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g Face

 

윤지선展 / YOONJISEON / 尹智嫙 / mixed media 

2022_0301 ▶ 2022_0313

 

윤지선_rag face #2201-1_사진, 천에 바느질_72×52.5cm_2022

윤지선 홈페이지_www.yoonjiseon.co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13일_12:00pm~02: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

 

 

3월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갤러리 담에서는 윤지선 작가의 Rag Face전시를 기획하였다. 국내보다는 외국에서 작품성을 인정 받고 있는 윤지선 작가는 자신의 얼굴을 사진을 찍어서 그 위에다가 끊임없이 바느질을 한다. 바늘이 못들어가는 시점에서야 비로소 작업을 멈추게 된다. 윤지선의 작업은 앞뒤가 따로 없다. 앞면은 실로 채워져 있고 뒷면은 실밥만이 그 형상을 남기고 있다. ● 공제 윤두서의 직계 손녀이기도 한 공제의 자화상을 출력해서 할아버지의 수염대신 자신의 음모의 털을 뽑아 심은 초기의 작품을 비롯하여 지금은 자신의 얼굴을 출력해서 재봉틀의 실로 그 얼굴을 채워나간다. 때로는 얼굴을 일부를 재봉실로 메워서 입을 사라지게 하기도 하고, 얼굴의 그 형상도 예쁘게 보이려고 애쓴 얼굴이 아니라 희극적이거나 슬픈 모습, 고통스런 얼굴들이 보인다. ● Rag는 헤진 천으로 된 누더기의 뜻을 가지고 있다. Rag Face란 결국 누더기로 되어버린 얼굴이라는 뜻이다. 작가의 자화상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도 예쁘게 미소 짓는 얼굴이 아닌 우스꽝스런 모습이나 일그러진 모습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을 그런 해괴한 얼굴을 찍는다 이후 다시 인화된 얼굴 위에 재봉틀로 바느질을 해댄다. 내면의 감정들을 이때에서 비로소 드러내듯이 다양한 감정들을 표출하고 있다. ● 작가의 작업은 사진에서 시작해서 바느질로 마무리가 되는 작업이어서 일우사진상을 받기도 하고 세계적인 텍스타일 전시에서도 큰 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번 전시에는 신작 10여점이 전시될 예정이다. 윤지선 작가는 한남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였으며 이번이 열 다섯번째 개인전이다. ■ 갤러리 담

 

윤지선_rag face #2203-1_사진, 천에 바느질_73×52.5cm_2022

내 마음대로 하는 것 같은 작업은 사실, 작업 과정이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여 한다. 작업을 능동적으로 한다기보다, '겪어 낸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실패(왜 그것이 실패인지 말로 표현 못하지만 알고는 있는)를 허둥지둥 만회하고, 얼렁뚱땅(무엇이 얼렁뚱땅이었을까?), 자포자기 넘어가려 마음 먹고는 잠자리를 뒤척이며 괴로워하다 끝내 이불을 박차고 나와 그 얼렁뚱땅을 쳐다보며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고 작업에 묻고 있다. ● 내 이야기가 작품을 장악하면 그것은 곧 식상한 지루함을 줄 수밖에 없다. 내 작업을 접한 이들 저마다의 주마등을 저저마다 감각할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싶다. 바라보기 보다 '겪는' 작업이었으면 좋겠다. ● 관(觀)보다 체(體)하는 이미지에 도달하고 싶다. (2022. 02) ■ 윤지선

 

윤지선_rag face #2203-2_사진, 천에 바느질_73×52.5cm_2022

무서운 얼굴 이모 ● 2003년 아일랜드 코크(Cork)에서 작가 윤지선을 처음 만났다. 나는 당시 어학연수를 하고 있었고 윤 작가는 유럽 배낭 여행 중이었다. 그녀는 마치 수 백 개의 용수철이 머리에서 곧 튀어나갈 듯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고 풍기는 아우라 덕에 심상치 않음을 느끼긴 했지만 사실 그녀가 예술가를 업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한참 후에야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20대의 나는 상대방의 직업이나 나이 따위는 관심 밖이었고 그냥 사람이 좋아 함께 즐기고 어울리던 시절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가 지나고 그녀가 아일랜드를 떠나기 전 작별 인사로 남긴 엽서를 통해 나는 그녀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 엽서에는 신체(손, 털이 숭숭 난 다리)를 이용한 사진 작품이 인화되어 있었고, 그 사진은 야릇한 상상력을 마구 자극해 부끄러움과 짜릿함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솔직히 그녀가 엽서에 쓴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엽서 속 작품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관심이 있다면 그녀의 이전 작업을 꼭 한 번 찾아보기를 권한다. 탯줄을 연상시키는 긴 장갑(작가의 어머니와의 공동 작업), 하나의 포즈를 취하기 위해 작가가 수십 시간을 요가에 투자하여 만들어낸 아크로바틱한 포즈 사진, 드릴로 작은 구멍을 뚫어 자신의 털을 심은 동물 뼈, 조상의 초상화(윤두서)에 자신의 털을 심은 작품 등 그녀의 작품 들은 때때로 사람들의 불편함을 자극하지만 윤지선적 유머가 있고 유희가 있다.

 

윤지선_rag face #2204-2_사진, 천에 바느질_72×52cm_2022

2014년 나는 미국으로의 이주를 앞두고 있었고 그녀에게서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Rag face와 관련한 이메일을 영어로 써 달라는 부탁이었다. 단순히 이메일 작성만 하면 끝날 줄 알았던 일이 예상 외로 점점 커져 이듬해 우리는 뉴욕 첼시에서 미국 첫 개인전 Rag face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그것이 우리의 첫 협업이었다. 이후에도 Rag face는 사진(Photography), 섬유(Textile), 초상(Portrait), 컨템포러리(Contemporary) 아트 등을 주제로 한 여러 전시에 초대되었고 덕분에 나는 네덜란드, 프랑스, 헝가리, 오스트리아 등을 여행하는 호사를 누렸다. 우리는 출장 업무가 끝나면 반드시 그 나라의 유명 미술관을 방문했고 그녀는 작품과 작가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흔쾌히 풀어 내주었다.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던 경험 때문인지 그녀는 예술을 전공하지 않은 나의 눈높이에 맞추어 작품과 작가의 시대적, 역사적 배경과 그에 얽힌 스토리를 맛깔스럽게 이야기해주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작업에만 몰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세상과 단절된 똥고집 작가이겠거니 지레 짐작했던 나의 편협한 생각은 이 여행들을 통해 사라졌다. 결혼과 육아로 나를 잊고 살고 있던 나에게 그녀와의 여행은 인생의 활력이 되어 주었고, 예술은 어렵고 특정인들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던 편견을 깨기 충분했다.

 

윤지선_rag face #2205-2_사진, 천에 바느질_72×53.5cm_2022

저 사람, 가면을 썼다' 라는 말은 흔히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진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는 사실 여러가지 얼굴이 존재한다. 사랑하는 이를 바라볼 때,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억지로 먹을 때, 오랜 동안 바라왔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의 얼굴 표정을 상상해보라. 사랑, 분노, 행복, 걱정, 기대, 멸시, 창피, 공포 등 우리는 오만 가지의 감정을 가지고 있고 이에 따라 우리 얼굴 표정도 바뀐다. 어쩌면 가면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자기 표현에 충실한 사람이 아닐까? 작가 윤지선의 Rag face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잊고 있었던 감정들이 하나씩 떠오르게 된다. Rag face 속 작가의 얼굴은 보통의 자화상과는 다르게 정면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지도, 억지로 멋진 표정을 지어 보이지 않는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본연의 감정과 표현에 충실할 뿐이다.

 

윤지선_rag face #2206-2_사진, 천에 바느질_72×53.5cm_2022

작가는 자신의 얼굴 표정을 사진으로 찍어 광목천에 현상하고 후에 공업용 재봉틀로 얼굴 사진 위를 박음질한다. 윗실과 아랫실의 색을 달리하여 마치 물감이 섞이듯이 실의 질감과 색감이 혼재하고 얼굴 표정은 원래부터 그랬던 것인지 바느질로 인해 생겨 난 것인지 순서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작품은 이러한 작업 과정을 통해 자연스레 앞면과 뒷면이 동시에 생겨난다. 앞과 뒤는 같은 얼굴이지만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마치 내가 모르는 나의 얼굴을 발견할 때처럼 말이다. 표정도 다르고 면의 질감과 색감도 다르다. 앞뒤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은 작가와 관객의 아날로그적 상호작용을 가능케 한다. 관객은 작품의 원하는 면만 골라 감상할 수 있고 공중에 걸어 앞과 뒤를 동시에 감상할 수도 있다. 관객의 물리적, 정신적, 감정적 환경에 따라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에 관객의 의지가 개입될 수 있다는 것이 Rag face의 매력이다. 이 매력을 100% 느끼기 위해 나는 그녀의 작품을 반드시 직접 보라고 권하고 싶다. 전시 공간에 들어가는 순간 느껴지는 압도적 흡인력은 인스타그램의 정사각형 사진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다. 한 올의 얇은 실이 수천 수백만 번의 재봉질을 통해 면이 되고, 그 면이 다시 쌓이고 쌓여 묵직한 캔버스를 창조해낸다. 면과 면의 경계를 구분하는 바느질의 모양새는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기법이다.

 

윤지선_rag face #2208-1_사진, 천에 바느질_74×52cm_2022

나의 두 아이들은 작가 윤지선을 '무서운 얼굴 이모'라고 부른다. 아이들이 어릴 때 Rag face를처음 보고 윤작가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그들에게 Rag face 첫인상은 무서움이었지만 이제 아이들은 작품에서 우스꽝스러움을 찾아내기도 하고, 슬픔을 느끼기도 하며, 얼굴 표정을 따라해 보이기도 하며 작품을 즐긴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작품 속에 점점 나이 들어가는 작가의 얼굴도 보이고, 가끔은 엄마의 얼굴, 그리고 나의 얼굴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도 있다. 처음 작품을 마주쳤을 때의 느낌과 지금은 차이가 있고, 아마도 앞으로도 변화해 나갈 것이다. 마치 새로운 사람을 만나 알아가는 과정처럼 말이다. 이는 아마도 그녀의 작품에는 관객이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서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작가는 관객이 Rag face를 통해 작가 의도를 파악하거나 '이거 작가 얼굴이래!' 라고 단정짓지 않기를 바란다. 작가의 의도가 어찌되었건 관객이 '밸 꼴리는 대로'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느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작품을 관람하는 여정에서 평소에 소홀했던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 사상 유래 없던 팬데믹이 전 세계를 강타한 이후 우리는 벌써 세번째 봄을 맞이하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고 있는 지금, 우리는 평범했던 일상과 여행을 갈망하고 있다. 다음 번에 다가올 봄은 지금보다 나아지기를 소망하며 마스크로부터 자유로운 Rag face를 통해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기를 바래 본다. ■ 정은

 

Vol.20220302a | 윤지선展 / YOONJISEON / 尹智嫙 / mixed media

아스팔트에서 식물채집하다

윤희수展 / YOONHEESU / 尹熙洙 / collage 

 

2021_0901 ▶ 2021_0910

 

윤희수_도시산책자_종이에 콜라주_56×76cm_202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10일_12:00pm~02: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

 

 

9월의 첫 전시로 윤희수의 도시산책자의 수집-『아스팔트에서 식물채집하다』는 전시가 열린다. 윤희수 작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건축과 그 공간 속에서 오고 가는 사람, 고양이, 건물, 구석에 핀 풀, 가로수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물을 만나게 된다. 그 안에서 작가는 종이로 그 형상을 오려내서 겹겹이 쌓아 올린다. 그것이 우리가 도시를 지나면서 부딪히게 되는 시간 흔적처럼 쌓는다. 아스팔트는 도시의 상징적이 도로의 모습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작가가 가지고 있던 잡지 책에서 오려낸 이미지들과 그 위에 유화 드로잉이 올려지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는 콜라주 작업 20여점이 보여질 예정이다. ■ 갤러리 담

 

윤희수_도시산책자_종이에 콜라주_56×76cm_2020

도시의 거리를 걷기 시작한다. 목적지가 있기도 하지만 무심하게 혹은 멜랑콜리 상태에서 걷는다. 느리게 걷기도 하고, 기웃거리거나 자주 멈추면서 도시의 변화를 경험한다. 도시에 매혹되기도 하고, 그 매혹됨에 '거리 두기'도 하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과거와 미래, 고급과 키치, 가치 유무, 도시와 자연, 등등 도시에서든 나의 의식 세계에서든 이런 대립항들이 날을 세우면 그 사이의 관계를 살피게 된다.

 

윤희수_도시산책_종이에 콜라주_56×76cm_2020

1991년부터 '느림'이라는 주제로 시작한 「비우기 채우기」 작업은 주변에서 수집한 다양한 종이 인쇄물을 오려 붙힌 콜라주 이다. 언뜻 선이나 미로, 또는 특정한 형상이나 색채일 수도 있는 오린 인쇄물을 수정없이 중첩하거나 병렬한다. 대부분 우연적이고 불확실한 상황에 기대어 작업한다. 지구 에너지 4분의 3 이상을 소비하는 대도시의 독특하고 매캐한 냄새와 탁한 채도, 밝게 빛나는 화려한 마천루의 깊고 어두운 음영, 그리고 반복되는 단절과 중첩.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주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이게든 보이지 않게든 존재하게 한다. 도시와 인간, 나아가 도시와 자연 사이의 간극, 틈, 관계, 맥락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거. 리. 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윤희수_도시산책_종이에 콜라주_56×76cm_2021

지금 여기 도시를 자유로이 돌아다니기 어렵게 된 팬데믹 상황에서, 맨 처음 발자국을 떼고 천천히 걸어 나갔던 인간과 그가 처음으로 서서 봤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상상해 본다. ● 발터 벤야민은 일찍이 '도시 산책자는 아스팔트에서 식물 채집하러 가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 윤희수

 

윤희수_자코메티와 도시산책_종이에 콜라주_46×52cm_2020

도시 걷기, 흐름과 멈춤의 리듬 ● 도시는 온갖 종류의 흐름이 모여 결합하는 동시에 갈라져 흩어지는 곳이다. 사물과 신체, 이미지와 소리, 냄새와 촉감이 도시의 시공간을 '비우고 채우며' 흐른다. 흐름의 '간격, 틈, 관계, 맥락' 속에서 도시는 끊임없이 차이와 반복의 리듬을 생성한다. 그러한 흐름의 리듬 속에서 또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우리를 만든다. ● 출근길의 북적이는 지하철 2호선에서, 방과 후의 치열한 대치동에서, 한낮의 나른한 탑골공원에서, 금요일 밤의 찬란한 이태원에서 우리는 도시인이 된다. 때로는 회사원으로, 때로는 학생으로, 때로는 노인으로, 때로는 청춘으로, 혹은 그 무엇도 아니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흐름 그 자체'로서 우리는 도시의 시공간에 새로운 리듬을 만든다. 우리는 그렇게 도시를 걷는다.

 

윤희수_도시산책과 동그라미 세모 네모_종이에 콜라주, 아크릴채색_56×76cm_2020
윤희수_도시산책과 동그라미 세모 네모_종이에 콜라주, 아크릴채색_56×76cm_2020

윤희수의 『아스팔트에서 식물 채집하다』는 우리의 걸음을 따라 창발하는 도시의 시공간과 그러한 시공간 속에 심겼다 뽑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윤희수는 흐르는 도시의 시공간을 잘라내 종이에 겹겹이 쌓아 올린다. 그렇게 중첩된 시공간의 조각들 '사이'에 도시를 걷는 '우리'가 있다. 마치 숲 속의 역동적인 생태계를 감상하고 채집하는 식물학자처럼, 우리는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도시의 스펙터클을 감상하고 채집한다. 우리는 빠르게 느리게 걷고, 서고, 주저앉았다 다시 일어난다. 흐름과 멈춤의 불규칙한 리듬 속에서 나와 타인, 대로와 골목길, 빌딩과 한옥, 고양이와 새, 나뭇가지와 애벌레가 찰나에 스쳤다 사라진다. 그들은 색일 수도 형상일 수도, 소리일 수도 냄새일 수도, 진짜일 수도 가짜일 수도 있다. 끊임없는 우연한 마주침을 통해 우리는 도시의 관람객이자 수행자가 된다. ● 윤희수의 작품 안/밖에서 도시를 응시하는 우리의 모습은 마치 아스팔트 위에 뿌리내린 식물 같다. 그리고 작품 안/밖을 가로질러 걷는 우리는 그렇게 식물이 된 스스로를 다시 채집한다. 흐름과 멈춤, 차이와 반복의 리듬이 다시 도시를 비우고 채운다. ■ 지명인

 

Vol.20210902e | 윤희수展 / YOONHEESU / 尹熙洙 / collage

New Life

신조展 / SINZOW / しんぞう / painting 

 

2021_0624 ▶ 2021_0707

 

신조_Game over No.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80.3cm_202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7월7일_12:00pm~04: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

 

 

갤러리담에서는 초여름을 맞이하면서 일본에서 활발한 작업을 하고 있는 일본작가 SINZOW의 New Life를 마련하였다. ● 코로나 19라는 엄청난 불안 속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건 어렵지만 코로나 이후에는 우리도 모두 다시 태어난 것처럼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작가로써 어머니로써 아내로써의 삶을 다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고로 다친 남편과 어린 자식을 돌보야하는 작가의 삶은 무척이나 무겁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하고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다. 「I am standing」이란 작품에선 시장에서 장을 보고 돌아가는 작가의 자화상인데 굵고 힘센 팔뚝으로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 작가의 표정이 자못 비장하다. ● 「Game over」라는 작품에서 보면 주변에는 잡초가 무성한 황량한 곳에서 자동차를 몰고 있는 작가가 자동차의 계기판에 게임오버라고 나오는 텍스트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코로나 19로 인한 시대가 곧 종말이 올 것이며 새로운 시대에 맞게 준비를 해야겠다는 작가의 생각이 보인다. S● INZOW작가는 갤러리 담에서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일본 작가 중의 한 명이다. 이번 전시에는 새롭게 판화 작업도 선보인다. ● 무사시노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으며 이번이 작가의 서른 두번째 개인전이다. ■ 갤러리 담

 

 

신조_Im stand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80.3cm_2021
신조_Fight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60.6cm_2021
신조_Ki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65.2cm_2021
신조_게임센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80.3cm_2020
신조_With Hanako 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80.3cm_2021
신조_기둥1柱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3×100cm_2021

 

큰 시대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농락당하면서도 냉정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으면 나를 덮고 있던 두꺼운 막이 흘러내려 사라지고 있다. 시야가 좋아져서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분명하게 보인다. 그냥 어린애처럼, 순수하게 하자! 내가 원했던 것을 손에 가지고, 처음으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으로 걷기 시작하고 있다. ■ 신조

 

 

Vol.20210624b | 신조展 / SINZOW / しんぞう / painting

김태헌展 / KIMTAEHEON / 金泰憲 / painting 

 

2021_0515 ▶ 2021_0531

 

김태헌_고사관초도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65cm_202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90507d | 김태헌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31일_12:00pm~02: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cafe.daum.net/gallerydam

 

 

전시를 보기 위해 화랑을 찾던 젊은 시절 나는 작품만큼이나 액자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가난한 미대생이라 아사천을 씌운 정식 틀은 언감생심이고, 액자도 1년에 한 번 하는 교내 미전 때나 화방에 주문했다. 그러니 금박액자는 그림의 떡이었다. 졸업할 즈음 미술계도 변해 액자없이 그림만 걸어 놓게 되었고, 화려한 액자에 넣는 그림을 시대에 뒤떨어진 작업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금박액자는 이제 먼 이야기가 되었다. ● 2020년, 코로나19가 내 방랑벽을 누르자 어느새 엉덩이에 뿌리가 돋고 머리엔 우울이 싹텄다. 그러던 어느 날 금박액자 18개가 생겼다. 이번에도 그 출처가 빠이롯트다. 이번 것은 빠이롯트 초대 회장님이 수집하여 그림을 보관하던 수장고에서 나왔다. 원화그림들은 판교박물관 수장고로 들어갔고, 엽서나 포스터가 들어있던 금박액자 중 일부가 나에게 들어왔다. 양과 액자 크기를 고려해서 딱 18개만 손에 넣었다.

 

김태헌_고사관수도_장지에 아크릴채색_53×43cm_2020
김태헌_붕붕_마당에서_장지에 아크릴채색_46.5×41cm_2020
김태헌_마당에서_아사천에 아크릴채색_37.5×49.5cm_2020

작업스타일을 밀어내며 미술계에 발을 붙이고 살다보니 여러모로 불편함이 있지만, 반복되는 형식에서 벗어나 늘 뭔가 새롭게 즐길 수 있어 좋다. 최근 몇 년간 몸 미술관 관장님이 오래된 가구나 박스 등등을 두 트럭이나 보내 끙끙대며 잘 놀았던 경험이 있던지라, 이번에 가져온 18개의 금박액자는 한결 여유 있어 보였다. 그런데 웬걸! ● 작은 금박액자에 넣는 그림마다 너무 어색한 게 아닌가? 여러 형식의 그림을 그려 온 나인지라 인내심을 갖고 이 그림 저 그림 그려서 넣어봤지만, 촌놈에게 명품샵에 있는 옷을 입혀 놓은 것 마냥 금박액자의 기세에 눌렸다. 결국 익숙하지 않은 내 눈 때문이려니 하며 금박액자를 그림에 입혀놓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때 가서도 아님 말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은 나를 생기있게 한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올 때쯤 17개의 그림이 마침내 금박액자 안에 자릴 잡았다. 낯설기만 하던 액자가 눈에 익은 것이다. 그 사이 말벌에 얼굴을 쏘여 기절까지 했다. 이제 액자 1개만 남았다. 그러던 어느날 작업실에 오신 분이 필요하다기에 얼른 내 드렸다. ■ 김태헌

 

김태헌_붕붕-개나리_장지에 아크릴채색_48×38cm_2020
김태헌_붕붕-울다가도 웃을일이 있지_장지에 아크릴채색_54.5×44.5cm_2020

5월을 맞이하여 갤러리 담에서는 김태헌 작가의 개인전을 마련하였다. 코로나로 인해 여행과 이동이 정지된 상황에서 집 주변의 정원의 풀과 나무 정리를 하면서 작가가 작은 소인국의 주인공처럼 표현된 그림들이 보인다. ●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의 제목을 빌려와 그린 「고사관수도」 시리즈의 그림에서는 쏟아지는 폭포를 우주인이 되어 바라다보는 그림이나 「고사관초도」에서는 작가가 소인국의 인물처럼 풀과 나무 사이를 우주 탐험하듯이 새롭게 관찰하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에서는 고결한 선비가 자연에서 소요유하면서 고요함을 나타내는 작품이라고 할 때 김태헌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고요함보다는 자연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모습이다. ● 그래서 등장 인물은 권투 복장을 입은 권투선수 혹은 우주복을 입은 우주인의 모습으로 자연에서 놀고 있는 모습이다. 「붕붕_개나리」라는 작품에서는 우주복을 입고 활짝 핀 개나리 속으로 조심스레 다가가는 모습도 자못 진지하다. 「 붕붕_ 울다가도 웃을 일이 있지」라는 작품에서는 권투복을 입고 화면 가운데 서 있는 등장인물의 모습에서 눈에 시퍼런 멍이 들었지만 해맑게 웃고 있는 작품에서 삶에서 받은 고통 속에서 끝내는 딛고 잘 일어설거라는 의지가 느껴진다.

 

김태헌_인왕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5×53cm_2021

이렇듯 김태헌의 작업에서는 작가가 현실을 바라보면서 유희적으로 노는 듯하지만 관조적으로 삶을 바라보면서 나름 열심히 살고자 하는 소시민의 생각이 읽혀진다. 때로는 우주인의 모습으로 때로는 여행자의 모습으로 변모하는 작가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난다. 평론가 정현이 김태헌의 작업에 대해 김태헌은 시시각각 변하는 시대, 자신의 위치와 시선에 충실하게 외부 세계를 관찰하고 그 사이에 풍자와 비유를 삽입하길 즐기는 듯하다고 말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다. ● 김태헌 작가는 경원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였으면 이번이 스무 번째 개인전이며, 이번 전시에서는 20여점의 신작이 출품할 예정이다. ■ 갤러리 담

 

 

Vol.20210515a | 김태헌展 / KIMTAEHEON / 金泰憲 / painting

기뻐하라 Be glad

 

김명진展 / KIMMYUNGJIN / 金明辰 / painting 

2021_0501 ▶ 2021_0514

 

김명진_기뻐하라_캔버스에 한지, 먹, 안료, 콜라주_72.5×60.5cm_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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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5월14일_12:00pm~02: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cafe.daum.net/gallerydam

 

작가의 글  축제 ● 어둠을 향해 두 손을 뻗는다. / 손과 손 사이에 연한 바람이 맴돈다. / 나와 이웃과 침묵의 잔해. / 명멸하는 빛. / 흙으로 빚은 듯한 종이 인형. / 얼굴의 알 수 없는 빛과 얼룩의 향연. / 저마다 빛나는 얼굴들. / 얼굴은 자신이 빛나는 것을 알지 못한다. / 당신의 눈동자처럼, 오소서! / 인형은 소녀의 고백에서 태어났다. / 그네 뛰는 소녀와 그 아래의 어깨, 광대의 줄타기, 뿔난이들, 광야에서의 경주, / 하얀코끼리, 곡예사, 가면쓴 이, 세례식, 나무를 옮기는 사람, 빛을 캐는 사람, 고독한 왕, / 광인의 행렬...........현실의 안쪽과 바깥에서의 줄타기. / 선택 받은이, 이방인, 여행자도 좋다. / 축제다. / 형제여, 주술이든, 충동이든, 여름 밤의 꿈이면 어떤가. / 두려움없이 나아가게 하소서. / 그래, 축제다. (2020. 8월) ■ 김명진

 

김명진_고해_캔버스에 한지, 재, 안료, 콜라주_53×45cm_2020
김명진_마더_캔버스에 한지, 먹, 안료, 재, 콜라주_130×97cm_2020~21
김명진_나를 위하여_캔버스에 한지콜라주, 먹, 안료_100×80cm_2021

어둠 속에 명멸하는 타자들의 행렬 ● 김명진의 [축제] 전은 어느 구멍으로 새어 들어온 지 알 수 없는 빛이 활주하는 암흑 상자 안 존재들은 '창 없는 방인 모나드'(라이프니츠)같은 어두운 화면에서 서로를 비추면서 서사를 이끌어 나간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은 명석 판명한 이성을 지향하는 대낮의 철학에 대해, 밤하늘의 별같이 다양하게 빛나는 세계를 지향한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빛남의 조건인 어둠은 불가피하게 무거움 또한 내포한다. 김명진의 작품은 하나의 규칙으로 총괄될 수는 없지만 비슷한 등장인물이 여러 화면에 등장하면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야기가 계속된다. 김명진의 최근 작품들은 죽어야 사는 희생양의 기제를 깔고 있다. 잔혹성이 포함된 즐거운 유희이다. 살과 피의 상징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검은 화면, 그리고 드물게 나타나는 주묵의 붉은 빛은 카니발에 가까운 축제를 말한다. 먹과 한지 꼴라주 등으로 만들어진 모노톤의 작품들은 어둡고 무거워 보이기는 하지만, 가라앉지는 않는다. 바닥이 없기에 가라앉을 수도 없다. ● 그렇지만 중력감은 존재하며, 작품 속 등장인물들을 가는 줄 위이나 그네 등에 매달려 추락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광대의 뾰족 모자와 들어 올린 발치를 관통하는 긴장감이 검은 화면을 횡단하는 선들을 통해 전해져 온다. 오래전부터 실험해온 한지 꼴라주 작업에서 가늘게 오려낸 얼룩진 선들은 최근 작품에서 내용을 담은 형식이 되었다. 어둠속 빛을 연상시키는 선은 순수한 광선은 아니지만, 추락과 익사, 또는 그 직전에서 고통 받는 존재들을 들어올린다.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난 것들은 급격한 존재의 변환을 겪는다. 피에로 복장이나 가면을 쓴 인물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를 상징한다. 가장(假裝)은 동일자 안의 타자를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예술가적 정체성과 만난다. 타자로서의 예술가는 자신을 표현하는 자이기 보다는, 미지의 힘을 통과시키는 매개자다. 우주적 밤을 떠올리는 깊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존재들은 축제의 행렬을 이룬다.

 

김명진_숲으로 가자_종이에 한지, 먹, 안료, 콜라주_48×38.5cm_2021
김명진_아무것도 아닙니다_캔버스에 한지, 먹, 안료, 콜라주_53×45cm_2021
김명진_인형극장_판넬에 대, 장지, 먹, 안료, 한지, 콜라주_77×131cm_2019
김명진_어지러워_캔버스에 한지콜라주, 먹, 안료_194×130cm_2020~21

 

심연으로부터 들어 올려지긴 했지만 그들이 안전해진 것은 아니다. 줄은 가느다란 버팀대가 되어주지만 동시에 속박, 운명, 조종 등 부정적인 상징 또한 선명하다. 수없이 추락해 본 노련한 광대만이 그가 타고 움직이는 칼날 같은 좁은 입지를 초월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곡예사들은 줄 위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 그 위에서만 비상할 수 있다. 서사는 축제처럼 좌표를 설정할 수 없는 막막한 바깥에서 펼쳐진다. 조각들이 덧붙여지고 때로는 긁어내며, 재도 포함되는 김명진의 작품은 이질적인 것들이 섞이는 장이다. 그가 이번 전시에서 축제를 호출한 것은 내용과 형식 모두에 관련된다. 원근법을 비롯한 재현의 장치로부터 벗어난 현대 미술가들에게도 축제는 작품의 한 소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미학과 닿아있다. 김명진의 작품 속 인물들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자연광은 아니다. 굳이 자연광과 비교하자면 햇빛이 아니라 달빛에 더 가깝다. ● 그들은 저 너머에서 오는 빛을 반사한다. 얼룩덜룩한 신체는 빛을 받는 존재의 이질성을 나타낸다.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닌 김명진의 작품은 경계 위반을 일삼는다. 한지 꼴라주라는 그의 형식은 우연과 필연의 경계를 넘나든다. 휴지통 안에 모아놓은 한지들은 오려지기도 하고 찢어지기도 하면서 화면에서 뒤섞인다. 한지의 물성을 재발견 하는 중인 최근 작업은 점차 두꺼워지고 있다. 재를 활용하여 울퉁불퉁한 화면을 만들기도 한다.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파편과 파편이 겹쳐지고 재로 뒤덮인 묵시록적 세계, 이러한 복합적 바탕에서 마술의 상자처럼 무엇이 솟아난들 놀라울 것이 없다. 그것은 단지 형식적 실험이라기보다는 때로 신비함으로도 이어지는 존재의 불투명성과 닿아있다. 종교인에게 기도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듯이, 작업 또한 그러하다. 축제라는 판을 가정한 행렬은 묵상 중에 명멸하는 무명의 존재들로 하여금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환상적 무대를 연출하게 한다. ● 종교적 묵상과 예술적 상상은 자아 뿐 아니라,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공동체, 그리고 사회적 맥락까지 확장된다. 먹에는 수많은 색이 잠재해 있다고 간주되어 왔지만, 먹을 포함한 복합적 재료가 사용되는 그의 화면에서는 형태 또한 찾아진다. 작업은 잠재적 형태가 현실화되는 과정이다. 축제와 서커스를 표현한 작품은 이 전시의 주제를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어둡고 희박한 공기 속에서 유희하고 고뇌하는 존재는 종교적 주체를 떠올리지만, 그는 자연에서도 자신을 지탱할만한 힘을 느낀다. 꽃이 피고 지는 뒷산에서도, 열매가 열리는 텃밭에서도, 살아가는 기술이 이미 입력된 채 태어나는 생명체들에서도,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섬에 대한 기억에서도 종교에서 받았던 위안을 느낀다. 자연에도 종교의 두 특성인 율법적인 측면과 신비적인 측면이 있다. 타자라는 같은 처지의 예술은 신화와 종교, 그리고 자연을 관통하는 세계의 신비와 접촉하는 또 다른 축제다. ■ 이선영

 

 

Vol.20210502a | 김명진展 / KIMMYUNGJIN / 金明辰 / painting

어디도 아닌

이은미展 / LEEEUNMI / 李銀美 / painting
2020_0421 ▶︎ 2020_0502


이은미_바깥_캔버스에 유채_45×54cm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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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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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끝, 다른 세상의 시작 ● 이은미의 「어디도 아닌」 전은 '어디'라는 단어에 포함되어 있듯, 어떤 자리나 공간에 대해 말한다. 조너선 스미스의 「자리잡기 to take place」에 의하면, 구체적 자리(place)와 추상적 공간(space)은 차이가 있지만, 어떤 구체적 자리로부터 시작되어 추상적 공간으로 마감되는 이은미의 작품은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경계 위에 존재한다. 「자리잡기」는 공간을 명사로, 자리를 자리잡기라는 동사로 이해하면서 기존의 종교적 해석의 중심보다는 중심을 찾아가는 과정을 중시한다. 이 중심은 결국 없을 수도 있으며, 부재하는 중심을 양파처럼 에워싸는 기나긴 미로 속의 여정만 남는다. '중심의 상실'(제들마이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형이상학적 정점(定點)으로 작동하는 중심보다는 자리를 찾아가는 시간적 과정이 더욱 설득력이 있으며, 그것은 이은미에게도 그렇다. 예술적 서사는 이 시간 속에서 펼쳐지고 접혀진다. 이렇게 목적지가 불분명한 이동인 유목은 현대문화 키워드 중의 하나가 된다. ● 어느 장소의 부분인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일단 벽, 바닥, 계단, 조명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관객들은 '여기가 어디냐?'는 질문을 많이 한다. 마치 어디인지 알면 바로 작품의 진의가 파악될 듯이 말이다. 추상화가 아니면서도 교묘하게 지시대상을 괄호 치는 작품들은 그 어디도 될 수 있는 가변성을 가진다. 길은 어디로도 뚫려있다. 비교적 정확하게 대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 「둥근 빛」은 갤러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명이지만, 천정 모서리의 선은 언뜻 수평선이나 지평선으로 확장되고 구멍은 항성(태양) 또는 위성(달)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어디를 선택하든 비슷한 분위기에 잠겨있는 그림들은 마음의 풍경이기도 하다. 상상의 공간이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넣었다가 빼낸 공간이라는 것이다. 지하의 탈주자에게는 희망의 구멍일 수도 있다. 조너선 스미스가 차이를 둔 자리와 공간이라는 의미를 포괄하기 위해, 일단 '자리 없는 공간'(블랑쇼)이라고 해두자. ● '어디도'에 바로 따라붙는 '아닌'은 자리나 공간의 불확실성을 말한다. 전시부제는 황정은의 소설집 「아무도 아닌」에서 영감 받았다. 그 소설을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말라르메, 카프카. 블랑쇼, 바르트 그리고 누보로망의 소설가들이 묘사한 현대의 익명성과 무관치 않으리라 추측한다. 대중적 익명성은 작가라는 주체에게도 연동되어 '작가의 죽음'(바르트)이 주장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고는 (후기)구조주의를 비롯한 이론적 배경이 있는 문학적 논의지만, 이를 미술에 적용시킨다면, 르네상스식 고전주의나 이를 19세기의 당대성에 적용시킨 리얼리즘으로 대변되는, 확고한 재현의 체계가 해체되는 과정과 밀접하다. 재현의 대상이 불확실해지면, 재현의 주체 또한 그렇게 된다. (문학에 비해)그림이라는 구체적인 형식은 '아닌'이라는 부정어를 모호하게 한다. 이항 대립적 사유의 보편화는 부정적인 정의를 쉽게 이해되는 어법으로 만든다.



이은미_벽과 벽_캔버스에 유채_60×50cm_2019


가령 우리는 천국을 잘 모르지만, 그곳이 '이세상이 아닌 곳'은 분명하다. 근대적 담론의 확고함에 비해 느슨한 근대 후기의 어법은 ' --이다' 대신에, '--이 아니고'의 연속으로 무엇인가를 규정하려 한다. 가령 주체는 여성이 아니고, 아시아인이 아니고, 이슬람교도가 아니고, 동물이 아니고, 성적 소수자가 아니고....궁극적으로 타자가 아니다. 이 부정어는 계속 나열될 수 있다. '어디도 아닌'에서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공간인 유토피아('어디에도 없는 곳')의 예를 들어보자. 리차드 해리스는 「파라다이스」에서, 유토피아는 1516년 토마스 모어가 이상적 사회를 주제로 쓴 책제목으로, 그리스어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뜻의 outopia와 '완전한 곳'이란 뜻의 eutopia사이의 모호한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고 썼다. 칼 만하임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서 토피아와 유토피아의 변증법을 보여준다. 이 책에 등장하는 란다우어는 현실의 모든 질서를 'topie'라고 한다면, 이상은 역사의 전환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라고 한다. ●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 의하면, 무정부주의자인 란다우어는 혁명이나 유토피아에만 가치를 부여하고 그 밖의 모든 토피아(존재질서)를 악한 것으로 보았다. 유토피아는 토피아와 상보적인 관계이다. 칼 만하임의 주장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모든 기존의 질서가 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토피아 중 한 가지 양식일 뿐이라는 결론이다. 그것은 제한된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은미의 그림에서는 무엇이 아니기 위해 그 무엇이 일단 드러나야 한다는 역설이 있다. 그래서 현대의 예술작품에서는 '부재'와 '흔적'이라는 관념이 그렇게도 많이 사용되는지도 모른다. 이중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의 작품들은 확실하고도 단호한 면이 있다. 개인의 성향을 드러낼 수 있는 붓질은 감춰지고, 이미지 또한 선과 그 연장인 면으로 이루어진다. 본 것을 기억하기 위해 찍은 사진적 프레임이 화면 내부의 선의 배치를 결정한다. 선들은 관계적이다. ● 차이의 관계 속에서 여러 좌표들이 설정된다. 작가의 동선을 알 수 있는 어떤 기표도 생략된다. 현대 소설가들이 '특징 없는 인간'을 묘사하려 했을 때, 그들이 있었을 법한 특징 없는 공간/자리이다. 회색과 보라색이 주조인 색감도 서늘하다. 형태(포지티브) 보다는 그림자(네가티브)에 가깝다. 따스한 노랑색이 부족한 색감은 빛이 포함되어 있다. 선택된 자리는 대개 인공적 조명에 의해 다양한 드라마가 연출된다. 배우 없는, 심지어는 사물도 없는 드라마가 그림의 주인공이다. 작가는 이렇게 비워둔 시공간을 빈 서판(書板)으로 삼아 관객들로 하여금 쓰기를 자극한다. 시작은 작가가 했지만, 마무리는 관객이 한다. 그 반대편에 읽기가 놓인다. '---읽기'는 계몽적 개괄서의 제목으로 자주 활용되며, 롤랑 바르트가 소비라고 비판하고, 수잔 손택이 해석이라고 비판한 문화산업의 국면을 말한다. 생산자와 소비자는 결국 연동되어 있지만, 시작을 책임지는 일, 즉 작가의 과업은 여전히 무겁고 어려운 것으로 남아있다.



이은미_둥근 빛_캔버스에 유채_60×41cm_2019


'아닌'이라는 방식으로 보면, 이은미의 작품에서 펼쳐지는 역설의 세계가 조금은 분명해질지도 모른다. 우선 아닌 것을 살펴보자. 텅 비어있다시피 한 작품은 소유와 지배를 향하는 도구적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다. 소유와 지배는 향유와 변화와 반대 항에 놓인다. 단편적 정보로 나타나는 빈곤한 지식들은 가슴이나 머릿속에 머물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뇌까려지곤 하며, 대화를 빙자한 독백은 작품의 개념이나 작가의 사고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작품은 침묵하는데 작가만 떠드는 상황이다. 특히 가다만 여정은 원래의 맥락을 탈구시켜 왜곡까지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침묵 속에서도 대화를 이끌어가는 작품이다. 이은미의 작품은 말이나 생각보다 시선이 우선한다. 그것은 작가가 세상의 구석들을 그런 식으로 먼저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을 주시하면서 거기에서 끝없는 이야기꺼리를 끌어낸다. 관객의 상상력은 작은 조명구에서 우주적 웜홀을 보고, 계단에서 주름진 시공간을 보는 식으로 확장될 수 있다. ● 작가는 주변이나 소외 등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 구석들을 주목하기는 하지만, 소박한 감정이입은 아니다. 거기에는 바라보기 특유의 거리감이 있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본다는 것은 거리를 전제로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본다는 것은 그것과 접촉하지 않을 수 있는 힘, 즉 접촉 속에서 오는 혼돈을 피하고자 한다. 블랑쇼에 의하면 본다는 것은 이러한 분리가 만남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보는 방식은 '감각적인 접촉'인데. 여기에서 '가시적인 영역과 비가시적인 영역 중 그 어느 것도 다른 하나에 희생되어서는 안된다'(블랑쇼). 이은미는 자신이 조우했던 장소들에서 '딱딱함, 흩어짐, 멀리 보이는...' 등의 감성을 끌어내곤 한다. 이야기는 바로 앞선 내용으로부터 꼬리를 물고 이어지므로, 이 침묵속의 대화는 할수록 할 말이 많아지는 생산성을 가진다. 대부분의 독선적 대화, 즉 독백은 주체가 임의적으로 확정한 시나리오를 반복해서 강요한다. 반면 침묵의 대화는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계속 틀어가는 길을 만든다.


이은미_한 조각_캔버스에 유채_65×50cm_2020


거기는 아무것도 없는 '어디도 아닌' 곳이지만, 정적이지는 않다. 그곳은 '무한히 움직이고 있는 비어있음'(블랑쇼)의 자리/공간이다. 최근 몇 년 간의 전시부제인 「어떤 곳」 (2019), 「건너편」 (2018), 「멀고도 가까운」 (2017), 「스미다」 (2015)를 보면, 공간적으로 경계에 걸쳐 있는 경우가 많고, 그곳들이 경계인 한 잠재적인 움직임이 있다. 대개 어딘가 가다가 멈춰 서 본 곳/것들이다. 그러나 본 것의 핵심은 뺀다. 이전작품에서 이러한 선택의 극명한 예는 허공에 떠있는 외투그림이다. 외투에서 사람을 뺀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황당한 작품에서 '모자가 사람을 만든다'는 서양 속담처럼 물신적 사고에 대한 비평을 볼 수도 있다. 기표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은미가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기표를 지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작품 「사이」는 단순하게 벽에 붙은 하얀 종이를 보여준다. 뭔가 그려져 있었을 표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벽에 붙은 종이를 그린 캔버스는 동어반복처럼 그림에 대한 그림이다. 거기에는 그림 자체에 주목하기 위해 지시대상을 삭제했던 현대미술의 역사가 있다. ● 그러나 추상화가 말레비치의 화법과 다르게, 종이(삭제된 그림)는 벽에서 살짝 들려서 그 사이의 그림자를 강조했다. 이 '그림'에서 주목할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빈 그림자다. 작가가 이미지를 빼버린 것은 환타지 소설의 원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차원을 넘나드는 거울처럼, 이동하기 위해서다. 재현적 원근법이 외눈박이 시선을 고정한다면, 이 무명의 장소/공간은 '빈 종이처럼 텅 빈 장소였다. 항상 걷고 싶어 했던 곳,...그것은 나의 내면을 찾아가는 여정이다'(2018년 작가노트) 중심이 아닌 주변, 동일자가 아닌 타자, 전체가 아닌 단편, 읽기 보다는 쓰기, 고정이 아니라 과정을 선택하는 이은미의 작품에서 형태 대신에 그림자를 종종 주인공으로 나서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작품 「바닥」에서 약간 볼륨감이 있는 사선은 대상을 뺀 그림자를 보여준다. 원래의 대상에 대한 기억이나 흔적은 없다. 또 다른 작품 「바닥」은 바닥과 벽이 만나는 선을 보여주는데, 꺽어 가로지르는 그림자가 무엇의 그림자인지는 공간만큼이나 오리무중이다



이은미_옆에 있는_캔버스에 유채_91×113cm_2019


작품 「한 조각」은 벽에 비친 반투명한 그림자로, 대상이 아닌 반영 상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보여준다. 그림자는 바로 대상 옆에 비켜서 있는 것이며, 작가는 앞이 아니라 옆을 주목한다. 검은 사각형이 공간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여주는 작품 「짙고 단단한」은 모서리를 만나 굴절되는 빛을 견고한 본질이나 실체처럼 내세웠다. 이은미의 작품은 덕지덕지 많은 칠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작가가 표현하려는 심연이 암시되어 있다. 여기에서 심연은 깊이 있게 칠해지지 않은 표면에 있다. 단지 친숙해서 확고해 보일 뿐인 일상(그리고 상식)은 명확한 좌표축 위에 배열되어 있는데, 이은미의 작품에서는 이 좌표축이 불안하다. 좌표가 없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 선택의 유희를 통해서 다양화된다. 그것은 근대의 절대적 시공간 개념을 상대화시키는 '좌표적 정의'의 공간이다. 세상의 어느 자리/공간을 이루는 구석은 대개 한 개 이상의 선으로 이루어진다. ● 어떤 작품은 매우 많은 선이 교차한다. 어떤 것은 인체의 일부를 떠오르게 하는 육감적인 선의 만남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무엇의 일부인지 가늠하기 힘든 해체적(구성적) 선의 유희가 있다. 모서리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작품 「모서리들」은 무엇인가의 일부인 단편이 전체의 관계를 모호하게 한다. 그것은 공간의 유기적 관계를 해체한다. 모서리를 이루는 면이 화면을 가로지르면서 공간적 단층을 이루는 이 작품은 평면, 즉 추상에 가까워진다. 작품 「층」은 회화라는 창을 가득 메운 층의 일부로, 접힌 면 같은 효과가 있다. 벽과 바닥 사이의 모서리가 짙은 음영이 있는 작품 「벽」은 원근감이 있지만, 모서리를 이루는 선들이 화면의 프레임에 닿아있어 평면성을 강조한다. 세 개의 모서리 선이 모이는 작품 「구석」은 여성의 은밀한 신체 부위같기도 하다. 무엇의 일부인지, 무엇에 사용되는 것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이미지가 한가운데 자리한 작품 「어떤 것」에서, 미지의 대상은 어디선가 들어온 빛을 다양한 강도로 공간에 배분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작품 「벽과 벽」은 물리적 공간에 의한 선과 광학적 효과에 의해 생겨난 선이 거의 동급으로 작용한다. 회화라는 좌표축 안에 또 다른 좌표축들이 설정하는 유희가 행해진다. 회화의 논리로 소화된 기하적 상상력이다. 작가가 장황하게 어떤 기하학이나 형이상학 등을 논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에는 그러한 이지적 감성이 녹아있다. 혹자는 보잘것없는 구석들을 소외라는 근대 특유의 상태를 느낄 수 있다. 막장이라는 어둡고 텁텁한 공간과 비교하긴 그렇지만, 나는 이은미가 그린 세상의 구석들에서 막장을 보았다. 점점 사라져서 탄광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는 사람이 더 많은 이때, 막장은 더 이상 갈데없는 상황을 비유하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된다. 그런데 막장에 가야 귀중한 자원을 캘 수 있으며, 워낙 깊이 들어가다 보니 뭔가 캐냈어도 세상으로 다시 돌아나갈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작업장인 막장이 무덤이 되어, 보석을 품은 채 발굴되는 유해가 가득한 곳이 바로 예술계 아닌가. ● 문예사조사는 그러한 추세가 대세가 된 시대를 근대라고 정확히 규정한다. 근대의 예술가는 지도가 없거나 지도가 더 이상 지시하지 않은 막장에 있다. 그곳에서 예술가들은 길을 만든다. 그 길은 때로 탈주로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애초에 작가가 막장으로 파고든 것이 탈주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중심에 놓여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아름다움은 너무 닳고 닳아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을 때, 탈주는 세상의 지배적 질서가 가리키는 장소의 아래 또는 옆을 향할 수 있다. 작품 「옆에 있는」은 굳게 닫힌 셔터 문을 보여주는데, 셔터의 수평선들의 녹슨 얼룩들은 시간의 침식을 드러낸다. 이 열리지 않는 철문을 통과하기 위한 작가의 전략은 수직선 보다 많은 평행선들을 활주하는 것, 그 평행선 위에 불규칙적으로 침식되어 가는 약한 부분을 활용하는데 있다. 작품이 암시하는 바로는, 길은 앞이 아니라 옆에 있다. 벽과 모서리 등 주로 실내의 구조물 일부가 소재로 등장하는 이 전시의 작품 중, 유일하게 바깥이 암시되는 작품은 「바깥」이다. 그것은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통해 상승 감을 준다.

 


이은미_구석_캔버스에 유채_45×53cm_2019


그렇지만 바깥의 절정인 하늘은 작은 퍼즐조각처럼 화면 한 귀퉁이에 자리할 뿐이며, 정작 작가는 계단참 아래의 음영을 미세하게 표현하는데 집중한다. 칙칙한 시멘트 구조물과 대조되는 화면 귀퉁이의 하늘색은 진짜 하늘과 관련된 색일까. 이전 작품에서 계단이 나오는 「도달할 수 없는」을 염두에 둔다면, 비약이든 단계별 이동이든 초월적 방향의 이동(또는 탈주)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전망이 밝지는 않다. 초월은 관념적이다. 관념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엄밀하게 규정되지 않을 때 손쉬운 타협책이 된다는 점이다. 이은미는 모호한 것을 그려놓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하는 부류는 아니다. 명료함은 작가가 지향하는 또 다른 축이다. 위로의 방향은 초월적이며, 종교의 역할을 계승한 근대예술에서의 선택지이기도 하다. 아래는 그 반대방향이다. 신이 있으면 악마가 있듯이 말이다. 이은미의 작품은 위도 아래도 아닌 옆을 가리킨다. 현대과학이나 철학이 주목하는 뫼비우스적인 시공간 모델은 바로 옆이 역변의 자리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 「그 옆에」라는 작품제목도 있다. 옆은 확실하지만 무엇의 옆인지는 불확실하다. 구상에서 시작해서 이제는 구상과 추상의 경계선까지 진입했지만, 실재감을 위해 여전히 추상으로의 선을 선뜻 넘지 못하는 작가는 대상의 기표를 제거하거나 프레임 조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구상과 추상을 왕래한다. 옆에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또는 중요하지 않지만), 무엇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며, 그 존재는 옆 공간의 위상에 영향을 준다. 현대우주론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상자같이 담아내는 공간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주인공이라는 가설을 내세운다. 안보이지만 영향력이 있는 무엇이 있다. 마치 비어있는 상징처럼. 조너선 스미스는 비어있는 상징을 설명하기 위해 레비 스트로스처럼 영(0)을 예로 든다. 그에 의하면 영(0)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 자체로는 의미가 비어있으면서도 중요한 차이를 표시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숫자들과 결합할 때면 의미로 가득 찬다. 그것은 불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사유에 연속성을 가능하게 한다' 이은미의 작품에서 옆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의미작용을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 구조주의적 사고에 의하면, '그 요소들은 기표이면서도 동시에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요소들로 구성된 체계'인 '무수한 기호들'로 기능한다. 옆은 '순수한 차이내기'의 결과이다. 우리말에 '삐딱선 탄다'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삐딱선은 맞서지 않지만 물러나지도 않는다. 승화도 퇴행도 아니라, 비스듬하게 피해간다. 옆이 중요할 뿐 무엇의 옆인지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정확히는 관심도 없다. 중요한 작품이 걸려 있었을 전시장의 한 구석이 생각나는 작품은 빈 바탕이나 그림자로만 나타난다. 이은미의 '어디도 아닌'에서 부정적인 것만을 보는 것은 편파적이다. 근래 몇 년간 매년 전시해온 그녀의 작품들에는 피난처의 아름다움 또한 포착되어 있다. 작년에 면천읍성 안 그 미술관에서 전시한 「어떤 곳」에서, 시골 쌀 창고가 서있는 황량한 풍경에는 예술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이 있다. 미술에 비해 서사성이 강한 영화에서 지고의 아름다움 장면은 탈주와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이은미_사이_캔버스에 유채_91×73cm_2019


영화 속 탈주자인 델마와 루이스가 '우리 다시는 잡히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주행을 하며 보았을 멋진 풍경이 떠오른다. 그곳은 이 세상의 끝이자 다른 세상의 시작일 터이다. 요즘은 에베레스트 산도 줄 서서 등반할 만큼 번잡하다고 하는데, 가기 힘든 곳에 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색다른 비전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멀리 있는 유명한 곳에 가지 않는다. 일상적 주변, 정확히는 자기가 있는 곳의 옆이다. 위는 초월을 아래는 퇴행을 앞은 대결을 뒤는 추리를 요구할 것이다. 어떤 방향이든 무리수가 따른다. 더 중요하다고 간주되는 것을 하기 위해 투입되는 에너지가 크다. 그러나 이은미가 바라보는 옆은 큰 몸동작이나 힘겨운 이동을 전제하지 않는다. 이 작은 그림들은 세상에 대해서도 그렇게 대응한다. '어디도 아닌' 전에 제시된 세상의 구석들은 CCTV가 있다면 사각 지대에 놓여있을 이상한 자리/공간들이다. ● '어디도 아닌'은 미셀 푸코가 근대의 감시 및 조절 기관인 패놉티콘을 설명하면서 비유한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즉 이전시대 신을 닮은 편재하는 시선에 대응 할 수 있는 장소이다. 거대한 감시의 그물망으로 포착하기 힘든, 포착된다 해도 그 의미와 기능을 알 수 없는 그래서 권력이 간과할 수 있는 자리/공간이다. 여기에 주변적인 타자의 시선이 닿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어디도 아닌' 이 구석진 곳에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중심지향성의 압력이 느슨한 그래서 소외와도 연결되는 해방구이다. 현실보다는 환상으로 간주되는 영역이다. 한 사회의 상징적 우주를 지배하는 시선이 주목할 만한 코드로부터 탈구된 영역이다. 물론 탈영토화는 재영토화될 수 있다. 패놉티콘이 거시적이라면 '어디도 아닌' 구석들은 미시적이다. 우리 속담에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 때의 그런 우묵한 장소이다. 현대인은 집에 있으면 직장에 자리가 있는 양, 직장에 있으면 집에 자리가 있는 양 바쁘게 움직인다. 그러나 집과 직장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 이전 시대처럼 자기가 태어난 집과 천직이 없는 세상이다. 누구와도, 어디에서도 교환 가능한 존재를 요구하는 코드의 세계에서 집과 직장만큼 불확실한 것도 없고, 그 연장선상에서 집과 직장의 연장이랄 수 있는 주체 또한 그러하다. '어디도 아닌', '아무도 아닌' 등과 같은 흐릿한 또는 시적 표현은 2015년 개인전 제목 「스미다」처럼 우리 옆에 어느 날 갑자기 다가와 있다. 이은미의 작품은 이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없어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추동된 탈주의 결과물이었지만, 그것들은 현실을 지시한다. 또는 현실에 도달한다. 현실은 우회로를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는 미지의 대상이지 자명할 출발점이 아니다. 나, 그리고 예술가 또한 마찬가지다. 도달점을 출발점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서 모든 오류와 독선이 야기된다. 이은미가 보고 표현한 세상의 구석들은 일견 잔잔하다. 그 현실은 너무나 단순하고 명료해서 머리가 얼얼하다. 현실은 단순하지만 거기에 내포된 진실은 복잡하다. 이때 예술은 현실을 각성시키는 아름다운 폭력이다. ■ 이선영


Vol.20200421b | 이은미展 / LEEEUNMI / 李銀美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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