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일 황규태선생께서 점심을 산다는 연락을 받았다.
‘동강사진상’을 받아 한 턱 쏘는 것 같았으나,
이러다 신용카드 구멍 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상금도 사진계 발전을 위해 주최 측에 희사하셨는데,
돈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 내심 걱정되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면서도 엄상빈씨와 이한구씨에게 전화해
남아있는 후배들을 위해 충분히 대접하고, 영수증만 달라하지 않았던가.






약속장소인 ‘한일관’에는 황규태선생을 비롯하여
한정식선생, 엄상빈, 이한구, 이규상, 이창남, 곽명우씨가 나왔다.


‘눈빛출판사’ 이규상씨는 따끈따끈한 김용철씨의 ‘경의선’ 사진집을 가져 왔더라.

오랜 추억으로 끌어들이는 좋은 사진이었다.


황규태선생께서 맛있는 갈비에다 냉면, 그리고 소주까지 사 주셨다.
그 날의 화제는 단연 ‘동강사진상’이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로 기절초풍할 일이 많더라.






몇년 전 노순택씨가 수상할 때 티셔츠 차림으로 참석했단다.
그런데 시상식에 참석한 사진가 윤주영선생께서
‘수상자 차림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셨단다.


그래서 영월장에 가서 촌놈 가다마이를 사 입고 상을 받은 것이다.
이번에도 오셨다면, 황규태선생도 영월장에 가실 뻔 했다.
황규태선생도 청바치에 티셔쳐만 걸치고 오셨으니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강홍구씨가 상을 받을 때의 일이다.
수상자가 결정된 후, 주최 측에서 작가에게 연락했더니,
강운구씨를 잘 못 알고 전화하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단다.


나 역시 받을 군번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전혀 예상하지 못할 일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심사위원들의 귀띔도 없었을까 의뭉스러웠다.






또 하나는 작년에 수상한 정동석씨 일이다.
당시 병원에 있어 상도 아들이 대신 받았다는데,
문제는 수상자전이 끝난 후, 반송하는 과정하서 작품이 손상된 것이다.
작가가 문제를 제기했으면, 배상하거나 사과해야 할 텐데,
운영위원장이 병원에 찾아와 오히려 작가를 나무랐단다.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아, 법정에 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참 별일들이 많다.
사진박물관에서 작가들의 작품을 허술하게 다룬다는 것도 그렇지만,
상이 도대체 무엇인지 되 씹는 시간이 되었다.
사진상을 심사하는 기준은 무엇이며,
얼마나 전지전능하신 신의 심사위원인지도 궁금했다.






이제 상의 운영규정을 이원화해야 한다.
문제되는 것은 다 돈 때문이다.

더 이상 사진가들이 반목하는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상금은 가난한 젊은 작가들의 창작지원금으로 주고,
사진에 대한 가치나 공적을 높이사는 상은 명예만 주어야 한다.






그 날 이규상씨도 말했다.
일찍 황규태선생께서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께 상을 거절하라고 말리려했으나,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다.





황규태선생께서는 진작 상을 받아야 할 분이었으니, 마지막 좋은 선례로 남기자,
어차피 상금도 받지 않았으니까....
더 이상 상 때문에 사진인들 조롱거리를 만들지 마라.

더러운 꼴 그만 보고 싶은데, 목숨이 너무 질기다.

사진, 글 / 조문호



















카메라의 신처럼 사진인에게 선망의 대상이던 카메라가 ‘라이카’다.

라이카를 선물 받아 감격한지가 엊그젠데, 실망의 연속이다.
지난 번 ‘스페이스 22’의 임재천씨 전시와 ‘브레송’의 문진우씨 전시 오프닝에서 사용했으나,

사진을 몇 장 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레쉬를 터트린 사진은 아예 나오지도 않았고,

그 외의 사진도 노출부족으로 화면이 대부분 어두웠다.
반평생 사진을 찍어 왔지만, 이렇게 일을 망친 적은 별로 없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매뉴얼을 자세히 읽었으나, 뭐가 잘 못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프로그램을 다시 깔아야 한다는 얘기도 했다.

‘라이카 V-Lux’는 2010만 화소에다. 감도가 12,800이라 어두운 실내에서도 다 찍을 수 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3cm 거리에서 접사가 가능하고 광각25미리에서 망원400미리까지 되는 줌렌즈가 고정된 카메라로 못 찍을게 없었다.

너무 꿈같은 기능에 장난감 같은 느낌이 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예전의 Nikon COOLPIX P310을 다시 사용했다.
다들 라이카를 왜 쓰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이 카메라가 더 가볍고 편하다고 얼버무렸다.
그러다 어저께 황규태 선생으로부터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는 전화를 받아 라이카를 다시 가져 나갔다.

인사동은 실외라 괜찮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다시 시험할 속셈도 있었다.









약속한 ‘한일관’에는 원로사진가 황규태선생을 비롯하여 강운구, 한정식선생도 계셨다.

냉면에다 소주까지 한 잔 하고, 모처럼 세 분이 함께한 자리라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초점 맞추느라 렌즈가 왔다 갔다 했지만, 잘 찍혀 주었다. 되돌려 확인해 보았으나, 이상 없는 것 같았다.






커피까지 마시고 헤어진 후, 다시 인사동을 찍기 시작했다.

아내의 전시가 예정된 ‘아라아트’에서 공윤희씨와 울산의 오세필씨를 만나 찍기도 했다.

사진을 잔뜩 찍어 와서 컴퓨터에 옮겨보니, 움직이는 사람은 모두 이중으로 겹쳐 있었다.

촬영 나갈 때 돋보기를 가져가지 못한 게 후회막급이었다.








얼마 전에는 니콘으로 찍은 사진을 올렸는데, 어느 페친은 “역시 라이카는 색감이 다르다”는 댓글을 올렸더라.

대부분의 국민들이 명품명품 노래를 부르지만, 사진인들도 라이카라는 명품에 자유롭지 못하다.







갑자기 우스게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옛날에는 대부분 한 식구가 한 방에서 비좁게 살았다.

자식들이 잠든 것을 확인한 두 내외가 사랑놀음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좀 다르게 하느라 벽치기를 시작했단다.

그러자 벽의 울림에 선반에 올려 둔 소쿠리가 갑자기 떨어져 잠자던 아들놈 머리 박에 쿵 떨어졌다고 한다.


자는 척 하던 아들 놈, 왈! “에이! 평소 하던 대로 하지...”


사진, 글 / 조문호











한겨레21 / 김순경의 맛 기행

밥 같은 집, 세월을 이겼네
이름났어도 주인이 안 보이면 소개에서 탈락
늘 변화를 거듭하며 성장해가는 나의 단골 맛집 20

 

 

 

 

 

<한겨레21>이 창간 20주년을 알려왔다. 우리 옛말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강산이 변해도 두 번은 변했다. 나의 ‘21’ 연재는 창간을 앞두고 있던 1994년 봄, 오귀환 부장(2대 편집장)과 창간 준비를 위한 만남의 자리에서 별미집과 음식에 관련된 연재 이야기를 꺼낸 것이 시작이 됐다. 말은 그럴듯했지만, 전국의 그 많은 음식점들 중에 옥석을 가려 매주 1곳씩 소개하는 책임이 만만치 않았다.

 

연재가 1년쯤 이어진 뒤에는 독자들도 호흡을 같이하며 힘을 보태주었다. ‘21’을 받으면 맨 앞에 실린 편집장의 글 ‘만리재에서’와 맨 뒤의 별미집 소개부터 읽는다거나, 창간호부터 한 회도 거르지 않고 스크랩을 했다는 독자들의 글이 후기로 오를 때는 참으로 고맙고 힘이 되곤 했다.

 

 

1세대는 타계하고 도시 개발에 밀리고

 

 

대학 캠퍼스에서는 <뉴스위크>나 <타임> 대신 ‘21’ 제호가 보이도록 접은 <한겨레21>을 뒷주머니에 꽂고 다녀야 시선을 받는다고 할 정도로 바람을 일궜던 덕분에 ‘21’에 소개되는 음식점들도 즐거웠다. 가는 곳마다 얌전한 젊은이들이 조용히 찾아와 음식을 먹고 가는 모습이 늘고 있다며 반가워했고, 3~4년이 지나면서부터는 고객이 세대교체가 되고 있다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10년이 지나고 또다시 10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 많은 것이 변하고 또 변해가고 있다.

 

예전 사람들 말에 말과 음식만큼 변할 줄 모르는 것이 없다고 했지만, ‘21’에 소개된 별미집들도 겉모습으로는 많은 것이 변했다. 북한의 향토음식을 전해준 실향민 1세대 주인들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들이 저세상 사람들이 됐고, 지방의 이름난 장터국밥집의 지역문화재급 음식장인들도 차례로 타계하며 이제는 그 기록조차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당시 유명세를 자랑하던 서울의 토박이 음식점들도 더러는 사람들의 입맛이 변하면서 아예 간판을 내렸거나 도시 개발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곳이 적지 않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변하고 있는 세상의 많은 것들과 비교하면, 아직은 옛 모습 그대로 크게 변하지 않고 이어져오는 곳이 내력 있는 음식점들인 것 같다. 1대조에 해당하는 원조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손맛을 아들딸들이 물려받고 다시 3대로 이어지며 가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곳을 청바지 뒷주머니에 ‘21’을 꽂고 갔던 젊은 청년들이 사회 중견 인사가 되고 가장이 된 지금도 꾸준한 골수 단골이 되어 찾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음식의 기본 바탕을 이루는 창업주의 정신과 늘 먹어도 물리지 않고 인이 박이도록 끌리는 맛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음식은 삶의 근본을 이루는 기본 요소 중 하나다. 햇빛과 공기, 물, 세 가지는 타고나면서부터 주어지는 자연의 선물이라지만, 음식은 같은 수준의 필수 요소이면서 선택의 여지를 지녔다. 그 선택 기준이 삶의 질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특히 하루 한 끼를 밖에서 해결하는 직장인들에게는 음식의 선택이 인생을 바꿔놓는 행운이 되고 불행을 초래하기도 한다.

 

 

 

 

 

1. 을밀대/ 냉면·편육/ 서울 마포구 염리동 249(마포KT 앞)/ 02-717-1922
2. 역전회관/ 선지해장국·바싹불고기/ 서울 마포구 염리동 173-21/ 02-703-0019
3. 구마산/ 추어탕·갈비구이/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43(미원빌딩)/ 02-783-3269
4. 영등포복집/ 참복매운탕·복수육/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3가 7-14/ 02-2678-3467
5. 고려삼계탕/ 삼계탕/ 서울 중구 서소문동 55-3/ 02-752-2734
6. 무교동북어국/ 북엇국/ 서울 중구 다동 173/ 02-777-3891
7. 하동관/ 곰탕/ 서울 중구 명동1가 10-4 / 02-776-5656
8. 명동함흥면옥/ 함흥냉면/ 서울 중구 명동2가 25-1/ 02-776-8430
9. 이문설렁탕/ 설렁탕·수육/ 서울 종로구 견지동 88/ 02-733-6526
10. 시골집/ 안동장터국밥·바싹불고기/ 서울 종로구 인사동 230/ 02-734-0525
11. 문화옥/ 설렁탕·우족탕·꼬리곰탕/ 서울 중구 주교동 118-2/ 02-2265-0322
12. 평양면옥/ 냉면·만둣국/ 서울 중구 장충동1가 26-1/ 02-2267-7784
13. 만두집/ 만둣국·녹두전/ 서울 강남구 신사동 661-1/ 02-544-3710
14. 한일관/ 동판불고기·갈비탕/ 서울 강남구 신사동 619-4/ 02-732-2002
15. 평안도찹쌀순대/ 돼지국밥·찹쌀순대/ 서울 강남구 역삼동 820-2/ 02-553-3234
16. 평양집/ 양·곱창구이·내장탕/ 서울 용산구 한강로1가 137-1/ 02-793-6866
17. 어도횟집/ 자연산활어회·매운탕/ 서울 강남구 논현동 99-1/ 02-548-7766
18. 대성집/ 도가니탕/ 서울 종로구 교북동 87/ 02-735-4259
19. 문경산골메밀묵/ 메밀묵·청국장/ 서울 송파구 가락동 70-10/ 02-443-6653
20. 박찬숙순대(경상도집)/ 순댓국·머리고기/ 서울 마포구 서교동 355-1/ 02-336-9909

 

 

옛이야기 들어줄 일 없는 집들도

 

 

그런 만큼 소개되는 음식점의 선별은 주인의 인품과 성실성이 첫째 조건이 됐다. 그다음이 음식 맛인데, 이 역시 음식의 내용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외했다. 따라서 아무리 유명한 음식점이라도 식사 시간에 주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곳은 몇 번이고 돌아섰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선택된 음식점들은 주인과 고객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소통하고 웬만한 경기 변동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고 변화에 민감할 이유도 없이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며 주인과 고객 모두 변하지 않고 대물림되고 있다.

 

나의 단골집이 된 음식점들도 면밀하게 살펴보면 늘 변화를 거듭하며 성장하고 있다. 서울곰탕의 본포인 하동관은 옛 수하동(청계천 입구)이 재개발되면서 명동 외환은행 뒤편으로 옮겼고 출가한 딸이 여의도에 직영점을 냈다. 용산역의 명소이던 역전회관은 용산역 재개발로 역전과는 전혀 상관없는 마포 돼지골목(용강동)으로 옮겼다. 터주골로 문을 연 무교동북어국은 외관을 깔끔하게 단장하고 ‘터주골’이란 옛 이름을 ‘무교동북어국집’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또 ‘21’에 소개되면서 서울의 100년 음식점 1호로 정확한 내력이 밝혀진 종로통 이문설렁탕도 종로타워 뒤편에서 조계사 건너편으로 옮기며 100년 터전을 다져놓은 옛 건물이 철거를 앞두고 있다. 그리고 종각과 대각선으로 마주하고 있던 한일관은 강남 압구정동으로 옮겨 새로운 위상을 펼쳐내고 있다.

 

그 밖에 여의도의 추어탕집 구마산은 MBC와 가까운 미원빌딩으로, 창신동 형제추탕은 하월곡동을 거쳐 평창동 예고 앞으로 이전했다. 만두집과 명동돈가스·명동교자·명동함흥면옥·명동할머니오징어찌개 등은 옛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20주년 기념호를 들고 찾아간들 옛날 이야기를 실감나게 들어줄 주인공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다시 단골이 되어

 

나의 단골집들은 지금도 하루 한두 끼니는 음식점을 찾아가야 하는 일상을 살고 있는 나에게는 내 집 음식처럼 입에 익은 음식을 차려낸다. 오랜만에 그중 몇 곳을 골라 다시 한번 선보이고자 한다. 다시 찾아가 재확인한 결과 단골이 되어도 괜찮은 집들이다. 언제 가도 믿고 먹을 만한 음식을 차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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