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하지 않고 낭비되는 기호


이태량展 / LEETAERYANG / 李太樑 / painting
2017_0614 ▶ 2017_0704



이태량_명제형식 Propositional Form_종이에 유채_45×33.3cm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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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0614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0)2.733.1045

www.grimson.co.kr



올해 갤러리 그림손에서 전시되는 「명제형식」과 「무경산수」 시리즈는 이태량이 수년째 집중적으로 이어 온 주제로, 하나는 추상화, 다른 하나는 산수화 형식을 갖추고 있다. 추상화나 산수화가 관념에 기댄다는 점에서 둘은 연결될 수도 있겠다. 뿐 아니라 문자를 비롯한 몇 가지 조형적 요소들은 두 시리즈에 연속성을 부여한다. 「명제형식」이라는, 다소간 딱딱해 보이는 철학적 제목, 그리고 전래의 틀을 상당 부분 따르는 산수화라는 형식은 그의 작품이 바둑판이나 체스판 같이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놀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한다. 예술이 규칙이라고 해서 반드시 규칙으로의 환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법칙과 달리 규칙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며, 따라서 변경될 수 있다. 파격 또한 규칙과의 상보적 관계에서 발생한다. 설치 작업을 포함한 그의 수많은 이질적 작업 목록에서 우리는 어떤 규칙 또는 파격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태량_무경산수_인왕산 Liberated Landscape_Inwangsa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17


규칙/파격은 한 작가의 독특함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도 있다. 협소한 의미의 실증주의처럼 현실을 의미 없는 모래알로 낱낱이 분해하려 하지 않는 이상, 누구나 자신이 직면한 현실을 구성하는 원리, 즉 규칙을 알고 싶어 한다. '원리'는 우리의 현재 좌표와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은 작가 스스로에게 조차도 확실성은 담보되지 않는다. 이태량의 경우, 작업의 목적이 앞에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에 있는 미지의 것이라는 점에서 작품 앞의 관객은 난제에 직면한다. 작가도 모르고 관객도 모르는 담론들이 떠돌 수 있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이즘들로 점철되어 있는 미술사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새로움의 이데올로기가 득세한 근대에 들어서 선언을 앞세운 사조들이 생겨나긴 했지만, 이즘은 나중에, 종종 얼떨결에 붙여 진 것들도 있다. 물론 이태량의 작업은 인간의 분류하고 명명하려는 관습에 대한 주제 또한 포함한다. 실재와 명명의 관계에 대한 문제 또한 철학의 역사를 수놓은 진지한 게임 중의 하나였다.



이태량_무경산수_인왕산 Liberated Landscape_Inwangsa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17


그의 작업은 놀이의 자유로움을 가능케 하는 것이 규칙이라는 역설을 잘 보여 준다. 이태량의 놀이 방식은 임의성을 최대한 늘리는 우연 놀이, 즉 로제 카이와가 『놀이와 인간』에서 분류한 방식 중 'Alea'에 가깝다. 우연 놀이에 충실한 화면은 지시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운 물감이 어디로 튈지, 불뚝 튀어나온 선이 어디로 나아갈지, 어떤 글자가 쓰여 질지 또는 어떻게 지워 질지 예측하기 힘들다. 이러한 예측 불가능성은 관객 뿐 아니라, 당사자인 작가에게도 해당된다. 그리고 그러한 예측 불가능성만큼의 다양성, 또는 이질성이 존재할 수 있다. 또는 다양성-이때 다양성은 난해성, 임의성 등을 포함할 수 있다-는 한 가지 특질로 수렴될 수도 있다. 만약 이질성이라면 그것은 동질적인 몸이 삼키기 어려운 것일 수 있다. 이러한 다양성과 이질성은 현대 미술이 쓸모 없는 난해함과 물신주의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유가 된다. 간혹 한지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개 캔버스를 활용하는 그의 작품들은 매번 다시 주사위를 던지는 막막한, 그래서 흥미로울 수도 있는 게임 같다. 그 동안 자신의 전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을 쏟아 부은 캔버스라는 하얀 판을 갱신해 왔다. ● 「명제형식」 시리즈는 추상적 화면 위에 숫자나 글자가 보이고, 때로는 인쇄물이 꼴라주 되기도 한다. 최근의 「무경산수」 시리즈는 이전의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좀 더 구축적이다. 동양화에는 시서화의 전통이 있고, 서양도 예술이 자율적이지 못한 시대에 화면에 글자(신화, 종교, 역사 등)가 나오기도 했지만, 입체파의 꼴라주처럼 근대 미술사에서 화면에 글자가 등장하는 경우, 그것은 화면의 평면성을 확인하는 자기 지시적인 맥락이 있다. 물론 그것은 읽혀 지기 보다는 조형적 구성 요소로 다가오며, 이는 이태량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의 작품에서 글자는 굳이 읽으려면 읽을 수도 있겠지만, 두터운 물감 안팎으로 명멸하는 글자들은 일종의 흔적처럼 다가온다. 이 흔적 속에서 기억과 망각은 부침을 거듭한다. 그림의 표면은 못 부친 편지처럼 쓰여 지고 지워 지기를 반복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고의 흐름은 이 작품에서 지워 진 글을 다른 작품에서 나타날 수 있게도 할 것이다.



이태량_명제형식 Propositional Form_종이에 유채_45×33.3cm_2016


많은 층위들로 되어 있는 그의 그림은 재현적 원근법이 아니라 추상적 원근법을 가지며, 이미지만큼이나 2차원적 평면에 자리를 잡는 글자나 숫자들도 그 층위중의 하나를 차지한다. 이태량의 회화는 압축 파일처럼 다층적이어서 이것을 3차원 공간으로 펼치면 설치 작품이 된다. 이전의 설치 작업을 보면 회화에 등장하는 요소들이 공간화 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설치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회화 내부에 들어가는 효과를 낳는다. 같은 맥락에서 무경산수는 눈으로 산수 내부를 탐사하도록 할 것이다. 어디서 온지 알 수 없는 인쇄물을 붙이기도 한 화면에서 쓰고 지우기가 반복된다. 두 행위는 반대 항이 아니라 한 행위의 이면이다. 여러 층의 물감이 두툼하기에 모래나 진흙 위의 문자처럼 새겨진 느낌을 주기도 한다. 평소 비망록에 기록해 두었던 아이디어 스케치나 단상, 메모 등과 관련된 그것들은 반석위의 문자처럼 견고하지 않고, 곧 물감이나 여타의 다른 힘에 의해 덮여 질 것 같은 가변성이 있다.



이태량_명제형식 Propositional Form_종이에 유채_45×33.3cm_2016


그의 작품에서 문자는 생성되거나 소멸 중이다. 그것은 무(無)도 유(有)도 아닌 그 사이의 과도기적인 과정을 보여 준다. 작가에 의하면 작품은 '아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찾아가는 와중에 그려진 / 씌여진 것'이다. 그는 아크릴과 유화, 목탄을 주로 사용하는데 특히 목탄은 구체적인 것이나 의도 없이 거침없이 표현하기 쉽다. 읽을 수 없거나 읽기 힘든 문자들은 원래 말이 없는 그림의 속성을 부연한다. 「명제형식」이라는 제목은 철학적 주제를 떠올린다. 특히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언명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전의 작품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아야 한다』(2016)는 얼굴 부분을 뭉갠 자화상으로, 말의 주체, 요컨대 문장의 주어를 차지하는 나를 지워 버린다. 가령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근대적 주체를 탄생시켰던 언명은 '나'의 자리가 불분명해짐 으로서 '존재' 또한 모호해 진다.

 


이태량_명제형식 Propositional Form_종이에 유채_45×33.3cm_2016


이태량의 전시 이력에서, 1995년 서호 갤러리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000년까지 이루어진 4번의 전시 제목이 모두 '존재와 사고'였음은 볼 때, 그것은 그의 초창기 작업을 가득 채웠던 주제였다. 주체의 자리를 비워 놓는 것은 행위나 행위의 대상 또한 모호하게 한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언명과 노자의 '자연의 도'에 대한 진술인 '하는 것이 없기에 아니 하는 것이 없다(無爲而 無不爲)'와의 유사성을 말한다. 합리주의의 극단에서 신비주의로 빠져든 듯한 지적 여정에서 동양화는 새롭게 다가왔을 것이다. 「무경산수」 시리즈가 시작된 것은 2015년 말 경, 겸재 정선에 관련된 기획전에 참여 하면서부터다. 그러나 2017년의 작품들은 겸재와 무관한 현재 진행형의 작업이다. 작가는 그것이 거의 우연적으로, 바깥으로부터의 자극에 의한 것이었지만, 자신의 기존 작업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바깥으로부터의 자극은 자신에 잠재해 있는 어떤 요소를 현실화시키는 것이다. ● 작품이라는 자극을 통해 관객에게서 새롭게 현실화되는 잠재성도 마찬가지 과정이다. 잠재성과 현실성의 긴밀한 관계를 대화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이러한 대화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행되는 것만은 아니다. 한국 미술사에서 겸재는 기존의 관념 산수에서 실경과 진경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작가로 평가된다. 이태량이 차용한 산수화라는 틀은 관념보다는 실재에 대한 느낌을 강조하고, 화면 또한 이전보다 구축적이다. 작품 전면에 흩어져 있던 에너지는 보다 응축적인 형상 안에 모아 놓았다. 그의 풍경에는 산수화에는 없는 직선이 발견된다. 직선은 자연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요소이다. 노장사상을 비롯하여 동양사상이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자연은 침해된다. 자연에 의거한 담론들 역시 위반된다. 이태량의 '산수화'에서는 산등성이를 따라선 직선을 포함하여 산의 추상화로 생각되는 피라미드 형태도 발견 된다.



이태량_명제형식 Propositional Form_종이에 유채_60.6×72.7cm_2016


무경산수의 '無境'을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장소 없는' 산수가 될 것이다. 그것은 지시 대상과 상관없이 펼쳐 졌던 추상화의 어법과도 연결된다. 즉 그것은 작가 말대로 자유로운 풍경(liberated landscape)일 것이다. 「무경산수」 시리즈에도 「명제형식」 시리즈처럼 글자가 등장하지만 작품 상단 부분, 즉 보통 하늘로 간주되는 여백 부분에 씌여진 붓글씨와 붉은색 낙관은 훼손되어—필자는 2008년의 평문에서 '손상된 기호와 사물'이라는 제목을 붙인 바 있다—있지 않다. 다른 글자들과 달리 뭉개지거나 지워지지 않고 올 곧이 박혀 있는 모습은 그의 자유로운 풍경을 '산수화'로 보게 하는 최소한의 틀이다. 그것은 보는 이에 따라서는 괴물스러운 산수로의 변형 기준이 된다. 그러나 풍경 여기저기에는 지워진 듯한 글자들이 있는 것은 이전의 작품과 연속적이다. 자신의 작품과 관련된 영문, 거꾸로 쓴 숫자, 화살표나 가위표 연산 기호 등도 보인다.


이태량_명제형식 Propositional Form_종이에 유채_60.6×72.7cm_2016


플러스(+)나 가위(X) 표는 더하고 빼는 것이 빈번한 화면을, 그리고 화살표는 물질과 에너지 사이의 변환과 그 방향을 은유하는 듯하다. 캔버스에 유화와 아크릴로 그린 이태량의 산수화 아랫부분을 여백으로 남겨 두고 물감을 흘리는가 하면, 가로 진행 방향의 글자들을 써 놓기도 한다. 산수는 중력의 방향에 충실하지만 작가는 종종 이 전체를 공중에 둥 띄워 놓거나 이미지와 반드시 상응한다고 할 수 없는 글자들로 채움으로서, 그림이라는 고전적인 환영의 자리를 말소 하에 놓는다. 「무경산수」 또한 「명제형식」처럼 바닥없는 심연에 놓인다. 그러나 무경산수는 추상적인 화면 속에서도 산줄기나 계곡, 폭포 모양 등이 유추된다. 전경 중경 원경을 층층이 쌓아 놓는 위아래로 길쭉한 포맷에 여러 폭으로 된 무경산수도 보인다. 그러나 산수화라고 해서 이전 작업에서 감지되는 격렬한 자기 발산적 행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경향은 형태를 그저 형태로 놓아두지 않고 문자를 그저 문자로 놓아두지 않는다. ● 그것은 문자의 육화를 꾀하면서 서구의 재현주의 전통을 무너뜨리려 했던 앙토냉 아르토의 '잔혹연극'론을 떠올린다.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아르토의 최우선 관심사는 작품을 해독 불가능의 심급에 놓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데리다의 인용에 의하면, 아르토는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문맹자들을 위해서'였다. 아르토는 '독해 불가능에 속하는 모든 것이 무대를 장악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것은 연극을 통해 우리를 '위험에 그리고 생성에 돌려보내고자' 한다. 위험과 생성에의 의지에서 예술의 모방적 충동은 사라진다. 이때 예술은 모방이 아니라, '모방의 파괴가 선보일 특권적 장소'(아르토)인 것이다. 그러한 경향은 작가(창조자)의 의도를 얌전하게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푸닥거리같은 연행을 낳았다. 그렇게 해서 작품에는 순수한 감각적인 것만을 제시하고자 했다. 아르토는 스스로의 말처럼 '예술이 인생의 표현이 되는데 그치지 않고, 인생의 순수한 창조이고자' 했던 것이다.



이태량_명제형식 Propositional Form_종이에 유채_218.2×290.9cm_2016


언어의 부정, 또는 변형은 '단순한 무력함, 할 말이 하나도 없음의 불모성, 또는 영감의 결여가 아니라, 영감 그자체'(데리다)가 되었다. 탈(脫) 모방론에 대한 아르토의 새롭고도 근본적인-'무지배 상태(anarchy)의 가능성은 역사 속에서 근원성(archisme)에 결부 된다'(데리다)-사고는 연극론에서 나온 이론이지만, 그것은 이후 주체의 표현이나 현실의 반영(재현) 같은 미학을 넘어서 연극성을 따라갔던 미니멀리즘 이후의 현대미술의 경향을 예시하는 선구성을 가진다. 사실, 르네상스의 원근법 이래, 무대와의 비유는 쉽게 이해할만한 것이 되었다. 이태량이 '내 그림은 중요하지 않으며, 정작 중요한 것은 내 그림 밖의 모든 것들에 있다'라고 말한 것은 회화나 회화 이외의 작품 형식에 압축된 연극적 충동을 말한다. 안(동일자)이 아니라 밖(타자)을 향하는, 미니멀리즘 이후의 현대미술은, 데리다의 표현에 의하면 '배설물로서의 작품의 역사'를 보여 준다. 즉 예술은 '분변학(scatologie) 자체'가 된다는 것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작품은 배설물이나 마찬가지로 분리를 상정하고 분리로부터 생산된다. 작품은 내 밖에서 언제나 넘어지고 곧 허물어진다. ● 작품을 일종의 심신의 배설로 읽는 이러한 냉소적이고 신랄한 독법은 현대예술에 대한 비판과 찬양에 대한 동시적 근거가 된다. 이태량의 작품에서는 글자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차이적 관계 속에서 해소된다. 즉 '말소 하에 놓인'(데리다)다. 그의 작품에서 반쯤 지워진 문장들, 거꾸로 배열된 숫자들, 맥락 없이 떠 있는 각종 부호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것은 불연속이다. '문장에 구멍을 뚫는 듯한'(데리다) 행위의 결과는 끝없는 미끄러짐이다. 특히 주체와 그 주체의 앞에 놓인 객체가 구멍들로 미끄러지며 빠져 나간다. 그러한 구멍들은 어떤 철학자(들뢰즈)에게는 변모한 주체의 탈주로로 제시된다. 기원과 목적을 연결 짓는 매끈한 선형적 질서가 해체되면, 기호는 의미하지 않고 낭비된다. 『글쓰기와 차이』에서 인용되는 또 다른 저자인 바타유는 '아무런 목적 없이,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아무런 의미 없이 낭비나 될 뿐인' 잉여 에너지를 상찬한다. 바타유에 의하면 '글쓰기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보증해서는 안 되고 우리에게 아무런 확신도 효과도 이익도 주지 않아야' 한다.



이태량_자화상 Self-portrait_한지에 유채_53×34cm_2016


그러한 글쓰기는 모험적이다. 그것은 운이지 테크닉이 아니다. 이 맥락에서 데리다는 '시는 의미를 가지지 못할 위험을 언제나 안고 있지만 이러한 위험이 없다면 시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글쓰기는 '단어들을 죽음의 쾌활한 긍정 속에서 태우고 소멸시키고 소비하는 기호들의 포트래치의 일종'(바타유)이다. 요컨대 희생이요 도전이다. 예술은 이러한 극도의 소모적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개체의 항상성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유기체에게 소모의 부정적인 의미를 새삼 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소모의 극단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삶이 의미라면 죽음은 무의미다. 그러나 '살아 있는 채 죽음을 체험하는'(바타유) 예술(또 하나는 에로티시즘)은 죽음과 무의미를 작품 한가운데 위치시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끝 모를 비관주의가 아니라, 소모를 통해 생성되는 것이다.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은 생산과 재현에 깔린 전제이다. 그것은 확고부동해 보이는 일상적 현실을 낳는다. 일상의 진부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현대의 많은 작가/이론가들이 소모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다. ● 앞서 언급한 아르토나 바타유에 모리스 블랑쇼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정한 시는 숨 쉬는 내면이다. 진정한 시를 통해 시인은 자신의 생명을 소진하고, 리듬 있게 스스로를 발산하여 공간을 증대시킨다. 우리의 삶은 정복하기 위해서 혹은 획득하기 위해서 어떤 결과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무(無)를 위한 순수한 관계, 순수한 소비 속에 희생된다. 변모는 이제 존재의 행복한 소진과 같다. 환희의 언어는 소멸 속에, 소멸해 가기 전에, 단 한번 소멸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의 절망은 누군가의 희망으로 읽힌다. 절망과 희망은 뫼비우스 띠처럼 돌고 돌면서 예술 하는 삶을 채운다. 쓰기와 그리기가 혼합된 넓은 의미의 드로잉에 가까운 이태량의 작품이 미술이 아닌, 현대문학이나 연극 같은 다른 영역에서 그 이해의 근거가 찾아 지는 것은 흥미롭다. 그림은 협소한 자기 규정을 넘어서면서 보다 큰 문화적 맥락, 더 나아가 미지의 실재에 근접한다. ■ 이선영



Vol.20170614e | 이태량展 / LEETAERYANG / 李太樑 / painting



EXISTENCE and THOUGHT 존재와 사고
Exposed Soliloquies, Detected Silence 독백과 침묵의 발각

이태량展 / LEETAERYANG / 李太樑 / mixed media

2014_0910 ▶ 2014_0923

 

 

이태량_설치작품_570×270cm

초대일시 / 2014_0913_토요일_03:00pm

 

 

기획 / 아트네후원 / HP_지스마트글로벌(주)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 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

www.grimson.co.kr

 

 

갤러리 그림손은 회화에 기반을 두고 영상, 설치 및 공공 미술에까지 예술적 실험을 끊이지 않는 이태량 작가를 초대해 그의 최근 회화와 영상, 설치 작품을 소개하는 기획전을 갖는다. 이태량 작가는 언어와 사고에서 비롯한 인식론의 암시와 회화의 무궁한 확장을 대비하는 실험을 지속해온 작가이다. 그는 시각 매체인 미술이 일상 언어가 갖는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고 회화의 유사성에 대한 본질적 작업을 이야기 하고자 했다. 기존 작업에서 보여주는 기호와 숫자, 기록적 형상은 거침없이 표현된 붓질과 간결한 구도적 조형과 더불어 하나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이태량_존재와 사고 EXISTENCE and THOUGHT, 명제형식 propositional form_

종이에 아크릴채색, 유채_109×66cm_2014

 

이태량_존재와 사고 EXISTENCE and THOUGHT, 가변적 욕망 variable desire_

종이에 아크릴채색, 유채_20×60cm×2_2014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논리철학논고』의 철학적 기반은 작가의 작업에 커다란 영향을 가져 다 주었다. "세계의 뜻은 세계 바깥에 있어야 한다. 세계 안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으며, 모든 것은 일어난 그대로 일어난다. 그 안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의 의미처럼, 우리가 바라보는 그림의 세계는 언어로서 말할 수 없는 시각적 세계이며, 시각적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는 세계의 바깥에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존재를 인식해야 된다는 점을 작가는 주장해 오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비트겐슈타인의『논고』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실존적 고뇌와 철학적 문제는 작가의 작업에 기초적 바탕을 담당하고 있다. '존재와 사고(EXISTENCE and THOUGHT)'란 주제로 변함없이 15회의 개인전을 한 이태량 작가는 실재적 논제와 작가적 감정, 현실적 명제에 대해 꾸준히 연구해 왔다.

 

이태량_존재와 사고 EXISTENCE and THOUGHT, 명제형식 propositional form_

나무에 혼합재료_77×65cm_2014

 

이태량_존재와 사고 EXISTENCE and THOUGHT, 명제형식 propositional form_

나무에 혼합재료_77×65cm_2014

 

 

 

이번 전시에서는 지금까지 이어온 그의 작가적 개념과 함께 평면작업과 더불어, 새롭게 시도하는 영상, 설치물 연작을 선보인다. 이 설치물 들은 기술공학에 기반으로 스스로 작동하는 기계 버전과 인물 영상물 버전으로 구성되었다. 기계 버전이 바닥에서 예기치 않은 것을 퍼 올리고 인물 영상 버전에 등장하는 소녀는 마비된 감각으로 말하고 음식을 먹는다. 예기치 않는 것의 노출과 의미를 잃은 말, 그리고 미각을 버린 식사와 같은 행동은 불특정한 현대인의 욕망이 구현되는 특성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결국 이들 설치영상은 첨예하게 추구하는 현대의 욕망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시각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이태량_영상작품 설치작업_영상_00:05:00

 

 

작가는 직접 바라보는 시점의 세계가 아닌 그 외의 세계를 통해, 현대 문명의 견고한 체계를 구성하고 규정하는 언어가 의미적으로 소통될 수 있다는 통상적 믿음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관람자들이 스스로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이태량 작가의『존재와 사고(EXISTENCE and THOUGHT)』가 소통을 넘어서 새로운 사고의 가능성으로 확장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 갤러리 그림손

 

 

Vol.20140910e | 이태량展 / LEETAERYANG / 李太樑 / mixed media

 

 


 

 

이태량 작가의 평면작품. 이미지제공=갤러리 그림손

이태량 작가의 초대전 'EXISTENCE and THOUGHT 2014'가 9월 10일부터 23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그림손에서 열린다.

회화에서 출발해 영상과 설치 미술, 공공 미술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실험을 시도해온 이태량 작가는 언어와 사유에서 비롯된 인식론의 빈틈과 회화의 무궁한 확장을 대비시켜왔다. 그는 시각 매체인 미술이 일상 언어가 갖는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고 진솔한 앎을 각성하는 한 방법임을 그간의 작업을 통해 주장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추구해온 작업의 연장선에서 최근 새롭게 시도하는 영상과 설치물 연작을 선보인다. 이 설치물들은 크게 스스로 작동하는 기계 버전과 인물 영상물 버전으로 구성됐다. 기계 버전이 바닥에서 예기치 않은 것을 퍼 올리고 인물 영상 버전에 등장하는 소녀는 마비된 감각으로 말하고 음식을 먹는다. 예기치 않는 것의 노출과 의미을 잃은 말, 그리고 미각을 버린 식사와 같은 행동은 현대인의 욕망이 구현되는 특성을 잘 표현해준다. 결국 이들 설치영상은 현대인의 욕망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현대 문명의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언어가 유용한 소통의 수단이라는 통상적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이들 영상물들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 갈수록 각박해져가는 현실에서 그의 작품을 통해 소통을 넘어선 시각적 각성의 새로운 사고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스포츠 조선 / 김형중 기자 telos21@sportschosun.com



"말할 수 없는 진실을 그립니다"

[일요시사=사회팀] 강현석 기자

 

존재와 사고라는 주제로 20년 가까이 작품 활동을 해온 예술가가 있다. 이태량 작가는 일찍부터 일상 속 언어가 갖는 표현의 한계에 주목했다. 그는 미술이 언어가 담을 수 없는 어떤 '진실'을 드러낸다고 믿고 있다. 오는 9월10일 이 작가는 서울 인사동 갤러리그림손에서 '독백과 침묵의 발각'이라는 주제로 열여섯 번째 개인전을 연다. 다가올 개인전에 발맞춰 이 작가의 작품 세계를 정리했다.

 

1995년 데뷔한 이태량 작가는 어느덧 중견작가가 됐다. 지난 20년 동안 개인전과 그룹전을 포함해 전시 횟수만 200차례가 넘는다. 같은 기간 그는 존재와 사고라는 일관된 주제로 작업했다. 회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영상과 설치, 공공미술 등 다양한 장르를 실험했다.

 

20년 외길

 

최근 이 작가는 갤러리그림손에서 오는 9월10일로 예정한 기획전에 초대됐다. 이 작가 입장에선 열여섯 번째 개인전이기도 하다. 전시제목은 '독백과 침묵의 발각'이다. 이 작가는 지금껏 품어왔던 문제의식(작가적 개념)을 이번 전시를 통해 또 한 번 드러낼 계획이다.

 

과거 초대전을 앞두고 이 작가는 "그림은 '좋은 작업을 해야 한다'라는 명제에 대한 시도가 아니라 '좋은 작업은 무엇인가'라는 물음 자체"라고 말했다. 덧붙여 이 작가는 본인의 작품에 대해 "단지 실재를 재현하거나 증명하는 수단이 아닌 언어의 한계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실재에 대한 명료성을 확보하려는 과정의 산물"이라고 정의했다.

 

언어는 현대문명을 구성하고 있는 유기체다. 인류역사의 거의 모든 산물은 언어로 전수됐고, 또 습득됐다. 얼핏 언어로 짜인 견고한 세계는 틈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작가는 어디까지나 '글자'로 된 언어가 불완전하다는 생각이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의 의사(혹은 감정)를 말이나 글로 타인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언어체계로 표현되지 않는 사고의 영역은 엄연히 존재한다. 사람 간의 소통에 한계가 있는 이유다.

 

이 작가의 주제의식은 독일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닮았다. '말할 수 있는 것'보다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비트겐슈타인처럼 이 작가는 '설명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논증에 고심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가깝게 그려내고자 하는 이 작가의 열망은 그의 작품 안에 고스란히 담겼다.

 

오는 10일 '독백과 침묵의 발각' 개인전
회화 기반으로 영상 설치 등 다양한 실험

 

개념미술을 중심으로 한 이 작가의 작업은 일반 대중에게 생소한 지점이 있다. 그가 그린 많은 회화가 형식면에서 추상화로 구별된다. 그렇지만 이 작가를 그저 추상화가로 단정 짓긴 어렵다. 몇 해 전 전시에서 앤디워홀이나 마릴린먼로와 같은 도상을 빌린 적이 있는 그다.

 

'독백과 침묵의 발각'에서 이 작가는 새로운 설치물 연작을 선보이기로 했다. 기술공학을 차용한 기계, 인물이 등장하는 영상물 등이 작품으로 구성됐다.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기계는 땅바닥에서 예상치 못한 것을 퍼 올린다. 그러면 영상 속 소녀는 '그것'들을 음식으로 먹는다. 문제는 소녀의 감각이 이미 마비됐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소녀는 '무언가' 말한다. 이 같은 프로세스로 작품은 끝없이 움직인다. 우리 시대의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새로운 시도

 

미감을 잃은 식사, 의미 없는 말 등은 욕망에 종속된 우리 삶의 한 단면을 은유한다. 작품 안에서 현대인의 욕망은 무의미하게 그려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가가 모든 욕망을 부정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다만 이 작가는 관객에게 '낯선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생각할 여지를 남겼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갤러리그림손은 "(관객이) 이 작가의 전시를 통해 새로운 사고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 작가의 작품들은 벽에 낙서하듯 자유로운 터치가 특징이다. 이번 전시에선 흰색과 검은색의 비중이 커진 점이 눈에 띈다. 여러 작품 가운데 '논리적 그림'이란 작업이 흥미롭다. 81가지의 서로 다른 형상은 정사각형 안에 마치 문자처럼 배열돼 있다. 외형적으로는 고대 상형문자를 떠올리게 하지만 실은 이 작가가 만든 '조형언어'다. 사색의 계절인 가을, 이 작가가 건네는 진실한 '말'에 '눈'을 기울여 보자.

 

<angeli@ilyosisa.co.kr>

 

[이태량 작가는?]

▲개인전 15회(2001-2013): Galerie TrES초대전(낭뜨, 프랑스) 외
▲부스전 6회(2001-2014): 뉴욕아트페어(맨해튼, 뉴욕) 외
▲ArtFair 16회(2011-2014): KIAF2013(COEX, 서울) 외
▲2인전(2010): 갤러리 소밥 초대-이여도 (양수리, 경기도)
▲3인전 2회(2008-2012): 국민일보 초대전(국민일보, 서울) 외
▲그룹전 190여회(1993-2014): 한국현대미술초대전(디마카, 베네쥬엘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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