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팔아도 사람거치 팔라“는 말은 청량리588의 맏 언니 격인 정숙이가 동생들이 잘못하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그는 윤락녀뿐 아니라, 국회의원에서 부터 밥벌이 하는 모든 직업을 몸파는 일로 본다.

몸을 팔아도 사람거치(같이), 사는 것도 사람거치, 하나같이 사람이 먼저다.

입이 거칠어 욕쟁이지만, 가치관이 분명하고 생각이 앞선 걸 보면 일찍 철든 것 같았다.


사창가에서 일하다 보면 시간은 돈이나 마찬가지라, 다투는 일의 대부분이 시간 싸움이다

'롱 타임'을 끊은 손님도 한번 일보고 나면, 그 다음은 강원도 포수다.

밤새로록  다른 손님받다 새벽녘에 얼굴이라도 삐끔 내밀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 만큼 시간이 돈이다 보니, 다들 손님이 시간 끄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오죽하면 상대방 이름이라도 물어보면 촌놈이라고 꼬겠나?


"혜련아! 밖에 손님 기다리는데, 왜 나올 생각 안 하냐? 영복이 오빠 기다린다

나까이 아지매가 찾는 소리에, 기다렸다는 듯이 앙칼진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야이! 씨발 새끼, 술이 취해 연애는 안하고 좆지랄로 시간끄내. 용팔이 오빠 있으면, 좀 끌고 나가라 해요"

이야기가 그쯤 나가면, 취객은 쫄아버린다. 보지도 못한 용팔이한데 겁먹어...

그런 소리 들리면 정숙이가  의례 한 마디 거들고 나선다.


야! 이년아~ 팔아도 제발 사람거치 팔아라



그러나 김정숙은 다르다. 사람이 먼저다. 아무리 손님이 추근대도 다독여준다.

기다려 주고, 장난도 받아주며 사람 사는 정을 느끼게한다.

이런 저런 이야기 다 들어주고 신세타령까지 하는 여자다.


자기 몸이 섹스머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유독 정숙이만 단골이 많다.

아무리 풋사랑이지만, 연애는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보다 적게 벌지만, 다른 애들처럼 쓸데없는 사치하지 않으니,

시골 엄마한데 공장에서 받은 월급이라며 꼬박꼬박 송금도 했다.

모두 인간적으로 대하니 동생들도 따르고, 심지어 포주도 정숙이 말은 믿었다.


나 역시 정숙이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여기 살며 제일 힘든 것이 사람 취급 안 한다는 것이다

모두 더럽다고 손가락질하며 구더기처럼 본다는 거다.

그래서 하나의 직업인으로 보는 세상을 만들자는데 동의한 것이다.



90년초,'588'전시 개막식에 다들 오기로 했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한 가닥 희망마저 쪽 팔리게 된 것이다..

언론에서 하나같이 매춘에 무게 둔, 사람보다 가십거리로 나팔 분 것이다.

다들 마음 아파했다. 욕쟁이 정숙이의 걸죽한 욕설도 터져 나왔다.


"에이~씨발! 세상 좆 같다. ~ 기자들도 국개의원이나 똑 같은 씹새들이구나."



그 이후 정숙이는 그곳에서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랐다.

4년전, '588'사진집을 내며 30여년만에 정숙에게 공개 편지를 띄웠다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걸 보니, 무소식이 희소식일게다.

정숙이는 어딜 가도 잘 살 거다. 언제나 사람이 먼저였으니...


그 당시  쫓겨 다니던 단속견이나 국개의원들에게 욕해대던 생각도 난다.

"사람 차별하지마라 씨발 놈들아. 우리한테 언제 사람대접 해봤냐?

위안부 할머니만 피해자가 아니라 우리도 피해자다. 몸 팔아 부모형제 먹여 살린 것도 죄냐?"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치판은 수시로 말 바꾸는 쓰레기들이 우글거리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정숙이보다 못한 덜 떨어진 인간들아~ 부끄럽지도 않냐?"

 

지금 쯤 정숙이도 개판 된 연동형비례대표제에 열받아, 어디선가 욕을 퍼붓고 있을거다. 

야이~ 씨발년놈들아! 정치 좆거치 하지말고 사람거치 해라


사진, / 조문호


































 


 









정선 온지 나흘 만에 그 동안 지킨 맹세, 개 맹세가 되어버렸다.

정선에서는 아날로그로 산다며 컴퓨터까지 버렸으나, 인터넷에 접선하러 읍내에 나간 것이다.

끝물의 옥수수 맛있을 때 보내자는 구실을 댓지만, 우체국 인터넷을 사용할 생각이 앞섰다.

 

내가 운영해 온  인사동사람들블로그부터 접속했다.

매일 일기 쓰듯 자질구레한 이야기와 사진들을 올려 온 터라, 안달이 난 것이다.

블로그를 확인해 보았더니 사흘간의 접속 율이 엄청나게 불어나 있었다.


진원지는 폐북에 링크시켜 놓은 또 다른 종군위안부, 양공주에 대하여...”란 미군위안부 이야기였다.

그 이전에 올린 부역자 학살사진도 접속률은 높았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21일 하루동안 5,000여명이 접속하고 사흘 만에 85명 공유에 9,000명 넘게 본 것이다.

 

어떤 분은 일본군 위안부와는 격이 다르다는 댓글도 나왔다.

물론 강제로 끌고 간 일본군 위안부와 비교할 수 없으나, 전쟁이 낳은 비극이라 차례대로 나열했을 뿐이다.

어떤 분은 환향녀가 화냥년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는 고증도 주셨다.

아마 미군위안부 문제가 너무 가려져, 젊은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우체국 들리기 전에 정선터미널문화공간에서 전시하는 김정숙씨 그림전에도 들렸다.

정선의 아름다운 비경들이 다양한 형식을 빌어 화폭에 담겨있었다.

내가 사는 귤암리 작가라 애착을 가졌으나, 전시장엔 작가도 관객도 없어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전시문화에 대한 지역적 한계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정선문화원'과 작가들이 머리를 맞대 묘안을 찾아내야 할 것 같다.

일전에는 터미널 입구 도로변에 전시 내용을 알릴 수 있는 세로형 광고 앵글을 만들자는

제안도 했으나, 아직 감감소식이다모두들 적극적인 대처가 없어 아쉽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아 한가롭게 여가를 즐길 때는 아닌 것 같다.

이틀 동안 대목장도 보고 사진도 찍을 겸, 아내와 촬영 길에 나서기로 했다.

어느 시골장터에 가도 대목장은 사람들이 붐벼 활기차기 때문이다.

 

 

사진,글 / 조문호


아내가 달밤에 체조한다.


빨리 창수네 집에 가야는데, 아내는 메시지 보내느라 정신이 빠져 있다.


최종대, 이선녀 내외와 저녁상에 둘러 앉았으나 술병이 보이지 않는다. [정영신사진]


정선 사거리에서 상 파는 장돌뱅이다, 하루에 다섯개 팔면 많이 판다는데, 마진은 얼마나 될까?


정선, 귤암리 화가 김정숙씨가 '정선터미널문화공간'에서 초대전을 하고있다


전시되는 김정숙씨의 작품 중에서...


아래 사진은 제9회 동강할미꽃 축제에 초대된 김정명씨 사진이다.

우측에 인공조명을 비춘 자욱이 뚜렷하다.

 

몇일 전 동강변에서 동강할미꽃에 물을 뿌리는 아마추어 사진인을 발견해 나무란 적이 있었다.

 

물을 뿌리면 꽃도 시들지만, 야생화 사진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진다는 것을 누차 강조했으나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손이 안 닿는 높은 곳의 할미꽃들은 아름다운 보라 빛을 머금고 있지만, 낮은 곳의 할미꽃들은 대개 누렇게 변색되다 말라 죽는다.

일부 몰지각한 아마추어 사진인들이 이슬 맺힌 것처럼 보이기 위해 꽃에 물을 뿌리는데, 동강할미꽃은 해가 떠올라 날씨가 따뜻해져야 꽃이 피기 때문에, 핀 꽃은 이슬이 맺힐 수 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화면을 단순화하려 꽃을 감싼 마른풀을 뜯어내어 동강할미꽃을 더 힘들게 한다. 생태사진으로서의 야생화촬영은 꽃도 꽃이지만, 꽃의 습성이나 자연적인 주변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왜 모를까?

 

이처럼 사진이기를 포기하는 아마추어적 풍조가 아직까지 만연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사협에서 실시하는 사진공모전 때문이다. 문제는 대개의 공모전 심사위원에 생태사진 전문가가 포함되지 않는데다, 심지어 야생화를 전문으로 찍는 중견작가까지 잘못된 습관을 버리지 못하였거나, 아직까지도 생태사진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햇볕이 나와 꽃이 피었건만, 꽆잎에 물방울이 묻어 있다.

 

 

지난 27일에는 동강할미꽃 축제를 기록하기 위해 행사장에 들렸다. 마침 귤암리 지역화가 김정숙씨로 부터 김정명씨의 동강할미꽃 초대작이 너무 좋다는 말을 들었으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16X20인치 사이즈의 동강할미꽃사진 7-8점이 이젤 위에 걸려 있었는데, 동강할미꽃에 물을 뿌려 활짝 핀 꽃에 물방울이 맺혀있었고, 마른풀도 전혀 없었다. 돌 틈의 꽃은 마른 풀이 있는 것도 간혹 있지만, 사진처럼 다 말끔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어떤 사진은 꽃망울에 강한 인공조명을 비추기도 했다초보자가 출품한 공모전에서는 쉽게 보아왔던 사진이지만, 이 건 30여년을 야생화만 찍어 온 중견작가의 사진이다. 한 때 한국식물사진작가협회 회장도 역임한 사람이 아니던가?

 

김정명씨는 97년 동강할미꽃을 처음 찍어 꽃 달력을 만들었는데, 그 사진을 '한국식물연구원' 이영노박사가 2000년 동강할미꽃이란 이름을 붙여 세계유일종으로 발표하여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김정명씨의 위치라면 공모전에서 야생화사진들을 심사해야 할 사람이다그런 사람이 자신의 사진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버젓이 내 걸고 있으니, 결국 생태사진의 기본조차 모른다는 말이다.

 

야생화 전문가로서 작가의식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은그에게 지도받는 초보자들도 결국은 비슷한 사진을 계속 찍어 내게 된다는 말이다.

 

사진에서 프로와 아마츄어를 구분하는 기준은 직업이냐 취미냐로 구분하는 것만 아니다. 프로지만 작가의식에 문제가 있는, 이런 사진인을 영원한 아마추어라 부른다.

 

 

: 조문호 / 사진 : 김정명

 

'

 

1985.6 / 전농동588번지

“놀다 가세요~”

거짓 사랑을 구걸했지만 지나치는 이의 반응은 차가웠다.

“야- 니가 좋아서 잡는 줄 아니, 돈이 좋아 잡는다”

체념 섞인 그 녀의 절규가 듣는 이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전농동을 기록한 오래된 필름 파일을 뒤적이다 그 소녀를 다시 보았다.

그녀를 잊은 지도 어언 30여년의 세월이 되었나보다.

 

참 착하고 예쁜 소녀였다.

그토록 꿈 많은 소녀가 거기까지 가게 된 건, 가난한 부모 만난 죄 뿐이다.

그 때는 나라까지 가난했으니, 시대적 사회적 희생양에 다름 아니다.

 

그녀 이름은 김정숙이었다.

 

그 때 나이 한참 고운 이십대였으니 이제 오십대의 아낙이 되었을 게다.

가난이 지겨워 무작정 상경해 돈 벌려고 곳곳을 떠돌았지만,

결국 사창가까지 오게 되었다며 슬피 울던 정숙이의 눈망울이 아직도 선하다.

 

그러나 몸은 망가져도 살기는 그 곳이 더 편했다고 했다.

끼니 걱정하지 않고, 돈까지 엄마한테 보내 줄 수 있어 그냥 산다고 했다.

다 견딜 수 있으나, 변소 구더기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의 멸시를 견딜 수 가 없다고 했다.

 

몸 파는 창녀일지라도 하나의 직업인으로 보아주는 사회인식을 바꾸게 하자고 설득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인권을 되찾자는데 공감해 사진작업에 많은 힘을 보태기도 했다.

동등한 사람으로 봐 주는 깨어난 세상을 바라며 5년 동안 뛰었으나, 결국 실패했다.

 

90년 2월, 그 사진들을 모아 전시회를 가졌으나 주인공인 그녀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언론들은 일제히 들고 나와 사람대접 받게 해 달라는 그녀들의 목소리 보다

매춘이란 호기심에 무게를 둔 선정적인 나팔을 불어재꼈다.

 

그래서 그 전시 이후로 전농동 기록필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쳐 박아 두었다.

사진집출판 제의도 거절했다. 또 하나의 춘화 같은 이야기 거리로 변질될 것도 두려웠으나,

행여 잘 사는 그녀들의 삶이 발목 잡힐 수 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에 파묻혀 간, 그 시절 장면 장면들은 우리 사회사의 중요한 기록이고 역사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 본인들이야 알아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때가 된 듯 싶다.

아무튼 이 사진집 출간을 계기로 그 때 못한 그녀들의 목소리도 전하고 싶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한 번 만나고도 싶다.

 

​“정숙아! 혜련아!” 나의 연인이기도 동생이기도 했던, 그 때 그 사람들이 보고 싶다.

당신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첩을 보게 되면 연락 한 번 주렴.

내 비록 거지 처지일지라도 소주 한 잔 살께...

디 행복하게 잘 살기 바란다.




2014. 12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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