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난 오래된 사진은 아득한 기억의 저장고다.

반세기가 지난 삶의 기록들은 손에 잡힐 듯 말 듯, 볼수록 정겨움이 더하는 우리의 역사다.

 

어제는 잠이 오지 않아 쪽방 침대 밑에 쌓인 책을 정리했다. 7년 가까이 집어넣기만 하고 나오지는 않았으니, 빈틈 없이 꽉 차 버린 것이다. 버릴 책과 옮길 책을 분류하다 2017년 청계천박물관 기획전에서 가져 온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의 다시 보는 청계천도록을 찾은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의 삶을 취재하러 왔던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께서 찍은 청계천의 오래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노무라 모토유키 선교사가 찍은 청계천 등 두 분의 사진만 청계천의 중요한 사료로 남았다. 국내 사진가들은 집 구경 하듯 지나치며 찍은 사진들은 간혹 있으나, 청계천 빈민들의 삶에 아무도 관심두지 않았다.

 

두 분의 사진을 대할 때마다 부끄러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그분들이 대신했는데, 그 무렵의 우리나라 사진가들은 대부분 아름다운 살롱사진에 빠져 기록의 중요성을 방기한 것이다. 아름답고 예쁜 것은 다시 찍을 수 있지만, 역사의 순간은 다시 찍을 수 없는 것이다. 

 

한때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산 이전을 앞두고 열린 마지막 특별전 ’가까운 옛날의 자화상‘에도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의 청계천 사진이 걸린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 사진이 들어 온 지 숱한 세월이 흘렀으나 여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사진전이 열린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우리의 역사보다 더 소중한 작품은 없다는 말이다.

 

구와바라 시세이 / 조문호사진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은 1964년 일본의 화보 잡지인 太陽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고 한다. 선생이 한국 현실에 가장 광범위하고 깊숙하게 관여한 시점이 1965년이었는데, 한국을 찍은 사진 중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청계천 사진도 이 무렵에 집중적으로 촬영된 것이다.

 

사진의 본질은 기록이라는 신념을 평생 구현한 보도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은 일본의 중금속 공해 사건을 다룬 미나마타 병을 앓는 사람들을 찍어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나, 그에게 사진가로서 결실을 맺은 것은 한국에 대한 기록이라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청계천 사진 외에도 기지촌 주변의 양공주에서부터 우리가 방치한 한국 사회의 이면사를 깊숙이 기록했는데, 사십여 년에 걸쳐 십 만장이 넘는 방대한 사진을 남겼다.

 

이 사진들은 본 지는 오래되었지만, 빈민들의 리얼한 삶이 담긴 현장이라 보면 볼수록 가슴 뭉클해지는 소중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사진이 찍힌 65년이라면 진학을 앞두고 서울에서 방황하던 시절이 아니던가?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으나, 어느 날 청계천 밤길을 걷다 좁은 골목에서 혼이 난 기억이 생생하다. 갑자기 나타난 낯선 아낙에게 떠밀려 들어간 곳이 사창가였는데, 뺏긴 가방을 찾기 위해 시달린 순간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하수구의 악취가 진동하는 청계천의 첫 대면은 생각만 해도 아찔한데, 그 당시의 청계천 풍경을 이토록 생생하게 기록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청계천도 평범한 서민들이 사는 달동네에 다름 아니었다. 사진에 담긴 장면에는 아침에 일어나 이를 닦거나, 빨래를 너는 모습, 때로는 연탄재나 오물을 버리는 평범한 일상이 담겼다. 보면 볼수록 정겨운 장면인데, 마치 무대 세트장 같다.

 

당시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께서 투숙한 곳이 남대문로 그랜드호텔이었다고 한다. 남대문에서 광화문을 향하는 곳에 있던 그 호텔은 청계천까지 걸어서 약 600미터 정도의 거리다. 명동이나 수하동을 거쳐 청계 2가 방향으로 걸었다는데, 낮에는 사람이 없어 이른 아침에 집중적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지저분한 청계천도 아이들에게는 둘도 없는 놀이터 였는데, 사진에는 복개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지만, 주민들의 이주는 물론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반세기 전 청계천 변 사람들의 꾸밈없는 일상이 담긴 이 사진들은 한국전쟁으로 월남한 피난민들의 삶의 현장이자, 급변해 온 서울의 한 도시공간이다. 다시 한번 청계천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보석 같은 사진들이다.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다큐멘터리 사진에 있어서 그와 같은 비유는 무의미하다. 지나간 버린 하나의 사실과 현장은 두 번 다시 재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와바라 시세이-

 

/ 조문호

 

구와바라 시세이 / 조문호사진

 

사진가 이재갑은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역사의 현장을 기록해 온 정통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강제징용 ‘잔혹사’를 기록한 ‘일본 속 한국풍경’, 경산 코발트 광산사건의 진실을 기록한 ‘잃어버린 기억’, 베트남전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현장을 찾아다닌 ‘하나의 전쟁, 두개의 기억‘ 등 사회가 기억하지 못하는 골 깊은 역사를 파헤쳐 왔다.

 

이번에 선보인 '어느 특별한 동행'전은 이 땅에서 태어났지만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배타적 차별을 감내하며 살아 온 혼혈인들과 함께한 전시다. 그들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눈, 우리 이웃의 또 다른 초상이다.

주명덕 선생께서 기록한 혼혈아, ‘섞여진 이름’이 발표된 지가 1965년이었니, 어느듯 반세기가 지났다. 그 이후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무도 되돌아보지 않았던 삶을 이재갑씨가 조명한 것이다.

 

지난 10일 오후5시 무렵, 모처럼 전시장을 찾아 나섰다.

여태 전시 보는 것 자체를 피해 온 것은 전시리뷰나 이런 저런 글을 쓰기 싫어서다. 글로 인해 많은 사람이 등을 돌렸는데, '씹 대주고 뺨 맞는' 격이었다. 개인적인 감상문에 불과한 글을 느낀 대로 쓸 수 없다면 쓸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궁여지책으로 다른 분이 쓴 전시리뷰나 서문으로 소개를 대신 하기는 했으나, 평론가의 고충을 알만했다.

작품만 보고 전시리뷰는 쓰지 않을 수도 있고, 싫은 소리는 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속에 넣어두고 배겨나지 못하는 성질머리를 어쩌겠는가? 차라리 안 보는 것이 더 속 편했다. 그런 일로 많은 사람을 잃어버린 ‘미운 오리 새끼’신세가 되었는데, 심지어 가까웠던 친구나 가족까지 등 돌렸다. 잘 못 쓴 글이 아니라면 절대 내리거나 수정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재갑씨의 ‘동행’전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전시였다. 전시가 열리는 ‘KP갤러리’가 동자동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기도 하지만, 기대했던 전시라 통풍이 도져 아픈 다리를 끌고 찾아간 것이다. 예술지상주의의 허접한 사진들이 판치는 세상에, 이재갑씨 만한 사진이 드물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사진도 기록한다고 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아니다. 아무런 작가의식 없이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을 넝마주이 사진이라 한다. 작년에는 원로 사진가 두 분이 찍은 60년대 중반 무렵의 사회기록사진들이 서랍 속에 잠들다 반세기만에 빛을 본 적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분 다 학창시절에 찍은 사진이었고, 그 이후부터 상업사진이나 문화재사진으로 전향한 형태도 비슷했다.

 

그 당시는 임응식선생이 주창한 ‘생활주의 리얼리즘’에 영향을 받아 거리의 스냅사진이 성행할 무렵이었는데, 세월의 무게에 실려 작가의식과 상관없이 소중한 역사적 사료가 된 것이다. 요즘의 아마추어 사진인들처럼 아름다운 풍경만 쫓아다니는 것보다야 백배 낫지만, 작가라면 뚜렷한 주관을 갖고 찍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주명덕선생의 ‘혼혈아’나 최민식선생의 ‘인간’, 그리고 김기찬선생의 ‘골목안 풍경’처럼 사람 속으로 파고 든 작업과는 차원이 다른 기록이다.

 

또 한 가지 사진의 우열을 가릴 수 있는 문제는 한 분은 표준렌즈로 찍었고, 한 분은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이 많다는 점이다. 망원렌즈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나, 동작을 포착하는 스포츠사진에나 활용되는 렌즈라 다큐멘터리 사진에는 적절치 않은 렌즈다. 망원렌즈로 사람을 찍는다는 것은 사람 속으로 다가 가는 것이 아니라 몰래 찍는 도둑 사진이나 다름없다. 요즘은 초상권 침해에 걸려 마음대로 발표할 수가 없어 그런지, 거리스냅 하는 사진인도 사라져버렸다.

 

가끔 사진가들의 프로필 사진에 대포 같은 망원렌즈가 장착된 카메라를 자랑스럽게 목에 건 사진을 볼 수 있는데, '난 사진가가 아니라 사냥꾼’이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하기야! 요즘 렌즈들은 광각에서 망원까지 사용할 수 있는 줌렌즈가 장착되어 다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카메라로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재갑의 "어느 특별한 동행"이 열리는 전시장을 찾아 갔더니, 전시 작가 이재갑씨와 전시기획자 이일우씨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전시된 작품은 작가가 혼혈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사회에서 특별한 존재로 취급받는 이들의 평범한 시간을 포착하고 있었다. 전시장에 내걸린 초상사진과 단체기념사진들은 얼핏 보면 평범한 사진으로도 볼 수 있으나, 작가와 당사자와의 끈끈한 교감이 느껴졌다.

 

‘동행’이란 전시제목처럼, 그들의 소소한 일상 속에 지난 시간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눈 흔적이 역역했다. 전시장에 찍힌 당사자의 모습도 보였는데, 이재갑씨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사진에 앞서 얼마나 가깝게 지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사람을 찍는 다는 것은 그 사람과 얼마나 소통하며, 상대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릴 수 있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으니, 그냥 찍은 사진과는 격이 달랐다. 이것이 다큐멘터리 사진인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 특별하지만 특별하지 않게, 함께 걷기 -

 

‘한 배를 타다(be in the same boat)’라는 표현은 한국어와 영어에서 똑같은 의미를 지닌다. 같은 운명이나 처지에 놓이다. 모든 이의 운명이 완전히 똑같이 일치할 수는 없겠지만, 서로의 처지가 비슷할 때, 우리는 이 말을 사용하고 의지하며 위안을 얻는다. 사진가 이재갑은 혼혈인들의 일상 속에 시선을 멈추어, 한국 사회에서 ‘특별한 존재’로 취급받는 이들의 평범한 시간을 포착한다. 같이 모여 음식을 나누고, 생일을 축하하며, 함께 야유회를 떠난다. 사진 속에 담긴 일상은 한국인들이 한국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아주 약간의, 외모적인 차이가 언뜻 엿보일 뿐이다. ‘아주 약간의 차이’, 그들이 탄 배의 이름이다.

 

미군정기(美軍政期)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외국인과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혼혈인이 생기고 그 수가 늘어났지만, 한국사회는 이들의 존재를 이질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국가의 발전이라는 기치 아래, 국가주도로 단일민족(Monoethnicity)이라는 신화를 기조로 삼아 민족의 우수성을 공교육에서 강조하고,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통합하는 동안, 외모가 다르거나 혈통이 다른 이들은 ‘소수자’라는 이름으로 묶여 한국사회의 주류에 끼지 못하고 주변부를 맴돌아야 했다.

 

한국사회가 이들을 ‘타자(the other)’로 규정하는 동안, 혼혈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그들만의 방법으로 한국 사회에 녹아들었다. 그들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들과 교류하고 함께 시간을 나누면서 누군가와 함께 걸어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혼혈인들은 다른 혼혈인 가족과 기꺼이 시간을 나누고 가족끼리 교류하며 서로의 근황을 나눈다. 카메라는 이들의 일상과 행사에 드러난 얼굴을 기록한다. 타자로 규정된 얼굴들이 따로 또 같이 기념사진을 위해 활짝 미소를 지으며 모습을 드러낸다.

 

다채로운 인간 군상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동질감을 강조하고 이질적인 존재들을 타자로 규정하고 거리를 두는 것은 가장 편리한 방법일지 모른다. 나와 같은 존재만 수용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일에는 많은 생각의 품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는 같고, 어느 정도는 다르다. 제각기 다른 뿌리와 직업, 사고방식, 환경을 가지고 있는 혼혈인들은 자신들만이 가진 동질감으로 서로에게 기대어 느슨한 연대를 만듦과 동시에 이질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한국사회에 기꺼이 ‘동일자(the same)’로 자신들의 자리를 만든다. 사회가 정해놓은 테두리와 선을 스스로의 존재로 지우고, 사회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고자 한다.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전체성과 무한』을 통해 타자를 집에 맞아들이는 ‘환대(hospitality)’가 우리 삶의 근본적인 자세라고 말한다. 내 테두리 밖의 ‘타자’는 익숙하지 않기에 낯선 자이지만, 그들의 존재는 지워질 수 없고 내 옆에 있으며, 함께 살아간다는 측면에서 ‘이웃’이기 때문이다. 환대. 이웃을 반갑게 맞아들이는 것, 이런 측면에서 이미 혼혈인들은 각자의 존재를 기꺼이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거대하고 불친절한 이웃을 환대하고, 더 나아가 그들의 세계로 또 다른 타자를 초대한다. 낯선 카메라에 반가운 미소를 짓고 자신들의 일상을 거리낌 없이 공개하는 ‘벌거벗은 얼굴들’은 바로 우리 이웃의 초상이다.

 

이재갑의 사진전 “어느 특별한 동행”은 한국이라는 배타적인 사회를 살아가는 혼혈인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사진에 담긴 이들의 시선은 사진을 보는 이들에게 ‘함께 걸어갈 것(동행)’을 제안한다. ‘아주 약간의 차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탄 배에 동행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 모두는 조금씩은 같고, 조금씩은 모두 다르다.

 

글 / 레 나(LENA)

 

KP 갤러리가 2023년 새해 첫 전시로 선정한 “어느 특별한 동행(同行)” 이재갑 사진전은 3월 4일까지 열린다. 

 

전시작가 최치권 / 사진 정영신




지난 9일 사직로의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이광수교수의 ‘사진으로 인문학하기’강좌가 열렸다.
마지막 강좌로 ‘사진 읽기와 말하기의 여러 방식에 대한 강의였다.
서울에서 이광수교수의 사진인문학강의를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번번히 놓쳐버렸다.
하필이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찜통더위인데다, 노회찬의원 죽음과도 맞물려 마음도 편치 않은 시기였다.
다음 주 다음 주로 미루다 마지막 강의만 간신히 들을 수 있었는데, 그 것도 도강이었다.
사실 마음대로 갈 수 없었던 것은 수강료가 없는 개털이란 형편도 한몫했다.






그러나 뻔뻔하지만, 참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 세월 많은 사진 강의를 들어보았지만, 번번이 실망했기에 사진 강좌는 잘 가지 않았다.
대개 그렇고 그런 알만한 내용인데다 뜬구름 잡는 소리 들으면 졸음만 온다.
사진전공자들의 우물에 갇힌 몰상식만 재확인 할 뿐이다.
사실 다큐멘터리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사진인문학이란 말도 생소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온 사진사나 외국사진가들 자랑 질이 주를 이루는데,
사진가들의 고민과는 항상 비켜간다. 알아야 면장을 하지 않겠는가?






강의의 주 내용은 다큐멘터리사진의 두 가지 접근법이었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과 마가렛 버크 화이트의 사진을 비교해가며
주관성과 객관성에 대한 차이점과 접근 방법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교재는 이광수교수의 ‘사진인문학’과 ‘사진은 칼이다’였다.
얼마나 귀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 하는지 두 시간이 금방 지나버렸다.
강의가 끝나고 쫑파티에서 푸는 구라는 강의보다 더 재미있었다. 타고 난 약장사였다.






이 날 쫑파티에는 이광수교수를 비롯하여 최소영, 정장식, 최인기, 소광숙, 정영신,

송주원, 김태진, 오진향, 이강훈씨 등 십여 명과 함께 했다.
교주님 덕분에 이차에 걸쳐 즐겁게 마시며 잘 놀았다.
그 원수는 죽어서라도 갚으리다.

사진, 글 / 조문호

















 

 

-임응식 회고 사진집에서 스크랩-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될 무렵, 서울 명동에서 촬영한 위의 ‘구직’사진은

사진인은 물론 일반인들도 잘 아는 원로사진가 임응식선생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모자를 눌러쓰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벽에 기대선 사람은 구직(求職)이란 팻말을 목에 걸고 있다.

좌절한 표정이나 몸짓이 얼마나 처절하게 느껴지는가?

그러나 시대적 실업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이 사진은 연출에 의한 사진이었다.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95년 ‘삼성항공’ 카메라 사업부에서

‘삼성포토스페이스’ 개관 초대전으로 임응식선생 회고전을 열 때였다.

당시 삼성카메라 사업부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는데, 그 회고전엔 ‘구직’사진도 전시되었다.

전시기간 중 관람객을 상대로 한 작가와의 만남에서

그 사진은 연출에 의한 사진이라고 밝힌 것이다.

 

임응식선생께서 초창기에는 토속적인 소재나 회화적 사진을 추구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종군기자로 활동하며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나섰는데,

우리나라 리얼리즘의 대표적 사진가로서의 말씀으로는 너무 뜻밖이었다.

 

사진에서 묘한 연출냄새가 풍기기는 했으나, 전혀 생각 못했던 일이었다.

그 자리에는 사진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여럿 있지 않았던가.

더 황당무계한 것은 연출의 당위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냥 지나치다 찍은 것이 아니라 작가의 창의력에 의한 연출로

시대적 실직 난을 알리기 위한 캠페인적 의도였다고 한다.


물론 사회적 실상을 홍보하는 사진으로는 이해가 되나,

선생께서는 우리나라에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최초로 주창하고 실천해 오신 분이 아니던가?

문제는 처음부터 그 사진이 홍보사진으로 발표된 것이 아니라, 기록사진에 편승해 왔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임응식선생은 우리나라 사진 일세대로서 최초의 사진교육에 이바지해 오신 분이었다.

서울대를 비롯한 유명대학에 출강 하셨고, 최초로 사진과가 생긴 ‘서라벌예술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들을 양성하신 원로사진가 말씀으로는 도무지 이해 되지 않았다. 


난. 그 일에 더 이상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사진계 일각에서도 그 사실을 아는 분이 있겠지만, 다들 모르는 일처럼 쉬쉬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요즘 임응식 선생의 ‘구직’사진이 '서울옥션' 경매에 나와

사회적 관심이 모아짐에 따라 자칫 역사적 왜곡을 불러 올 수 있기에, 더 이상 밝히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사진은 기록 사진이 아니라 연출사진이라는 것을...

글 / 조문호


팽목항_2014년 7월 9일



사진가 김봉규의 ‘팽목항에서’사진집 출판기념전이 오는 30일까지 청운동 ‘류가헌’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가 시작된 지난 7월25일 오후6시경 '류가헌'을 가기위해 경복궁역에서 걸어 갔더니 너무 더웠다.

가는 도중 전람회를 다녀오던  엄상빈씨를 만났고, 전시장에는 사진가 김봉규씨를 비롯하여 이규상, 이상엽,

한금선, 곽명우, 이규철, 강제훈씨 등 여러 명이 모여 있었다. 반가운 분들 만나 이야기 나누며 곡차도 한 잔했다. 



▲김봉규 사진가.ⓒ조문호



첫 눈에 보인 사진은 작가가 평목항을 처음 찾은 동거차도의 밤이었다.

사진집 표지에 소개되었듯이, 조명탄에 비친 가라앉는 세월호의 선수가 마지막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어둠의 농도로 하늘과 바다를 구분하며 어렴풋이 먼 섬의 능선들이 드러났지만, 긴박한 비극의 현장은 적막에 휩싸였다.

사람이나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조명탄만 흘러내렸다.

그 사진 한 장이 운명의 첫날밤에 맞닥트린 김봉규의 처절한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수많은 기자들과 사진가들이 팽목항을 촬영했겠지만, 김봉규씨는 친자식을 떠나보낸 듯한 비통한 마음으로 아파하며 찍었다.

사진가로서의 소명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 마음이 더 아팠던 것이다.

다큐멘터리사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대상 속에서 이루어내는 공감인데, 김봉규의 평목항 전시가 빛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공감이었다. 스스로 아파야 아픔이 사진에 드러나고, 보는 이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김봉규시의 '팽목항에서'사진집 표지 (가격 : 12,000원)



김봉규의 사진을 덕목과 공감으로 평한 사진가 김문호씨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다큐사진의 무게, 혹은 삶의 무게, 사진가가 찍는 대상인 당신이 곧 내가 되고 당신과 내가 우리가 되고,

그 "우리"를 "인간"이라는 단어로 환치할 수 있을 때, 가장 진정성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큐멘터리 사진의 무게를 이루는 것, 그것은 대상과 사진가와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공감"(compassion)의 무게일 것이다.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덕목 "공감", 다큐멘터리 사진에 진정성의 무게를 만들어주는 덕목, "공감".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사람 같지 않은 사람, 사람 되기는 그른 사람"이라 하고,

그것이 결여되어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진정성이 없는 사진"이라고 말한다.

김봉규의 팽목항 사진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 그것은 단순히 슬퍼하는 유족들에 대한 동정을 넘어서

바로 우리가 적어도 지금 살아 숨쉬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체감해야 할 "공감"일 것이다.

사진이 이렇게도 이렇게 막막할 수 있다니...”




  ▲팽목항_2014년 11월 18일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사진기자 김봉규씨가 유가족의 울부짖는 모습이나 시신이 인양되는 비참한 모습이 담긴 직설적인 표현을 비켜간 의도가 무엇이겠는가?

가족처럼 차마 보여 주기 싫었던 것이다. 그 것만 보아도 사진가가 얼마나 아파하며 그들과 동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사진들은 ‘객관적 앵글’로 찍힌 신문용 사진이 아니라, 한 인간의 감정에 충실한 ‘주관적 앵글’의 사진이다.

오히려 직설적인 화법보다 간접적인 화법이 더 강하고 여운이 오래간다는 것도 증명한다.


넋을 잃은 듯 절망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먹구름이 뒤덮은 칠흑 같은 바다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뒷모습들이 마치 지옥의 묵시록처럼 무겁게 닥아 왔다. 가끔 어두운 바다를 배경으로 부표나 십자가, 노란 리본들이 부각되기도 했으나,

대개가 침울한 슬픈 풍경이다. 마치 유령이 나올 듯이 음산하기까지 하여 불쌍한 원혼들이 바닷가를 멤도는 착시현상마저 생겼다.

그리고 사진 곳곳에 작가의 분노가 똬리 틀고 있었다.



▲팽목항_2014년 6월 2일



“여기에 실린 김봉규의 사진들은 대체로 비극의 슬픔과 분노를 적막 속에 감추고 있다.

감춘다기보다는 감춤으로서 표출되고 억누름으로서 드러난다. 이 억누름은 힘을 가해서 얻어지는 물리적 억누름이 아니라,

드러나지 못해서 아우성치면서 심층에 잠겨있는 것들의 드러남을 허용하는 여백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한다.

이 억누름과 드러남은 고통스런 분열의 과정인데 그 과정을 통해서 인칭의 국면은 힘겹게 전환되면서 인칭들 사이에

새로운 의미가 빚어지고, 대상은 보이기 시작한다“고 소설가 김훈은 해설했다.



▲팽목항_2014년 4월 27일



이 작업을 이루어 낸 김봉규씨의 사진가로서 집념과 열정에 대해 부언하려 한다.
그를 처음 만난 건, 20여 년전 ‘사진집단 사실’에 함께 하면서다. 그는 사진이라면 물 불 가리지 않았고,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당시는 다큐 사진가로서 살아남으려면 최선의 직업이 사진기자였다.

밥벌이를 겸해 작업을 할 수 있는 길이 사진기자인데, 그가 평소 관심 가져 온 ‘시사저널’ 사무실을 찾아 간 것이다.

사진기자 모집이 있은 것도 아닌데, ‘시사저널’ 주필 방에 들어가 통사정한 것이다. 끈질기게 포부를 밝혀 관철시켰다.

그는 후회없이 최선을 다해 일했고, 그 뒤 ‘한겨레’신문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사진 찍는 일 외에는 한 눈 팔지 않았다.

대개가 취미사진가를 위한 강좌나 촬영지도 같은 부업을 갖지만,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로지 사진뿐이었다.


 


이 ‘팽목항’ 작업 역시 사진 작업에만 몰두하는 그의 열정과 끈기가 이루어낸 성과다.
우리가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세월호의 현장을 통한의 시어처럼 기록해 남긴 것이다.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나고 가슴이 미어지는 장면 장면들이다.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이데올로기조차 뛰어넘는 게 사람의 생명이요 인간의 존엄성 아니겠는가?

이제부터 하나하나 밝혀내어,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어린 영혼들의 원한을 풀어주자.

이 김봉규의 팽목항 전시와 사진집 출판을 계기로 빠른 시일 안에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세월호 앞에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아래사진은 전시 열림식에 다녀 간 분들의 모습이다]

























조문호/사진가

사람들이 사진을 너무 우습게 생각한다.

아무리 이미지 홍수시대에 살고 있으나, 오래된 사진이나 기록적가치가 높은 사진은 차원이 다르다. 예술 보다 더 소중한 기록의 역사성을 하잖게 여기니, 어찌 역사가 바로 설 수 있겠는가? 수 많은 무명사진가들의 소중한 사진자료들이 쓰레기더미에 썰려나가도 사진계의 어느 누구하나 나서는 이가 없고, 정부도 사회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사진가들이 평생 찍어 온 필름들이 집안의 애물단지처럼 굴러다니다 본인이 세상을 떠나면 그냥 소멸되고 만다. 이런 지경이니 사진가들이 잘 팔리지도 않는 사진집이지만, 살아생전 책 한 권이라도 남기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부기록보존소’에는 왜 역사적인 사진자료를 발굴하여 소장하는 부서가 없을까? 고작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알려진 작가 위주로 소장전을 갖기도 했으나, 사진가들의 이전투구로 그마저 뜸하다.

어느 분야의 예술이건 작가들의 삶이란 빈궁하기 짝이 없다. 예술계 전반에 대한 빈곤의 문제지만, 그중에서도 가난한 작가는 사진가이고, 사진 중에서도 기록에 전념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다. 탁상에서 할 수 있는 문학 같은 일과 현장을 누비고 다녀야 하는 다큐사진과는 경제적 비용 발생에서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아무런 보상이나 보장도 없지만 오로지 사명감하나로 버텨내고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사진을 전공해도 사회에 나오면 다들 몇 년을 견디지 못한다. 사회는 다른 직업을 갖고 틈틈이 찍는 아마추어 사진가를 원하고 있다. 

사진가들이 다들 살기 어려우니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나고 있다. 최근 폐북에 글을 올려 말썽을 일으킨 두 사진가 모두 가난에서 비롯되었다는 공통점은 일말의 동정의 여지가 있으나, 그 행위 자체는 용납할 수 없다. 거론된 해당 출판사나 갤러리 측은 많은 사진 중에 선택해야했으니, 밀려난 사람의 입장에서는 갑 질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 건 아니다. 어려운 사진계를 위해 애쓰는 분들에게 큰 상처를 입히며 의욕을 꺾어버렸다. 아마추어가 프로를 심의한다는 모욕적인 말을 퍼트리기도 하고,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며 협박하고 나선 것이다. 두 분 다 정중히 사과해야 한다. 그 피해를 입은 당사자만이 아니라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많은 사진가들을 부끄럽게 했기 때문이다. 그 불미스러운 사건은 개인적 욕심과 자기도취에 빠진 사진가들의 전형적인 자화상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록 다큐멘터리사진가들만이 아니라 사진계 전반에 문제가 많다. 아마추어 사진가들 모임인 ‘한국사진작가협회’라는 거대한 조직은 포기한지가 수십 년 넘었지만, 그 대안으로 창립한 ‘민족사진가회’마저 개인의 사유화로 방치되고 있으니, 참담한 심정이 아닐 수 없다. 구심점이 없으니 단합 할 수 없고, 단합할 수 없으니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것이다. 여지 것 그 많은 사회적 정치적 문제점에 저항하며 기자회견장 한 번 마련 한 적 없고, 타 단체와 연대해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사진에 대한 문제점을 시정하고 바로잡기 위해 힘을 모아 나선 적도 없었다. 선배나 후배나 모든 사진가들이 자기밖에 모른다. 어느 예술매체보다 사회현실과 가까워야 할 다큐멘터리사진가들 조차 나서지 않으니,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사진에 대한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으려면 정치인들과 교류도 있어야 되지만, 정치적인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예술행위에 정치가 개입되는 자체는 말이 되지 않지만, 사진계 발전이나 후진을 위해서 누군가는 나서야 한다. 사진인 스스로 권익을 찾지 않으니 누가 권익을 찾아주겠는가? 그러니 정치인마저 사진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얼마 전 한 대선후보의 문화포럼에 모든 예술분야 인사들이 골고루 참석했으나, 유독 사진가만 한 사람도 없었다. 이건 한 사례일 뿐이지만 도처에 사진이 개 취급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 또한 자업자득일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사진인들은 물론 모두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쪽 팔려 못 살겠다.

[스크랩 / 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 사진가



사진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다큐멘터리가 사진의 꽃이다.

그러나 사회여건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씨를 말리고 있다.

최근 들어 충무로 ‘브레송갤러리’에서 연 이어 볼만한 다큐멘터리 사진전들이 열리고 있다.

권철의 ‘독대’나 양승우의 ‘청춘길일’ 등 둘 다 일본에서 활동하거나 몇 년 전 일본에서 귀국한 사진가들이다.

특히 조폭들의 삶을 다룬 양승우의 ‘청춘길일’은 우리 사회에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작가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권철은 제주에서 풀빵장사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고, 양승우는 길거리에서 노숙하며 ‘조직폭력’의 세상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뒤늦게 사진학과 후배였던 아내를 맞으며 노숙자 신세는 면했다지만 살림살이는 여전히 말이 아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지만 한국에선 일용직 자리마저 쉽지 않아 일본에 눌러 있다고 했다.

건축현장 노가다로 일하며 사진작업을 잇는 그의 생활은 눈물겹다.

이번 전시 뒤풀이에서 눈물을 훔친, 그 아내의 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그들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다큐사진가 대부분이 비참하게 살아간다.

다큐멘터리사진을 전공했지만, 사회에 나오면 다들 몇 년을 버텨내지 못한다.

사회는 다른 직업을 갖고 틈틈이 찍는 아마추어 사진가를 원하고 있다.

사실을 매개로 하는 다큐작업을 그렇게 띄엄띄엄 찍어 어떻게 제대로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로라하는 대부분의 다큐사진가들은 대학교 문전이나 기웃거리며, 보따리 장사로 연명한다.

그런 기회마저 얻지 못한 사진가들은 행여 사진으로 돈 생길 일이라도 생기면 서로 차지하려 아귀다툼이다.

반평생 다큐멘터리 사진을 해 온 나도 예외는 아니다. 숱한 빚을 안고 살지만, 그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가끔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지, 회의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런데, 몇 개월 전 반가운 소식이 들어왔다.

내년이 ‘87민주항행’ 30주년이라 역사박물관에서 내 사진을 사겠다는 것이다.

듣기로는 민주항쟁을 기록한 세 명의 사진을 구입한다고 했다.

그 쪽에서 원하는 오십여 장의 이미지를 보내고는 꿈에 부풀었다.

쓰러져 가는 정선집도 수리하고, 잘 하면 신용불량자 신세도 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에서다.

그런데 뒤늦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전해졌다.

마지막 결재라인에서 ‘87민주항쟁’ 자체가 보류됐다는 것이다.

이유가 뭔지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행여 권력의 눈치를 살피는 정치적 이유는 아닌지...


사실, 이것이 정부에서 기록 사진가들에게 해 주는 유일한 혜택이기도 하지만,

역사박물관에 소장 되는 것이 다큐멘터리사진가들로서는 한 가닥 희망이고 보람이었다,

그 구멍이 바늘구멍보다 작아 복권에 당첨되는 확률에 다를 바 없지만...

이것이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의 현실이다.

비록 다큐멘터리사진만 그런 게 아니라 예술인 전반에 대한 빈곤의 문제지만,

작업실에 앉아 할 수 있는 문학 같은 일과 현장을 누비고 다녀야 하는 다큐사진과는

경제적 비용 발생에서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오랜 세월 지속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역사박물관의 사진 소장 율을 대폭 확대하고,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한 창작지원 시스템이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도록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일반인들도 다큐멘터리사진에 관심을 좀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여유가 있는 분은 사진 한 점이라도 소장해 주고, 사는 게 그렇고 그런 분들은 사진집이라도 한 권씩 구입해주자.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하는 다큐사진 시리즈는 한 권에 12,000원이라 별 부담도 없지만,

유익한 사진들이 실려 있어 구입 가치가 높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비록 그 진실이 고통을 안겨줄지라도....

그리고 밝혀진 진실은 바로 우리의 역사가 된다.

그래서 가려진 세상의 위장막을 걷어내는 다큐멘터리사진이 중요한 것이다.

다큐 사진가가 살아남아야 세상이 밝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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