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질량을 빚다
조지연展 / CHOCHIYUN / 趙智衍 / painting
2013_0731 ▶ 2013_0806
조지연_구름의 질량을 빚다_유채_91×72.7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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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_12:00pm~06:00pm
더 케이 갤러리THE K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6번지Tel. +82.2.764.1389
www.the-k-gallery.com
조지연의 회화-구름에 접촉하고 접신하고 전율하다 ● 작가는 자신이 그냥 편히 느낄 수 있는 조용한 소재들이 좋다고 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딱 그만큼만 살다가 스윽 하고 그냥 그렇게 가버리는 것이 좋고, 흐르면서 고요히 사라지는 것이 참 예쁘다고도 했다. 그래서 구름을 그린다. 구름은 무상하고 무심하다. 형태가 없고 자기가 없다.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고 스스로 내세울 만한 에고가 없다. 에고가 없으니 형태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고, 형태에 자신을 가두지 않으니 스스로도 자유로울 수가 있다. 그렇게 흐르면서 사라질 수가 있다. ● 사실 구름에 형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관념이든 감각이든 만약 형태가 없다면 작가의 그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구름에는 형태가 없기는커녕 지나치게 많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할 만큼 많다. 구름이 만들어 보이는 형태 중에는 지각은 모르되 인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형태들이 많다. 생판 처음 보는 것 같은 형태들이면서도 왠지 친근한 느낌을 자아내는 형태들이다. 그렇게 구름은 형태에 대한 선입견을 재확인시켜줄 뿐만 아니라, 선입견을 넘어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형태를 싸안는다. 세상의 모든 형태들을 그려 보이면서 지각의 깊이를 더하고 인식의 폭을 넓혀준다. 그러므로 구름에 형태가 없다는 말은 사실은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다는 말로 고쳐 읽어야 하고, 특정의 형태로 붙잡을 수 없을 만큼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형태로 고쳐 읽어야 한다. 변화무상한 형태며 움직이는 형태, 정처 없는 형태며 항상적으로 이행중인 형태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조지연_구름의 질량을 빚다_유채_100×80.3cm_2013
항상적으로 이행중인 형태? 스스로를 지우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를 자기 위로 밀어 올리는 형태? 자기를 부정하면서 자기를 생성시키는 형태? 그래서 구름이 무상하다고 했고, 무상하게 흐른다고 했다. 그렇게 무상한 구름이 무상한 삶의 유비가 된다. 알다시피 삶은 영원하지도 영속적이지도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적어도 심정적으로는 삶이 영원하다고 믿고 싶고 영속적이라고 믿고 싶다(실제로 한때 예술은 자기를, 존재를 대신 영속시켜주는 매개체로 여겨지기도 했다). 믿고 싶다? 현실인식보다는 욕망이 삶을 견인하는 계기가 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여기서 무상한 구름이 주지시키는 무상한 삶은 바로 그 욕망의 부질없음과 덧없음을 일깨워준다. ● 존재의 유비와 관련해볼 때 구름은 양가적이다. 구름이 그려 보이는 덧없는 형태만큼이나 존재의 삶은 순간적이고 찰나적이다. 그리고 구름이 그려 보이는 끝도 없이 연이어지는 변화무상한 형태처럼 존재의 삶은 계속 태를 바꾸는 거듭나는 과정 속에서 영원하고 영속적일 수 있다. 순간적으로만 존재했다가 찰나적으로 사라지는 덧없는 형태를 붙잡을 것인가, 아님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기를 생성시키는 덧없지만 영속적인 형태 위에 올라탈 것인가. 존재를 구름의 어디에 어떻게 붙들어 맬 것인가. 이처럼 구름의 양가성은 비록 덧없는 삶이지만 영속적일 수 있는(거듭되는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삶의 양가성을 드러낸다. 작가가 구름에 매료되고 매력을 느끼는 이유일 것이다.
조지연_구름의 질량을 빚다_유채_91×72.7cm_2013
조지연이 처음 구름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2012년 전시부터였고 그때의 전시제목이 『유랑』이었다. 아마도 어떤 우연한 계기에 구름에서 정처 없는 삶이며 부유하는 삶, 떠도는 삶이며 유랑하는 삶의 비유를 보았을 것이다. 아님 그렇게 살고 싶은 욕망을 구름에 투사했을 수도 있겠다. 유목적인 삶의 태도를 은연중 내비친 것인데, 여기서 유목적인 삶은 말할 것도 없이 의식의 유목을 말할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천리를 내다본다는 천리안처럼 거침이 없고 막힘이 없는, 그렇게 저 가고 싶은 대로 가고 흐르고 싶은 대로 흐르는 의식의 유목을 지향하면서 아마도 그 지향을 먼저 실현하고 있는 구름이 부럽고, 그 구름이 떠올려주는 존재의 양태를 삶의 태도로 취하고 싶었을 것이다. ● 그리고 연이은 전시제목이 『구름에서, 구름』이다. 아마도 이 제목은 구름에서 구름으로, 라고 고쳐 읽을 수가 있고 또한 실제로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이 제목은 구름에서 구름으로, 형태에서 형태로, 자기에서 자기에게로 밑도 끝도 없이 이행하는 구름의 양태며 존재의 양태를 떠올려준다. 자기에서 자기에게로 이행한다? 자기에서 자기에게로 확장된다? 자기에서 자기에게로 환원되면서 확장된다? 그 메커니즘 속엔 동어반복의 문법이 탑재돼 있고, 매번 같으면서 다른 것으로의 이행이 수행되고 있고, 자기부정을 통해서 자기를 생성시키는 존재의 운동성이 가동되고 있다. 여전히 자기이면서 매번 자기 아닌 것으로의 이행이 실천되고 있는 것인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거듭나기를 전제로 한 통과의례를 비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비유는 전작에서의 유랑이며 유목의 개념과도 통한다. 그 개념의 실체 아님 실천논리를 해명하고 부연하는 경우로서, 전작에 대한 일종의 주석으로 봐도 되겠다. ●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자신의 그림에 『구름의 질량을 빚다』는 제목을 부쳤다. 이 제목이 의미하는 것은 전작에서의 의미와는 사뭇 다르다. 지금까지는 구름의 변하는 양태며 생리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제는 구름 자체(구름의 본질?)를 그리고 싶다.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형태가 아무리 변해도 여전히 구름일 수 있게 해주는 국면을 그리고 싶고, 구름의 변하지 않는 국면을 그리고 싶고, 구름의 항상적인 국면을 그리고 싶다. 그런데 그 기획은 반어적이고 역설적이다. 무슨 말이냐면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구름은 변하는 형태를 통해서만 자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변하는 형태 자체 곧 변태 자체가 이미 구름의 본질이며 본성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하튼 형태가 변한다면 그렇게 형태를 변하게 만들어주는 어떤 계기가 있을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운동성이 작용하리라고 추정해볼 수는 있다. 여기서 작가는 바로 그 운동성의 계기(그 자체 피직스에 대한 나투라, 자연에 대한 자연성에 그 초점이 맞춰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법과도 통하는)를 그리고 싶다. 아마도 질량이란 그 운동성의 계기를 이르는 다른 이름일 것이다.
조지연_구름의 질량을 빚다_유채_91×72.7cm_2013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이처럼 구름을 그리지만, 사실 처음부터 구름의 감각적 닮은꼴 그대로를 재현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저 구름이라는 관념을 옮겨 그리는 것에 관심이 있었고, 그 관념을 상기시켜줄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구름에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고, 변화무상하고 천변만화한,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형태를 내보이는 구름의 본성을 생각하면 이처럼 감각적 재현보다는 관념에 초점이 맞춰진 구름에 대한 작가의 태도 내지 접근방법에는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다. ● 이렇게 작가는 흔히 운문으로 알려진 구름문양으로 그 감각적 형태를 대신한다. 솜뭉치 같기도 하고 추상적 기호로 환원된 깃털 같기도 한 낱낱의 구름형상들이 텅 빈 대기 속을 표표히 부유하기도 하고, 흡사 원자와도 같고 소립자와도 같은 구름문양들이 하나로 모여 커다랗고 유기적인 형상의 구름 덩어리를 상형하기도 하고, 그 입자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내면서 거대한 흐름을 연출해보이거나 한다. 그 형상은 어디서 어디로 흐르는가. 구름에서 구름으로 흐르고, 구름에서 대기로 흐르고, 구름에서 물로 흐른다. 바로 순환이다. 시도 때도 없이 자기형태를 바꾸는 변태와 더불어, 거듭되는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새로운 형상을 빚을 수 있는 생성과 소멸의 경계 넘나들기로 나타난 존재의 운동성(기의 운동성?)을 실현해 보인다. 그렇게 구름 속엔 대기가 들어있고, 물속에 구름이 들어있다. 그렇게 작가가 그린 구름은 대기 같고 물 같다.
조지연_구름의 질량을 빚다_유채_145.5×112cm_2013
이처럼 지금까지 작가는 구름에서 대기로, 대기에서 구름으로, 그리고 재차 구름에서 물로 순환하고 변태하는 구름의 형상을 그렸다면, 근작에선 구름의 핵(?)을 그린다. 아마도 구름의 질량을 빚는다는 제목에서 질량이란 바로 그 핵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여하튼 형상이 있다면 핵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구름은 그 형상도 종잡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핵을 그릴 것인가. 그럼에도 여하튼 구름의 핵이란 구름의 원형에 해당할 것이고, 따라서 작가의 근작은 그 원형을 그린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림에는 원형이 많다. 구름의 원형을 원형으로 옮겨 그린 것이다. 그 원형은 그 속에 물을 머금은 물 알갱이 같고, 습기를 머금은 대기 같고, 존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고, 존재를 뱉어내는 화이트홀 같다. 물이 생명의 근원임을 생각하면 그 속에 물을 머금은 곧 생명을 머금은 존재의 자궁으로 볼 수도 있겠다. ● 이렇게 작가의 그림은 그저 구름을 그린 것이지만 실상은 단순한 구름의 경계를 넘어선다. 말하자면 구름에서 대기로, 대기에서 물로, 물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원형으로, 원형에서 존재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순환과 변태와 자기부정을 통한 생성의 원리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지연_구름에서, 구름展_2013
조지연_구름에서, 구름展_2013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특이한데, 붓 대신 손가락으로 그리고 손바닥으로 그린다. 캔버스의 표면질감과 물감의 진득한 느낌 그리고 손의 감촉이 하나로 합치되는 어떤 감각적 쾌감에 의해 견인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고, 대상과 내가, 세계와 존재가 거리감 없이 일체화되고 있다는 어떤 느낌에 의해 추동된다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작화방식은 정치한 묘사보다는 정서적이고 유기적인 감정과 느낌 그대로를 오롯이 전달하는 그림에 어울리고, 그 자체가 작가가 그리고 싶은 구름에도 합치된다. 그렇게 손가락으로 때론 손바닥으로 화면을 문지르면서 구름의 질량을 빚다보면 어떤 접신의 경지를 느낀다. 접신의 경지? 주지하다시피 접신이란 알 수 없는 어떤 실체와 합치 내지는 합체되고 있다는 경험이며 느낌에 연유한 카타르시스를 말한다. 알 수 없는 실체? 그에게 구름은 바로 이처럼 처음부터 알 수 없는 실체였다. 작가는 그렇게 진즉에 아님 구름을 그리는 내내 구름의 감각적 닮은꼴이 아니라 구름이 자기의 형상 위로 밀어올린 관념을 그리고 싶었고, 그 관념의 실체에 이르고 싶었고, 그 관념의 몸체를 더듬어 만지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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