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신의 ‘장에 가자’사진전이 지난 11일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개막되었다.

 

원님 덕에 나팔 부는 격이라고 좋아했지만, 첫날부터 술에 취해 뻗어버렸다.

전시가 끝나는 열흘 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첫 날은 가져 갈 짐이 많아 차를 끌고 나왔는데,

주차할 곳도 마땅찮은데다 빠트리고 온 게 있어 다시 집에 가야 했다.

 

그의 치매수준이다.

눈은 침침하고 귀는 안 들리고, 어느 한 구석 성한 곳이 없으니 산송장에 다름 아니다.

이런 산송장을 거두어주는 보살님께 보답하는 길은 오로지 충성뿐이다.

녹번동에 차를 두고 동자동에 들려 충무로로 와야 했다.

 

서울역에서 충무로까지는 회현역과 명동역 다음인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지만

남산 길로 걷게되면 산책코스로 댓길이다.

스산한 늦가을 정취에 흠뻑 빠져 산길을 걸었는데, 머리위로 황금 잎이 휘날렸다.

 

전시장 입구에 도착하니 김이하 시인이 나와 있었다.

김이하시인은 문단의 곽명우씨나 마찬가지다.

이젠 문단 뿐 아니라 화단이나 사단까지 넘나드는 예술 판 마당발이다.

 

산길을 걸으며 생각한 것은 전시장 들어섰을 때, 처음 만날 장면이었다.

장터에 누가 어떻게 어울려 있을지 그 분위기가 궁금해서다.

그 첫 장면에 주술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카메라를 손에 쥐고 들어갔다.

 

주변을 살펴보지도 않고 정면을 향해 찍었는데,

의자에 앉으려는 김이하씨의 어정쩡한 자세 옆에는

대마 명예회복이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현영애감독이 서 있었다.

좌측에는 ‘이숲’출판사 김문영 대표와 정영신씨가 있었다.

뭔가 미완의 느낌이 드는 이 사진이 주는 의미는 뭘까?

 

한 쪽에는 현감독과 이조기영씨 등 함께 온 손님 몇 분이 계셨다.

지난 번 정선에서 만났던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반가운 분들이 차례대로 등장했다.

 

화가 정복수씨 가족과 김 구, 김문호, 이나무, 양재문, 남태영, 임경일, 이윤기, 장영진, 김범준,

이수철, 박찬호, 김영호, 최인기, 최건모, 한상진, 이기형, 홍성미, 이홍순, 정윤순, 김수진, 김재희,

 박찬원, 김민영, 임홍택, 손은영씨등 많은 분들을 두루 만날 수 있었다.

 

별도의 개막식은 없으나 다들 맞추어 오셨는데, 반갑기야 하지만 전염병이 걱정이었다.

만약 확진자가 생긴다면 갤러리 문 닫아야 할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다들 목숨 걸고 찾아 왔으니, 술이라도 한 잔 대접해야 할 것 아닌가?

묵은지 갈비찜이 맛있는 ‘김삼보’집으로 다들 자리를 옮겼는데,

곽명우, 남 준, 정장식씨는 뒤늦게 합류했다.

 

술 자리에서 많은 대화들이 오갔으나,

귀가 어두워 제대로 알아듣질 못하니 술 밖에 마실 일이 없었다.

일찍부터 홀짝홀짝 마신 와인이 화근인지,

소주가 들어가니 어질어질하며 진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무데나 드러눕고 싶었으니, 이제 봄날은 간 것 같았다.

 

2차는 생각도 못하고, 술자리 파하기가 무섭게 최건모씨 도움으로 택시에 실려갔다.

미안하면 그냥 자빠져 잘 것이지, 택시비 걱정하느라

“이럴 때 119 부르면 안 될까?하는 별 궁상을 다 떨었다.

집에 도착하여 바로 뻗어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방한복을 벗지 않아 온 몸이 땀에 젖었는데,

빼지 않고 잔 틀니의 불쾌함에다 속까지 쓰려 죽을 지경이었다.

원님 덕에 나팔 두 번만 불었다간 뒈지기 십상이었다.

 

보살님이 데워 준 육개장으로 속을 풀고 다시 전쟁터에 나서야했다.

술 상무를 제대로 하라는 보살님의 지시를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 살살 마시자고 다짐에 다짐을 했다.

 

몸이 편찮으니 사진 정리는 물론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이틀 동안 소식을 못 전해 부득이 연속 상영을 좀 해야겠다.

 

그 이틀 날은 삭은 표내지 않으려고 동동구리무도 바르고 나름의 정장을 했다.

그 꼴에 그 꼴인 것을 꾸물대다보니, 사진가 박옥수선생과 최정균씨가 전시장에 먼저 와 계셨다.

박옥수선생께서 장터사진을 돌아보더니, 오랜 추억담을 꺼냈다.

 

지금은 돌아가신 사진가 문선호선생의 스튜디오에서 일할 무렵인 75년도 이야기였다.

그 당시 문선호선생의 스튜디오에는 박선생을 비롯하여 이창남씨가 일했는데,

쉬어야 될 년 말에 지방촬영명령이 떨어져, 새벽에 찾아간 곳이 여수장이었다고 한다.

장터 사람들의 순박함에 끌렸던 그 때가 그립다는 것이다.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이동한 강행군이라는데,

년 초에 밥 사먹을 곳이라도 제대로 있었겠는가?

촬영 길에서 돌아 온 즉시 찍은 필름을 현상해 보고는 다시 찍으라고 내려 보냈단다.

최선을 다 하라는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된다.

 

장터사진에서 그 때 그 사람과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이 무엇을 말 하는가?

장터는 바로 그리움이었다. ‘사람 사는 정’ 말이다.

 

한참 후에는, 누군지 아리송한 분이 “날 알겠는 기요”라며 반갑게 다가왔다

마스크 위를 살펴보니 사진가 강위원씨 같은 느낌은 들었으나,

대구에 계신분이라 아닌 줄 알았다.

인사까지 나눈 터라 다시 물어보기도 민망했는데, 마침 팜프렛 한 권을 꺼내주었다.

 

진짜 강위원씨 맞았다. 뵌 지가 너무 오래되어 근황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아직 경일대학교에서 사진 가르킵니꺼?‘라고 물었더니,

정년퇴임한지가 십년이 넘었단다.

세월이 너무 빠르다는 것을 다시 절감했다.

 

팜프렛은 지난 주 대구에서 열었던 ‘팔공산의 향기’ 사진전이었다,

실린 사진에서 자연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바로 사진가의 마음이기도, 전하고자하는 메시지 같았다.

처음이면서도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라 기념사진도 찍었다.

 

뒤 이어 ‘스마트협동조합’ 서인형씨를 비롯하여 최석태, 황경하, 박건주, 이영미,

이미경, 정종열씨 등 조합의 일개 분대가 밀어닥쳤다.

 

사진들을 돌아 본 후 ‘보은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젠 술을 아껴 마셔야 했다.

신사동 ‘뮤아트’에서 마실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살아남기 힘들더라.

 

좌우지간, 전시 덕분에 반가운 분들은 많이 만났다.

이렇게라도 보지 않으면 살아 생 전 뵐 날이 몇 번이나 있겠는가?

김진하, 박신흥, 김준호, 주기중씨 등 뵙지도 못하고 다녀간 분도 여럿 있었지만.

셋째 날 부터는 가까이 있는 동자동 쪽방에서 대기할 작정이다.

행여 보살님 청춘사업에 방해 될지도 몰라, 서랍에 넣어 둔 핸드폰을 꺼내 켜 놓았다.

 

정영신의 ‘장에 가자’ 책은 여행부문의 베스트셀러다.

출판된 지 몇 일만에 다시 찍은 2쇄마저 품절되어, 일부 서점은 책이 없는 곳도 있었다.

전시장에도 주문한 책이 오지 않아 재고가 바닥났다.

10% 활인해서 판매하는 인터넷서점에서 구입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구입한 책을 전시장에 가져오면 작가 서명과 함께 작품사진(5X7규격)한 점을 선물로 드린다.

전시는 오는 20일까지 이어진다.

 

요즘은 없는 것이 없는 장이 아니라, 없는 것이 더 많은 장이지만,

그래도 따끈따끈한 정은 살아 있다.

“장 구경 하세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장이 아니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