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곡 2023 오픈콜-박재훈: 파생 풍경

SAM 2023 Open Call-Park Jaehun: Derivative Landscape

박재훈/ PARKJAEHUN / 朴宰勳 / mixed media

2023_1020 2023_1119 / 월요일 휴관

박재훈 _ 총체적 난국 _3D  시뮬레이션 영상 _3840×3840px, 00:02:44_2023

박재훈 홈페이지_windlessroom.com

인스타그램_@windlessroom

 

초대일시 / 2023_1020_금요일_05:00pm

입장료 / 일반( 18~64) 5,000

단체,  65세 이상, 장애인, 국가유공자, 예술인패스 4,000

초등생 이하, ICOM 무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 월요일 휴관

 

주최,주관,기획 / 성곡미술관

이수균(학예연구실장)_전지희(학예연구사)

이시연(학예연구원)_김태희_박혜정(학예인턴)

전시비평 / 문혜진

 

성곡미술관

SUNGKOK ART MUSEUM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42

(신문로 21-101번지) 2관 제1,2전시실

Tel. +82.(0)2.737.7650

www.sungkokmuseum.org

@sungkokartmuseum

 

성곡미술관은 2021년부터 청년 예술가를 발굴하고 지원하기 위해 성곡미술관 오픈콜프로그램을 운영한다. 2023년에는 이은, 이진영, 박재훈 3명의 작가를 선정했고, 올해 마지막 순서로 박재훈의 개인전 파생 풍경 Derivative Landscape을 개최한다. 박재훈(b.1986)은 스스로를 디지털 조각가, 애니메이터, 시뮬레이터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디지털 공간에 오롯한 하나의 세계관을 창조하는 지난한 작업 과정을 놓고 볼 때, 그를 단지 애니메이터 혹은 시뮬레이터로만 정의하는 것은 섣부른 명명이다. 조물주의 시선으로 사물을 창조하고 가공하고 설치하고 연출하는 박재훈은 때로는 화가이며 조각가이고, 영화감독이며 설치미술가이기도 하다.

 

박재훈_단두대가 있는 방_3D 시뮬레이션 영상_3840×3840px, 00:02:33_2023
박재훈_나뭇가지 방_3D 시뮬레이션 영상_3840×3840px, 00:03:00_2023
박재훈 _ 크롬 나비뼈의 방 _3D  시뮬레이션 영상 _3840×3840px, 00:04:00_2023

박재훈은 포인트 클라우드(point cloud)와 사진측량기술(photogrammetry)을 이용해 현실 세계의 사물을 3D 시뮬레이션으로 번역한다. 그는 직접 사물의 3D 데이터를 만들거나, 게임 개발자들이 만들어 놓은 레디메이드(ready-made) 데이터를 수집한 후 그것을 가공하고 분해하고 재조합해 가상의 디지털 공간에 배치한다. 이렇게 쌓아 올린 조각들은 현실의 구조와 법칙하에서는 성립할 수 없는 무대를 구성하는데, 이것은 현실 세계의 재현인 듯 보이면서도 어딘가 기이하고 인공적인 감각으로 점철되어 있다. 현실보다는 거울 환영에 더 가까운 이 3D 시뮬레이션은 무의식을 떠다니는 사물의 무작위 집합체처럼 보이기도 하고, 꿈을 부유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의 회화처럼 비치기도 한다.

 

박재훈_거룩한 묘시_3D 시뮬레이션 영상_3840×2160px, 00:06:07_2022
박재훈_거룩한 묘시_3D 시뮬레이션 영상_3840×2160px, 00:06:07_2022
박재훈 _ 거룩한 묘시 _3D  시뮬레이션 영상 _3840×2160px, 00:06:07_2022

그의 작업에는 인간 대신 각종 사물이 자리하는데, 이 사물들은 인간이 만들어 낸 동시대 욕망의 총체로서 하이퍼 자본주의(hyper-capitalism) 아래 모든 질서가 종속되고 재편되는 구조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사물을 조합한 무대장치를 스펙타클의 결정체로 만들어 자본주의적 환희의 순간을 연출하는 한편,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파괴된 종말론적 배경을 병치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파멸과 비극을 암시한다.

 

박재훈_빙하를 위한 제의_3D 시뮬레이션 4K 영상_3840×2160px, 00:04:16_2022
박재훈 _ 표류하는 사물들 _3D  시뮬레이션 영상 _1280×1280px, 00:06:00_2023

박재훈의 관심사는 실로 방대한데,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물들, 예컨대 일론 머스크의 스타링크 위성이나 물류대란을 상징하는 화물 컨테이너, 폭발한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가스 송유관, 핵폭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붕괴한 건물의 잔해들까지 세계의 사회, 경제, 정치,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과 이를 상징하는 사물들이 화면 속 거대한 제단을 이룬다. 이것은 또한 미술사의 풍부한 상징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작가는 작품 여기저기에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에서 가져온 도상의 상징과 은유를 흩뿌려 놓고, 이는 한데 모여 기묘한 무대 장치를 구축한다. 화면 넓게 퍼진 내러티브는 마치 동시대를 반으로 갈라 자른 듯,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숨 막히는 횡단면을 드러낸다.

 

수학적 알고리즘에 의해 철저히 계산된 가상의 물리 현상들은 개연성 없이 병치된 사물들과 함께 일상적 공간을 초현실적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모든 것이 재화로 귀결되는 자본주의 법칙이 깃든, 아름답게 다듬어진 사물들의 조합은 시적이기에 역설적으로 기괴하다. 그의 작업은 종말을 향해 다가가는 이 시대 인류의 자화상이다. 박재훈은 종교가 가지던 위상마저 획득해 버린 자본주의의 파생 풍경을 기록하며 인류의 욕망이 가는 길은 어디인지를 질문한다. 성곡미술관

원피스아트 : 걷는 사람 THE ONE PIECE OF ART : WALKER

임춘희/ IMCHUNHEE / 林春熙 / painting

2023_0906 2023_1028 / ,월요일 휴관

임춘희 _ 걷는 사람 11_ 캔버스에 유채 _117×91cm_2023

임춘희 인스타그램_@chunheeim

 

초대일시 / 2023_0913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1015,22_01:00pm~05:00pm / ,월요일 휴관

(1015,22일만 일요일 운영)

 

갤러리 아트비앤

Gallery artbn

서울 종로구 삼청로 22-31 2

Tel. +82.(0)2.6012.1434

www.galleryartbn.com

@gallery_artbn

 

아트비앤 원피스아트 7번째 전시로 임춘희 개인전 걷는 사람96일 부터 1028일까지 열립니다. 이번전시에는 작가가 오랜 시간동안 작업실 주변을 산책하며 변화하는 자연 풍경과 환경들을 사진에 담아내고 그 기록들을 통해 작가만의 새로운 감성의 교감을 통해 작업으로 표현해 내는 과정을 담은 작품을 소개합니다.

 

임춘희 _ 걷는 사람 1-6_ 파브리아노지에 유채 _56×42cm×6_2022

작가의 시선에서 보는 일상의 풍경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 되었고, 매일 단순히 휴식을 위한 산책이 아닌 생명의 간절한 의지로 한걸음 내딛으며 산책길에 나선다. 그 길에 담아낸 풍경 사진들은 기록과 같이 쌓여 가고 우리는 그 발걸음에 따라 새로운 여행 길을 함께 걸어간다. 작가는 익숙한 작업실 주변을 매일 반복해서 걸으면서 익숙한 주변의 나무, , , 하늘, 노을, 바람, 야생화등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의 모습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모습들은 흔해서 어쩜 우리들은 그냥 지나쳐 버리게 되고 의미를 크게 두지 않는 사물들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지며 애정을 두고 간절히 원하는 것을 투영하듯이 반복적으로 어떤 여정을 떠나듯이 산책을 하며 눈에 담아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작가의 회화 작품은 보는듯 깊은 감성과 교감이 일어나는건 바로 작가가 집중한 시간의 이야기와 마주하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 작가는 산책을 통해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인간으로서 가야할 관계 속 바른길을 가듯 그 길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듯한 느낌을 작업을 통해 보여준다. 조심스런 붓칠의 끝은 항상 그 에너지와 갈망의 거친 흩날림이 가득하고, 어디론가 향해 가려는 꿈틀댐이 느껴진다. 감추어진 표현 속에 눈망울은 더욱 간절해지고 웃음과 슬픔이 섞여 보이기도하고, 해학적으로 보이기는 거침없는 모습이기도 한 것은 작가만의 정서적 흥취가 잘 담아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임춘희_걷는 사람9_캔버스에 유채_80.5×80.5cm_2021~3
임춘희 _ 걷는 사람 12_ 캔버스에 유채 _100×100cm_2023

이번 전시에서는 한점의 작품과 함께 소품과 종이위에 유화작품 6점이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영상 작품으로 작가의 산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작가가 작업실 주변을 걸어가는 길을 작가의 발의 시선으로 영상미를 더해 제작하였다. 영상공동제작으로 아트비앤 기획, 스피키비주얼컬쳐 제작으로 완성되었다. 갤러리 아트비앤

 

임춘희_걷는 사람10_캔버스에 유채_53×45cm_2023
임춘희 _ 걷는 사람 8_ 캔버스에 유채 _53×45.7cm_2023

몸이 아파지면서일까? 불완전함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의 몸은 아프고 사회, 세상 속에서 맺고 맺어진 관계로부터 허물어진다. 생명은 나비처럼 팔랑팔랑 가벼워. 나는 불완전하다. 생명은 찬란한 불꽃처럼 타올라 화려하면서도 곧 사그라들어 꺼지는 죽음과도 친구. 일어서서 걸어. 이리로 갈지 저리로 갈지 여전히 길을 잃고 헤맨다. 힘없고 나약한 불완전한 존재. 자연과 사람 우리 모두 연결되어 있다.

 

임춘희_원피스아트 : 걷는사람展_갤러리 아트비앤_2023

그림을 그리면서 느끼며 깨닫고 나를 본다. 바람 한 점 없는 황량한 벌판에 혼자다. 간혹 애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자유로움을 만난다. 늘 그 순간들을 기억하며 갈망한다. 너무 투명해서 별거 없는 삶이다. 1월 말 오른쪽 고관절(인공관절) 수술 후 몇 개월이 지나도록 작업할 힘이 생기지 않아서 이번 전시를 앞두고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다시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되면서 그림에 집중하며 스며들 수 있었기에 소중한 시간, 참 감사하다. (20238) 임춘희

 

THE ONE PIECE OF ART 원피스아트 ● 『THE ONE PIECE OF ART 원피스아트는 아트비앤의 전시기획명으로 선정된 작가의 한점 작품과 작품제작영상을 전시, 한점의 작품에 집중하며 작가의 작품세계를 보다 심도있게 조명하는 전시형 아트프로젝트입니다. 2021SCRATCHER 신선주 개인전을 시작으로 ASSEMBLER 박천욱, BLUE CREER 김세중, DEMETER 김나리, SILHOUETTE 주연, GOLDEN WALKING MAN 이상원까지 6인의 전시를 개최, 앞으로 원피스아트 프로젝트를 이어가 총 10인 원피스 아트 프로젝트를 완성해 갈 예정입니다.

사진가 최민식선생께서 돌아가신 지가 벌써 10년이 되었다.

최민식 선생 서거10주기를 맞은 심포지움이 지금 다시, 최민식을 바라보다는 제목으로

지난 20일 오후4시부터 부산 F1963도서관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부산광역시부산문화재단이 주최하고 SOOYOIL이 주관한 이날 심포지움에는 이광수교수의

최민식 사진의 작품성: 평론가와 대중의 평가 차이를 중심으로란 발제로 열렸다.

사진가 이동근씨의 사회로 진행된 심포지엄 패널로는 사진가 김문호, 문진우, 강제욱씨가 나섰고,

20여명의 사진인들이 참석했다. 참가한 사진가 중에는 박태진, 배정선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눈에 띄었다.

 

  고 최민식선생은 50여년에 걸쳐 민중의 삶을 기록해 온 우리나라의 대표적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전통적 스트레이트 사진으로 15만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한 평생 작업해 온 휴머니즘이 대중에게 큰 감동을 일으키며,

한 시대를 증언한 훌륭한 사진가로 자리매김했으나, 최민식선생의 사진세계를 제대로 조명한 자리가 없었다.

 

  서거 10주기를 맞아 최민식 선생의 작품세계와

이를 둘러싼 다양한 관점을 나누며 토론하는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열쇠구멍으로 본 도둑사진이라거나 소재주의라는 몇몇 사진가들의 잘못된

비판에 따른 해명은 물론 평소 선생의 삶에 따른 여러 가지 이야기도 나왔다,

루카치가 말한 전형을 통한 예술의 가치를 이룩하며 카타르시스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루카치가 말한 예술은 인간의 삶을 명료하게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사회적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부분에서도 정확하게 일치했다.

선생의 사진만큼 노동운동이나 여러 가지 사회적 쟁점에 사용된 분도 없었다.

박정희정권 초기에는 빈민사진으로 외국원조를 얻는데도 일조하는 사회적 기여도 했다.  

대신 북한으로 흘러들어가 악용되기도 했지만...

한참 후에는 선생을 주축으로 김문호씨가 리얼포토’(사진집단 사실)를 창립하여

사회적 참여에 적극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평론가말로는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중적이고 통속적으로 수준이 낮다지만,

페널로 나선 강제욱씨는 예술이 인문학 위에 있지 않다며,

한 평생 인간애를 다룬 최민식선생의 사진 자체가 사회사적 의미고 작품성이라고 말했다.

나 역시 공감하는 말로, 객관성을 요하는 사진의 재현보다 작가의 주관이 우선되는 표현이라면

사진보다 미술에 해당된다는 생각이다. 카메라나 붓은 대상을 표현하는 도구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찍히는 사람에게 허락 받지 않고 찍은 열쇠구멍으로 본 사진이라 비하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생각해야 한다. 유학에서 돌아 온 이들에 의한

새로운 사진조류가 형성되기 이전의 사진가들은 거리의 스냅 촬영이 일상적이었다.

순간 포착으로 자연스러운 표정이나 동작을 잡아야하는데,

본인에게 물어 본다는 자체가 셔터찬스를 놓치는 것이다.

오죽하면 원로사진가인 고 임응식선생은 초대전 작가와의 만남에서

대표작 구직을 연출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작가의 주관을 높게 평가하는 시류가 빚은 촌극이었다.

 

  요즘이야 초상권문제가 크게 작용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초상권 운운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골 노인들마저 초상권을 말하는 오늘의 현실도 문제다.

사진이 악용되어질 때 초상권을 거론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심도가 얕은 준망원 렌즈를 표준렌즈보다 더 많이 사용하는 것도 탓할 문제는 아니다.

사람을 찍어 부각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렌즈가 105미리에서 130미리 정도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 아니던가?

오히려 유행처럼 광각렌즈로 대상을 왜곡하는 게 더 문제다.

어떤 렌즈에 의해 어떤 방법으로 찍던 그것은 작가가 추구하는 접근방법일 뿐이지,

정해진 원칙이 어디 있는가? 작가마다 접근방법이 다르듯이,

작가의 개성에 따른 개성적인 사진이 많이 나오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닌가?

 

  사람을 찍는 사람에게 소재주의라는 말도 터무니없는 비방이다.

나 역시 소재주의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그러면 그런 사진은 누가 기록할 것인가?

 

최민식 사진상 부정심사 의혹을 밝히는 자리에 불려 나온 당시 운영위원장과 심사위원

문제는 열쇠 구멍 사진이라며 최민식선생을 비방한 자들이 최민식 사진상을 운영하는 자리를 차고앉아,

선생이 주창했던 휴머니즘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터리 사진에다 상을 주며 끼리끼리 단물을 빨아 먹었다는

사실이다. 사태가 확대되어 최민식 사진상 자체가 없어지게 상황까지 갔는데, 최민식 사진상

부정 심사 의혹을 밝히는 자리에 나와 상의 권위를 위해 가난한 친구에게 주었다는 개소리를 지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몰상식하고 염치없는 인간들이 대학 사진 교수나 힘 있는 자리에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최민식선생은 열 네 권의 개인사진집을 낼 정도로 열심히 기록한 사진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로 개인사진집을 낸 분이다.

사진평론가 였던 고 이명동 선생께서도 최민식선생 사진을 극찬했다.

뛰어난 직감력으로 대상과 거리의 개념을 없애는 독자적 시각이라며,

인간의 내면적 리얼리티 핵심에 접근한다고 말했다.

 

  1967년도 영국사진연감에서 스타작가로 지명하며, 선생의 사진으로 특집을 만들 정도였다.

국내외로 유명도가 높아, 그때부터 동료나 선배 사진가들의 시기와 질투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러한 훌륭한 성과를 무시하는 후배들의 비방에 기가 막힐 뿐이다.

 

  발제자와 패널의 많은 의견과 해명도 있었으나, 귀가 어두워 자세히 알아 듯 지 못해 죄송스럽다.

나 역시 발언할 시간을 주었으나 관중공포증으로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해 이 면을 빌어 말한다.

 

  나는 최민식선생 때문에 사진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선생의 모든 사진관에 동조하지만

선생과 같은 어프로치는 하지 않는다.

때로는 거리 스냅도 하지만, 모르는 분의 사진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찍힌 사람의 이름을 밝힌다. 이름 없는 사진은 유령사진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대상 속으로 들어가 작업한다.

 

  최민식 선생을 알게 된 것은 70년대 중반인데, 평소 음악을 좋아 하셔서 선생은 우리 집 단골손님이셨다.

어느 날 휴먼사진집 한 권을 선물로 주셨는데, 받아보니 너무 감동적이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힘이 더 강하다는 생각에 사진을 시작했는데, 때로는 후회스러웠다.

한곳에 빠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이다.

사진을 하며 장사는 항상 뒷전으로 밀려났는데, 매일같이 가게를 종업원에게 맡기고 다녔으니,

잘 되던 가게지만 손님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선생께서 별일 없는 날엔 주 촬영 무대인 자갈치시장에 나오셨다.

한 번은 촬영하는 중에 선생과도 가까운 분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은 것이다.

같이 장례식장 부터 가자는 말에 한마디로 거절했다.

죽고 나서 가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며, 그 시간에 사진이나 열심히 찍으라고 말했다.

내가 죽어도 문상오지 말라며, 죽고 나면 말짱 도루묵이라 했다.

선생은 카톨릭 신자였으나,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현실적인 분이셨다.

 

  촬영이 끝날 무렵에는 남포동의 음악다방을 거쳐 우리 집에 들리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술을 많이 드시진 않았지만, 젊은 손님들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사진 하는 분보다 화가나 음악인들과 자주 어울렸다.

 

  어느 날 최민식선생께서 부산에 사진학원을 차리면 어떻겠냐는 질문에 귀가 번쩍 띄었다.

사진학원을 차리기 위해 급매물로 나온 확대기 세대와 기자재부터 구입해 놓고 서울로 시장조사를 간 것이다.

서울 낙원동에서 민태영씨가 운영하던 한국사진학원3개월 수강 신청을 하고 세밀하게 알아 본 것이다.

가르치는 커리큘럼도 신통 찮았지만, 사진학원 운영이 어려웠다.

그 사진학원은 그나마 군대 사진병으로 갈 수 있는 특전이라도 있어

현상유지라도 한다는 말에 의욕이 꺾이고 말았다.

 

  결국 사진학원은 포기하고 사진 작업에만 매달렸는데,

월간사진황성옥대표의 요청으로 월간사진클럽 부산지부를 창립하게 된 것이다.

지도교수로 최민식선생과 김복만선생을 번갈아 모셨으나, 작업에는 도움 되지 않았다.

찍어 온 사진들을 살펴보며 트리밍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번은 서울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같은 회원이었던 김석중씨와 야간열차를 타고

상경한 적이 있었는데, 최민식 선생을 나무라며 밟고 넘어서야 한다는 당돌한 이야기를 했다.

그 친구도 초창기에는 정신병동을 찍어 사진집을 만들기도 했는데,

그 이후에는 김아타로 이름까지 바꾸며 표현주의로 돌아섰다.

 

  결국 가게를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가 처음으로 나간 곳이 월간사진이었다.

최민식선생은 서울 오실 때마다 만났으나, 수시로 원고청탁을 하는 등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한번은 서울 올라와 인쇄소 맡겨야 한다며 사진 프린트 잘 하는 곳을 물었다.

당시 인사동에 작업실이 두었던 김영수씨를 연결해 주었는데, 비용이 만만찮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선생의 사진 프린트는 콘트라스트가 너무 강했다.

콘트라스트가 강하면 사진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사진 계조가 고르지 못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오래된 습성이라 잘 고쳐지지 않았는데, 사진집 찍을 때마다 애로가 많았단다.

 

  삼년 후 월간사진을 그만두고, ‘한국사협회지편집장으로 갔을 때는선생의 예술론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 당시 원고지 40매에 가까운 원고를 매달 우편으로 보내왔는데,

선생의 독서량이 상당하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한번은 지방에 촬영하러 갔다가 카메라 가방 채 몽땅 도둑맞은 적도 있었다.

너무 난감하여 카메라바디와 렌즈 번호를 적어 분실공고를 회지에 게재했는데,

최민식 선생께서 며칠 뒤 서울 오실 때, 안 쓰는 카메라가 있었다며

니콘FM 바디와 105미리 랜즈 하나를 갖다 준 것이다.

사진 찍는 사람이 잠시라도 카메라가 없으면 안 된다는 선생의 말씀에 코끝이 찡했다.

선생의 사진에 대한 열정은 진작 알았으나, 인정이 많다는 것은 그 때 처음 알았다.

 

  선생을 만나며 지켜 본 바에 의하면 나와 공통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인간을 향한 주제의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음악을 좋아하거나 무엇이든 한 번 시작하면 포기하지 하는 것도 똑 같았다.

예술가들의 풍류에서 빠질 수 없는 화류도 마찬가지다.

 

  한 번은 사진클럽 회원 중에 혼자 사는 여성회원 한 분이 있었는데,

식사나 한 번 같이하자는 편지를 보낸 것이 화근이 된 것 같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혼자 사는 처녀가 아니라 같은 회원 분과 동거를 하고 있었는데,

성격 급한 그 친구가 최민식선생께 전화를 걸어 사진판에서 매장 시키겠다고 겁을 준 모양이다.

그래서 나에게 말 좀 해달라며 장문의 편지를 적어 보낸 것이다.

별 문제는 없었지만, 지금으로 치면 미투의 원조가 아닌가 생각된다.

연서를 보낸다는 자체가 얼마나 로맨틱한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주절주절 생각나는 대로 적다보니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다시 한 번 선생의 명복을 빈다.

 

사진, / 조문호

 

       양상현교수가 미국 뉴저지주 럿거스대학교 도서관에서 찾아 낸

그리피스 컬렉션 사진전이 지난 18일부터 인사동 갤러리인덱스에서 열리고 있다.

 

  140년이란 긴 세월의 실타래를 되돌려 놓은 장면 장면들은

하나같이 낯설고도 친숙한 우리 선조들의 삶의 풍경이 담긴 진귀한 모습이었다.

 

  지게에 걸터앉아 농가의 정겨움을 담은 사진에서부터

종로 대로에 우마차가 다니는 부감사진, 옹기를 가득 짊어진 옹기장수,

거울 앞에서 선 기녀 등 하나같이 호랑이 담배 피우던, 말로만 듣던 우리 선조들의 생생한 모습이다.

 

  이 사료들은 그리피스 교수에 의해 수집되어 도서관에 잠든 것을 2008년 양상현 교수가 찾아낸 것이다.

 

일주일에 걸쳐 찾았다는 500여장의 사진 속 장면 장면을

역사적 사실과 대조하여 주제별로 분류한 후 몇 편의 학술논문으로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2015년 양 교수의 갑작스런 타계로 사장될 위기에 처한 것을

그의 부인 손현수 교수가 공개하기에 이른 것이다.

 

  기록의 중요함을 다시 한 번 절감케 하는 소중한 전시가 아닐 수 없다.

 

78년 동아일보에서 발행한 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이나

86년 서문당에서 발행한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등 몇몇 사진집에서

흐릿한 당시 풍경을 보긴 했으나, 확대 프린트된 사진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한 그리피스 컬렉션전은

인사동 갤러리인덱스에서 30일까지 열린다.

 

사진, / 조문호

 

REFLECTION

유근택/ YOOGEUNTAEK / 柳根澤 / painting.installation

2023_1025 2023_1203 / 월요일 휴관

유근택_반영_한지에 수묵채색_144×101cm_2023

 

유근택 홈페이지_www.geuntaek.com

인스타그램_@yoogeuntaek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현대 본관

GALLERY HYUNDAI

서울 종로구 삼청로 14(사간동 82-1번지)

Tel. +82.(0)2.2287.3500

www.galleryhyundai.com

 

유근택, 또는 회화의 반투명성에 관하여 유근택의 회화 작품을 처음 본 것은 2000년 가을이었다. 이따금 방문하는 교외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젊은 모색 2000-새로운 세기를 향하여(2000)라는 그룹전에 전시된 6점의 수묵화 연작 긴 울타리(2000)가 그것이다. 나는 기민한 감식안을 지닌 사람은 아니지만, 이때만큼은 굉장한 작품을 보았다고 즉시 생각하였고 고양감을 누를 길이 없었다. 이후 이 화가에 대한 극찬하는 내용을 담은 평론을 세 번이나 썼다. 이번에 쓰면 네 번째가 된다. 외국 작가에 대해 여러 번 글을 쓰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글쓰기 취향을 조금 바꿔 반세기가량 한국의 바로 옆 나라에서 비평 활동을 지속해 온 나의 비평의 배경과 기준을 다시금 표명하면서, 왜 유근택의 회화가 나에게(우리에게) 특별하고 귀중했는가를 밝히고 싶다. 기억이 가물가물 흐려지고 있는데 반세기를 되짚어 보는 일이므로, 사실관계가 어긋난 내용이, 마치 대나무 바구니에서 낱알이 쏟아지듯 등장한다 해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길 바란다.

 

유근택 _ 창문 _ 한지에 수묵채색 _146×103cm_2022
유근택 _ 말하는 정원 _ 한지에 수묵채색 _149×101cm_2020

내가 미술비평가 활동을 시작한 1970년의 일본은 구질서를 비판부정하는 전위적인 분위기가 한창 고조되어 두 가지 쟁점이 치열하게 부딪치는 상황이었다. 한편으로는 도쿄비엔날레 '70의 기획을 맡은 비평가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1960년대부터 전개되어온 복잡다단한 반예술의 동향을 동시대 서구의 최첨단 경향을 참조하면서 탈감정화탈지역화하여 전통예술의 방법론에 따르지 않는, 물질적 무질서의 논리화로 정리해 제시하여 비평가로서 유례없는 명망을 얻었다. 다른 한편 몇몇 동료들과 더불어 예술사상의 문명적 틀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나카하라가 참조한서구 최첨단 경향의 예술 상황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도, 도리어 서구 근대의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는 이원론적 세계관 그 자체를 예리하게 비판하며 '모노하(もの)' 의 중심축을 지탱한 존재로 평가받는 한국 태생 이우환의 활동이 있었다. 이리하여 나카하라 유스케도 이우환도 일본의 1970년대 이후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셈인데, 두 사람에게는 각각 시대 특유의 한계가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나카하라는 자신이 주도했던 개념주의적 이론의 공격을 받고 주춤하였고, 마지막까지 '회화'와 진지하게 다시 대면할 수 없었다. 이우환도 다시 한번 회화를 서구 근대와 동일시하여 단죄한 일이 있었지만, 다행히 그의 내면의 유연한 예술가 자질 덕분에 1973년경부터 붓질의 반복으로 화면을 화가의 자유로운 움직임이나 물질의 단순한 드러냄에서 구해내는 양가적인 작품세계를 성취하는 데 성공했다. 나카하라의 도쿄비엔날레 '70에 협력했던 나는 이우환의 극단적인 반서구근대주의에 동조하기 어려웠고 다소 반감마저 느꼈으나, 본디 회화조각에 강한 정열을 지닌 인간이었기에 이우환이 보여준 양가적 회화의 개안에는 일찍이 공감하였고 금세 그의 비평적 지지자가 되었다. 이우환의 이러한 근사한 전진에는 당시 내가 줄곧 주창한 예술 실천의 반복성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다소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좀더 확실한 것은 같은 시기(1970년대 초) 서울에서 이방인 이우환과 깊이 교유한 박서보의 작업방식, 즉 캔버스 바탕에 한지를 덧바르고 밑칠한 뒤 반복적인 긋기로 충돌과 간섭을 동일한 양가적 화면으로 구축해온 이른바 '묘법(描法, Ecriture)' 회화와의 동질성을 지적할 수 있다. 그 후 박서보와 이우환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단순한 추상화가에 그치지 않은, 의미 깊은 양가적 회화의 수행자로서 중요하게 다뤄져왔다. 그들의 진가는 오늘날 한국 특유의 회화표현으로 전세계에 알려진 단색화의 집단적 양식성을 훌쩍 뛰어넘는 결과로 나타났고, 회화의 현대적 의의를 단둘이서 선도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유근택 _ 거울 _ 한지에 수묵채색 _150×104cm_2022
유근택_말하는 정원_한지에 수묵채색_146×203cm_2019

때는 1970년대였다. 미국 회화에서는 미니멀리즘의 한계를 극복해낼 만한 전망이 부재하였고 여전히 '불투명성의 회화' 등이 거론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마오주의(Maoism) 영향으로 표현과 물질의 모순을 중시하는 풍조가 강해졌는데, 회화 그 자체의 고유성을 모색하는 자세는 드물었다. 그리고 어느 지역에서든 회화는 임의로 시도된 적이 있더라도 추상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본과 한국의 현대미술도 이우환과 박서보의 귀중한 주도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추상 바깥으로나아갈 수 없었다. 20세기라는 시대, 그것이 한계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이한 일인데, 이런 '회화 빙하기'가 한창이던 19774월 나는 잡지 미술수첩(美術手帖)편집부를 설득하여 회화에 관한 특집을 마련했고, 거기에 회화에 관한 10(絵画する10)이라는 에세이를 기고했다. 당시 사람들은 회화가 이미 한물갔다고 생각했고 그 대신 '평면'이라고 부르는 것이 '동시대 시류'라고 여겼다. 편집부가 타협해서 특집 타이틀을 회화의 평면과 평면의 회화(絵画平面平面絵画)라고 붙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그평면은 어떤 의미로든 추상을 뜻한다는 데에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말하는 '회화' 또한 형상이나 이미지를 전제로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선 제압하는 태도로 '회화의 본질은 반투명성이다'라고 밀어붙였다. 좌담회는 기묘하게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도쿄비엔날레 '70의 성공 이후 위세가 당당했던 나카하라 유스케는 뜻밖의 화제(회화의 부활)에 의기소침한듯싶었고, 젊은 두 명의 비평가는 딴청 부리며 쓸데없는 잡담을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최대의 난적이라고 생각했던 후지에다 데루오(藤枝晃雄)가 쉬는 시간에 옆에 있던 나에게 "회화가 반투명이라니, 괜찮은 말이군요"라고 말을 건넸다. 늙은 평론가의 감상적인 옛날 얘기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회화 부재의 30년 동안 구상을 제외한 '회화'를 놓고서 이런 논의를 진행했던 것 자체는 지금 돌이켜보니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는 형상과 이미지를 결여했다고 해도, 회화의 본질을 반투명이라고 보는 논의의 근거가 조금도 낡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범속한 것을 좋아하는 비평가라서 예언자적 부류를 믿지 않는다. 허나, 회화의 반투명성은 바로 지금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반투명성'이라는 말로 나는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 후 10년이 흐른 뒤 19866, 박서보의 도쿄화랑 개인전에 도록 평론글에 나는 이렇게 썼다.

 

유근택 _ 반영 _ 한지에 수묵채색 _100×205cm_2023
유근택 _ 반영 _ 한지에 수묵채색 _145×102cm_2023
유근택 _ 반영 _ 한지에 수묵채색 _146×102cm_2023
유근택_봄 - 세상의 시작_한지에 수묵채색_242×206cm_2023
유근택_봄 - 세상의 시작_한지에 수묵채색_250×206cm_2023 "

뛰어난 회화는 왜 반투명인가. 마티에르(매체의 물질성)의 불투명한 벽이 드러내는 물자체의 발현을 실존적으로 긍정하는 즐거움과 그 벽의 저편에 혹은 바로 앞에 시각이 투명하게 비쳐지고, 때로는 뜻하지 않은 비전이 생기는 즐거움을 둘 다 향유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 회화는 이 양극단의 어느 쪽이든 한쪽에만 치우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모노크롬 회화는 불투명성에 치우친 예이며, 삽화나 개념도 같은 그림은 투명성에 치우친 결과다그 중간의, 반투명성의 애매함을 견뎌야만 한다. 그애매함, 벽도 풍경도 아닌, 말하자면 창()이 지닌 양가성에야말로, 회화의 깊이, 예측 불허(변덕스러움), 리얼리티, 허구성, 요컨대 회화의 풍요로움의 일체가 깃들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쓴 다음에도 일본과 한국의 풍경은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 서브컬처의 성공에 가려진 회화를 점점 잊어버린 일본에서는 1960년대 이후 그래픽 디자인계의 인기 스타였던 요코오 다다노리(橫尾忠則)1982년 갑자기 피카소나 피카비아를 모방하며 창조적 회화를 그리는 작가가 되려고 의욕을 보였는데, 그 본령이 발휘되기까지 1988다원우주론, 나아가서는 2000년 이후의 Y자형 골목길시리즈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래도 과감하게 고전미술의 성과를 끌어들여 형상과 이미지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 요코오의 회화 영역안에서의 횡단은 일본 현대미술계의 기이한 풍경이었다. 희귀종이었던 요코오를 예외로 놓고 생각해보면, 일본은 여전히 이우환의 양가적 추상회화 이상의 가치를 몰랐던 것이다. 이미 아셨을 것이다. 2000년 가을, 유근택의 작품과 만난 일이 내게 어느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나. 이우환과 박서보에 의해서 가까스로 견지되어 온 회화의 반투명성이라는 미적 요소가, 그와 맞먹는 수준의 의미 있는 붓질과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한층 솔직한 구상 표현의 붓질로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고 깊이 있는 성찰로서 성취된 것이다. 당시의 유근택 그림은 앞서 박서보 평론에 서 언급했듯이, 필시 "벽도 풍경도 아닌, 말하자면 창이 지닌 양가성"으로 살아 숨쉬었다. 작업실 창문을 통해 정점관측하듯이, 매일 관찰하는 숲속 오솔길과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 일상에서 쉽게 마주치는 시시하고 밋밋한 것들은 화가와, 화가가 매일 산책길에서 관찰하는 풍경 사이의 보이지 않는 창틀에 의해 (그리고 그것을 대변하는 울타리에 의해) 이원화되며, 그 이원성이 작가와 대상세계와의 말소하기 어려운 시간의 엇갈림산 자와 죽은 자의 엇갈림에 이르는 거리으로서구조화되고 있음을 정감 있게 보여준다.

 

유근택_분수_한지에 수묵채색_258×206cm_2023
유근택_분수_한지에 수묵채색_258×206cm_2023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그려진 풍경 사이의 치명적이고 비극적인 거리를 의식하는 것은 이 화가의 타고난 예술적 감성에서 기인한 듯싶다. 우리는 화가가 초년생 시절에 그린 놀라운 대작 유적-토카타(질주)(1991)에서 그러한 거리의 인식을 이미 명확하게 회화적으로 처리했음 알고 있다. 할머니에게서 매일 들었던 한국 시민의 비극적인 역사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이 대형 작품이 드러내는 것은 결코 말해진 이야기(narrative)가 아니다. 이야기로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 차원을 내포한 사건에 대한 통찰로 구성되어 회화적으로 가공된, 한 편의 창작물이자 비극이다. 이 벽화 같은 작품의 첫 부분과 끝부분이 그리스 비극에 으레 붙는 코러스를 연상시키는 무수한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로 메워졌고, 더욱이 고문을 연상시키는 장면에 겹친 부처의 얼굴 등, 사상(事象)의 단일성일원성을 넘어선 핵심적인 필치가 회화 특유의 중층적 생기를 자아낸 것을 놓칠 수 없다. 이 작품 이후 일상생활의 관찰과 공상, 허구에서 포착해낸 다양한 주제형상이미지가 유근택 작업에 엄청나게 중요한 피와 살이 되었다. 그러한 작품들을 나는 비평가로서 이례적이지만 놀라움과 감동으로 받아들였다. 그림이 극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형상 묘사의 밀도가 뛰어나서 그런것도 아니다. 농밀한 동아시아적인 전통적인 수묵과 과감한 현대적 도시 풍경이 편견 없이 공존 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화면에 끌어들인 모든 요소들이 서로 녹아들 수 없는 시제(時制)를 지니며, 말하자면 내재적인 상호 비판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는 사람과 그려진 것 사이의 불가피한 시간차를 메울만한, 그러한 붓질의 투입. 그의 회화는 결코 하나의 이야기로 끝맺은 적 없고, 끝나지 않는 세계로의 관여로 감동을 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유근택의 작품에서는 그림이 자기 그림을 비판하며, 그 비판의 척력(斥力)으로 화면은 잘 보인다고도, 보이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반투명의 중간지대로 부유하듯, 가상성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만 예로 작품을 다뤄보겠다. 2007년 이후 이따금 제작된 자라는 실내시리즈. 사람이 사는 넓은 서양식 거실과 그 거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공간을 다 채운 채로 부유하는 다양한 종류의 자잘한 나뭇가지. 살아있는 인간의 의지나 감정을 무시하고 끝없이 자라나는 식물의 거대한 군집과 평온한 거실 공간 사이에 기묘한 휴전 상태가 성립한다. 두 개의 공간 표상과 생명 원리가 명 료하게 이층으로 나뉘어 서로가 서로의 생존 원리를 위협하면서 어느 한쪽에게 일방적인 지배권을 내맡기지 않는다. 그림을 보는 사람은 어디에 자리 잡으면 좋은가. 어느 쪽으로 리얼리티를 느껴야 하는 것인가. 무언가 보인다는 것의 이중성, 의미를 지닌 공간의 비결정성.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잠재된 양가적 애매함을 이토록 명확하게 제시해 보인 회화가 일찍이 있었던가. 이와 같 은 회화를 앞에 두고 우리는 일원적으로 말하는 것의 무의미함을 깨달으며 세계의 깊은 다양성과 초월성으로 이끌리는 게 아닐까.

 

유근택_자화상_한지에 수묵채색_40×29.5 F 56×45.5×4cm_2018

형상과 이미지를 과감하게 도입한 방식이 유근택의 작품세계를 새로운 영역으로 이끌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회화의 반투명성을 고양시킨 내재적 비판은 1980년대 이후 이우환의 기상학적 회화나 1990년대 이후 박서보의 이른바 '지그재그' 회화에서 원리적으로 수행된 방식이었다. 유근택의 등장이 세대의 단절이 아닌, 좀더 뜻깊은 발전적 계승을 성취한 결과라고 한다면, 그것은 한국이나 일본이 경험할 수 있었던 멋진 역사적 쾌거가 아닐까 생각한다. 미네무라 도시아키 번역 / 김정복

 

유근택_창문_한지에 수묵채색_146×101cm_2022
유근택 _ 폴과 해변 _ 한지에 수묵채색 _128×140cm

 

나무아트의 한국현대목판화 발굴 프로젝트 두 번째 작가로 이인철씨가 호출되어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개막되었다.

 

이 전시는 이인철씨의 80년대 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독자적인 판화작업으로,

사진 몽타주처럼 극사실로 재현한 작품이다.

 

오래전부터 그의 명성은 익히 들은 바 있으나 고작 한두 점을 본 것에 불과한데,

페이스북에 소개된 예고편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연한 칼의 흐름에 의한 정밀한 형태감에서

작가의 강렬한 저항감을 느껴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시 개막식을 맞은 지난 18일 전시를 보러 가기 위해

찌뿌둥한 몸을 끌고 남대문사우나에 가서 잠시 쉰다는 게, 그만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눈을 떠보니 개막 시간이 지나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이미 많은 분은 뒤풀이에 가고 작가 이인철을 비롯하여 김진하관장, 최석태, 김도수,

김영진, 박진화, 황준연씨 등 10여 명이 남아 전시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의 초창기 작품은 한두 점 보았으나 이렇게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대하는 것은 처음이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마치 ‘87 민주항쟁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아련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는데,

군부 시절보다 더 음흉한 검부 시대라 다시 거리로 뛰쳐 나가고 싶었다.

 

산적처럼 생긴 작가의 외모처럼, 그의 칼춤은 능수능란했다.

요즘은 3D 디지털 그림으로 바꾸어 신식 작업을 하는데, 아날로그 시절로 되돌리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미술평론가 김진하의 상세한 평으로 대신한다.

 

이인철의 1980년대 목판화 - 거리에서 보낸 한 철

.

1. 알만한 사람은 알듯 이인철은 부산수산대학 출신이다. 그림판에 넘치는 그 흔하고 뻔한 미대 출신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학을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해서 화가가 되었다. 서울에서 처음 만난 일군의 화가들이 민중미술 운동의 중심이 되는 작가들이었다. 서울미술공동체라는 미술운동 단체 멤버들이었고, 이인철도 창립회원으로 가입해서 함께 활동을 시작한다. 1984년경이다. 이어서 1985년 전국단위 문화운동 단체인 민족미술협회가 창립되면서 이인철도 자연스레 민미협 회원이 된다. 이는 시위하는 바가 크다. 미술계와 별 인연이 없는 사람이 현실 비판적인 미술운동에 자연스럽게 몸을 담근다는 거, 그의 기질 혹은 사유에 사회나 역사에 대해 곧추선 의식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는 근 4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인철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의 뼈대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실, 동시대 현실, 그리고 미래에의 전망을 통시적으로 통찰하면서도 동시에 당대 현실에 미술로 개입하고 실천하는 행동 말이다.

 

1980년대의 저항 이후 지금까지 제도권 화단의 아웃사이더로 표류하면서도 이인철은 초지일관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 내용의 작업을 지속해왔다.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괴롭고도 지난한 과정이었다. 80년에는 목판화로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컴퓨터그래픽으로 스스로를 더 고립시키며 작업해 왔다. 물론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제도권 화단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리얼리스트로서 미학적 이념을 현실에 정착시키려는 작가 의식은 현실과의 불화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범, 그 지난하고도 외로운 과정이 자신의 미학적 입장을 작업에 정착시키는 것이기에.

이번 전시와 이 도록은 그런 이인철의 활동 중에서 초기인 1980년대 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목(고무)판화 작업으로 구성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도 있는 기간이다. 그의 서울미술공동체민족미술협회회원 시절의 주요 장르다. 당시 목판화는 민중미술의 핵심으로 대 사회적 메시지와 복수미술로서의 가능성에 크게 고무된 장르였다. 1985년부터 시작된 이인철의 목(고무)판화는 1990년대 초반까지 대략 10여년간 진행되었다. 이 시기 이인철은 한국 판화사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킬만한 독자적 양식과 기법의 작업을 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의 디지털 작업으로의 전환은 이인철의 판화작업을 이후 좀처럼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은 30여 년이 흐르고 이인철의 판화작업들도 우리들의 뇌리에서 상당 부분 잊혀졌다.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 본 나무아트 프로그램인 <한국현대목판화 발굴 프로젝트>의 두 번째 작가로 이인철의 목판화를 조망해보고자 한다.

 

2.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이인철의 목판화와 리놀륨(Linoleum)판화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철저하게 사진적 몽타주를 극사실로 재현한 판각법과, 외곽선에 의한 형태로 인물의 성격을 드러낸 <바람 부는 날, 1985><짤라 버릴까부다, 1986><마누라 나도, 1987><갈증, 1988><어떤 수인, 1988> 등과 같은 일련의 형식이 있다. 이런 위트·풍자·해학 등으로 군부독재 시기를 비틀며 비판한 내용의 선각 작업이 대략 1985~1988년경 먼저 시도된 형식이고, 동시대를 응시하면서 불의한 권력에 의한 모순을 정면으로 담아낸 증언이자 기록의 정밀한 판각법이 86~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경향이다. 이 글에서는 이인철 특유의 양식이자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정교한 형식의 판화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겠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역시 과도기적 특징의 작업이면서도 반5·반미·반제를 선명한 콘트라스트 형식으로 도상화한 <거부의 몸짓, 1985><스포츠 공화국의 상과 하, 1986><자유의 여신상, 1986><안녕히 가세요, 1987><반전 반핵, 1989> 등과 같은 작품이다. 작가가 의도한 메시지와 80년대 민중미술에서 두드러지는 대하서사적 시각 문법이 선명하다.

이어서 좀 더 정교해진 칼맛으로 형상화한 동시대 현실 풍경. 80~90년대 거리에서 마주치는 현상들에 대한 일상적 서사성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이어진다. <머물지 못하는 사람들, 1985><불꽃으로 다시 살아나, 1989><죽음의 변주곡, 1989><역사의 기록, 1989><젊은 날의 초상-1, 1991><체포, 1991><죽음, 죽음, 죽음, 1991><젊은 날의 초상-2, 1992>등과 같은 동시대 민중의 삶의 모습이나, 시위현장과 거기서 산화한 젊은이들에 대한 진중한 슬픔의 묘사가 눈에 띈다.

 

특히 이인철의 판화 중 가장 큰 대작인 <젊은 날의 초상-1><젊은 날의 초상-2>는 한국 리얼리즘 목판화의 백미라고 여겨진다. 시위 현장에서 백골단과 젊은 육체를 부딪치며 전투를 벌이는 청년들과, 이어서 그 청년 중 누군가의 상여가 거리를 행진하는 장면이다. 운구하는 대학생들의 슬프고도 엄숙한 표정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반독재 투쟁 풍경이 전형화되어 드러난다. 많은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격렬한 전투와 더불어 고문·분신·투신 정국에서 젊은 꽃송이들의 스러짐은, 결국 그들이 싸웠던 거리에 숭고하고도 장엄한 비극적 장면을 살아남은 우리에게 남겼다. 불의에 저항하다가 그 힘에 굴복하지 않은 죽음은 장엄하다. 박종철이 그랬고, 이한열도 그랬다. 뿐인가 숱한 민주열사와 노동자들의 외침과 죽음 또한 그랬다. 이인철이 거리에서 취재한 이 두 점의 작품이 어떤 최루성 장치 없이 사실만을 건조하게 제시하면서도 우리에게 먹먹한 가슴의 통증을 남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인철은 바로 이 두 장면을 통해서 1980~1990년대 초반의 시대성을 정교하게 반영해냈다. 단단하고 빈틈없이 정밀한 형태감. 목판의 나뭇결과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칼의 운행(등장인물의 얼굴과 의복 부분)은 마치 한지 위에 얹힌 세필의 먹 필선이나 동판화 에칭의 그것처럼 빈틈없이 정갈하다. 동시에 단단한 형태감과 유연한 칼의 운행은 밀도 높은 화면을 견인해냈다. 목판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서사적 내용과 기술과 숙련성이 두루 엮여서 수준 높은 미적 전형성을 확보한 리얼리즘의 수작이라 하겠다.

이런 서사성과는 달리 서정성을 담지한 리얼리스틱한 일군의 작품들도 중요하다. 오월 광주의 회한을 격렬한 감정과 회한으로 표현해낸 <죽음의 변주곡, 1989><마침내 망월동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1991>, 노동자와 도시 서민의 아픔과 슬픔의 소외된 일상성을 포착한 <우리들의 일상, 1987><산성비가 내린다, 1989><보이지 않는 손, 1990><김씨, 1991><동트는 새벽에, 1990><신혼의 이씨, 1992><가족, 1992><거리풍경, 1991><술집 풍경, 1992><아침, 1992> 등의 다소 건조한 서민들의 계급적 서정으로 연결된다. 모두 이웃들의 모습을 연민으로 바라본 시선이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감정적 입장(주관적 표현성)을 절제하면서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두기의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도드라진 작업들이다. 그중에서도 풍경인 <마침내 망월동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와 인물인 <김씨, 1991><신혼의 이씨, 1992>가 주목된다. 전자는 작가의 내적인 분노와 슬픔이 격렬한 표현적 풍경으로 상징화된 점이, 후자는 노동자의 실존적 고민이 은밀하고 고요하게 배어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상호 대비되면서도 동시에 돋보인다.

 

그런데 냉정하고도 차갑게 대상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관찰자 시점에서 극사실적인 기법을 구사하는 이인철의 형식에서, 이렇듯 작품을 보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는 서정성이 도드라지는 점이 놀랍다. 서사적인 장면이든 서정적인 화면이든 가리지 않고 이인철의 화면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는 뜻이다. 그 이유가 뭘까. 1980년대라는 시대를 함께 겪은 정서 때문일까. 아니면 그와 나의 세계에 대한 개별적 인식이나 감성이 어떤 공통의 분모를 가져서일까.

단언하기 어렵지만 유추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생래적으로 폭력적 현상에 대한 거부라는 본능의 바탕에, 저항에의 의지와 현실 인식이 더해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당시 민중미술이나 비판적 형상성을 추구하던 작가들 상당수가 그랬다. 아니, 19876월 혁명에 임하던 시민 거의 모두의 태도가 그랬다. 그런 각자의 뜨거운 경험과 겹치는 이인철의 도상에서, 인간적 감정을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이인철의 이런 서정적 형상성은, 그림의 단순한 소재를 넘어서서 타자와 공유 가능한 정서적 지점을 포착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홀로 격리된 골방이 아닌 시민과 동지들이 거리에서함께 보고 겪었던 지점, 현장을 즉물적으로 겪었던 체험을 이인철 특유의 목판화 형식으로 진술함으로 확보하게 되는 전형성으로 말이다. 이는 이인철의 목판화가 90년대 이후 그의 디지털 회화와 조형적 문법이나 양식이 아닌 태도로서 구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물론 이 말은 그의 디지털 회화와 비교하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인철의 디지털 회화는 또 그 나름대로 독립적 장르적 특성과 장점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오해 없으시길).

 

3. 리놀륨(Linoleum)은 정교한 칼의 운행이 유효한 재료다. 목판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편한 판(Plate)의 유연한 질료감 때문이다. 이인철은 그런 고무판의 속성을 잘 활용했다. 그러나 이인철은 단단하고 다소 거친 목판화에서도 그 정교한 호흡을 놓치지 않았다. 이인철 판화의 독자적 형식을 산출한 이 재료와 칼의 구사 기법은, 공학자나 건축설계자의 그것처럼, 혹은 한땀 한땀 뜨는 수예처럼 한칼 한칼의 운행이 꼼꼼하고 정밀하게 계산된 결과다. 기계적으로 보일 만큼 절제를 동반한 형태감과, 칼의 구사와, 제판 기법은 이인철의 체질적 특성과 맞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판면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개인적이고 주관적 표현성보다는, 마주한 현상을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대상성으로 분석하고 서술하려는 리얼리스트의 판각법에 잘 어울리는 장르란 뜻이다. 또 시각적인 맛과 효과를 유도하는 이인철의 계산된 칼질의 매력(꼼꼼한 장인성)에 바탕한 것이라, 이는 기존 민중미술의 거칠고도 속도감 있는 기법이나 언술들과는 다른 매력을 동반한다. 그리고 이런 특징들은 이인철이 90년대 중반 판화와 결별하고 극한적인 장인성과 디테일을 요하는 3D 회화로 그의 미디어를 이주하는 체질적 원인도 된다.

리놀륨과 목판화는 기본적으로 밑그림-판각-프린팅이라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밑그림에서는 작품의 내용·화면구성·언어 등이 결정되고, 판각에서는 작가의 체질·표현법·어법 등이 드러난다. 그리고 프린팅에서는 잉킹과 찍기라는 균질한 복수성의 기계적 프로세스가 반복된다. 한마디로 회화적 감성과 몸을 통한 노동, 그리고 규칙적이고도 정교한 장인성이 필요한 장르라는 의미다. 이인철의 작업은 이 셋 모두 담기에 적합한 양식과 주제를 띈 조형적 특성을 가졌다. 당연히 자신의 판화 감수성과 심미적 체중이 판 위에 실렸기에 이인철 특유의 맛이 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돌아보면, 이인철의 판화는 1980년대 민중미술 목판화의 다소 단순한 형식적 흐름에서 이탈해서 독자적인 표현법의 한 지점을 점유했다고 여겨진다. 이는 민중미술 목판화사에서 귀한 실례다.

 

당시 민중미술 진영에서 판화가로서 이인철은 나름의 이런 독자성을 확보했던 상태라, 그의 이 반전에 가까운디지털로의 궤도 변경은 신선한 충격으로 동료 작가들에게 회자 되곤 했다. 그만큼 이인철 판화의 정밀한 칼맛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이미 인정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인철은 과감하게 그 장르에 이별을 고하고, 90년대 중반 민중 미술계에서는 전인미답이었던 첨단 3D 디지털 회화(이자 디지털 판화)의 생소한 장르로 이주한 것이었다.

새로운 장르로의 선택과 전회는 물론 작가로선 긍정적인 도전이다. 그러나 한편 그 길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위험한 장정이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물과 식량, 지도나 나침반조차 없이 길 없는 픽셀의 사막에 무모하게 진입한 것이니까. 그게 30여 년 전이다. 당시 첨단이었던 3D 프로그램들은 이제 보편적인 일상적 기술이 되었고, 또 많은 사람이 구사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이인철의 3D 회화작업이 자신만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유지하며 지속되고 있는 것은 분명 긍정적이다. 이인철이 미디어 자체에 탐닉하는 스타일리스트가 아니라, 끊임없이 동시대 현실의 모순을 포착하고 저항하는 내용을 작품으로 구현하고 발언하는 작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서로 다른 장르, 즉 물리적·물질적 판화와 비물질적인 디지털이지만 이를 관통하는 이인철식 세계관과 리얼리즘의 구현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그러나, 상대적으로, 목판화계에선 이런 이인철의 공백이 아쉽다. 80년대 왕성했던 민중미술과 비판적 형상미술 목판화의 미술운동으로서의 신명과 전투성은 90년대 초반 문민정부 시기 이후 점차 화단 변방으로 사라지고, 바뀐 사회 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여러 목판화 작가들도 생계를 위해 지방이나 시골로 거처를 옮기면서 사실상 목판화는 그 시대적 소명을 다한 것처럼 보이는 시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이인철의 장르 변경도 다른 작가들의 이주와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다만 타 작가들은 지역에 은거했더라도 조각도를 갈며 은인자중 계속 목판화를 지속했음에 비해, 이인철은 디지털회화로 장르를 바꾼 점만 달랐을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이인철의 목판화 공백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90년대 초중반 만개한 목판화 기량이 절정일 때, 그리하여 그 이후를 더 기대하던 터에 갑자기 조각도를 놓고 총잡이 셰인처럼 떠난 칼잽이 목판화가 이인철이 말이다. 비록 그는 디지털 회화로 자기 길을 표표히 갔을지라도, 남아서 그 뒷모습을 보는 이의 아쉬움은 얼마나 컸을 것인가. 하물며 지속적으로 80년대 이후 목판화의 진행을 비평적으로 주목하는 나 같은 사람은 한국현대목판화에서 사라진 리얼리즘의 정수를 아쉬워하는 것이다. 이인철은 한국현대목판화사에서 정원철과 더불어 가장 정교한 목판화 판각법을 구사한 작가다. 그래서 짧은 10여 년간 100여 점만의 목판화를 남긴 게 더 아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10년 정도 더 작업해서 작품을 300점 정도라도 남겼다면 1990년대 목판화사는 훨씬 풍부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어떤 시대든 그 시대를 견디는 건 모든 이들이 힘들지만, 그들을 관찰하고 작업으로 옮기는 작가는 더 아프고 괴롭다. 함께 겪은 통증을 작업으로 진술하거나 표현하는 이중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인철은 엄혹했던 1980년대에 부조리한 권력과 폭력이 작동했던 사회의, 사람살이에 대한 관찰과 이미지 채집을 멈추지 않고 작업으로 남겼다. 그것은 통증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응시한 결과로, 안락한 머무름이 부재한 거리라는 공간에서 타고난 아웃사이더의 더듬이를 가진 채 떠도는 불편한 리얼리스트의 모습이다. 거리에서 사람들의 삶을 보고 표현하는 표류는 쓸 수 있으되 정착는 쓸 수 없는, 그야말로 작가로서 감내해내야만 하는 태도로 무장한 모습으로 말이다. 어렵고 힘들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지난 시기 이인철 목판화를 일별하다가 보니, 그에게 위로의 술 한잔 사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리에서

.

김진하(미술평론가)

 

뒤풀이 장소인 낭만으로 갔더니, 김정헌씨를 비롯하여 김재홍, 류연복, 장경호,

박불똥, 이태호, 이재민, 정세학, 양상용, 이현정, 전용일, 칡뫼김구, 김이하,

안원규, 조신호, 임경일, 성기준, 박은태씨 등 많은 분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길거리 게릴라전을 펼치고 다니는 스트리트 아티스트 이태호씨가

작업 도구를 챙겨와 낭만벽에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새기기 시작했다.

 

한때는 김수영시인 흉상을 거리에 새겼으나 요즘은 홍범도 장군을 새기는데,

새길 때마다 지나치는 행인들이 시비를 건단다.

 

이곳에서는 너도나도 반기며 서명까지 하는데,

예술가들은 작품을 알아보나 일반인들 눈에는 낙서로 보이는 모양이다.

한때는 벌금을 3백만원이나 문 적도 있단다.

 

그날은 김진하관장이 모자를 들고 다니며 뒤풀이 비용을 걷었으나,

마신 술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을 것이다.

 

술도 취했지만, 파장이라 먼저 일어나야 했다.

 

지하철 타러 가다 유목민에 잠시 들렸는데,

주인장 대신 주홍수씨와 허준씨가 반겼는데, 안쪽에는 황예숙 일행이 있었다.

 

이런 반가운 분들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들린 것이다.

 

이인철의 칼춤 거리에서30일까지니, 인사동 가는 걸음에 꼭 보시기 바란다.

 

사진, / 조문호

 

말 뿐인 약자복지, 거짓 정권 물러가라.

매년 1017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빈곤퇴치의 날이다.

빈곤철폐의날 조직위원회에서는 세계빈곤퇴치의 날을 앞둔

지난 14일 오후2시부터 한 시간 가량, 사전집회를 가졌다.

종로 보신각 앞에서 열린 사전집회에는 400여명이 참가했다.

 

이날 집회에는 동자동 쪽방촌 주민을 비롯하여 장애인, 노동자,

종교인 등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단체 회원들이 모여

주거권을 당장 보장하라고 외치며 거리에 나섰다.

 

코로나로 인하여 의료와 간병, 보육 등 사회서비스의 필요성은 확대되었으나,

윤석렬 정권의 사회서비스 확대 정책은 민영화로 기울고 있다.

지금까지 여성에게 전가하여 유지됐던 돌봄, 시장공급에 의존해 온 주거,

의료가 절실한 빈민들의 기본권 박탈 등은 더 이상 두고 볼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후위기의 재난은 일상화되었다.

이에 자본주의의 모순은 더욱 극적인 양상으로 드러난다.

지난 해 우리가 경험한 반 지하 수해 참사, 최근 오송 지하차도 침수,

경북 산사태, 등 며칠 간격으로 반복하는 폭염과 폭우의

기후재난 일상화는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심각한 상황이다.

 

올해 빈곤철폐의 날 슬로건은 주거권 지금 당장이다.

빈곤과 불평등은 날로 심각해져, 이주대책 없는 재개발로

철거민은 속수무책 쫓겨나고, 반 지하 거주자는 수해로 목숨을 잃었다.

 

전세사기와 깡통전세는 가난한 사람의 삶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동자동 쪽방촌의 공공개발도 3년째 밀쳐놓고 눈치만 보고 있고.

장애인은 집이 아닌 시설에 감금하여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게 한다.

 

윤석렬정권은 약자복지를 정권의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어려운 분들을 돕겠다고 강변하지만, 입에 발린 헛말일 뿐이다.

여태까지 약자복지 운운하며 가난한 이를 들러리 세워,

권리를 요구하는 약자를 탄압해 오지 않았던가?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거짓 정권에 철퇴를 내리고, 우리의 권리를 쟁취하자.

 

이날 거리대행진에 앞서 열린 사전집회는

빈곤사회연대 정성철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집회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의 발언을 시작으로

노점상, 전세사기 피해자, 철거민들의 현장 발언으로 이어졌다.

 

박경석 빈곤사회연대 공동대표는 주거권을 쟁취하기 위해 함께 투쟁하자며 독려했다.

이 사회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게으르네. 너 능력 없네. 너 못 배웠네. 너 여자네. 너 나랑 다르네.’

이게 바로 낙인이자 차별이고 격리이자 감금이라며 가난을 이유로, 못 배움을 이유로,

장애를 이유로 우리를 공격하는 권력자와 자본가들과 함께 싸우자고 촉구했다.

 

안상미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장은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국가가 정한 법과 제도

안에서 국가가 공인한 공인중개사를 통해 집을 계약했다. 그런데 전세사기의 책임은 피해자가 다 진다.

국가가 대책이라고 내놓은 건 무이자로 대출해 줄 테니 성실히 갚아라고만 한다며,

국가 제도 안에서 벌어진 일인데, 왜 임대인만 보호 하나?며 울분을 터트렸다.

이게 어떻게 개인의 거래? 윤석열 정부가 책임지고 해결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병찬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중랑지역장은 동대문구에서 벌어진 노점 강제철거 폭력을 고발했다.

지난 316일 새벽, 동대문구청에서 노점 리어카를 탈취해 갔다고 했다.

80대 할머니 노점상들이 어렵게 마련한 리어카를 도둑맞았는데.

노점상을 몰아낸 자리에다 화단을 깔아 놨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노점상의 생존권을 탄압하는 이필형 구청장은 각성하라,

끝까지 투쟁하여 노점상 생존권을 쟁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동자동 쪽방촌의 정대철씨를 비롯하여 홈리스 주거팀 활동가인

림보, 로즈마리, 요지, 달자씨가 등장하여 단막극을 선보였다.

 

줄거리는 정대철씨가 동자동 쪽방촌에 들어와 겪은 나날을 극화했는데,

동자동공공개발 발표에 따른 희망에서 점점 기대치가 줄어가며, 절망에 빠져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로인해 투쟁의 의지를 다지는 과정을 연출한 극인데, 장애에 의한 정씨의 어눌한 말투가 웃프기도 했으나,

어느 연극이 삶의 현실을 토해 내는, 이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겠는가?

 

그 외에도 기후단체, 공공운수노조의 연대발언과 민중가수의 열창도 있었다.

 

조직위는 투쟁결의문을 통해 더 높아지는 건물이 더 깊어지는 절망만을 의미할 때,

우리는 세상의 규칙을 바꿔야 한다. 노점상이 사라진 도시를 발전한 도시라고 말하지 말자.

휠체어를 외면하는 버스와 장애인을 채용하지 않는 노동을 묵인하지 말자.

가난한 이들을 빗물과 더위, 추위에 죽어가도록 방치하지 말자. 이대로는 살 수 없다.

빈곤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했다.

 

집회가 끝난 후 서울시 종로구 공평동, 안국동, 낙원동, 종로2가를 거치는 2km가량을 거리 행진했다.

캐리어를 끄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탈 가정 청소년, 강아지와 함께 행진한 시민,

돼지 분장을 하고 동물권을 외친 활동가 등 다양한 풍경이 펼쳐졌다.

 

빈곤과 불평등을 없애기 위한 우리의 요구

기만적인 약자복지 반대한다. 차별과 동정 말고 가난 이들에게 권리를!

기후위기 시대 주거는 기본권이다. 주거권 보장 지금 당장!

우리에게 더 많은 평등한 땅을, 공동 토지 민간매각 금지, 공공임대주택 확대!

 

사진,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