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go 에고

                                       김신규展 / KIMSINGYOO / 金新奎 / painting

                                                       2013_0515 ▶ 2013_0521

                                                김신규_ego1_아크릴 채색_91×116cm_201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이즈GALLERY IS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인사동길 52-1)Tel. +82.2.736.6669www.galleryis.com


「에고(ego)」-상처의 옷을 입고 완성된 자아 ● 보색의 원색들이 자유롭게 춤추는 화면. 그 안에서 고불고불한 머리카락을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기울인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인물을 마주한 우리들은 그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과 알 수 없는 신비로움에 이끌려 어느 순간 화면 깊숙한 곳에 이르게 된다. 그는 누구이고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수많은 질문이 오가는 사이 어느덧 그와의 진정한 내면의 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김신규_ego5_아크릴 채색_162×112cm_2012

김신규 수사의 회화 연작 「에고(ego)」를 마주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체험담일 것이다. 조각을 전공했음에도 색을 사용하는데 있어 전혀 두려움이 없는 김신규 수사의 자유로운 회화 작품은 그의 또 다른 달란트를 드러내며 '진정한 나'에 대한 물음을 거침없이 던지고 있다.

                                                 김신규_ego2_아크릴 채색_162×130cm_2012

그의 작품은 「에고(ego)」 즉 '자아'를 주제로 하고 있다. 에고는 정신분석학에서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용어이지만 김신규 수사가 제시하는 에고는 여러 층위의 자아가 소통하며 이루어낸 한 완결체로서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달리 해석된다. 프로이드나 라캉의 이론에 입각한 자아의 해석을 그의 그림에 덧씌우려 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가톨릭 수사(修士)인 그에게 있어 자아에 대한 탐구는 창조주에게 던지는 끊임없는 질문이기도 하기에 그 사유의 범위는 인간의 의식에만 머무르지 않고 초월적인 범주에까지 확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 김신규 수사의 에고는 그리스어 "Εγώ(Ego)"에서 유래한 ego의 본 의미 그대로의 '나, 자아'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더 나아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상처와 그 상처를 매개로 한 소통과 치유의 과정에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자아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그의 「에고(ego)」 시리즈에 담긴 진정한 의미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한 인간의 온전한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에 내비쳐지는 불안, 고뇌, 혼돈, 욕망 그리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받게 되는 상처를 표현하면서도 쾌(快)를 부르는 색채와 유리알처럼 맑고 투명한 눈동자를 통해, 완성된 자아를 꿈꾸는 초월적 인간상을 그려내고 있다. 존재에 대해 자문하는 궁금증 어린 고갯짓과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암시하는 고불거리는 머리카락과 섬세하게 그려진 입술은 모두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길에 맞닥뜨리게 되는 나 자신의 또 다른 모습들이다.

                                                김신규_ego3_아크릴 채색_130×162cm_2012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마치 양파처럼 겹겹이 쌓여 형성된 그의 '에고'는 갖가지 색의 삼각형이나 부드러운 꽃잎 문양으로 장식된 옷을 입고 있다. 나와 타인이 받았을 상처를 표현했다는 오색의 옷은 상처투성이의 자아를 감싸는 동시에 상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다만 그 상처는 고통과 슬픔에만 머무르지 않고 진정한 자아를 일구어 가는데 쓰일 하나하나의 아름다운 삶의 조각들로 제시되고 있다. 이렇게 김신규 수사의 「에고(ego)」는 고통스럽지만 한편으로는 기쁨이기도 한 '참된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 우리를 동참하게 한다. 그리고 진정한 나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통로이자 초월적 존재를 마주하게 될 빛나는 창(窓)인 에고의 눈동자로 우리를 인도한다.

 

 

                                                김신규_ego4_아크릴 채색_112×162cm_2012

상처의 조각들을 이어 지은 옷을 입고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에고는 어쩌면 현존할 수 없는 완전한 자아에 대한 동경을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끝없는 희망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늘 그가 이야기하는 '에고'를 꿈꾸게 된다. ■ 정수경

 

                                                김신규_ego6_아크릴 채색_162×130cm_2012

「에고(ego)」 ● 인간은 누구나 거절 받기를 두려워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상처를 받는다. 누구나 ego (자아)는 있다. 이 자아(ego)는 본질적으로 아이덴디티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물론 환경도 중요하다. 「에고(ego)」를 통해서 어떤 소통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어려운 철학적인 명제나, 미학적인 담론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수도 있다. 상처는 인간을 파멸 할 수도 성장시킬 수도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철학적인 구석이 많다. 상처를 철학적으로 풀어 낼 수 있을까? 특히나 자아(ego)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느낄 수 있을 따름이다. 막연한 믿음일수 있겠지만 느낄 수 있을뿐,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점이 많다. 이 상처들을 통해서 우리는 소통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에고(ego)」들의 상처를 통해서 우리는 현재 이성의 나와 자아(ego)가 소통을 하고 나와 우리가 소통을 한다는 상상을 해본다. 이러한 소통들이 어긋나고 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자아(ego)와 이성이 온전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겐 기본적인 욕망이나, 감정들이 존재한다.

                                                 김신규_ego7_아크릴 채색_91×116cm_2012

이 욕망이나 감정들이 자아(ego)가 가지고 있든, 이성이 가지고 있든 하나의 인격체를 형성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감정과 욕망을 통해서 우리는 소통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감정이나 욕망들은 철학적이다. 발터벤야민은 언어철학을 통해서 미학을이야기 했지만 ,인간의 언어보다 기본적인 앞선 욕망이나 감정을 일차적으로 나는 이야기하고 싶다. 이러한 상처들은 언어로써 전달이 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감정이나 욕망이라는 것이 앞선다. 이 자아(ego)가 가지고 있는 심연의 그 어떤 감정들 말이다. 소통이 불통이 되는 것도 이러한 자아(ego)의 상처로 말미암아 어떤 감정의 단절이 이루어낸 결과가 아닐까? ego는 그 심연에서 좋은 것들도, 나쁜 것들도 꺼내줄 수 있다. 상처를 통해서 이야기하려는 이 자아(ego)는 어떤 존재, 이미지일까? 나는 작업을 통해서 이미지를 연출한다. 이 이미지라는 자아(ego)가 허구일수도 있다. 나에겐 더 절실한 상처받은 에고가 있을 수 있다. 내 안에 있는 자아(ego)는 이러한 욕망이나 감정들을 통해서 소통을 이루고 때론 단절을 이룬다. 여기엔 고독과 고통과 구도자의 성찰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 나는 그런 고독과 고통을 통하여 아이덴디티를 찾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상처와 욕망들을 통해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우리의 삶은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에도 현재 진행형이다. 이미지를 통해서 나 자신의 에고와 우리 각자의 에고를 상상하거나 볼 수 있다. 그것이 허구이든 실제이든 우리는 하나의 꿈을 꿀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욕망과 감정이 있는 꿈 말이다. 자아(ego)가 꿈을 꾸고 우리 이성은 그걸 현실화 시키는 꿈 말이다. 여기에서도 자아(ego)와 우리의 이성은 소통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 꿈들을 이루기위해서 심연에 존재하는 욕망과 감정들의 상처가 내안에 있는 자아(ego)의 우주 안에 덩어리처럼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한 소통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것이다. ■ 김신규

Vol.20130515a | 김신규展 / KIMSINGYOO / 金新奎 / painting

 

 

 

(8) 31갤러리 T 322-1290

김현정전 4.1-5.7 / 핑크 아틀리에전 5.8-5.14 / 김명옥. 이수애. 최정희. 홍혜선 4인전 5.15-5.21 / 대한민국 아사달회전 5.22-5.28 / 박병인전 5.29-6.4

(69) 57th갤러리 T 733-2657

(1전시실) 하왕기전 5.1-5.7 / 조용숙전 5.8-5.14 / 퀼트 작품전 5.15-5.21 / 이은주전 5.22-5.28 / 백지혜전 5.29-6.4

(2전시실) 박선양전 5.22-5.28

(41) 가가갤러리 T 725-3546
봄봄봄전 5.1-5.14 / 스프링전 5.15-5.21 / 3인전 5.22-5.28

(2) 가나아트스페이스 T 734-1333
(1층전시장) 최바다전 5.1-5.6 / 박현웅전 5.8-5.13 / 전호영전 5.15-5.20 / 김영준전 5.22-5.27 / 박인희전 5.29-6.3
(2층전시장) 신혜숙전 5.1-5.6 / 오정미전 5.8-5.13 / 강진이전 5.15-5.20 / 정효진전 5.22-5.27 / 최봉혜전 5.29-6.3
(3층전시장) 이고은전 5.1-5.6 / 이동준전 5.8-5.13 / 박인옥전 5.15-5.20 / 구주연전 5.22-5.27 / 김정은전 5.29-6.3

(10) 가람화랑 T 732-6170
상설전

(59) 갤러리가이아 T 733-3373
김자연전 4.24-5.5 / 박태성전 5.8-5.14 / 이해경전 5.15-5.27 / 심여란전 5.29-6.4 / 이지영전 5.29-6.4
 
(22) 갤러리 각 T 737-9963

어린이날전 5.1-5.7 / 한형배전 5.8-5.14 / 팝+콘전 5.15-5.21 / 동행전 5.22-5.28

(15) 갤러리 그림손 T 733-1045
김문석전 5.1-5.7 / 황나현전 5.8-5.14 / 정진아전 5.15-5.21 / 한동옥전 5.22-5.28 / 박재연전 5.29-6.4
 
(49) 갤러리 나우 T 725-2930
이효은전 5.1-5.14 / 문화포럼뉴비전전 5.15-5.21 / 관점과 사유전 5.22-5.28 / 제1회 단국대 건축학과(DUCA) 건축학과 건축사진전5.29-6.4

(47) 갤러리 대아 T 725-2550
상설전

(57) 갤러리 더케이 T 764-1389
(1전시실) 심영신전 5.1-5.7 / 최서윤전 5.8-5.14 / 심미경전 5.15-5.21 / 류은경전 5.22-5.28 
(2전시실) 에밀리영전 5.1-5.7 / 윤소연전 5.8-5.14 / 이한비전 5.15-5.21 / 신희섭전 5.22-5.28

(44) 갤러리 라메르 T 730-5454
(제1전시실) 민남순전 5.1-5.7 / 하이 파이브전 5.8-5.14 / 김정자전 5.15-5.21 / 김기선전 5.22-5.28 / 차명순전 5.29-6.4  
(제2전시실) 이영미전 5.1-5.7 / 이집트 여행전 5.8-5.14 / 전소빈전 5.15-5.21 / 조숙희전 5.22-5.28 / 차종순전 5.29-6.4
(제3전시실) 송옥자전 5.22-5.28
(제3-4전시실) 선학회전 5.1-5.7 / 그린퀼트전 5.15-5.21
(제4-5전시실) 월봉 민화전 5.22-5.28
(제5전시실) 최종관 채화칠기전 5.1-5.7 / 동국대 불교미술전 5.15-5.21 

(제3-5전시실) 신미술회전 5.8-5.14 / 인천민화협회전 5.29-6.4
 
(54) 갤러리 룩스 T 720-8488
최병관 사진전 5.1-5.7 / 정말희 사진전 5.8-5.14 / 백형욱 사진전 5.15-5.21 / 정수희 사진전 5.22-5.28

(40) 갤러리 메쉬 T 730-5321

박환웅전 5.8-5.17

(71) 갤러리 바움 T 720-4237
상설전

(38) 갤러리 바이올렛 T 722-9655

이성완전 5.1-5.14 / 봄날의 노스텔지어전 5.15-5.28

(72) 갤러리 베아르떼 T739-4333
라틴 컨템포러리 아트전 5.1-5.19

(25) 갤러리 서호 T 723-1864

안정희 서양화전 4.24-5.1 / 청도염색전 5.2-5.14
 
(37) 갤러리 수 T 733-5454
 박용주전 5.1-5.7 / 이승문전 5.8-5.14 / 박윤남전 5.15-5.21 / 함께하는 전시6인전 5.22-5.28 / 정태희전 5.29-6.4

(30) 갤러리 시작 T 735-6266-7
창작동화 미출판 원화전 5.1-5.12 / 용산국제고등학교 졸업생전 5.13-5.20 / 원니스 인 다이버시티전 5.29-6.4

(34) 갤러리 신상 T 730-6540
메이아트 페스티발전 5.1-5.7 / 나나리타영전 5.8-5.14 / 임희숙침선방전 5.15-5.21 / 메이러브 기프트전 5.22-5.28 / 블루칩 아티스트전 5.29-6.4
 
(12) 갤러리 아트뱅크 T 737-0321
상설전

(28) 갤러리 아트플러스 T 732-7710
원로작가 소장전

(1) 갤러리 예당 T 732-5364

차와 함께하는 공예선물전 5.1-5.28

(21) 갤러리 올 T 720-0054

선면회전 5.1-5.7 / 박수정전 5.8-5.14 / 현혜경. 명경자 2인전 5.15-5.21 / 목연회전 5.22-5.28

(16) 갤러리 우림 T 733-3738
박일용전 5.29-6.11

(6) 갤러리 이즈 T 736-6669
(제1전시장) 김래형전 5.1-5.7 / 윤정숙전 5.8-5.14 / 김신규전 5.15-5.21 / 조숙전 5.29-6.4
(제2전시장) 행복한 우리 민화전 5.1-5.7 / 김예성전 5.8-5.14
(제3전시장) 안소윤전 5.1-5.7 / 양홍규 사진전 5.8-5.14 / 오감여정전 5.15-5.21 / 김주연 도예전 5.29-6.4
(제4전시장) 우성철 유리공예전 5.1-5.7 / 홍지희 조각전 5.8-5.14 / 정종범 유리공예전 5.15-5.21 / 신예진 조각전 5.29-6.4

(전관) 오토픽션:한국화의 유혹과 저항전 5.22-5.28

(73) 갤러리 일호 T 6014-6677
우제길전 4.25-5.1 / 아트놈전 5.2-5.8 / 남경민전 5.9-5.15 / 한기창전 5.16-5.22 / 김영화전 5.23-5.29

(71) 갤러리 타블로 T 723-6081
(55) 갤러리 토포하우스 T 722-9883, 738-7555
(1전시실) 박종우사진전 5.1-5.14 / 김성혜 송진영 2인전 5.15-5.21 / 김나정 섬유공예전 5.22-5.28
(2전시실) 위나우전 5.1-5.7 / 엄경근 서양화전 5.8-5.14 / 박성근전 5.15-5.21 / 이인영 사진전 5.22-5.28
(3전시실) 지승배 서양화전 5.1-5.7 / 교감전 5.8-5.14 / 신용덕 서양화전 5.15-5.21 / 수원대 미술대학원 화예조형학전 5.22-5.28

(39) 갤러리 환 T 735-7047
범최 전 5.1-5.7 / 엄연화전 5.8-5.14 / 박성숙전 5.15-5.21 / 이즘전 5.22-5.28 / 칠색회전 5.29-6.4
 
(27) 갤러리M T 735-9500
먼지신혜전 5.1-5.7 / 부디스토리전 5.8-5.14 / 모아스님전 5.15-5.21 / 이목일전 5.22-5.28 / 한국미술인회전 5.29-6.4
 
(9) 경인미술관 T 733-4448(ARS9)
(제1전시관) 조영랑 서예(문인화)전 5.1-5.7 / 빛뜨란 닥종이 인형전 5.8-5.14 / 김군자 서예전 5.15-5.21 / 민은숙 서예(문인화)전 5.22-5.28
(제2전시관) 박신영 옻칠화전 5.1-5.7 / 박미선 회화전 5.8-5.14 / 제1회 PTIA협회전 5.15-5.21 / 한국식물화가협회 공모전 5.22-5.28
(제3전시관) 토탈 악세사리전 5.1-5.7 / 유정혜 회화전 5.8-5.14 / 박광희 회화전 5.15-5.21 / 강상구 서예(문인화)전 5.22-5.28
(아틀리에) 한국 꽃 누르미 작가회전 5.1-5.7 / 김려현 회화전 5.8-5.14 / 오월애 공예 소품전 5.15-5.21 / 정승기 서양화전 5.22-5.28
(제5전시관) 정경숙 서양화전 5.1-5.7 / 김신주 수채화전 5.8-5.14 / 지오선 서양화전 5.15-5.21 / 소아암 어린이 미술치료전 5.22-5.28
(제6전시관) 김민선 서양화전 5.1-5.7 / 제1회 다린회전 5.8-5.14 / 아틀리에 세난 포슬린아트전 5.15-5.21 / 블루밍로렌 포슬린 페인팅전 5.22-5.28

(43) 공아트스페이스 T 730-1144
(1F) 황호섭전 5.2-5.12 / 송창애전 5.29-6.8
(2F) 정두섭전 5.29-6.4 
(3F) 이만일전 5.22-5.28
(1-2F) 이희중전 5.22-5.28
(2-3F) 목가구전 5.1-5.21 

(68) 공평아트센터 공평갤러리 T 3210-0071
(제2전시실) 김태규전 5.8-5.14 / 서울아카데미전 5.22-5.28

(제1-2전시실) 십이지상전 4.24-5.7 / CNC전 5.15-5.21

(특별관) 금동원전 5.15-5.21
 
(51) 관훈갤러리 T 733-6469
(1층) 이후창 유리조각전 4.20-5.2

(3층) 김용국 설치전 5.1-5.7

(전관) 홍순환 설치전 5.15-5.28
 
(61) 나무갤러리 T 2011-1995
간화선 중흥을 위한 선서화전 4.23-5.3

(32) 노암갤러리 T 720-2235-6
건국대 현대미술전공전 5.8-5.14 / 정두화전 5.15-5.28 / 김희정전 5.29-6.4
 
(5) 노화랑 T 732-3558

(19) 단성갤러리 T 735-5588
상설전

(26) 덕원갤러리 T 723-7771

(60) 동덕아트갤러리 T 732-6458

(A실) 허정수전 5.22-5.28

(전관) 동덕여대 패션디자인과 졸업전 5.15-5.21 / 동덕여대 미디어디자인과 졸업전 5.29-6.4

(65) 동산방화랑 T 733-5877

(46) 동호갤러리 T 722-3665
상설전

(29) 리서울 갤러리 T 720-0319
조현각전 5.15-5.28
 
(20) 모던화랑 T 732-6261
원로중진소장품전

(11) 모인화랑 T 739-9292
더 플라워즈전 5.29-6.4 

(58) 목인 갤러리 T 722-5055
대광미술 어제와 오늘 : 65전 5.1-5.14

(67) 물파스페이스 T 739-1997-8
석용진전 5.8-5.28 / 우재순전 5.29-6.4
 
(4 ) 미술공간 현 T 732-5556

(47) 백송갤러리 T 730-5824
컬렉션전

(52) 백악미술관 T 734-4205
(1층) 모란회민화전 4.25-5.1 / 이은숙 서예전 5.9-5.15 / 강암서예대전 5.16-5.22 / 예문와전 5.23-5.29
(1.2층) 한신서전 5.2-5.8 / 제6회 경묵회전 5.30-6.5

(50) 보나장신구박물관 T 732-6621
찬란한 빛, 장신구전 5.29-8.4

(70) 사비나미술관 T 736-4371
아티스트의 포트폴리오전 3.20-6.30

(31) 서울미술관 T 732-3314
(A관) 정수현전 5.8-5.14

(B관) 더 소토리 오브 호라이(horai)전 5.8-5.14

(전관) 현대한국화협회전 5.1-5.7 / 국전작가회전 5.15-5.21 / 한국여성작가협회전 5.22-5.28 / 한국회화의 위상전 5.29-6.4
 
(42) 선화랑 T 734-5839

김재학전 5.15-5.31

(48) 성보갤러리 T 730-8478

최정 회화. 설치전 5.8-5.14 / 알랑가몰라전 5.22-5.28

(62) 아라아트 T 743-1643

(3) 영아트갤러리 T 733-3410

한 집 한 그림전 5.1-5.14 / 한국화 젊은 모색전 5.15-5.28

(66) 예성화랑 T 738-3630
세계 거장 판화전

(13) 유니아트갤러리 T 723-7170

백남준외 소장품전
 
(7) 이음아트 인사 T 736-8811

(18) 인사갤러리 T 735-2655-6

(53) 인사아트센터 T 736-1020
(JMA스페이스 B1F) 문재성전 5.1-5.6 / 류명기전 5.8-5.13 / 권성수전 5.15-5.20 / 공예문화협회전 5.22-5.27 / 박상규전 5.29-6.3 
(제3 특별관 B1F) 선종훈전  5.1-5.6 / 최윤미전 5.8-5.13 / 신수원전 5.15-5.20 / 김상희전 5.22-5.27 / 김민정전 5.29-6.3
(본 전시장 1F) ) 신현규전 5.1-5.6 / 엄길자전 5.8-5.13 / 홍은양전 5.15-5.20 / 이창남전 5.22-5.27 / 조명호전 5.29-6.3
(제2전시장 2F) 김숭열전 5.1-5.6 / 이영희전 5.8-5.13 / 조현계전 5.15-5.20 / 옮겨진 풍경들전 5.22-5.27 / 이동환전 5.29-6.3
(제3전시장 3F) 윤두진전 5.1-5.6 / 박해룡전 5.8-5.13 / 배달래전 5.15-5.20 / 홍경표전 5.22-5.27 / 윤길영전 5.29-6.3

(제1특별관 3F) 조문희전 5.1-5.6 / 김주령전 5.8-5.13 / 이종숙전 5.15-5.20 / 권대열전 5.22-5.27 / 김미란전 5.29-6.3
(제4전시장 4F) 천년의 내밀한 기억전 5.1-5.6 / 김현 전 5.8-5.13 / 여주경전 5.8-5.13 / 제8회 소목장 박명배와 그의 제자전 5.15-5.20 /

                     서울금공예전 5.22-5.27 / 김품창전 5.29-6.3
(제2특별관 4F) 최경미 금속공예전 5.1-5.5 / 김수진전 5.8-5.13 / 김민정전 5.15-5.20 / 염윤숙전 5.22-5.27 / 비욘드7전 5.29-6.3
(제5전시장 5F) 황정일전 5.1-5.6 / 김경신전 5.8-5.13 / 이장미전 5.8-5.13 / 느림을 배우는 정원전 5.15-5.20 / 권성녀전 5.22-5.27
(제6전시장 6F) 선재스님의 사찰음식문화전 5.1-5.6 / 운사회전 5.15-5.20 / 주수양전 5.22-5.27

(제5-6전시장 5-6F) 한국여류화가협회전 5.29-6.3
 
(14) 장은선갤러리 T 730-3533
김근배.박선영 2인전 5.1-5.11 / 박현옥 서양화전 5.15-5.25
 
(36) 조형갤러리 T 736-4804
정경석전 5.1-5.7 / 전통여성작가회전 5.8-5.14 / 생묵회전 5.15-5.21 / 서석환전 5.22-5.28

 

(75) 탑골미술관 T 6911-9651

춘, 익숙한 것을 되돌아 봄전 5.16-6.28
 
(23) 통인가게 T 733-4867

(통인화랑) 전민영 도자전 5.1-5.7 / 각양각색전 5.8-5.28
(통인옥션갤러리) 김구림 회화전 4.2-5.5 / 성백주 회화전 5.8-5.26

(35) 하나로갤러리 T 720-4646
신맥회전 5.1-5.14 / 아카데미미술협회전 5.22-5.28 / 동행전 5.29-6.4
 
(56)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T 733-9041

(45) 화봉갤러리 T 737-0057

민족의 꿈과 창의의 샘 한국 문학작품 산책전 5.1-5.29

(17) JH갤러리 T 730-4854

상설전


(63) OCI미술관 T 734-0440
이지영전 5.9-5.29 / 이현호전 5.9-5.29

(64) space99 T 735-5811-2
윤동희전 4.30-5.9 / 이재환전 5.14-5.23



                                               프레스코화의 방법적 모색

                                          김문석展 / KIMMOONSEOK / 金文錫 / painting

                                                          2013_0501 ▶ 2013_0507

 


 

 

김문석_civilization – multivision2013_fresco on panei_187×685cm_2013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갤러리 그림손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Tel. +82.2.733.1045~6www.grimson.co.kr


김문석의 신작 : 「문명시리즈」에 부쳐●

일반적으로 프레스코화는 겉으로 드러내는 색상의 힘이 유화나 아크릴 물감처럼 강렬하지는 않지만

은은하고 세련된 느낌을 갖고 있으며, 그 수명은 매우 길어서 1000년 이상 지속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 세월의 장구함에서 프레스코의 방식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는데, 우선 프레스코화는 안료가 접착제에 의해서

표면에 부착되는 형식이 아니라 벽면위에 발라진 석회 반죽이 안료 그 자체를 흡수하여 장시간 보관하면서

빛의 굴절에 의해 색을 뿜어내기 때문에 색채가 투명하며, 그 수명이 일반적인 안료 부착형 회화와는 비교될 수 없는

강인함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들은 선배 화가들이 개발해온 벽화나 천정화의 기법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대에 와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러한 방식이 잘 계승되지도 않고, 그 기법을 전수받는 화가들도 매우 드물다.

 


김문석_civilization2013_fresco on panei_181×273cm_2013

 

김문석_civilization2013_fresco on panei_91×181cm_2013

 

김문석_civilization2013_fresco on panei_91×181cm_2013

작가 김문석이 현재 진행 중인 「문명」 시리즈의 작품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프레스코화풍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스타일로서, 프레스코의 화면 위에 원형, 직선형 등의 이미지들을 새기는 작업을 해왔다.

이러한 다양한 이미지들이 고고학적인 문양처럼 각인되어 마치 현대인의 고고학적인 기록화와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방식들이 그 주류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작가는 이러한 유형에 커다란 변화를 이룩하는데, 그것은

현대회화의 표현방식을 두루 혼합하고 색다른 방식으로 개척하여 프레스코기법과 현대적인 회화의 기법을

접목하는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랜덤하기도 하고 의도적이기도 한 이미지가 서려

있는 다갈색의 화면 즉, 자연친화적인 프레스코의 원시적인 화면 위에, 대기업의 브랜드마크와 같은 디자인

적이며 기하학적인 현대의 물질문명의 기호들을 나열형으로 병치시킴으로써, 순수예술의 방식과 디자인의

방식을 접목하여 시대를 초월한 미묘한 정서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김문석_civilization2013_fresco on panei_91×91cm_2013



김문석_civilization2013_fresco on panei_91×91cm_2013

「문명」시리즈의 회화들은 이처럼 다양한 기호의 나열과 같은 올오버의 표현방식들을 도입하면서 다원주의

와 글로벌리즘을 형성하고 있는 오늘날의 시대적인 담론을 제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치 신구의 만남 속에서

펼쳐진 드라마틱한 변화인데, 묵직함과 가벼움, 비정형과 정형, 토속성과 현대성을 하나의 화면 위에서 대구적

으로 등장시킴으로써, 그 표현 기호의 충돌을 야기 시킬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창궐한 물질문명의 화려함과

그 이면적 허상을 동시에 표출하고 있다.



김문석_civilization2013_fresco on panei_181×181cm_2013

이러한 이미지의 충돌은 자신이 학부졸업 이후 장기간 이룩해온 프레스코 화풍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지적메시지를 담는 그릇으로서 자신의 화풍을 새롭게 펼쳐 보임으로써, 새롭고도 실험적인 도전적

스타일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작가의 신작들은 전통과 현대의 만남, 혹은 화해의 장을 유추해냄으로써,

새로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즉, 글로벌리즘 시대의 우리의 삶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과정

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결과처럼 보인다. ■ 박기웅

                                                                                     OBLIVION ; Being forgotten 

                                                             이동준展 / LEEDONGJUN / 李東俊 / photography

                                                            2013_0508 ▶ 2013_0513

 

이동준_OBLIVION, HAVANA #4_피그먼트 프린트_90×60cm_2013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0727e | 이동준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3_0508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GANA 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3층Tel. +82.2.734.1333www.ganaartspace.com

도시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해간다. 빠르게 변해가는 도시의 이면에는 소외되고 잊혀져가고 그리고 사라져가는 것들이 있다.

그 속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치가 있는데, 그것은 도시의 모습처럼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서울, 하바나 두 도시를 작업하면서 크고 화려함 보다는 오래되고 낡은 대상들을 담아보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져 가는 추억들, 그 기억들을 들춰내 본다. ■ 이동준

 

이동준_OBLIVION, HAVANA #6_피그먼트 프린트_90×60cm_2013

 

이동준_OBLIVION, HAVANA #7_피그먼트 프린트_90×60cm_2013

 

이동준_OBLIVION, SEOUL #3_피그먼트 프린트_90×60cm_2010

 

이동준_OBLIVION, SEOUL #4_피그먼트 프린트_90×60cm_2010


Fading Out

연진展 / YEONJIN / 延珍 / painting 2013_0417 ▶ 2013_0423

 

연진_내버려 둘 순 없을까 Leave me alon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3×54.5cm_2013

 

초대일시 / 2013_0417_수요일_05:00pm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석사청구展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GALLERY IS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인사동길 52-1)Tel. +82.2.736.6669www.galleryis.com

 

 

우리가 소통할 수 있는 창이 반드시 설명적이여만 하는 것일까. 몇 가지 단어와 몇 가지 형태만으로도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는 것. 그것이 반드시 맞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틀리기 때문에 오히려 재미있는 의외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것. 그것이 추상의 묘미가 아닐까 한다. 미술을 오래 하거나 관심을 꾸준히 가져온 사람이 아니고서는 추상미술을 접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이게 뭔가", "나도 하겠다" 혹은 "너무 단순해서 이해하기 어렵다"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아티스트를 연출가, 미술 작품이 공연이라고 생각해 봤을 때 관객에게 상상력의 여지를 준다는 측면에서 추상미술은 관객과 호흡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미술 형태가 아닐까 한다. 보는 이가 누가 되었든 누군가로부터 내 그림을 보면서 무언가가 상상된다 혹은 어떠한 느낌이 난다는 등 다양한 감상평을 듣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는 것 같다.

 

연진_Stressful turtl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5×54.5cm_2013

 

 

연진_스트레스풀 Stressful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72cm_2013

 

픽셀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모습을 보면 복잡하고 스트레스로 가득한 우리 사회와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이 많은 사회 풍토 속에서 조금이라도 나아 보이려는 레벨의식에 젖은 채, 높고 좁은 등용문 앞에 아글따글 모여든다. 이래저래 날이 선 정신력이 요구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게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인생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사로운 것들에 집중하게 되어 여유를 가지고 숲을 보는 능력은 거의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 나는 길게 변형된 형태의 픽셀들을 나열하는 작업을 통해 이처럼 복잡하고 삭막한 하루하루 속에서 잃어가고 있는 여유와 소소한 낭만을 일깨우는 시도를 하고자 하였다. 픽셀을 나열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공통적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형태를 갖추고 있어 이것을 fading out으로 규정했다. 축약해서 F.O.으로 이름 붙이기도 했던 이 기법은 사회에서 내가 겪고 있는 심리적 갈등을 풀어주는 열쇠가 되기도 하였다. 복잡하게 얽혀 나열된 픽셀들이 서서히 공간을 내어가며 흩어져 가는 방식으로 스트레스적인 상황의 긴장을 완화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좁게 무의식적으로 방향성 없이 나열된 픽셀들은 점점 진공상태에서 자신만의 방향으로 부유하게 되고 그것들을 통해 비로소 세속적인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연진_파티 Part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5×72.5cm_2012

 

 

연진_F.O. 잔해 #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0cm_2013

F.O.기법은 카테고리가 다소 포괄적인 만큼 다중적인 연출법을 지닌다. 기본적으로 긴장을 완화한다는 시도는 공통분모적으로 존재하지만 진공상태의 연출과 더불어 붕괴에서 오는 카타르시스적인 장면의 연출을 시도하고 있기도 하다. 재난영화나 재앙적 상황에서 관찰될 수 있는 붕괴 장면은 주로 비장한 현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사회의 극단적인 상황과 맞물려 강한 공감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이런 내용적인 기능을 떠나 붕괴 자체를 놓고 보면 이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된 상황을 타파하는 듯한 쾌감을 주는 심리적 기능을 하기도 한다. 이는 인간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잠재된 파괴본능을 건드리기도 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정리되고 획일화 되어 있는 현재 사회 풍토에서 인간이 가진 파괴 본능은 다소 숙명적으로 여겨진다. ■ 연진

 

 

                                                   연진_F.O. 잔해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5×54cm_2013

JUMP OF NEW ARTIST 3부 : 이주현, 이제우

 

2013.4.17-4.23

노암갤러리

 

 

 

1전시실 : 이주현 LEE Juhyun

이주현은 생물의 기관과 기관사이의 연결을 생략 하거나, 위치 전이에 의한 이질적인 구성을 통해 생명체
내부에 잠복되어 있는 이미지들을 보다 직접적이고 촉각적으로 보여 줄 수 있게 유도 한다.

2전시실 : 이제우 LEE Jewoo

"가벼우면서 무거운 그림"
종이와 연필, 그리고 낙서.
이제우의 가벼운 소재와 방식으로 무거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작업은, 우리 삶에서 만나게 되는 역설처럼 언제나 낯설다.

Macguffin Desire

권여현展 / KWONYEOHYUN / 權汝鉉 / painting 2013_0307 ▶ 2013_0428 / 월요일 휴관

 

권여현_권여현_코나투스의 숲 Conatus forest_캔버스에 유채_194×259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0203d | 권여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3_0307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p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OCI Museum Of Art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Tel. +82.2.734.0440www.ocimuseum.org

 

혼성의 숲, 이성과 욕망 사이로 틈입하기 ● 권여현은 전방위의 작가이다. 1980년대 작가로 데뷔한 이래 그는 회화, 사진, 드로잉, 입체, 설치, 퍼포먼스, 영상을 넘나들며 엄청난 작품을 쏟아내었다. 그의 거침없는 생산력은 국내외에서 가진 30여 차례에 이르는 개인전을 통해 이미 입증되었다. 그의 이 왕성한 생산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농담처럼 그의 특이한 습관에서 그 이유를 찾기도 했다. 말하자면 눈으로는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한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받으며 다른 손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식이다. 이 말은 그의 모든 감각기관이 외부세계로 향해 열려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한마디로 그는 눈, 코, 입, 귀는 물론 혀, 손과 발, 피부 등 모든 신체를 동원해 현상과 본질, 자아와 타자를 보고 듣고 느끼고 분석하고, 해석한다. 이런 점은 그가 욕심이 아주 많은 작가임을 밝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언젠가 나는 그의 회화를 보며 '이미지의 공화국'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지금 다시 그의 작품을 보니 그가 작품 속에서 운영하는 세계는 공화국이 아니라 연방이란 생각이 든다. 그것도 이미지는 물론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의 인문학이 서로의 입과 꼬리를 물고 있는 거대한 조합으로서의 연방 말이다. 그 근거로서 그의 작품에서 다양성과 혼종성이 특히 두드러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풍부하면서 다면적이고, 또한 다변(多辯)이기도 한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것은 혼성의 병렬이자 중첩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모더니즘 미술을 지배했던 순혈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이단이지만 잡종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으로는 해방지대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해 그의 그림은 과잉되고 복잡하며 열정적이면서도 냉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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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현_Rhizome waterfall_캔버스에 유채_194×259cm_2012

최근에 완성한「코나투스의 숲」이란 작품을 예로 들어 보자. 배경은 장소가 불특정한 숲이다. 이 숲에 거주하는 존재는 우로보로스(ουροβóρος)라 불리는 뱀이다. 이 뱀은 마치 신수(神樹)처럼 화면의 중심을 수직으로 가르며 분할하고 있는 나무를 칭칭 감고 있다. 타원형으로 똬리를 튼 뱀의 영역 속에 인간이 있다. 머리카락이 뱀으로 이루어진 메두사의 머리를 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헤르마프로디테의 모습을 한 스피노자(Baruch Spinoza)가 이 비밀의 숲에서 에덴동산의 최초의 인간처럼 벌거벗은 채 서로 마주보고 있다. 그 옆에서 뱀이 아가리로 집어삼키려고 하는 인물은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이다. 그 아래에서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얼굴만 슬쩍 내밀고 있고 국보83호 금동보살반가사유상이 느닷없이 출몰하고 있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매혹적인 춤을 추고 있는 인도의 무희가 등장하고 아래에 당나귀의 네 발에서 뿌리가 자라고 있다. 이미지 자체로는 초현실주의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신비롭고 환상적이다. 그러나 화면 아래 부분의 문자는 이 꿈같은 이미지가 엮고 있는 구조에 대한 냉정하고 지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우로보로스란 뱀을 받치고 있는 것은 롤랑 바르트가 1967년에 출간한『모드의 체계(SYSTÈME DE LA MODE)』이란 책이다. 그 아래에는 라틴어로 '코나투스', 그리스어로 '우로보로스'라고 적힌 책이 놓여 있다. 이 지경이라면 이 그림은 이제 더 이상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 되고 만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미지로 쓴 철학전서(哲學典書)와도 같은 것이라고 할까. 게다가 끊어지지 않고 순환하는 구조를 상징하는 기호까지 등장하고 있으니 난감하기 그지없다. 회화는 해석되는 것이지 설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마법처럼 이 난해한 이 이미지의 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동원하고 있는 개념들을 하나하나 짚어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 기술하지 않은 하나의 이미지가 이 그림의 의미를 해석하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물에 포획 당한 채 누워있는 저 젊은 여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게다가 그녀는 벌거벗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아니면 최면에 걸린 것인가.

 

권여현_신화의 신전 The shrine of Myth_사진에 유채_98×154.2cm_2013

권여현은 최근에 제작한 작품을 관류하는 키워드로 코나투스(conatus), 영원회귀, 모나드(monad), 나선형 순환구조, 양가성, 거울상 단계, 응시, 실재계의 찡그림, -맥거핀(macguffin), 욕망, 이데올로기가 아닌 헤게모니 등을 제시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작품의 제목과도 연관되는 코나투스는 물론 스피노자가 말했던 '자아를 보존, 발전, 완성하려는 욕구이자 의지'이다. 따라서 제목이 지시하는 의미 그대로 따라간다면「코나투스의 숲」은 생이 지속되는 세계이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정치체제를 통해 최고의 코나투스를 발휘할 수 있는 있다고 했으므로 이 숲은 흑암과 혼돈의 세계가 아니라 조화로운 관계로 이루어진 세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화면은 혼란스럽고 거친 붓질의 흔적이 두드러지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결코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우로보로스와 나무에서 흘러나오는 줄기에 감겨 있다. 아가리로 꼬리를 물고 커다란 원을 그리고 있는 우로보로스는 시작이 곧 끝이고 끝은 다시 시작과 연결된다는 의미에서 윤회사상 또는 영원성을 상징한다. ● 사실 고대 사회에서 자연현상과 그 지역의 기후조건에 따라 이런 종류의 신화는 많은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탐무즈(Tammuz)와 이슈타르(Ishtar) 여신에 얽힌 신화는 건기와 우기란 계절에 낳은 순환구조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다. 해가 서쪽으로 지는 현상, 달이 차면 기우는 현상을 관찰하며 탄생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상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뭄과 홍수가 반복되는 현상을 보며 자연의 순환원리에 대해 인식했던 인간은 마침내 불변하는 영원성의 문제까지 상상했던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것을 상형으로 표현했다. 예컨대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 라(Ra)는 호루스처럼 사람의 몸에 매의 머리를 한 상상의 동물이자 신으로서 머리 위에 이고 있는 붉은 태양의 테두리를 뱀이 감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뱀의 탈피를 관찰하며 그것에서 낡은 육체를 버리고 새로운 육체를 얻는다고 생각하여 탄생과 죽음의 결합을 계속 순환하는 부활을 상징하는 우로보로스를 만들어냈다. 시간의 항구성에 대한 은유는 초기 그리스도교파의 하나인 그노시스파에게도 계승되었다. 그들은 아가리로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를 세계가 모두 하나라는 관념을 표현하는데 활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활용했다. 중세 연금술에서는 우로보로스를 처음과 끝을 동시에 지닌 존재로 파악하여 형이상학적 기호인 'O'으로 표현된 '현자의 돌'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여겼다. 이렇게 볼 때 우로보로스는 창조, 영원, 무한, 불사, 완전성은 물론 변화를 의미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코나투스의 숲」은 영원히 반복되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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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현_Ophelia and Net hunte_캔버스에 UV 프린트_89.4×130.3cm_2012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성장을 위해 알의 껍데기를 깨고 천사이자 악마로서 아브락사스(Abraxas)란 이름을 지닌 신을 향해 날아가야 한다고 했지만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결코 우로보로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즉 죽음이 비영속적인 삶으로부터 영속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반복의 구조 속으로 회귀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권여현은 화면 속에 둥근 원을 그리며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은 물론 니체와 스피노자를 호출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권여현이 제시한 키워드의 하나인 '영원회귀'와 만날 수 있는 접점이기도 하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야말로 디오니소스적 탄생의 순간을 의미하지 않는가. 독실한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신을 죽여 버린 그는 자기의지를 지닌 완전한 존재인 초인을 맞이하여 선악의 피안을 넘어서고자 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영원회귀는 디오니소스적 상태에서 자아를 잊어버리고 초개인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으로 탄생하는 그 '순간'이다. 그 순간에 형이상학적 예술도 태어난다. 그렇다면 권여현이 그려놓은 코나투스의 숲은 영원하고 안정된 지상낙원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활성공간이다. 순간들이 요동치고 있으므로 드라마가 발생하며 유지의 욕구인 코나투스 또한 활성화된다. 그러나 운명의 사슬인 우로보로스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니체와 스피노자의 우연하고도 이상한 만남 또한 그물 속에서나 가능하다. 그물은 정신이나 육체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연결하는 장치이다. 따라서 그물은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緣起)이거나 인타라망(因陀羅網)으로 볼 수도 있다. 연기는 태어나고 죽는 인간의 실존을 불교적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비스듬하게 누운 채 잠들어있는 여성의 신체를 감고 있는 그물, 요염한 춤을 추고 있는 무희 압살라를 휘감고 있는 그물이 원인과 결과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그러나 그의 작품을 논리적인 구조로 해석하려고 할 경우 그가 걸어놓은 덫에 걸려들고 만다. 왜냐하면 이 그물은 단순히 이미지를 포획하는 도구가 아니라 일종의 미끼이기 때문이다. 미끼라! 그러고 보니 그가 제시한 키워드 중의 하나가 바로 속임수, 미끼를 의미하는 맥거핀이지 않는가. 공포영화의 거장인 히치콕 감독이 사용한 영화기법이기도 한 맥거핀은 작품 줄거리에는 영향을 주지 않지만, 관객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묶어 둠으로써 공포감이나 의문을 자아내게 만드는 영화 구성상의 속임수를 의미한다. 그래서 니체, 스피노자, 쇼펜하우어, 데리다, 금동반가사유상과 압살라가 한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사용한 '낯설게 하기', 즉 데페이즈망(depaysement)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작품 속의 이미지를 독해하기 위해 철학책을 뒤적거려야 했던 우리는 그가 만들어놓은 코나투스의 숲이란 혼성의 연방에서 조난당한 꼴이다. ● 이런 눈속임은 많은 작품에 나타난다.「잔 다르크의 숲」에서 잔 다르크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그녀는 메두사이거나 환호하는 원더우먼에게 보란 듯이 오스카 트로피를 높이 들고 우쭐대는 배우이기도 하다. 그녀의 어깨에 올빼미가 앉아있다고 해서 미네르바와 동일시하면 우리는 권여현이 걸어놓은 맥거핀의 포로가 되고 만다. 앙리 루소의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상상의 숲을 연상시키는 남방의 풍경 속에 느닷없이 소나무가 나타나고 있는 것도, 잔 다르크의 충복처럼 등장하고 있는 개만큼이나 이상하다. 이 개는 뒤러(Albrecht Dürer)의 판화에서 죽음과 악마의 유혹을 받으면서도 씩씩하게 진군하고 있는 기사를 따르고 있는 개를 연상시키지만 잔 다르크와 논리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잔 다르크의 왼손을 떠받치고 있는 마장가제트란 로봇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그의 작품에서 중심은 주변에 의해 미끄러지고 있으며, 은유는 본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권여현_Young Ophelia_캔버스에 UV 프린트_60.6×72.7cm_2012

그렇다면 그는 이 혼란의 숲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태어난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죽는다는 결론은 너무 소박하고 일차원적인 결론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이 혼성의 이미지를 통해 존재란 명증한 논리로 규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양가성은 그것을 해명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존재와 부재, 주체와 객체, 이데아와 현상, 선과 악과 같은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접근할수록 그의 작품은 우리의 이성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가 불가지론의 심연을 헤엄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늘 그랬듯이 그는 작품을 통해 항상 뭔가 주장해왔다. 특이하게도 권여현은 항상 자기논리 또는 원칙을 세우고 작품을 발표해 왔다. 그런 점에서 권여현은 아주 지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초기에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실존철학이었다. 그것을 회화로 구현하기 위해 그가 제시한 여섯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견고한 배경과 얇게 그려진 인간 / 둘째, 부분적 추상과 전체적 구상 / 셋째, 단계적인 제작과정 / 넷째, 각 부분의 다른 양식들 / 다섯째, 드로잉의 원리 -과감한 두고, 날카로운 직선, 강렬한 광선, 전혀 다른 공간의 조합 / 여섯째, 전면 이질적인 추상적 형식은 색채와 내용에 의해 통합된다. (1987년 개인전『실존공간-n』과『Form and Content-n』)물론 위의 원칙은 자신이 추구하던 실존철학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방법론이지만 그 행간에서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이 바로 손이다. 손으로 그리기는 그가 한 때 다양한 계층과 부류의 인간으로 분장, 연기한 모습을 촬영한 사진작업을 제외한다면 항상 작업의 중심을 차지하여 왔다. 자신의 손에 대한 지극한 애착과 믿음은 그의 빼어나게 잘생긴 외모와 그에 대응하는 외모 콤플렉스(이게 무언인지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금방 눈치 챌 것이다)가 나르시시즘의 원천이었듯이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가「구도자」란 영상을 제작하며 했던 퍼포먼스의 부산물로서 멋진 사진작업이 하나 탄생했다. 바닥에 캔버스를 깔아놓고 온 몸으로 화면 위의 물감을 휘젓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그의 손은 마구 뒤섞인 물감이 주름마다 스며들어 '우연하게도' 고원의 자외선에 노출된 채 성지를 향해 오체투지를 하며 나아가고 있는 순례자의 거칠고 때가 낀 손과 같은 것으로 나타났다. 만약 영상을 보지 않고 이 깍지 낀 손만 본다면 그것이 권여현의 손인지, 구도자의 손인지, 아니면 평생 땅을 일궈온 농부의 주름진 손을 촬영한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이다. 나는 이 사진작업을 볼 때마다 문득문득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을 떠올리게 된다.「구도자」에서든 그가 최근에 제작한「맥거핀 욕망 혹은 네트 헌터」란 영상에서 그가 바닥에 깔아놓은 캔버스 위에 온 몸을 던져 허우적거리는 강렬한 퍼포먼스를 했기 때문에 폴록을 떠올린 것은 아니다. 우리는 폴록이 물감을 뿌려놓은 거대한 캔버스만 본다. 그러나 그가 작업실 바닥에 캔버스를 깔아놓고 안료를 흠뻑 적신 막대기와도 같은 붓을 휘두르고 있는 사진 속의 그 손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물감을 뿌리고 있는 폴록의 손은 그리기란 오래된 원칙에 대한 반란이자 해방을 보여준다. 권여현은 아예 화폭 속으로 온 몸을 던졌다. 그러나 그는 격렬한 행위의 결과인 화폭과 함께 물감으로 얼룩진 주름진 손도 버젓이 전시했다. 여기에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어쩌면 권여현은 폴록보다 훨씬 더 자신의 손을 예찬하고 심지어 숭배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회화에서도 그의 손에 의해 물감의 물질성은 고양되고 화면은 기운생동한다. 사전에 계획되고 연출된 화면구성은 이 순간 비등하는 에너지에 의해 돌멩이가 던져진 수면처럼 출렁거리며, 그의 붓질은 마치 접신상태의 샤먼처럼 '신들린 광기'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의 트랜스(trance) 상태는 실제로 아주 짧다. 그러기에 그의 머리는 너무 복잡하고 참조해야 할 것도 너무 많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이 이성과 무의식을 버무리는 것, 이른바 '미장아빔(mise en abyme)'이란 기법이다. 회화의 맥락에서 이미지 속에 다른 이미지를 섞어 넣는 이 기법은 고도의 연출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는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것처럼 혼성의 연속이자 반복이지만 그것도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만 볼 때 그렇다.

 

권여현_Macguffin Desire_캔버스에 UV 프린트_89.4×130.3cm_2012

그는 화가이기도 하지만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이기도 하다. 위장술은 그의 회화에서도 잘 발휘된다.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미술사의 잘 알려진 명작들이 잘려나간 채 차용되고 있음을 본다. 미술사는 그에게 많은 소재를 제공하는 보물창고이자 원천이다. 신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것이 미끼임을, 그가 걸어놓은 맥거핀의 함정임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정작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미술사적 정보나 신화체계에 대한 지식과 해석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이 원작에 대한 패러디라고 규정하는 것도 만족스러운 결론은 아니다. 내용을 인식할 수 있는 원작이 그의 작품 속에서 화자로서 말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화자의 부재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그래서 오리무중이고 미궁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생기는 간격이 그의 작품이 지닌 특이성이다. 그의 작품은 켜켜이 중첩되고, 또 한편으로 수평적으로 병렬된 이미지와 이미지, 화포와 물감 사이에 놓여있다. 결론을 예측할 수 있는 복선을 기대하지 말라. 그것조차 해체하는 것이 그의 작품이 추구하는 것이니까.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베이컨(Francis Bacon)의 그림에서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의 초상과 에이젠시타인(Sergei M. Eisenstein)의「전함포템킨」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물론 원작은 베이컨의 회화를 위해 중요하다. 그러나 베이컨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이미지의 원형을 연상시키는 형태가 아니라 피나 땀과도 같은 분비물이었고 격렬한 붓질로 드러나는 욕망이었다. 베이컨은 작업의 모티브를 찾기 위해 수집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이미지들을 수집했다. 대부분은 시사잡지에 게재된 사진이었지만 말이다. 권여현은 모티브를 미술사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위에 철학의 담론을 덧씌운다. 그가 참조하고 있는 철학자는 자크 라캉과 같은 정신분석학자, 질 들뢰즈나 데리다와 같은 후기구조주의자는 물론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니체 등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고 풍부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봐야 할지, 그의 작품에서 철학사를 읽어야 할지 헷갈릴 지경이다. 하여튼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모티브들은 모든 곳으로부터 온다. 철학적 담론, 신화, 종교, 과학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그의 현학취향을 반영한다. 내가 그의 작품을 봐야 하는지 것인지 읽어야 하는지 난감해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화든 철학이든 다 같이 존재의 문제를 표현하기 위해 동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거룩한 말씀도 존재를 해명하기 위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실존의 문제로부터 출발하여 1990년대의 직설적 감성과 직설적 화법을 통해 병약하여 신열을 앓고 있으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의해 작동되는 자아를 천착하던 그는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마침내 자기존재를 부유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의 작품을 관류해왔던 주제가 존재, 특히 자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지 않는가. 이러한 일관성을 주목해 볼 때 그가 어떤 미끼를 던지고 이미지의 덫을 놓든 그 저변에 사회적 존재, 역사 속의 존재, 주체로서의 존재문제에 천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코기토(Cogito) 이전의 상태, 즉 의심하는 자아이다. 즉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렇다. 의심도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의심은 당연히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또는 진리라고 강변된 것에 대한 질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어쩌면 회의주의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책상 위에 턱을 괴고 앉아 그것이 과연 그럴까 라고 사색만 한 것은 아니다.

 

 

권여현_rhizome forest_캔버스에 유채_194×259cm_2012

다중인격에 대한 열렬한 집착이 결국에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서 나온 것이듯이 그는 이 회의를 통해 이미 오래 전부터 추구해왔던 혼성의 정당성에 대해 더 깊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존재의 사슬이자 욕망의 사슬이기도 한 우로보로스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수미일관하고 논리적인 구조로서가 아니라 그가 또 하나의 키워드로 제시한 앵프라맹스(inframince)처럼 미세한 틈, 그 사이를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앵프로맹스에서 이성과 감성, 무의식과 욕망, 자아와 타자는 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겹쳐져 있다. 권여현의 작품에서도 인간이 동물이나 식물이 되고, 식물이 기계와 공존하며 자아는 잔혹한 지배자이자 그물에 걸린 가련한 먹이로 등장한다. 이들을 연결하는 것은 거대하고 복잡한 뿌리, 그것이 리좀이든 인트라망이었든 무엇이었든 간에, 서로를 성장시키고 구속하는 구조이다. 이것이 매트릭스일까. 아니면 그것조차 맥거핀일까. ● 그가 만든 영화『맥거핀 욕망 혹은 네트 헌터』는 암시적이다. 과연 오필리아는 사랑하는 햄릿에게 버림받은 처참함 때문에 죽은 것일까. 혹은 실수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햄릿에게 복수하기 위해 죽음을 위장한 것일까. 이 영상의 결말 부분은 다소 의아하지만 헌터 마스터(hunter master)로 분장한 작가 자신이 오필리아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스산한 바람이 부는 들판(이 장면에서 나는 에마뉘엘 안티유(Emanuelle Antille)의「천사의 캠프(Angel's Camp)를 떠올렸다)으로부터 헌터 마스터의 목을 자르는 장면(여기서 나는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의「유디트」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에 이르기까지 잘 짜인 각본과 레제(Fernand Léeger)의「기계적 발레(Le Ballet Mécanique)」에서 활용한 몽타주의 반복과도 같은 효과를 도입한 것은「구도자」와 비교하지만 진일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도입부로부터 마지막 장면의 노래나 계속 화면을 어지럽히는 자막, 그것도 작가 자신의 철학적 언술을 적어놓은 글은 생경하고 설명적이다. 그러나 오필리아가 죽인 헌터 마스터가 가족임이 드러나고 물려받은 상자가 맥거핀임이 밝혀짐으로써 이 모든 서사가 인간이 지닌 콤플렉스에 대한 암시로 가득 찬 것임을 알 수 있다. 오필리아는 죽지 않았다. 그녀가 죽이고자 했던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운명의 그물이었다. 어쩌면 그녀도 햄릿처럼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한 상태로 죽음의 순간을 지연시켰을 수도 있다. 물에 떠 있는 그 순간 그녀가 본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욕망하는 대타자이다. 죽음의 순간에 도달하는 주이상스를 느낄수록 실제의 죽음은 지연된다. 목이 잘려 살해당한 헌터 마스터는 부활해 헌터들에게 칼을 건넨다. 이것은 한 바탕 꿈인가. 아니면 이성과 욕망 사이에 난 균열의 틈으로 슬쩍 본, 그래서 응시가 활성화된 장면인가. 이 모든 것이 맥거핀임이 드러난 순간 영상은 가족사진으로 급속하게 되돌려진다. 다시 거친 바람이 부는 언덕에서 이야기는 반복을 암시한다. 그렇듯 그의 현란하면서 복잡한 이야기도 그림을 통해, 퍼포먼스를 통해, 영상을 통해 계속 될 것이다. ■ 최태만

Vol.20130307a | 권여현展 / KWONYEOHYUN / 權汝鉉 / painting

 

 

 

 

 

 

 

 

 

 

 

 

 

 

 

Character episode 1

원성원展 / WONSEOUNGWON / 元性媛 / photography 2013_0411 ▶ 2013_0509 / 월요일 휴관

 

원성원_성격의섬 The character islands_C 프린트_147×195cm_2013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513g | 원성원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3_0411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아트사이드GALLERY ARTSIDE서울 종로구 통의동 33번지Tel. +82.2.725.1020www.artside.org

 

이미지로 이해하고, 이미지로 치유하고● 원성원은 이미지를 다룬다. 그의 전공이 조각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이미지를 다루는 것을 넘어 각각의 개별 이미지로 레이어와 스토리가 있는 통합 이미지를 조각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에게 이미지란 자신의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이면서 동시에 대상을 상징하고, 추상하고 그리고 분석하는 도구다. 이미지 조각가. 그가 자신의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과 전개하는 내용들을 모두 고려했을 때 그를 가장 그답게 설명하는 말일 것이다. ● 작가는 사람들의 성격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환경을 어떻게 극복하고 적응하는가에 따라 드러나는 개인적 특성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자신이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를 분석하는 것이 어떻게 자신이 사회를 이해하고 타자와 구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발견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이는 일종에 자신을 위장할 수 있는 위장술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과 함께 그 위장술을 발전시켜 사회성을 촉발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각자의 성격은 자신을 남과 구별하게 만드는 요소임과 동시에 그 성격으로 인해 사회성이 제약을 받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그럼으로 자신에게 두드러진 성격을 가급적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감춤으로써 보다 더 사회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 각각의 성격들을 동물들과 결부시켰다. 그리고 그 성격을 이해하려 선택된 동물들을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이동시켰다.

 

 

원성원_완벽한정원 The perfect garden_C 프린트_138×195cm_2013

 

 

원성원_자존심의다리 The bridge of ego_C 프린트_138×195cm_2013

 

 

유난히 집에 집착하는 성격이 있다. 작가는 그 병적인 집착을 갈매기에 비유했다. 수평선 너머로 달이 지고 바다는 언제 거대한 파도를 일으킬지 모르게 잔뜩 성이 나있다.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집들을 위태로운 배위에 싣고 표류한다. 육지에서는 재산일지 모르지만 바다 위 위태로운 저 집들은 오히려 없는 것 보다 더 위험한 집착이다. 시작점을 알 수 없이 얽혀있는 밧줄에만 의지한 채 표류하는 집처럼 집착은 그 대상으로부터 오히려 공격 당할 수 있다. 놓지 못하는 손으로는 그 어떤 것도 잡을 수 없다. ● 자신들만의 세계를 고집하고 나눌지 모르는 성격도 있다. 닭이면서 공작이기를 바라는 허황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작은 텃밭이라도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멀쩡한 산을 깎아 누구든지 다 볼 수 있도록 텃밭을 만들었다. 꾸몄다가 더 적절한 말일 것이다. 과시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타인의 눈과 말만을 신경 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자신들의 잣대의 눈이고 말이다. 수 십 년 동안 자라온 소나무보다 당장 자신의 텃밭에서 수확한 호박이나 고추가 더 자랑스럽다. 무엇이 더 소중한가에 대한 판단은 오직 과시할 수 있는 대상인가 아닌가에 달려있을 뿐이다. 공작과 닭이 서로 마주볼 수 없듯이 분수에 맞지 않은 과시는 서서히 자신의 주변을 황폐화 시킬 것이다.

 

원성원_장남의 별아파트 The star apartment of the eldest son_C 프린트_180×144.5cm_2013

 

 

원성원_졸부의 텃밭 The kitchen garden of a parvenu_C 프린트_138×195cm_2013

당장이라도 불길이 치솟을 것 같은 건조한 들판.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들판 사이를 여러 개여 다리들이 이어주고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 철로 만들어진 다리 그리고 더 단단한 흙으로 만든 다리들이 순차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흙다리를 제외한 나머지 다리들은 얼음으로 얼어 버렸든지 불에 타 버렸든지 이제 다리로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안이 훤히 다 드려다 보이는 비닐 하우스에 살면서 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면서 이 올빼미와 불곰은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자존심만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은 상처를 받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자존심은 타인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지 자기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사회 속에서 사회적 관계에서 드러나는 자존감이야 말로 우리가 지켜야 할 약속이며 신뢰일 것이다. ● 유럽식 완벽한 정원에는 빨간색의 눈금자가 놓여있고, 주변은 쓰레기로 덮여있다. 그리고 그 정원에는 사슴들이 우아하게 노닐고 있다. 사슴은 완벽주의자의 가장 신성한 존재다. 만약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는 너구리라고 하더라도 눈금자의 직선에만 맞으면 사슴처럼 그 완벽한 정원에서 노닐 수 있다. 작가에게 완벽주의란 이렇게 자신만이 인정될 수 있는 법칙 안에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그 법칙을 타인에게 강요하면서 주변의 쓰레기들을 감춘다. 완벽주의자에 의해 여전히 푸르고 깍듯이 정리된 정원은 저 멀리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눈보라에 의해 곧 사라져 버릴 것이다. 오직 완벽주의자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이다. 완벽은 곧 자신의 불완전을 감추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만약 완벽하다면 우린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성원_집착의 방주 The ark of obsession_C 프린트_125×195cm_2013

천문학자를 꿈꾸던 장남은 아파트를 짓는다. 더 가까이 별을 관측하고자 고층의 아파트를 짓고 있는 장남은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자신의 꿈을 접었다. 가족들은 그의 꿈보다는 그의 책임감이 흔들릴까 적당히 그를 위로한다. 여전히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이야기 하지만 정작 가족은 자신들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장남에게 현실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책임감이 강한 장남은 멀리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으로 자신의 꿈을 현실과 맞바꾼다. ● 작가는 집착, 자존심, 과시, 완벽주의 그리고 책임감 등 병적으로 악화될 수 있는 인간들의 성격을 이미지화했다. 이는 단순히 작가의 조형적 감성을 넘어 분석하고 이해한 결과로서의 이미지다. 따라서 작가는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삶을 그리고 관계를 이해했다. 이는 또한, 작가의 치유면서 곧 관객들의 치유가 될 것이다. 과연 나의 성격은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이다. ■ 임대식

Vol.20130411a | 원성원展 / WONSEOUNGWON / 元性媛 / 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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