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갤러리인덱스’에서 열린 정영신의 ‘혼자 가본 장항선 장터길’

출판기념전은 많은 분의 성원에 힘 입어 잘 마쳤습니다.

 

장항선 장터 길에 함께해 주신 분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정영신은 반평생을 장돌뱅이로 떠돌았지만, 아직도 할 일이 많다.

코로나로 사람 접촉을 꺼리던 2년 전부터 혼자 열차를 타고

장항선 주변에 있는 충청도장을 떠돌았다.

 

무거운 카메라에 짓눌려 힘들게 장바닥을 휘젓고 다닌

그녀의 장터 순례길은 고향의 어머니 찾아가듯 즐거운 일이었다.

무슨 사명감 인양, 아무리 쪼들려도 장터 떠나는 늦추지 않았는데,

자기 좋아서 하는 것을 누가 말릴 수 있겠나?

 

장바닥을 떠돌며 사람 만나 정 나누는 것은 좋으나,

무거운 물건까지 사 들고 올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파김치가 되어 오던 그 지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결국 그 일을 마무리하여 책까지 펴낸 것이다.

돈 한 푼 없어도, 저지르고 부딪히니 되긴 되더라.

 

사라져가는 오일장과 삭막해지는 인심을 안타까워 하지만,

이 세상 어느 하나 사라지지 않고 바뀌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녀에겐 고향 같고 어머니 품속 같은 장터와 장터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지울 수 없다.

장터보다 장터 사람에 대한 애착이 더 깊다.

 

어쩌면 어머니의 마음 같은 따뜻한 인간애를 찾아 장터를 헤맨 것인지 모른다.

그가 펴낸 ‘어머니의 땅’에 실린 사진과 초창기 장터 사진의 연대나 접근 방식이 같은 데서도 알 수 있다.

 

아래에 옮긴 이광수교수의 사진 비평도 궤를 같이 한다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어떤 원형을 그리워하는 그리고 그것을 안타깝게 기록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근대주의의 휴머니즘의 세계에 뿌리내린 사진 세계다. 사라져버린 것을 애써 찾으려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변화한 모습, 그로 인해 사라져버린, 다시는 찾기 어려운 모습을 기록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려

것도 아니다. 변화에 방점이 있는 것보다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어머니의 심성을 찾는 것이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원형을 찾으려 돌아다니는 낭만주의자의 모습이 보인다.

원형은 있다, 가야 할 곳도 있다, 그곳은 꿈과 신화 속에 있는 게 아니고, 내 눈앞에 있다.

우리 마음의 고향, 뿌리 내리는 삶, 그 뿌리를 찾아 발길을 옮긴다. 이것이 정영신의 사진 철학이다.”

 

개막식과 전시 이튿날까지 다녀가신 분은 지난 25일 소개한 적이 있으나,

그 뒤부터 끝날 때까지의 사진은 힘들어 그대로 모아 두었다.

전시가 끝나고 막상 정리하려고 보니, 기억이 가물거려 미치겠더라.

다행히 사진에 찍힌 정보가 있어 퍼즐 맞추듯 풀어냈다.

 

소식 또한 금방 나온 조간 신문이라 기 보다 늦은 주간지 정도로 알면 된다.

다녀가신 분이야 사진이 어떻게 나왔는지도 궁금하겠지만,

아니어도 반가운 분을 만날 수 있어 좋다.

 

술 마시며 노는 것도 힘들었다.

평소 부러워했던 술 상무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 술을 마셔 지쳐 있는 노숙인의 힘든 처지도 알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금만 마셔도 쓰러진다.

 

연락부절로 화장실에 쫓겨 다니는데다, 속까지 뒤집혀 죽을 맛이었다.

걸어 다니는 송장에 가깝지만, 사람만 보면 반갑고 즐거웠다.

마치 저승에서 문상객 맞는 심정이라, 더 절절했다.

 

내가 만나지 못한 분만해도 류연복씨를 비롯하여 박흥순, 양시영, 유준, 임동은, 박인식, 임홍택, 김홍성, 

김영진, 신길훈, 장종운, 백금옥, 이혜숙, 조시노, 음주애, 이완순, 최리나, 김효순, 이진홍, 한현주, 김애경,

김형배, 장석원, 곽숙경, 신혜선, 한선영, 홍경순, 김유나, 설인선, 이정숙, 김성은, 이용민, 김명점, 김혜영,

이영욱, 양한모, 한용길, 정태섭, 김지연, 김승준, 김혜원, 문 슬, 이기정, 전인경, 신영섭, 장소연, 임정희,

임연웅, 주강현, 이형순, 박범이, 채영임, 유형근, 박상희, 윤장섭, 김정락, 이수헌, 이홍순, 오리진, 김민형,

온세미, 송진욱, 유운선, 진 민, 김미숙, 박찬원, 김병구, 최상기, 송남양, 변성진, 권오창, 박재웅, 김형로,

장순향, 김영곤, 김용순, 고미정, 김백순, 김추윤, 이근정, 이우섭씨 등 헤아릴 수가 없다.

 

다들 뵙지 못해 죄송스럽다.

 

26일 오후에는 전태수씨가 오셨다는 전화를 받고 하던 일을 접어버렸다.

술시가 이르지만, ‘유목민’으로 옮겨 술 잔을 들었다.

젊은 시절 부산에서 사진 했다는 오래된 이야기도 들었다.

 

27일엔 양재문, 남태영, 김녕만, 나종희, 이주영, 곽대원씨를 비롯하여

남기은씨 내외 분께서도 다녀 가셨다.

다음 달에 시집갈 조카 조은겸이는 남편과 시어머니 될 분까지 모셔 왔다.

 

뒤이어 김여옥 시인이 등장하자 인사동 건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승철 시인이 장경호, 양상용, 한상진, 최석태씨 등 화가를 대동하여 ‘시골해장국’으로 갔다.

 

김여옥시인이 인사동에서 ‘시인’이란 술집 차렸을 때는 인기 마담이었다,

숱한 세월이 흘러도 미색은 여전했다.

유쾌한 시간을 만들어 준 것 만도 고마운데, 그 날 술값까지 그녀가 쏘았다.

 

그 다음 날은 김발렌티노를 비롯하여 정주영씨와 딸 김소연, 이성표 부부가 다녀갔다.

긴 세월 언론계에 몸 바친 윤상길씨는 ‘미술여행’ 편집위원들과 다녀가셨고,

사진가 이윤기, 임성호, 권양수, 김연지, 신영섭씨도 오셨다.

 

느지막에 손님 오셨다는 연락 받아 나가다, 길에서 음유시인 송상욱선생을 만났다.

만난 지가 몇 년은 족히 된 것 같은데, 그 연세에 아직도 기타를 메고 다녔다.

대폿집에 모셔가 선생의 십팔 번 ‘부용산’이라도 한 곡 듣고 싶었으나, 너무 늦어버렸다.

쓸쓸하게 돌아서는 뒷모습이 영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은 모처럼 손님 만나 술 마실 일이 없었는데,

운현선 기자가 다녀가며 와인 한 병을 선물로 두고 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서 전어 몇 마리 사서 정동지와 오붓한 술자리를 만들었다.

 

매일 같이 술 마시다 하루 쯤 쉴 만도 한데, 술을 두고 그냥 잘 수는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술자리보다

마음 통하는 사람과 오붓한 술자리가 더 좋다.

 

술 마시며, 정동지의 다음 작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젠 장보다 장꾼을 찾아 다니려면, 늦었지만 운전을 배우라고 했다.

내가 죽고 나면 시골 구석구석을 어떻게 찾아다닐 것인가?

 

걱정은 되지만, 억척같은 또순이라 충분히 해낼 것으로 믿는다.

31일은 손님 오셨다는 전화에 늦게 사 전시장에 갔다,

오랜만에 쓸쓸한 미소의 화백, 신학철선생을 만난 것이다.

 

장경호씨와 더불어 ‘부산식당’으로 갔는데,

그곳에 ‘민주화기념사업회’ 이종률씨와 이선태씨도 있었다.

뒤따라 최석태씨까지 합류하여 오랜만에 동지애를 불태웠다.

 

헤어져 돌아가는 중에 ‘이모집’으로 오라는 전화가 다시 왔다.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렸는데, 가보니 좀 전에 헤어졌던 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준영, 정희성, 박철, 박불똥, 조경연씨 등 일개 소대가 모여 있었다.

이미 취한 상태라 무슨 주접을 떨었는지, 뒷일은 기억나지 않는 게 낫다.

 

9월1일은 부산의 이광수교주와 아산 ‘봄에실’ 농장 식구들이 온다 기에

일찍부터 차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누가 차 문을 두드렸다.

농장 식구들이 주차하고 나오다 고물차를 알아본 것이다.

 

김창복, 김선우, 양이현, 김평 등 농장 식구들이 총출동했는데,

문단속은 잘했는지, 동물들 먹이는 어떻게 했는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다들 전시장으로 갔는데, 모처럼 서울 나들이한 평이가 제일 신났다.

 

좀 있으니, 이광수교수가 나타났고 뒤따라 사진가 김문호씨도 왔다.

다들 술이 인사라 ‘부산식당’에서 낮술부터 마신 것이다.

인사동 점쟁이 신단수씨도 농장 식구를 데리고 그곳으로 식사하러 왔다.

 

그날은 충무로에서 양승우씨 전시가 열리는 날이라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이광수 교수는 ‘갤러리브레송’에 가려고, 옆자리 밥값까지 내 버렸다.

늦을 세라 택시까지 타고 갔는데, 갤러리 문이 잠겨 있었다.

이교수가 김남진 관장에게 전화를 하니, 뒤풀이 집으로 오란다.

 

어이가 없었다. 나 같은 늙은이라면 모르겠으나, 부산에서 온 손님이 있지 않은가?

김문호씨 와는 다음에 볼 수도 있지만, 가야 할 이교수는 어쩌라고?

 

이건 갤러리를 운영하는 관장으로서 손님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그렇게 술이 마시고 싶었다면 다른 사람이라도 지키게 해야지...

더구나 오랫동안 무보수로 이교수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나?

사람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았다.

 

어렵사리 뒤풀이 장소를 찾아갔는데, 김남진관장을 비롯하여

이윤기, 이세연, 서준영, 나인석씨 등 일곱 명이 통닭집에 모여 있었다.

이교수의 호쾌한 구라에 마음을 다독였으나, 영 불편했다.

뒤늦게 ‘봄에실’ 농장 식구들과 함께 정동지도 도착했다.

이교수가 떠날 기차 시간까지 깨소금 안주로 독주를 마셨다.

 

9월3일은 전시장에 갔더니, 김명지, 서정란, 이은정, 전태수씨가 와 계셨다.

이은정, 전태수 내외분을 모시고 일찍부터 ‘유목민’에 술상 차렸다.

 

안주도 나오기 전에 여동생 조진옥과 매제 김종성이 왔다는 연락이 왔다.

전시장에 갔더니, 여동생 외에도 이대훈, 노인자 내외 분을 비롯하여

 최명철, 박종면씨 등 많은 분이 계셨다.

 

삶의 풍경을 그리는 동생에게 장터 풍경은 좋은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매제는 동생이 공모전에서 상 받은 걸 자랑하지만, 상은 작업에 독이라며 일축했다.

 

여동생과 매제를 보낸 후, 이대훈씨 내외분을 ‘유목민’으로 모셔왔다.

전태수 내외 분과 합석하게 되었는데, 최명철, 신단수씨 일행은 입구에 자리 잡았다.

 

 술 잔 들기도 전에 또 다시 연극연출가 기국서 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인덱스갤러리’를 못 찾아 수도약국 앞에서 헤맨단다.

 

예전에 인사동을 들락거린 분이라면 옛 ‘수희제‘ 3층이라면 금방 찾을 텐데,

’수희제‘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다시 달려가야 했다.

 

기국서씨를 만나 전시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생각지도 못한 박진호씨가 나타났다.

 

야! 이게 얼마 만인가?

정동지 더러 이혼 설득할 때, 들러리 서 준지가 7년이 넘지 않았던가?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동안 그대로였다.

 

약속이 있어 가야 한다는 박진호씨를 보내고, 기국서씨를 ’유목민‘으로 안내했다.

9월5일부터 9일까지 ’강북문화예술회관‘ 진달래 홀에서 열릴 ’관객모독‘ 공연 준비로 바쁘 단다.

바쁜 와중에도 들려주어, 고맙기 그지없었다. 

 

여기저기 손님이 나뉘어 있으니, 술을 마셔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찾아 주신 분께는 송구스럽지만,

운전하려면 차에서 눈 좀 붙이는 게 나을 것 같아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전시 마지막 날은 ’유목민‘ 전활철씨가 술자리를 준비했다고 한다.

그날이 생일인 줄 어떻게 알았는지, 장어를 구워 몇 사람 초대했단다.

 생일이 페북에 뜨지 않도록 어렵사리 만들었고,

’봄에실‘농장에서 평이가 그토록 기다린다는 생일상도 한사코 거절했는데...

 

난, 내가 태어난 생일 자체가 싫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세상에 태어난 게 싫다.

지독히도 생일을 챙겼던 정동지마저 이젠 한풀 꺾였는데...

 

어쩔 수 없이 ’유목민‘에 갔더니, 전활철씨 외에도 방기식, 유 준씨 등 여러 명 와 있었다.

그날이 ’유목민‘ 휴일이라 오붓한 술자리가 되었는데

‘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 관장과 한지공예를 한다는 처음 보는 미녀도 있었다.

아무튼 불편한 생일상이지만, 배려해 주어 고맙다.

그 이튿날은 전시를 철수하기 위해 정오 무렵 나갔다.

철수하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 노인자씨도 와 계셨다.

서둘러 액자를 포장하여 차로 옮겼는데,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요즘 들어 부쩍 자동차 방전이 잦은데, 꼭 결정적인 순간에 일이 벌어진다.

긴급출동은 왜 그리 오지 않는지, 가게 주인의 성화에 발을 동동 굴려야 했다.

 

어렵사리 시동을 걸어 인사동을 빠져나왔으나, 차가 밀려 꼼짝할 수 없었다.

‘민주노총’이 광교사거리에서 벌인 노조법 개정 촉구 결의대회에 발목 잡힌 것이다.

왕왕거리는 확성기 소리에 정신이 없었는데,

에어컨이 꺼지고 램프가 깜박이더니, 갑자기 시동이 꺼져버렸다.

 

아무래도 발전기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아 견인차를 불렀다.

그렇지만 차가 밀려 꼼짝 하지 않는 판에 견인차는 어떻게 들어오겠는가?

 

종로 한복판에 고장 난 차를 세워 두었으니, 운전자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은 견딜 수 있으나,

뜨거운 길바닥으로 내몰린 정동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지하철 타고 먼저 가라며 보내긴 했으나, 꼬리 문 차들의 진로를 바꾸게 하는 일을

한 시간은 족히 하고서야 견인차가 나타났다.

 

견인차에 끌려 역촌역 현대자동차 정비공장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발전기가 수명을 다해 교체해야 한다는데, 발전기 교체 비용이 50만원이란다.

 

190만원짜리 고물차 수리비가 50만원이라면 폐차가 답이다.

그러나 잔뜩 실은 짐은 어떻게 할 것이며, 차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하는 내 처지가 난감했다.

 

폐차할 고물차에 신품 발전기가 말이 되냐며 중고를 구해 달라고 하니,

현대자동차 정비공장이라 정품만 써야 한 단다.

그렇다면 견인차를 불러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중고를 알아본 후 교체해 주었다.

 

28만원으로 내려간 중고발전기를 구해 어렵사리 고쳤는데,

마침 중고 발전기 값 만큼의 현금이 주머니에 있었다.

엊저녁 활철씨가 생일축하금으로 준 20만원과

그날 노인자씨가 점심 식사 하라며 준 10만원이었다.

 

같이 식사하러 왔다가 차가 말썽을 부려 밥도 못 먹고 헤어졌지만,

어쩌면 수리비 액수까지 딱 맞추어 주고 가셨다. 언제나 절실한 것 만큼만 주는 돈과의 인연이다.

돈이란 빨리 돌아야 하지만, 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잠시도 머물 틈을 주지 않는다.

 

두 분 덕분에 자동차를 고쳐 사진액자를 안전하게 옮겼는데,

정동지는 오후 다섯 시까지 ‘금보성아트센터’로 가야 한 단다.

 

이번 전시에 금보성씨가 책을 40권 사 주었고, 창원의 조성제씨도 20권을 사 주었다.

덕분에 배당 받은 200권 목표량을 초과하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 책을 그날 전해 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답례로 정영신의 ‘한국의장터’와 나의 ‘청량리588’ 사진집 두 권을 드렸는데,

오래전 588번 버스 타고 그곳을 지나다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한국의 장터’ 사진집은 여러 가지 도울 수 있는 프로젝트가 많겠 단다.

그 자리에서 여기저기 전화 걸어 타진 해 주기도 했다.

금보성씨는 자신의 작업량도 엄청나지만,

힘들게 작업하는 주변 작가를 돕는 일에 힘을 아끼지 않는다.

 

마침 자기가 돕는 다른 작가들과 미팅이 있다며, 함께 식사하자고 했다.

금보성씨 내외 분 따라 연희동 ‘고미정’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자리에 개인 그림전을 준비하는 고등학생과 사진가 이명호씨가 있었다.

 

‘고미정’ 음식들은 소박하지만 정갈하고 맛있었다.

덕분에 금보성씨로 부터 예술정책에 대한 문제점을 듣는 좋은 시간이었다.

 

전시와 관련된 모든 일을 끝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속이 후련하다.

그동안 죽는 것도 전시 끝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며 버텼으나,

많은 분에게 신세만 져 어깨가 무겁다.

그 신세 갚는 길은 열심히 사는 것 밖에 없다.

 

정영신의 장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개막식 날 사진과 그 이튿날 사진을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성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https://blog.naver.com/josun7662/223193794923

 

 

 

 

정영신의 ‘장에 가자’사진전이 지난 11일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개막되었다.

 

원님 덕에 나팔 부는 격이라고 좋아했지만, 첫날부터 술에 취해 뻗어버렸다.

전시가 끝나는 열흘 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첫 날은 가져 갈 짐이 많아 차를 끌고 나왔는데,

주차할 곳도 마땅찮은데다 빠트리고 온 게 있어 다시 집에 가야 했다.

 

그의 치매수준이다.

눈은 침침하고 귀는 안 들리고, 어느 한 구석 성한 곳이 없으니 산송장에 다름 아니다.

이런 산송장을 거두어주는 보살님께 보답하는 길은 오로지 충성뿐이다.

녹번동에 차를 두고 동자동에 들려 충무로로 와야 했다.

 

서울역에서 충무로까지는 회현역과 명동역 다음인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지만

남산 길로 걷게되면 산책코스로 댓길이다.

스산한 늦가을 정취에 흠뻑 빠져 산길을 걸었는데, 머리위로 황금 잎이 휘날렸다.

 

전시장 입구에 도착하니 김이하 시인이 나와 있었다.

김이하시인은 문단의 곽명우씨나 마찬가지다.

이젠 문단 뿐 아니라 화단이나 사단까지 넘나드는 예술 판 마당발이다.

 

산길을 걸으며 생각한 것은 전시장 들어섰을 때, 처음 만날 장면이었다.

장터에 누가 어떻게 어울려 있을지 그 분위기가 궁금해서다.

그 첫 장면에 주술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카메라를 손에 쥐고 들어갔다.

 

주변을 살펴보지도 않고 정면을 향해 찍었는데,

의자에 앉으려는 김이하씨의 어정쩡한 자세 옆에는

대마 명예회복이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현영애감독이 서 있었다.

좌측에는 ‘이숲’출판사 김문영 대표와 정영신씨가 있었다.

뭔가 미완의 느낌이 드는 이 사진이 주는 의미는 뭘까?

 

한 쪽에는 현감독과 이조기영씨 등 함께 온 손님 몇 분이 계셨다.

지난 번 정선에서 만났던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반가운 분들이 차례대로 등장했다.

 

화가 정복수씨 가족과 김 구, 김문호, 이나무, 양재문, 남태영, 임경일, 이윤기, 장영진, 김범준,

이수철, 박찬호, 김영호, 최인기, 최건모, 한상진, 이기형, 홍성미, 이홍순, 정윤순, 김수진, 김재희,

 박찬원, 김민영, 임홍택, 손은영씨등 많은 분들을 두루 만날 수 있었다.

 

별도의 개막식은 없으나 다들 맞추어 오셨는데, 반갑기야 하지만 전염병이 걱정이었다.

만약 확진자가 생긴다면 갤러리 문 닫아야 할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다들 목숨 걸고 찾아 왔으니, 술이라도 한 잔 대접해야 할 것 아닌가?

묵은지 갈비찜이 맛있는 ‘김삼보’집으로 다들 자리를 옮겼는데,

곽명우, 남 준, 정장식씨는 뒤늦게 합류했다.

 

술 자리에서 많은 대화들이 오갔으나,

귀가 어두워 제대로 알아듣질 못하니 술 밖에 마실 일이 없었다.

일찍부터 홀짝홀짝 마신 와인이 화근인지,

소주가 들어가니 어질어질하며 진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무데나 드러눕고 싶었으니, 이제 봄날은 간 것 같았다.

 

2차는 생각도 못하고, 술자리 파하기가 무섭게 최건모씨 도움으로 택시에 실려갔다.

미안하면 그냥 자빠져 잘 것이지, 택시비 걱정하느라

“이럴 때 119 부르면 안 될까?하는 별 궁상을 다 떨었다.

집에 도착하여 바로 뻗어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방한복을 벗지 않아 온 몸이 땀에 젖었는데,

빼지 않고 잔 틀니의 불쾌함에다 속까지 쓰려 죽을 지경이었다.

원님 덕에 나팔 두 번만 불었다간 뒈지기 십상이었다.

 

보살님이 데워 준 육개장으로 속을 풀고 다시 전쟁터에 나서야했다.

술 상무를 제대로 하라는 보살님의 지시를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 살살 마시자고 다짐에 다짐을 했다.

 

몸이 편찮으니 사진 정리는 물론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이틀 동안 소식을 못 전해 부득이 연속 상영을 좀 해야겠다.

 

그 이틀 날은 삭은 표내지 않으려고 동동구리무도 바르고 나름의 정장을 했다.

그 꼴에 그 꼴인 것을 꾸물대다보니, 사진가 박옥수선생과 최정균씨가 전시장에 먼저 와 계셨다.

박옥수선생께서 장터사진을 돌아보더니, 오랜 추억담을 꺼냈다.

 

지금은 돌아가신 사진가 문선호선생의 스튜디오에서 일할 무렵인 75년도 이야기였다.

그 당시 문선호선생의 스튜디오에는 박선생을 비롯하여 이창남씨가 일했는데,

쉬어야 될 년 말에 지방촬영명령이 떨어져, 새벽에 찾아간 곳이 여수장이었다고 한다.

장터 사람들의 순박함에 끌렸던 그 때가 그립다는 것이다.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이동한 강행군이라는데,

년 초에 밥 사먹을 곳이라도 제대로 있었겠는가?

촬영 길에서 돌아 온 즉시 찍은 필름을 현상해 보고는 다시 찍으라고 내려 보냈단다.

최선을 다 하라는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된다.

 

장터사진에서 그 때 그 사람과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이 무엇을 말 하는가?

장터는 바로 그리움이었다. ‘사람 사는 정’ 말이다.

 

한참 후에는, 누군지 아리송한 분이 “날 알겠는 기요”라며 반갑게 다가왔다

마스크 위를 살펴보니 사진가 강위원씨 같은 느낌은 들었으나,

대구에 계신분이라 아닌 줄 알았다.

인사까지 나눈 터라 다시 물어보기도 민망했는데, 마침 팜프렛 한 권을 꺼내주었다.

 

진짜 강위원씨 맞았다. 뵌 지가 너무 오래되어 근황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아직 경일대학교에서 사진 가르킵니꺼?‘라고 물었더니,

정년퇴임한지가 십년이 넘었단다.

세월이 너무 빠르다는 것을 다시 절감했다.

 

팜프렛은 지난 주 대구에서 열었던 ‘팔공산의 향기’ 사진전이었다,

실린 사진에서 자연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바로 사진가의 마음이기도, 전하고자하는 메시지 같았다.

처음이면서도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라 기념사진도 찍었다.

 

뒤 이어 ‘스마트협동조합’ 서인형씨를 비롯하여 최석태, 황경하, 박건주, 이영미,

이미경, 정종열씨 등 조합의 일개 분대가 밀어닥쳤다.

 

사진들을 돌아 본 후 ‘보은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젠 술을 아껴 마셔야 했다.

신사동 ‘뮤아트’에서 마실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살아남기 힘들더라.

 

좌우지간, 전시 덕분에 반가운 분들은 많이 만났다.

이렇게라도 보지 않으면 살아 생 전 뵐 날이 몇 번이나 있겠는가?

김진하, 박신흥, 김준호, 주기중씨 등 뵙지도 못하고 다녀간 분도 여럿 있었지만.

셋째 날 부터는 가까이 있는 동자동 쪽방에서 대기할 작정이다.

행여 보살님 청춘사업에 방해 될지도 몰라, 서랍에 넣어 둔 핸드폰을 꺼내 켜 놓았다.

 

정영신의 ‘장에 가자’ 책은 여행부문의 베스트셀러다.

출판된 지 몇 일만에 다시 찍은 2쇄마저 품절되어, 일부 서점은 책이 없는 곳도 있었다.

전시장에도 주문한 책이 오지 않아 재고가 바닥났다.

10% 활인해서 판매하는 인터넷서점에서 구입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구입한 책을 전시장에 가져오면 작가 서명과 함께 작품사진(5X7규격)한 점을 선물로 드린다.

전시는 오는 20일까지 이어진다.

 

요즘은 없는 것이 없는 장이 아니라, 없는 것이 더 많은 장이지만,

그래도 따끈따끈한 정은 살아 있다.

“장 구경 하세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장이 아니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주말, 새벽에 서는 삼척 번개시장을 찾아갔다.

번개시장은 번개처럼 빨리 끝난다는 말인데, 흔히 말하는 도깨비시장이다.

동트기 전 새벽 다섯시에 열었다가 아침 늦게 사라진다.

 

강원도 삼척시 삼척역 건너편에 서는 삼척 번개시장은

인근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신선한 수산물을 비롯하여

일반 재래시장처럼 별의 별 것이 다 있는 장이다.

 

요즘 새벽시장에 공들이는 정영신씨 따라 나선 촬영 길인데,

예전처럼, 인근 오일장 두 세 곳을 돌아보는 강행군이 아니라

장터지역의 문화유산도 함께 살펴보는 여유로운 나들이다.

 

전 날 밤 여관방 모기와 신경전 벌이느라 잠을 설쳤는데,

이른 새벽부터 잠이 덜 깬 상태로 장을 찾아 나섰다.

정영신씨를 차에서 내려주고 다시 잠들어버렸다.

 

얼마나 잤는지 눈을 떠보니, 이미 파장인데,

어물전 아줌마의 힘찬 칼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좀 있으니 정영신씨가 아이스박스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싱싱한 가자미가 30마리에 2만원이라는데, 진짜 싸긴 싸더라.

 

시장에서 된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관동팔경 중 최고로 치는 죽서루부터 들렸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 웅장하게 버티고 있었는데,

높고 낮은 자연 석을 그대로 받쳐 기둥의 길이가 다 달랐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누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또한 절경이었다.

누각 출입을 금하는 다른 문화재와는 달리

누각에 올라 주변을 조망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죽서루 천장에는 허목 삼척부사가 쓴 ‘第一溪亭’을 비롯하여 이이의 시편 등

절경을 노래하는 다양한 현판이 걸려 있어,

시대적 묵객들이 쉬어간 풍류의 현장임을 증명했다.

 

주위에 늘린 용문바위와 선사 암각화 등 다채로운 자연석도 볼만 했다.

대나무밭 입구에는 ‘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팔각 장대석 이래 팔각 기반에는 송강의 대표작과 친필이 새겨져 있었다.

 

삼척에 있다면 매일 들리고 싶다는 정영신씨의 말을 뒤로하고,

신비의 대금굴을 보기위해 대이리 동굴지대로 자리를 옮겼다.

 

대금굴은 발견된 후로 7년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2007년 세상에 알려졌는데,

모노레일로 현장까지 이동하도록 되어 있었다.

들어가려면 예약은 필수고, 성인 입장료는 12,000원이었다.

 

대금굴은 대이리 동굴지대 중 가장 아름다운 동굴로,

지척에는 동양에서 제일 크다는 환선굴도 있었다.

5억년의 신비에 쌓인 동굴에서 세월의 무게를 느꼈다.

 

동굴 내부에는 종유석, 석순, 석주 등이 아름답게 생성되었는데,

많은 물이 흘러내려 여러 개의 크고 작은 폭포와 동굴호수를 만들어놓았다.

폭포에서 흘러내리는 굉음에 동굴이 쩌렁쩌렁 울렸다.

 

마지막에는 남근숭배민속의 터전인 해신당을 찾았다

나무 남근을 바쳐 풍어를 비는 전설의 사당이다.

해신당 앞에는 ‘애바위’라는 작은 섬이 있는데,

처녀가 애를 쓰다 죽었다고 ‘애바위’가 되었단다.

해신당 맞은편에 조성된 ‘남근조각공원’은 좆으로 시작하여 좆으로 끝났다.

별의 별 좆이 다 있는데, 의자에 튀어나온 좆에서는 요절복통했다.

웃는 것이 좋긴 하지만, 이렇게 좆 갖고 놀아도 되나 싶었다.

 

사진 찍으러 간 번개시장에서 싱싱한 해산물 싸게 사고,

죽서류에서 풍류 즐기고, 태고의 대금굴 신비에 취하고,

해신당 좆에 배꼽 잡았으니, 이 보다 더한 여행이 어디 있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한국의 장터'를 펴낸 사진가이자 소설가인 정영신씨는 농민신문의 '정영신의 장터순례'에 이어
오는 11월25일부터 방송되는 교통방송의 "정영신의 장터, 속 이야기"에도 출연하게 되었다.
교통방송 '브라보 마이웨이 1부' "정영신의 장터, 속 이야기"는 각 오일장의 정보와 함께 따뜻한
사람사는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는데, 매주 월요일 자정부터 45분 동안 진행된다.

그 첫 회분의 녹화현장 모습이다.

 

 

 

 

 

                                      스탭 기념촬영, 왼쪽부터 PD 조문행, MC 서혜정, 사진가 정영신, 작가 최형미씨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