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정영신씨의 ‘장터길 문화탐방(가제)’ 출판 마무리 작업에 따라 나섰는데,
문경에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마침, 아나키스트 박열 의사의 기념관에 간다는 것이다.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와의 짧지만 뜨거웠던 삶의 궤적도 인상적이지만,
항일 의열단 단원으로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공적에 비해 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무정부주의 단체 ‘흑도회’를 조직하여 일본 히로히토 암살을 모의한 당사자다.
‘대역사건’으로 검거되어 23년간 옥고를 치루고 해방으로 출옥되어

‘신조선건설동맹’과 ‘재일조선인거류민당’을 차례대로 창립하기도 했다.



2012년 생가 터에 박열의사 기념관이 건립되었으나, 그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기념관 옆쪽에는 2003년 부터 자리 잡았다는 가네꼬 후미코의 묘소도 있었다.
감옥에서 꽃다운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가네꼬 후미코는
일제에 저항한 공로로 일본인으로 두 번째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얼마 전 김명성씨가 소장한 박열의사의 많은 친필서한들을 촬영한 적이 있었는데,
시인이기도 했던 그의 서한들을 접하며 그를 다시 알게 된 것이다.
기념관에는 어떤 유적들이 있을까? 하는 기대가 컸다.




문경새재에서 아침시간을 보내고, 정오 가까이 기념관에 도착했는데,
공원화한 유적지의 기념관은 엄청난 규모로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관람객은 커녕 관리하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생가 터도 복원해 놓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없는, 민속촌에서나 본듯 한 초가였다.




기념관에는 여러가지 사료들을 모아두었으나, 원본이 아니라 대부분 복제였다.
눈 짐작에도 몇 백억 예산은 족히 들어갔을 텐데, 껍데기에 불과한 토목공사에 돈 처바르고,
유적구입에는 왜 소홀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유적 구입에 들어가는 돈은 남는 게 없어서일까? 아니면 몰라서일까?
비록 여기만이 아니라 지자체에서 건립한 대개의 유적들이 이런 식이다.
엄청난 규모로 만들기만 해놓고, 관리나 홍보는 뒷전인 이런 식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




다음 행선지는 삼국시대부터 전해 내려 온 천연의 요새, ‘고모산성’이었다.
이곳은 옛날 과거 보러 가던 선비들의 애환이 담긴 산길이기도 한데,
포곡식 산성으로 본성과 익성을 합해 총 1,646m에 달하는 성이다.




사방에서 침입하는 적을 모두 방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데,
선인들의 지혜가 느껴지는 건축미와 세월의 흔적을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



마지막 들린 곳은 한 때 문경선 역사였던 ‘불정역’이었다.
1954년 문을 열어 1993년 문을 닫은 불정역은 문경탄광의 석탄산업과 연계된 역사적 장소성이 있다.




역사 아래는 화강석으로 마감했으나, 상부는 인근의 구랑리 천 강자갈을 사용했다고 한다.
멈춰 선 기차의 객실은 문이 닫혔으나, 다양한 용도로 활용한 듯 했다,

비록 찾는 이는 없으나, 아담한 간이역이었다.




오후1시가 넘도록 아침식사를 못해, 허기져 더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듯이, 배가 고프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문경장에 들려 아침 겸 점심을 먹었는데, 오천원짜리 정식을 시켜 엄청 맛있게 먹었다.
시장이 반찬 이라 듯, 무엇을 먹은들 맛없는 음식이 있겠는가?



 
문경까지 와서 그냥 가면 안 될 분이 있다며, 정영신씨가 이선행씨에게 연락했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달려 나온 그의 안내로 인근의 단골집 ‘커피 가 로스터스’에 들렸다.
난, 자판기 스타일이지만, 가격도 저렴한데다 커피마니아가 운영하는 괜찮은 커피집이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먼저 일어나 혼자 장터에 갔다.




대목장이라 장터는 붐볐지만, 예전 같지 않았다.
방앗간에 떡 만들러 온 사람들의 행렬도 보이지 않았고, 생선가게만 붐볐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장터 풍경을 아쉬워한들 무슨 소용이랴!



그런데, 장터에서 멋쟁이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연세의 할머니가 뽀얗게 분을 바르고, 빨간 하이일 까지 신었더라.
마지막까지 여자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그 할머니가 존경스러웠다.




좀 있으니, 정영신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장터 촬영도 촬영이지만, 우리도 제사상 차릴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엊그제 서산장에서도 몇 가지 샀지만, 나물거리와 생선을 사야 한단다.
따라 온 이선행씨가 단골집에 들려 시금치 한 단을 사주었는데,
가격은 서울과 똑같은 오천원이나, 양은 서울의 곱절이나 되었다.




'새도 날아서 넘어가기 힘들었다'는 ‘문경새재’라 그런지, 나도 힘들었다.
대목장 마지막 촬영지라 누적된 피로가 몰려 온 듯 했다.
무사히 집까지 오긴 했으나, 졸음운전으로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사는 것 자체가 곡예 아니던가?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5일, 반가운 손님 오셨다는 연락을 정영신씨로 부터 받았다.
문경의 문화활동가 이선행씨가 인사동 왔다는데, 점심이나 같이 먹잖다.






하필 ‘헌법제판소’ 부근이라는데, 요즘은 헌법 이야기만 들어도 열 받는다.
부지런히 내려가니, 이선행씨와 함께 골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9월 문경장에서 뵙고 처음인데, 그 때보다 살이 좀 빠진 것 같았다.
여자 분들은 살이 빠지는 것이 좋은지 모르지만, 난 든든한 미인이 좋더라.






그 곳에 맛있는 만두집이 있다는데, 자주 들락거리는 나보다 시골 사람이 더 잘 알았다.
가보니 '깡통만두'집인데,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동자동에서 줄 세우는 게 지겨워, 줄서는 건 딱 질색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두라 먹기도 편하지만, 기다리다 먹으면 더 맛있잖아.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맛있게 먹었으면 그만이지, 빈대떡 도시락까지 싸 왔다.
두 분이 인사동에서 차 한 잔 한다지만, 난 자판기 스타일이라 빠졌다.






나온 김에 볼 전시가 있어 인사동 거리로 나서는데,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돌아보니 안면 있는 분인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야! 이럴 때, 정말 입장곤란하다.
기억이 날 듯 말듯 머뭇거렸더니, 봉화 도예가 신동여씨 이야기를 꺼냈다.
그 때야 오랜 기억이 떠올랐는데, 영주의 권오진씨 였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이종문씨와 적음까지 그리워졌다.






잘 아는 분 전시가 있어 왔다기에 따라갔더니,
‘인사아트’에서 열리는 김흥배씨의 ‘달항아리’전이었다.
달 항아리가 정말 달덩이처럼 훤하게 잘 생겼더라.  
녹차는 얻어 마셨지만, 그 곳도 자판기 커피는 없었다.






전시장을 나와 김진열, 장경호, 정복수씨 삼인전이 열리는 ‘나무화랑’으로 올라갔다.
전시장에는 김진하 관장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34년만의 "조우 또는 해우“ 김진열, 장경호, 정복수전은 ’나무화랑‘ 기획전이다.
김재홍, 김영진, 박불똥의 36년만의 만남-오!레알?』展에 이어
'중견작가 되돌아보기 시리즈' 두 번째 전시다.






강렬한 물질성과 형상성으로 민족의 아픔을 말하는 김진열씨,
초지일관 인간에 대한 발언을 쏟아내는 정복수씨,
한 때 ‘한강미술관’을 운영하며, 민중미술에 기름을 부었던 장경호씨 등
다들 한 가닥 하는 배트랑 작가전이라 볼만하다.






그러나 방명록에 흔적만 남기고, 얼른 줄행랑쳤다.
사실 장경호 만나지 않으려고, 개막식을 피해 일부러 일찍 간 것이다.





그는 동생처럼 생각하는 친구지만, 요즘은 일체 상종을 않는다.
한 달 전에 부린 주정이 내게 부린 술주정이라면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건 정영신에 대한 모욕이라 참을 수 없었다.
지금은 내 기집이 아니지만, 십 몇 년 살아보니 참 착한 년이더라.
여지 것 그 여자 힘들게 하면 누구든 그냥 두지 않았다.






그러나 화는 시간만 지나면 풀리지만, 이 참에 버르장머리를 고칠 작정이다.
그만큼 서럽고 외로웠으면 작업으로 토해낼 때도 되었는데, 허구한 날 술로 세월 보낸다.
그것도 조용히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쌓인 분노를
술 친구에게 다 풀어 주변에 술친구가 없다.






사실 좋은 신작이라도 내놓았다면, 오히려 내가 사과하려 했다.
무슨 철천지 원수진 것도 아니지만, 작업에 매달리지 않는 한 보지 않을 생각이다.





나 역시, 존경하는 선생이던 친구든 후배든, 가리지 않고 입 바른 소리를 해 사람 많이 잃었다.
그렇지만, 그런 모욕에도 깨우치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 필요 없다.
좋은 사람 만나기도 바쁜데, 덜 된 사람 만날 필요가 뭐 있겠는가?






그나저나, 커피생각은 간절한데 인사동에는 커피자판기가 없다.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러 계동 ‘민예총’사무실로 올라갔더니,
정영신씨는 없고 서인형 국장과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있었다.
다들 ‘민예총’ 기금 마련전 준비로 바쁜 것 같았다.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니, 그때야 정영신씨와 이선행씨가 올라왔다.






마침 탁자 위에 2003년도 ‘문예진흥원’에서 만든 신학철선생 전시도록이 있었다.
신학철화백의 걸작들을 다시 볼 수 있었는데, 끔찍한 작품 한 점이 눈에 밟혔다.






난, 세상만사 미리 정해져 일어난다는 운명론보다 인간이 짓는 업보를 믿는 편이다.
저 그림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지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세상사 누가 알겠냐마는, 좋은 것이 좋다는 어른들 말씀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닐 게다.






지금 선생께서 처한 슬픔이, 한낱 기우에 그쳤으면 좋겠다,
제발 기적이 일어나길 빈다. 간절히...



사진, 글 / 조문호




































모처럼 사는 일 떨치고, 장에 따라 나섰다.
장터와 지역 문화 답사 가는 정영신씨 기사 노릇을 자청해 콧바람 씌러 간 것이다.






첫 날은 경상북도 점촌장에 들렸다.
점촌하면 왠지 점잖은 촌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동내이름도 그렇지만, 야박한 다른 장 인심에 비해,
몇 년 전 받은 후덕한 인심이 그런 생각을 각인시킨 것 같았다.






점촌장은 급변하는 장터에 비해 아직 덜 망가진 시골장이다.
난전에 둘러앉아 한담 나누는 할머니의 모습도, 무뚝뚝한 사내들 사투리조차 정겹더라.





장에는 벌써 송이버섯이 나왔는데, 고추만한 버섯 여섯 개 놓고 팔 만원이라했다.
가난한 사람들 눈에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그 돈이면 고기로 온 가족이 맛있게 먹을텐데...






장터를 기웃거리며 떠도는 여인도 만났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장터에 이런 사람들이 간혹 있다.
세상이 미치도록 했겠으나, 어쩌면 그녀가 더 행복한지도 모르겠다.
단돈 천원에 싱글벙글 좋아했는데, 요즘은 어린애들도 천원을 우습게 여기는 세상 아니던가?
큰 욕심 없이 즐겁게 사니, 그게 바로 행복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장터에서 문경의 문화 활동가인 이선행씨를 만났다.
아마 정영신씨와 연락 닿아 나오신 것 같았다.
지난 겨울 정선 동계올림픽 얼음축제장에서 열린 정영신씨 장터사진전 때 한 번 뵌 적 있는 분이었다.
문경에서 정선까지 장터 전시 보러 온 지극정성에 놀랐었다.





정영신씨의 페친으로 장터문화를 좋아하는 분이라는데, 이번 문경 여행 안내를 맡아주셨다. 
점촌과 함창의 맛집에서 음식도 사 주셨는데, 너무 황송스러운 환대를 받았다.
그 중 함창의 버섯요리전문점 ‘테마촌’에서 먹은 버섯탕수육은 별미 중의 별미였다.
오디로 만든 달짝한 소스에 찍어 먹으니, 입에 살살 녹았다.






그 뿐 아니라,'문경새재도립공원'에 있는 ‘옛길박물관’을 비롯해 문경의 여러 곳을 안내해 주었다.

 ‘옛길박물관’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조선시대의 오래된 장터 사진으로 처음 보는 사진이 많았다.





산북면 사불산에 둥지 튼 '대승사'로 향하니, 죽도록 고생한 이십사년 전으로 필름이 돌아갔다.
한국의 불교 유적을 찾아 전국 사찰을 돌아다닐 때인데, 새벽에 도착하기 위해 매번 한 밤중에 떠났다.






지금에야 길 안내 해주는 내비라도 있지만, 그 때는 사람조차 만날 수 없는 시골 밤길 헤매느라 곤욕을 치루었다.
그 뿐 아니라 졸음을 견디지 못해 창을 내려 운전하다보니,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 불구가 되어버린, 고난의 시절이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 전국 명찰 문화재를 모두 촬영해 출판사에 원고를 넘겼으나,

일곱 권의'한국불교미술대전' 도록을 만들다 경영난에 허덕인 출판사의 부도로 원고료조차 받지 못했다.
유일하게 돈 되는 일 하나 맡았다고 생각했으나, 되는 일이 없었다.
그 덕에 사진이라도 남았지만, '대승사'를 보니 갑자기 힘들었던 그 때가 떠올랐다.






이어 이선행씨는 전통도예가 천한봉 명장의 도천도자미술관으로 안내했다.

도천 천한봉선생과 선생의 따님 천경희 도예가를 소개해 주었는데,

같은 듯 다른 두 작가의 도자를 감상하며 우리 고유의 멋에 빠지는 시간을 가졌다.







천한봉 선생께서는 일본을 자주 가신다고 하셨는데,

일본의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선생과 가까운 사이라고 하셨다.

구와바라 시세이선생께서 반세기 동안 천선생의 가마터를 오가며 기록했던

흑백 사진앨범 두 권을 보여주었는데, 한국전쟁 직후의 희귀한 사진도 있었다.





그런데,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께서 치매에 걸렸다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삼년 전 귀국하셨을 때만 해도 건강하셨는데, 한 번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아무쪼록, 별 탈 없기만을 빌 뿐이다.





그리고 점촌장에서 사주신 머루포도는 먹을 때마다

이선생의 고마움이 새록새록 나는 감칠 맛이었다.






"이선생, 고마웠습니다.

서울 오시면 맛있는 것 사드릴께요."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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