서 나오는 외계인의 방문처럼 묘연하게 탄생한다. 괴물적인 것, 그것은 괴물monster이 나타내는 바 문자그대로 어떤 것을 보여주는monstrous 것인데, 또한 「달리에 대한 오마주」에서 보이듯 초현실적인 기괴한 모습의 괴물-천사이기도 하다. ● 그러나 이한수의 작업에서 과거에 도래했던 인간 속에 깃든 신성, "괴물적인 인간" 초인으로서 부처, 예수, 성모, 천사 등은 혼종성의 실례로서 라일리언 등의 뉴에이지적 종교제례와 구별되지 않는 하나의 평면, 혼효면plan of consistency에 섞여 위치한다. 그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 중력이 무한대에 가까운 지점에 이르는, 블랙홀에 이르는 사건의 지평 너머의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환기하려는 시도이며 컬러플한 빛이라든지 관객의 눈 안쪽에 맺히는 빛의 잔상으로서만, 불가해한 것을 마주하는 효과로서만, 규정할 수 없는 짧은 시간의 찰나로서만 존재한다. ● 『씨 플러스 스윙바이C+swingby』그의 사고의 궤적을 보여주는, 단정하게 잘 차려진 맛깔스러운 뷔페같은 느낌을 주는 전시이다. 이제 그의 관심사는 시종일관 어떤 '표면에 새김'이라는 의미로서의 문신에 있는듯 하다. 이한수는 문신을 특별히 비주류 대중문화의 특별하고도 팬시한 '아이콘icon'으로서 사용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불상이 나타내는 부처 등 동서양의 여러 종교에서 차용한 '성상'에 조응하는, 현대적인 상업적 저급문화의 아이콘, 비주류적이며 키치적이고 하위문화적인 그러면서도 철저히 상업적인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서 과거 신성神聖의 아이콘의 이미지에 반대급부적으로 조응한다. ● 문신은 신체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각인하여 새기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문신이라든지 피어싱과 같은 젊은 층에서 신체를 관통하는 표식의 유행에 대해 레나타 살레클 Renata Salecl 은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에서 이러한 열망이 모든 것이 부박浮薄하고 상업적인 것일 뿐인 세계에서 지울 수 없는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하는 "실재의 회귀"라고 말한바 있다. 현대사회에서 매체들은 아름다움의 이미지들로 젊은이들을 쉴 새 없이 폭격하며, 이렇듯 강제된 동일화에 대항하기 위한 방법들 가운데 하나는 실재적 행동을 수행하는 것, 즉 신체를 변화될 수 없는 방법으로 표식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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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수_무제(여신)1303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73×91cm_2013
흔적trace 내지 각인에 대한 관심은 단지 쓰기에서의 기록이나 새김뿐 아니라 비물질적인 차원에서의 순수 사건의 새겨짐 내지 흔적을 중시하는 현대 사상가들의 특별한 관심사이기도 한데, 이것은 '각인' 혹은 '표시'에 대한 서구적 태도에 조응한다. 예컨대 천사는 '신의 인장'으로서 이해되었고, 그리스도 성상은 베로니카가 자신의 수건에 고통받는 그리스도의 얼굴의 각인을 찍어내듯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신성한 힘의 각인으로서 처음 시작된다. 애초에 성상은 성서가 복음사가들이 임의대로 기술한 것이 아니라 천사의 말을 먼저 '듣고' 받아 적는 것이듯 인간의 능력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인장을 찍듯 찍어내는 것이었다. ● 이러한 종교적 의미에서의 신체에 대한 각인이란 대단히 강력한 것으로, 현대 철학자들의 언어로 번안하자면 사실상 의식으로는 잘 포착되지 않으면서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 잊어버릴래야 잊을 수 없는 것, 말하자면 트라우마와도 같은, 결코 지울 수 없는 몸의 기억에 가깝다. 천사가 지닌 의미인 '신의 인장'이란 결코 지울 수 없는 외상적 상처와도 같은 흔적으로서만 기억된다. 트라우마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일상에서의 반복을 만들어내며 이렇게 반복으로 되풀이된 것이 충동과 습관을 이루며, 습관은 관습의 형태로 고착화되어 사회적 정체성 형성에 관여한다. ● 문신은 무엇보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신체에 각인하는 것으로, 새기는데 격심한 고통을 수반한다. 또한 미국 감옥에서라든지 죄수를 신대륙으로 이주시킨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초기 이민자 사회에서는 범법자 혹은 죄수를 명시하는 낙인의 의미가 강했다. 국가발생 이전 부족사회 단계의 대부분의 문화에서 문신은 통과의례의 성격을 지닌다. 신체에 새기는 주변부 하위 문화의 각인으로서, 예술의 어법으로서 사용되는 문신은 마치 통과의례와도 같이 한 사회가 잊지 말아야 할 윤리적 책무를 일깨운다. 이것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재는 말해질 수 없는 것 혹은 표상불가능한 것으로 외상적인 상처의 형태로서만 상징계에 출몰한다는 라캉 Jacques Marie Emile Lacan 이나 제임슨 Fredric Jameson과 같은 현대 이론가들의 견해를 환기시킨다. ● 문신은 동시대 대중영화에서 비주류 하위문화의 혹은 문화적 경계선상에서의 어떤 임시적인 이행의 공간에서 고통받는 자아에 대한 아이콘icon으로서 사용된다. 예컨대 남아프리카의 정치적 경제적 갈등을 다룬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에서 반군에 포획당한 무장 소년병들은 면도칼로 문신한 후 마약을 지급받는다. 동시대 한국의 세태를 보여주는, 조기 유학생들의 애환과 방황을 다룬 김소영 감독의 한국 독립영화 『방황의 날들In-between』에서도 미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조기 유학한 청소년들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서로에게 문신을 해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상호 이질적인 문화적 경계에서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겪는 정체성의 위기를 적극적인 형태로 말로 표현하지 못하며 다만 감내하는 가운데 자학적으로 몸에 새기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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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수_혼성열반 Hybrid nirvana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1
디디에 앙지외Angieu는 문신에 대해 논하는 가운데 '스킨 에고'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외부 세계로부터 받은 강렬한 인상과 심리적인 변화는 모든 점에 있어 신체적 존재 속에, 몸의 구조 속에 근거지워진다고 한다. 앙죄가 말하는 피부는 경계boundary의 장소로서, 내외부를 직면케 하는 표면으로서 피부의 특수성이다. 피부는 자아의 내외부 양쪽을 면하는 하나의 '에고'로서 간주되며, 프로이트가 '이드'라 부른 것과 외부적 의미 복합체의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 이한수의 경우 문신에 대한 이같은 관심은 하위 주변부 문화subculture의 상위문화적인 예술적 어법으로의 적극적인 포용 외에도, 순수사건에 해당되는 무엇인가를 새기고 표시하며 기록한다는 의미에서의 신체에 대한 보다 환유적인 관심에 뿌리내리고 있는듯 하다. 이같은 사고에는 서구에서는 오랜 근원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 서양 중세에 천사는 신의 '인장'으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성상은 베로니카가 그리스도 얼굴을 수건에 찍어내듯 혹은 복음사가가 천사의 말을 듣고 나서 받아적듯 작자 자신의 힘이 아니라 전적인 외부로부터 오는 것, '각인하여 찍혀지는' 것이었다. 이한수는 주변부 하위문화와 마찬가지로 코스모폴리탄적 도시문화의 한 측면으로서 종교성을 제시한다. 그 자체 문화의 경계부에서 근원이 다른 문화들간의 혼종성 가운데 태어나는 것이다. ● 「백호를 가진 흑두」에서도 전지전능한 보는 힘을 나타내는듯 천 개의 눈을 상징하는 레이저는 일정한 간격으로 점멸하며 그 레이저가 투사되는 지점에 이미지로 맺힌다. 미간 사이에 설치된 것은 웹캠이다. 웹켐은 관객의 모습을 포착하여 자동적으로 디지털 만다라 형식으로 변형한다. 이렇게 '보여진' 관객의 모습은 실시간으로 맞은편 벽에 비춰지는데, 세 번째 눈 백호를 통해 작품 편에서 관객을 '응시gaze'하며 관객의 이미지를 디지털 만다라 속에 변형하는 형식으로 상호작용성이 구현된다. 검은 두상 전면에는 거리측정 센서가 설치되어 관객의 모습이 끊임없이 자동적으로 확대되거나 축소되며 마치 고치 속의 애벌레의 변태처럼 변이되도록 조작되며 이러한 변이는 문신 문양과 겹쳐져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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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수_혼성열반 Hybrid nirvana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1
즉 디지털 만다라가 되는 관객의 이미지는 여기서 마치 흐르는대로 형태가 바뀌는 유동체처럼 형태가 가변적이고, 쉴 새 없이 춤추듯 변화하며 동시에 투사된 빛으로서 화려한 영상과는 대조적으로 스크린이라는 차갑고 중성적인 매체의 무미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미지는 한 줄기 빛 속에 잠재되어 있으며, 프로젝터를 통해 투사되어 무감각한 매체 위에서 구현되는 가운데에서만 오직 순간적으로 구현된다. 이렇게 마치 현란한 디스코텍의 리듬처럼 나부끼고 펄럭이고 요동치는 영상과 무겁기 이를데 없는 매체적 존재감의 대비는,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시간성 속에서 변화무쌍하게 증식되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하는 시뮬라크르로서 이미지의 본성을 말해준다. ● 이후 작업에서도 변주되는 "눈깜박임ougenblick"과 같은 극히 찰나적 순간성을 하나의 감각적 질료로서 끌어들이고 있는 이같은 이한수의 작업은 붙잡을 수 없는 찰나처럼 순간과도 같은 매질로 사용되는 빛이라든지 내외부가 만나는 경계부이자 표면으로서 피부 내지 어떤 평면에 대한 최근의 지속적인 철학적 관심을 환기한다. 이같은 시간적 순간성이 조형해내는 공간성을 인류학자 빅터 터너 Victor Turner가 말하는 경계부이자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의 이행과 통과의 공간으로서 리미널리티liminality라는 측면에서 볼 수도 있겠고, 혹은 들뢰즈가 말하는 '일관성의 지평plan of consistence''혼효면'을 상기시킨다고도 볼 수 있다. 의미있는 사건이란 포착할 수 없으며 찰나적 순간성에 지나지 않는 차이로서 발표되는 특이성의 응축으로서, 그러한 가벼운 휘황함을 지닌, 두께없는 투사된 스크린의 막처럼 기능하며 작업으로서의 몸체에 각인되어 새겨진다. ● 별이 총총히 빛나는 밤이라는 의미의 성좌constellation는 이한수 작업에서 반복되는 주요 모티프이다. 별이 빛나는 밤은 사진작업에서 배경으로 사용되거나, 둥근 캔버스 안 아크릴 하늘 안에서 LED소자들이 그려내는 문신문양으로 빛나기도 한다. 이같은 이한수의 독특한 '의미의 성좌'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90년대 후반 유학 시기 쌀그림의 오랜 기간에 걸친 발전된 형태이다. 이 계열의 작업들은 호랑이와 같은 상징물을 차용하는 가운데 천구 혹은 망막처럼 캔버스 형태 자체가 둥글어진다. 가회동 갤러리 마노에서 열렸던 「우로보로스의 꿈」(2006-2007)은 영화 「수면의 과학」의 자막이라든지 데미안 허스트의 원형 그림에서처럼 마치 꿈을 꿀 때 어둠속에 감은 눈으로도 꿈의 영상을 볼 수 있는 것처럼 특수한 신경학적인 것을 연상시키는 센세이셔널한 감각지각을 표현하고 있다. ■ 최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