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향 희미해지는 한국

 미국인 마이클 마이어스(왼쪽)가 서울 인사동 전통찻집 에서 녹차를 음미하고 있다. 조용철 기자

 

포커스 / 한경환기자


 

‘커피 공화국’으로 급속히 바뀌어 가는 가운데서도 아직 전통차의 성역으로 남아 있는 곳이 있다. 서울뿐 아니라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전통문화거리를 자랑하는 인사동 일대다. 고미술품점·골동품점·표구점·필방·공예품점이 많은 거리 분위기에 걸맞게 ‘전통찻집’ 간판들이 즐비하다. 서울 인사동과 북촌 한옥마을 일대의 찻집들을 둘러봤다.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한국 고유문화를 체감할 수 있는 이곳엔 내국인은 물론 외국 관광객들이 늘 북적거린다. 유동인구가 평일 3만~5만 명, 주말이나 공휴일은 7만~1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 관광코스다.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종로 탑골공원까지 이어지는 인사동길은 전통찻집 밀집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 ‘주(主)가로변’에만 20여 곳이나 된다. 작은 골목골목에서도 아늑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우리 찻집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반면 커피전문점은 인사동길 외곽 쪽으로 밀려나 있으며 그나마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거리 특성에 맞춰 업종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집 건너 한 집꼴로 커피전문점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서울의 다른 중심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대학원생 배세진(26)씨는 한적한 여유를 즐기기 위해 가끔씩 인사동 찻집을 찾는다. 배씨는 “사람들이 붐비는 커피전문점과는 달리 쾌적하고 조용한 것이 우리 찻집의 장점”이라고 했다. 실제로 인사동 대부분의 찻집은 한산함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차분했다. 배씨는 “차를 우려내는 과정에서 잔재미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뜨거운 물만 채우면 몇 잔이든 마실 수 있어 경제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배씨는 오랜 시간 논문을 읽을 때 찻집을 주로 찾는다고 했다.

하지만 차나무 잎으로 만든 ‘차’를 전문으로 파는 곳은 보기 드물었다. 대부분은 대추차·오미자차·유자차와 같은 대용차를 함께 판다. 전통차만으로 손님을 끌기에는 부족해서인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퓨전형’도 많다.

한국의 대표 차 브랜드인 오설록의 규모가 가장 크다. 복합 차문화공간을 지향하는 오설록은 1층 매장 입구에 덖음 솥을 설치해 놓고 녹차를 시음하는 코너가 마련돼 있다. 각종 차 제품을 직접 구입할 수도 있다 .2~3층에선 프리미엄 녹차부터 다양한 블렌딩 차와 음료를 마실 수 있다.

인천에서 온 김슬기(27)씨는 평소 전통차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인사동에 놀러온 김에 특별히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정통 녹차를 주문한 김씨는 “자연 그대로의 맛과 향이 살아 있어 좋다”고 말했다. 함께 온 지효진(25)씨는 제주난꽃향이 나는 차를 시켰다. 여성 고객들은 향이 첨가된 차를 선호하는 편이라고 한다. 김씨는 “차는 마시면 좋긴 한데 접할 기회가 의외로 적다”고 말했다.

인근 찻집 지대방에선 미국인 마이클 마이어스(54)를 만났다. 자신이 손수 디자인한 개량한복을 입고 이곳을 찾은 마이어스는 우리 차 예찬론자다. 한국에 온 지 30년 가까이 된 그는 “뉴욕에 살 때도 커피보다는 차를 더 즐겨 마셨다”며 “한국적 멋과 맛을 즐길 수 있는 전통차는 한국 생활의 벗이 된 지 오래”라고 말했다.

문을 연 지 30년 됐다는 이 찻집의 주 고객층은 30~40대 직장인이다. 다도모임을 하는 대학생들이 가끔씩 찾기도 한다. 녹차를 주문하는 손님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한다. 대추차가 가장 많이 팔린다.

거리에는 포장된 차 제품과 다기를 파는 곳도 눈에 띈다. 동양다예 하일남 대표는 1990년 대 초 이곳에 자리 잡았다. 그는 경남 하동 화개에서 자신이 직접 생산한 차를 가져와 판다. 하 대표는 “이곳에 차 전문 상점이 생기면서 전통차거리가 서서히 조성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전통찻집은 십전대보탕 같은 한약탕을 파는 곳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녹차를 파는 곳은 극히 드물었다. 그는 “90년대 후반까지도 차에 대한 이해가 낮았다”며 “예나 지금이나 전통찻집이 있다 해도 진정한 의미의 차를 찾는 사람은 흔치 않다”고 말했다.

하 대표는 차가 커피에 밀리는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커피의 경우 무역상들을 통해 원두와 커피도구들이 대량 배급되고 바리스타와 같은 교육 과정도 많이 개설됐기 때문에 활성화됐다는 것이다. 전통차 업계가 참고할 만한 조언이 아닐까 싶다.

인근 커피전문점에서 만난 강민정(26)씨는 “그냥 늘 마시던 커피라 인사동에 와서도 습관적으로 커피점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강씨는 “찻집은 혼자 가기가 왠지 꺼려지고 값도 약간 부담스럽다”며 “계획하고 가지 않는 이상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인사동과 인접해 있는 안국역 북쪽의 북촌 한옥마을 거리만 해도 전통찻집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대부분이 커피점이었다. 인사동길같이 업종 제한이 있지 않은 곳이라면 전통찻집이 발을 붙이기가 점점 어려워져 가는 게 현실이다. 어느새 인사동은 커피점으로 포위된 전통찻집 섬이 돼 버린 느낌이 들었다. 더군다나 고유의 의미의 차는 더 인사동 내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신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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