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전 날 밤은 고향 생각에 잠을 설쳤다.

영산은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만세운동을 벌인 고장이다.

그래서 삼일절이 다가오면 옛 생각이 떠오른다.

 

고향 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와 기개는 대단했다.

그 독립정신을 되 세기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바로 '영산삼일문화제'다.

옛 부터 정월대보름이면 즐기던 줄다리기와 쇠머리대기를

60년 전부터 시작된 삼일문화제에 끌어들인 것이다.

 

삼일문화제는 중요무형문화재인 줄다리기와 쇠머리대기 외에도

구계목도, 문오장, 연등놀이 등 많은 전례 민속놀이를 주축으로 3일 동안 치루어 진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진영을 나누어 벌이는 줄다리기다.

지금은 고향친구인 신수식씨가 이어받았지만, 조성국선생의 열정으로 재현된 민속놀이다.

 

60년 전 삼일문화제가 처음 열릴 때는 중학생 시절이다.

그 당시 부친의 친구끼리 동부와 서부 대장을 나누어 맡았는데,

적장이 된 후로는 원수처럼 으르렁 거렸지만, 지금의 대선 판처럼 추잡하진 않았다.

우리 집은 동부의 거점이 되어 며칠 동안 풍물패 술과 음식 대느라 잔치집처럼 북적였다.

 

 줄다리기도 지금처럼 학교운동장에서 벌인 것이 아니라 영산 큰 들에서 벌였다.

장수들이 말 위에서 칼춤을 추며 진영을 지휘했는데, 줄의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와 함께 터지는 군중들의 함성과 자욱한 흙먼지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밀리고 당기는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동안 곁 줄이 끊어져 넘어지는 사람이 여기 저기 생겨나기도 했으나

승부가 판가름 나는 긴박한 순간들은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고향을 등진 후에도 삼일절이 되면 찾았으나, 카메라 장비를 몽땅 잃어버리는 낭패도 당했다.

삼일문화제는 전국에서 많은 사진인들이 몰려오는데, 카메라를 노리는 전문절도단에게 털린 것이다.

전야제가 있던 날, 고향친구 조대권을 만나 다방에서 차 한 잔 하고 나오니

카메라가방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사진인들이 장비를 차에 두고 간편한 카메라만 휴대하는 습관을 노린 것 같았다.

 

파출소에 카메라 분실을 알리며 사진인에게 카메라를 조심하라는 안내를 부탁 했는데도

그 이튿날 행사장에서 세 사람이 카메라가방을 도둑맞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분실한 사람 중 두 사람은 잘 아는 사진가였는데, 나처럼 오래된 차는 차문을 쉽게 열었으나

문이 열리지 않는 좋은 차는 차 유리를 깨어 훔쳐 간 것이다.

 

내가 도둑맞은 장비만 해도 중소형 카메라 바디 세 개에 달린 갖가지 렌즈를 합하면

분실 액수가 만만찮은데, 그 속에는 빌려 온 핫셀브라드 망원렌즈가 있어 더 걱정되었다.

그 외에도 당시 '이미지 라이프'라는 취재대행업을 했는데, 부탁받은 일 때문에 난감했다.

오래 전 찍어 둔 사진으로 어렵사리 위기를 모면한 기억도 난다.

 

근 이십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 일만 생각하면 온 몸에 힘이 빠진다. 

분신이나 마찬가지였던 카메라를 모두 잃었으니,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카메라를 잊어버린 후로는 삼일문화제에 가기가 싫어졌다.

그 대신 삼일절만 되면 탑골공원에서 선열들을 기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런 저런 생각하느라 늦잠에 빠져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오전10시가 가까웠다.

지하철 타러 서울역으로 달려 갔으나 정신없이 타다보니 반대방향의 열차를 탔는데,

남영역에서 내려 갈아타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종로3가역까지 몇 구역 되지도 않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리 서둘렀는지 모르겠다.

 

현장에 도착하니 오전11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탑골공원에서 열리는 추념식은 끝났는지 공원은 텅 비었고,

탑골공원 주변에는 민족지도자대회나 시민대회라는 이름의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신명을 돋우는 풍물패를 찍고 있을 무렵, 생각지도 못한 장경호씨를 만난 것이다.

 

그 곳에서 최석태를 만나기로 했다지만, 목부터 추기자며 인사동으로 옮겼다.

술시가 이른지 ‘유목민’도 ‘사랑채’도 모두 문이 잠겨있었다.

둘 다 아침을 먹지 않아 ‘부산식당’으로 갔다.

 

모처럼 시원한 생태탕으로 반주까지 곁들였는데, 그날따라 장경호씨가 술을 아꼈다.

하기야! 매일 같이 마시는 술을 이른 시간부터 취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식사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최석태씨가 나타났다.

 

최석태씨 따라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즐거운 찻집’이라는 처음가는 곳이었다.

술 마시다 차 마시는 별난 자리지만, 아마 그 곳에서 우문명씨를 만나기로 한것 같았다.

그 날 술값과 찻값을 모두 최석태씨가 계산했지만, 술값은 아깝지 않은데 차 값은 왜 그리 아까울까?

 

‘유목민’으로 옮겼더니, 그때 사 전활철씨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소주 한 병을 다 마셔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술도 땡긴다고 마구 마시는 것이 아니라 계산해 마셔야 했다.

하루종일 버텨내기 위해 막걸리를 아껴 마신 장경호씨가 이해되었다.

 

‘유목민’ 전활철씨 말로는 가게 문 열 때 들어와 문 닫을 때 간다지만,

술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람이 그리운 것 같았다.

그런데, 장경호씨와는 왜 매번 길이 엇갈렸는지 모르겠다.

 

인사동을 사랑한다는 인사동사람은 많지만, 다들 말로만 사랑한다.

얼마 전 ‘나무화랑’에서 ‘인사동이야기’ 전시할 때 알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장경호 처럼 인사동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인사동하면 천상병시인 떠 올리듯, 먼 훗날 화가 장경호 이름을 떠 올릴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일봉 조성국(1919-1993)선생은 ‘한국민예총‘ 초대 공동의장을 역임하신 분으로,

영산줄다리기(당기기)의 기능보유자였다.



'창녕을 사랑하는 사람들'카페에서 스크랩



경남 창녕군 영산에서 태어 난 선생께서는 일제 때 맥이 끊겨 잊혀져가던

영산줄다리기를 되살려 마을 놀이로 자리 잡게한 장본인이다.





영산줄다리기는 애살에 의해 만들어지고, 진잡이로 신명을 일으키며 답합으로 이끄는 대동문화다.

선생께서는 1980년대부터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지방대에서 줄 바람을 일으켰는데,

그 신명난 대동놀이로 삼일독립정신을 일깨우며, 민주화에 불씨를 지피기도 했다.





1950년대부터 10여 년 동안 영산중학교에 근무하는 등 향토교육에도 기여하셨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며, 양파 품종을 개발해 보급하는 등 농촌경제를 일으키려는 향토애도 대단하셨다.

창녕이 양파 주산지가 되도록 이끌며 '양파재배법'(1972)을 비롯한 여러 권의 문화관련 책을 펴내기도 했다.





난, 조성국선생님과의 인연이 남다르다.

영산중학교 은사이기도 하지만, 아버지 친구 분이라 어린 시절 기억들이 너무 새록새록 하다.

학기가 바뀌어 교실에 들어와 처음 하신 말씀은 아직까지 기억난다.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얽은 자신을 소개하며, “곰보도 정이 들면 구멍구멍마다 든다”며 웃기셨다.





국어와 농업을 가르쳤는데, 선생님의 수업시간은 유달리 기다려졌다.

가끔 여러 학생에게 각자의 대사로 연결하는 연극형식을 취하기도 했는데,

수업의 지루함을 해소시키며 머리에 주입시키는 선생의 교육방식은 틀에 박힌 다른 분들과 사뭇 달랐다.

한 번은 내게 여자 배역을 맡겼는데, 너무 간드러진 목소리를 내 친구들로 부터 웃음을 산 기억도 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선생님께서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당분간 못 나오신다고 했지만, 동내 소문은 “빨갱이로 잡혀 갔다”는 것이었다.

어렵사리, 아버지께 여쭈어 보았더니 교원노조에 연루돼 구속되었다고 하셨다.

석방되어 해직된 후로는 농사꾼으로 변신해 양파재배와 줄다리기를 정착시키는데 이바지했다.





그 이후 고향을 떠나 와 잊고 있었는데, 1970년대는 인간문화재의 권익과

올바른 전통 계승을 위해 '한국인간문화재연합회' 결성을 주도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 이후 어느 날, 서울에서 열린 ‘민예총’ 창립총회에서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것이다.

고은시인과 미술평론가 김윤수선생, 조성국선생. 세분이 '민예총' 초대 공동의장으로 선임되었고,

신경림시인은 사무총장, 실무를 관장하는 사무처장은 김용태씨가 맡게 되었다.





너무 반가워 이런 저런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블로그에 올리려 찾아보니 한 장도 없었다.

인터넷을 뒤져 보아도 선생의 사진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오래된 필름이라 정선에 쳐 박아 둔 모양인데, 필름 찾아 스캔 받는 일이 찍는 일보다 더 급한 것 같았다.





문화운동, 지역운동, 사회운동으로 기여한 공적이 큰 분이지만, 세상에 덜 알려진 것은 틀림없다.

부산대 명예교수 채희완씨는 장일순선생과 조성국선생께서 닮은 데가 너무 많다고도 했다.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시며 당대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인품까지 꼭 같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꼭지는 ‘3,1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에 참여한 영산줄다리기를 소개하는 면이다.

그러나 오늘의 줄다리기가 있도록 만든 조성국 선생에 대한 자료가 너무 없는데다,

공적에 비해 너무 알려지지 않아 선생님 이야기부터 늘어 놓게 된 것이다.




지난 26일부터 시작된 3,1일 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3,1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에

영산줄다리기가 참여한다는 소식을 진즉 듣고, 행사를 기록하기 위해 찾아 간 것이다.

더구나 조성국선생님께 줄다리기를 물려받는 신수식씨는 초등학교 동창이 아니던가.

참여한 보존회 회원 대개가 고향 선후배인데다 사촌까지 있었다.





신수식, 차재현, 황태암, 장상록, 김정식, 이일선, 차창규, 조찬호, 이철식,윤호웅, 김건수,

김홍광씨 등 향에서 열 두 명이 올라왔는데, 두세 명 외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다들 몇 십 년을 떨어져 늙어 왔으니, 모를 만도 했다.





덕분에, 같은 서울 살지만 일 년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든 고향 동창까지 만난 것이다.

김상현씨와 송장식씨를 만났고, 줄다리기가 시작되는 3월1일이 되면

더 많은 고향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해마다 3,1절에 맞추어 열리는 영산 3,1문화제는 어떻게 하고 왔는지 물어보았더니,

서울 광화문줄다리기가 끝나는 즉시 내려 가야한다고 했다.

정말 불알에 요령소리 나게 됐다.





가닥 줄은 영산에서 가져왔지만, 엮고 밟고 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니 옛날 생각도 났다.

줄다리기를 전수받은 신수식씨의 능란한 지휘와 통솔력은 조성국선생을 너무 닮아 있었다.

기능에 이어 선생님의 정신까지 이어 받은 게 너무 장하고 고마웠다.





첫 날은 숙소에 띠라가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오랜만의 회포도 풀었다.

술 자리에는 서울 ‘에이스다원’ 대표이사인 오정혁씨와 직원 한 분이 합류하였고,

이차로 옮긴 ‘봄 여름 가을 겨울’에는 본 축전의 예술감독인 채희완씨도 오셔서 함께 했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듯이 기분좋게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3,1절 백주년을 맞는 오늘 다들 청계광장으로 나가자.

‘3,1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의 하이라이트인 줄다리기가 오후3시 부터 열린다.

광화문광장으로 줄을 옮겨 4시부터 줄다리기가 시작되니, 다들 신명난 한 판을 벌여 보자.


"이어~차, 이어~차, 이어~차"



사진, 글 / 조문호



























































































 

 

 

 

아! 이게 얼마 만인가?
산소에 조상님을 모셨지만, 고향을 등진지가 어언 십년이 가까워 오고 있다.
한 때는 영산에서 열리는 삼일민속문화제를 기록하기 위해 해마다 다니기도 했으나,

카메라장비를 행사장에서 몽땅 도둑만나면서 그 작업은 중단되었고, 발길마저 멀어진 것이다.


 

 



늘 돈 안 되는 사진 찍느라 고향마저 잊고 살았는데, 지난 13일은 모처럼 기회가 생겼다.

영산초등학교 45회 친구들의 모임이 매년 8월15일마다 고향에서 열렸으나,

광복절행사와 겹쳐 참여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이틀 앞 당겼기 때문이다.

더구나 안내장에 적힌 이승을 떠난 친구들의 이름 나열에 화들짝 놀란 것이다.

죽기 전에 친구 모습을 한번이라도 더 보고, 기록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찾았다.

시간이 맞지 않아 고물자동차까지 끌고 내려갔으니, 친구 만나는 대가도 수월찮게 든 셈이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한지라 만년교 돌다리를 건너 남산부터 올라갔다.

‘고향 길은 밤에 가도 돌에 채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오르는 산길이 편안하고 고즈넉했다.

마을 곳곳을 살펴보며 오래된 기억들을 하나하나 떠 올렸다

제일 오래된 기억으로는 한국전쟁통의 희미하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울 엄마 등에 업혀 남산 밑 미나리깡 뚝길을 가는데, 총 맞아 피 흘리던 군인이

물 좀 달라며 엄마치마를 부여잡았고, 옆에서는 그냥 가라고 총부리를 흔들었다.

등에 업은 나를 앞으로 돌려 업고, 내 뛰는 울 엄마의 거친 숨소리가 아직까지 벌떡거린다.

 

 

 


 

두 번째 기억은 50여 년 전, 제1회 영산삼일문화제의 기억이다.

올 해로 56회라니 반세기가 지난 일이다. 그 때의 하이라이트도 역시 줄다리기였다.

동부 대장은 아버지가 맡았고, 서부 대장으로는 아버지의 친구인 하점원씨가 맡았다.

우리 집은 동부 팀의 거점이 되어 몇 날을 술과 음식 장만하느라 정신 없었다.

줄다리기 행사를 지금처럼 운동장에서 벌인 것이 아니라 영산 큰 들에서 벌였는데, 줄의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하점원씨는 아버지의 친구지만, 진영을 나누고 부터는 원수처럼 으르렁 거렸다.

장수에게는 말이 제공되었는데, 말을 탄 채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했는지,

서부대장의 목검은 두 동강이가 났고, 아버지는 말에서 떨어지는 사태까지 벌어진 것이다.

포수가 쏜 신호탄으로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는데, 마른 논에서 이는 흙먼지와 함성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곁 줄이 끊어져 내동댕이치는 사람이 여기 저기 생겨나고, 계속 밀리고 당기는 줄다리기가 한 동안 진행되었다.

다들 논 턱에 힘을 실어 버텼으니 쉽게 끌려가지 않았는데, 그 긴박한 순간들은 정말 잊지 못할 장관이었다.

 

 

 


 

옛날에는 보름날 행사로 열린 줄다리기와 쇠머리대기가 독립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삼일문화제에 맞추어 열렸는데,

영산의 지식인이었던 조성국 선생이 계셨기에 올 곧은 전승이 가능했다.

중학생시절에는 국어교사로 계셨는데, 한 번은 “빨갱이라 붙들려갔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잘 아는 아버지에게 여쭈었더니, 별일 아니라 곧 석방될 것이라 하셨다.

문화의 힘으로 대동단결을 이루어내는 리더십이나 영산을 양파 주산지로 만드는 등 훌륭한 일을 많이 하셨다.

한 때는 '민예총'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고, 지역문화와 농업 발전의 양축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신 분이다.

 

 

 


 

영산은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삼일 독립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줄다리기, 쇠머리대기의

중요무형문화재를 비롯하여 구계목도, 문오장 단오제 등 많은 전례 민속놀이의 전승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낙동강전투의 마지막 보루로 치열한 격전을 치룬 곳이라 남산위에는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인간도 아니었던 전두환시절에는, 영산에서 유적을 발굴하다 이변이 생긴일도 있었다. 

전두환 조상 중 한 사람이 영산의 사또로 있다 떠날 때 만들어졌다는 공적비가 하나 출토된 것이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 덕에 남산의 전적비가 세워졌다는 이야기까지 들렸다.

 

 

 


 

세 번째 기억은 남산 밑 냇가에서 물놀이하다, 수식이 형이었던 신쾌식씨로 부터 혼줄 난 일이다.

물웅덩이에 있는 나를 향해 넓은 판지를 던져 물밑에 깔았는데, 헤어나지 못해 허우적거려야 했다,

자칫하면 익사로 연결될 번한 끔찍한 일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의 기억으로는 연극도 한 몫 했다. 제목은 기억에 없지만, 

국군으로 분한 이순경선생의 절망스런 절규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각인되어 남았다.

그리고 친구 조성호가 연지 못가에서 불었던 트럼펫 소리는 애간장을 다 녹였다.

얼마나 낭만적인 분위기에 동했는지, 그 때부터 트럼펫을 제일 좋아하게 되었다.

하금순의 꾀꼬리 같은 노래 소리도 생각났다.

 

 

 



사회에 첫발을 디뎌 ‘농협’에서 일했던 일도 떠올랐다.

'부산농협'에서 '김해농협'을 거쳐 고향까지 흘러들었는데,

애인이 찾아 와 함박산 약수터 여관에서 하룻 밤 지낸 적이 있었다.

자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이층 창문으로 날라 온 벚꽃 잎이 알몸 위에 흩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 녀는 잊었으나, 그 당시의 행복감은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직장의 무료를 달래기 위해 문 닫은 정미소에다 음악감상실을 차렸는데, 주로 시골 교사들이 단골이었다.

주말이면 부산에서 친구들이 몰려 와 날밤을 까기도 했는데, 이런 저런 추억에 빠지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집결지로 정해진 도천면의 ‘한우마당’을 물어물어 찾아 갔더니, 이미 20여명의 고향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구자훈, 김공조, 김이만, 김종석, 김종호, 문영태, 신규식, 신수식, 윤상고, 윤성관, 이상영, 이석중, 이세중,

이수만, 임성택, 조대권, 조성호, 황정철, 김순남, 하금순, 허영숙 등 하나같이 반가운 얼굴이었는데,

나만 늙은 줄 알았으나, 다 같이 늙어가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대권이가 “이빨이 와 그렇노?”라며 걱정스레 묻길래 “니 웃길라고 몇 개 빼고 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개구장이 같은 어린 시절은 오간데 없고, 다들 늙은이가 되어 점잔만 빼고 있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일을 보존하거나 전수하고 있는 신수식, 조대권, 김공조를 위시하여

문영태, 윤상고 등 고향을 지키는 고추 친구라고는 다섯 명 뿐이고,

서울, 부산, 마산은 물론, 인천, 구리, 성남, 충남 당진, 전남 영암 등 전국 각지에서 몰려왔다.

 

 

 


 

반가운 친구가 한 둘이 아니었으니, 얼마나 할 말이 많겠는가?

겁도 없이 주는 대로 여기저기 술을 받아 마셨다가 일찍부터 맛이 가 버렸다.

성호와 금순이는 노래까지 불렀으나, 난 이가 빠진데다 목소리까지 쉬어 끼일 군번이 아니었다.

몸 생각하느라 다들 술을 아껴 먹었는지 모두 멀쩡했는데, 성호와 나만 곤드레 만드레가 되었다.

‘꽃은 반만 핀 것이 곱고, 술도 반만 취한 것이 좋다’는 말도 있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해 되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다.

다들 술 마신 후 차를 끌고 가야하는데, 왜 난데없는 도천면에서 모였는지 모르겠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친구들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친구들이 고향을 찾았다면,

고향에서 즐기는 게 좋지 않겠는가? 이 먼 길을 고기 먹으러 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예전에는 이차로 부곡온천에 방을 잡아 밤늦도록 놀며 못 다한 아쉬움을 풀었는데,

한 낮에 술자리가 파하니,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게 늙어가는 징표인가?

 

 

 


 

한심한 생각이 들어, 나 혼자 영산의 곳곳을 살피고 다녔다.

예전에 살았던 고향집도 찾아보고, 음악실 했던 정미소 자리도 가보고,

잡초가 무성한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용서를 빌기도 했다.

결국은 부곡온천에 여장을 풀고 독수공방 지냈지만...

 

“친구야! 제발 오래 살 생각만 하지 말고, 재미있게 살아라.”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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