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다큐멘터리사진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갤러리 브레송’의 기획전,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서준영론이 지난 22일 오후6시 개막되었다.

양승우, 강재구, 김동진, 김은주씨에 이어 다섯 번째로 열리는 서준영 론은 ‘테마파크, ’오타쿠공화국‘,

’중간정산‘, ’캣워크‘, ’너에게 이름을 주고 싶지 않아’ 등 그동안의 작업을 주제별로 보여준다.

 

 '브레송' 송년회를 겸하는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서준영 전시개막식에는

이번 기획전에 글을 쓰는 이광수교수를 비롯한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모였다.

요즘 전시 개막식엔 잘 가지 않지만, 더구나 그 날이 ‘홈리스추모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러나 멀리서 우리 교주님이 오시는데,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나에 관한 사진논문을 쓰고 있다는데...

 

여태 이광수교수를 교주라 부르는 것은 그로부터 많은 진리를 깨우치기도 하지만,

최민식사진상의 문제점을 제기했을 때 부터다.

썩어 문드러진 사진판에 누가 감히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었겠나?

입바른 소리로 사진판에 외톨이가 된다는 걸 본인인들 어찌 모르겠나.

자기 밖에 모르는 사진판에 이런 분이라도 있어 숨통이라도 트이는 것이다.

 

서울역광장에서 열리는 ‘홈리스추모제’는  홈리스행동, 동자동사랑방, 빈곤사회연대,

37개 단체가 함께한 ‘2022 홈리스추모제 공동기획단’에서 주최하고 있다.

 

올 해 '홈리스 추모제'는 주거제공 우선 홈리스 정책 실행, 홈리스 차별 금지, 권리기반 정책 시행,

홈리스의 평등한 의료접근권 보장, 여성홈리스 존재 인정, 젠더 관점 기반 정책 시행,

무연고 홈리스 사망자의 애도받을 권리, 애도할 권리 보장 등

다섯 가지 요구를 중심으로 각종 토론회와 집회를 개최하며,

지난 12일부터 추모제가 열린 22일까지 11일간의 추모 주간을 보냈다.

 

2022년 한 해 동안 서울의 거리에서 숨진 사람은 442명으로 파악되었으나,

그것도 정부의 공식 통계가 없어 추모제를 진행하는 단체에서 자체 집계한 것이다.

전국 무연고 사망자는 3600여 명으로 3년 전보다 1.4배 증가했고

10년 전인 2012년보다 3.5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전시 개막식과 홈리스 추모제가 한 시간 사이로 열려 개막식부터 들렸는데,

마침 이광수교수의 강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입구에는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가 지켜 섰고,

안쪽에는 사진가 김문호, 성남훈, 강제욱, 김동진, 김영호씨등 반가운 분이 여럿 보였다.

 

그런데, 이번 기획전을 추진한 김남진관장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코로나에 감염되어, 주인 없는 집에 나그네들만 잔치를 벌이는 격이었다.

 그렇찮아도 건강에 이상이 생겨 병원을 들락거리는데, 빨리 완쾌하길 바란다.

 

귀가 어두워 이광수교수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작가에게 지적한 한마디는 귀에 들어왔다.

‘어깨에 힘을 빼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사진의 힘을 빼라는 말이었다. 학자다웠다.

전시 개막식에 대부분 듣기 좋은 공치사나 하는 판에,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겠나. 

 

개막식이 끝나 이교수와 인사를 나누고 나니, 정영신 동지가 나타났다.

뒷일은 정동지에게 맡겨두고 서울역으로 달려갔는데, 기다렸다는듯이 추모제가 시작되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숨이 턱턱 막혔다.

여태 추모제에 여러번 참여해 보았으나, 이렇게 추운 날은 처음이었다.

고생하는 활동가나 참여한 젊은이들의 모습에 존경심이 일었다.

거리에서 죽은 442명의 영혼을 달래는 무용가 서정숙씨의 위령무에 마음 실어보냈다.

 

빨리 오라는 정동지의 전화를 받고서야 충무로로 갔더니, 이미 뒤풀이는 파장이었다.

모지웅, 이일우, 박찬호, 임성호씨 등 전시장에서 미처 보지 못한 분도 여럿 있었다.

 

그 자리에서 ‘눈빛’ 이규상대표가 인사동 '인덱스'를 인수한다는 반가운 이야기도 들었다,

사진집 한 권 만들면 사백만원씩 손해보는 무지한 출판 현실에서 살아 남으려면,

사진작품 유통업으로 확대시켜서라도 출구를 찾아야 했을 것이다.

 

오후10시로 예약해 두었다는 부산행 열차 시간이 가까웠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광수교수더러 한 잔 더하고 주무시고 가라며,

박찬호씨를 비롯한 후배들이 가로 막았다.

 

차마 거절하지 못해 이광수교수는 다시 자리에 앉아버렸다.

가라할 수도 없고 있으라할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라, 슬며시 합바지 방귀 새듯 새버렸다.

늙은이는 사라지는 것이 도와주는 일이다.

 

그 순간을 뿌리치지 못해, 낮선 여관에서 자게되었다며 걱정했으나,

다음날 이광수씨 페이스 북을 보니, 늦게라도 간 모양이더라.

아무튼, 좋은 시간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전시는 12월 31일까지 열리오니, 많은 관람 바란다.

그리고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여섯 번째 사진가는 강제욱씨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갤러리 브레송’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두 번째 기획전

징병제에 의한 의무복무, 박제화, 사육과 무기력, 몰인간성

 

 

강재구 사진전이 지난 9월 19일부터 28일까지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가 강재구는 입영 전의 민간인에서부터 머리를 깎은 군인에 이르기까지, 징병제에 따른 군인 시리즈를 20여 년 동안 기록해 왔다. 이등병이라는 전형을 통해 우리가 추구하는 휴머니즘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한구의 ‘군용’ 사진이 군에 갓 입대해 체험적 병영생활을 어렵사리 기록한 사진이라면, 강재구 사진은 군인으로서의 문제점을 다 각도로 형상화해 왔다는 점이 다르다.

 

강재구 작업은 직업군인보다 의무적 복무를 수행하는 이등병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이등병은 막 입영했다는 이유만으로 기본적인 욕구조차 자신의 의지 대로 행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통제당하며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그때부터 사람이 아닌, 군바리 취급을 받는 안쓰러운 존재가 되어, 군대가 만들어 낸 틀 안에서 이등병이란 자아 상실을 경험하며 나약해 진다. 카메라 앞에선 긴장된 모습이 마치 박제화된 인간처럼, 모순된 상황을 재현한다

 

그가 징집병을 대상으로 삼은 것은 군인의 정체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군인으로 끌려가 삶을 저당 잡혀 살아야 하는 청년 문화를 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청년 문화 안에 서식하는 집단성과 몰 개체성이나 비인간적으로 사육되는 무기력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군 복무 시절과는 전혀 다른 제대 후의 예비역 모습도 보여준다. 예비군복은 입었지만, 머리카락이 자라 군모를 쓴 것조차 어색하고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빨간색 나이키 운동화를 신거나 팔찌나 목걸이로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며, 군기 빠진 또 다른 군인 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2009년에는 기존 시리즈와는 성격이 약간 다른 군대 사진관에서 찍은 증명사진 식의 ‘사병증명’도 있다. 필름을 아끼려고 두세 명을 나란히 세워놓고 촬영한 후 필요한 사진의 얼굴만 도려내 사용하면, 사진에는 얼굴은 없고 몸만 남는 것이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게 된 이름만 남은 증명사진 프레임은 군대라는 몰인간성을 은유하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2019년 작업한 ‘12mm’는 획일적 군대의 시작점이며, 비인간적인 군대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이등병은 입대 전 머리카락 길이를 12mm로 잘라야 하는데, 군 훈육이 남긴 일종의 정신적 충격을 기념사진 형식으로 드러낸 사회적 초상이다. 입대를 전후해 삭발한 인물을 릴레이로 촬영한 ‘12mm’는 ‘이등병’, ‘예비역’, ‘사병증명’ 등 지금까지의 군인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적 작업이다.

 

작가는 일반 기념사진과는 달리 모델에게 그 무엇을 요구하거나 통제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포즈를 연출하도록 한다. 다만 적절한 배경이나 인물의 수만 결정할 뿐이다. 배경은 훈련소 막사 앞일 수도 혹은 그 주변 시설일 수도 있다. 그리고 주인공은 담배를 피우던지 애인을 감싸 안을 수도 있어, ‘이등병’에 비해 훨씬 자유롭고 인간적이다.

 

이번에 새로이 보여 준 ‘입영전야’는 입영을 앞둔 청년들의 알몸사진을 찍었다.

지난 달 그 작품 사진을 블로그에 올렸다가, 이 페이지가 삭제되고 일주일 동안 운영정지된 바도 있다.

성기가 노출되지도 않은 청년의 알몸 사진을 유해물로 판단한 관리자의 의식전환이 시급한 실정이다.

제외된 '입영전야' 작품사진은 '아트뉴스'나 네이브 블로그 '인사동이야기'에서 강재구를 검색하면 볼 수 있다.

 

스튜디오에서 조명을 받으며 알몸으로 카메라를 마주하는 청년의 모습에는

그가 지나온 시간과 그가 속해있던 환경,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까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한 사진을 통해 군인으로서의 강인함이 아닌, 아직은 여리고 앳된 소년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아래 글은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의 강재구론, ‘전형’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에서 발췌했다.

강재구 다큐멘터리 재현의 가장 중요한 방편은 순간 동작이 아닌 연출로 만들어진 행위를 촬영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사진가가 미리 대상을 섭외하고, 기획하여 짠 각본에 따라 촬영한다. 그러니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동작과 사실의 관계에 대한 담론이 생긴다.

 

스튜디오 포트레이트의 동작은 포즈다. 포즈란, 피사체가 사진가의 카메라를 통해 대중에게 말하는 그만의 언어인데, 그 언어를 사진가가 통제하고 강제해버린다. 피사체는 사진 바깥의 세계에서 그가 처한 군인이라는 위치에서 똑같이 철저하게 강제당함으로써 행위자 피사체로서는 죽은 존재와 다름없이 전락해버린다. 강재구 사진의 탁월성이 여기에서 나온다.

 

사진가는 강제로 연출 당하면서 모든 언로를 차단당한 채 무기력하게 존재하는 그 박제된 이등병과 그 주변인들을 통해 몰개성과 획일성을 비판한다. 독을 제거하려면 깨끗한 물이 아닌 또 다른 독으로 해야 한다는 힌두교 밀교의 세계관이다.

 

글 / 조문호

 

 

'갤러리 브레송' 기획전1

 

우리 시대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사진의 시원이자 근원을 이루고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은 끊임없이 시대의 흐름을 담아내고 사회의 담론을 만들어 왔다. ‘Look Back in Anger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는 일찍이 영국 극작가 오즈번이 기성 사회의 위선과 물질문명 속에서 인간 부재와 상오 소통의 단절을 지적했듯이 시대의 목격자로서, 기록자로서 인간 중심이라는 기본적인 정신을 계승하면서 사회 부조리와 인간관계의 불합리와 모순에 분노할 줄 아는 작가에 주목하고자 한다.[전시 기획자/ 김남진]

 

 

굴뚝에 관한 보고서-산업유산 풍경

김인재展 / KIMINJAE / 金仁在 / photography 

 

2022_0712 ▶ 2022_0721

 

김인재_조선내화 벽돌공장_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일,공휴일_11:00am~06:00pm

 

 

갤러리 브레송

GALLERY BRESSON

서울 중구 퇴계로 163(충무로2가 52-6번지) 고려빌딩 B1

Tel. +82.(0)2.2269.2613

gallerybresson.com

 

김인재, 〈굴뚝에 관한 보고서〉 ● 사진을 찍는다는 일은 보는 일이고, 보는 일은 바라봄과 해석함이 연속되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를 사진가 김인재는 작가 노트를 통해 상상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이라 말한다. 그가 지난 2년간 바라보는 대상으로 삼은 건 '근대산업문화유산'이다. 그는 '굴뚝'으로 상징되는 근대의 유산을 바라보았고, 그것을 자신의 상상으로 해석하여, 어떤 현실을 창조하려 한다. 굴뚝으로 상징된 그 흘러간 시간의 오브제를 바라보는 일이란, 누구나 보는 어떤 분명한 객관성을 가지지 않는다. 관(官)이나 학문의 언어는 그것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일반화시키지만, 사진가는 그런 획일의 언어로 규정하려 하지 않는다. '산업유산(industrial heritage)'이라는 용어로 치환하여 사진으로 재현하는 것은 그 언어가 담는 품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관이나 학문의 언어가 담지 못하는 어떤 상상의 세계를 사진가가 끄집어내고 독자가 그것을 자신 개인만의 기억과 이야기로 창조하였으면 하는 것이다.

 

김인재_조선내화 벽돌공장_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1

어떤 장소와 거기에 있는 오브제가 산업유산이라고 규정하고 전하고자 하는 일은 기록 차원의 일이다. 그 기록을 영상(image)로 남기려면 아무래도 동영상이 더 효율적이다. 그러면 당신은 왜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가? 굳이 맥락이 소거되고, 상황이 은닉되고, 어떤 부분을 배제하면서 네모난 박스 안에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규격화하는 사진 행위를 한다면, 당신은 이미 기록을 넘어 해석의 세계로 들어가 있다고 본다. 이 대목에서 사진가 김인재는 매우 적극적인 해석의 지평 안으로 들어간다. 대상을 과학과 객관으로 범주화하여 그 안에서 어떤 분류와 분석이라는 과학의 일에 머무르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분류를 넘어 섞임의 세계를, 보이는 외형을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분석을 넘어 해석을 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굴뚝과 공장이 있지만, 그것들과 함께 낡고 손때 묻은 기계, 막힌 벽, 깨진 유리창 그리고 사용자와 노동자를 옭아맨 '태극기' 액자가 있다. 사람은 세월의 무게 바깥으로 다 사라져, 카메라로는 담아내지 못하였지만, 그가 담은 그 부재 안에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래서 김인재의 '굴뚝에 관한 보고서'는 기록을 넘어, 소재주의를 넘어, 기억으로 쓰는 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역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김인재_장항제련소_피그먼트 프린트_40×50cm_2020
김인재_장항제련소_피그먼트 프린트_40×50cm_2020

카메라라는 기계로 대상을 재현하는 일이 기록을 넘어, 해석으로 가는 것은 그 대상이라는 것 자체가 입체적이고 맥락적인데, 그것을 한 평면의 이미지로 고착화해 버리는 무모함을 거부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대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어떤 시공간에서 행위 하는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것이 품는 매우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들이 켜켜이 쌓이는 것인데, 그래서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막상 이미지로 드러나는 것은, '굴뚝'으로 대표한 지표뿐이다. 그래서 그 단순화한 지표는 그것을 둘러싸고 벌인 사람들의 여러 행위와 그 행위 속에서 드러나거나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사진가 김인재는 바로 이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그래서 그것을 상상 속으로 연결하고, 그것을 뭔가를 창조하는 일로 연결하고자 한다. 이는 사진가가 벗어날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의 세계다. 메타(meta)로서의 커뮤니케이션 말이다. 뭔가 분화되지 않는, 규정할 수 없고, 정돈할 수 없는 원초적 세계다.

 

김인재_전남일신방직_피그먼트 프린트_80×60cm_2021
김인재_전남일신방직_피그먼트 프린트_40×50cm_2021

대상이란 그 본질이 무엇이든지, 대상을 대하는 사람 앞에 나타날 때는 그 대상이 눔에 의해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 대상이 자신의 과거를 공유하는 시간의 축적물이면, 기억의 서사와 흘러가 버린 시간의 슬픔을 자아낼 것이고, 자신이 믿는 어떤 신격체의 상(像)이라면 존귀와 숭례(崇禮)의 현현(顯現)으로 다가서게 할 것이고, 그래서 초월의 소통을 이루게 할 것이며, 그 대상이 자신과 별다른 관계를 갖지 못하는 존재라면, 그저 그렇게 그냥 무의미하게 지나쳐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진가 김인재가 재현하는 저 '굴뚝'으로 표지되는 저 시공 속의 피사체는 무슨 의미로 나타내졌는가? 우선, 사진가에 의해 마치 어떤 행위자인 것처럼 위치하게 되고, 그것을 관찰하는 우리는 그 사진가에 의해 관중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렇다면, 카메라라는 기계로 우리 각자의 흘러간 기억을 어떤 형태로 박제하여 각 개인 앞에 내놓는 사진가는 기억의 슬픔을 끄집어내는 영매(靈媒)가 된다. 사진가는 무의미하듯 가만히 존재하는 피사체에게 어떤 의미의 옷을 입혀 그 상(像)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새로운 차원의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가 되는 것이다.

 

김인재_오산 계성제지_피그먼트 프린트_40×50cm_2021
김인재_오산 계성제지_피그먼트 프린트_40×50cm_2021

당신은 사진가 김인재가 재현하여 제시하는 저 '굴뚝'들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무엇을 보는가? 이제 당신이 사진가의 '보고서'에 화답할 일이다. 당신의 화답은 그의 사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당신이 찾는 시간과 우주에 관한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사진가와 독자가 소통하는 일이다. 좋은 사진을 만드는 것은 사진가에게만 달린 게 아니고, 독자에게도 달리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사진의 세계다. ■ 이광수

 

Vol.20220712d | 김인재展 / KIMINJAE / 金仁在 / photography

푸른 잎사귀 Bright Leaf 明葉

 

한문순展 / HANMOONSOON / 韓文順 / photography 

2022_0217 ▶ 2022_0226

 

한문순_Go round_피그먼트 프린트_100×150cm_2016/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공휴일_11:00am~06:00pm

 

 

갤러리 브레송

GALLERY BRESSON

서울 중구 퇴계로 163(충무로2가 52-6번지) 고려빌딩 B1

Tel. +82.(0)2.2269.2613

gallerybresson.com

 

 

체르노빌(Чернобыль)은 '검은 잎사귀'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현재 우리는 이 단어를 '검은 잎사귀'라는 뜻을 가진 외국어로 생각하지 않고, 핵재앙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한다. 1986년에 발생한 체르노빌 지역의 핵발전소 폭발사고의 여파 때문이다.

 

 

한문순_Hallway_피그먼트 프린트_100×150cm_2016/2022

2차 세계대전 이후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Atoms for Peace) 덕분에 원자력 발전은 전기 에너지를 값싸게 무한정 공급해 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우라늄 1kg이 석유 200만 리터 또는 석탄 3000톤의 에너지와 필적하는 원자력은 인류가 역사상 지금까지 보유한 에너지원 중에서 최고의 출력을 갖고 있어, 고질적 인류 문제의 하나인 에너지 부족 현상을 완전히 해결해줄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1986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 키예프 북쪽에 위치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제4호기 원자로가 폭발하면서, 인류는 최초로 국제원자력사고등급(INES) 최고 등급인 7단계 방사능 누출을 경험하게 됐다.

 

한문순_Window_피그먼트 프린트_91×61cm_2016/2022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건으로 인해 현재의 인간 기술력은 아직 원자력을 완벽히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질 못했음이 민낯으로 드러났고, 인류는 스스로 과학에 대한 맹목적 맹신에 빠졌음을 깨닫고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인간은 방사능으로 오염된 체르노빌 지역을 도망치듯 쫓겨나왔고 발전소 일대 지역은 방사능 오염 구역으로 봉인되었다.

 

한문순_Classroom_피그먼트 프린트_61×91cm_2016/2022
한문순_Court_피그먼트 프린트_61×91cm_2016/2022

세슘 방사능 반감기인 30년이 지나고 사고 현장을 방문했을 때, 체르노빌 지역은 여전히 자기 이름만큼이나 검고 우울한 모습을 갖고 있을 것이라 예상하였다. 그러나, 나의 예상과는 달리 인간이 만든 각종 구조물만이 검고 우울한 모습을 띠고 있을 뿐, 체르노빌 지역은 이미 자생하는 식물에 의해 복원과 치유가 진행 중에 있었다. 더 이상 검은 잎사귀로 뒤덮인 지역이 아닌 오히려 밝고 선명한 생명의 색깔을 띠고 있었다.

 

한문순_Pool_피그먼트 프린트_61×91cm_2016/2022

인간의 죄악을 씻어 내고, 더 이상 인간의 해악이 범접할 생각이 들지 못하게끔 당당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곳은 벌써 소도(蘇塗)와 같은 성지이자 마룬(Maroon)과 같은 자유구임이 선언됐던 것이다. 이런 점은 이 지역 일대의 곰, 늑대, 사슴, 순록 등 많은 종류의 야생 동물의 수가 사고 이전보다 오히려 크게 늘어났다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방사능이 야생동물에 좋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라, 인간이야 말로 야생 동물들 입장에서는 방사능 물질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죽을 정도의 방사선 수치가 아니라면 차라리 체르노빌이 다른 곳보다 훨씬 안전한 장소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문순_Ride_피그먼트 프린트_61×91cm_2016/2022

인류에게 인식의 대상보다는 소유의 존재로 여겨졌던 식물. 그런 식물의 위대함이 파괴된 자연을 훌륭하게 치유함으로써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그리고 식물의 위대함이 아이러니하게도 인류 최악의 범죄 현장에서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흔적을 남긴다. ■ 한문순

 

한문순_Hotel_피그먼트 프린트_61×91cm_2016/2022

Chernobyl is a word that means "black leaf." Currently, we don't think of this word as a foreign language meaning "black leaf," but use it as a word meaning nuclear disaster. This is due to the aftermath of the nuclear power plant explosion in the Chernobyl region in 1986. ● Nuclear power was considered to be capable of completely solving the energy shortage, one of the chronic human problems, as it had the best output ever in history. However, on April 26, 1986, the Chernobyl Nuclear Power Plant No. 4 reactor, located in the north of Kiev, Ukraine, exploded, and mankind experienced the highest grade of the International Nuclear Event Scale (INES). The Chernobyl nuclear explosion revealed bare face that the current technology was not yet fully capable of controlling nuclear power, and it served as important to realize and reflect on mankind's blind faith in science. ● Eventually, humans were chased out of Chernobyl area contaminated with radioactivity, and the area around the power plant was sealed as a radioactive contamination area. When I visited the accident site 30 years after the half-life of cesium radioactivity, I expected that the Chernobyl area would still be as black and gloomy as its name. However, contrary to my expectations, only various human-made structures were black and gloomy, and the Chernobyl area was already undergoing restoration and healing by native plants. It was no longer an area covered with black leaves, but rather a sacred place with a bright and vivid color of life. ● It was confident enough to wash away human sins and no longer allow human harm to come across. It has already been declared a sacred place like Sodo and a free slave zone like Maroon. Plants were considered possessions rather than objects of recognition to mankind. However, the greatness of such trivial plants is revealed by healing of the destroyed nature. ● To remember the ironic situation in which the greatness of plants is revealed in the worst crime scene of mankind, I leave a trace with pictures. ■ Han moon soon

 

Vol.20220217b | 한문순展 / HANMOONSOON / 韓文順 / photography

사진의 만찬

 

정영희_최경덕 2인展 

2022_0204 ▶ 2022_0213 / 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기획 / 이수철주최 / 미학적사진학교

관람시간 / 11:00am~06:30pm / 일,공휴일_11:00am~06:00pm

 

 

갤러리 브레송

GALLERY BRESSON

서울 중구 퇴계로 163(충무로2가 52-6번지) 고려빌딩 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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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로 부터 ● 인생에서 가장 많은 집중력을 발휘했을 때가 언제였을까.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가녀린 생명을 보살피고 양육하던 그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의 새봄이 시작되었다. 따스한 햇살과 보드라운 봄바람으로 미소 짓기도 하고, 때로는 변덕스러운 찬바람으로 옷깃을 여미게도 했던 봄날들. 봄이 언제나 짧은 것처럼 나의 새봄도 그러했다.

 

정영희_봄날 001_종이에 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_50.75×100cm_2021
정영희_봄날 002_종이에 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_100×50.75cm_2021
정영희_봄날 004_종이에 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_100×50.75cm_2021
정영희_봄날 005_종이에 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_50.75×100cm_2021

 

이제는 누구의 돌봄이 필요치 않은 인격체로 성장했고, 자기 자신만의 방향키로 각자 다른 모습으로 인생 여정을 시작하는 아이들은 자신들의 새봄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뒤를 돌아보는 것조차 잊은 채 앞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부모 이전에 자식이었던 나 또한 그 시절 뒤돌아 부모님을 보기보다는 내 앞에 펼쳐진 세상만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부모님에게서 멀어져 가듯이 나의 아이들도 멀어져 간다. 내 인생의 새봄을 떠나보내며 가을 햇살 가득한 넓은 마당처럼 그 자리에 있어야겠다. ■ 정영희

 

Into the Picture ● 카메라 속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다른 세계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가끔은 그들의 공간과 시간을 나의 프레임으로 끌어들이기도 하며, 사진 속 프레임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 그들의 삶 속으로 한 발짝 발을 내딛기도 한다.

 

최경덕_사진 속 사진 #001_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 바느질_56.6×85cm_2021
최경덕_마음읽기_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 바느질_66.6×100cm_2021
최경덕_뮤직뱅크_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 바느질_56.6×85cm_2021
최경덕_하모니_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 바느질_56.6×85cm_2021

나의 카메라는 종종 미술관에서 프레임으로부터 해방된다.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러간다. 사람들은 작은 소리로 뭔가를 속삭이듯 재잘거린다. 딸아이가 그림 속 어딘가에서 서성인다. 순간 카메라 셔터음과 동시에 그곳의 그림과 딸과 나는 같은 공간 속, 같은 시간에 존재하고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그러한 프레임 안과 밖을 오가며 딸과 함께하는 사진을 찍고, 종이 위로 잉크가 스며들어 사진이 출력되고, 그 위로 딸아이의 사진을 바느질할 때 비로소 나의 딸과 함께한 시간은 완성 되어진다. 예단할 수 없는 결과가 나의 손을 거쳐 가고 사진 속 사진이 완성되어 갈 즈음... 그것은 마치 종교의 의식처럼 위로로 다가온다. ■ 최경덕

 

Vol.20220204b | 사진의 만찬-정영희_최경덕 2인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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