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or it yourself

김성우展 / KIMSUNGWOO / 金成佑 / sculpture

2013_1204 ▶ 2013_1210

 

 


김성우_gamble door_60×60×60cm_2013

초대일시 / 2013_1204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토포하우스TOPOHAUS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6(관훈동 184번지)Tel. +82.2.734.7555/+82.2.722.9883

www.topohaus.com


문(門)전(展)성(成)시(示) ● 김성우의『Do-or it yourself』전시장의 문을 열자마자, 우리는 기둥에 기묘하게 접합된 문(「대리기둥알바」)과 맞닥뜨리며, 그 뒤로도 각기 다른 패턴들로 중첩된 실제 크기의 화려한 문짝들(「A rabbit burrow series」)이 펼쳐진 광경을 보게 된다. 고개를 돌려보아도, 전시장 한 벽면 전체에 회색계열의 문들(「25개의 벽」)이 빼곡히 들어차 있을 뿐만 아니라 접혀지고 구부러진 문(「Gamble door」)까지 그 공간을 꽉 채우고 있다. 수많은 문들로 전시장을 가득 메운 그 광경은 '대문 앞이 저자를 이룬다(문전성시 門前成市)'라는 고사성어처럼, 그야말로 '문전(展)성시(示)'다. 그의 평평한 문짝들은 화이트 큐브에 걸려있는 평면작품으로서, 그리고 입체적인 문들은 이편에서 저편으로 미끄러지는 토끼굴과 같은 설치작품으로 '성시'를 이룬다. 건축적 의미에서 한 장소의 경계를 개폐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구조물로서의 문은 보통 한 장소와 다른 장소를 연결시키는 접점에 위치'됨'으로써 담, 벽 등의 경계요소와 함께한다. 이러한 연속된 경계요소의 성격은 그것의 특징과 명칭을 좌우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공간과 공간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문에 관한 속성은 그것을 상징적 의미로 활발히 작동시키기도 한다. 문학에서는 이를 비유의 힘으로 충분히 이용하여, 타자와 타자를 연결하는 관계로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며 자아와 타자의 시공간을 드나들 수 있고 차단하거나 연결할 수도 있는 메타포로 자유로이 결합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문의 외연을 이리저리 열어가다 보면, 그것이 독립적 구조물로서 보다는 경계요소와 병존할 때, 즉 타자와의 부딪침에 충실할 때 그 자체의 주체적 역할을 온전히 수행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김성우가 매우 사실적으로 재현한 그 문들은 실제적인 그 사물의 역할과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문고리가 없거나 혹은 열지도 닫지도 못하는 그 문들과 마주한 우리는 일반적 표상으로 해석하여 그 사물들을 우리 자신 앞에 불러 세우기가 난감하다. 말하자면, 그 사물에 대한 의미가 텍스트라는 잘 만들어진 세계에서는 형식적으로 확장될 수 있지만 실용적 목적에 따라 의미가 통제되고 고정되는 사회적 실천의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점에서 작가는 자신의 예술적 수사학을 열어젖힌다. 그는 충실한 사물로서의 문이 "소통의 과정으로 자신을 온전히 내놓지만 정작 절대적인 수동의 입장"으로 벽에 고정되어 누군가의 사용에 '의하여' 결정되어지는 면을 회의한다. 이에 그는 "수동적 오브제로서 관계를 맺고 형성되어지는 데에는 선택권이 없는" 이 익숙한 사물로서의 문을 단순한 수동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의미(significance)의 역동적 생산자로 불러낸다. 다시 말해, 작가에게 문은 구조 사이에서 획득된 상관관계에 묶여진 규정성들을 통해서 타자들에게 무언가를 나타내는 혹은 대리하는 사물이 아닌 것이다. 그는 수동적 종합으로 성립된 그러한 문에게 주체적 선택권을 돌려주면서 무기력한 존재로 그것을 전락시키는 '사물화'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한 상실로부터의 회복은 '문'이라는 주체의 자기 변형을 요구하며, 이러한 요구는 '문'의 자기에의 물음을 반복하게 한다. 이제 생명 없는 그 문들은 마치 제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해내듯이 행동하면서 온갖 까다로운 질문을 던진다. 예컨대 사물의 주체성을 폭넓게 인정하는 한국어에서 "문이 열린다"라는 일상적 어법의 표면적 의미만을 본다면, 그 사물은 문장 안에서 주어 노릇을 하면서 사람에게나 어울릴 법한 능동사를 거느리기까지 한다. 영어에서라면 문장의 주어 자리는 사람이 되거나, 사물이 주어가 되는 대부분의 경우처럼 수동태의 형식을 취하며 그 사물을 어디까지나 인간 행위의 대상으로 국한시킬 것이다. 사물이 주어자리에 오더라도 피동문보다는 능동문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우리말에 일상적 어법으로, 그리고 수사학적으로 의인법에 해당하는 김성우의 예술적 수사법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철학적 연장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만물에 생명이 있다'고 보는 물활론(物活論)으로, 더 밀고 나아간다면 '모든 사물이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는 범심론(汎心論)으로까지의 확장이 그것일 것이다. 작가는 수동적으로 틀(frame) 지워진 문을 다양한 관계적 의미로 확대시키기 위하여 그것을 능동적 행위자로 불러낸다. 활기 없이 고정되어 있는 수동적 사물로서의 문은 "Do-or it yourself"라는 작가의 예술적 발화를 통해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 화한다. 명사로서의 문(door)은 자기 스스로를 동사적 주체로 변형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문체(門體)를 '두(do)'드리는 능동적 행위를 수행해 간다.

 

 

 김성우_gamble door_60×60×60cm_2013_부분

 

김성우_a rabbit burrow series_194×74×5cm_2013

 


 

김성우_a rabbit burrow series_194×74×5cm_2013

이를 위하여 작가는 우선 일반적인 규칙성을 갖고 있는 문짝의 전체 도안을 MDF합판으로 자르고 잇대어 붙여 원하는 형태로 구성한다. 그리고 이 납작한 합판들에 다양한 문짝의 세부 패턴들을 선택하여 새기고(彫), 깎고(刻), 맞추고(構), 쌓는(築) 방법으로 그 조형적 형상을 재구축한다. 일례로「A rabbit burrow series」에서 4개의 문들은 3cm 정도의 직사각형 합판에 다양한 문짝에서 선별된 문양을 새기고 깎은 후, 그 위에 다시 직사각형 아이폰 대문 화면의 동영상 패턴을 쌓아 올리며 요철 있는 부조조각으로 통합된다. 미묘한 깊이와 높이를 대응시킨 요철 있는 화면에 정교하고 화려한 색채가 더해지면서 그 문들은 술어들을 하나씩 갖추며 서서히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25개의 벽」은 그러한 직사각형 프레임들이 반복되는 구조를 통해서 전시장의 한 벽면 전체를 회색계열로 뒤덮어 틀 없는 거대한 사각의 화면을 재형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제작과정은 마치 계열체의 수직축과 통합체의 수평축에 따라서 기호의 선택과 조합을 이루면서 생산되는 소쉬르적 뉘앙스를 풍긴다. 이 두 축이 단어들을 문장으로 만들어 언어로 조직하는 틀을 제공하듯이, 작가는 '문'이라는 단위에서 선별된 공통적인 요소를 연쇄시켜 서로 결합될 수 있는 관계로 집합시키고 그렇게 선택된 계열체적 조합으로 문에 대한 전체적 예술문법을 통합시킨다. 그러나 의미는 통합체의 축을 따라 축적되지만, 계열체적인 영역에서의 선택은 하나의 문장 속의 특정한 지점에서 의미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25개의 벽」처럼 수직수평이 엇갈리고 만나면서 구축된 기하학적 구성에서 모든 개개체의 문은 그 자신만의 고유한 힘을 품고 각각에 존재하는 실체의 단자(monad)로 표상되는 다양성을 이루어낸다. 그리고 일종의 캔버스와 같은 의미를 가진 그 평평한 문짝의 면들은 기호의 연쇄를 새겨 넣기 위한 평면의 역할을 하며,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렇듯 '문'이라는 술어적 주체는 그 사물을 구성하는 각 범주들에서 추출된 규정들이 계열화됨으로써, 연접(conjunction)을 형성함으로써 구성된다. 즉 한 주체는 무수한 규정성들의 계열체이다. 이것은 술어들의 그물 속에서 문-자신의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며, 자신의 이름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그물에 단지 고착되어 있다면 문-자신의 구성은 상투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Gamble door」의 문은 스스로 직사각형의 몸체를 구부리고 접어가며 주사위 형태로 변화한 후, 스스로 던져지면서 매번 상이한 숫자를 자초하여 지표 위에서 우발적 사건들을 연속시키려 한다. 적극적 모험의 관계로 굴러가려는 주사위 문체는 고정된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계속적으로 바꾸기 위하여 놀이한다. 일종의 수동의 능동'되기', 능동의 수동'되기'를 번갈아 가는 이러한 과정에서 차연(différance)이 진동한다. 데리다(Jacques Derrida)라면, 능동태도 수동태도 아닌 이러한 형태를 하나의 '중간태'라고 명명하였을 것이다. 그의 차연은 출구가 없는 자기애정이나 자폐성의 아집에 얽매이지 않고 텍스트의 무한한 연쇄성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끝없이 지연되는 그 과정에서 '문'에 대한 다른 단어와 또 다른 단어, 그리고 또 다른 언어를 참조하기 때문에 의미는 고정된 기의를 폐기하며 기표의 사슬로 미끄러진다. 이것은 기묘하고 의인화된 생명체들이 사는 환상의 세계로 미끄러져가는 앨리스의 토끼굴처럼, 김성우의 평평한 문 주변에서 깊숙한 패러독스의 출로와 입구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김성우_a rabbit burrow series_194×74×5cm_2013

 

김성우_a rabbit burrow series_194×74×5cm_2013

 

김성우_대리기둥 알바_650×278×78cm_2013

문(門)으로 선문(問)답하기 ● 김성우의 문전(門展)에서 발견되는 역설은 문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진술을 만들려는 우리의 노력에서 계속해서 빠져나간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와 같은 것을 실체화하고 표상화하려는 모든 시도를 부정한다. 이는 작가가 사실적으로 재현한 그 문들이 단순히 상징적인 형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재현이 대신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에 대한 의미로 구성되고 있는 점을 역설해준다. 따라서 그의 문들은 상대의 경직된 관념을 역으로 활용하는 장치이며, 이 장치로 상대를 유인한 다음 결국 해체시킴으로써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나도록 하는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 토대로 작가는 주체화의 선상에서 '문'의 고정된 양식이라는 통념(doxa)에 반하는(para) 계열화를 유발하며 규정된 양식의 힘과 대결하고 그것을 무력화시키는 역설(paradox)로 향해 간다.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이를 또 다른 '의미의 논리'로, 통상적인 의미의 논리 혹은 사건화의 방법을 해명하면서 그것에 머물지 않고 그와는 다른 변이와 생성의 선을 그리는 새로운 의미의 논리, 사건화의 방법으로 제안한다. 그리고 김성우는 고정된 의미를 제시하는 양식과 통념에 반하여 이전과 다른 '문(門)'이라는 또 다른 사유의 가능성으로 그것을 '물음 문(問)'으로 변이시켜 문답의 사건을 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문은 명사로서의 문(door)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문체를 '두(do)'드리는 동사적 주체로 생성되어 가는 것이다. '문으로 선문답하기', 그 과정에서는 말해지는 순간, 말해지는 것을 버려야만 하고 일체의 상식과 양식에 대한 전제들에서 멀어져야만 한다. 선문답과 같은 해체는 절대적 진리를 설명하는 대신에 무한한 사유의 공간을 주파하며 한정된 우리의 인식을 뒤흔든다. 풍부한 인식의 장치를 지닌 선문답은 일치되지 않는 문답일지라도 관점에 따라 화두를 해석해 냄으로써 수많은 가능태의 물음들을 '두'드리며 황당하고 모순투성이의 선문답으로 김성우의 문들을 전시장에 늘어서게 한다. 전시장의 한 구석 벽면에 붙여진 전시지원서에서 그 문은「May I join?」이라고 우리에게 물으며, 자신을 화두로 하여 우리와의 선문답을 요청한다. 그러나 '주체'라는 문에게 '우리'라는 타인은 언제나 힘겨운 존재일 것이다. 사회적 장 안에서 '문'이라는 '나'에게 붙여있는 규정성들 하나하나는 타인들의 눈길 하나하나를 함축한다. 그러한 현실을 회피하려는 이들은 오직 자신의 이해에 관련되는 것들만이 실재라고 생각하며 세상 모든 모순들로부터 눈을 돌리려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사물들 사이에 존재함으로써 세계를 얻게 된다"는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전언을 상기하며 만일 내가 보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대상이 없다면 나는 볼 수도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즉 나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순투성이의 문이 발화하는 소리, 그것의 불확실한 첫문장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불충분함을 안다고 하여도, 작가는 자신만의 예술적 수사로 우리의 문답을 계속해서 '두'드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허무한 잡담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김성우는 향후의 많은 문전(門展)을 통해서도 끊임없는 선문답을 반복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주체화의 선상을 따라 이루어지는 '문'의 자기 만들기에서 나아가 실재적인 자기 만들기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관계를 떠난 순수 내면적 자기 만듦은 어쩌면 허구적 주체성으로 침잠되어가는 상상적 만듦에 지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에 직접 부딪치며 새로운 변이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의 선문답적 수사법을 열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 오윤정

Vol.20131203e | 김성우展 / KIMSUNGWOO / 金成佑 / sculpture


그래도...난다 Nevertheless...Fly

이원경展 / LEEWONKYUNG / 李嫄景 / sculpture

 

2013_1204 ▶ 2013_1217

 

 


이원경_그래도...난다 Nevertheless...Fly_스테인리스 스틸 주물_76×230×10cm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1224a | 이원경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리서울 갤러리LEESEOUL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23-2번지Tel. +82.2.720.0319

www.leeseoul.com


'거울-구속'에서 우물신화로 : 용쓰는 현대인의 푸른 눈빛 ● 이원경의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대체로 소품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개별화된 단품들이 아니라 9개 소품들이 하나의 주제로 묶이는 단편집에 가깝다. 문학적으로 바꿔 말하면 그것들은 '비행(飛行)'에 관한 짧은 장편(掌篇)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그의 작품을 모니터로 켜 두고 천천히 살펴가면서 전체를 이어 붙여 보았다. 소년에서 노인으로 옮겨가는 시간의 격차를 다스려보기도 하고 중년들의 외줄타기 같은 불안과 비락(飛落)의 순간들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불현 듯 한 목소리가 들려 귀를 기울였다. 그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이원경_꿈꾸는 날개 Wings with dream_브론즈, 스테인리스 스틸_36×190×25cm

권진규_허영과 종교로 분절한 모델, 그 모델의 면피를 나풀나풀 벗기면서 진흙을 발라야 한다. 두툼한 입술에서 욕정을 도려내고 정화수로 뱀 같은 눈언저리를 닦아내야겠다. 모가지의 길이가 몇 치쯤 아쉽다. ● 김종길_1971년 12월 10일, 명동화랑에서 열린『테라코타_乾漆』展 포스터가 떠오르는 군요. 선생께서는 선생의 얼굴사진 뒤로 자소상(自塑像) 연작을 마치 "나풀나풀 벗기면서 진흙을 발라"놓은 형상처럼 배치하셨지요. 이원경의 작품들에서 선생이 말년에 실험하셨던 건칠작업이 떠오르시나요? ● 권_굳이 내 작품이 떠올라서만은 아니요.「悲樂-飛落」을 봅시다. 한 사람이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날고 있소. 그는 무척 평안해 보이오. 그의 두 팔이 마치 하얀 날개처럼 보이지 않소? 관객은 이 사람이 저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오. 그가 보고 있는 세계는 푸른 하늘이오. 그는 지금 이 지상으로부터 날아올라 저 하늘 속으로 날아오르고 있는 것이오. 그런데 작가는 이 작품에 '飛落'을 덧붙였소. 날면서 또한 떨어지고 있다는 뜻인데, 가만히 보니 저건 사람이 아니라 빈껍데기가 아니겠소? 마치 유충의 번데기 집이었던 고치(cocoon) 껍데기 같은 거 말이오. ● 김_그랬군요. 그렇다면 그 껍데기의 실체였던 사람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그는 과연 자기 껍데기를 벗고 나와서 가볍게 훨훨 날아가 버린 것일까요? ● 권_그것을 이해하려면 그 밑에 설치해 놓은 거울을 먼저 해석해야 할 것 같소. 저것은 혹시 수선화(水仙花)가 되어버린 그리스 신화의 아름다운 소년 나르키소스를 상징하는 게 아니겠소? 내가 보기엔 자기 리비도(libido)에 빠진 상태, 즉 나르시시즘에 풍덩 빠져버린 상태의 '거울-구속'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말이오. ● 김_'거울-구속'이라, 아주 흥미로운 개념이군요. 저 흰 고치 신체의 껍데기로부터 변태를 거듭한 새 몸이 너무도 투명한 자신의 몸에 홀려서 '자기보기'의 나르시시즘에 빠졌다는 가설이라.... 그런데 저는 이 작품이 일종의 욕망충동으로서의 나르시시즘적 리비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저 거울을 우물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거울이 2차원적인 평면으로서 외부를 반사하는 것에 갇혀있다면, 우물은 반사면 아래로 깊숙이 심연(深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 권_그렇소. 우물은 어두운 심연이 아니라 맑고 투명한 심연이오. 깊어질수록 그 물밑의 세계는 샘의 근원과 맞닿게 되지. 그뿐만 아니라 우물은 하늘과 연결되는 하나의 통로 같은 구멍이외다. 대지의 숨구멍에서 솟은 물이 둥글게 하늘을 담고 있는 것이 우물이지. ● 김_바로 그렇습니다. 그런 숨구멍의 세계로서 하늘과 대지를 연결하는 통로라고 생각해 보는 거지요. 하늘로 훨훨 날아가는 껍질을 두고 그가 풍덩 빠져든 세계는 어디로 이어져 있는 것일까요? 옛 선인들은 나무뿌리가 가 닿는 곳과 우물의 뿌리가 가 닿는 곳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 했습니다. 신화적 상징으로 그 근원에 이르면 한 마리 거대한 '용(龍)'이 있지요.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구 중부에 룽징이 있습니다. 용정(龍井). 우물에서 용이 나와 승천했다는 곳입니다. 경주 분황사에는 돌로 만든 우물(石井)이 있지요.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 우물에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살았다고 합니다. 위례성 우물이야기도 있어요. 백제시조 온조왕이 밤이면 용이 되어 위례성 우물로 들어가서는 부여 백마강에서 놀다가 날이 밝으면 다시 이 우물로 나와서 왕 노릇했다는 것이죠. 이렇듯 우물과 용에 얽힌 신화는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 퍼져 있습니다. 왜 우물에서 용이 나오는 것일까요?

 


이원경_푸른 시선 Bluish stare_브론즈, 스테인리스 스틸_48×80×80cm

권_그러고 보니 저 거울은 우물 같기도 하오. 하지만 이원경의 작품들이 고대 신화나 전설을 모티프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 그 용이란 것도 상징으로서만 작동해야 하지 않겠소? 그렇다면 지금 여기의 현대인들에게 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 같소만. ● 김_제가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원경에게 있어 아니, 그가 표현하고 있는 인물들에게 있어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 인물들과 용의 상관성을 추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작가가 굳이 용을 떠올리거나 또는 용의 실체를 확인하려는 어떠한 조각적 형상을 구체화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용을 표현하려는 것이 이 작품들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용과 엇비슷한 상태에서의 신체적 변이와 그 변이가 내포하는 현실적 상징에 관심이 있는 듯합니다. 즉,「悲樂-飛落」로부터 탈피(脫皮)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하고 있는 셈이죠.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하잖습니까? "용쓰고 산다."고들 말하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그는 지금 이곳에서 용쓰고 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용이 되려고 사는 사람들일 테니까요. ● 권_그렇겠군. 이원경의 작품에 등장하는 날개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바로 그 용과 연결되니 말이오. ● 김_저는 누구나「유년의 날개」가 보여주듯이 날개 하나씩은 다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키가 크듯이 날개도 자라서 힘차게 비상할 순간을 준비하는 것이지요. 저 소년의 몸은 아직 미완의 상태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이제 막 그의 오른쪽 어깨 위에서 날개 하나가 싹튼 것을 보세요. 푸릇푸릇한 저 날개가 저 소년의 희망이 아닐는지요. ● 권_저 몸이 가장 싱싱한 몸이요. 저 몸이 이제 막 어미의 껍질로부터 탈피한 순수의 덩어리요. 저 소년이 내민 손을 보시오. 저 소년의 눈빛을 보시오. 저 소년은 당당히 세계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소. 현실을 밀어내지 않고 함께 가길 청하고 있는 순간이외다. 그의 몸속에는 푸른 피가 가득해서 푸른 날개 따위 금방이라도 키워낼 듯 충만하오.

 


이원경_단연한 숨 Resolute_브론즈, 스테인리스 스틸_35×80×20cm

김_그동안 이원경이 보여주었던 조각들과 달리 이 작품은 인간의 근원적인 형상성이 내포한 '삶의 진실' 같은 것을 보여줍니다. 더군다나 그는 바로 그 근원의 형상과 삶의 진실 같은 것이 실제로는 인간의 신화가 잉태되는 첫 순간이라는 것도 암시하고 있지요. 예수가 말했잖습니까? 저 소년과 같지 않다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요. 그러나 우리는 모두 저 순간을 거역하며 어른이 되고 맙니다. 우리 자신의 투명한 형상이니 진실이니, 또는 내 자신의 신화 따위는 깡그리 잊은 채 말이죠. ● 권_「간절한 비행」의 늙은 육체를 보시오. 어머니 우물에서 솟았다고는 하나 자기 자신의 신화를 망각하고 살아 온 자들의 초상이 아닐 수 없소. 소년의 어깨에서 푸르게 자랐던 날개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지 오래요. 늙어서,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잊고 살아온 삶의 진실을 다시 찾게 되지. 하지만 수차례 변이를 거듭하면서도 욕망을 내려놓지 않았던 자들의 삶은 결국 늙은 육체만 남게 된다오. 우물 속을 아무리 들여다본다 한들 그가 상실해 버린 날개는 결코 찾지 못할 것이오. ● 김_그래도 작가는「간절한 비행」의 우물 면에 날개 깃 하나를 붙여 두었어요. 저는 저 깃이「깃」에 깃들어 있는 어떤 회상의 메타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간절한 비행」에 등장하는 저 늙은 육체의 주인이 더 늙어갈 지라도 '비행'에의 집착은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러면 그럴수록 그가 살아 온 삶의 그림자는 그를 더 붙잡아 당길지도 모를 일이지요. 늙은 육체의 마지막이란 결국 죽음이라는 최종의 고치(棺) 상태로 회귀하는 것 아니겠어요?「깃」의 작품들이 사각의 큐브 공간에 투영된 얼굴들과 깃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은 그런 회귀 공간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깃」의 공간은 사념이 머물러 있는 기억의 사물함 같은 것이기도 할 테고요. 그런데 저는 이쯤에서 어떤 의문에 휩싸입니다. 용을 쓰든 용이 되든 왜 그는 이렇듯 '용 되기'의 '날개'에 집착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가 저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시되어 있었습니다. "인생에 날개가 있다면, 두 개의 이상적인 날개를 가지고 태어나 끝까지 날 수 있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완벽한 날개라고 믿고 정말 끝까지 날 수 있다고 생각 하는가? 사람들은 모두 화려한 비상을 꿈꾸며 살고 있다. 자유의 날개, 꿈의 날개, 욕망의 날개.... 사람들은 대부분 부족한 날개를 가지고 있다. 너무 작은 날개, 외 날개, 이미 늦어버린 날개. 그러나 부족한 날개로도 꺾을 수 없는 의지가 있다. 날개가 어떻든 꼭 날것이라는 의지이다. 각각 다른 불편한 날개를 가진 사람들의 모습들. 내 인생의 날개는 어떤가? 내가 가지고 있는 자아의 날개는 어떤 형태인가? 내게서 한쪽만 있는 나의 날개를 보았다."

 

 


이원경_간절한 비행 Desperate flight_브론즈, 스테인리스 스틸_40×58×45cm

권_그 의문이 나를 이곳에 호명한 이유인 듯하오. 나도 이원경 작가처럼 '각각 다른 불편한 날개를 가진 사람들의 모습들'에 주목했소. 그러던 어느 해 사찰에 잠시 들렀다가 깨닫게 되었소. 날개의 진실은 본연의 자기 초상에 다가서는데 있다는 것을 말이오. 그래서 자소상에 매달렸던 것이오. 그리고 그 자소상은 부처와 동일시해야만 했소. 자소상은 자각상(自覺像)이기도 했으니 말이오. 나는 이원경의 날개에서 비상하게도 나의 자각상에 관한 사유를 발견하오. 초기 불교미술에서는 부처의 형상을 인간을 초월한 이상적 존재로 상징화했었소. 부처가 된 석가모니를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형상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진리의 부처는 그 자체로 상징이며 '그 자리에 있다'는 암시만으로 존재를 드러냈소. 부처의 형상을 드러냈던 최초의 상징은 탄생, 깨달음, 설법, 대열반의 네 가지 사건을 다룬 것이었다오. 부처의 탄생은 세상의 풍요였지. 그래서 첫 상징인 풍요를 표현할 때는 풍요의 여신 락시미가 풍요의 항아리위로 피어오른 연꽃 위에서 코끼리들이 뿌리는 물을 맞고 있는 것이었소. 깨달음은 지혜의 나무 보리수로 그렸고, 설법은 법, 즉 진리의 바퀴로 새겼소. 설법을 표현할 때는 간혹 사슴을 그렸는데, 최초의 설법이 사르나트 녹야원에서 이뤄졌기 때문이오. 그리고 대열반은 수투파(탑)에 응결되었소. 스투파는 니르바나(열반)에 들어간 순간을 나타내므로 절대적 진리를 구현한 기념물이기도 하오. 자 그런데 말이오. 그러다가 한 5백년이 지났을 무렵이었을 것이오. 인간들은 결국 부처를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오. 그 부처의 형상이 어땠는지 아시오? 그는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팽팽한 뺨과 미소 띤 입, 반쯤 감은 눈을 가진 청년이었소. 이원경의 인물들 눈빛을 보시오. 그의 눈빛들은 하나같이 푸르오. 그가 어린 소년이든 늙은이든 상관없이 말이오. 이원경의 인물들은 현실 속에 있으나 그들은 그렇게 던져진 푸른 영혼의 소유자들이오. 그 푸름의 상징과 날개의 상징이 어디를 향하고 있다 생각하시오? ● 김_「푸른 시선」의 인물을 보니 그가 드디어 한 세계로부터 다시 한 세계로 비상하려는 듯 서 있음을 보게 되는 군요. 우리 모두는 어머니 대지의 우물로부터 왔으니 곧 이 세계에 던져진 순간들이 날개를 상실한 순간일 것입니다.「베를린 천사의 시」에서처럼 날개를 상실하면 지상에 떨어지고 말잖아요. 그렇지만 우리는 날개를 가졌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날개를 가졌던 순간의 기억이야말로 우리의 영혼이 푸르게 빛나는 순간일 테고요. 그러므로「푸른 시선」의 그는 누가 뭐라 해도 날개를 가진 사람입니다. 인간의 신화와 삶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비상을 준비하는 그의 눈빛은 너무도 강렬합니다. 그는 지금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그의 존재성은 충만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서 있고 팽팽한 뺨과 결의 찬 입, 크고 푸른 눈빛의 용이군요. 이미 그는 용이었고 용의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원경_유년의 날개 Wing of childhood_브론즈, 스테인리스 스틸_41×50×25cm

그런 대화가 오갔다고 생각했을 무렵, 나는 나 스스로 떠들고 있는 나를 보았다. 모니터에는「단연한 숨」의 인물이 쭈그리고 앉아 깃을 보듯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 앉아 사찰의 하늘을 보았던 권진규의 얼굴 같기도 하였다. ■ 김종길

 


이원경_깃 Feather_합성수지_24×30×24cm×3

인생에 날개가 있다면, / 두 개의 이상적인 날개를 가지고 태어나 끝까지 날 수 있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 완벽한 날개라고 믿고 정말 끝까지 날 수 있다고 생각 하는가? // 사람들은 모두 화려한 비상을 꿈꾸며 살고 있다. / 자유의 날개, 꿈의 날개, 욕망의 날개 등... // 사람들은 대부분 부족한 날개를 가지고 있다. 너무 작은 날개, 외 날개, 이미 늦어버린 날개 등 / 그러나 부족한 날개로도 꺽을 수 없는 의지가 있다. 날개가 어떻든 꼭 날것이라는 의지이다. // 각각 다른 불편한 날개를 가진 사람들의 모습들. // 내 인생의 날개는 어떤가? / 내가 가지고 있는 자아의 날개는 어떤 형태인가? / 내게서 한쪽만 있는 나의 날개를 보았다. // 이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의연하게 꿈꾼다. / 그래도...꼭...난다고. (2013) ■ 이원경

Vol.20131203j | 이원경展 / LEEWONKYUNG / 李嫄景 / sculpture


Sonoration

김범중展 / KIMBEOMJOONG / 金凡中 / painting.drawing
2013_1204 ▶ 2013_1210

 


김범중_Sonoration_장지에 연필_80×105cm_2013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관훈갤러리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작은 진폭의 생각들이 모여 거대한 파장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증폭된 희망일수도 있고 증폭된 절망일수도 있다. 언제나 번뇌의 파장은 또 다른 전이를 일으키고 새로운 형질의 번뇌로 재생산된다. 갖가지 생각으로 고뇌하지만 그것은 비슷한 틀 속에서 몸부림치는 그다지 크지 않은 진폭의 파장들일 뿐 일 때가 많다. 그러나 파장이 점점 강해지고 흡수할 수 있는 한계에 도달하면 기존의 믿음들은 무너지게 되고 새로운 믿음들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세월 속에 쌓이면서 어느 덧 커다란 신념으로 찾아온다.

 


김범중_Ignition_장지에 연필_112×160cm_2013

 


김범중_Dissipation_장지에 연필_120×160cm_2013

 


김범중_회절의숲-Diffraction Forest_장지에 연필_45×55cm_2012

 


김범중_Stereophonics_장지에 연필_45×55cm_2012

물질계의 분자는 열과 같은 자극을 가하면 약간의 운동을 시작하다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 또 다시 가하면 점점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계속해서 가하면 마침내 대류와 같은 구조의 새로운 체계가 만들어진다. 이른바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인 것이다. 인간의 정신계 역시 온갖 번뇌의 파장들로 들끓지만 뇌파가 극점을 치고 나면 각각의 새로운 틀을 만들고 자리를 잡는다. 자극을 받지 않을 때는 평온하고 안정적이지만 그것은 활력이나 별다른 변화가 없는 정태적인 상태다. 그러나 대류와 같은 구조는 사고의 활발한 움직임 속에서 점화되는 새로운 발아이며 역동적인 질서다. 그리고 이는 완전한 상태에 이르는 과정이 아닌 혼돈으로부터 질서로, 또 다시 혼돈에 이르며 끊임없이 반복하는 순환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수많은 번뇌 속에서 태어나고 반복되는 새로운 깨달음들이고 삶의 전환점들이다. (작가노트 중) ■ 김범중

Vol.20131204f | 김범중展 / KIMBEOMJOONG / 金凡中 / painting.drawing


노마드 NOMAD 4

변화하는 1980년대의 한국인의 삶에 대한 작은 기록 - 4



권태균展 / KWONTAEGYUN / 權泰鈞 / photography

2013_1204 ▶ 2013_1216

 

 

 


권태균_경운기위의아이들-경남 의령_198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1204b | 권태균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204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공휴일_11:00am~07:00pm / 마지막 화요일 12시까지


갤러리 룩스GALLERY LUX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Tel. +82.2.720.8488

www.gallerylux.net


한국인의 얼굴과 삶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사진 속의 얼굴들은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고, 나의 카메라에 담아졌습니다. '노마드'는 내가 좋아하고 즐겨 쓰는 말이기도 하고, 나를 표현하는 말이면 좋겠다고 생각 합니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던 나의 모습 그리고 나의 마음속 사진에 대한 느낌들, 그리고 사진 속의 노마드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20여년전 우리 삶의 모습이지만 그 사이 잊어버린 모습이 많습니다. 삶이 역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일상의 다양한 편린입니다.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삶의 얼굴을 묶었습니다. 사람이 어떤 모양을 하고 살아가는가에 대한 관심, 단순히 외양이 아닌 사람들의 어떤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이 그 주변의 상황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입니다. 낱장의 사진이 묶여 기록이 되는 과정을 탐구해 보았습니다. 언젠가는 역시 사진 속 박제가 될 우리의 삶을 성찰해 보자는 의미입니다. ■ 권태균

 


권태균_아이와창-경남의령_1980

 

 

권태균_얼씨구나-경남고성_1983

 

 

권태균_결혼식가는 부부-전남구례_1988

 

 

권태균_미류나무길-경북청송_1989

 

 

권태균_집으로-경북상주_1983

갤러리룩스는 2013년12월 4일(수)부터 12월 16일(월)까지 권태균의 개인전 『노마드』를 개최한다.이번 전시는 국내에서 다큐멘터리분야로 30여년 간 작업해온 사진작가 권태균의 「변화하는 1980년대의 한국인의 삶에 대한 작은 기록」이라는 연작시리즈로서 2010년 첫 전시를 시작으로 2013년 올해, 네번째를 마지막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개인전이다. 네 번의 개인전으로 풀어 낼 만큼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며 1980년대를 담아낸 방대한 권태균의 사진은 한국사의 생생한 역사이며 소중한 기록이다. 또한 그의 작품에는 역사를 바꾸는 커다란 사건이나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소한 생활 속에서 「미루나무 길(1989)」 처럼 시대를 따라 걷는 「의관을 정제한 노인(1988)」을 볼 수 있고 「가을 걷이 (1985)」 후 「경운기 위에 아이들(1981)」을 태우고 「집으로(1983)」가는 내 아버지를 만나 반갑게 과거를회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한다. ■ 갤러리 룩스

Vol.20131204g | 권태균展 / KWONTAEGYUN / 權泰鈞 / photography

ㆍ인사동 노화랑 4일부터 ‘꽃의 화가’ 송수남 매란국죽 유작전

한겨울 추위를 견디고 이른 봄 먼저 꽃을 피워 진한 향을 전하는 매화, 때묻지 않아 고결청초하면서 은은한 향의 난초, 꽃들이 져가는 서리 내리는 늦가을에 고고하게 꽃을 피우는 국화, 사시사철 푸른 데다 곧게 뻗어 강인한 기상을 지닌 대나무. 사계절과 때를 같이하는 매·난·국·죽은 각각의 특성이 덕과 학식을 겸비한 군자의 인품에 비유되면서 ‘사군자’로 불렸다.

동양 수묵화의 기본으로 중국 북송 때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사군자는 고려시대에 도입됐다. 선비정신을 상징하기도 한 사군자는 조선시대엔 문인 사대부 등이 문인화와는 달리 여가가 날 때 틈틈이 즐겼다. 요즘은 취미생활의 하나로 사군자를 즐기는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수만명에 이른다. 바쁘고 팍팍한 일상에서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보는 여유를 가지려는 몸짓의 하나이다.

여기 특별한 사군자 작품이 한자리에 모였다. 노화랑(서울 인사동)이 마련해 4일 개막하는 ‘남천 송수남, 매란국죽’전이다. ‘현대 수묵화의 거장’ ‘꽃의 화가’라 불리다 지난 6월 타계한 남천 송수남 전 홍익대 교수의 유작들이다. “내 장례식에는 모두가 화사한 복장으로 꽃을 들고, 생전의 좋은 추억을 떠올리며 참석했으면 좋겠다.” 남천은 생전에 이 같은 유언을 남겼다. 소탈하고 격의 없는 인간적 모습을 보여준다.



                                                                                       ‘매화’, 한지에 수묵담채, 34×40㎝



이번 전시회에 나오는 작품들은 남천이 전시회를 염두에 두기보다는 평소 틈틈이 수양하는 자세로,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며 먹을 갈고, 붓을 든 것들이어서 의미가 새롭다. 한 거장 화백의 속내가 오롯이 담긴 작품들인 셈이다.

남천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노승진 노화랑 대표는 “남천 선생은 생전 수묵화 운동을 이끌 때나 2000년대 들어 유명세를 치르게 한 ‘꽃그림’을 그릴 때도 사군자를 등한시하지 않았다”며 “마음을 안정시킬 때, 혹은 여유로운 마음을 그림으로 드러내고자 할 때 특히 사군자를 그렸다”고 회고했다.

화면 한 가득 소담스러운 꽃을 채운 매화, 옆에 있는 괴석이 ‘향에 취해 앓는 소리’를 내게 하는 난초, 붉고 노랗고 때론 푸른색인 국화, 현대적 조형성과 함께 먹의 농담이 조화를 이룬 대나무는 남천만의 예술세계를 보여준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붓질이 보는 사람까지도 저절로 평안하게 만든다. 평소 “가장 행복한 순간 중의 하나는 한지에 먹물이 스며드는 때, 그때의 묵향이 참 그윽하다”고 한 남천의 말이 떠오른다.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 동양화과로 전과한 남천은 상업주의·복고주의 등에 반발해 수묵화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2003년부터 유화 등으로 화사한 꽃그림을 그려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2005년엔 사군자 작품을 엮은 화집 ‘매란국죽’을 펴내기도 했다. 12월18일까지. (02)732-3558

 

인사동지역 갤러리 12월 전시일정
[스크랩 / 서울 아트가이드]

 

 

 

 

 


 

소리와 조형을 결합시키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는 정하응 작가. 김효원기자 eggroll@sportsseoul.com

 

정하응 ‘사운딩’. 김효원기자 eggroll@sportsseoul.com

 

정하응, ‘전파 거울’. 김효원기자 eggroll@sportsseoul.com

 

정하응, ‘ssaeng, 쌩, 生’. 김효원기자 eggroll@sportsseoul.com

 

설치작가 정하응이 최근작을 선보이는 개인전 ‘ssaeng, 쌩, 生’전을 오는 12월 15일까지 서울 인사동 갤러리3에서 연다.

지금까지 꾸준히 폐자재와 소리를 결합하는 작업을 선보여온 정하응은 이번 전시에서 삶의 찰라적인 순간들을 채집해 우리의 눈 앞에 재현하는 설치 작업과 이 작업이 나오기까지 밑바탕이 된 드로잉들을 다채롭게 선보인다.

가장 핵심이 되는 작업은 전시 타이틀로 사용된 ‘ssaeng, 쌩, 生”이다. 커다란 박스 형태의 구조물 양쪽에 모니터를 설치하고 전시장 밖에 CCTV를 달아 전시장 밖에서 벌어지는 풍경들이 실시간으로 나타나도록 했다. 구조물에 부착된 스피커에서는 자동차 소음을 비롯한 일상의 소음들이 쏟아져 나온다.

정하응은 “우리 삶에서 느껴지는 일상적이고 찰라적인 현상들에 대한 이야기하고 싶었다. 작품에 설치된 모니터에서는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찰라적 현상들이 나타난다. 삶이라는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담았기 때문에 ‘ssaeng, 쌩, 生”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일상은 항상 우리 곁에 있는 듯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것을 잊는다. 그렇게 흘러가는 일상을 사람들이 느껴보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업에서 자동차 소리, 자동차 이미지 등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빠르게 지나가는 속도의 시대에 대한 반성의 의미다. 이번 전시에서도 자동차 소음을 통해 현기증 나는 현대인의 삶을 에둘러 이야기하고 있다. 낡은 폐자재를 주로 사용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흔적이 담겨있는 낡은 폐자재를 통해 새 것만을 쫓아가는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게 한다. 이같은 작업을 통해 결국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소통이다. 아찔한 속도의 시대에 빠르게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작가는 “걸음을 잠시 멈춰 서서 자신과, 혹은 타자와 소통해보라”는 메시지를 타전하고있다.

이같은 정하응의 작업에 대해 미술평론가 변종필은 “사물에 내재돼있는 소리를 작가적 시각에서 재생하는 정하응의 작업은 우리가 무심하게 흘려보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지껄임같기도 하고 소음같기도 한 파편화된 소리와 폐품들의 조합은 태어났다 소멸하는 삶과 유기적 관계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소리와 조각을 연결하는 시도를 꾸준히 지속해온 정하응은 “내게 소리는 하나의 오브제다. 형태가 없는 오브제라고 할 수 있다. 조형과 소리를 연결하면 둘 사이에 상호작용이 일어난다”며 “앞으로는 사람의 언어를 이용해 시각적인 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소리 자체로 작업을 해보고 싶은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02)730-5322

[스포츠 서울]김효원기자 eggroll@sportsseoul.com


Heart-Land

권인경展 / KWONINKYUNG / 權仁卿 / painting

 2013_1120 ▶ 2013_1126

 

 

 


권인경_저장된 파라다이스_한지에 고서콜라주, 수묵채색_160×130cm_2013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0806a | 권인경展으로 갑니다.

권인경 홈페이지_http://www.inkyungkwon.com


초대일시 / 2013_1120_수요일_06:00pm

본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시행중인『Emerging Artists: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의 선정작가 전시입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Tel. +82.2.733.1045~6

www.grimson.co.kr


Heartland-유토피아의 입구에서 ● 권인경은 채색화 기법을 통해 풍경을 표현하는 작가다. 그런데 그 풍경은 전통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작품들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들이다. 권인경의 작품에서는 전통산수화에서 구사되는 먹과 붓의 흐름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화법에서 도입하지 않았던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기도 하고, 화면 구성 방식에 있어서도 오래된 책들의 낱장들이 화면에 콜라주 되어 시간성을 상징하기도 하며 다시 그 위에 몽타주 기법으로 그려진 다양한 이미지들이 작가의 주변을 둘러싼 소소한 일상의 사유와 경험을 시각화하는 이중적 콜라주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 권인경의 작품 속에는 논리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풍경이 한 화면 속에 혼재해있다. 작가의 생활 반경에서 발견되는 주택과 상점, 그리고 작가가 방문했거나 먼 곳에서 바라본 빌딩들이 일관된 시점과 비례에 맞지 않게 바위산이나 나무, 숲, 아스팔트 도로 등과 공존하고 있다. 종종 권인경은 작품 속에 배치시킬 건물이나 풍경을 의도적으로 왜곡시켜 고층 건물의 바로 앞에서 올려다 볼 때의 급격한 원근법적 묘사나 마치 하늘 위에서 불규칙한 굴곡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듯한 이미지로 대상을 표현하기도 한다. 작품 속의 장면들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실내에 있음직한 의자나 탁자 등의 가구들이 그 풍경 안에 더해지고 때로는 이러한 장면들이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권인경_저장된 파라다이스2_한지에 고서콜라주, 수묵채색, 아크릴채색_194×130cm_2013

 

 

권인경_펼쳐진 집_한지에 고서콜라주, 수묵채색_126×156cm_2013


이렇게 구성된 권인경 작품의 화면 안에는 해자(moat)처럼 풍경을 둘러싸거나 거의 둘러싸듯이 감아 돌아가는 물길이 자주 등장해왔다. 황색 계열의 화면에 남색으로 화면을 휘두르며 흐르는 물은 색상의 대비효과만큼이나 화면 속의 공간을 대비적으로 분리시킨다. 푸른색의 강물은 때로는 이편과 저편을 갈라놓는 듯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 물길로 인해서 고립되는 공간을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위협으로부터의 완충지대 역할을 수행하는 듯하기도 하다. ● 작가는 이렇게 창조된 공간을 Heartland로 명명한다. '심장부' 또는 '중심지'로 해석되는 Heartland는 지리학적인 좌표상의 중심이면서 마음속에서 관심을 집중하는 정신적인 사고의 중심지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 표현된 시각적 이미지들은 기억과 상상의 콜라주로서 작가의 심리적 heartland를 구성하는 요소들로 채워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암호해독 과정처럼 그 이미지를 읽어 나아갈 필요가 있다.

 


권인경_Heart-land_한지에 고서콜라주, 수묵채색_181.5×228cm_2013

 

 

 

권인경_경계의 바깥_한지에 고서콜라주, 수묵채색_130×96cm_2013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우리 인간의 성심리, 불안, 무의식과 잠재의식 등을 연구하여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연구 가운데 하나로서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적 불안을 외부에 표출하는 무의식적 반응 가운데 하나인 방어기제(defensive mechanisms)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연구 이론에 따르면 우리들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불안을 느끼면 이성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그 불안을 통제하기 어렵게 되고 오히려 무의식에 기반을 둔 판단과 행동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방어기제는 우리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불안과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함으로써 자아를 붕괴의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 동원되는 자기보호의 방법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 권인경이 작품을 통해 구축해가는 Heartland에는 외부의 어떠한 자극과 위협으로부터도 흔들리지 않는 유토피아적 안녕을 향한 자기보호와 행복 추구의 본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유토피아의 영토에 진입하기 전 단계에서 우리는 불안과 위협에 노출될 염려를 떨치지 못하는 시련의 과정을 겪을 수도 있다. 권인경의 작품 가운데 가파른 절벽 앞에 세워진 가상의 고층건물들이나 주변이 가라앉아 그 부분만 솟아오른 것처럼 좁은 땅위에 서있는 이국적인 건물들은「기억의 심연」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작가의 의식 속에서 지금까지 지나쳐온 심리적 불안과 시련의 단계를 시각적으로 회고하는 것일 수도 있다.

 


권인경_모호한 공간2_한지에 수묵채색, 아크릴채색_90×103cm_2013

 

 

 

권인경_가시돋는 나무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24×19cm_2013

권인경_녹는 나무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22×16cm_2013

권인경은 이제 Heartland를 지향한다. 작가는 그곳을 '그 어떤 외부적 요인에도 흔들리지 않는 요새'라고 한다. 그러나 요새는 이제 더 이상 지형적으로 방어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의 여유로 무장된 정신의 요새라고 할까. 작가는 Heartland의 가능성을 조금씩 엿보듯이 작품 속에서 방어적 구도를 이룬 경계의 지형을 조금씩 열어준다. 이제 강물은 작가의 Heartland를 보호하듯 에워싸지 않고 춤추듯 굽어 흐른다. 작가는 이러한 장면을「흐르는 시간」으로 명명 한다. 삶의 연륜이 쌓여갈 때 시간 앞에서 대상들을 관조하는 태도처럼 이제 작가가 새롭게 구축한 풍경에는 활짝 열린 원경의 강(혹은 바다)과 그 너머의 먼 곳의 산들이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게 화면의 구성요소로 등장한다. 색채 역시 이전보다 잘 정제되고 구도도 보다 깔끔하게 다듬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화면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면 그 안에는 구원의 상징인 십자가가 달린 아담한 교회의 모습도 작고 수줍게 등장한다. ● 권인경의 최근작「저장된 파라다이스」에서는 전통회화에서 볼 수 있는 괴석이나 식물 실루엣의 틀 안에 이제까지 작가가 구사해왔던 고서 콜라주, 이미지 몽타주, 작가 주변의 풍경과 사물의 데페이즈망 형식의 배치 등이 모두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공간이 코발트색 바탕을 배경으로 마치 우뚝 솟은 바위나 싱싱하게 성장하는 화분 속의 식물의 형상으로 대치되어 있으며, 그 안에서 유독 붉고 커다란 꽃송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작가가 드디어 Heartland의 입구를 발견한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 하계훈

Vol.20131120d | 권인경展 / KWONINKYUNG / 權仁卿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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