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떠나 보내는 지난 28일 저녁 무렵,

시대가 낳은 의인 방동규선생을 모시는 자리가 인사동 '선천집'에서 마련되었다.

송년회와 방동규선생 미수연을 겸한 자리였는데,

늦장 부리다 송년 인사하려다 새해 인사가 되어버렸다.

 

얼마 전 푸른사상맹문재 주간이 방동규선생님을 모시고 저녁 식사나 같이하자고 했다.

장소만 결정되면 한번 뵙고 싶어 했는데, 친구 송년회 선약과 겹쳐버렸다.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할 수 밖에 없었는데, 선천집에는 방동규선생께서 먼저 와 계셨다.

이승철 시인도 보였고, 한 분은 방동규선생의 미수를 축하한다는 글을 붙이고 있었다.

 

송년회가 미수연으로 바뀐 셈인데, 지난 4월 은성식당에서 가진 방동규 선생 미수연이 떠올랐다.

그날 참석하지 못한 분들이 모신 자리기는 하지만, 방동규선생께서 그런 자리를 반기지 않는 것 같았다.

"년 말이라 저녁 식사나 하자기에 나왔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자신을 내세우는 자리 자체를 싫어하시지만, 일제의 잔재라며 미수란 글자도 못 마땅해 했다.

 

맹문재씨가 나타나서야 송년회 아닌 미수연이 시작되었다.

방동규선생을 비롯하여 맹문재주간과 이승철시인 외는 모르는 분이었다.

맹주간이 강태승씨를 비롯하여 권순자, 고은진주, 유국환, 장우원, 조미희 시인과

고서적 수집가 김병호씨, 그리고 뉴스페이퍼이민우씨를 차례대로 소개했다.

 

맹문재씨는 오래전 선생께서 펴낸 자서전 배추가 돌아왔다1,2권을 챙겨 와 방동규선생을 소개했다.

방배추를 모르면 간첩이다는 말도 한 물간 옛말이었다.

 

방배추란 별명은 어떻게 생겼냐는 첫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하드라마에 버금가는 방배추선생의 이야기보따리가 풀렸다.

시대적 울분을 날린 낭만 주먹 이야기는 막힘이 없었다.

방동규선생은 돌아가신 백기완선생, 소설가 황석영씨와 더불어

조선의 삼대 구라로 불리는 분이 아니던가?

 

방배추의 주먹도 좋고 구라도 좋지만, 무엇보다 의인이라는 것이다.

구순을 눈앞에 둔 지금까지 일손을 놓지 않는데,

꾸준한 근육운동으로 몸 관리까지 하고 계신다.

 

그리고 이 추운 날, 윤석열 정권 규탄하는 토요 집회에도 빠지지 않으신다.

다들 눈치나 살피는 어른들이라, 못 볼 것을 보아도 꿀 먹은 벙어리다.

진정한 어른이 없는 시대라 방동규선생이 더 돋보이는 것이다.

 

고은시인이 만인보에 쓴 방동규선생에 대한 시를 한 번 들어보자.

되지 못한 세상에서는 / 꼭 엉뚱하기는 / 천장에 매달린 / 대들보 같은 사람이 있어야 했다

힘깨나 쓰지만 힘자랑보다 / 입심 좋아 / 그 입심에 술자리 눈과 귀 집중하다가 /

술자리 입들 짝 벌어져 / / 와 웃음 터진다.”

 

새해에는 다들 웃고 삽시다.

그리고 선생님처럼 건강하고 의롭게 삽시다.

방동규 선생님의 만수무강을 빕니다.

 

사진, / 조문호

 

 

꽃비 내리는 지난 주말 방동규선생을 모시고, 돌아가신 백기완선생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푸른 사상’ 여름호에 게재될 특집 대담을 위해 맹문재교수가 진행했다.

 

'한국출판콘텐츠센터'에 있는 ‘푸른사상사’ 사무실에서 오랜만에 방동규선생을

만나뵙고 이야기 들은 좋은 시간이었는데, 방배추 선생의 입심은 여전하셨다.

 

오후2시부터 시작된 대담이 어둑할 때까지 이어졌으니, 장장 다섯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쉬는 시간도 없이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흡인력이 대단했다.

긴 시간 대담이 이어졌으나 여쭈어보지 못한 게 많아 한 번 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단다.

 

또 하나 예사롭지 않은 것은 선생의 또렷한 기억력이다.

나 역시 오래된 일은 물론, 엊그제 일도 잘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은데,

팔순 후반인 선생의 기억력은 아직까지 생생하셨다.

 

하기야! 방동규선생은 백기완, 황석영선생과 더불어 조선의 삼대구라로 꼽히는 위인이 아니던가?

방선생의 입심보다 살아오신 내력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한 때는 조선 최고의 주먹인 방배추란 별명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떨쳤다.

그 것도 정치깡패나 돈에 팔린 주먹이 아니라 의협의 주먹이었다.

 

잘 못된 것을 그냥 못 보는 선생의 기질은 어릴 때부터 타고 난 것 같았다.

못된 놈은 상급자를 가리지 않고 손을 보았으니, 다섯 번이나 퇴학 당하여 학교를 옮겼다고 한다.

 

그런 전력을 가진 방선생께서 백기완 선생으로부터 뺨 석대 맞고

시작된 인연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 것이다.

그 센 주먹을 나라를 위해 쓰라는 뜻을 누가 모르겠는가?

 

백기완선생은 노동자의 세상을 설파하셨지만, 방동규선생은 노동을 일상화하는 분이다.

탄광에서 부터 농사까지 안 해본 일이 없는데, 그 연세에 아직까지 일거리를 찾아 나선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마라'는 신념의 소유자다.

 

두 분에 대한 이력이야 여러 권의 자서전에서 어느정도 알고 있었으나, 처음 듣는 이야기도 있었다.

정식 교육을 받은 것이라고는 일제강점기 때 국민학교 5년 다닌 게 전부인 백기완 선생께서

장관 집이나 부자 집 자식들 영어 과외 공부를 도맡았다고 한다.

더 이해가 되지않는 것은 백기완선생은 외국말을 지독히 싫어하는데다,

미국을 원수처럼 여기는 분이 아니던가?

 

그 이유는 적과 싸우려면 적을 모르고는 싸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독학의 피나는 노력도 따랐겠지만,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울 정도의 천재성에 기인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정보부 고문실에 끌려가 죽도록 얻어맞고 나오다 백기완선생을 만났으면

다친대는 없냐고 걱정해 줘야 마땅한데, 기죽지 말라고 소리 질렀다고 한다.

 

또 하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역사가 모든 것을 기록 한다”는 말씀이셨다. 

“친구인 너도 기록될 수 밖에 없으니, 매사에 조심하라”는 언질이었다.

한 평생 육체적 고통에 더해 마음의 자물쇠마저 차고 계셨으니,

어디 마음 편한 날이 하루라도 있었겠는가?

 

불쌈꾼’이고 민중사상가인 백기완 선생의 삶은 격동의 현대사 자체다.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 온몸을 던지셨다.

 

진행자인 맹문재씨가 대담 말미에 백기완선생과의 관계를 내게도 물었는데,

오래된 인연이긴 하나 뚜렷한 기억이 떠 오르지 않았다. 

 

80년대 중반 선생의 존함만 알았던 어느 날,

기자로 일하던 후배로 부터 백기완선생 사진 좀 찍어 달라는 부탁을 받아

함께 자택을 찾아 간 것이 선생과의 첫 대면이었다.

첫 인상은 온화하게 느껴졌으나, 빈틈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범상한 모습에 기가 죽었다.

노동운동에 대한 이야기도 정치에 대한 이야기도 모두 날이 서 있었다.

낙천주의자인 나로서는 선생 앞에 쫄 수밖에 없는 상황인지라, 고개도 못 고 말씀만 들었던 기억이다.

 

그 뒤 1987년 대선에 출마하셨을 때는 87 민주항쟁’ 기록 자체를 선생의 행보에 맞추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대학로 유세에서는 젊은이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쇳소리 같은 선생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타고 난 선동가였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이룰 것 같은 신념으로 희망찼으나, 양김 단일화를 위해 뜻을 접어셨다.

백기완 선생은 “그때 내 말만 들었으면 군사독재가 진즉 청산됐을 것”이라며

이루지 못한 뜻을 못내 아쉬워 하셨다.

 

그 뒤 90년대 중반 무렵, 양평의 어느 행사에 참석하신 적이 있었다.

사진하는 김영수 작업실에 들려 오랜시간 함께 했는데, 처음으로 자상한 모습을 보았다.

김영수의 소변 색이 이상하다는 말에 확인해 보고는

당장 술을 끊으라고 나무라던 큰형 같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난, 어릴 때부터 성격이 암되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다.

평소에는 죄인처럼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지만, 술만 한 잔 들어가면 백 팔십도로 바뀐다. 

그렇지만, 선생 앞에서는 감히 술 한 잔 마실 여유조차 없었다.

 

그 이후엔 전시 개막식에나 광화문광장 등에서 자주 뵐 수 있었지만, 항상 거리를 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을 반가워하며 기념사진 찍기 바쁘니, 나 까지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었다.

나서기 싫어하는 소인배 임을 감지하셨는지, 떨어져서 올리는 목례에 늘 빙그레 웃으셨다.

그래서 선생님을 만나면 카메라로 인사드리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반가운 사람만 만나면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못된 버르장머리는 그 때부터 생겨 난 것이다.

 

그토록 염원하던 남북통일을 보지 못한 채, 선생께선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본주의를 뛰어 넘어 모두 잘 사는 '노나메기’ 세상도 보지 못하고 가셨다.

 

한 평생 자신의 안위는 내팽개치고 힘겹게 사신 선생의 지난한 생애가 너무 가슴 아프다.

찬바람 부는 '광화문광장'에서 버티던 선생의 모습은 보는 자체가 고문이었다.

역사란 족쇄에 갇혀 재미있게 한 번 놀아보기라도 하셨겠나?

 

백기완 선생은 이 시대 마지막 투사였다.

민중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위대한 업적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산 자여 따르라"는 선생의 노랫 말이 귓가에 아롱거린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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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린시인 탄생100주년을 맞아 시인의 시세계를 재조명하는 학술심포지엄이

지난 529일 오후3시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렸습니다. 

한국후기모더니즘 시운동의 선구자라지만 처음 듣는 이름이었고,

배포한 시집을 읽어봐도 그렇게 마음에 와 닿는 시도 없었습니다.

 

민용태, 홍승진, 이계설, 맹문재씨 등 심포지움에 참석한 발제자나 토론자,

그리고 사회를 보는 이은영씨를 제외하고는 그 넓은 기자회견장을 메운 문인들 중 

아는 분이 한 분도 없다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사진기록 부탁을 받고 갔으나 후회스러운 발걸음이었습니다.


받은 사진촬영비용도 김경린시인 가족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사진, / 조문호


















 







지난4일 열린 7차 ‘광화문 미술행동’에서 내세운 슬로건은 ‘새로운 나라로!’였다.

새로운 나라가 되기에는 세월이 걸릴 것 같지만, 일단 박근혜 부터 구속시키고 황교안을 사퇴시키자.

광장갤러리에 설치된 걸개그림은 판화가 김준권씨의 ‘청죽’을 비롯하여 30년 전에 그린 김진하씨의 작품도 먼지 털며 나왔고,

정비파씨의 독수리 무리도 경주에서 날아왔다. 박홍규, 김봉준, 김 억, 류연복, 손기환, 유대수, 윤여걸, 이철수, 홍진숙,

홍선웅씨 등 대가들의 그림이 줄줄이 내 걸렸다. 이젠 알미늄 틀도 만들어져, 다들 반듯하게 걸렸으나,

김진하씨의 작품만 바람난 여인 치맛자락같이 펄럭였다. 오히려 흔들리는 형상에 더 눈길이 끌리더라.


오는 정월대보름 날 열릴 8차 프로젝트에서는 ‘광장갤러리’를 시와 사진으로 꾸밀 예정이다. 

서예퍼포먼스와 함께 춤판도 벌일 예정이나 매주 예술행동에 소요되는 비용 또한 만만찮다.

세화를 찍고, 판화를 파는 등 다방면으로 후원금을 모아 왔으나, 적자를 면키 어려웠다.

가난한 작가들의 예술저항이라 십시일반 나누는 시민들의 도움이 절실한 실정이다. 

‘궁핍현대미술광장’에서 열린 세화로 꾸민 판화전은 관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판화가 류연복씨는 세화 찍느라 바빴고, 옆에서는 김가영씨가 열심히 도왔다.

이날은 반가운 분들도 연이어 등장하셨다.

원로 시인 강 민선생을 비롯하여 백기완, 황석영씨와 함께 조선의 삼대구라로 꼽히는 방배추(방동규)선생,

시골서 상경한 홍석화씨, 맹문재교수, 양문규시인, 장영도이사도 함께했다.

이른 점심을 먹고 나왔으나 ‘청진동해장국’으로 따라갔다. 신축건물이라 옛 분위기는 오간데 없고, 밥값만 비싸졌더라.

맹문재씨가 카드로 결제했지만, 만원씩이나 하는 해장국은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자리를 비웠더니, ‘광화문 미술행동’의 서예퍼포먼스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여태명씨의 서예퍼포먼스는 끝 난 뒤였다.

여태명씨는 ‘탄핵대길. 안민다경’을 써 놓았고, 박수훈씨는 탄핵농자지대본’을 쓰고 있었다.

예술가들의 글과 그림 위에 시민들이 쓰는 자유발언대 참여도 이어졌다.

이날 김준권씨를 비롯하여 장경호, 송경동, 김남선, 김진하, 깁봉준, 정덕수, 김 억, 김 구, 양혜경, 정영신, 장순향,

김영배, 이광군, 장진영, 이윤엽, 이재민씨 등 많은 예술가들이 일을 도왔고, 신학철, 신상철, 박 철, 권 홍, 최석태,

하형우, 김보영씨 모녀도 모습을 드러냈다. 고생하는 후배들을 위해 신학철선생께서 한 턱 쏘았는데,

술 한 잔에 맛이 가 꾸벅꾸벅 졸다 돌아와야 했다. 아직 몸이 정상은 아니었다.

오는 정월대보름날 열릴 15차 촛불집회의 ‘광화문예술행동‘을 기대하시라.
김준권씨는 충북 옥천에서 행진에 사용할 깃발용과, 광화문 달집용 대나무를 벌채하는 사진이 페북에 올라왔다.

정월대보름의 신명난 굿판이 기다려지는 하루다.

사진, 글 / 조문호

























[김준권씨 페북에서 스크랩]

[김준권씨 페북에서 스크랩]





































































[김준권씨 페북에서 스크랩]

[김준권씨 페북에서 스크랩]







강 민선생의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 출간에 대한 기자간담회가

지난 7월9일 정오 무렵 인사동 ‘포도나무집’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는 인사동의 원로시인들이 대부분 참석하였다.

문학평론가 구중서, 극작가 신봉승, 시인 민 영, 신경림,  황명걸, 맹문재, 박정희,

서정란, 이경철씨와  문화일보 유민환기자, 세계일보 조용호기자, 한국일보 황수현기자 등

일간지 문학담당 기자 7명이 참석하여 오찬을 겸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강 민 선생께서는 시집출판에 대한 인사말에서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도

동요하지 말고 안심하라 했다면서 세월호 참사의 동질성을 질타했고,

신경림선생께서는 시집출간을 축하하는 격려 말씀을 주셨다.


 

시인 민 영선생에 이어 맹문재씨가 낭송한 강민선생의 “명동, 추억을 걷는다” 시 한편을 옮긴다.

 



명동, 추억을 걷는다.

2007년3월29일, 오전 11시40분경
약속 시간이 남아
내 추억의 앨범에는 없는
낯선 명동을 걷는다.
2,30대의 우리가 거의 날마다 들려
헤매던 거리와는 완전히 달라진
화려하게 분칠한 명동을 걷는다.

지하철 명동역에서 내려 충무로를 가로지르려다
문득 태극당 앞 건물 지하에 있던 [음악회관] 생각이 난다.
건장한 체구의 노익장이셨던 첼리스트 김인수 선생이 운영하시던
거기서 천상병을 위시한 우리는 무척 선생의 속을 썩혀 드렸다.
이추림, 김희로의 [오시회/午時會]도 여기서 주로 모임을 가졌었지
충무로에 들어선 김에 우측으로 돌아 명동성당 길로 발길을 옮긴다.
길모퉁이, 여기 쯤이던가
이산 김광섭 선생이 내시던 문예지 ‘자유문학’사가 있었지
편집을 하던 이는 시인 김시철, 또 다음에는 소설가 박용숙이었던가
거기를 통해 남정현, 최인훈, 송혁, 남구봉, 권용태, 황명걸 등이 등단했고
아니지 결국 나도 그리로 등단하지 않았던가
조금 내려가니
우측에 빈대떡집 ‘송림’, ‘송도’ 자리가 보인다
아나운서 유창경, 소설가 정인영, 송기동, 시인 김춘배, 출판편집인 김승환, 김상기 등이
때로는 거의 고장 난 고물 시계를 맡기고 외상술을 마셔도
싫은 내색도 없이 오히려
“너희들 술 좀 작작 마셔라. 몸 상할라”
염려하시던 주인아줌마들...
70년대 어느 날에는 ‘겨울공화국’에 쫓기는 양성우 시인과 야인 백기완과
여기서 급한 회포를 나누기도 했지
아, 잊을 수 없다. 그때 쏘아보던 양성우 시인의 새파란 야수 같은 눈빛!
폭격으로 페허가 된 건물 지하에 수십 집이 얼기설기 칸을 막고 영업을 해서
우리가 ‘아방궁’이라 불렀던 곳에는
이제 이름 모를 큰 빌딩이 치솟아 있고
박성룡, 이규헌, 이일, 이창대, 김관식, 이현우, 송혁, 신기선, 송영택 등이
소금으로 안주를 삼고 동동주라는 카바이트 술을 마시던
언덕배기의 ‘몽파르나스’는 이일 시인의 명명(命名)이었던가
이현우가 자주 노숙을 한 공원이었던 제일백화점 자리는 흔적도 없고
그 앞에 있던 음악감상실 ‘돌체’, ‘엠프레스’
폐질환으로 파랗게 질린 표정의 천재 화가 김청관을 비롯한 박서보, 문우식, 최기원 등의 화가며 조각가들의 모습이 떠오르며
거기서 DJ 역할을 하던 나중에 ‘조선일보’문화부장을 한 정영일 생각도 나고
좁은 골목 안에 있던 ‘쌍과부집’은 알콜 중독의 천상병이 주기(酒氣)가
떨어지면 가서 큰 유리잔으로 막소주 한 잔을 홀짝 마시던 곳이었지
다시 명동의 본길로 돌아와 복원 중인 ‘국립극장’ 쪽으로 걷는다
왼쪽의 화려한 패션 상점 거기에 ‘청동’에서 ‘금문’, ‘송원’으로
이름이 바뀐 찻집이 있었지
늘 그 자리에 눌러앉아 연신 담배를 피워 물며
끊임없이 찾아오는 여학생들의 손을 만지작거리시던
‘청동문학’의 주인이시며 우리 문단의 원로 공초 오상순선생!
거기서 만난 남구봉, 신봉승, 김종원 등의 친구와 멋쟁이 선배 황명, 최재복
그리고 김금지, 최희숙, 박정희 등의 여자 친구들
아, 지금의 내 아내 소국당(小菊當)도 거기에 이따금 출입했었지
그 위가 ‘송원기원’이었는데
우리나라 바둑계를 이끌던 조남철 선생이 운영하시던 그곳에서
민병산, 신동문, 김심온, 신경림, 황명걸, 이시철, 김문수 등을 만났다.
겨우 두 집 내면 사는 정도밖에 모르는 내게
조선생은 떡 8급 딱지를 붙여 주시고...
네거리에 서면, 국립극단 초년생으로 무대에 섰지만, 열정적이고
인상적이었던 김금지의 ‘만선(滿船)’ 무대 연기가 생각난다.
왼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가 다시 을지로 쪽으로 꺾는다
텔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그 유명한 목로‘은성‘
그 자리 앞에 선다.
그 집의 벽화로 불리운 명동백작 이봉구선생, 박봉우, 문일영, 김하중, 이문환 등의 시인 묵객들...
모두가 그리운 이름들이다.
그리고 그 앞집이 ‘몽블랑’이었다
내 인생의 진로를 바꿔 놓은 영화감독 김소동 선생이 늘 진치고 계시던 찻집
어려서부터 영화에 미쳐서 그 길로 가려고
서라벌예대 첫해 연극영화과에 입학하려는 나를 극구 말려 동국대 국문과로 돌려놓으신 선생님!
여기서 문득 내 추억 걷기는 멎는다
약속시간이 다 되고 그 장소가 바로 거기 보였기 때문이다
‘갈채’ ‘코지코너’ ‘동방살롱‘ ’청산‘ ’도심‘ ’문예살롱‘ 등의 찻집과
‘명천옥’ ‘구만리’ ‘할머니집’ ‘도라무통집’ 등의 대폿집...
많은 이들이 가고 명동은 변했다
허지만 아직도 많은 명동 구석구석의 추억을 찾아 나는 또 여기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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