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하는 터줏대감들 만나러 가는 날이다.
그 분이 바로 시인 강 민선생과 민속학자 심우성선생이시다.
강민 선생께서는 시로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하고, 심우성선생은 몸으로 인사동 아리랑을 추신다.

두 분 다 인사동을 너무 짝사랑해, 인사동 아리랑고개로 넘어 가시겠단다.

지난 17일 오후3시 무렵, 두 분을 만나러 인사동 ‘예당’으로 갔다.
그 곳에는 강 민 선생을 비롯하여 소설가 김승환, 유금호선생, 그리고 시인 이애정씨가 계셨다.
좀 있으니 옷상자를 챙겨든 심우성선생께서 싱글 벙글 들어오신다.
대학로에 공연이 있어 상복 한벌 지어 오셨는데, 삼일동안의 출연료 대신 옷 한 벌 지어 달랬단다.

‘유목민’으로 술 마시러 가자는 강민선생의 말씀에 심우성선생께서 손사래를 치신다.
'오늘은 여자관계가 너무 복잡하다"며 서둘러 일어나신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 복분자에다 민어회를 시켰는데,
그 술값을 유금호선생께서 다 내 주시어, 한시름 놓게 했다.

 

뒤 늦게 심우성선생께서 재 등장하시어, 복분자 한 병 추가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유금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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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거리에 선 소설가 박인식

 

 

글 : 박인식 / 사진 : 조문호

 

인사동은 미술과의 인연이 아주 깊다. 조선조 때 양반들은 북촌에 살았고 화공이나 도공 같은 중인들의 거주지가 인사동이었다. 그 덕에 인사동은 조선 초기에 이미 미술 활동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그때 가닥 잡힌 ‘미술거리-인사동’의 이미지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더 굳어졌다. 1924년 ‘통인가게’가 생기면서 이 일대에 서점, 필방, 화구점,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섰다. 1930년대에는 우리 전통예술의 상징인 골동품상거리로 탈바꿈했다.

인사동이 현대적인 화랑거리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박명자 씨의 현대화랑에 이어 동산방, 선화랑, 가나화랑, 경인미술관, 학고재, 금호미술관, 국제화랑, 미화랑, 진화랑 등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을 이끄는 메이저급 화랑들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빠짐없이 인사동에서 문을 열었다. 이들을 따라 크고 작은 화랑들뿐 아니라 골동품점, 표구점, 민속공예점 등 미술 관련 가게들이 들어서며 500여 미술 관련 업종이 밀집한 인사동은 ‘한국 미술의 메카’로 불리게 되었다.

인사네거리에서 서쪽으로 난 인사동 5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하나로빌딩이 나온다. 그 빌딩 현관에 자그마한 표석이 하나 서 있다. 나의 인사동 나들이 출발점이다. 서울중심표석!

그랬다. 서울을 사대문 안으로 좁혀 보던 시절에 인사동은 분명 서울의 중심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하여 이 자리가 ‘나라의 중심’임을 선언하는 표석을 세운 1395년 이래로 지금까지 인사동은 우리 미술의 중심일 뿐 아니라 서울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그 표석을 볼 때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자문해 본다.

과연 서울의 중심에 서 있는가? 서울중심표석 앞에 선 너는 너라는 존재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는 있는가?

그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사이, 머릿속에서는 시간이 미끄러지는 타임슬립이 일어났다. 타임슬립은 인사동에 맨 처음 난장을 펼쳤던 조선조 화공과 도공이 ‘여기가 세상의 중심일세’하고 외치는 소리를 듣자마자 멈춘다.

그들과 서울의 중심에 함께 선 ‘인간중심’을 공유하는 것도 잠깐. 곧 역타임슬립 사면을 미끄러져 제정신으로 돌아온 그 자리는 이미 서울의 중심이 아니다.

지금 서울의 중심이 어디인지 나는 모른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도 모른다. 다들 서울의 중심 따위는 관심조차 없다.

돈에 영혼까지 팔게 된 요즘 세상이고 보면 ‘서울의 중심’은 다른 곳이 아니라 ‘돈의 중심’인 강남이나 여의도의 증권가나 금융가로 옮겨졌는지도 모른다.

어쨌건 이 자리가 더는 ‘서울의 중심’이 아니게 된 시점에 즈음해서 인사동을 떠난 ‘한국 미술의 중심’들을 생각해 본다. 어떤 화랑들은 강남 가는 제비가 되었고, 또 어떤 화랑들은 북촌이나 서촌 또는 평창동으로 옮아갔다. 1990년대 중·후반쯤 인사동의 땅값이 천장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오르면서다. 초기 인사동을 대표하던 화랑 가운데 아직 인사동을 지키고 있는 화랑은 동산방과 경인미술관, 관훈미술관, 선화랑 등 몇몇에 지나지 않는다.

인사동을 떠나는 화랑 주인들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쓸쓸해하는 내게 표석이 돌의 입을 연다. 목소리가 그지없이 단단하다.

“이봐! 힘내, 인사동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나는 이제 서울의 중심은 아니지만 아직은 한국 미술의 중심이라 자부하고 있어. 생각해봐. 인사동에 자리 잡은 1000여 상가 중 문화예술 업종이 그 절반인 500여 개가 되잖아. 그 나머지 절반도 거의 카페나 찻집 음식점들인데 모두 한국 전통을 표방하고 있거든.”

돌의 격려로 나는 ‘서울의 중심’이 아니라 ‘한국 미술의 중심’에 서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내 존재의 중심을 그 돌의 중심이 받쳐 주자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진다. 그제야 나는 돌의 중심에 받쳐,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30년 넘게 인사동 소풍을 다녔지만 매번 새롭게 눈에 띈 화랑이 두어 개씩 나타났었다. 내가 눈썰미 없어서가 아니라 인사동에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해도 인사동에는 죄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화랑이 많았던 것이다.

인사동의 미술문화지킴터인 경인미술관의 정원

 

이름이 잘 알려졌건 아니건, 크건 작건, 인사동에서 저 나름으로 미술문화의 꽃을 피웠던 그 낭만시대에 작가로서의 내가 만들어졌기에 그 낭만시대의 버팀목이 되어준 몇몇 미술관을 들러 안부 전해 달라고 그 돌은 내게 당부했다. 나는 거기로 가야 했다.

표석을 뒤로하고 다시 인사네거리로 갔다. 인사동 길과 마주치는 거기서부터 관광객 물결에 휩쓸렸다. 주말이라 그 물결은 거침없고 드세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중국어가 우리말을 압도한다. 그들이 주로 들락거리는 쇼핑몰로는 아리랑명품관, 동일전통공예관, 덕원빌딩, 인사아트프라자, 인사동마루, 그리고 쌈지길 등이 있다. 그 쇼핑몰들을 빼고는 죄다 화랑이거나 표구점이거나 공예품가게거나 전통찻집들이다. 쇼핑몰에도 어김없이 미술 전시 전문 갤러리가 들어 있다. 요는 인사동에 자리 잡은 이상 아무리 잡다한 관광기념품으로 관광객을 상대한다 해도, 그 공간에 문화예술의 낌새를 풍겨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사동이 인사동의 자리를 지켜가게 하는 가장 듬직한 힘이다.

중국 관광객 요우커(遊客)들이 ‘메이드 인 차이나’인 한국 전통공예품(그런 것들이 인사동 좌판에 많다)을 한국제로 알고 구입한다 해도, 그곳이 인사동인 이상 그 물품은 한국 전통예술기념품으로 둔갑하고 만다. 다른 곳에서 잡은 조기도 영광에서 말리면 영광굴비가 되듯이.

수도약국 못미처 오른쪽으로 꺾어진다. 이 길은 한산하다. 관광객 인파가 쓸고 지나가는 인사동 길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도 이토록 달라진다. 조금 떨어져 바라보면 인사동 길은 사람 물결로 굽이쳐 흐르는 대하(大河) 같다. 사람 많이 몰리는 곳 또는 사람 가는 곳만 찾아가는 관광객인 것이다.

인사동 10길로 접어들어 다시 왼쪽으로 꺾어지면 경인미술관이 나온다.

여기 들를 때마다 고마움이 앞선다. 이 미술관은 옛 인사동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인사동 길을 벗어난 지 2∼3분이 지나지 않는데, 먼바다를 건너 외딴 섬에 닿은 느낌이다. 1983년에 개관했을 때와 지금의 경관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옥 전시관과 2층의 아담한 현대식 건축물이 정원에게 가운데 자리를 양보하고 한쪽으로 물러앉아 점잖다.

수도약국 맞은편의 가나인사아트센터와 북인사마당 가까이 올라간 곳에 있는 가나아트스페이스가 평창동으로 본거지를 옮겨간 가나화랑이 인사동에 남긴 흔적이며 그리움이다. 가나아트스페이스 바로 곁에 있던 학고재는 삼청동 쪽으로 떴다. ‘이즈’라는 대관 전문 화랑이 학고재를 대신하고 있다.

인사동 길 중간쯤에서 조계사 쪽으로 빠지면 인사동홍보관이 나온다. 모든 인사동 화랑주인으로부터 원로로 존경 받고 있는 박주환 옹이 창업한 동산방과 이 인사동홍보관 사이에 2012년 가을 지하 4층에 지상 5층 그러니까 9층의 큰 건물 하나가 들어섰다. 9개 층이 모두 전시실이다. 그림을 걸어두고 파는 상설공간은 일절 없다. 9개 층의 2000평(6600㎡) 공간 전체가 전시공간이다. 단일 미술관으로는 뉴욕이나 파리나 런던 등 미술 선진도시의 세계적 미술관이 무색할 만큼 큰 스케일에 공간 활용이 멋지고 기품이 넘치며 당당하다.

 

 

인사동을 상징하는 랜드마크 '아라아트'


인사동을 상징할 랜드마크가 들어선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메이저 화랑들이 속속 인사동을 뜨고 있을 즈음에 ‘시류의 반항아’인 김명성 씨가 인사동 르네상스를 꿈꾸며 이곳에 터를 잡은 2007년부터 나의 인사동 소풍 발길의 종점은 이 아라아트센터가 되었다.

기적이 따로 없다. 한국 미술시장이 해체 지경에 이르렀다는 한탄이 끊이지 않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인사동에 이런 전시관이 한 사내의 집념으로 세워졌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기적이다.


이 기적이 인사동 부흥의 기치를 한국 미술사에 드높이 치켜세우는 또 다른 기적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아라아트센터를 찾는 인사동 사람들의 발길이 요즘 끊이지 않는다. 김명성 씨는 인사동 사람들의 술값 밥값 치르며 지난 삼십 년을 살아온 사람이다.

‘아라’라는 이름은 내가 지었다. 한자 표기는 ‘亞羅’다. 아시아로 뻗쳐 나가라는 바람을 담았다. 영어로는 ‘Asia Renaissance Action’ 곧 ‘아시아문예부흥운동’의 이니셜을 땄다. 인사동 아라아트센터가 ARA의 빛나는 거점이 되길 바랄 뿐!

이렇듯 인사동에는 아직 미술과 더불어 숨 쉬는 공간이 500곳 넘게 살아 있어, 인사동은 오늘도 미술세상의 중심에서 예술을 외친다.

[소설가 박인식씨가 문화일보에 기고한 글]

 


 

                                                                                                        김승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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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헌갑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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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정선의 문화게릴라 강기희씨

"이 시대의 마지막 빨치산 숙암골로 숨어들다."

 

 

 

강기희씨 하면 진보적인 성향의 소설가, 또는 '동강에는 쉬리가 있다'를 쓴 작가로 대개 기억한다.
그래서 그의 구체적인 이력을 한번 들여다보았다.

 

그는 정선토박이로 강원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하였고, 1998년 ‘문학21’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장편소설로 ‘아담과 아담 이브와 이브’, ‘동강에는 쉬리가 있다’, ‘은옥이 1, 2’, ‘개같은 인생들’, ‘연산’ 등이 있으며

한국최초 전자책 전문업체인 ‘바로북 닷컴’이 주최한 오천만원 고료 ‘제1회 디지털문학대상을 수상하였고,

그리고 2005년 한국문화에술위원회의 문예창작기금을 수혜하기도 했다.

지금은 한국문학평화포럼이사로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한다는 등의 이력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력보다 더 중요한 그 만의 남 다른 면모가 많다.

순정의 절규를 외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날카롭게 현실을 꿰뚫어 보는 문제의식을 가진 작가이다.

그동안 ‘오마이 뉴스’ 객원기자로 일하며 현실을 비판했던 탓인지 가끔 색깔론을 재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정선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애써 왔다는 사실이다.

가진 것이 없어 망정이지 만약 경제적 능력만 있었다면 쉴 틈 없이 판을 벌일 그런 사람이다.

정선 집에는 서울에서 활동하는 문객들이 수시로 들락거리고, 필자도 정선보다 인사동에서 그를 만날 때가 많았다.

지역적 소외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 만큼 문화예술에 대한 갈증을 많이 느낀다는 반증이다.

몇 년 전 누전에 의한 화재로 자신의 집을 몽땅 불태워 버린적이 있었다.

집뿐 아니라 책이며 옷이며 살림 전부를 불 태워 숟가락 하나 건지지 못한 빈털터리가 되었다.

다행히 남의 집이긴 하지만 숙암리의 아름다운 저택에 입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한 때 박성범, 신은경 커플이 별장으로 사용했던 꿈의 궁전임에도 불구하고 

오래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탓에 그가 아지트로 빌려 쓰게되었다는 것이다.

그 곳에서 얼마 전 출간된 ‘연산’을 음모하기도 했고, 지금은 또 다른 일을 저지르기 위해 음모 중이다.

올 시월달에 열릴 정선아리랑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기에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그는 분명 정선이 내 세울 수 있는 자랑스러운 작가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가 성장한 배경에는 정선시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빠트릴 수가 없다,

그의 어머니이신 이춘옥(81세)씨가 한 평생을 정선장에서 벌어 그 돈으로 자식들을 키웠다는데.

 아직까지 가게도 없는 노점에서 장사하는 어머니를 늘 안스럽게 지켜보는 그다.

그래서인지 정선아리랑시장에 문화의 옷을 입히는데도 많은 고심을 해왔다.

얼마 전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에다 돈 안 되는 ‘골목도서관’을 차려 언론의 조명을 받기도 했는데,

지금은 모자가 함께 장터에서 일하고 있는 셈이다.


자랑스러운 장꾼의 아들! 강기희씨의 또 다른 문화적 음모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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