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에서 나온 조선 전기 한글 금속활자

인사동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발굴 장소는 서울 종로 피맛골 뒤편, 인사동 79번지다.

그 곳은 공평구역 도시환경 정비사업을 위해 지난해 3월부터 정밀 발굴 조사를 진행 중인 곳이었다.

‘서울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중 ‘나 지역’으로 탑골 공원과 종로 YMCA 사이다.

 

옛 한양 중심부로 조선 전기까지 경제 문화중심지인 한성부 중부 견평방에 속한 곳으로 

주변에는 관청인 의금부와 전의감, 궁가인 순화궁, 죽동궁 등이 있었다.

 

가장 눈길 끄는 건 항아리에 담긴 채 발견된 금속활자 1600여점으로 모두 15~16세기 때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한글과 한자, 서체, 크기, 형태 등 최소 5종류 이상의 활자가 섞인 한글 활자 약 600점, 한자 활자 1000여점이다.

서지학 전문가들은 “조선 전기 금속활자가 실물로 출토된 것 자체가 처음”이라고 했다.

 

이 중에는 지금까지 최고의 조선 금속활자로 알려진 '을해자'(세조 1455년)보다

21년 앞선 ‘갑인자’(1434년)로 추정되는 한자 금속활자도 다량 포함되어 있다.

향후 연구를 거쳐 ‘갑인자’로 공인될 경우, 조선 시대 금속활자 중 가장 오래된 실물 자료일 뿐 아니라

1450년대 찍은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최소 16년 앞선 금속활자가 출토되어 세계 인쇄사를 바꿀 중요한 발견으로 주목하고 있다.

 

인사동에서 나온 금속활자 발견 당시 모습

'갑인자'는 갑인년에 세종의 명으로 만든 한자 활자로서 조선시대 금속활자의 꽃으로 불린다.

그리고 '을해자'는 1443년 훈민정음 창제 후 세조가 즉위한 을해년에 주조한 한자 활자지만,

한문 원문을 한글로 번역하기 위해 만든 한글 활자도 있다.

 

 순경음(ㅱ, ㅸ), 이영보래(ㅭ) 등 15세기에 사용된 동국정운(東國正韻)식 표기법을 따른 최고 한글 금속활자. 

그간 가장 오래된 한글 활자로 알려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활자 30여점과 같은 시기로 추정되지만,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동국정운식 표기를 포함하고 있어 의미가 더 크다고 한다.

'동국정운'이란  훈민정음 창제 초창기인 15세기에 중국 한자를 표준음에 가깝게 발음하기 위해 쓰인 한글 자음 (ㅱ, ㆆ, ㆅ)으로

일명 동국정운식 표기 한글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에 반대하는 양반들을 설득하기 위해 본보기로 펴낸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에도 이들 표기가 나타나는데, 이 표기법의 금속활자가 실물로 확인된 것이다.

 

물시계 부속품인 '주전'으로 추정되는 동제품

금속활자 외에도 물시계 부속 장치인 '주전', 세종 때 만든 천문 시계인 '일성정시의', 중종과 선조 때 만든 총통 류 8점,

동종 1점 등 금속 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되어, 지난 29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실물을 공개했다.

이재정 학예연구관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활자는 조선 왕실에서 쓰이다가 일제강점기 이왕직을 거쳐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이관된 것들이지만, 이번 활자들은 다른 유물과 함께 ‘출토’된 최초의 활자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했다.

인사동에서 나온 총통

발굴조사를 맡은 수도문물연구원 관계자는 "건물터 형태가 매우 특이하다"며

"관이 지은 건물은 아닌 듯하고, 평범한 일자형 혹은 ㄱ자형 창고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수습한 유물이 일반 민가에서 소유할 만한 물건은 아니라는 점에서 출토 위치가 상당히 미스터리"라고 덧붙였다.

 

물시계의 중요 부품인 주전. 처음 확인되는 실물이다. 

그리고 "도기 항아리를 기와 조각과 작은 돌로 괸 것을 보면 인위적으로 묻은 정황을 알 수 있다"며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 중 화포인 소승자총통이 1588년에 만들어져 가장 늦은 편인데,

1588년 이후 어느 시점에 한꺼번에 묻었다가 잊혀져 다시 활용하지 못한 것 같다"고 추정했다.

"구리는 조선시대에도 비싼 금속이었다"며 "유물을 값나가는 물건으로 인식했는지,

활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같은 크기로 토막나 있었다고 한다.

 

인사동에서 나온 일성정시의

전문가들은 유물 매장 상황을 봤을 때 누군가가 금속품을 모아 고의로 묻었고,

나중에 녹여서 다른 물건으로 만드는 '재활용'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일성정시의 및 동종 출토 모습 

문화재청 관계자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누군가가 유물을 모아 폐기했을 수도 있다"며

"금속 유물을 무더기로 묻은 이유는 추가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 : 조문호, 사진 : 문화재청 

 

인사동 금속유물 출토지

 



해방71주년을 맞은 지난15일, 유진규씨 퍼포먼스 보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갔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혼신을 다하는 행위 예술가들의 모습에 머리가 절로 숙여졌다.

마지막으로 사형장에 몰려가 벌인 난장의 한마당에서 통쾌한 감격의 순간도 맛보았다.

행사가 끝난 후, 몇몇 사람이 인사동으로 넘어왔다.
오후6시가 되었으나, 그 때까지 “유목민‘과 ’푸른별 이야기‘는 문이 잠겨있었다.

하는 수 없이 피맛골로 옮겼는데,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남인사마당에서는 궁중무용 ’여민자락 처용지무‘ 공연이 막 끝나고 있었다.

출연자들의 기념사진 한 장으로 갈음해야 했다.

장경호, 이명희, 손병주, 정영철, 케이필, 강경석, 문형석씨 등 여덟 명이

피맛골 ‘불타는 조개구이’ 야외 홀에 자리 잡았으나, 모두들 더위를 먹었다.

갈증을 느껴 술을 퍼 마시기 시작했으나, 술자리에 가난한 사람뿐이라 은근히 걱정되었다.

아니라 다를까, 무일푼이 세 사람이라 가난한 연극배우 이명희가 그 몫을 감당했다.


마음이 편치 않은 자리는 술을 마셔도 즐겁지 않았다.
이젠 술자리가 힘들기도 하지만, 돈 없이는 술자리에 나서지 않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에 ‘사동집’들려 송점순 여사와 시름 달랬다.


사진,글 / 조문호
































[기획탐방=돈되는 상권]-<82>피맛골…잇단 화재에 개발도 안돼 ‘사라진다’

 

스카이데일리 / 성다영기자

 

주점촌으로 알려진 ‘피맛골’은 조선시대 서민들이 종로를 지나는 고관들의 말을 피해 다니던 길이라는 ‘피마(避馬)’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는 현재의 종로 1가에서 6가까지를 일컫는 명칭이었으나 지금은 종로 1가 교보문고 뒤쪽에서 종로 3가 사이에 일부만 남아있다. 서민들이 이용하다 보니 피맛골 주변에는 술집과 음식점이 번창했고, 이러한 풍경은 현대에까지 이어졌다. 피맛골은 동피맛골과 서피맛골로 구분되는데, 일반에게 알려진 피맛골은 금강제화 빌딩 뒤편의 인사동 1길 일대를 일컫는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재수생을 위한 입시학원과 외국어학원이 종로에 들어서면서 이곳은 대학생들에게 값싸고 푸짐한 안주와 막걸리를 파는 주점촌으로 발전했다. 여러 주점 가운데 일명 ‘고갈비집’, ‘전봇대집’이라고 불린 ‘이갈비’는 이면수 구이와 양푼 막걸리로 피맛골의 대표적인 명소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피맛골은 잇따른 화재로 경관이 훼손되고, 청진동 피맛골이 재건축되면서 손님들의 발길이 점차 뜸해져 이제는 상권이라고 불리기도 민망할 정도로 축소됐다. 10여 년 전 화마가 휩쓸고 간 흔적이 흉물스럽게 남아있어 해가 지면 이 일대에는 지나가는 행인 외에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 일대의 음식점들은 오후 5시면 문을 닫고 있었다. 피맛골의 옛 명성을 믿고 장사를 시작한 1~2년차 점주들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스카이데일리가 과거 번화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피맛골을 취재했다.

 

 

 ▲ 오후 시간에 피맛골 골목을 찾았을 때 옛 추억을 찾아 이곳에 왔다는 40대 초중반과 번잡한 종로시내를 피해

 이곳을 지나가는 행인 등을 보았을 뿐 한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지도는 피맛골 내 주요 점포 위치도 ⓒ스카이데일리


 

종로를 대표하는 학사주점촌이었던 피맛골 상권이 급속하게 쇠퇴한 이유는 2000년대 초반 연이어 발생한 화재 탓이 컸다. 200211월 삼일대로 401번지 일대 화재로 10여개 점포가 전소된데 이어 20035월에는 인사동 131-101번지 일대 일명 피맛골 화재로 역시 10여개 점포가 불탔다.
 
화재 이후 전소된 건물들과 그 잔해는 검게 그을린 모습으로 방치됐고, 할렘가처럼 변해버린 피맛골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30년 전부터 피맛골에서 장사를 해온 상인은 당시 이 주변에서는 재건축 시행업체에서 고용한 사람이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무성했다한때 손님들로 바글바글했던 이 골목이 이렇게 초라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피맛골에 발길이 끊기게 된 원인으로는 화재뿐만 아니라 청진동 피맛골 재개발 소식도 단단히 한몫 거들었다. 인근 상인들은 청진동 피맛골 재건축 소식이 매스컴을 타면서 피맛골이 다 없어진 것으로 착각하고 피맛골 주점촌을 찾는 사람들이 끊겨버렸다고 푸념했다.
   
4개 주점만 남은 피맛골 주점촌밤에는 무서워서 못 지나가

▲ 굳게 문닫은 피맛골 주점들 ⓒ스카이데일리


 

오후 4시경 피맛골 골목에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피맛골을 찾은 40대 초중반 남자들과 번잡한 종로 시내를 피해 이곳을 지나가는 행인들이 보일 뿐이었다. 
   
전성기 시절 20여개에 이르렀던 인사동길 뒤편의 피맛골 주점의 수는 현재는 일지매’, ‘마님은 왜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시나(이하 마님과 돌쇠)’, ‘불로주점’, ‘이갈비’(옛 종로집) 등 4개만 남아있다. 서피맛골이라고 불리는 삼일대로 401번지 일대도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손님 발길이 끊어지기 시작한지 오래다.
 
마님과 돌쇠는 피맛골 주점촌에서 30년 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주점이다. ‘마님과 돌쇠대표 A씨는 “10여 년 전만 해도 이곳 주점들의 환한 불빛으로 골목 안은 저녁이 돼도 환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불빛을 보고 궁금해서 골목으로 들어오기도 했다그러나 지금은 저녁 시간대에는 사람 지나가는 것을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마님과 돌쇠’는 오후 5시까지만 영업을 한다.
 
A씨는 원래 피맛골은 저렴하고 양이 푸짐한 안주 때문에 주머니 가벼운 20대 학생들이 90%를 차지했다최근에는 단체손님이나 옛 향수를 찾아오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임대료는 비싸지만 장사가 안 돼 장사하던 점주들은 다 떠났고 현재 남아서 영업을 하는 사람은 건물주 몇 명뿐이다고 덧붙였다.

 

 ▲ 피맛골은 사실상 복구가 어려워 철제 슬레이트로 막아 놓은 모습이다. 또 직장인 퇴근시간에 맞춰 손님맞이 준비로 분주한 종로구의 대로변 음식점들과는 정반대로 저녁시간에는 문을 닫는 점포가 대부분이었다. ⓒ스카이데일리


 

최근 1~2년 사이 피맛골 인근에는 청강에 비친 달’, ‘대끼리’, ‘불고기와 오징어의 만남’, ‘황금포차등 밥집과 주점들이 생겼다. 그러나 몇몇 점포는 장사가 안 돼 벌써 가게를 내놨다는 것이 인근 상인들의 전언이다.
 
청강에 비친 달은 경복궁 근처에서 맛집으로 유명했던 음식점이다. ‘청강에 비친 달대표B씨에 따르면 퇴근시간이 되면 당시 8개의 테이블이 꽉 차서 가게 밖까지 대기하는 손님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B씨는 더 넓은 곳으로 가게를 옮기려고 장소를 물색하던 중 올해 1월경 피맛골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피맛골 옛 명성이 있어 어느 정도 장사가 될 줄 알았는데, 단골만 간신히 찾아오는 정도다고 말했다.
 
그는 그나마 있던 학생 단골들도 피맛골 길이 저녁이 되면 너무 어둡고 무서워 찾아오기 힘들어 한다고 토로했다.
 

 

건물 신개축 불가, 재개발 움직임 없어 그대로 방치
 
그렇다면 한때 대학생들의 놀이터였던 피맛골이 불타 버린 건물들과 함께 방치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 종로구청 도시개발과 도심재개발팀 장천섭 주무관은 피맛골 일대(인사동123-1, 123-3, 126-1, 126-2, 126-3, 128-2, 129-1, 129-20)40년째 무허가 건물로 이뤄진 곳이며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돼 있어 신축·개축을 못하도록 제한된 곳이다고 설명했다.

 

▲ 10여년전 화재로 타버린 건물이 그을린 채로 흉물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방치되고 있다. ⓒ스카이데일리

 

이어 그는
종로구 인사동 일대는 공평 소단위 맞춤형 정비구역으로 지정돼 전면 철거를 하지 않고 옛 도심부의 도시조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하지만 공평구역 15, 16지구(서피맛골과 피맛골 주점촌)는 대로변에 인접해 소단위 맞춤구역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 주무관은 개발이 되기 전까지 구청에서 특별히 준비하거나 마련하고 있는 대책은 없다고 덧붙였다.
 
정 주무관의 설명을 요약하면 도시환경정비구역이란 제약 때문에 삼일대로와 피맛골 일대에는 새로 건물을 올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전소된 건물들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또 소단위 맞춤구역에 포함되지 않아 소단위로 개발할 수 없는 지역이다. 이곳이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건축주들이 조합 결성 후 대규모 재개발을 진행해야 하는데 결집력이 약해 아직까지 그러한 움직임은 없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피맛골을 되살리려면 대규모 도시재개발이 아닌 부분적인 개보수가 이뤄져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인근 부동산 관계자는 서피맛골(삼일대로)과 피맛골 주점촌에 위치한 20평 규모 점포의 보증금 1000~2000만원, 월세는 150만원~200만원으로 형성돼 있다“150만원 이하 월세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종로의 중심이라는 이유로 임대료는 비싼데 반해 피맛골에 위치한 점포수익률은 좋지 않아 매매는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1945년 광복 직후 문을 연 선술집 ‘청일집’은 피맛골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했었다.
 60여년간 서울 시민들에게 추억의 향수를 달랬던 청일집은 종로 피맛골 선술집의 전설이 되다시피 했지만 지난 2010년 2월 재개발로 문을 닫았다.
 피맛골 ‘열차집’은 6.25 전쟁 이후 폐허가 된 서울에서 전쟁의 상흔을 달래고 싶던 손님들에게 무허가 빈대떡을 팔았던 것이 시작이었다.
 기찻 칸 처럼 엉성한 의자 몇 개에 길게 판자때기로 양쪽을 막았다고 해서 열차집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