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날 24일 정오 무렵, 그랜드 하얏트 호텔 (2층 낙산홀)에서

박정숙씨 아들 최용석 군과 조정호, 김순화씨 딸 조은겸 양이 결혼식을 올렸다.

 

사랑스러운 막내 조카 은겸이가 추석을 앞두고 시집을 간 것이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너무 좋아 춤을 너울너울 추셨을 거다.

막내 손녀로 태어 나 어머니 사랑을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많이 받아 그런지, 수많은 조카 중에 은겸이 처럼 인정 많고 착한 조카는 없다.

멀고도 먼 정선 만지산 할머니 묘소에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꽃을 사 들고 찾아왔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는 전시회는 어떻게 알았는지 매번 찾아온다.

 

지난달 인사동에서 열린 정영신의 혼자 가본 장항선 장터 길전시에는

결혼할 최용석 군을 비롯하여 시어머니가 될 박정숙 여사도 모시고 왔었다.

결혼하기도 전에, 시어머니 될 분께서는 인정이 많다며 은겸이 칭찬을 한다.

 

지난 24일은 은겸이 시집가는 날이라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식장인 하얏트 호텔은 동자동에서 멀지 않지만,

정동지를 대동하려면 녹번동부터 들려야 하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은 맞추었으나, 호텔이라 낯설기 그지없었다.

어떤 연유로 호텔 식장을 잡았는지 모르지만 지나친 낭비였다.

돈 한 푼 내지 않으면서 탓할 처지는 아니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식장에 들어가니, 반가운 이산가족이 다 모여 있었다.

결혼식 치루는 형님 댁 조카 조웅래, 조향, 조지향 가족을 비롯하여

돌아가신 형님 딸 조봉숙도 와 있었다.

 

조영희 누님의 조카 박형준, 박홍전, 박유전 가족을 비롯하여

남동생 조창호의 딸 조아라와 여동생 조진옥과 김종성의 딸 김소원,

아들 조햇님을 비롯하여 귀여운 손녀 하랑이까지 와 있었다.

집안 대사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가족 총 동원령이 발동한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신랑 신부가 입장하여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았는데,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 입은 은겸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결혼식 주례도 따로 없이, 신부 아버지인 형님이 대신하여 서로 위해주며 잘 살라는 덕담을 했다.

축가에 이어 신랑 누님의 피아노 연주도 이어졌다.

 

예식이 끝난 후 기념사진을 찍는 중에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먹기 바쁘게 다른 음식이 나왔다. 부담스럽지만 맛은 있었다.

결혼식장을 장식한 수많은 생화도 하객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싸 주었다.

 

마침 고향의 형님 친구 네 분이 찾아와 반겼는데, 누가 누구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릴 때 본 형님들이 할아버지가 되었으니, 어찌 기억할 수 있겠는가?

저마다 손에 꽃을 든 할아버지 기념사진만 찍었다.

형님들께 죄송하지만, 내가 더 늙은 것 같다.

세월이 참 무정 타.

 

그런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접수대에 타고 온 차량번호를 적었는데, 치매 끼가 있어 번호를 잘 못 적은 것 같다.

주차장 출구 차단막이 올라가지 않고, 주차비가 45천원이나 나왔다.

차를 되돌리고 싶지만, 대기한 차들 때문에 돌릴 수도 없었다.

반세기 동안 운전한 중에 최고로 많이 낸 주차비가 아닌가 생각된다.

더구나 없는 사람에게 보탠 것이 아니라 가진 놈 아가리에 털어 넣은 게 더 분했다.

“늙으면 죽어야지”를 곱씹는다.

 

최서방, 그리고 은겸아! 돈은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더 중요하단다.

행복하게 잘 살아라.

 

사진, / 조문호

 

 

 

 

지난 31일은 돌아가신 어머니 기일이었다.

20여 년 동안 정선 만지산에 어머니를 모셔 두고 제사를 지냈는데,

묘지 벌초하는 모습을 지켜본 조카의 만류도 만류지만,

거리가 멀어 자주 올 수 없다는 가족들의 원망에 손을 들고 말았다.

 

어머니 유골을 일산 '하늘문 납골당에 모신 후, 제사마저 인천 형님 댁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인천 형님 댁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한쪽에서 예배를 보았으나

그 다음부터 아예 제사상을 차리지 않고 예배만 보아 발길을 끊은 것이다.

밥 한 그릇만 떠 놓아도 혼자 제사 지내는 게 속 편했다.

 

, 무신론자로 제사마저 부질없는 줄 알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제사로 어머니를 기리고 싶은 것이다.

결국 융통성 없는 기독교 교리가 가족 간의 마음을 상하게 한 촉매 역할을 한 셈이다.

 

이번 기일에는 어머니를 모셔 둔 하늘문납골당에서 가족들이 모이기로 했다.

누님 조영희를 비롯하여 형님 조정호, 동생 조창호, 조진옥, 매제 김종성,

그리고 정영신 동지를 비롯한 조카 박홍전, 조아라, 조은겸 등 10명이

 한자리에 모여 어머니를 기리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다들 사는 게 그렇게 바쁜지 집안에 길흉사가 없으면 일 년에 한 번도 만나기 어렵다.

모두 수도권에 살면서도 어찌 남보다 못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모처럼 집안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다.

형수가 아파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마저 퇴원을 앞두고 한 것이다.

그리고 막네 조카 은겸이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도 주었다.

은겸이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끔찍이도 끼고 돌아, 누구보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실 것 같았다.

 

또 하나 놀라운 소식은 막내 여동생 진옥이가 화가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우연히 매제 김종성씨가 집사람이 상을 받았다며, 휴대폰으로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수상작보다 자신의 색깔이 뚜렷한 일련의 그림 이미지에 더 놀란 것이다.

남편 뒷바라지나 하며 자식을 키운 아낙으로 살아 온 줄 알았는데,

긴 세월동안 동생이 뭘 했는지도 모르고 살았으니, 귀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기야! 나 역시 여태 사진집을 출판하거나 여러 차례 전시를 열었지만,

한 번도 식구들에게는 연락하지 않았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스스로를 내 세우기 싫어하는 집안 내력인 것 같았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때 잠깐 문 닫았던 진주청국장 그만 두겠다는 조카 홍전의 말에 또 한 번 놀랐다.

진주에서 여의도로, 여의도에서 서초동으로 옮겨가며 돈을 많이 벌었으나, 미련 없이 손을 털기로 했단다. 

누님은 자신이 만들어 온 독특한 경상도 음식 맛이 사라질까 아쉬워하지만,

조카 홍전의 쉽지 않은 결단에 존경심이 일었다.

고생하는 어머니를 편히 쉬게 하려는 효도에서 비롯되었지만,

벌면 벌수록 강해지는 돈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욕심은 무섭기 때문이다.

 

모처럼 이산가족이 한자리에 만나는 즐거운 시간이 되었는데.

도대체 누굴 위해 사는지, 산다는 게 뭔 지 모르겠다.

고향도 가족도 잊은 채, 어찌 이리 비정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사진, / 조문호

 

 

 

어머니! 그립습니다.

정선 만지산에서 ‘하늘문 납골당으로 모신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군요.

적막한 산골짜기 보다야 아파트 같은 납골당이 좋겠지요?

끝까지 어머니를 지키지 못한 자식놈을 용서하십시요.

 

만지산에 계실 땐, 메주알 고주알 세상 이야기를 전해드렸으나

이젠 기일이 아니면 어머니께 말씀드릴 겨를이 없습니다.

 

이장을 결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만지산 집에 불이 났습니다.

모든 걸 태워 몸 둘바를 몰랐으나,

정선을 떠나라는 어머니의 계시로 알고 만지산에 대한 미련은 접었습니다.

 

모든 게 무위로 끝나는 세상이치지만, 지난 세월의 그리움은 지울 수가 없네요. 

그동안 제일 무서운 돈병은 들지 않고 잘 살았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삶, 하던 일 마무리하고 따라 가겠습니다.

 

오늘따라 어머니의 십팔번 ‘삐빠빠 룰라’가 유난히 듣고 싶습니다.

 

불효자식 문호가 기도 올립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어머니 기일인 지난 12 정오무렵, 정동지와 함께 고양 하늘문납골당으로 갔다.

그곳에는 누님 조영희, 형님 조정호, 동생 조진옥을 비롯하여

형수 김순화, 매부 김종성, 조카 조웅래, 박홍전 등 여러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가족도 이런 날이 아니면 만날 수 없을 정도로 다들 뿔뿔이 흩어져 바쁘게 산다.

반가움에 지난 날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위안한 하루였다.

 

 

 

 

 




양재동에서 ‘진주청국장’ 밥 장사하는 조영희 누님께서 엊그제 팔순을 맞았다.
옛날 같으면 고려장에 들 연세지만, 아직도 주방에서 고군분투하신다.
한 평생을 진주에서 여의도로, 양재동으로 옮겨가며 청국장만 끓여 왔다.
이제 딸 박홍전이에게 식당을 맡겨놓고, 주방에서 맛만 지키신다.
한편으론, 그 지긋지긋한 일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사니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팔순을 맞아 점심이라도 같이 먹자는 연락을 받았는데, 가게 옆 일식집으로 오란다.
‘진주청국장’은 손님이 많아 편하게 드시지도 못하지만, 외식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것도 전 가족이 모이는 팔순잔치가 아니라, 남매만 모이는 오붓한 자리였다.
형님 조정호와 동생 조창호, 조카 조아라, 동지 정영신씨 등 여섯 명이 함께 한 것이다.
작은 누님은 몇년 전 돌아가셨으나, 여동생 조옥희가 급한 일이 생겨 오지 못했다.






평소에는 만나기 힘든 형님께서 나와 반갑기 그지없었는데, 지난 년 말 퇴임 하셨단다.
팔순을 이년 남겨두고 일손을 놓았지만, 시원섭섭한 모양이시다.
재벌총수 댁 집사로서 남의 살림을 도맡아 살다보니, 식당 누님처럼 변변히 노는 날도 없었다.






누님과 형님께선 돈 걱정 안하고 살지 모르지만, 내가 볼 때는 불행하기 짝이 없었다.
좋아하는 취미생활 한번 즐기지 못한 채, 평생 돈에 끌려 다닌 게 아니던가?
동생 창호는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산전수전 다 겪었으나,
이젠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생활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사실, 우리가족은 노는 데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다.
형님은 젊은 시절엔 한량이었다. 사교 춤과 당구 등 재주가 다양한 분이라 말씀드렸다.
“이젠 ‘완 투 쓰리 카바레”도 가시고, 당구장도 열심히 다니며 즐겁게 사시라”고...






아직도 철이 안 들었다고 탓할지 모르지만, 돈은 없어도 내가 제일 잘 살았다.
나처럼 꼴리는 대로 살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 아니던가?
가족을 고생시킨 무책임은 면할 수 없지만, 오히려 돈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팔순을 축하하는 술잔을 들며 나눈 대화는 요즘 사는 이야기는 뒷전이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추억을 먹고 산다 듯이, 다들 옛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어린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사연들이 줄줄이 나왔는데,
한국전쟁 때 불바다가 되었던 고향, 영산 이야기도 나왔다.






낙동강전투의 마지막 방어지역인 영산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한 복판이었다.
내 나이 세 살 때라 기억이 흐릿하지만, 딱 한 가지만 생각이 또렷하다.
남산 밑의 미나리꽝을 지나가는데, 총 맞은 군인이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물 달라 통사정하고,
옆에 선 군인은 그냥 가라며 총부리로 위협했다.





등에 업힌 나를 돌려 업고 도망치던 엄마의 거친 숨소리는 아직도 생생하다.
왜 위험한 전쟁터를 지나가야 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는데. 가게 된 사연을 누님께서 들려주었다.






식구들은 모두 안전한 곳으로 피난하였는데,
동네가 불바다가 되는 바람에 집에 숨겨 둔 패물이 걱정되어 가셨다는 것이다.
당시 도정공장을 운영할 때인데, 쓰임세가 큰 아버지 몰래 자식들을 위해
패물을 사모아 두었다는데, 그게 걱정되어 가지러 가셨다는 것이다.
좌우지간, 그 놈의 돈이 무엇이기에 목숨까지 걸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다음에 시간나면 녹음기 챙겨 다시 와야겠다.
누님 돌아가시면,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가족사는 영원히 파 뭍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젠 형님이 한가해졌으니, 정선 만지산에 계신 엄마 산소에서 봄놀이 한번 하자고 제안했다.
가족과의 봄놀이도 이제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겠는가?






술이 얼큰하여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차 한 잔 하러 ‘진주청국장’으로 몰려갔다‘
식당은 바쁜 시간이 끝나 한가했고, 조카 홍전이도 한 숨 돌리고 있었다.
이제 오십에 가까운 조카가 시집도 가지 않은 채, 일에 파묻혀 사는 것을 보니 불쌍했다.
술김에, 늙은 외삼촌과 결혼하자는 흰소리를 지껄이며 낄낄대기도 했다.






누님께선 틈만 나면 맥주 드시는 것이 낙인지라 식사에 소홀한 것 같았다.
우야튼, 밥 잘 챙겨 드시고, 백세까지 팔팔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노세 노세 젊어 노세”가 아니라 “노세 노세 늙어 노세”로 노래도 바꾸자.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조카 박형준 아들 담온이의 돌찬치가 있어 명동에 갔습니다.

 

오랜만에 조카 형준이 가족과 영희 누님, 정호 형님, 동생 창호와 형수님, 제수씨까지 모두 모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조카 조웅래, 조 향, 조지향, 조영란, 박홍전, 박유전,

그리고 하나 뿐인 아들 햇님까지 오랫만에 모두 만나 엄청 기분이 좋았습니다.
죽기 전에 이렇게 한 자리에서 다 볼 수 있는 자리가 몇 번이나 더 있겠습니까?
한 잔 마신김에 ‘봄날은 간다‘에서부터 ’앵두나무 우물가에 바람난 동내처녀 도망간 노래까지 다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전에는 형수님이 오시면 늘 조카 웅래와 함께 왔는데, 이제는 따로 살아서인지 따로 국밥입니다.

뒤늦게 웅래와 조카 며누리가 나타나니 형님께서 슬그머니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오기 전엔 돌아가신 엄마처럼 내 그릇에 열심히 음식을 챙겨 주시더니,

갑자기 나가시길래 딴 약속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아들내외 앉으라고 슬쩍 일어난 것입니다,

나중에 보니 한쪽 구석에 앉아 멀리서 자식과 손자들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갑자기 코 끝이 찡해졌습니다. 그 놈의 자식이란게 도대체 무엇인지?

모든 건 내리 사랑이란 걸 다시 깨달았지요.

어저께는 가수 최백호씨의 ‘효교’에 대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요지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그 영혼이 제일 좋아하는 자식한테 옮겨가니 부모를 잘 모시라는 말인데,

그 '효교'의 당위성을 입증한 한 사례였습니다.

 

그 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엄청 많이 웃었습니다.
별 영양가 없는 너스레라도 떨며 가족들과 항상 웃고 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笑門萬福來'

 

 

사진: 조햇님, 조문호 / 글: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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