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이광수교수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인간은 악이다’라는 말이 이처럼 꽂힐 수는 없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사람의 목을 잘라 사진을 찍을 수가 있을까?

이 사진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11월 미국의 ‘라이프’지 기자 마가렛트 버크-화이트(Magaret Brourke White)

찍은 사진으로 ‘라이프’지에는 게재되지 않은 사진이다.
할머니들이 울고 있는 사진도 함께 찍은 걸 보니, 전투 중의 사상자가 아니라 처형된 부역자로 보여진다.


‘라이프’지는 한국전쟁에 Carl Mydans, David Douglas Duncan, Magaret Brourke White, Mike Rougier, Howard Sochurek 등

뛰어난 사진 기자 다섯 명을 파견하여 취재했는데, 이 사진을 찍은 버크 화이트는 3개월 간 한국에 체류했다고 한다.





오래 전, 목 잘린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는 치가 떨려 자세히 보지도 않고 넘겼는데,
우연히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을 살펴보니, 도끼로 목을 잘라 치켜들고 있었다.
사진설명에는 '빨지산의 수급을 든 한경록 전남도경국장의 팔사진'이라 적고있다.

연출한 듯한 작위성도 다분했다. 그렇지 않다면 치켜들 필요가 없을 것이다.

머리를 움켜 진 한경록이란 자는 손만 나와 그 잔인한 표정을 읽을 수 없지만,
도끼를 어깨에 맨 사내의 표정에서 이글거리는 야수성을 느낄 수 있다.
전쟁터에서 피 맛을 보면 눈알이 뒤집힌다는 말은 들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이럴 수는 없다 싶다.
‘성선설’이 맞는 건지 ‘성악설’이 맞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인간 자체가 악임은 틀림없다.





 위 사진은 친일 경찰 출신인 한경록이 살상을 자축하는 모습이다.

사진 설명에는 "중국의 밤"이라는 일본 노래를 부르며, 부하와 기생들과 어울려 놀고 있다'고 적혀있다.

그는 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학살 사건, 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 부역혐의자 학살 사건 등에 관여한 경찰 수뇌부로,

일선 경찰 중 민간인 학살 분야에서 유일하게 3관왕을 달성한 악질 경찰이라고 한다.

목을 치켜들고 사진을 찍었던 악마같은 표정은 안 보아도 훤히 그려진다.





이 사진을 찍은 버크-화이트는 미국의 전설적인 사진가다.
그녀는 현장을 기록해야 하는 기자이고 다큐멘터리 사진가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꼭 이렇게 찍어야 했는지 묻고 싶다.
어찌 보면, 끔찍한 사진을 공개하는 나 역시 별 다를 바 없겠지만....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가끔 고민하는 문제가 바로 이 부분이다.
지금 사람이 죽어 간다면 사람을 구 할 것인가? 사진을 찍을 것인가?
물론 사람을 구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사람부터 구해야 되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일 때 말이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라면 대부분 찍을 것이고, 이전 같았으면 나 역시 찍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 한 장으로 다큐사진가의 자세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인본주의를 내세우며,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진가 Magaret Brourke White



사진을 찍은 버크-화이트는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나서 1971년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사진가로서 활동한 1920년부터 1950년까지 30년 동안은 세계사적 일대 전환기로,

격변의 시대 상황을 기록한 독보적인 사진가다.

포춘(Fortune)지와 ‘라이프(Life)’지의 창간 스탭으로도 활동하였고,
‘라이프’가 창조한 포토저널리즘의 새로운 형태인 포토에세이로 주목받은 스타 사진가이기도하다.

20세기 다작 사진가의 한사람으로, 초기에는 곤충에서부터 산업, 농업, 건축 등
다양한 대상에 흥미를 가졌으나, 점차 인간의 갈등과 비극, 삶의 투쟁 등으로 좁혀져 갔다.

독일의 멸망을 취재하고, Buchenwald 수용소에 들어가 죽은 자와 생존자를 취재했다.
그 사진들은 인간이 만들어 낸 지상의 지옥에 대한 영원한 증언으로 남았다.
그 뿐 아니라 처칠의 포트레이트와 간디의 마지막 사진 등 유명한 작품을 숱하게 남겼다.

그가 남긴 "사진가가 사진에서 진실을 말하려 한다면 그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이 사진 한 장으로 퇴색된다.




사진, Magaret Brourke White / 글, 조문호
사진자료는 페이스북 'Designersparty'에서 스크랩했다.








 

 

간밤에, 죽은 사진기자 김종구씨를 만났다.

 

인사동거리에서 그를 만났는데, 대뜸 “조 선배! 강촌에는 언제 올 거요?”라고

물었다. “응 시간 맞춰, 근일 간에 한 번 갈게”라며 헤어졌으나, 꿈이었다.

“왜, 갑자기 죽은 종구씨가 꿈에 나타났을까?” 옛 생각에 잠시 빠졌다.

강촌은 그가 마지막 시간을 보냈던 곳이지만 한 번도 못 가봐,

늘 마음의 빚이 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꿈에 나타난 것이리라.

 

김종구씨는 인사동에서 청춘, 아니 인생을 불사른 사진기자다.

인사동과 친구들이 없었다면 그렇게 퍼 마시지도 않았을 것이고,

일찍 세상을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최류탄 가루에 범벅이 된 몸으로 ‘귀천’에 앉아 진토닉 한 잔으로 울분을 삼킨 그다.

인사동 좋아하고 친구 좋아 해, 틈만 나면 인사동에 나와 마셔댔다.

하기야! 그 암울한 시대에 술 마시지 않고, 맨 정신으로 살기도 힘들었다.

 

술에 절은 까만 얼굴에 큰 입으로 낄낄거리며 웃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근무하는 중학동의 ‘한국일보’사가 인사동 지척에 있었으니, 수시로 들락거렸다. 

당시 인사동 거지 예술가들에게 김종구씨는 영원한 호구며 구세주였다.

대개 ‘실비집’에서 퇴근하기를 기다리는데, 죽은 적음시인은 늘 목을 매고 기다렸다.

그렇게 하루도 쉬지 않고 마셔대더니, 결국 둘 다 술 때문에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나는 그에게 술 만 얻어먹은 것이 아니라 필름도 얻어 썼다.

사진기자들은 필름에 구애받지 않아, 사진하는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가끔 꼬불쳐 둔 필름을 한 두통씩 건네주곤 했는데, 너무 고마웠다.

특히 시위현장에서 필름이 떨어지면, 그를 찾는 수 밖에 없었다.

 

요즘은 87년도 민주항쟁을 기록한 사진 수정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사진들을 수정하다 종구씨의 취재장면이 담긴 모습을 만난 것이다.

명동성당 입구에서 박종철 추모미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취재진 속에 섞여있었다.

육교 위의 나에게 카메라를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보니, 너무 반가웠다.

이 사진을 보려고, 그런 꿈을 꾸었나 생각되기도 했다.

 

그는 사진기자로서는 최선을 다했으나,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대개의 사진기자들이 별도의 카메라로 자기가 필요한 대상도 찍지만, 그는 고지식했다.

그 사진하기 좋은 조건에 있으면서도 한 눈 팔지 않았고, 남는 시간은 술 마시는데 소진했다.

‘한국일보’ 사진부 소속으로 ‘주간한국‘의 오지 촬영을 했을땐, 별도의 작업도 기대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 후 아까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남긴 필름이 늘 궁금했다.

몇 년 전 두번째 부인으로 부터 '유카리화랑'의 노광래씨에게 전달되었다기에,

마침 천상병선생 20주기를 맞아 사진집 출판을 준비하던 즈음이라 찾아 나섰다.

특히 인상적인 그의 사진은 ‘귀천’에서 천상병선생 옆에 앉아 목여사님이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었다.

그 필름을 비롯한 천상병선생 관련 자료들은 찾아 몇 장 빌려 쓸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인터뷰 때 찍은 포트레이트사진들이 어수선하게 화일에 꽂혀 있었다.

 

사진기자로서 한국일보사에 남긴 기록적 사진자료들은 많겠지만,

사진으로 20여년을 살아 온 한 사진가의 자료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그래, 죽으면 어차피 빈손으로 가는데 남겨봤자 뭐하겠느냐“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간 밤에 꿈에서 한 그의 말이 영 찜찜했다.

“강촌에 언제 올거냐?”가 아니라 “저승에 언제 올거냐?”란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야이! 술 귀신아~ 그거는 저승사자인 니가 더 잘 알지, 살아있는 놈이 우째 아노“

 

사진,글 / 조문호

 

사진하는 사람으로 이명동선생 모르면 간첩 소리 듣는다.
한국사진계에 끼친 영향력도 워낙 크지만 보도사진가로서의 기자정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4,19때 총탄이 쏟아지는 경무대 앞에서 찍은 사진과 육군교도소에 수감된 서민호선생을 찍기 위해 위장한 사건 등으로 사진계에 전설을 일구어 냈다.

그는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올해로 95세를 맞은 원로 사진가다.
어린 시절, 소 판돈 들고 나와 카메라를 구입해 사진의 길로 나선 것이다.

종군기자로 시작된 사진인생은 육군본부에서 주최한 전투사진콘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막을 열었고,

화랑무공훈장을 무려 3개나 받았다.
동아일보 인촌선생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장례식장을 지켜, 갑자기 조문 온 이승만대통령을 찍어 특종 하였는데,

그 것이 계기가 되어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입사했다. 여지껏 사진기자 출신으로 부국장 반열에 오른 사람도 없거니와, 

일하는 동안 몸 아끼지 않는 그만의 기지로 많은 특종을 만들어 냈다.

특히 국내 최초로 시작된 동아사진콘테스트와 동아국제살롱사진, 사진단체 창설 등 사진사에 남을 중요한 일들은 모두 선생께서 주도하셨다. 대학에서 보도사진을 강의해 후학들을 양성하기도 했지만, 선생의 날카로운 사진비평은  황무지나 마찬가지였던 사진계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정년퇴임 후에는 '한국화보'와 '서울화보'를 발간하여 우리문화를 세계에 알렸으며, 그 이후 '사진예술'을 창간하여 낙후한 국내사진잡지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   

그동안 사진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현대사진문화상, 제비꽃 특별사진가상, 옥관문화훈장, 건국포장, 언론부문의 인촌상 등을 받아 온 이명동선생은 한국사진계의 전설이자 산 증인임에 틀림없다.

지난 2월 24일 아침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생각지도 않은 이명동선생의 전화를 받아 어리둥절했는데,

자택이 있는 약수동에서 맛있는 점심을 사주겠다는 말씀이셨다.

선생님을 만나뵙고 갈비탕과 차를 들며 즐거운시간을 가졌지만,

계산을 먼저 해 민망하게 만들었다. 
사시는 모습을 기록하려 찾은 자택에는 사모님 혼자 계셨는데,
거동이 불편한 사모님을 위해 직접 밥을 지어 차려주고 나오셨다는 것이다.
연로하신 선생님께서 시장보아 음식 만들고, 간병까지 한다니 기가 막혔다.  

 

"아! 이게 인생이구나"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많은 공적과 화려한 명성도 세월 앞에는 다 부질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좁은 방에서 장모님 간병하는 아내가 안타까워 투정했던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워 졌다.  

선생님께서 마지막까지 한 수 가르쳐 주신 것이다.
갑자기 전화주신 것도 내 처지를 아셨던 모양인데, 이것이 말없는 교육이었다.
떠나올 때, 장모님 맛있는 음식 사드리라며 주머니에 강제로 찔러 넣어 준,
꼬기 꼬기 접은 오만원권 지폐 두 장이 결국 나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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