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인사동 골목대장으로 통했던 창원의 변형주가 올라왔다는 연락이 왔다.

모처럼의 서울 나들이인데, 하필 그날이 유목민정기휴일이었다.

문 닫은 술집에서 오붓하게 한잔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나섰는데,

몸은 흐느적거리지만 반가운 사람 만날 생각에 마음은 들떴다.

그러나 지하철 타고 가다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왜 안 오냐는 변형주 전화에 잠이 깼는데, 목적지를 한참 지나버렸다.

요즘은 앉기만 하면 졸아, 조심하는데도 매번 실수를 한다.

 

변형주는 창원에서 오래전부터 식당을 운영해 왔다.

지금은 저승으로 떠난 친구 정남규와 김의권 뒷바라지도 많이 했고, 내게도 도움을 준 인정 많은 후배다.

 

문 닫은 유목민에서 중화요리를 시켜 술을 마셨는데, 요즘은 시골 들어가 살 준비를 하고 있단다.

그가 준비해 온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니, 옛날 생각이 절로 났다.

부산 에덴공원 음악실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데,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시절인 것 같았다.

그 시절을 그리며 홀짝홀짝 마신 술에 그만 취해버렸다.

주량을 초과했는지 아니면 몸에 이상이 생겼는지, 갑자기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전활철씨 부축을 받아 간신히 자리에 누웠는데, 한 시간쯤 지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더 취하면 가기도 힘들지만, 4층까지 올라갈 자신이 없었다.

 

요즘 몸 상태로는 병원에 입원해야 할 처지지만, 병원에 들어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버틴다.

세상사 아무 미련은 없으나, 한 가지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서다.

다가오는 동짓날 전해주기로 한 버려진 사람들의 초상사진 때문인데,

그날이 제삿날이 될 지언정, 이를 악물고 버텨내야 한다.

 

사진, / 조문호

 

 

지난 23일 늦은 오후, 모처럼 인사동을 사랑한 한량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조준영 시인이 비용의 많은 부분을 감당하며 두 달에 한 번씩 자리를 만들어 왔는데,

지난번 모임에는 인사동에 정나미가 떨어져 가지 않았다.

 

변해버린 인사동도 인사동이지만 싫은 사람이 생겨서다

그렇지만 재차 연락해 온 조준영씨의 전화를 깔아뭉갤 수는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적대다 끝날 시간이 되어서야 약속 장소인 ‘바다슈퍼’로 갔는데,

양산에서 온 공윤희씨와 화가 장경호씨는 가버리고 없었다.

 

술자리엔 조준영씨를 비롯하여 전활철, 최석태, 전강호, 노광래,

정영신, 김이하, 김 구, 김수길씨 등 아홉 명이 남았는데, 고정 맴버에서 선수교체도 있었다.

 

‘바다수퍼’라는 술집은 처음 가보았는데, 손님이 제법 북적였다.

조개에 물려 조개탕은 싫어하지만, 우동사리를 안주로 소주 한잔했다.

전활철, 최석태씨 까지 일어 선 파장의 술자리라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최석태씨가 간다는 ‘흐린 세상 건너기’로 건너갔더니,

최석태씨는 물론 장경호씨와 김영진씨도 그곳에 있었다.

김영진씨는 ‘나무화랑’에서 전시 중이었으나, 가보지 못해 죄송스러웠다.

 

요즘은 인사동에 거리를 두기 시작하며 전시장 출입도 가급적 삼가한다.

‘ 인덱스’에서 열리는 중요 사진전 외에는 일체 가지 않았다.

 

전시만 보면 될 텐데, 메주 알 고주 알 올린 전시리뷰가 거슬린 모양인데,

고맙다는 인사는 커녕 욕까지 먹어, 뭐 대주고 뺨 맞는 격이었다.

 

이젠 나잇값도 해야 할 때라, 전시장 출입을 자제하니 일이 줄어 너무 편했다.

 밀쳐 둔 내 일에 전념하기 위한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긴 세월 찍어 둔 인사동 사진들을 정리해 책도 마무리해야 하고, 오래된 필름 정리에서부터

동자동 작업 등 죽기 전에 마무리할 일이 태산 같아, 남의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귀천’이 있는 인사동14길은 젊은 사람이 몰리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곳곳에 반가운 분들이 콩깍지처럼 끼어 있었다.

 

담배 피우러 나갔다가 옆집 ‘삼화령’ 안을 들여다보니 소리꾼 김민경씨와 배성일씨가 앉아 있었다.

너무 반가워 합류했는데, 이런 게 인사동의 매력 아니겠는가?

 

벽치기 골목 ‘유목민’을 아지트로 삼으며, 이 골목은 한동안 발길이 뜸해졌는데,

‘흐린 세상 건너기’나 ‘삼화령’은 수십 년 된 오래된 가게다.

 

정희성 시인을 비롯한 원로작가들이 가끔 들리는 곳으로, 그중 인사동의 풍류가 남은 곳이다.

 

소주를 마신데다 ‘흐린 세상 건너기’에서 내놓은 약주를 마셨더니, 속이 거북했다.

이젠 술도 아무 술이나 마시지 말라는 신호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참새방앗간 ‘유목민’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유목민’에서 운명철학가 신단수씨를 만나는 행운도 누렸다.

 

술을 깰 겸 콜라를 한 병 시켰는데, 콜라 값도 계산하지 않고 병 채로 들고 와 버렸네.

치매도 이런 치매는 곤란하다. 이 나이에 무전취식으로 종로경찰서 갈 수야 없잖은가?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풍류가 사라진 지 어제오늘 만의 일은 아니건만, 새삼 인사동 노래를 부른다.

인사동 풍류란 인사동에 시냇물이 흐르던 조선시대 서화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8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철학자 민병산선생을 비롯하여 천상병, 박이엽, 강민 시인 등의 문객들이 명동과 관철동을 거쳐 인사동으로 넘어오며 풍미했던 낭만 말이다.

 

인사동에 돈 바람이 분 것은 전통문화거리로 지정되기 훨씬 이전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살기 힘든 사람들이 집에 숨겨 둔 골동이나 고미술품을 팔려고 가져 나오며 비롯되었다.

오래된 집안 가보를 팔아 쌀을 사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지,

당시 정보장교로 한국에 와 있던 막 뮐러는 한 달 봉급으로 두 트럭이나 되는 골동을 사 모으기도 했단다.

보관 창고에 임금의 옥쇄가 발에 차였다는 때로, 인사동의 골동상들이 떼돈을 벌던 시기였다.

배에 가득 실은 골동품을 일본으로 내다 판 매국노 같은 장사꾼도 있었다.

 

골동상이 얼마나 많은 돈을 주물렀으면, ‘금당살인사건이라는 끔찍한 일도 생겨났다.

79에 벌어진 금당 살인사건은 진귀한 골동품이 있다며 금당주인을 유인한 후,

안주인과 기사에게 현금 오백만원을 갖고 나오도록 만들어, 세 사람 모두 죽여 암매장한 사건이었다.

그 일로 인사동 고미술상이나 중계상 삼천여명이 조사를 받았고,

그중 76명은 그 사건과 관계없는 일로 구속되는 등 인사동 고미술상에 큰 회오리바람을 일으켰지만, 그때뿐이었다.

 

고미술품과의 인연을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사동은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그 야바위 같은 뒷거래가 은밀히 이루어진다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모호하고 도굴품까지 늘렸으니,

장사꾼에서 장사꾼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가격이 엄청나게 불어나는 등 희한한 일이 많았다.

케이비에스에서 방영한 진품명품이란 프로도 일조했다.

 

고미술품 전성시대는 안으로 곪았지만, 관광 시대로 접어든 88년부터는 밖으로 곪기 시작했다.

인사동 자체가 잡동사니 거리로 변한 것이다.

흐르는 세월 따라 변하는 인사동을 누가 잡겠냐마는, ‘구하산방’, ‘통문관’, ‘명신당필방’, ‘수도약국’,

통인화랑’, 이문설농탕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노포가 곳곳에 살아있는 곳이 아니던가?

 

뭐니 뭐니해도 예술 중심지인 인사동에 예술가들이 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예술로 빌어먹는 가객들이 콩깍지 속 콩알처럼 주막에 틀어박혀 개똥철학으로 목청 높인 적도 아득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인사동 골목 문화를 만들어 온 예술가들의 풍류가 새벽 안개처럼 사라지고 있다.

 

그나마 오 가며 들렸던 벽치기 골목에 참새방앗간 하나 있었으나, 얼마 전 젊은 매니저가 들어 오며 제동이 걸려버렸다.

늙은이들이 있으면 젊은 사람이 오지 않는데다, 안주 하나에 술 한 병 시켜 놓고 세월을 죽이니 무슨 장사가 되겠는가?

인사동이야 노 예술가들의 출입이 잦아 여태 살아남았지, 다른 지역은 노인들 출입이 통제된 지 오래다.

 

인사동 골목골목을 찾아보면 술 마실 곳이야 없겠냐마는, 사람을 만날 장소 즉 이산가족 상봉소가 사라져 걱정이다.

아무리 그렇지만 전시를 여는 화랑이 밀집해 있는 이상, 등 돌릴 수도 없는 일이 아니던가.

마땅히 갈 곳도 없는 인사동 골목을 배회하다 발길을 돌리는데, 이젠 지인들의 전시 뒤풀이에서 만나는 방법뿐이다.

 

 

비싼 점포세 내가며 늙은 예술가들을 반길 곳은 없으므로

참새 방앗간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생각된다.

 

인사동을 출입하는 예술가들이 힘을 모아 인정과 예술이 살아 넘치는 곳을 한 번 만들어 보자.

십시일반 역할을 분담하여 술만 마시는 곳이 아니라 작품을 싸게 거래하거나

시 낭송회나 여러가지 토론회를 갖는 등 하나밖에 없는 예술가들의 둥지를 만들자.

 

인사동을 방황하다 외롭게 떠나가신 강민시인과 심우성선생이 그리워진다.

 

사진, / 조문호

 

 

 

 

낭만가객 최백호의 산문집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마음의 숲에서 출간되어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다.

출판된지 한 달도 되지않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최백호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마음의 숲/ 240면 / 가격17,000원

지난 달 초에 발간된 산문집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는 그가 써온 노래가사처럼 깊은 우수와 사유,

삶에 대한 통찰이 오롯이 담겨있다.

 

산문집에는 최백호가 가수가 된 우여곡절과 가수로서 진정성을 잃지 않고 살아 온 진득한 이야기,

노래에 얽힌 사연, 그리고 깊은 울림을 주는 삶의 잠언들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60세가 넘어 그리기 시작하여 여러 차례 개인전을 가졌던 그림 30점도 수록되어

산문집의 볼거리를 더해주는데, 그림에 이어 글 솜씨도 보통은 아니었다.

하기야! 그가 쓴 시 같은 노래가사들을 보면 일찍부터 노래하는 시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수이며 시인이고, 시인이며 화가인 최백호는 이 시대의 진정한 풍류객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난 4일 오후 4시에는 광화문 교보빌딩 대산홀에서 최백호의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북 콘서트가 열렸다.

 

교보빌딩 23층 대산홀은 350석 규모지만 코로나 방역으로175명만 입장할 수 있는데다,

책은 이미 구해 읽은 터라 북 콘서트는 가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뜻밖의 이변이 생겨버렸다.

 

필자가 포스팅한 북 리뷰를 본 울산의 오세필씨가 사발통문을 돌려버렸다.

그 덕에 김명성씨가 좌석을 확보하여 인사동 지인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이십여 명이나 추가로 참석할 수 있었던 것도 객석의 반만 예약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 날 오후 3시 무렵, 정영신씨와 인사동부터 들려 갤러리인덱스에서 열리는

) 김기찬선생의 어게인 골목안 풍경 속으로사진전을 관람했는데,

사진전 역시 모처럼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좋은 사진이었다.

 

전시를 보고 나오는 길에 역술인 신단수씨를 만나 그날 일진이 어떨지 궁금했는데,

북콘서트가 열리는 대산홀 입구에는 신단수씨의 친형인 김명성씨가 구입한 책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객석에는 오세필, 임태종, 정기범, 이정숙씨등 반가운 분도 여럿 보였다.

 

오후4시부터 시작된 북 콘서트는 최백호의 주옥같은 노래와 함께

가을 낙엽처럼 구수한 이야기들이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께서 태어난 지 몇 개월 밖에 되지 않은 자신을 보러오다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누님으로부터 너 때문에 아버지를 잃었다는 원망과 더불어

공부가 하기싫어 방황했다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가슴에 맺힌 상처까지 다 털어놓아

그의 진정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별도의 사회 없이 혼자서 1시간 30분 동안 끌어가는 북 콘서트 진행 솜씨도 보통은 아니었다.

 SBS 라디오에서 '최백호의 낭만시대'14년 동안 끌어 온 경험이 뒷받침 되지 않았나 싶다.

 

그 날 부른 노래는 부산에 가면을 비롯한 애창곡을 일곱 곡이나 불렀는데,

우수에 젖은 그의 노래는 흩어지는 낙엽처럼 아련한 향수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특히 지금은 별이 되어버린 친구 홍수진 시인을 생각하며 가사를 쓴

영일만 친구에서는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왈칵 밀려왔다.

마지막 구절인 친구를 부르는 대목은 절규처럼 가슴에 내려 꽂혔다.

 

3월 말에는 부산에서 최백호의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북 콘서트가 열린다니,

부산에 계신 분들은 잊지 말고 좋은 시간 만들길 바란다.

 

'인사동 사람들'은 북 콘서트가 끝난 후 미리 예약해 둔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 유쾌한 만찬의 시간도 가졌다.

그러나 김명성씨가 마지막 기념사진 찍으며 뱉은 농담 한마디는 영원히 잊지 못할 마음의 상처가 되고 말았다.

 

사진, / 조문호

 

정영신 사진
정영신사진
정영신사진

  

지난 17일 오후5시 무렵, 인사동 사람들의 정기모임이 인사동 유목민에서 열렸다.

 

두 달 만에 열린 이번 모임에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이명희, 정복수, 조해인, 유근오, 장경호, 정영신,

임태종, 공윤희, 안원규, 임헌갑, 최유진, 임경일, 김발렌티노 등 15명이 참석했다.

 

모처럼 만난 반가운 자리였으나 좌석이 여러 곳으로 나뉘어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분도 있었는데, 마침 최유진씨로 부터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을 맞아 위령 종루를 보수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는 27일 오후4시부터 인사동 서원빌딩 14‘615남측위원회회의실에서 종루 보수 모금 확산을 위한 이규수교수의 '관동대진재와 조선인 학살, 그 망각과 기억의 소환'이란 특강이 열리니 많은 참석을 바랍니.

 

이 일은 오래 전, 김의경, 심우성선생께서 성금을 모아 일본 관음사 경내에 종과 종루를 세웠으나, 지금은 훼손이 심해 보수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가신 심우성선생을 대신하여 연극연출가 최유진씨가 모금위원장을 맡아 발 벗고 나섰다고 한다.

 

2023년은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이지만, 그 참혹한 역사를 기억하고 원혼들을 진혼하기 위한 시설이 아직 우리나라에는 없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59년 양심적인 일본 시민들이 그 학살 현장에서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위령제를 올리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단다.

 

1985년 그곳의 위령 팻말을 본 한국 문화예술인들이 나서서 대한민국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희생자 기림 시설인 보화종루를 일본 관음사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1999년에는 일본 시민들이 조선인 희생자들의 위령비를 종루 옆에 세우고, 한일 양국 시민들의 추모문화제도 계속 열었다고 한다. 이렇게 역사적 의미가 깊은 사적 가치를 지닌 보화종루가 오랜 세월과 잦은 지진으로 훼손과 파손이 심해져 붕괴 위험에 처한 것이다.

 

이에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을 맞아 과거 이 종루를 건립하고 보수해왔던 원로 문화예술인들의 후배와 자녀 세대 문화예술인이 중심이 되어 다시 한 번 양국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개보수하여 시설을 보존하려 한다.

 

학살피해 100주년이 되는 오는 9 10일은 추도문화제도 함께 개최하여 상생의 뜻깊은 전통을 이어가고자 하오니, 뜻있는 분들의 많은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사진, / 조문호

 

 

  

 

자유로운 삶을 사신 철학자 신성준 선생께서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받았다.

뇌출혈을 일으켜 갑자기 돌아가셨다며, 인사동 유목민에 빈소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며칠 전 윤명철씨가 발견하여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늦었다고 한다.

독일 사는 조카에게 연락이 닿아 그나마 혈연이 빈소를 지킬 수 있었다.

 

지난 5일 오후6시 무렵, 빈소를 차린 유목민에 갔더니,

독일에서 온 외조카 유수선씨와 조카 신대식씨를 비롯하여

윤명철, 노광래, 전활철, 최유진, 강찬모, 김명성, 조해인, 이명희씨가 있었다.

 

일찍은 박상희씨가 다녀갔고, 늦게는 방기식씨와 김상현씨도 조문을 왔는데,

김상현씨는 암과 투병중인 환자가 아니던가?

 

빈소에 걸린 영정사진이 젊은 모습이라 낯설기도 하지만,

고인의 영전에 술 한 잔 올려 편안한 안식을 기원했다.

 

먼길 떠나는 노잣돈이라며 돈봉투를 내놓았더니, 노광래씨가 필요없다며 돌려 주었다.

술 값은 독일에서 온 외조카 유수선씨가 부담한다며...

 

고인은 독신으로 사셨으니, 걸릴 것 없이 편하게 떠나신 것이다.

장례식장보다 유목민에 빈소를 마련한 것도 잘 한 것 같았다.

 

5일은 인사동 유목민에서 조문객을 맞고,

6일은 노광래씨가 운영하는 시네갤러리에서 맞을 것이라 한다.

 

생전에 두 곳을 가끔 들리기도 했지만, 유목민처럼 사시며 술을 즐겼으니

고인의 뜻도 같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인의 삶처럼 자유롭게 이승을 떠돌며  삶을 하직한 것이다.

최유진씨는 장례문화도 이처럼 다양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해는 화장하여 조카가 사는 독일로 옮겨 갈 것이라는데,

절차가 까다로워 보름정도의 시일이 걸린다고 한다.

 

삼가 고인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사진, / 조문호

 

 

 

 

철학자 신성준 선생께서 지난 4일, 뇌출혈로 돌아가셨습니다.

빈소를 지킬 가족이 없어 인사동 ‘유목민’에 임시 분향소를 마련하였습니다.

2월 5일은 '유목민'에서 조문이 가능하고, 2월6일은 노광래씨의 '시네갤러리'로 옮깁니다.

생전에 좋아하신 약주 한 잔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고인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아래는 고인의 생전 모습입니다.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인사동이 인사동 같지가 않다.

인사동이 삭막하게 변한 것이 어제 오늘만의 일도 아니지만,

정든 사람마저 볼 수 없으니,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인사동 풍류객들은 세상을 등졌거나 대부분 떠나버렸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거리도, 여느 거리와 다를 바 없다.

서울역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지만,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가기도 싫어졌다.

 

지난17일 오후무렵,  유목민전활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홍천 사는 양서욱씨가 인사동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를 본지도 오래되었지만, 술 생각이 간절한 터라 하던 일을 덮어버렸다.

 

유목민에 갔더니, 전활철, 양서욱, 고은우씨가 있었다.

가게 안쪽 전등이 꺼진데다 주변이 어수선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 날이 정기휴일이란다.

 

홍천에서 집 짓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는 서욱씨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뒤늦게 도언탁, 장은하씨가 등장하며 술자리도 무르익어 갔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 그런지, 벽치기길 입구의 담배포가 문을 닫아버렸다.

술 마시며 담배를 참아야 하는 인내에 한계를 느꼈다.

또 한 곳인 '예당은 술집이라 사러가기가 민망하지만. 어쩌겠는가?

 

하는 수 없이 예당에 담배 사러 갔더니, 도처에 아는 사람들이 콩알처럼 박혀 있었다.

 

최유진, 이만주, 이두엽, 김태서씨 등 반가운 분들이 많았으나, 사진만 찍고 나와 버렸다.

 

돌아오다 새로 생긴 술집에도 잠시 들려 보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장경호, 박원규, 노현덕씨가 앉아 있었다.

느닷없이 등장한 쌍다구에 그들이 더 놀란 것 같았다.

 

반가운 인사동 사람들이 여기 저기 앉아 있으니, 모처럼 인사동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예전 인사동이 정겹듯이, 사람도 오래된 사이가 정겹다. 농익은 술이나 곰삭은 된장처럼...

 

새로 개업한 집에서부터 예당유목민을 오가며 첨벙거리던 중에

흐린 세상으로 건너오라는 이두엽씨의 전화를 받았다.

 

이미 술에 절었지만, 그 쪽 사정이 궁금해 안 갈수가 없었다.

골목을 돌고 돌아 흐린 세상 건너기로 갔더니,

이두엽, 최유진, 이만주씨와 잘 모르는 여시인도 한 분 계셨다.

 

한 때 방송피디로 일하다 신문사사장까지 두루 거친 이두엽씨는

세상을 떠난 여운화백과 더불어 인사동 밤안개로 불렸다.

밤안개처럼, 밤 새도록 인사동을 휩쓸며 새긴 사연이 얼마나 많겠나?

 

그런데, ‘뿌리 깊은 미래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는 따끈한 소식을 주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인사동이라며, 인사동의 뿌리를 찾아 나서겠다는 말에 가슴이 부풀었다.

 

인사동의 매력은 정이라는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정하면 인사동의 인정이니, 결국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가?

 

"사람아 사람아~ 인사동 사람아~"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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