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은 울 엄마 제삿날이었다.

 

꼭 가봐야 할 전시가 있어 정선에서 지내야 할 제사상을 서울로 옮겨 와 버렸다.

산소에 벌초할 때, 서울 나들이 한 번 하시라며 용서는 구했으나, 정말 불효막심한 놈이다.

 

제사를 서울서 지낸다고 연락했더니, 서울 사시는 누님과  일산 사는 동생은 더 좋아했다.

제사 때마다 거리가 멀어 못오고 주말을 이용해 산소에나 들렸는데,

이번에는 함께 제사를 지낼 수 있었으니 모두들 반가웠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인천사시는 형님댁에서 제사를 지내 왔으나 형님께서 교회에 나가며 

정선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모두들 제사를 멀리하게 되었다.

누님과 나만 주님의 은총을 받지 않았을 뿐 모든 식구들이 크리스찬이 된 것이다.

 

그 이후로는 집안에 길흉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의 가족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오랜만에 함께 모여 옛이야기들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 모두들 행복해 했다.

교회나가는 식구들은 기도하면되니, 앞으로도 제사를 서울서 지내자는 누님의 제안에 따르기로 합의했다.

 

이번엔 누님 조영희, 동생 조창호, 형수 김순남, 조카 조영란이만 왔으나 다음엔 여동생도 오겠단다.

사실 제사는 망자를 위해서라기보다 살아 남은 가족들을 위한 자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 년에 한 번도 만나기 어려운 무심한 세상에 기제사 두 번에 명절 제사까지 합하면

네 번이나 만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부모님을 기릴 수 있으니 저승에 계신 부모님도 오히려 좋아하실 걸로 생각한다.

살아평생을 자식만 위해 사셨으니, 어찌 먼 길이라 마다 하시겠는가.

그게 부모 마음인데...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둘째 누님 (조미희(69) / 세실리아)께서 지난 15일 세상을 떠났다.

 

전시 준비로 문병을 미루어오다,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은 14일에서야 서둘러 부산으로 내려갔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던 누님께서 잠시 나를 알아봤을 뿐,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얼마나 간절한 기도를 올렸으면, 손에 쥔 십자가가 묵주처럼 매끄러웠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지난 세월의 아련한 추억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시 스케줄에 쫒겨 이틀 날 아침 부랴부랴 상경하였는데,

서울 도착하기가 무섭게 임종하셨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16일 오후10시 무렵에야 도착한 부산 성모병원 장례식장에는

매형 조한길씨를 비롯하여 조카 조은상, 조가을, 동생 조창호, 조진옥, 매제 김종성씨 등

가까운 가족들만 침통한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누님의 장례미사는 17일 오전9시 무렵,

성모병원 영결식장에서 장엄하게 치루어졌다.

 

 유골은 납골당이 있는 김포 사당에 안치했는데,

매형께서 일가 유골을 한 곳에 모실 수 있는 사당을 만들어 두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설날인 삼오제에는 모두들 김포사당에 모여 제를 올리기도 했다.

 

“고생만 하다 떠나버린 불쌍한 누님! 부디 영면하시어 편안히 쉬십시요.”

 

 

 

 

 

 

 

 

 

 

 

 

 

 

 

 

 

 

 

 

 

 

 

 

 

 

 

 

 

 

 

 

 

 

 

 

 

 

 

 

 

 

 

누님 이야기

 

누님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고 자라지 못했다.

9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난 여식이라 교육에서부터 모든 순위가 다른 형제자매에 밀렸던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형님이 집어던진 나무토막에 눈을 맞아 실명 위기를 맞기도 했다.

아버지께 운동화를 사 달라며 조르던 형님께서 따라오는 동생을 쫓으려 목제소에 나딩구는 나무토막을 던졌는데,

그게 하필이면 누님의 눈에 맞았던 것이다. 실명은 면했지만, 여성으로서 치명적인 상해였다.

 

그래서 인지 누님은 어릴 적부터 자립심이 남달랐다.

일찍부터 낯설은 서울로 올라가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형제자매 중 가장 먼저 자립하여 사당동에 대궐 같은 집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기까지 근검절약은 물론 자린고비처럼 돈을 쓰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편히 쉴 때, 누님은 일 했고, 남이 배부를 때, 누님은 배를 곯았다.

 

한 때는 미국 이민가려 모든 가산을 정리한 때도 있었다.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던 매형께서 직장까지 그만두고 이민을 준비했으나 

출국장에서 크레임이 걸려 이민을 포기해야 하는 불상사가 생겼던 것이다.

 

몇 년 뒤 다시 이민 길에 올라 외로운 이국생활에 적응해 나갔으나,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고생을 너무 많이 한 탓인지, 중병에 걸려 지난 여름 급기야 귀국하게 된 것이다.

이국 땅의 근거를 놓치지 않으려고 매형까지 미국에 남겨 둔 채 말이다.

 

병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궁암에서 방광암으로 전위되고, 급기야는 폐암으로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그까짓 돈이 대관절 무엇이길래...

 

사진,글 /조문호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엔 폭우가 무섭도록 쏟아졌다.
승용차가 개울에 떨어져 가족들이 병원에 실려 가는 등,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정신을 놓아 어떻게 시신을 땅에 묻었는지 기억마저 없다.

울 엄마 만지산 입산 신고식은 그렇게 힘들게 치루었다.
그 때가 엊그제 같은데, 무심한 세월이 벌써 십년이나 흘렀다.

아내는 대상포진이라는 병에 걸려 몇 일째 꼼짝을 못하는데,
태풍마저 온다는 뉴스에 마음이 무겁다.
새벽4시부터 일어나 음식들을 싸들고 혼자 정선으로 떠났다.

양평을 벗어나 횡성 가까이 쯤에서 운해에 휩싸였던 산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조개구름을 비집고 햇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태풍 대신 폭염을 예고하고 있었으나, 푸드덕 나는 새가 길조이길 바랬다.

열흘 만에 찾은 집은 잡초도 무성하지만, 텃밭의 채소도 몰라보게 컸다.
만지산 산소에 가족들이 온다는 연락에 혼자 바쁜 걸음 쳤다.
청소하고 밥 짓고 밤 깎는 등, 두 시간이 금새 지나버렸다.

이번 기일엔 모두들 살기 바쁜지 많은 가족들이 빠졌다.
누님(조영희)과 동생(조창호), 형수(김순남)와 조카(조영란)만 왔는데,
조카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할머니 좋아하는 꽃바구니를 사들고 온다.
생전에 조카를 끔찍이 좋아하기도 했지만, 도무지 요즘 애들 같지 않다.

제삿날마다 비 아니면 폭염이 쏟아져 각오는 했지만, 땀이 팥죽처럼 흘렀다.
아무리 산중이라지만 찬바람 나는 에어컨이 그리웠다.
산소에 차린 음식마저 마다하고 모두들 읍내로 외식하러 나갔다.

시설 좋은 집 찾느라 ‘국향’까지 갔는데, 왠지 바가지 쓴 기분이다.
곤드레 정식 일인분에 17,000원이라니...
식당 안내 잘 못한 죄로 병방치 스카이워크까지 갔으나, 그 또한 쓸데없는 짓이였다.

모두들 떠나가고 혼자 쓸쓸히 제사상을 차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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