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곽순환

 

김기수展 / KIMGISOO / 金基洙 / painting 

2022_0126 ▶ 2022_0222 / 월요일 휴관

 

김기수_기원의 조건_캔버스에 유채_195×130cm_202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30am~06:30pm / 월요일 휴관

 

 

아트비트 갤러리

ARTBIT GALLERY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74-13(화동 132번지)

Tel. +82.(0)2.738.5511

www.artbit.kr

 

공간, 폭력, 여정  1. 이번 전시에 김기수가 선보인 작업은 예의 풍경그림이다. 그의 작가 이력은 압축성장이 초래한 이곳 도시공간의 폭력성, 그 난맥상에 대응한 일련의 실험 작업을 선보이며 시작되었다. 개념주의적 사진, 퍼포먼스 성격의 야외 오브제 설치, 아카이브 등으로 전개된 이 작업들이 풍경그림으로 전화된 지도 어느덧 10년을 넘어선다. 그 동안 4번의 개인전 『밤산책』(11), 『녹색광선』(12), 『대단지 입구』(14), 『창동 레지던시 입주보고서』(16)이 있었고, 이번 전시 『외곽순환』은 시간 격차를 두고 5년여 만에 열린다.

 

김기수_낯익은 능선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21

2. 초기 그림에서 일단 눈에 띠는 것은 작업 모티브를 선택하는 방식이다. 그는 일상 주변에서 맞닥뜨린 장면들을 모티브로 삼는다. 집 근처 골목이나 동네 주위를 거닐면서, 차를 타고 가거나 주차하는 중에, 어떤 장소를 방문하거나 산을 오르면서 우연히 마주치거나 눈에 들어온 장면들을 선택한다. 하긴 이런 방식 자체는 특이할 것도 없다. 하지만 작업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이런 식의 모티브 선택이 일상의 사물과 공간을 대하는 작가의 감각적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 『밤산책』에는 낮의 일상에선 주변화되어 있던 밤의 사물과 정경들이 등장한다. 밤의 빛으로 드러난 사물과 정경들은 낮의 그것들과는 다르다. 바위, 인공폭포, 성벽, 정자, 국사당, 화분, 골목 길바닥을 지나는 고양이, 텅 빈 공원의 풀밭, 불 켜진 문방구 등은 밤의 어두움에 뒤섞여 산란되는 빛을 받아 기묘한 분위기를 발산한다. 그 기묘함은 한편으로 우리들이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 스스로 체화한 자동화된 감성체계를 해체하는가 하면, 동시에 일상 속에서 상처받은 우리의 감각을 몽환적인 매력의 이질적 세계로 이끌어 위무하기도 한다. 작가는 일상 속에 있으나, 일상의 주변을 떠돈다. 그리고 그 주변부에서 일상을 빗겨나간 어떤 틈새와 마주한다. 밤의 사물, 정경이 펼쳐놓는 이질적 감각세계를 감수하는 것은 또 다른 삶을 기대하는 것과 어떻게 이어지는 것일까?

 

김기수_둘레 3_캔버스에 유채_90.5×162cm_2021

『밤산책』의 경우 사물과 정경의 감성적 전환에 초점이 있었다면, 『녹색광선』에선 사물 혹은 상황 자체의 황폐함이 전면에 부각된다. 고속도로 터널 입구의 멍한 풍경, 비어있는 다이빙 풀의 하릴없는 물질적 존재감, 물 뿜는 분수의 허망한 풍경, 연립주택 입구를 장식한 색 전구의 무심한 반짝임 등이 그렇다. 이 작업들이 확인시켜 주는 것은 일상의 감각과 의미가 무화된 순간들이다. 하지만 이 순간은 자동화된 감각의 해체나 상처받은 감각의 승화과정에서 생겨나기보다는 우울증적으로 고착된 작가의 시선에 의해 발생하는 듯하다. 작가는 녹색광선*을 찾아 헤매지만, 녹색 빛은 화면 위를 언뜻언뜻 떠돌고 있을 뿐이다. 사물과 공간은 무의미하게 존립하는 망연자실한 광경 안에 빠져들어 있다.

 

김기수_강변의 아침_캔버스에 유채_97×130cm_2021

3. 『대단지 입구』展에서 그가 다시 현실 공간으로 되돌아 온 것은 아마도 이러한 막막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지 모른다. 일상 속에서 그 너머의 감각에 몰입하던 그는 이제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장소, 나름의 역사와 사건, 그곳을 산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흔적과 기억이 새겨져 있는 성남이라는 시공간에 위치를 잡는다. 아마도 그는 현실 공간에 축적된 시간을 통해 현재와 화해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작업은 공적, 사적으로 남겨진 사진들(성남시 공식 행사들, 사건, 기록, 친척, 지인 등), 기억으로부터 이끌려 나온 장면들(주스, 참외, 찬송 등), 그리고 시간의 흔적이 배어든 공간과 건물, 장소로부터 모티브를 채택해 그려진다. 하지만 이 장면들 각각은 서로 모아지지도 연결되지도 않는다. 작가는 장면 하나하나를 마치 파편처럼 다룬다. 그리하여 그 장면들 각각은 연쇄적으로 중첩된 수많은 기억과 사건, 이야기를 상기시키는 알레고리로 작동하지만, 결국은 모호한, 요해불가능한 무엇으로 남는다. 이들은 상처를 떠올릴 뿐 위무하지 않으며, 기묘한 매력을 발산하지도 않는다. 단지 끊임없는 연상을 일으키며 그렇게 존립할 뿐이다.

 

김기수_외곽순환로_캔버스에 유채_130×97cm_202

4. 김기수의 이번 전시 제목은 『외곽순환』이다. 작업에서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초기 그림에서처럼 모티브를 다시 일상 주변에서 채택한다는 점이다. 살고 있는 동네의 골목, 건물, 집 안팎의 정경을 그린 작업이 여럿 있지만, 주를 이루는 것은 방문지나 여행지에서 혹은 차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마주친 장면이다. 하지만 사물과 공간, 정경을 대하는 작가의 감각적 태도는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나는 이 변화가 어떤 식으로든 '화해'를 모색하려는 작가의 새로운 지향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간 김기수의 그림들 배후에는 모종의 폐허감각 같은 것이 깔려있었다. 초기의 개념적이고 실험적인 작업들이 급속한 난개발로 인한 공간 환경의 폭력성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이 그랬고, 그림으로 전환한 이후 작가가 끊임없이 일상의 주변을 떠돌거나(『밤산책』), 일상 곳곳에서 그 개발 성과들이 남겨놓은 공허함을 응시했던 점을 볼 때 그렇다(『녹색광선』). 『대단지 입구』에서 모든 장면들이 부서진 파편처럼 병렬될 때 그 배후에 놓여있던 것 역시 그 같은 폐허감각 때문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번 전시는 그가 이 폐허감각으로부터 큰 보폭으로 걸어 나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기수_섬망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21

이번 전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업 중 하나는 「기원祈願의 조건」(2021)이다. 이 그림은 우연히 방문한 바닷가 절의 전망대 마당을 그린 것이다. 난간 위편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공간 앞쪽에는 두 개의 기물이 서있다. 앞쪽 것은 독특한 형태의 3층짜리 음수대이고, 뒤쪽 '바르게 살자' 류의 돌덩이에는 무언가 글이 적혀있다. 바닥엔 음수대에서 넘쳐 나온 듯 물이 흐른다. 첫 눈에 이 그림은 '못그린 그림'으로 보인다. 붓질은 통상 아마추어가 공간을 메꾸는 데 주력하듯 조악해 보이며, 색채 또한 크레용을 사용한 아동화 스타일을 연상시킨다. 형태 또한 세부 묘사 없이 대충 윤곽에 맞춘 듯 여겨지며, 화면의 구성은 실제 정경에 근거했다 하더라도 서로 어울리지 않는 기물들이 과장된 비례로 위치해 있어 괴이해 보이기까지 한다.

 

김기수_노래방_캔버스에 유채_97×130.3cm_2017~21

하지만 약간 거리를 두고 그림 전체를 조망해 보면, 이 그림이 매우 잘 그려진 그림임을 알아챌 수 있다. 우선 화면 속 공간은 편하게 열려있고, 구성물들은 차분하게 그 안에 안착하고 있다. 바다와 파도는 부피감을 형성하여 부딪침과 움직임을 드러내며, 빛은 하늘과 구름 속을 부유하며 미세하게 흐르는 듯 반짝인다. 검은색으로 칠해진 바닥은 안정되어 있고, 심지어 물의 흐름도 고졸하여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림의 초점은 기도하듯 손 모으고 있는 음수대와 뜬금없는 권위를 내뿜으며 멀뚱히 자리하고 있는 돌비석에 있다. 부조화를 과시하는 듯 홀연히 두드러진 이 두 개의 기물은 하지만 철저히 작가의 의도에 따라 형상화된 것이다. 작가는. 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 기물들이 자연, 관광, 종교, 정치, 전통문화가 한국식으로 생경하게 혼합된 이 장소의 성격을 드러낼 수 있게끔, 그것들을 부각시켰다. 이 광경을 수용자들이 인문의 시선으로 반추할 있게끔 구성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첫 눈에 못 그린 느낌을 주던 화면 안 요소들은 작가가 이 장소의 황당한 리얼리티를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취한 방법의 소산임을 알 수 있다.

 

김기수_학교 2_캔버스에 유채_72.7×91cm_2021

5.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은 이번 전시의 작업들이 이전과 달라진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싶어서다. 여러 차이를 언급할 수 있겠지만 두 가지 지점에 주목하고 싶다. ● 하나는 앞서 언급했듯 배드페인팅**의 경향이 나타나는 점이다. 이는 나쁜 대상, 곧 폭력적으로 형성된 이곳 현실공간에 핍진하는 형상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그런 공간의 형상화를 외면해 온 기존 예술적 스타일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의도적인 마구잡이 붓질과 검은색의 비상식적 활용, 세부묘사를 생략하는 단순화가 기법적 특징이다. 이번 작업들 중 「강변의 아침」이나 「나무」, 「입산」 등이 대표적 사례다. ● 다른 하나는 특유의 추상抽象 방법을 활용한 점이다. 이는 작가가 모티브로 채택한 장면이 발산하는 정보(감각적, 정서적, 인문적)를 필요에 따라 생략(단순화), 응축, 전환시키는 방식을 활용하고 있음을 말한다. 앞서 「기원祈願의 조건」 역시 작가가 파악한 장소의 요체를 이런 추상 장치를 활용, 재구성해 제시하는 방법을 사용한 바 있다. 「낯익은 능선」(2021)에선 이 장치를 좀 더 명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림은 흔히 볼 수 있는 산사山寺의 한 장면을 그렸다. 좌측에 법당의 일부가 보이고 아래쪽으로 계단이 있다. 멀리 중앙부와 우측으로는 능선이 지나고 중앙 뒤쪽에 탑이 그리고 우측 앞쪽에 나무 한그루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계단은 정성스럽게 그려졌지만, 나무는 동그라미 정도로 표현되고, 탑은 윤곽선만 투명하게 제시되며, 산은 능선 정도로 단순화된 표현방식이다. 이를 통해 낯익은 풍경은 결코 낯익지 않은 그림으로 변화되며, 작가에 의해 새로 해석된 풍경으로 전환한다.

 

김기수_예술적인 저녁_캔버스에 유채_145.7×145.7cm_2021

이번 전시의 작업에서 이 두 가지 회화적 장치는 거의 모든 작업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활용된다. 나는 이 두 장치가 작가가 그동안 회피해왔던 폭력적인 현실 공간 혹은 공간의 폭력성과 직접 대면하기 시작한 신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간의 폭력성에 대한 작가의 저항, 회피, 절망, 알레고리적 대응은 이제 숙고된 대면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유의 대화 방식을 획득해내고 있다. 이 지난한 과정은 작가가 이제 비로소 지나치게 근접해 있어 상처(충격)로만 다가오던 대상, 곧 근대화의 압축성장이 초래한 이곳의 공간 현실과 그 폭력성에 대해 일종의 거리두기가 가능해졌음을 알려준다. 작품 「둘레 3」은 이렇듯 거리두기를 통해 확장된 시공간 감각이 나름의 성취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 이영욱

 

* 각주* 해돋이 직후 또는 해넘이 직전에 태양방향 수평선 근처에서 녹색 빛이 관측되는 광학적인 현상, 에릭 로메르가 감독한 영화 『녹색광선』(1986)에선 이 광선을 보게 되면 자신의 진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진실까지도 알 수 있게 된다.** 배드 페인팅은 1970년대 미국 형상미술 중 한 흐름에 붙여진 명칭으로, 비평가이지 큐레이터인 마르시아 터커Marcia Tucker가 1978년 뉴욕의 뉴뮤지엄New Museum of Contemporary Art에서 했던 동명의 전시 이름에서 유래. 배드페인팅은 당대의 스타일들에 대한 의도적이며 고의적인 불신을 표방하는 작품들을 말함. 특징은 형상의 변형, 미술사적 자료와 비미술 자료의 혼합, 환상적이거나 부적절한 내용 같은 것들. 배드 페인팅은 정확한 재현이나 예술에 대한 관습적 태도를 무시하는 가운데 재미있으면서 뭉클하기도 하며, 종종 좋은 취향이라는 기준을 비웃는 황당함을 드러냄. 위키피디아 참조.

 

Vol.20220126b | 김기수展 / KIMGISOO / 金基洙 / painting展

2016년 한해 동안 '갤러리브레송'에서 진행한 '이 땅의 고수를 찿아서..'


2018년 03월 12일 (월) 03:02:24    정영신 기자 press@sctoday.co.kr





지난 2016년부터 매달 두 번씩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국내사진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한 이광수 교수가 한국현대사진가 열 두 명의 작가론을 묶은 ”카메라는 칼이다“를 펴냈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제대로 된 국내 사진가론이 전무하였다는 사실이다. 평론가들이 외국사진가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반복해가며 거론하였지만, 정작 국내 사진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작품이란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사진을 무기로 사진에 대한 신화를 깨었다.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없애고, 패거리도 없애는 대동의 사진세계에서 멋지게 노는

이 땅의 진정한 고수를 찾는 놀이로 시작되었다"고 저자 이광수 교수는 말하고 있다.


'카메라는 칼이다'저자 이광수교수 Ⓒ정영신


사진을 전공하는 교수와 작가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작가들의 작가론이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학자로써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역사가 있기에 우리가 존재하듯 각자 자기의 고유한 역사를 지니며 살아가고 있다. 더구나 평생 우리나라 문화와 생활상을 기록해 온 사진가들의 작가론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 '카메라는 칼이다'의 사진가들과 저자인 이광수교수, 갤러리브레송 김남진관장 Ⓒ정영신


다른나라 사진가론은 줄줄 외면서 우리나라작가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기록해오고 과거의 진실을 어떻게 발견해 왔는지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에 통분했다. 사대주의적 발상이 아니었다면 국내 사진가에 대해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현실에 주목하여 이광수 교수가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이 최민식 작가론이다.





이광수 교수는 끊임없는 동어반복적인 시간이 응축된 사진 속에 숨겨진 의미를 하나하나 찾아내었고, 그의 예리한 집도에 의해 작가들의 심중에 묻힌 비장의 언어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는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인도사를 연구하는 교수이자 사진비평가로. 사진으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10여년 넘게 사진비평에 혼신을 쏟아왔다.



▲ 강정효작가의 '유해발굴'



이광수 교수는 “작품이 왜 좋은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 건지 어떤 사회적, 문화적 효과를 내고 있는지 평가를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작가를 대상으로 한 논문을 하나도 찾아내지 못해 작가론을 쓰기시작 했다”고 말했다.



▲ 권철 작가의 '가부키초'


또한 인맥이나 학력등을 배재한 채 50대 이상으로 30년 가까이 고독하게 자기작업만을 고집하는 사진가를 찾아내는 일은 '갤러리브레송' 김남진관장이 맡았다. 그야말로 이 땅에 숨겨진 ‘사진’ 고수를 찾아 소개하는데 꼬박 1년이 걸린 셈이다. '


김남진 관장은 사진가를 찾아내고, 이광수교수는 매달 50매에 달하는 글을 써서 오마이뉴스에 연재하면서 갤러리 브래송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를 진행한 것이다.



▲ 김문호 작가의 '온더로드'


비평가의 책무는 작품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 해석하는 것이다. 허나 우리 사진계에 이렇다 할 작가론 한권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광수교수의 ‘카메라는 칼이다’는 의미가 있는 책으로 사진보는 것을 넘어, 사진을 읽게 함으로써 책에 나온 사진가의 진면목을 독자스스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 김보섭 작가의 '청관'


3부로 구성된 책속으로 들어가 보자. 제1부는 ‘시대와 시간을 기록하다’에 권철, 신동필, 최영진, 강정효작가, 제2부는 ‘사람과 역사를 바라보다’에 조문호, 김보섭, 문진우, 김문호, 이재갑, 이영욱작가, 마지막 제3부에는 존재와 예술을 그리는 파인 아트작가로 고정남과 이수철작가를 논했다.



▲ 문진우 작가의 '내 마음속의 다큐 한 장'


‘독대’의 권철사진가는 “도꼬다이.... ‘홀로’의 의미가 강해 사진가 권철을 일컫는 말로 이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다”고 쓰고, 이어 신동필작가를 논하면서 “신동필의 역사는 민족의 역사다. 그는 투사로서 민족, 자주, 반미, 통일의 도도한 물결을 거스리지도, 시비 걸지도 않고 대의를 따라 함께 걸었다”고 평하고, 최영진작가론은 “그대로 그렇게 그 모태를 재현하고 있다며, 죽어 말라 버린 물고기 한 마리 이미지가 쉬 사라지지 않는다. 노자가 말하고 최영진이 따르는 자연의 미와 추에 대해 생각한다” 고 했다.



▲ 신동필작가의 '또 다른 가족'


풍경, 민속 그리고 역사를 담은 강정효는 “유채꽃 노란 물결에 배어 있는 농민들의 땀을 읽어 주십사 하는 목소리를 낸다. 강정효는 제주의 모든 것을 담되, 그 안에 사람이 우선되는 세상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고 했다.



▲ 이수철작가의 '화몽중경'


인본을 이야기하는 조문호작가는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사진가라며 조문호에게 이말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는 말을 나는 찾지 못했다”고 해석했다. 오브제로 기록하는 감성적 민족지를 보여준 김보섭 작가는 “그는 사라져 가는 세계를 당당하고 아름답게 본다. 그 위에서 그가 만든 포토제닉한 이미지는 감성으로서 독자들이 과거를 스스로 재구성할 수 있는 여지를 더 크게 열어 젖힌다”고 쓰고 있다.



▲ 이영욱작가의 '자유공원'


카메라불사 카메라 40년의 문진우 작가는 “사진의 작품성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바로 오래됨에 있다며 찍어놓고 보면 시간이 흐르고, 그 사이에 오래됨이 생긴다. 누구든, 그 오래된 사진에 끌리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 기준이 무엇인지 나만 혼자 바보가 되네’의 김문호 작가는 “세계와 역사에 대한 고민이 많고, 사유가 깊은 다큐사진가일수록 그 재현 방식의 이동 폭 이 넓다. 김문호 작가가 그 대표적인 사진가다”고 작가론을 펼쳤다.



▲ 이재갑작가의 '무대 뒤의 차가운 풍경'


“아픈 역사를 이면과 기억으로 엮는 서사시”의 이재갑작가는 “기록할 수 없는 그렇다고 토해낼 수도 없는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 기억해야 하는 것, 이 기억에 대한 담론을 사진으로 작업한다”고 평했다.


사진으로 사진에 대한 신화를 깨다의 이영욱 작가는 “이영욱 사진은 기록에 대해 시비를 거는 메타기록이다. 경험에 대한 기록이 아니고, 해석에 의한 기록이 아닌, 세계본질에 대한 기록이다”고 쓰고 있다.



▲ 최영진작가의 '서해안'


‘끊임없는 기억의 흐름에 정해진 것은 없다’의 고정남작가는 “답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고, 가치와 의미로 된 규정도 없고, 모두가 있는 작은 곳곳의 자리에서 나 자신만의 세상을 누벼보는 것이다. 사진은 찍는 이의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보고 나누는 이의 것이기도 하다”고 썼다.


마지막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레퀴엠’의 이수철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때로는 합성을 통해, 때로는 덧칠을 통해, 때로는 타 매체와의 협업을 통해 그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레퀴엠을 바친다”고 논했다.


▲ 조문호작가의 '동자동 노숙인'



카메라는 칼이다’의 저자 이광수교수는 “기계가 만들어내는 사진의 역사가 18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하늘 아래 새로운 사진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겠는가? 사진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라도 모든 경우에 통용되는 가치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오래됨’이라고 했다.


이 땅에서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숨어있는 현대사진가 12명의 작가론을 해석하고 비평한 이광수교수의 ‘카메라는 칼이다’ 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이영욱 (사진가)





‘갤러리 브레송’기획전의 “사진인을 찾아서” 세 번째 작가,
이영욱씨의 ‘텅 빈 의미’ 사진전 개막식이

지난21일 오후6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렸다.


난, 사진가 이영욱씨를 20여 년 전에 처음 알았다.
‘삼성카메라’에서 일할 때였는데, 그곳에서 ‘자유공원’이란 사진전을 했다.
그 때는 대개 틀에 박힌 사고에 젖어 있을 때라, 그의 사진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말없는 말들은 ‘자유공원’ 자체를 다시 생각게 했다.

그 후 그를 잊어버렸다. 이름은 잊었으나 ‘자유공원’은 잊지 않았다.
티비, 신문, 잡지 한 권 안보고 살았으니, 세상 돌아가는 꼴을 간첩보다 더 몰란거다.
작년부터 페북과 가까이 하며 모든 걸 알았다.
컴퓨터에서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으나, 때로는 정치나 사진판의 구태에 열받기도 했다.

얼마 전, 이영욱씨 사진에 대한 이광수교수의 글이 ‘오마이뉴스’에 올라 있었다.
“사진으로 맥아더 목을 잘라버린 그 남자”를 보고, 이영욱이란 이름을 다시 기억해 낸 것이다.
오랜 기억의 ‘자유공원’을 비롯하여, ‘대상과 침묵의 접촉’, ‘이상한 도시산책’, ‘이 도시가 꿈꾸었던 그 꿈은 무엇인가’,

‘거울의 기억’, ‘북간도’, ‘사진일기, ’불확실한 여행‘, ’아카이브‘ 등 그동안의 작업들을 정리해 놓았는데, 놀라웠다.

그의 시비는 20여 년 동안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기다리던 전시 개막식 날, 서둘러 나왔으나 전시장은 축하객으로 발 디딜 틈 없었다.
김남진 ‘브레송’ 관장이 나와 작가소개를 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작가 이영욱씨와 이광수교수가 서있었다.

엄상빈, 정진호, 성남훈, 이상엽, 이갑철, 박신흥, 신동필, 윤성준, 이은숙, 남 준, 김영호, 곽윤섭, 곽명우, 정영신,

강제욱, 고정남, 정태만, 이경자, 권혜진, 이상봉씨 등 많은 분들을 만났으나, 아는 분보다 모르는 분이 더 많았다.

사람이 많아 사진을 꼼꼼히 살펴볼 수 없는 게 아쉬웠으나,
모든 사진은 사물들에 시비를 걸고 있었다. 대상에 대한 반론 재기인 것이다.
기존의 관념을 깨부수는 작품은 마치 선승의 “이 뭣고?”라는 화두 같았다.
처음에는 좀 낮 선 것 같았지만, 신화에 불과한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나라 했다.
그 안에는 역사도, 사회도 없고, 오로지 중지된 현상만 있다고 말했다.

이광수 교수는 작가의 화두가 사실에 대한 '객관성'이라며 열변을 토해냈다.
어떤 현상에 달라붙은 단일적 대표성에 대한 그의 시비는, 신화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라 했다.

'텅 빈 의미'도 아무 의미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의미가 너무 많아 하나의 의미로 고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어찌나 논리 정연한 달변인지, 그의 사진에 푹 빠져 이해하게 했다.

강연이 끝나고 다들 뒤풀이 집으로 옮겼는데, 식당이 꽉 차벼렸다.
즐겁게 술 마시다, 전시장에선 미처 못 본 사진집을 만난 것이다.
‘접촉’이란 이영욱사진집이 눈빛사진가선 23호로 나왔는데, 일단 ‘접촉’이란 제목이 너무 마음을 끌었다.


대충 보았으나 너무 갖고 싶었다. 작품도 꼼꼼히 살펴볼 겸, 다시 찾을 작정이다.

그런데, 그 날 뒤풀이 비용이 제법 많이 나왔을 텐데, 술값을 거두지 않더라.
일단 지갑은 굳었지만, 다들 뻔한 처지라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 전시 제목은 “텅 빈 의미”였지만, 사진은 “꽉 찬 내용”이었다.
이 달 30일까지 계속되니, 꼭 한번 보시기 바란다.
전시장에서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접촉’사진집(12,000원)도 살 수 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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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갤러리 브레송 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 3


이영욱 편 '텅 빈 의미 - obtus' 

3월 21일부터 30일까지 / 갤러리 브레송

 오프닝 : 21일(월)오후 6시 30분


이영욱, 자유공원, 23.5x105cm, archival pigment print, 1995.

이영욱, 자유공원, 23.5 x 105cm, archival pigment print, 1995.ⓒ 이영욱

이영욱, 자유공원, 23.5 x 105cm, archival pigment print, 1995.ⓒ 이영욱


사진이 보여주는 모양새를 서로 나눠 보고, 그 안에 담긴 뜻을 서로 헤아려 보고, 그 안에서 내 세계를 그려보고, 그로부터 지적 유희를 즐기고, 그것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그런 평가가 있었으면 한다. 그 안에는 주류도 없고, 패거리도 없는 그런 평가가 있었으면 한다. 재미있게 말하자면, 이 땅에 숨겨진 고수를 찾아서 놀이를 하자는 것이다.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허물고, 패거리도 없고 갑과 을의 관계도 없는 대동의 사진 세계에서 한 세상 멋지게 놀 수 있는 이 땅의 고수를 찾는 놀이다.



이영욱, 대상과 침묵의 첩촉,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3), 1998.ⓒ 이영욱



글 / 이광수 (부산외대교수, 사진비평가)

아주 아주 오랫동안, 역사학의 관심은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록하고 해석하는 것이었다. 언제 누가 무슨 일을 했고, 왜 그리고 어떻게 했느냐에 관한 관심이었다. 목격이 가장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됐고, 그 위에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어떤 구조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유럽에서 '그 과거를 규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문에 봉착하면서 역사학은 사실 그 자체보다는 사람들이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안에 객관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해석일 뿐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진가 이영욱의 문제의식은 이런 맥락과 연결된다. 그에게 가장 큰 화두는 사실에 대한 '객관성'이다. 신화에 대한 의문이다. 그 의문은 어떤 현상에 대해 남긴 기록이라는 것에 달라붙은 단일적 대표성에 대해 건 시비이고, 나아가 사진에게까지 달라붙은 그 객관성이라는 신화에 대한 도전이다.

사진가 이영욱의 작품을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가 던진 사진에 대한 사진을 통한 문제 제기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워서 그렇다. 바닷물 속에서 사는 용왕이 토끼에게 들은 땅이라는 개념을 전혀 이해할 수 없듯이 그가 던진 기록과 객관이라는 신화에 대해 평소에 의문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의 사진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의 사진이 어려운 것은 독자들이 보기에 왜 이런 평범한 사진이냐는 사실에서부터 먼저 시작될 것이다. 그의 사진은 누구나가 다 찍을 수 있는 사진이다. 그런데 누구나가 다 읽을 수 있는 사진은 아니다. 사람들이 빛과 색으로 만든 현란한 이미지에 물들어 있고 그것이 가진 특정 현상에 부여된 의미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 익숙함 속에서 이영욱이 전혀 생뚱맞은 사진을 내걸어 전시를 하고, 책을 내니, 사람들은 의아해 할 뿐이다.



이영욱, 대상과 침묵의 첩촉,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3), 1998.ⓒ 이영욱



1. 신화로부터 탈주

이영욱은 1995년 발표한 첫 작업 <자유공원>에서 그 화두를 꺼냈다. 그는 인천의 '자유공원'이 왜 인천 시민의 마음의 갤러리 혹은 관념이 됐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자신의 긴 사진사의 화두를 꺼냈다.

과연 그들이 품고, 개념화하고, 소비하는 그런 '자유공원'이라는 실체는 존재하는 것일까? 이 의문을 사진으로 던지는 작업이다. 맥아더 동상, 자유의 여신상, 비둘기, 경찰서, 반공 캠페인 표지판, 충혼탑,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 등 역사를 해석하는 어떤 권력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규정되는, 그리고 그 해석돼 만들어진 하나의 역사를 객관의 진리로 받아들여 시민들의 표상으로 자리 잡힌 역사에 대해 냉정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맥아더의 목을 쳐버리거나, 충혼탑의 글귀를 보이지 않도록 처리해버린다거나 하는 비판과 느닷없는 안마시술소나 지저분하고 전혀 '자유'스럽지 않은 비둘기집을 집어 넣어버리는 방식으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스토리텔링이다.

처음 이 공원의 이름이 '만국공원'이었다가 왜 '자유''공원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왜 1990년대 이후 민족자주 진영의 진보운동가들이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 했는지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사진가가 사진으로 맥아더 동상을 죽여버렸지만, 그것이 그렇다고 민족자주 진영이 시도한 물리적 동상 파괴에 대한 옹호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맥아더를 통해 자유냐 반미냐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신화냐 실재냐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다음 작업은 1998년의<대상과 침묵의 접촉>이다. 전작에서 출발한 신화에 대한 고민이 거시사의 해석이었다면,<대상과 침묵의 접촉>은 미시적 일상사의 해석이다. 이 점에서 이영욱은 롤랑 바르트의 전사다.

바르트에 의하면 세상은 '일정한 구조에 의해 형성되고, 그 구조는 특정 의미를 지니는 기호'로 이뤄져 있는데, 사람들은 그 기호에 종속돼 그 안에서 발생한 어떤 제도나 현상을 마치 자연스럽거나 합리적이거나 심지어는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화일 뿐 보편적인 것이라 할 수 없음에도 사람들은 그 신화에 함몰돼 어떤 것이 옳은지 싸운다. 나아가 그 옳지 않은 것은 처단해야 한다고 싸운다. 목숨 걸고 싸운다.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의 해석만을 기독교 성경 바이블처럼 받드는 어리석은 일이다.



이영욱, 대상과 침묵의 첩촉,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3), 1998.ⓒ 이영욱

이영욱, 대상과 침묵의 첩촉,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3), 1998.ⓒ 이영욱

이영욱, 대상과 침묵의 첩촉,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3), 1998.ⓒ 이영욱

이영욱, 대상과 침묵의 첩촉,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3), 1998.ⓒ 이영욱



이영욱이 <대상과 침묵의 접촉>에서 보여주는 사진들은 모두 이미지의 실재에 대한 반론이다. 흔히 말하는 리얼리티라는 것은 의미 없는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란 다름 아닌 그것을 바라보는 특정인의 신화 구조 속에서 형성된 그 사람의 관념의 소산일 뿐인데 왜 그것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해석으로 굳혀져야 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짝짝이로 놓여져 뭔가 잘못된 된 것 같이 보이는 군화 한 켤레, 다 타버린 연탄 위에 버려진 담배꽁초와 그 앞에 죽어 널 부러진 비둘기(이 새는 평화의 상징으로 사람들에게 읽힌다) 한 마리, 풀밭에 놓인 뒤엉켜 버린 고무호스, 텅 빈 유원지에 놓인 목마, 트럭 짐 차 앞에 놓인 매트리스, 공원에서 사진 찍는 포즈의 여성과 사진 찍는 것 같으면서 아닌 것 같은 앉은 자세의 남성 등 그 어떤 장면 하나 하나가 명확한 의미를 보여주는 것도 없거나 자칫 식상한 의미를 부여하는 상징으로 해석될 듯한 장면들을 모아놨다.

누구든 이 장면에 대해 확실한 의미를 보여줘 봐라는 것이다. 세상이 이러 하니 제발 잘 찍은 사진 한 장, 물성이 좋은 이미지, 리얼리티가 분명한 이야기로 세상을 해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영욱, 이상한 도시산책- 중앙동, 100x150cm, archival pigment print, 2014.ⓒ 이영욱

이영욱, 이상한 도시산책- 용현동, 100x130cm, archival pigment print, 2014.ⓒ 이영욱



2012년의 작업, <BLOW_UP, 이 도시가 꿈꾸었던 그 꿈은 무엇인가>와 2014년 작업 <이상한 도시 산책>도 이와 동일한 선상에서 이뤄진 사진의 기록과 신화에 대한 문제제기다. 사진가는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자신의 작업실 주변을 기록했는데, 15년 정도가 지난 후 우연히 그 사진들을 보다가, 그곳을 다시 찾아가봤다.

그리고서는 변해버린 장소성 안에서 특정의 시간을 기억하거나 기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스스로가 붙들고 있는 긴 화두를 다시 한 번 되새김질했다. 사진으로 남긴 것은 기록이라는 탈을 쓴 하나의 기억일 뿐이지 않는가, 그것이 국가·민족·계급과 같은 만들어진 집단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내가 보았고 내가 셔터를 눌러서 기록했다고 해서 그 '나'의 시각은 '나'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집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말이다를 말하고 싶어졌다.

그러한 의문으로 그의 사진은 '나'에게서 도시에게로 옮겼다. 그래서 이 도시가 꿈꿨던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진 것이다. 그 꿈이란 도대체 있었던 것일까? 그 꿈은 무엇인가?


이영욱, BLOW_UP. 이 도시가 꿈꾸었던 그 꿈은 무엇인가,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12(1993-1998촬영)ⓒ 이영욱

이영욱, BLOW_UP. 이 도시가 꿈꾸었던 그 꿈은 무엇인가,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12(1993-1998촬영)ⓒ 이영욱



2. 기록과 다큐멘터리의 부정

사진가 이영욱은 <자유공원>과 <접촉>을 통해 '존재와 해석'에 관해 사진으로 글을 썼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의 긴 작업을 하나의 글이라 치면  <자유공원>과 <접촉>은 기(起)에 해당한다. 그 기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2001년 <거울의 기억.에서는 살을 붙이고, 윤기가 나게 문지르고, 생각을 확장했다. 이른바 승(承)이라 할 수 있다.

사진가가 보는 존재란 절대성이 없고, 그것은 해석에 대해 열려 있을 뿐이라면, 이제 <거울의 기억>은 그 해석의 열린 공간을 만들어보는 문제의 이음새다. 올림푸스 하프 사이즈 카메라로 작업해 한 프레임 안에 찍혀 좌우에 우연히 배치된 서로 다른 장면들을 하나로 묶어 우연성 안에서 해석의 여백을 만든 작업이다. 사진의 가장 큰 특질 중의 하나인 우연의 요소를 기반으로 하로 만든  이미지다.

그는 그 두 개의 이미지를 우연에 기대어 하나의 조합으로 세워 둘 뿐, 다른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하나의 사진이 어떤 완결된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사진가는 바로 이 전제에서  '텅 빈 의미'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다. 물론 '텅 빈 의미'란 아무 의미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의미가 너무 많아서 하나의 의미로 고정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영욱, 거울의 기억,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1. ⓒ 이영욱

이영욱, 거울의 기억,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1. ⓒ 이영욱



이영욱이 '존재와 해석'의 문제를 또 다른 방식으로 승(承)한 것은 기록에 대한 것이다.  2007년의 <북간도> 작업에서다. 그것은 기록이지만 탈(脫)기록이다. 그 기록이란 기존의 시간과 맥락을 탈피하려는 새로운 차원의 기록이다. 사진가 이영욱은 자신이 처음 접한 '북간도'에 대한 인식을 '일반화'라는 신화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했고, 그래서 그것을 중지시키고자 했다.

상징으로 점철된,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가치로부터 벗어나야 뭔가 새로운 어떤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사진가 이영욱은 우리가 흔히 '북간도'라 하면 자연스럽게 상기되거나 읽혀지는 특정 역사의 의미 구조를 과감히 배제하고, 객관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는 좀 낮 설 수도 있는 이미지를 선택해 기록의 신화로부터 탈주하고자 함을 말하고자 한다.

분명히 그곳에 존재하고 있던 풍경들, 일제 강점기나 아버지의 아버지들의 잃어버린 조국 강산, 반드시 되찾아야 할 조국 강산을 위해 살아남아야 할 그 땅의 의미로부터 벗어나 그냥 있는 그대로의 만주 평원을 기록한 것이다. 그 안에는 역사도 없고, 사회도 없다. 오로지 중지된 현상만 있을 뿐이다. 당신은 이런 방식의 기록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영욱, 북간도, 90x100cm,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7.ⓒ 이영욱

이영욱, 북간도, 90x100cm,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7.ⓒ 이영욱



이영욱은 객관성이라는 만들어진 신화에 대해 그리고 그 신화 안에 똬리를 튼 '사진(의 과학성)'이라는 또 다른 신화에 대해 사진으로 말을 하는 중이다. 사진으로 사진을 말하는 사진론, 참으로 무거운 작업이다.

그는 이 작업을 1995년부터 해오던 중 2001년에 중국에 갔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신화 깨기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말하기의 방식은 기존의 것과는 사뭇 달리 <즐거운 유배지>와 <사진일기> 작업을 했다. 동일한 주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이 작품은 낮은 화질(350dfi)의 이미지로 5x7 inch 크기의 사진이 텍스트와 묶여 함께 발표됐다.


이영욱, 사진일기 - 즐거운 유배지, 5x7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7.ⓒ 이영욱



이영욱, 사진일기 - 즐거운 유배지, 5x7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7.ⓒ 이영욱



이영욱은 이 두 작업을 두고 "어릴적 그림일기 형식을 차용해서 이미지와 텍스트를 함께 배치 한 것인데, 이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만남을 통해서 내면적인 솔직한 고백의 형식이라 믿는 일기를 뒤집고 싶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사진은 과학적인 증거의 역할을 하고, 일기는 아무도 보지 않(거나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는 자기 고백이라는 일반화 된 진실 같은 비(非)진실을 믿는 관객에게 죽비로 그 어깨죽지를 후리치는 도발이다.
    


이영욱, 사진일기 - 즐거운 유배지, 5x7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7.ⓒ 이영욱


이영욱, 사진일기 - 즐거운 유배지, 5x7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7.ⓒ 이영욱



그런데<불확실한 여행>에서는 그 텍스트를 제거해버렸다. 그러다 보니 다른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 만들어졌다. 작가는 텍스트마저 제거해 앞에서 시도한 사진과 일기로 표상되는 일상성의 신화 깨기를 사진으로만 보여준다고 하는 의도인 것으로 읽힌다.

신화를 깨고 나가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보는 것이겠으나, 두 장르를 가지고와 양 방향에서 신화 깨기의 협공을 벌인 싸움을 느닷없이 중지하고 전혀 새로운 방식의 신화 깨기 싸움을 벌이는 것 같아 긴 싸움의 여정에서 볼 때는 천재적이거나 산만하다.

이 셋은 이미지와 텍스트와의 상관관계, 이미지에서 물성(物性)의 제거, 평범한 오브제와 대상의 선택 등을 통해서 볼 때 결국 같은 맥락이긴 하지만, 〈불확실한 여행〉은 기(起)를 거치고 승(承)1과 승(承)2를 거쳐 전(轉)으로 넘어 가지 않고, 승(承)3으로 영역을 넓힌 것으로 이해된다.


이영욱, 불확실한 여행, 60x90cm,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8.ⓒ 이영욱

이영욱, 불확실한 여행, 60x90cm,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8.ⓒ 이영욱



3. 아카이브라는 또 다른 신화

사진가 이영욱이 사진으로 하는 사진에 대한 신화 깨기 작업은 2015년의 <집이다>에서 전(轉)을 맞는다. <집이다>에서 '집'은 특별한 맥락의 이해나 기교를 통한 수식 등을 필요로 하지 않은, 그 자체로서 지난 도시의 과거를 보여주는 대상을 가장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이미지로 찍는다.

그 대상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해줄 뿐, 달리 특별한 양식의 재현을 하지 않으면서 만든 이미지다. 전작들에 비해 힘이 빠지고 기름기가 빠졌다. 상큼하다. 누구든 저 이미지를 보면 '어쩌다 저런 집이 생겼을까!'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그래서 그 묘한 그 집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보다 더 극적인 다큐멘터리는 없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아카이브의 방식을 통해 사진가 이영욱은 지금까지 해온 객관이라는 신화를 깨는 방식을 전환시켰다. 지금까진 논리적 격문을 던지는 것을 멈추고, 그저 그냥 거울 하나 꺼내 제 모습 보도록 넌지시 건네줄 뿐이다. 작품의 감동은 이러한 발상의 전환에서 온다.


이영욱, 집이다. 인천-화평동, 60x90cm, Pigment inkjet print, 2015.ⓒ 이영욱



이영욱, 집이다. 인천-북성동, 60x90cm, Pigment inkjet print, 2015.ⓒ 이영욱



이영욱이 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절대적 기록이 아니다. 그 어떤 시각도 다 배제한, 완전히 절대적으로 무미건조한 본질적 절대성을 지닌 기록으로서의 이미지란 만들 수 없다. 그래서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지개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고, 그 무지개를 잡으러 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는 그 가능하지 않은 길을 새로운 방법론을 대동해 가능하다고 믿고 길을 나선다. 그 새로운 방법론이란 바로 '아카이브'다


이영욱, 아카이브 - 섬프로젝트 - 이작도, 100x130cm, Pigment inkjet print, 2015.ⓒ 이영욱

이영욱, 아카이브 - 중구프로젝트 - 송학동, 100x130cm, Pigment inkjet print, 2015.ⓒ 이영욱



일정한 장소를 기록하되, 대상을 보는 주체가 가질 수 있는 시각을 가능한 한 최대한 배제하고, 대상이 스스로 말을 하도록, 모든 장치를 방해하지 않도록 무미건조한 사진을 찍되, 그 분량을 최대한 늘린다.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인간이 관계적으로 유일하게 독립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각 매체로서의 사진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사진이 갖는 의미와 예술에 대한 강한 부인이다. 이영욱이 택한 이 아카이브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중국에서 돌아온 후, 지금으로부터 약 6년 전에 시작했다.


이영욱, 농촌, 60x80cm, Pigment inkjet print, 2015. ⓒ 이영욱

이영욱, 농촌, 60x80cm, Pigment inkjet print, 2015.ⓒ 이영욱



사진가 이영욱은 이제 도시에서 벗어나, 농촌과 어촌을 향한다. 객관이나 일반의 신화를 깨려는 작업은 여전하다. 흔히 말하는 '우리'가 갖는 농촌의 모습, 섬의 이미지는 이제 이영욱의 카메라를 통해 정겹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고, 어머니와 고향으로 둘러싸여 있지도 않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무미건조한 모습으로 보여질 것이다.

그것이 설사 가능하지 않다더라도 고정 관념과 이미지를 향해 쉴 새 없이 던지는 성찰과 담론이다. 그것은 뭇 사람들이 갖는 기록이라는 신화에 대해 균열을 내서 그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던지는 것이다.

결과를 뽑아내려는 사회과학이 아닌 문제를 제기하는 인문학 담론이다. 만들어진 신화에 대한 지독하고 치열한 도전이다. 기록성을 부인하면서 만들어가는 기록, 예술을 부인하면서 생기는 예술, 우리는 이를 뭐라고 평가해야 할까? 탈객관을 지향하는 탈주관? 존재와 기록에 대한 아나키즘? 신화를 무너뜨리며 쌓은 또 다른 신화? 사진가 이영욱 앞에서 사진에 달라붙은 모든 만들어진 신화는 지금, 무너진다. 할(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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