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만화의 대부로 불리는 박재동화백이 인사동 ‘거리 화가’로 나섰다.

박 화백의 ‘오픈 스튜디오’가 '인사아트프라자'(인사동길 34-1)

건물 초입에 인사동 복덕방 처럼 둥치 튼 것이다.

 

인사동이 예술가 아지트로서 구심점을 잃어가는 현실이라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인사동에 70년대 김상옥시인의 '아자방'이 있었다면, 80년대는 천상병시인의 ‘귀천’이 있었다.

문영태를 비롯한 여러 전사들이 꾸려간 민중미술의 요람 '그림마당 민'도 있었다.

정동용시인의 ‘시인대학’. 흑백 사진만 뽑던 신작가의 '꽃나라', 전유성씨의 ‘학교종이 땡땡땡’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끼리끼리 어울리던 아지트들이 있었다.

예술가들이 모이는 점포가 상징처럼 인사동에 똬리 틀어, 가교 역할을 한 것이다.

 

'인사아트프라자'의 배려로 캐리커처 공간 임대료를 내지 않는다니,

문 닫을 염려야 없겠지만, 노장의 체력이 버텨줄지 모르겠다.

 

그동안 가짜 미투에 걸려  얼마나 곤욕스러운 시간을 보냈는가?

진위야 밝혀졌지만, 땅에 떨어진 작가의 명예는 어떻게 되찾겠나?

더 이상 미투가 정적을 제거하는 도구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은 순진한 박원순시장의 목숨까지 앗아가지 않았던가?

미투운동이 여성의 인권을 신장시키는데는 큰 몫을 했지만,

억울하게 이용 당한 남성의 인권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박화백의 대중 소통을 위한 접근은 권위적이고 물질적인 미술을 인본주의로 돌려놓았다.

미술작품이 가진 자들의 욕망에 컴컴한 수장고에 갇혀 잠자는 것이 좋겠는가?

살아가는 공간 가까이에서 볼 때마다 눈웃음 짖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어디서, 재료값에 불과한 돈으로 박화백의 초상화를 받을 수 있겠는가?

그건 대중을 껴 안고자하는 박화백의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쩌면 수행의 한 방편도 될 수 있고, 이보다 더 치열한 작업도 없겠다 싶다.

 

박화백이 인사동에 ‘오픈 스튜디오’를 차렸다는 반가운 소식은

보름 전 페북에서 보았는데, 한 번 찾아가 기록해 둔다는 게 영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박화백은 목, 금, 토요일만 나오는데다, 난 정선에서 화요일만 나오니 날자가 엇갈렸다.

 

지난 금요일에서야 시간을 낼 수 있었는데, 마침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그런데, 옆 자리에 영화평론가 강익모씨가 앉아 있었다.

“아! 이 얼마만인가?” 강교수와 소식 끊긴지가 10년은 된 것 같았다.

 

아직 사년 정도의 임기를 남겨두고 교수직에서 퇴임했다는 소식과

부친께서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도 전해 주었다.

 

인사동 건물 옥상에서 영화를 상영하던 이야기에서부터

옛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박재동 화백의 강한 시선이 느껴졌다.

 

스케치하는 눈빛이 내 마음을 뚫어 보는 것처럼 강렬했다.

마치 점쟁이가 사주 보듯 말이다.

 

여지 것 찻집에서나 술집에서 박화백을 뵐 때마다

항상 스켓치북에 누군가를 그리고 있었다.

 

내가 카메라를 놓지 못하듯이 항상 그의 손에는 붓이 잡혀 있었다.

나 역시 여러 차례 모델이 되기도 했는데, 

작품 값은 고사하고 수고비도 드리지 못하고 챙겨 둔 초상화가 석장이나 된다.

포인트만 잡으면 척척 그려가는 솜씨가 가히 경지에 이른 것 같다.

 

그날도 짧은 시간에 두 장이나 그렸는데, 징그러운 늙은이를 귀여운 늙은이로 둔갑시켜 놓았더라.

영감탱이의 엉큼한 심보가 뽀록 나도록 그렸는데, 화가인지 점쟁인지 도통 분간이 안 된다.

 

한 장은 사 와야 하는데, 큰 그림이라 솔직히 돈이 좀 부족했다.

돈 생기면 살 생각으로 어물쩍 넘겼는데, 거지 손님을 잘 못 골란 죄도 있다.

 

강익모 촬영

 

박재동선생 사진 찍으러 갔다가 도리어 내가 모델이 된 셈이다.

어쨋던, 박화백이 인사동 거리의 화가로 등장해 너무 기분좋다.

지난 달 ‘현실과 발언’ 창립 40주년을 맞아 열린 '학고제' 현장 작업과 바로 연결된 것 같다.

 

그의 초상화는 언제보아도 정겹다. 그림에 사람의 따듯한 체온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박재동 화백의 숨겨진 얼굴 그리기 프로젝트의 따뜻함으로 인사동에 온기를 불어넣었으면 좋겠다.

 

박재동 화백만 보면 ‘한겨레신문’에 실렸던 시사만평 '한겨레 그림판'부터 떠오른다.

1980년대 후반에는 민주화 세대의 진보의식을 대변하는 '만화운동가'로 활동하지 않았던가?

권력의 본질을 예리한 메스로 파헤친 그의 만평은 시대 고발에 앞서 우리의 마음을 두드렸다.

 

그가 보여준 시사만화 세계는 독창적이며 독보적이었다.

신문 만평을 독자들이 가장 먼저 찾는 기사의 핵심으로 만들었고,

‘권력 앞에서도 당당한 시사만화’의 진면목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조그만 사각 속에 국민들의 슬픔과 분노, 고민과 아픔을 웃음과 눈물로 버무렸다.

 

두 번째가 ‘한예종’교수로 일하며 후진을 양성한 시기라면,

이 '숨겨진 얼굴 그리기 프로젝트'는 세 번째의 대변신인 것이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의 초상화는 인사동 명물로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요즘은 코로나란 사회적 거리두기로 손님이 많지 않아

오히려 한가하게 이야기 나누며 자기 모습을 남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도 싶다.

박재동 화백의 붓 끝에 탄생한 당신의 초상화가 인사동 문화에 불을 지핀다.

 

인사동 나가는 걸음에 자신의 초상화 한 장 그려 두자.

 

사진, 글 / 조문호

 

광화문 집회의 코로나 확산으로 다시 인사동에 찬바람이 일고 있다.

지루한 장마가 끝날 기미를 보이자 모처럼 인사동거리가 활기를 찾았으나 며칠을 넘기지 못했다.

 

지난 19일 오후 ‘진인진출판사‘ 김태진 대표와의 약속으로 인사동에 갔다.

인사동 거리부터 한 바퀴 돌았는데, 인파를 셀 수 있을 정도로 거리는 한산했다.

한산한 곳이 비단 인사동만은 아니지만, 보기 안쓰러웠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인사동 큰길가에 자리 잡은 매장들이 많이 바뀌었더라.

관광객을 상대로 판매하던 관광상품 매장이나 실타래과자 등 군것질 장사가 대부분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자리를 의류매장이나 악세사리 매장이 대체했다.

 

싸구려 중국산 관광 상품이 사라진 것은 반갑기 그지없었으나,

새로 생긴 매장들은 여성 고객들을 겨누어 고급화되어가는 추세였다.

아직 셔터를 내린 빈 점포도 많았으나, 머지않아 인사동 그림이 바뀌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렇지만 군데군데 오래된 노포들도 살아남아 있었다.

골동상, 탈방, 필방, 도예방 몇몇이 간신히 버텨, 그나마 인사동의 자존심을 지켰다.

또 하나의 변화라면 ‘통인가게’ 이층에 생긴 ‘태극당’을 비롯하여

금옥당, 수예당 등 대형 다과점이 생겨 난 것이다.

 

그리고 ‘통인가게’ 일층을 차지했던 실타래과자점이 대부분 사라지고

새롭게 단장한 미술품 매장들이 눈길을 끌었다.

 

쓸쓸한 거리에 생기를 불어넣는 유랑 악사들의 버스킹도 평소보다 많았고,

‘갤러리 이즈’ 일층에는 이용순씨의 사진전(25일까지)이 열렸다.

 

약속한 ‘사동집’으로 정영신씨와 함께 갔더니, 의외로 손님이 없었다.

텅 빈 식당을 지키던 노모 송점순씨가 반갑게 맞아 주었는데,

북적대던 평소와 달리 그토록 손님 없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렇지만 벽에 걸린 민병산선생의 글씨에 반가움을 금할 수 없었다.

 

김태진씨와의 미팅은 오래전부터 이야기되었던 인사동 사진집 출판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저녁식사로 만두전골을 시켰는데, 이전보다 맛이 없는 것 같았다.

역시 음식은 손님이 많아 제 때 제 때 소모되어야 맛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특별한 안은 없었으나 좋은 사진집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이 논의되었다.

인사동 토박이들의 인터뷰로 내용을 다양화 하는 등

인사동을 제대로 소개할 수 있는 책을 만드는데 뜻을 모았다.

무엇보다 대중에게 팔릴 수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사진집이 나올 즈음에는 어떤 모습의 인사동으로 변할까?

사진으로나마 지난날을 오래오래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은 고향도 아니고 사는 곳도 아니지만,

비 온다고 나가고 날씨 개였다고 나간다.

전시한다고 나가고 사람 만난다고 나간다.

 

정든 사람 떠난 인사동을 허구한 날 맴돈다.

더러는 저승으로 떠나고 더러는 오리무중이다.

남은 건 인사도 안 하는 인사동이란 이름뿐이다.

아니면 술에 취해 인사 불성된 기억만 떠돈다.

 

가게들은 간판을 바꾸고 주인까지 바뀌었지만,

꼬불꼬불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만 그대로다.

 

그러나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기억의 저장고다.

그리움이 안개처럼 맴도는 추억의 공간이다.

 

삭막한 거리를 떠돌며 지워진 이름을 떠 올린다.

 

천향각, 실비집, 시인통신, 누님칼국수, 하가, 귀천,

레테, 춘원, 평화만들기, 수희재, 인사동사람들...

 

그리고 별이 된 사람들도 떠 올린다.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 박재삼, 강 민, 심우성,

이구영, 김동수, 김대환, 이계익, 이호철, 목순옥,

원광스님, 중광스님, 적음스님, 김용태, 문영태,

김종구, 이존수, 여 운, 이동엽, 김영수, 강용대, 박광호...

 

다들 일상 너머 세상을 꿈꾸는 낭만적인 사람들이다.

지나간 세월이 그립고, 떠나 간 사람들이 보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은 지루한 장마가 끝난 지난 일요일에 찍었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는 광복절 노래가 무색한 날이었다.

인터넷에 올라 온 사진에는 광화문광장 시위에 일장기까지 등장했다.

 

우리나라가 일본 놈들 손아귀에서 벗어 난지 75년이 지났건만,

친일 청산은 커녕, 오히려 일제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갤러리 구루지’에서 열리는 ‘독립이 맞습니까?’란 전시 제목이 실감났다.

 

다시 한 번 미치광이 전광훈 개독집단과 꼴통 보수 세력이 친일 잔재라는 걸 입증했다.

그 뿐이던가?  맞장구치며 부추기는 보수언론이 더 문제다.

김원웅 광복회장의 광복절 기념사를 씹는 보수언론 논리에 귀가 막혔다.

 

독재자 이승만의 일제 계승과 무고한 민중 학살을 몰라서 하는 말이던가?

그렇게 일제 치하가 그리우면 국적을 바꾸던지, 차라리 일본으로 이민가라.

언론이란 가면을 쓰고 국민을 이간질 시키는 무리부터 척결해야 한다.

 

더구나 ‘코로나19’가 다시 기승을 부리는 위급한 때가 아닌가?

도저히 쪽방 구석에 처박혀 울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어디서 술이라도 한 잔 해야 할 것 같았다.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을 찾아 인사동으로 갔다.

시위를 끝내고 지하철로 몰려드는 늙은이들의 행렬이 측은해 보였다.

무엇이 저들을 거리로 내 몰았을까? 역병에 목숨까지 걸어가며...

 

요즘 떠도는 유행어처럼 독립운동은 못해도 꼬장은 부리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원칙도 가치관도 없이, 젊은이들로 부터 지탄 받고 살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인사동의 모습은 변함없었다.

비에 젖어 가라앉은 거리엔 발길만 분주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거리 사진부터 찍었겠지만, 바로 술집을 찾아갔다.

 

벽치기 골목을 들어서니 ‘유목민’ 앞에 연출가 기국서씨와 김명성씨 모습이 보였다.

김명성씨가 추진한 독립 자료전을 보고 오는 길이라 했다.

개막식이 있던 날은 작업 때문에 밀양에 있었단다.

 

모처럼 소주잔을 나누는 자리에서 기국서씨가 고충을 털어 놓았다.

아무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는 풀리지 않는 일에 답답해했다

결과에 돈이 걸려 있다는 대목에서는 미칠 것 같단다.

 

비록 기국서씨 혼자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주변과 얽히지 않은 일이 어디 있으며, 돈에서 자유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작가의 재능이 뛰어나도 권력이나 돈에 치우치면

애국가를 만든 안익태나 친일시인 서정주와 다를 게 무엇인가?

차라리 낫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사람이 나을 것이다.

 

한 쪽 자리에는 ‘뮤아트’ 김상현씨가 후배 가수들과 어울려 노래를 불렀고,

유진오씨는 분주히 ‘유목민’ 일손을 돕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니 출연자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시인 이승철씨, 박재웅씨 일행에 이어 단청장 이인섭씨가 나타났다.

좀 있으니, 시인 정희성씨와 소설가 현기영, 산악인 박기성씨가 왔다.

 

이 우울한 날 어찌 술 한 잔 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른 때와 달리, 기국서씨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는 시국처럼, 술자리마저 흩어져 사분오열이었다.

‘유진커피숍’에서 팥빙수에 더운 속을 식히고 자리를 떴다.

 

아무리 코로나가 설쳐도 꼭 찾아갈 곳이 있다.

바로 구로구민회관 ‘갤러리 구루지’에서 열리는 ‘독립이 맞습니까?’전이다.

그 전시를 보며, 독립을 위하여 몸 바쳐 싸운 독립투사들의 정신을 되새기자.

 

전시는 오는 29일까지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구로구민회관, ‘갤러리 구루지’에서 ‘독립이 맞습니까? 특별기획전이 열린다.

 

지난 12일 오후5시에 시작된 개막식에는 생각보다 손님이 많았다.

요즘은 손님 많은 개막식은 잘 안 가지만, 이 전시는 안 갈수가 없었다.

전시된 독립자료들이야 촬영할 때 여러 차례 보았지만,

선열들의 의연한 기상을 느끼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

 

더구나 전시 자료들이 인사동을 사랑하는 김명성씨가

긴 세월동안 어렵사리 찾아 낸 유적들이 아니던가?

 

예전 같았으면 인사동 사람들의 모임인 ‘창예헌’을 통해 전시를 알렸겠지만,

모임이 흐지부지 한데다 시절이 사람을 많이 불러 모을 때는 아니었다.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를 통해서만 알렸는데, 대충 아는 듯 했다.

사이트에 자주 들락거려 하루에 500여명은 찾아오니까...

 

그러나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누가 누군지 모르겠더라.

아는 체하면 웃거나 손을 흔들지만, 누군지 분간 안 되는 사람도 많았다.

이제 코로나 방역이 생활화되었지만, 사람들 꼴은 말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입에다 팬티를 걸치고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 숨이 차 못 견디겠다.

 

전시장에는 이성 구로구청장과 구로문화재단 허정숙대표이사, 김명성 독립투쟁사 추진위원겸 에술 감독이 손님을 맞고 있었다, 김미경 은평구청장을 비롯하여 구중서, 방동규, 박기정, 무세중, 무나미, 정기범, 이정숙, 손연칠, 김규선, 김상환, 김연갑, 박동웅, 강찬모, 최효준, 박인식, 조해인, 김수길, 송일봉, 최유진, 조준영, 박윤호, 김상현, 권경일, 전인경, 전인미, 정영신, 서길헌, 노광래, 이만주, 전활철, 김 구, 임경일, 이상훈씨 등 알아챈 분은 이 정도지만, 100여명은 되는 것 같았다.

 

행사에 앞 서 가진 국민의례는 다른 행사와 달리 꼭 필요한 의례였다.

그 자리에서 어찌 고개 숙여 묵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최 측과 내빈께서 차례대로 나와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다.

 

전시된 갤러리 ‘구루지’는 미술관 사정이 열악한 서울 서남권의 대표 갤러리로

도약하기 위해 확장 공사를 가진  후 첫 전시라고 했다. 전시장 짜임새도 흥미로웠다.

마치 독립투사들의 밀회장을 연상할 수 있는 은밀한 전시 공간이 두 곳이나 있었다.

 

전시장을 돌아보니 100여 년 전으로 세월을 되돌리는 것 같았다.

얼마나 안타깝고 분한지 몸이 부르르 떨렸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시원과 아우 이지원이 목숨을 끊기 전에

올린 절명시를 비롯하여 박열열사가 옥중에서 쓴 칠언절구 2수를 보니 가슴이 아팠다.

 

“철망 안에서 보내는 나날, 낙원 속에서 사는 것만 같구나.

귀신이 베갯머리 나타나 신선 같다고 속삭인다."

 

그 유묵과 서찰들을 살펴보며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목숨을 바쳐가며 독립을 이루었건만, 아직까지 친일세력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아니던가?

전시 제목처럼 ‘독립이 맞습니까?’란 물음이 절로 나왔다.

모두들 이 전시를 찾아보며 친일청산에 나서야 한다.

 

일본 놈 앞잡이가 되어 독립군을 무참하게 죽인 백선엽 같은 인간이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일제에 빌붙었던 ‘조선일보’를 비롯한 왜놈 앞잡이들이 아직까지 깽판치는 세상이 아니던가?

 

다들 인근에 있는 뒤풀이 장소 ‘내고향 숯불갈비’로 자리를 옮겼다.

전시장에선 다들 방역규칙을 잘 지켰지만, 입을 가리고야 먹을 수 없지 않은가?

다닥다닥 붙어 앉아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여지것 입막고 고생했던 일은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다.

죽고 사는 것은 오로지 신의 뜻에 맞길 수밖에 없었다.

 

부어라 마시어라 술을 퍼 마셨다.

이렇게 기분 좋게 어울려 대취할 수 있는 기회가 살아 생전 몇 번이나 더 있겠는가?

 

고기굽는 아주머니의 엉덩이가 내 옆구리에 부딪혔다.

이것도 미투 대상이 아닌가도 생각되지만 기분만 좋더라.

좋을 때는 넘어가고 나쁠 때는 미투가 되는 세상, 여성 혐오감만 짙어가니 이 일을 어쩔까?

 

문제가 되었던 박재동화백은 결백이 밝혀졌지만, 박원순 시장은 목숨까지 잃었다.

그리고 서울시립미술관장 최효준씨는 아직까지 미결로 남았다.

당사자가 제거되면 누가 득을 보는지, 그걸 보면 알수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 사람은 기획된 함정이 틀림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맞은 편 자리에는 사진가 박윤호씨가 앉아 있었다.

오래 전 페북 사진 때문에 페친관계를 끊은 적이 있었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미안했다.

올 년말에 사진전을 연다는 반가운 소식은, 한 사람을 모델로 찍은 표정사진이란다.

 

그 전에 문제가 되었던 것도 얼굴을 너무 가까히 찍어 혐오감을 일으켜서인데,

모델만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그 방법을 재연했다고 한다.

나 역시 사진을 찍지만 얼굴에 바짝 렌즈를 들이밀고 반복해서 찍으면 불쾌하기 그지없다.

그 사진으로 전시를 한다니 할 말은 없지만, 일단은 축하할 일이었다.

 

먼 뒷자리에는 인연을 끊은 선배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전시장에서도 부딪히는 걸 의식적으로 피했으나, 후배의 도리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통해 들려 준 모욕적인 험담은 더 이상 보지 않겠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이 들어가니 마음이 흔들렸다.

 

사진사가 사람이 싫다고 객관적인 기록을 않는다는 것은 쪽팔리는 일이었다.

그 선배가 일어서니, 때 마침 '뮤아트'의 김상현씨가 ‘떠날 때는 말없이’를 서럽도록 불렀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맨발로 뛰어나가 그 선배 일행을 찍고 말았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노객의 뒷 모습에 애잔함이 밀려왔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곳은 동자동도 인사동도 아닌 구로동이 아니던가? 은평방면으로 갈 사람을 모았다.

조해인, 김수길, 정영신, 박윤호씨 등인데 택시 한 대에 다 탈수가 없었다.

난 사람이 아니라 강아지라고 우겼는데, 다섯 명이 한 차에 탈 수 있도록 눈감아줬다.

 

얼마나 끼어 앉았으면 주굴 주굴한 얼굴이 땡겨 펴질 지경이었다.

스님들이 저지르는 불법도, 무임승차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30여분 동안 곤욕을 치르고 끌려간 곳은 조해인씨 집 부근에 있는 ‘치킨호프 응암점’이었다.

 

내일 삼수갑산에 갈지라도 마시고 볼 일이었다.

정영신씨를 위해 김수길씨가 와인까지 사 왔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자기는 와인보다 소주잔을 채우기가 무섭게 입에 털어 넣는 만용을 부리면서....

 

이미 술이 취해 술이 술을 마시는 격이었다.

그런데 또 하나 놀란 사실은 박윤호씨가 술과 담배를 끊었단다. 그 긴 시간동안 술 한 잔 마시지 않았다.

아무튼 내가 너무 오래 산 것 같다. 세상에 바뀌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독립투사들 덕에 술 얻어마신 것도 생전 처음이었다.

귀신 술이라 그런지 술은 술술 넘어갔지만,

그 이튿날 방바닥에 엎드려 하루 종일 속죄해야 했다.

다시는 귀신 술에 욕심 부리지 않겠다고...

 

사진, 글 / 조문호

 

독립운동 주역들의 필묵과 역사적 자료들을 펼쳐놓은 “독립이 맞습니까?전이

오는 8월12일부터 29일까지 구로 ‘갤러리 구루지’에서 열립니다.

광복75주년 기념 구로문화재단 특별기획전인 ‘독립이 맞습니까“전은

한 개인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전시라 더 애틋합니다.

 

이런 독립자료 수집은 정부에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국립한국문학관’ 자료수집에는 친일파 문인들의 도서구입비로 몇 억을 들이지만,

독립투사들의 한이 맺힌 소중한 자료구입에는 손을 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얼마 전 문경에 있는 '박열 의사기념관'에 가본 적이 있는데,

어마어마한 건물만 있을 뿐, 박열열사의 자료가 없는 속빈 강정이었습니다.

 

김명성씨는 정부가 해야 할 독립운동 자료 찾느라 모든 걸 다 바쳤습니다.

일본에 흘러들어간 필묵들도 숱하게 사들였습니다.

수 십 년 동안 독립운동 자취를 쫒아 온 다른 분들의 자료들도

사장되기 직전에 돈으로 보상하고 살려냈습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이런 일도 독립운동에 버금가는 일 아닙니까?

 

오랫동안 독립운동자료 수집과정들을 지켜보며 자료들을 촬영 해왔기에

그 귀중하고 방대한 자료를 잘 압니다. 이번에 선보이게 될 ‘독립이 맞는가?’전 뿐 아니라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자화상, 나를 보다”전에도

그가 수집한 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필묵들이 전시되어 있고,

‘은평한옥박물관’ 전시도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료를 한 곳에 모우기 위해 ‘독립투쟁사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인사동을 사랑하는 시인으로 미술품 수집가이기도 합니다.

40여년 동안 천상병선생을 비롯한 원로 문인들 뒷바라지하며,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습니다.

인사동만의 풍류와 낭만이 농익을 수 있도록 한데는 그의 기여가 컸습니다.

 

이젠 수많은 독립자료에 파묻혀 독립운동사를 추적하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기록에서 독립운동을 가장한 친일파도 찾아냈다고 합니다. 미쳐도 제대로 미친 것입니다.

우리 틈내어 그가 억척스레 수집한 김구, 안창호, 안중근, 신채호, 박열 등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숨결을 느끼러 갑시다.

다시 한 번 독립을 되새겨봅시다.

 

개막식은 8월12일 오후5시지만, 편할 때 가시면 됩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죽을 쑨다.

그 많던 관광객이 코로나 광풍에 휩쓸린지 오래다.

 

장사는 안 되어도, 친근한 오래전의 풍경은 되살아난다.

 

이제 물밀 듯 밀려오던 그 때의 호황은 꿈도 못 꾸지만,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이미 점포 비운 가게들이 속출하고, 새 주인 기다리는 가게도 많다.

새로 들어 온 상인들은 기존 업종보다 다른 업종으로 바꾼다.

 

음식점에서 커피 집으로 바뀐 정도야 그게 그거지만

낙원상가와 가까운 인사동4길은 악기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인사아트프라자’의 대 변신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그 건물에,

인사동 문화에 애착을 가진 새로운 경영자가 들어왔다.

 

건물 전체를 미술관으로 만든다고 한다.

이미 공예품매장으로 어수선 하던 1층이 갤러리로 바뀌어 손님을 맞고 있었다.

 

백 여 평의 7개 층 전관에 한 달 동안 전시 한 건 없는 ‘아라아트’ 같이

파리 날리는 전시장이 더 많은 시절에 걱정은 되나 나름의 전략이 있단다.

 

오랫동안 임자 못 만난, 보물 없는 ‘보물창고’를 비롯한

인사동 큰 길가의 가게들이야 무슨 업종이 들어서던 명맥은 유지할 것이다.

 

그러나 골목 안으로 한걸음만 들어가도 문 닫은 집이 속출한다.

 다시 채우려면 숱한 시일이 걸릴 것 같았다.

 

신통하게, 손님 몰리는 곳도 있다,

인사동 16길에서 벽치기 길로 이어지는 골목 술집들이다.

 

‘유목민’, ‘누룩’ 등의 몇몇 술집은 코로나 이전보다 손님이 많단다.

답답한 세상 술 잔에라도 풀지 않는다면 어찌 살겠는가?

 

앞으로 인사동에 어떤 업종이 들어올지도 모르고,

인사동 문화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사동의 변화는 불가피할 것 같다. 

 

희망사항에 불과하겠지만 인사동 미술시장이 더 활성화되고

전통문화와 예술가들의 풍류가 함께 어울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에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인사동만 젖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젖는다.

 

분주했던 수요일 거리치고는 한적했다.

 

찾아 간 전시는 어설픈 모방에 불과했다.

 

어차피 사는 자체가 모방이 아니던가?

 

비에 젖은 허탈감에 술 생각만 간절하다.

 

그런데, 그 많던 술벗들은 어디 갔는가?

 

전화를 버렸으니, 내가 버린 거나 마찬가지다.

 

술 한 잔에 마음 달래려 해도 처량하게 궁상떨기는 더더욱 싫었다.

 

애잔하게 연주하는 ‘예스터데이’가 들려온다.

 

가사 후반부를 곱씹으니, 남의 말이 아니었다.

 

“Now I long for yesterday

yesterday love was such an easy game to play

now I need a place to hide a way

oh, I believe in yesterday“

 

“이젠 지난날이 자꾸만 그리워지네.

지난 날 사랑은 너무 쉬운 게임 같았어.

이제 난 어디든 숨을 곳이 필요해.

오! 그 때가 좋았었는데“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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