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에는 가을걷이하러 내려갔다.

며칠 만에 아산 왔는데, 방명록에 수원의 김지식씨와 천명철씨가 다녀가셨다.

전시장을 비워 차도 한 잔 대접하지 못했으나,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추수래야 배추와 무, 당근, 들깨 등 몇 가지 되지 않고 양도 얼마 되지 않지만,

서리맞아 언덕에 웅크린 대마는 행복을 전해 줄 신의 선물이 아니던가?

 

손이 많이 가기로는 무 잎 삶아 말리는 일이었다.

일단 땔감도 할 겸, 들깨와 시든 꽃대부터 수거했다.

 

들깻잎은 올여름 내 입을 즐겁게 해주었고, 꽃은 눈을 즐겁게 해주지 않았던가?

사람이나 식물이나 수명을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 야속하지만 다 뽑았다.

 

코스모스는 말라 죽어 괜찮았으나, 시들어 고개 숙인 국화를 뽑으려니 마음이 영 켕겼다.

하는 김에 설치물 주변을 어지럽게 만드는 꽃대를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필요할 때만 써먹고 활용 가치가 없으면 가차 없이 버리는, 인간 자체가 악인 걸 어쩌겠는가?

그래도 서리 내릴 때 피는 국화만 남아 있었다.

 

꽃을 태우면서도 쓰레기로 버리지 않고 화장해준다며, 생색까지 낸다.

 

가마솥에 물 끓이느라 숱한 꽃을 태웠으나 그래도 남았다.

한 번은 더 사용할 수 있는 양인데, 꽃대 무덤처럼 가마솥을 지키게 했다.

 

삶아 낸 무청을 빨랫줄에 늘었는데, 빨랫줄과는 인연이 많다.

동자동 사진 나누어 줄 때도 빨랫줄에 걸었으니까...

 

들깨를 정리하고 나니 서서히 어둠이 몰려왔다.

 

무청을 삶아 거무튀튀한 물로 세수하기는 꺼림직했으나,

날씨가 쌀쌀해 따뜻한 물이 좋았다.

 

저녁 식사를 한 후 수확한 대마를 옷걸이에 걸어두고 마르기만 기다리는데,

김창복씨와 이현이 그리고 평이가 찾아왔다.

 

내일 농장에서 김장한다며 수확한 배추 가지러 온 것이다.

갖고 온 떡을 먹으며 모처럼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틈을 이용해 이현이는 인사동 사람들블로그 전체를 다운받기 위해 안달이다.

블로그에서 쫓겨난 지 일 년이 가까워서야 살려냈는데,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 고마움을 뭣으로 답해야 할지 고민이다.

 

하기야, 고맙기로는 어디 그뿐이랴!

인덕이 많다는 소리는 예전부터 들었는데, 그 많은 분에게 갚지도 않고 죽을 날만

기다리다니... 죽어도 편하게 죽기는 글렀다.

 

사진,글 / 조문호

 

 

겨울이 오면 쪽방촌은 추위보다 화재가 무섭다.

추위를 막는 대부분 물품이 불이 붙으면 쉽게 꺼지지 않는 소재인데다,

주방이 없어 방 안에서 부탄가스로 밥을 한다.

전선도 대부분 노후화되어 아슬아슬한데다, 끼고 사는 전기장판도 너무 오래되어 위험하다.

 

방과 방 사이 사람 한 명이 들어가기 어려울 만큼 다닥다닥 붙은

쪽방 구조 자체가 불에 취약한데다 불이 나도 소방차가 진입하기도 어렵다.

동자동 쪽방촌은 해마다 화재로 골머리를 앓는데, 사흘 전에도 불이나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으나, 재발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동자동 재개발을 계속 미루는 것도, 화재로 모두 사라지기만 기다리는 건가?

 

나 역시 정선 살 때 옆집에서 옮겨 붙은 불로 모든 걸 태웠지만, 아산으로 옮기고 나서도 불을 끼고 산다.

장작 타 들어 가는 불길이 좋아 하염없이 지켜보는 것이 낙이라면 낙인데,

활활 타오르다 한 줌의 재로 사는지는 것을 보면 마치 인생을 보는 듯 하다,

집에 손님만 오면 불을 피워 고기나 고구마를 구워 먹는데, 문제는 태울 나무가 넉넉지 않다는 데 있다.

 

지난 목요일도 서둘러 아산으로 내려가 필요한 생필품을 사려고 '하나로마트'부터 들렸는데,

완주의 김종신씨가 백암길 전시장에 와 있다는 연락을 했다.

부리나케 달려갔더니 부안의 김영숙씨와 같이 와 있었다.

 

땔감이 부족해 걱정했는데, 캠핑 카에 있던 참나무부터 꺼내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다행히 나무가 적게 들어가는 화덕을 사용해 한숨 돌렸다.

아담한 불길에 삼겹살과 고구마를 구워 술판을 벌였으나, 나는 안주만 축낼 팔자가 되고 말았다.

20여일 전부터 금주를 시작했으나 전시 중 딱 한 차례 유혹에 못 이겨 술을 마셨는데,

술이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음담패설을 즐기던 예전 버릇이 도졌다.

그 이후로 술을 마시면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다짐했으니, 그들의 건배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술 고문이나 다름 없으나, 기어이 떨쳐 낼것을 다짐하며 죄 없는 담배만 피워댔다.

유일하게 낄낄거리며 웃을 수 있던 술을 떠나보내는 마음이 애인을 잃은 듯 허전한데,

블루투스에서는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악장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반가운 벗들과 옛 이야기 나누는 정겨움에 위안받고,

타오르는 불길에 음악 날리는 행복감에 젖었다.

하늘에 걸린 초승달 또한 얼마나 매혹적인지, 예쁜 여인네 눈웃음을 닮았다.

김영숙씨는 김종신씨 술 덜 먹이기 위해 마시다 보니 주량이 늘었다며, 연이어 술 잔을 부딪혔다.

홀 애비와 과부가 서로 사랑하며 의지하지만, 자식들 눈치 보여 결혼 못한다니, 답답한 분들이다.

자식들이 평생 같이 살아줄 것 같은가?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는데, 집으로 돌아가던 마을버스가 멈추며 운전기사 김재돌씨가 내렸다.

유달리 사진을 좋아하는 분이라 반겼는데, 운전하는 애주가에게 술을 권할 수 없어 난감했다.

꼬불쳐 둔 대마불사주를 한 잔만 따라 주었는데, 단숨에 들이킨 후,

고기 던져 주기를 기다리며 바라보는 들고양이처럼 애절한 눈길을 보냈다.

건달로 살아오다 우연히 마을버스 기사 자리를 얻어 살아가는,

지난 이야기를 하염없이 풀어 대는 바람에 분위기를 깨버렸다.

 

술자리가 파한 후 김종신씨 내외는 캠핑 카에 자러 갔으나,

잠이 오지 않아 첫닭이 울 때까지 뒤척이다 늦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떠 보니 해가 중천에 걸렸고, 김종신씨도 그때 사 일어나 떠날 준비를 했다.

선우가 끓여 놓은 시락국으로 속 달래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요즘은 텃밭의 채소가 다 자라 나무하는 것이 일이다.

주변에서 주워 사용하던 나무가 바닥나, 당장 급한 일은 땔감을 구해야 했다.

 

현충사 둘레길로 이어진 산길로 차를 끌고 가 넘어진 소나무 가지를

조그만 톱으로 잘라 오기란 만만찮았다.

 

그렇지만, 모닥불에 둘러앉아 보내는 행복한 시간은,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차례나 오르내리며 정신 없이 실어 나른 후, 일을 끝 내려는데 톱이 보이지 않았다,

다닌 곳을 삼십 분 가량 찾아 헤매다, 포기하고 차로 돌아와 보니 짐칸 나무에 걸려 있지 않겠는가?

어이 없지만, 이런 치매 현상이 어제오늘 만의 일도 아니다.

 

실어 온 나무도 제법 많은 것 같았으나,

잘라 정리해보니 두세 차례 땔거리밖에 되지 않지만, 보리 슝년에 이기 어디고?

 

마당을 청소하며 돌아보니 오래전 김창복씨가 옮겨 심은 국화가 이제 사 봉우리를 맺기 시작했다.

 

서리 올 때 핀다는 말은 들었으나,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모든 꽃이 시드는 늦가을의 아쉬움을 이 국화가 달래 주었다.

마치, 너도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는 듯...

 

사진, 글 / 조문호

 


사람 사는 이야기사진 설치전이 지난 24일 막을 올렸다.

전시를 여러 차례 해 보았지만, 이번 처럼 힘든 전시는 처음이다.

 

경비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지원금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나,

몸이 송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죽더라도 전시는 열어놓고 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주눅들어,

어떻게 준비했는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전시장 찾은 손님 받는 게, 상가 문상객 받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대마불사주라도 마음껏 대접할 수 있고,

손님도 두 번 걸음 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여러 사람 고생만 시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불편한 이곳까지 오라는 말도 부담스럽지만, 오셔도 손님 맞을 일이 걱정되었다.

 

음식이야 김선우가 준비했지만, 술을 끊었으니 술 고문을 어떻게 당하느냐도 관건이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이곳에 오는 교통편과 숙박이었다.

 

승용차로 오면 술을 마실 수 없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엔 불편한 점이 너무 많았다,

일만 없다면 역까지 마중 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한가롭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일을 벌였으니 죽을 각오로 최선을 다하기는 했으나, 식구들이 고생 많이 했다.

전 날밤은 김창복, 김선우, 양이현, 김평 등 온 식구가 동원되었는데,

힘들게 길 낸 가마솥에다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안도의 한숨을 쉰 것이다.

 

전시 날자는 기다려주지 않고 어김없이 찾아왔는데,

문 열자마자 세종시에 산다는 오세인씨가 오셨다.

 

이광수씨 페북을 보고 알았다는, 첫 손님의 진지한 관람에 기분이 좋았다.

커피 한 잔 드렸더니, ‘두메산골사람들사진집도 한 권 사주었다.

 

이어 홍유선, 김현아씨가 다녀가고 나니, 소설가 임헌갑씨가 심영태씨와 같이 오셨는데,

지리산 막걸리를 두 박스나 가져오셨다.

 

때맞추어 온 완주의 사진가 김종신씨는 오다 보니 안내 현수막이 없더라며

현수막 두 개를 주문해 주었다.

 

임헌갑씨 일행은 온천장에 숙소를 잡았으나,

김종신씨는 캠핑 카에서 지내기로 하고 술자리를 만들었는데,

모처럼 옛이야기를 안주 삼아 늦은 시간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임헌갑씨는 지난번에 주지 못한 책이라며, 인도로 가는 동안이라는 연작 소설을 한 권 주었다.

 

초대일인 26일에는 마산의 변형주씨가 마산 중리 막걸리를 가져왔다.

유목민전활철씨가 준 '느린마을' 막걸리와 '송명섭' 막걸리 두 박스에다

우리가 준비한 소주와 맥주를 비롯한 대마불사주에 이르기까지 곳곳의 명주가 다 준비되었다.

 

'사람 사는 이야기' 전시가 아니라 사람 사는 주막 같은데, 아무래도 술은 남아돌 것 같았다.

 

이튿날은 화가 신상덕씨와 정복수씨, ‘사진바다곽명우씨,

사진비평가 이광수씨가 연이어 오셔서 전시장 분위기가 한결 무르익었다.

 

정복수씨는 나무화랑에서 진행한 프로젝트인 초상화를 전복하는 초상화 작품집을 선물했다.

역시 고생한 보람이 느껴지는 훌륭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이광수교수로 부터 받은 따끈따끈한 선물 '따마스' 사진집이었다.

 

무겁게 마음을 휘어잡는 사진에서 '악의 꽃'이 연상되었다.

스토리의 연관성보다, 인간은 악이지만 꽃처럼 아름답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기존의 전시형식에서 벗어난 좋은 사진전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늦게는 뮤아트김상현씨와 기타리스트 김병수씨가 나타났다.

인사 나누기가 무섭게 시작된 두 분의 협연은 가을밤의 정취를 무르익게 했다.

김상현씨의 아코디온 연주에 덧붙인 김병수의 기타 음율은 애간장을 녹였다.

 

그런데, 수술 후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다는 김상현씨가 처음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예전보다 음색이 훨씬 깊어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옛말이 딱 맞았다.

특히 하얀 목련은 듣는이의 심금을 울려 준 절창이라, 우리 식구만 듣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모닥불 앞에서 듣는 협연이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새벽닭이 울어 시간을 보니, 새벽 네시가 훌쩍 넘었더라.

편치 않은 몸으로 먼 길까지 달려와 준 것만도 고마운데, 너무 고생하셨다.

 

그들의 뜨거운 음악 사랑과 깊은 인정에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잠깐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떠나는 뒷모습에 마음이 아렸다.

 

그다음 일요일에는 일찍부터 유목민의 전활철씨가 술안주를 잔뜩 짊어지고 왔는데,

좀 있으니 사진가 고영준씨는 친구들을 데려 왔고,

우기곤씨 역시 사우 여러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뒤이어 전통무예가 하태웅씨가 지리산에서 오셨고,

시인 이은정, 전태수, 홍대춘, 서정란씨 등의 문인들과 사진가 마동욱, 김영숙 내외,

화가 칡뫼 김구, 함상규, 고선애, 최보현, 박효링, 권현석, 노인자, 송춘애,

박귀옥, 엄근배, 성혜선씨 등 많은 분이 다녀가셨다.

 

오는 1113일부터 26일까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황무지, 우상의 벌판개인전을 여는

화가 칡뫼 김구는 열차와 택시를 갈아타며 어렵사리 오셨는데, 가제본 된 책을 가져왔다.

 

손님이 한꺼번에 몰려 한 자리에 오래 머물 수도 없었지만,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아무래도 손님 접대가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떠나고 나니 죄송스러운 마음만 남았다.

 

오죽하면 전시 시작한 지 며칠 동안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기는 커녕 들여다볼 틈도 없었다.

 

그 뒤 이틀 동안 오신 분 사진 역시, 정리할 시간이 없어 주말까지 찍은 사진만 올리는 것이다.

끝나는 날까지 마무리하려면 두 번은 더 소개해야 할 것 같았다.

 

빚진 생각에 마음은 무겁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쩌겠는가?

시간이 맞지 않은 분을 위해 주말인 113일까지 연장하기로 했으니,

가을 가기 전에 나들이 한 번 해도 좋을 것 같다..

 

다들 성원해 주셔서 고맙고 고맙습니다.

아무쪼록 깊어가는 현충사의 가을을 오래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 조문호

 

 

전시 일자가 다가오나 준비작업에 진도가 나가지 않아 걱정했으나, 다행스럽게 잘 마무리했다.

 

지난 일요일 오전에는 기웅서씨가 앵글 작업을 마무리해주자,

오후에는 김창복씨와 양이현이는 물론 평이 까지 함께 도와 밤늦도록 일했다.

 

김창복씨는 감나무를 가리는 패널 제작 등 어려운 일을 맡아 주셨고,

이현이와 나는 현수막 사진 묶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

 

어두워 머리에 전등을 달고 일했는데, 마무리하고 나니 자정이 가까웠다.

 

다들 24시 해장국집에서 자정 무렵이 되어 저녁 식사를 한 것이다.

이런 강행군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는데,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다.

 

나야 내가 벌인 일이라 감수해야 겠지만,

김창복씨와 이현이는 무슨 죄가 있어 이렇게 고생시키는지 모르겠다.

 

식사를 끝낸 후 정동지와 나는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정동지도 아침 일찍 일이 있지만, 나역시 동자동에 볼일이 있었다.

늦게 먹은 저녁 탓에 졸음이 몰려오지만, 목숨 건 질주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이런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건만, 개 명세에 가깝다.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일 만드는 천성은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모진 놈 탓에 주변 사람들만 힘들게 한다.

 

다들 불평 없이 도와주어 고맙고 고맙다.

 

사진, 정영신 / 글, 조문호

 

다시는 스스로를 내세우는 보여주기식 전시나 인터뷰는 하지 않기로 다짐했건만,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여러 사람을 힘들게 만든다.

 

며칠 전에는 온 식구가 동원되어 전시 준비 작업에 나섰다.

선우만 가게 일 하느라 동참하지 못했지, 다들 솥을 걸거나 칠을 하는 등 정신없이 바빴다.

김창복씨는 목공 일을, 기웅서씨는 용접일을, 이현이는 조경 일로 다들 고생했다.

용접할 자제가 부족해 마무리는 못했지만, 대략의 가닥은 잡혔다.

 

거지 처지에 남의 돈 까먹는 이 힘든 일을 왜 하는지, 하면서도 고개를 흔들어 댔다.

발단은 김선우가 만들어 준 아산 백암길 사람사진관의 개관식을 겸한 전시도

한번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정선 집 화재 때 도움 주신 많은 분에게 드리는

보고 형식의 자리도 필요했다.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었는데,

마침 스마트협동조합에서 신청해 준 한국예술인복지재단 ‘2024 예술활동준비지원사업

선정되어 진행하였으나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지원금 삼백만원으로 준비하기도 부족하지만,

동자동에서 아산 백암길을 드나들며 준비한다는 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그보다 무슨 사진으로 무슨 말을 할지가 관건이었다.

전시 기획안부터 마련되어 추진하는 것이 순서겠으나.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그래서 삼십 년 전에 찍었으나 제대로 발표하지 못한 신체발언사진을 꺼내

사회적 문제로 꼽히는 미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로 했는데,

시골인 것도 걸리지만, 사진관을 만들어 준 선우의 입장도 고려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긴 세월 작업해 온 전체 사진에서 주요 사진만 추려내어 그때 말을 되새기는

말한다사진 설치전을 열기로 결정한 것이다.

단지 신체발언사진은 내 사진 한 점만 숲속에 내걸어 당사자 문제를 제기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 진안 계남정미소에서 열린 정영신의 진안 그 다정한 풍경

작가와의 대화에 따라갔는데, 그날 밤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오래된 사우 김종신씨를 만나 완주 자택에서 자기로 하고 술을 마셨는데,

술만 마시면 발동하는 성적 발언이나 장난 끼가 도진 것이다.

그것도 여러 사람 있는 자리에서 딸 같은 선우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그 당시는 심각한 상황도 인식하지 못한 채 며칠이 지났는데,

뒤늦게 선우로부터 장문의 이메일을 받아 보며 화들짝 놀란 것이다.

선우에게 사죄하고, 앞으로 술을 완전히 끊기로 하고 덮었으나, 그냥 넘길 문제는 아니었다.

 

난, 성 개방주의자로 성 문제를 경직시키는 현실에 늘 불만을 가진 사람이다.

술자리에서 좌중을 웃기려고 가끔 성 문제를 거론해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오래된 술버릇이라 잘 고쳐지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은, 평상시에는 샌님처럼 말도 잘 하지 않다가

술만 한 잔 들어가면 백팔십도로 바뀌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술 취해 돼지 목따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성을 안주 삼아 별 지랄을 다 한다.

다행히 돈도 권력도 명예도 없어 살아남았지,

아니었다면 벌써 미투에 걸려 매장되었을 것이다.

이번에 크게 깨달은, 뒤늦은 반성으로 평생 즐겨온 술마저 끊었지만,

미력하지만 그 문제를 개선하는데 힘을 보태고 싶다.

 

사회적 문제가 된 미투가 성 의식을 바로잡아 성차별을 없애는 데는 이바지했으나,

정치적이거나 개인적 목적에 의해 생사람 잡는 경우도 많았다.

더 큰 문제는 아름다운 성 문제를 경직시켜 남녀 간의 큰 벽을 만들었다.

사람답게 살자는 바람직한 운동이 남녀 간의 애정을 가로막는 역효과를 낸 것이다.

 

일단 이번 전시에 내 걸기로 한 사내 알몸 사진은 걸지 않기로 했지만,

언젠가 다시 보충 사진을 찍어 제대로 된 전시와 심포지움을 열어,

페미니즘 문제의 가해자로 낱낱이 고백하는 단두대에 서겠다는 것이다.

바라건대, 다시는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만들어,

경직된 남녀 문제에 봄바람을 일으키고 싶다.

 

건강이 그때까지 지탱해 줄지 모르겠으나 돌팔매는 나중에 맞기로 하고,

이번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로 전시를 치루게 되었다.

 

평생 작업해 온 사진에서 추려 내 자연 속에 설치하는 전시인데,

전시장에 갇힌 사진에서 야외로 끌어내는 전시다.

동자동 빨래 줄 사진전에서 인사동 담벼락 전시에 이은 야외 전 행보다.

 

청량리에서 몸 팔던 소녀의 이야기에서부터 독재에 저항한 시민이나

살기 어려운 산골 농민이나 장터 사람들의 하소연,

거리에 내몰린 노숙인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그 시절의 인간애를 소환하는 전시다.

 

내 아들을 살려내라는 김세진 어머니의 울부짖음도 있고,

돈 벌어 가족 먹여 살렸다오팔팔김정숙씨의 하소연,

춥고 배 고프다는 노숙인 이덕영씨의 절규도 있다.

허리가 아파 누워 장사한다는 증평장의 정숙현 할머니,

죽도록 고생해도 빚만 남았다는 최덕남씨, ”세상에 믿을 건 두 손 뿐이다

정선의 최종대씨 등 대부분 힘든 서민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리고 예술은 오기, 무기, 놀기다는 화가 박건씨의 사진이나

막사발로 세계를 제패하고 싶다는 도예가 김용문씨 등

인사동 사람들의 투지가 포함된 30여 점의 사람사진이 자연 속에 설치된다.

 

사람 사는 정이 메말라가는 이 에이아이유령 세상에,

힘든 이야기지만 사람 사는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지나치는 걸음에 들려 차 한잔 드시며 사람 사는 정이나 나누자.

 

가을이 무르익는 24일부터 31일까지 백암길 사람사진관에 술상 차린다.

 

사진, / 조문호

 

 

폭염이 기승을 부린 지난 주말의 봄에실농장에는 또 다른 시원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물놀이를 좋아하는 평이를 위해 정원 모퉁이에 물놀이장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온종일 물놀이에 빠진 평이의 모습에, 구경하는 나까지 시원함을 느꼈다.

 

사실, 고양이처럼 물을 겁내는 늙은이라, 여태 바닷가에 갈 기회가 생겨도 물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오래전 물놀이하다 죽을 뻔한 이후부터 생긴 물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지난 주말 역시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 낮에는 일손을 놓아야 했다.

집안에 들어가도 푹푹 찌는 더위라 오래 있을 수도 없었다.

 

얼마 전 인근 고속도로 발파작업으로 지붕의 기와가 흔들려 비가 새기 시작했는데,

공사장 측에서 임시방편으로 지붕 전체를 천막으로 감싼 이후 부터다.

 

김창복씨는 그 무더운 날 닭을 잡아 삶았고, 나는 이현이 따라 옥수수를 땄다.

 

옥수수를 삶아 다 같이 하모니카 합주로 토종 맛에 빠지기도 했고,

수박 화채로 더위를 식히는 여유로운 주말을 보낸 것이다.

 

잠시만 움직여도 땀이 팥죽같이 흘러내려, 그늘막에 앉아 담배나 피우며 평이 물놀이 구경을 했다.

 

물에 들어오라는 평이 재촉에 못 이겨, 잠깐 놀아주러 들어갔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하수를 뽑아 올린 찬물이라 지긋지긋한 더위를 한 방에 날려버렸다.

 

족욕이나 즐겨야 할 늙은이가 어린애처럼 물장구치는 꼴불견이었으나,

정신이 번쩍 드는 시원함에는 쪽팔려 죽어도 좋았다.

 

턱 위에 올라가 다이빙한다며 퐁당거리는 추태까지 보였으니, 나이를 잊어버린 것이다.

 

다들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 지 않던가? ㅎㅎ

 

사진: 정영신, 조문호/ : 조문호

 

토종이 맛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나, 식탁에서 사라진 지 꽤 오래되었다.

식량 증산을 위해 새 품종으로 개량했기 때문인데, 크고 매끈한 것만 찾는 소비자의 성향도 한 몫 했다.

'농업진흥청'에서 개량한 종자만 사용하다 보니, 토종이 설 자리를 잃어 씨를 말려 버렸다.

 

요즘 나온 과일이나 농산물을 먹다 보면 대개 맛이 없다.

다들 왜 옛날 맛이 나지 않을까?” 궁금해 하지만, 종자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아산의 김창복씨는 유기농으로 토종만 고집하는 농삿꾼이다.

토종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긴 세월 토종 씨앗을 구하러 수소문하고 다녔다.

현재 보유한 종자만 수십 종에 달한단다.

 

수집한 토종 씨앗으로 재배해, 그 농장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농산물은 토종이다.

그러나 수확량도 적지만 때깔이 작고 못생겨 상품화될 수가 없었다.

돈은 못 버는 대신, 식구들은 옛 맛의 진수를 본다.

 

지루한 장마로 지지난 주말엔 봄에실농장에 가지 못했다.

지난 주말에도 장마가 이어진다는 일기예보였으나, 일기예보가 빗나기를 바라며 갔다.

일주일만 가지 않으면 잡초가 농작물을 뒤덮기도 하지만, 자란 야채를 따기 위해서다.

 

아니나 다를까 비는 그치지 않고, 젖은 땅을 쉼 없이 적셨다.

지난 폭우에 언덕길이 무너지는 불상사는 있으나, 큰 피해는 없었단다.

지척에서 울어대는 맹꽁이 소리를 음악 삼아 멍 때리는 한가한 시간이었다.

 

선우는 옥수수를 삶아왔다. 하나같이 어린 애 손처럼 작고 앙증맞았으나, 맛은 달랐다.

마치 늙은이의 치아처럼 생겼는데, 옥수수 알은 빠지거나 엇갈린 것이 더 맛있었다.

그래, 어릴 때 맛본 이 맛이야! 입맛이 변한 게 아니라 종자가 달랐구나

맛있게 하모니카를 불고 있으니, 고양이도 먹고 싶어 창 너머로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김창복씨는 빗방울이 약해지니, 그사이를 못 참고 신발을 거둬 빗물에 씻어 왔다.

참 부지런한 분인데, 게으른 놈은 옆에 있기가 참 민망하다.

 

이현이는 정동지가 갖다 준 옷으로 패션쇼 하느라 바빴다.

이 옷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한 바퀴 돌고 가더니,

두 번째는 쌕시 모드라며 짧은 바지에 선그라스 까지 끼고 나와 한바탕 웃겼다.

 

비 덕분에 복에 없는 호강을 했다.

토종작물을 특화하여 파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왔다.

거지의 삼중생활은 고달프지만 즐겁다.

 

사진, / 조문호

 

 
양이현, 셀프 촬영

‘봄에실’은 아산시 인주면에 있는 농장 이름이다.

그곳에는 김창복, 김선우, 양이현, 김평 동지 외에 또 다른 대식구가 있다.

 

고양이 4대가 함께 살며 농장의 파수꾼 노릇을 톡톡히 한다.

갈 때마다 꼬리를 치켜세워 반가운 기색은 하지만,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는다.

항상 거리를 두며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편안한 가족관계를 유지한다.

 

함께 모인 것을 보지 못해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대략 20여 마리 되는 것 같았다.

들쥐나 뱀을 쫓아주는 고마운 일을 하지만, 그들이 먹어 치우는 사료 값이 만만찮다.

 

 4대가 한 가족을 이룬 농장에 유일하게 입양된 갈색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다들 야생으로 사는 것이 체질화되었으나, 그 냥이만 방에 살던 미련이 남아,

높은 곳에 올라가 창으로 방안을 내려다 보았다.

안쓰럽지만, 곧 자유로운 야생에 익숙해질 것이다.

 

고양이가 없었을 때는 들쥐가 닭장에 들어가 닭을 잡아가기도 하고

풀밭에 뱀이 도사리고 앉아 일하는 사람을 놀라게도 했으나,

고양이 방위사령부가 지킨 후로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빨라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인데, 주말마다 농장에가니 일주일이 총알같다.

 

문제는 몸이 마음같이 움직여 주지 않는데 있다.

 

더구나 장마철이라 그런지 몸은 쇳덩이처럼 무겁고, 마치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린다.

 

지난 주말에는 김창복씨가 몸보신시켜 준다며 닭을 두 마리나 잡았다.

더운 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엄나무와 푹 삶아 놓았더라.

 

그리고 얼마나 부지런한지, 그 넓은 농장의 잡초를 깨끗이 베어내고,

나무 가지치기까지 해 정원을 말끔하게 단장해 놓았다.

 

연못에는 물이 고여 곳곳에 개구리알이 둥지 틀었고,

심어놓은 야채는 싱싱하게 자라, 가지도 고추도 거시기보다 더 컸다.

 

정동지는 백반을 챙겨와 이현이에게 봉숭화 꽃잎으로 손톱에 물들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잠시도 쉴 틈 없는 김선생께는 발판 겸 책꽂이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냥 판자를 잘라 못질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라인더로 갈고,

선우는 콩기름까지 먹여 발 딛기 민망할 정도로 예쁘게 만들어 주었다.

 

다음날 오찬에는 선우가 연잎밥을 지었는데, 너무 예뻐 먹기 아까웠다.

오래전, 도예가 조상권씨 공방에서 먹어본 후, 두 번째 맛보는 연잎밥이었다.

입안에 번지는 향이 감칠맛이었다.

 

남정네 빰치는 작은 여장부 김선우는 일 솜씨뿐 아니라 음식솜씨도 대단했다.

거기다 양이현의 부지런함이나 인정스러움은 요즘 소녀가 아니다.

듬직한 평이의 재치 역시 부전자전이다.

 

대단한 분이 모여 사는 농장에 얼치기 두 명이 끼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도움은커녕 일거리만 만드는 편인데, 갈 때마다 신세만 진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데, 이 일을 어쩌지?

 

사진, 글 / 조문호

 

양이현, 셀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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