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 박선영 작가의 개인전 '감정의 자연展'이 2일부터 8일까지 서울 인사동 상상갤러리에서 열린다.

박선영 작가는 이번 전시회에서 실제 자연풍경을 사람의 모습으로 옮겨내고 있다. 또 때로는 사람의 모습에 자연풍광을 유입시키기도 한다. 박 작가는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지 않고 있다.

이번에 3번째 개인전을 여는 박선영 작가는 단국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회화과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교육산업신문 /김흥식 기자 0113142603@hanmail.net

동화약품과 부채표 가송재단이 접선(摺扇)의 아름다움을 현대미술로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이는 제4회 '여름생색’ 展을 오는 9일부터 22일까지 2주간 인사동 갤러리 공아트스페이스에서 개최한다고 3일 밝혔다.

‘여름생색’ 展에서는 매해 공모를 통해 선발된 가송예술상 본선 진출자 13인의 작품을 전시한다. 시각예술 전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신진작가들은 부채를 모티브로 다룬 작품과 부채로부터 파생된 의미나 이야기를 풀어낸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다

 

특히 2014년 가송예술상은 부채 장인과 협업을 위한 작품을 공모하는 ‘콜라보레이션’ 부문이 강화되어, 전통 예술과 현대 미술의 만남이라는 의의를 더욱 강조할 예정이다. 국내 유일의 접선장이자 전라남도 무형문화재인 김대석 장인의 작품, 민합죽선을 가지고 송용원, 신혜진, 장은우 세 작가가 협업을 거쳐 재해석 한 작품이 대중에게 소개된다.

인사동 공아트스페이스 제1, 2전시실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본선진출 작가들의 대표작도 함께 전시된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독특한 개성을 갖춘 젊은 작가의 기존 작품 전시로 관람객에게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할 예정이다. 전시 시작 전에 개최되는 시상식에서는 대상 1명(상금 1000만원, 공아트스페이스 개인전 개최), 우수상 1명(상금 500만원), 콜라보레이션상 1명(상금 500만원)을 선정한다.

 

동화약품 윤도준 회장은 “가송예술상이 젊은 작가 특유의 예술성을 바탕으로 부채의 아름다움을 재해석하는 의미 있는 장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며 “앞으로도 참신하고 뛰어난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동화약품과 부채표 가송재단의 ‘여름생색’ 展은 2011년 무형문화재 김동식, 김대석 부채 장인과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50인의 중견 및 신진작가들이 함께 참여하여 부채를 모티브로 작품들을 선보이며 처음 시작돼 올해 네 번째를 맞이했다. 2012년부터는 ‘가송예술상’으로 영역을 확대해 신진작가들의 가송예술상 본선 진출작을 전시했다. 2012년에는 최준경 작가가 대상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정찬부 작가가 대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세계일보 / 헬스팀 최성훈 기자 cshoon@segye.com

‘송윤주, 윤기언 2인전’이 갤러리그림손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 두 작가는 회화와 더불어 영상, 설치작품 등을 선보이며 관객들에게 보다 풍성한 전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송윤주 작가의 작품은 안료를 수십 차례 반복해 바른 후 송곳, 나이프 등으로 표면을 긁어내고 다시 덮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를 통해 작가는 형상의 생성과 소멸, 본질과 자아에 대한 자기수양적 성찰을 보여준다.

 

 

또한 작가는 전시의 주제를 태풍(太豊)으로 정하고, 전시를 통해 무한하게 펼쳐진 하늘과 모든 생물을 품어주는 대지 사이에서 살아가는 가족의 단란함, 풍요로움, 기쁨, 희망 등을 관객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반면 윤기언 작가는 얇은 한지에 세필을 이용해 섬세하게 선묘를 그려냈다. 또 손이라는 소재를 활용해 일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제스처를 화면에 옮겨 놓는 작업을 했다. 작가에 따르면, 묘사력을 키우기 위해 손짓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상징적인 기호이자 시각적인 언어로 손에 대한 흥미를 느끼게 되면서 주된 매개체로 사용하게 됐다.

 

 

▲ 미묘한 순간-깃발I

최근 작품에 등장하는 주된 소재 중 하나가 손이다. 처음 손을 그리게 된 것은 묘사력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지만 소통하고 교감하는 매개체로서 다양한 표정을 발견하면서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소리 없는 언어로서 손에 담긴 수많은 의미와 상징은 그림의 재료가 되고 수수께끼를 만드는 열쇠가 된다. 화면에서 세밀한 선묘와 농담의 변화, 얇은 한지의 중첩은 전통회화의 재료와 용구가 지닌 우회적이고 조용한 어법으로 일상의 시간을 차분히 살펴보게 한다.(작가노트 중)

 

한편 이번 전시는 내달 2일(수)부터 8일(화)까지 일주일간 종로구 인사동에 위치한 갤러리그림손에서 진행된다. 
 

제16회 춘추미술상 수상기념 초대전


최지윤展 / CHOIJEEYUN / 崔智允 / painting


2014_0625 ▶ 2014_0701 / 일요일 휴관

 

 

최지윤_날아가는 꿈 Ⅲ_천에 혼합재료_지름 51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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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윤 홈페이지_www.artchoi.com

 

 

초대일시 / 2014_0625_수요일_06:00pm

후원 / 백송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pm~06:30pm / 일요일 휴관

 

 

 

백송갤러리BAIKSONG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31-8 (관훈동 197-9번지)

Tel. +82.2.730.5824

www.artbaiksong.com

 

 

 

현대미술을 규정하는 하나의 양상 혹은 흐름이라 할 수 있는 특징들이 있을 것이다. 동시대의 자화상이라 할 만한 첨단에의 강박을 담아내기 위한 작가적 성찰의 결과물들은 역설적으로 또 하나의 강박을 노출하게 되는데, 이는 자연에 대비되는 화학적 순수, 기계적 정교함, 건조하고 치밀한 분할과 배열 등이 대표적인 표현양식으로 반영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현대미술의 좌표 위에 우리가 위치한 자리에는 감상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관음증적 시선으로 그것들을 대할 수밖에 없는 모종의 강요가 숨겨져 있기도 하다.

 

 

최지윤_날아가는 꿈 V_천에 혼합재료_지름 73cm_2014

 

최지윤_달콤한 꽃_천에 혼합재료_33.3×24.2cm_2014

 

최지윤_달콤한 꽃_천위에 혼합재료_33.3×24.2cm_2014

 

최지윤_찰나 (The moment)_장지에 혼합재료_162×260cm_2014

 

최지윤_날아가는 꿈 II_천에 혼합재료_지름 90cm_2013

 

최지윤_달콤한 꽃_천에 혼합재료_45×45cm_2014
 

 

작가 최지윤의 작업들은 여기서 한 발 벗어나 있다. 소소한 일상의 풍경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물과의 교감과 동화, 그리고 이입을 통한 시적 체험의 기회를 지극히 세련된 방식으로 제공한다. 리각미술관이 2013년을 마무리하는 전시를 최지윤의 작업으로 기획하면서, 학예실 내부에서 이견이 없었던 점은 아마도 이런 몰입과 관조에 대한 갈증과 욕구를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그의 작업에‘범대중적 감성의 초점’이 존재하는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이다. ■ 이상원

 

 

Vol.20140625b | 최지윤展 / CHOIJEEYUN / 崔智允 / painting

 

 

 


행복한 북한아이들 Happy North Korean Children

천민정展 / CHEONMINA / 千珉正 / photography.painting

2014_0626 ▶ 2014_0729 / 월요일 휴관

 

 

천민정_Happy North Korean Children 1-1_아카이벌 디지털 프린트_110×160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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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0703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트렁크갤러리TRUNK GALLERY

서울 종로구 소격동 128-3번지

Tel. +82.2.3210.1233

www.trunkgallery.com

 

 

 

'북한'이라는 극장의 '행복한 아이들' ● '북한'이나 한국의 분단 체제를 다룬 미술 작품은 이전에도 있었다. 한참 위로는 손장섭의 회화 시리즈부터 남북 관계의 이중성과 시차적 관점을 그린 박찬경의「Flying」, 남한과 북한 사이에 가상 국가를 세운 양아치의「미들코리아」등이 있다. 천민정의 '폴리티컬 팝' 시리즈는 앞에 열거한 작품들보다 훨씬 간결하게 이미지 생산이라는 미술의 원초적인 목적에 충실한 회화 작품이다. 하지만 천민정의 작업을 단순히 팝아트라는 장르로 구분 지어 형식적인 결과물만 놓고 판단하기에는 우리 사회의 집단 무의식에서 '북한'이 자리 잡고 있는 부분이 너무 크다. '북한'과 연결된 천민정의 작업을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미국에서 생활하고 작업하면서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고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작가의 물리적인 위치나 여성 작가로서 가질 수 있는 미시사적 접근 등 부차적인 요소를 고려해볼 수 있다. 어쨌거나 천민정이 주목하는 지점은 '북한'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는 남한 사회에 대한 비판적 해석만이 아니다. 그보다 정치적 상징으로서의 '북한'이, 거기다가 실제의 북한이 아닌 권력 세습을 위한 형태로 포장된 '북한'이 말 그대로 '소비'되는 현대 사회의 인식 양상을 보다 직접적이고 직감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천민정_Happy North Korean Children 1-2_아카이벌 디지털 프린트_110×160cm_2014

 

 

천민정_Happy North Korean Children 2-2_아카이벌 디지털 프린트_110×230cm_2014
 

 

천민정의 '폴리티컬 팝' 시리즈를 끌고 가는 화자는 '김일순'이다. '김일순'은 작가가 만들어낸 캐릭터이자 예술적 페르소나로, 허구의 인물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자는 작가의 셀프 이미지로 구체화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작가의 셀프 이미지는 북한에 대한 가장 상투적인 모습들, 이를테면 찬양하고, 행군하고, 경례하는 장면들을 만들어내고, 이 장면들은 무한 반복된다. 이것은 시대적 상황을 재현하거나 비판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북한'이라는 국가를 상징화하고, 우리가 매우 편향적으로만 인식하는 북한 체제에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장면들의 배경에는 롤리팝 스트라이프나 공간 묘사의 디자인적인 요소 때문에 의미론적인 부담감을 경감시키고, 역사적인 무게감으로부터 탈피한다. 한편, 반복 등장하는 셀프 이미지는 일부분 분열 적인 개인의 상태를 고백하는 방법으로도 해석된다. 과장된 미소와 포즈는 물론 '북한'에 대한 우리의 전형적인 상상이자 상투적인 미디어 콘텐츠 이지만, 구체적인 정치적 상황에서 배제된 자가 스스로 만든 프레임에서 한바탕 놀아보는 유희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작가의 셀프 이미지가 반복 등장하는 천민정의 그림은 서울에서 불과 50Km 남짓 되는 거리에 위치하는 '북한'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이해가 얼마나 편협하고 단순 한지를 풍자한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 지겨운 북한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비정하게 말하는 듯 하다. 그런 면에서 천민정의 '폴리티컬 팝' 시리즈는 미술 작품의 사회 정치적 야망을 아주 냉정하게 제한한다. 아니, 그림의 예술적 가치가 사회적인 기능을 태연하게 분리하고 그 한계를 받아들인 듯 하다.

 

 

 천민정_Happy North Korean Little Bo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22×4cm_2013

Courtesy of Ethan Cohen New York Gallery

 

 천민정_Happy North Korean Little Girl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22×4cm_2013

Courtesy of Ethan Cohen New York Gallery

 

 

이번 전시에서 가장 흥미롭게 다가오는 지점은 '북한'이라는 '극장 국가'에 아이들을 연결하면서 작가가 남겨둔 감정의 여백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작가의 아들 걸슨과 딸 사샤로, 각각 '김시운'과 '김시아'라는 이름의 캐릭터를 연기한다. 빨강과 노랑의 원색으로 단순하게 재단한 극장 무대 위에서 아이들은 교복을 입고, 자동적인 웃음을 지으며, 찬양하고, 동작한다. 시운과 시아의 행동들은, 일순의 그것처럼 반복해서 보여진다. 이 단순 반복적인 이미지는 분단 국가의 정치 문화적 공허함을 호소하거나 달래주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반대로, 작품 속에서 매끈하게 처리가 끝난 상황 자체가 단절하는 '실제성'이 강력한 아련함이 되어 아직까지도 불명확한 감성을 건드린다. ■ 권진

 

천민정_007 Ms. Kim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22×4cm_2013

Courtesy of Ethan Cohen New York Gallery

 

 

Vol.20140626e | 천민정展 / CHEONMINA / 千珉正 / photography.painting

저 언덕으로

신장식展 / SHINJANGSIK / 申璋湜 / painting

2014_0618 ▶ 2014_0629

신장식_저 언덕으로-우주인플레이션 cosmic inflation; 중력파 gravitational wave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291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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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식 블로그_blog.naver.com/artsjs

 

 

초대일시 / 2014_0618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노암갤러리

NOAM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82.2.720.2235~6

www.noamgallery.com

 

 

 

"저 언덕으로"는 /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건너감"에서 나왔다. // 저 언덕은 / "아리랑 고개"일수도 있고, / "금강산"일수도 있고, / "수행의 완성, 최상, 최고에 이르는 삼매"일수도 있다. / "pāramitā 波羅蜜"에 대한 나의 해석과 행(行)일수도 있다. //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 고통의 이 세상에서 고통이 없는 저 피안의 세계로, / 현실의 차안(此岸)에서 이상의 피안(彼岸)으로 향하는 / "희망의 아리랑"이다. ■ 신장식

 

신장식_저 언덕으로 - 금강산 천화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0×333cm_2014

 

신장식_저 언덕으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162cm_2013

 

신장식_비오는 만물상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182cm_2014
 

 

언젠가 신장식은 자신에 대해 "내 인생에 50대는 길 위의 수행자다."라고 말한 바 있다. 나로서는 그가 종교적 발심으로 스스로를 수행자로 규정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예술가의 길도 수행자의 길이며, 그림도 수행의 도구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찾으러 세상을 그렇게 다니고 동서고금을 헤맸나? 조금의 빛이라도 표현해낸다면 좋겠다. 나는 그림으로 '희망의 아리랑'을 노래하고 싶다."라고 했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말한 수행자는 '길을 찾는 사람'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 스스로 길 위의 수행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처럼 신장식은 여행을 좋아한다. 그에게 있어 여행은 단지 일상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재충전을 위한 휴지(休止)의 시간이거나 열심히 일한 자신에게 제공하는 보상(報償)이 아니다. 그는 무언가를 찾는 사람이고, 그 대상이 떠오르면 계속 몰입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는 산치대탑에서 무불상시대 석가모니부처가 보리수나 발자국, 법륜으로 표현된 것을 발견했고, 탁실라박물관에서 헬레니즘과 로마미술이 불교와 습합하여 나타난 간다라불상을 발견했다. 사르나트박물관에서는 5세기 인도 불교미술의 걸작과 만났으며,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을 때는 이 길에서 죽어간 무수하게 많은 구법승들의 고행과도 만났다. 탈레반이 출몰할지도 모를 간다라지역의 길기트에서 마애불을 보았을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가 함께 했던 여행이 결코 고행은 아니었다. 어쩌면 실크로드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즐거운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실크로드에서 돌아온 후 그는 혼자 경주 남산으로 갔다. 서산마애불과 같은 부조의 경우 빛의 양과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시간을 달리하며 그곳을 찾기도 했다. 비단 불상뿐만 아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의 전거(典據)를 찾아 열심히 불교공부에도 매진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 그의 대화주제는 온통 불교로 가득하다. ● 금강산여행이 열리기 전 금강산을 그릴 때도 그랬다. 금강산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모으고, 조사, 연구하며 그것을 화면 위에 재구성했다. 이러한 열정은 금강산 개방 후 수많은 현지답사를 통해 그를 '금강산화가'로 만드는 동력이기도 했다.

 

신장식_삼매 Samãdhi_캔버스에 한지, 아크릴채색_73×117cm_2013

 

신장식_저 언덕으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146cm_2014

 

 

 

 

신장식_아리랑-기원_캔버스에 한지, 아크릴채색_227×364cm_1992

 

 

 

열정이 과도하면 집착이 될 수 있지만 불상을 그리는 것도 어떤 원력(願力)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는 신앙심에 이끌려 예배의 대상인 불상을 그리고 있지는 않다. 어쩌면 불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깃들어있는 깊은 사유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불상을 방편으로 삼았는지 모른다. 마치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이러한 앎에의 욕구란 동기가 작용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직관적이면서 동시에 분석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 아리랑으로부터 금강산, 그리고 불상에 이르기까지 신장식의 그림 속에서 갈등과 대립은 없다. 그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그가 찾는 것은 '희망의 아리랑'이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분명하게 단언할 수 없지만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빛과 같은 것을 찾아가는 것. 그것에 대해 도달하기 위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있고(위빠사나), 집중할 수도 있고(사띠), 그것조차 여의고 지극히 무념무상한 상태(사마디)에 들 수도 있다. 예술의 길과 선정의 길은 다르다. 그 다름이 예술을 풍요롭게 만드는 요인이지만 현실의 고통을 넘어서 궁극으로 가고자 하는 것에는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반야바라밀은 불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에도 필요한 것은 아닐까. ■ 최태만

 

 

Vol.20140618d | 신장식展 / SHINJANGSIK / 申璋湜 / painting

 

 

 

 

 

 

 

 

 

 

 

 

Sentimental Scenery II

헬렌 정 리展 / HELEN CHUNG LEE / photography

2014_0618 ▶ 2014_0624

 

 헬렌 정 리_그대와 영원히(Together Forever)_캔버스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71.1×116.8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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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정 리 홈페이지_www.helenchunglee.com

 

초대일시 / 2014_0618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6월24일_10:30am~12:00pm

 

 

리서울 갤러리

LEESEOUL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23-2번지

Tel. +82.2.720.0319

www.leeseoul.com

 

 

새로운 세계를 향한 꿈 ● 그간의 형이상학적 예술경향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은 현상의 배후에 실재한다고 본 본질, 본원, 가치 그리고 이것을 토대로 한 논리, 이성, 분석적 표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형이상학적 논리와 이성으로 인해 파행되었다고 본 실존의 진정성을 되찾기 위해 감성과 직관을 회복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예술경향은 정신분석학의 발달과 함께 심리적이고 생리적인 측면이 부각되면서 전체보다는 개별과 개체에 대해 많은 의미부여가 가능토록 하였다. 개체는 작고 사소한 것이지만 드디어 하찮은 것에서 벗어나 소우주로서 생기를 되찾게 되었다.

 

 헬렌 정 리_펭귄 트리오의 여행(Traveling Penguin Trio)_캔버스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71.1×71.1cm_2014

 

 헬렌 정 리_사랑海(Sea of Love)_캔버스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1×101.6cm_2014

 

 

헬렌 정 리가 "시선을 잘 끌지 못하는 작고 하찮은 사물들을 통해서도 다양한 꿈을 꿀 수 있다"고 한 언급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그녀의 예술경향을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녀의 작품은 나무옹이와 전복껍질과 같은 사소하고 하찮은 사물들의 색택과 문양과 결을 환타스틱하게 드러낸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재현적 매체인 사진을 활용하여 자연이 지닌 모습을 있는 그대로 확대하여 이끌어낸 것이다. 흔하게 접할 수 있지만 쉽게 놓치는 곳에서 그녀는 기존의 정의된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제시한다. 여기에 더하여, 그녀는 작고 사소한 개체에 대한 접근 또한 기성의 형이상학적이고 논리적이며 이성적인 추론방식에서 벗어나 있고, 사소한 개체에 대해 감각적이며 즉물적인 접근방식을 취한다. 그녀는 2007년부터 꾸준한 작품 활동을 통해서 우리가 그동안 간과했던 자연물의 일부분을 있는 그대로 사진에 담아내고 그 위에 연상적으로 떠오른 그녀의 심상을 아크릴 물감으로 최소한의 구상성을 가미시켜 환상적인 이미지들로 제시해 왔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작가의 일련의 작품들은 우리들에게 정경융합(情景融合)된 새로운 일루젼의 세계에 빠져들게 한다.

 

 헬렌 정 리_바람의 기억(Memory of the Wind)_캔버스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1×101.6cm_2014

 

헬렌 정 리_청춘 달동네(Moon Village)_캔버스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1×101.6cm_2014

 

최근에는 사진에 회화적 기법을 접목시키지 않고 오직 원본 사진 이미지를 이용하여 '달맞이', '페퍼민트 산', '거위의 꿈', '내 안에 너 있다'등 인위적 조작성을 극도로 배제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인위적 터치를 최소화함으로써 작고 사소한 나무옹이와 전복 껍데기이지만 그 안에 펼쳐진 무궁한 우주적 파노라마에 우리들의 감성이 스며들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상태 위에 작가는 최소한의 개입을 하는데, 그 개입은 개체 사물이 발산하는 우주적 이미지 위에 작가의 심상이 부여된 이미지들을 반영함에 의해서이다. 이것은 주로 작품 주제어로서 개입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추출된 주객이 융합된 이미지들은 무한한 우주적 환영과 인간의 서정을 새롭게 융화 회통할 할 수 있게 하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은 그간의 형이상학적 문명체계에서 벗어나 실존의 진정성을 찾아내려는 포스트모던적 새로운 세계에 대한 그녀의 열망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헬렌 정 리_이도공간(Inner Senses)_캔버스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71.1×71.1cm_2014

 

이번 전시회 또한 작고 사소한 것에 대한 인위적 제시가 최대한 배제된 무작위적(無作爲的)이고 감성적이며 순수한 조응을 추구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녀는 개체 대상과의 만남과 작품과의 소통에 대해 미리 설계하지 않는다. 그것은 망망대해를 가르고 가는 정해져 있지 않은 항로 위의 배와 같아서 실존의 진정성에 대한 감각적이고 직관적이며 감성적인 접근태도를 갖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감성을 통한 새로운 세계와 만나고 감응하고자 하는 그녀의 순수한 갈망에서 비롯한다. ■ 김선옥

 

 

Vol.20140618a | 헬렌 정 리展 / HELEN CHUNG LEE / photography

2014 OCI YOUNG CREATIVES

민진영_박경진 2인展

2014_0612 ▶ 2014_0709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4_0612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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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망한다. 의미가 생성되는 장소를 ● 민진영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상은 집이다. 그녀의 작품은 다락방이나 계단 등의 공간에 대한 기억을 표현한 것이 많다. 그러다보니 건축적 형태를 지니고 있으나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건축공간이 아니라 심리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 반복하는 계단작업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과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결합해 놓은 것으로서 지하공간에 있을 때는 밝은 빛을 찾아 위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을, 그러나 막상 옥상으로 올라갔을 때는 땅으로 내려가고 싶은 심리적 동요를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양가감정은 두 개의 지붕이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지붕과 지붕」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바닥이 지붕으로 이루어진 이 집은 거주할 수 있는 집이라기보다 집에 대한 작가의 기억과 그것이 만들어낸 복잡한 심리상태를 나타낸다. 그래서 이 집은 대지 위에 세워지지 않고 허공에 매달려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제작한 동기에 대해 보편적인 집에 대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기억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했다. 즉 어린 시절 집에 대한 기억이 두 지붕을 하나로 결합한 형태로 만들도록 했다는 것인데 아마도 한 채의 집에 여러 가구가 함께 살았던 경험으로부터 이러한 형태가 나온 것은 아닐까. 또 작가는 각 집마다 그들만의 고유한 가정사가 있기 마련인데 두 개의 집을 하나로 결합한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를 남들이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작했다고도 했다. 이런 점은 그녀의 작품이 건축의 재현이 아니라 마음의 표상임을 드러낸다. 주기적으로 켜졌다 꺼졌다 하는 조명은 이러한 심리의 은유라고 할 수 있다. ● 육각형의 긴 터널처럼 보이는「지붕과 지붕 사이」는 2009년에 제작한「그에게는 아이가 없다(He has no child)」의 연장선에 있다. 감성적이면서 내러티브가 있는 제목의 이 작품의 기본 형태는 역시 집이다. 그러나 이 집은 견고한 재료로 건축된 것이 아니라 텐트로 만들어진 가설물이다. 터널처럼 긴 형태의 임시 주거공간의 양 끝에는 각각 다른 영상이 투사되고 있다. 한쪽에는 슬라이드를 이용한 29컷의 표지판이 3초 간격으로 반복되고 있고, 맞은 편 벽의 창으로는 터널 속 영상이 반복된다. 공사중, 야생동물조심, 어린이 보호 등 사람들에게 익숙한 픽토그램을 작가가 개인사와 결부시켜 임의적으로 변형한 이 표지판은 작가와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민진영_연약함, 위대함_레진, 아크릴, 섬유, 조명_365×146×89cm_2014

 

 

작가는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경기도 성남으로 이사했다. 당시 분당 신도시가 한창 건설 중이었기 때문에 작가는 아주 자연스럽게 공사현장의 풍경에 익숙해졌다. 우리가 흔히 '드럼통ï이라 부르는 금속용기 속에 시멘트로 빚은 산과 구릉을 배치하고 그 주변을 비계와 안전그물로 감싼「특이한 대상(unusual objectⅡ)」 역시 신도시 건설현장에서 목격한 장면을 재연해 놓은 것이다. 그것은 건축 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대에 볼 수 있었던 일상의 풍경이자 작가가 어린 시절 주변에서 늘 보았던 풍경이기도 했다.「그에게는 아이가 없다」는 한 벽면에 투사된 공사장의 삽이나 기중기, 화물열차, 버스 등과 같은 픽토그램 또한 어린 시절 일상적으로 보았던 공사현장에 대한 기억을 반영하고 있다. 다만 이 그림문자들이 작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금씩 변형되면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개발된 픽토그램은 제목이 암시하듯 개인의 경험을 고백하는 상징이자 기호로 전치된다. 3초 간격으로 화면을 스쳐 지나가는 이 픽토그램들은 개발, 건설 등을 통해 새로운 문명이 생기는 것에 대한 동경과 사라져가는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란 양가적 감정을 표현한 것이자 동시에 아버지와 작가 사이에 있었던 불편함을 단순한 이미지로 토로한 은유의 결과물이다. 맞은편 창문에 상영되고 있는 터널의 이미지 역시 기억이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입구이자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이다. 질주하는 자동차의 소음보다 더 크게 들리는 슬라이드 프로젝터의 기계음은 작가가 걸어놓은 수수께끼이자 자기고백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감추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즉 텐트로 상징되는 임시주거공간과 픽토그램 사이에 가로놓인 그 간극 속에 개인사가 은밀하게 스며들고, 동일한 영상이 반복되는 터널의 이미지는 이 개인사의 미궁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지만 정작 그 세계로 들어가기에 작가가 깔아놓은 복선이 많기 때문에 그 내용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자신의 개인사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과 숨기고 싶은 것이 밝혀졌을 때 느낄 수 있는 부끄러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의 진자운동과 같은 상태를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건축적 구조물이자 마음의 상태가 만들어낸 심리의 건축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 민진영의 작품에 중요한 요소로서 빛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감성과 감정, 심리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작품에 인공조명을 도입하는 경우가 많다. 빛에 대한 기억은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5세 때 시내에서 만취한 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버지를 모시고 집을 찾아 어두운 산길을 헤맨 일이 있다고 한다. 아직 어린 아이였지만 안전한 집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버지를 이끌고 출발했는데 산간지역이라 집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드문드문 켜진 불빛을 보면서 간신히 집을 찾아갔다는 것이다. 그때 느꼈던 공포와 불빛이 제공하는 안도감, 마치 막막한 어둔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의 불빛처럼 반갑고 고마운 불빛이 그의 작품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노출시키는 장치로서, 개인들의 역사를 밝히는 길잡이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민진영_어둠의 깊이_아크릴, 섬유, 조명_80×61×41cm_2014
 

 

작가가 특별히 집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가족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독신세대가 늘어나면서 원룸이나 독신자아파트가 늘어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집은 역시 한 가족이 거주하는 공간일 경우가 많다. 그곳은 노동에 지친 내 육신이 쉴 수 있는 공간이자 가족 간의 연대가 실천되는 작은 공동체이자 은신처이며, 내 신체와 피부의 연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천막으로 산봉우리를 만들고 그 내부에 일정한 간격으로 꺼졌다 켜졌다 하면서 각각의 봉우리로 옮겨가는 조명을 설치한「Individuality in Mountain」은 '집=가족=안식처ï란 등식을 위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관념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작품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 작품은 일본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코레다 히로가츠(是枝裕和)의 영화「아무도 모른다」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영화 속에서 아버지는 각자 다르지만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네 형제가 허름한 아파트로 이사를 온다. 어머니는 아버지 없이 네 형제를 키운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집을 빌릴 수 없었기 때문에 집주인에게 남편은 해외에 근무하고 있으며, 아들과 단 둘이 산다는 거짓말로 간신히 허름한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남자를 만난 어머니가 아이들을 무책임하게 방치한 채 떠나버리자 남겨진 네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결국 굶주림에 지친 막내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고까지 당해 죽자 나머지 세 아이들은 죽은 막내의 시신을 여행가방에 담아 공항으로 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실화를 바탕으로 가족 간의 사랑, 신뢰, 존중, 보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이 영화를 모티브로 했다는 점에서 그만큼 작가 자신도 가족의 의미에 대해 심각하고 진지한 고민과 성찰 아래 이 작품을 제작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작품에서 각 봉우리를 하나의 집이자 가정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의 연장은 곧 사회이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도 가족은 때로 혈족적 유대를 해체할 정도의 서먹함, 불편함, 서운함, 실망과 분노의 진원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각자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는 봉우리를 넘나들고 있는 불빛은 관계의 단절에 의해 야기된 가족해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소통의 신호이지 않을까.「집을 읽다Ⅲ」에서 원형의 비닐하우스를 따라 빛이 움직이는 구조물은 집을 지시한다기보다 집과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가족에 대한 작가의 이러한 불편한 마음을 상징한다. 몇 개의 지지대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비닐하우스 구조물은 집이라기보다 동굴에 가깝다. 이러한 동굴로서의 집은 주거공간이라기보다 공중에 매달린 누각이거나 계속 원점으로 회귀하도록 설계된 터널이다. 비록 투명하지만 동굴을 연상시키는 이 구조물은 집에 대한 공포, 세상에 대한 막막하고 불편한 심리의 표현이다.「집을 읽다Ⅰ」의 바퀴가 달린 계단 두 대로 연결된 터널 혹은 아케이드 역시 정주가 아니라 유동적인 가족관계를 은유한다. 어떤 한쪽에 압력이 가해질 경우 아슬아슬하게 지탱되던 균형이 무너지고 위에 놓인 터널과도 같은 구조물조차 추락할 것만 같은 위기는 그가 느끼고 있는 불편함의 근원이 집이라는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의 관계에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구조물을 투명한 비닐로 만든 것은 들키고 싶지 않은 개인의 내밀한 감정이나 감추고 싶은 치부가 거주하는 장소가 실제로는 투명하기 때문에 은폐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민진영_Between roof and roof_아크릴, 섬유, 이동조명_28×110×24cm_2012~14

 

 

민진영_연약한 공기_영상, 섬유, 스틸_60×240×57cm_2014_부분
 

 

집을 중심에 놓고 자신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는 양가감정에 대해 말하고 있는 민진영이 정작 표현하고자 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은신처이다. 비닐로 만들었든 천막으로 만들었든 집은 그의 피난처이자 은신처이며 몸과 마음이 되돌아가서 쉴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심리적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회주의 국가가 된 폴란드 바르샤바의 1956년을 시대배경으로 마레크 플라스코가 쓴 소설 『제8요일』의 여주인공 아그네시카는 "벽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면의 벽, 아니 삼면이라도 좋겠지? 삼면이라도 방이 될 수 있을까? 그런 방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그런 방이 어디 없을까?"라고 되뇌인다. 이 소설은 공산주의의 감시와 억압 앞에서 느끼는 평범한 연인들의 절망과 허무를 표현한 것이지만 민진영에게 필요한 것은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방이 아니라 마음의 피난처이다. 그래서 그가 표현한 집은 마음의 영역이 생성되는 터전이라고 볼 수 있다. 바다를 매립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테트라포드에 마치 광배처럼 원을 그리며 순환하는 빛의 길을 결합해 놓은「코라」는 이러한 생성으로서의 공간을 해명하는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코라(chora)는 원래 플라톤이 『타마이오스』에서 어머니인 코라가 아버지인 형상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식들인 우주가 형성된다고 말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특정한 장소를 일컫는 것이라기보다 출발, 시작, 원인으로서의 터전을 의미한다. '코라 세미오틱ï이란 여성주의적 의미생성의 개념을 제안한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코라를 무의식을 조명하는 중요한 열쇠로 파악했다. 크리스테바는 잔혹극과 광기의 연극을 추구한 아르토(Antonin Artaud)를 연구하면서 코라에 대해 집적소(réceptacle)로서 가변적인 장소(lieu)를 나타낸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코라는 사회적으로 질서 잡힌 모든 상징체계로부터 벗어나 가장 근원적인 차원의 생성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크리스테바는 코라의 두 가지 성격에 대해 첫째, 형이상학적인 틀(matrix)로서 측정할 수 없는 태초의 물질이 구성되기 이전의 땅이자 카오스가 생성의 운동을 전개하는 장, 둘째, 움직임과 정지가 이루어지는 코라는 언어적인 관점에서 욕망으로부터 분절되며 '비표현적인 총체ï라고 정의했다. 이런 관점을 따라가자면 코라는 좁게는 임신과 출산을 가능하게 하는 여성의 자궁이자 언어로 규명할 수 없는 무의식이 활동하는 에너지가 생성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테트라포드는 다리를 벌리고 있는 여성의 인체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에너지가 외부로 발산되기보다 내부로 집적되면서 분열과 융합을 거듭하는 공간이자 장소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이 구조물에 대해 '바다의 습기를 빨아들이는 기구ï라고 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혼돈과 질서가 결합된 운동의 지속으로서 카오스모스를 형태로 표현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벗어나고 싶지만 다시 돌아와야 할 장소, 그곳은 나의 집일수도 있고 유동하는 내 마음이 잠시 머물러야 할 영역일 수도 있다. 집은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한 물리적 장소라기보다 의미가 생성되는 내 마음의 영역이다. 그래서 나는 소망한다. 물결치듯 일렁거리는 내 마음 속의 에너지가 새로운 의미로 거듭나는 장소로서의 집을. ■ 최태만

 

 

민진영_연약한 공기_영상, 섬유, 스틸_60×240×57cm_2014_부분
 

 

인재(人災)를 성찰하는 회화 - 반경 0km 혹은 좌표0000 ● 박경진의 회화는 재난, 특히 인재와 그것이 유발하는 사회, 심리적 영역을 탐구한다. 지진, 해일과 같은 자연재해 또한 전쟁, 테러, 사건 사고와 같은 사회적 재난처럼 구조, 대비 소홀로 이내 인재로 변환되기 쉽다는 점에서, 그것들로부터 야기된 공포, 불안, 혼란은 자못 심대하다. 인재란 우리가 터너(William Turner)의「난파선」,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의「메두사의 뗏목」의 경우처럼 자연 재해의 공포 이면에서 찾아졌던 자연에 대한 숭고(sublime)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재난이기 보다는 인재를 탐구하는 그의 회화는 차라리 뉴욕의 9.11테러 혹은 후쿠시마의 대지진과 쓰나미를 잇는 원전 폭발의 공포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 만큼, 그의 회화에 드러난 재난은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못한 채 현재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근접한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발원한다. 그런 면에서 박경진의 회화에 나타난 재난이란 공동체의 삶을 일순간에 붕괴시키는 폭압적 사건에 대한 결코 '망각되지 못하는 집단 기억의 귀환ï이며, 집단 구성원들의 심층에 트라우마로 자리 잡아 그들의 삶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악몽 같은 현실의 재생ï이 된다. 박경진이 작가노트에서 밝히고 있듯이, 후쿠시마 원전 폭발은, "미디어를 통해 인재(人災)와 관련한 사건 사고를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듯 허구적으로 받아들이던 태도"로부터 자신에게도 발생할 수 있다는 인식의 변화를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작가에게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구체화시킨 것은 최근의 세월호 침몰 사건이었다. 허구와 현실이 혼재된 채 미디어를 통해 받아들였던 재난이 인재라는 현실로 확연히 인식되게 만든 두 사건은 박경진의 최근 회화를 인재 시리즈에 골몰하게 만드는 주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 재난 미술 - 예술의 사회학과 관계 미학. 인재 시리즈에 천착하기 이전의 박경진의 작업은 자본주의 구조와 사회적 현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드러내는 특정 인물군의 집단초상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졸업식」, 「29연대 훈련병」,「가을신상패션쇼」, 「모터쇼」와 같은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교복, 군복, 유니폼 속에서 위계화된 집단의 속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정면성, 전신상과 같이 전형화된 유형학(typology)적 초상은, 제 각기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 개별자들을 익명화시켜 군상 속으로 사라지게 만든다. 기념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몸에 재배치되는 이러한 사회적 계보학(genealogy)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은폐한 채, 작가의 말처럼 '패키지 된 추억ï에 대한 소비와 더불어 '일시적 추억의 열람ï만을 가능하게 할 뿐이다. 우리에게 '집단화된 기억ï을 공유하게 만드는 발원지는 일련의 정치, 사회적 사건들이다. 그것의 본질은 대개 은폐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본질적 국면을 더듬어 추적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인간 사이의 상호관계성을 읽어낸다. 일련의 사건이 거대 사고이거나 인재일 경우는 그 파장이란 자못 심각하다. 기존의 사회적 구조를 재편할 필요성이나 맥락을 재질서해야만 할 당위성마저 제기되는 것이다. 인재를 회화적 주제로 탐구하는 박경진의 작품에는 이러한 사회학의 지평이 펼쳐져 있다. 예술이 사회를 대면하는 루카치(György Lukács) 류의 예술사회학, 혹은 예술의 사회 참여적 역할을 모색하는 부리오((Nicolas Bourriaud)식의 역동적인 '관계미학(Esthétique relationnelle)ï의 관점이 담겨져 있다. 그의 작품은 실제의 정치에 의해서는 결코 성취될 수 없는 목적점을 지향하는 랑시에르(Jacques Ranciere)식의 '정치적 예술ï 혹은 '비판적 예술ï의 메타정치와 같은 행보를 이어나가기조차 한다. 박경진의 예술을 통한 비판적 발언은 사회 구조적 모순에 대한 저항을 통한 변혁을 꾀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불가항력의 천재지변과 같은 1차적 재난을 뒤따르는 인재로서의 2차적 재난, 그것을 은폐하는 권력의 폭압과 미디어의 음모, 그리고 대중 스스로 그들에게 은폐된 채널을 복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인간과 사회의 상호작용의 관계성과 그것을 탐구하는 예술의 역할의 효용성에 대한 문제 제기라 할 것이다.

 

박경진_반경 0 Km #.10_캔버스에 유채_130×166cm_2014
 

 

인재 원점 - 반경 0km 혹은 좌표0000. 그의 인재 시리즈 작품이 예술 안의 문제보다는 예술 밖의 관계, 즉 사회적 맥락에 더 골몰한다는 점에서, 부리오의 관계미학에서 변환의 상호관계성으로 주창되는 이행성(transitivity은 그의 회화에 있어 주요한 조형적 실천이 된다. 사전적 정의에서 이행성이란 "집합의 세 원소 a, b, c에 대해 a R b와 b R c 관계가 성립하면 a R c의 관계도 성립되는 것"과 같은 "다른 상태로 전환하는 특성"이다. 부리오의 미학에서 그것은 예술작품이 관객, 사회 등 예술작품 밖에서 이질적인 것들과 맺는 변환적 관계이다. 박경진에게 있어, 미디어를 통해 접하던 재난 특히 인재를 현실에서 맞닥뜨리게 된 경험은, 자신의 최근작에서 인재 사건에 관한 허구와 실재의 간극을 무너뜨리고 사회 맥락 속 인재의 다양한 주제의식과 더불어 그것의 다차원적 이행성을 탐구하게 만든다. ● 그의 시리즈 작품 「반경 20km」와 「반경 0km」에는 이러한 이행성이 잘 드러나 있다. 전자는 박경진이 인재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던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ï가 야기한 '재난 원점(原點)ï인 동시에 접근 금지 구역을 의미한다. 이것은 물리적 공간임과 동시에 삶과 죽음이 존재와 부재가 교차하고 있는 상징적인 관계 공간이다. 인간의 접근이 금지된 후쿠시마의 제1핵발전소 20킬로미터 이내 공간은 사람이 살지 않는 부재의 공간이자, 구출되지 못한 가축들이 배회하는 유배지이기도 하다. 지진과 쓰나미로 폐허가 된 건물, 폐가와 운명을 함께 한 동물의 주검, 방사능 오염수와 원전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흰색 방호복으로 중무장한 사람들, 스산한 풍경으로 비어있는 대형마트 앞을 떠도는 소들, 아스팔트 위를 방황하는 돼지 떼... 그는 일본 원전 사고를 보도한 각종 미디어의 사진들을 참조해서 캔버스 위에 팩트를 재현하고 현재적 역사를 기록한다. 그런 점에서 반경 20km는 자신의 작품의 메시지가 관객과 맺고 있는 상징적 관계 지점이기도 하다.

 

박경진_반경 0 Km #.9_캔버스에 유채_130×166cm_2014
 

 

한편, 「반경 0km」시리즈 작품들은 현실의 팩트(fact)와 구성한 사건이라는 픽션(fiction)이 한데 어우러진 것들이다. 이 시리즈물은 재난을 대면한 예술가의 재해석이 전면에 자리한다는 점에서 박경진의 작품세계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실제로 일어났던 인재들, 예를 들어 미국의 9.11테러, 보스턴마라톤 폭탄 테러, 한국의 구제역 사건, 용산 참사, 대구 지하철 참사 등의 재난 이미지들이 혼성적으로 교차하는 듯한 화면은 원래의 역사적 시공간을 탈각시키고 허구의 시공간 속에 들어와 자리 잡는다. 그것은 '반경 0kmï라는 이름으로 표상된다. 핵무기가 폭발한 피폭 중심지를 지칭하는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ï라는 군사용어가 9.11테러의 발생 원점을 의미하면서 사용된 것처럼 박경진의 '반경 0kmï는 모든 인재의 발생 원점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다. 이것을 x축과 y축이 교차하는 데카르트좌표로 표기하면 p(0,0)이, 3차원 공간좌표로 표기하면 p(0,0,0)이 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경선을 0°로 설정하고, 적도를 지나는 위선을 0°로 설정한 구분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 그저 사건 발생의 원점으로서의 좌표 00이자, 좌표000인 것이다. 여기에 시간을 부여하는 t축을 결합시킨 불가능한 우리의 좌표 p(0,0,0,0)은 박경진의 '반경 0kmï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다.

 

박경진_반경 0 Km #.12_캔버스에 유채_50×60.5cm_2014

 

박경진_반경 20 Km #.8_캔버스에 유채_50×60.5cm_2013

 

박경진_반경 20 Km #.2_캔버스에 유채_61×72.5cm_2012

 

 

이것은 수많은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인재들이 우리 인류의 삶의 지층에 아직 끝나지 않은 상흔(傷痕)으로서의 짙은 트라우마(trauma)를 남겼다는 점에서, 그것은 오늘날의 인재 원점에 집결되어 다시 유령처럼 출현한다. 천재지변이야 어쩔 수 없다 할지라도 인재란 분명코 치유되어야만 할 오명의 유산이다. 번화한 도시로 뛰쳐나온 소들, 집단 주검을 검안하는 방호복의 사람, 생존의 몸부림이 역력한 아우성치는 사람들, 화염에 휩싸인 재난 앞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은 실재의 사건을 형상화한 것이 아님에도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모습ï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분명 시뮬라크르라는 허구일진대 작가 박경진이 만들어내는 리얼리티의 환영을 입고 우리의 현실 속으로 뛰어든다. 구체적 묘사가 생략된 미완성적 화면, 넓은 붓질의 즉발적 표현 언어는 '이미 일어났지만, 일어나서는 안 될 인재ï라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효율적으로 담아내면서, 우리에게 분노, 충격, 슬픔을 응축시킨 인재 원점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요청한다. ■ 김성호

 

 

Vol.20140612f | 2014 OCI YOUNG CREATIVES-민진영_박경진 2인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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