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장에 세워진 웨딩사진을 찍었다. [촬영자 미상]



시나리오 작가이며 다큐 감독인 최건모씨가 지난 4월14일 노량진 ‘베라카채플’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나이 40이 넘도록 작업에 미쳐 연애 걸 시간조차 없었는데, 몇 달 전 결혼 할 사람이라며 한 여인을 소개했다.

예쁜 여인이 첫 인상도 너무 착해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알아 본 정영신씨가 너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채연희씨는 전라도 해남 처녀인데, 두 사람의 궁합이 너무 잘 맞았다.

속 궁합이야 잘 모르지만, 서로의 생각이 같고 지향점이 같다는 것보다 더 좋을 수는 있겠는가?

연인의 관계에 앞서, 친구처럼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서로가 하는 일에 큰 에너지가 되어 줄 좋은 배필임이 틀림없었다.




최건모씨를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3년 전 나의 다큐를 찍겠다고 찾아 와 처음 만났는데,

인연이 깊게 된 것은, 그가 찍은 빈민들의 영상을 보게 되며서다.

찍힌 현장의 조악함도 그렇지만, 동자동 빈민들의 삶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평생 사람을 찍어 온 나는 그동안 무엇했냐는 자책감이 들 정도였다.




오랫동안 인사동을 기록해 왔으나, 더 이상 한계를 느껴 고민한 것도 사실이다.

인사동을 사랑했던 많은 예술인들이 하나 둘 떠나가는데다,

점차 정체성을 잃어 관광지로 변해가는 인사동을 지켜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현역에서 물러나야 할 나이에,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무리인 것 같았으나,

다 버리고 도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스스로를 용서받는 의미에서 마지막 인생을 이곳에 바쳐야겠다는 각오를 다진 것이다.




그런데, 그 작업은 오가며 할 작업이 아니라, 똑같은 처지가 되어야 찍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게 되었는데,

최건모씨는 자기 때문에 가정이 해체된다고 생각했으니, 그의 마음인들 얼마나 아팠겠는가?


우여곡절을 거쳤으나, 2년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동자동의 생활도 어렵사리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의 규범에 불과한 법적인 절차보다 실리적으로 사는 것을 원해 왔다.

이혼은 했지만, 변함없는 동지애를 유지하며, 서로 도와주고 소통하는 모습에

최건모씨도 다소 안도하는 것 같았다.



이토록 예사롭지 않은 인연을 가진 최건모씨의 결혼 소식에 내가 장가 가듯 들떴다.

정영신씨와 결혼 선물 하나 만들어 달려갔는데, 예식장을 잘 못 찾아 좀 늦어버렸다.

목사님의 주례사가 시작되고 있었는데, 나란히 서있는 한 쌍의 모습이 너무 잘 어울렸다.




신부의 고향인 해남에서 버스를 대절해 온 친지와 이웃들도 많아 예식장은 만원이었다.

그 날 주례사에서도 말씀 하셨지만, 항상 자신보다 상대를 먼저 배려하고,

친구처럼 서로 의지하는 아름다운 삶을 이어가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날, 조준영시인도 예식장에 왔다고 했으나, 길이 엇갈려 서로 만나보지 못했다.


피로연 자리에 찾아 온 신랑의 입이 찢어질 듯 싱글벙글했는데, 함께 온 신부인들 얼마나 좋았겠는가?

신혼여행지로 일본 ‘오사까’라 했는데, 멋지고 좋은 추억 많이 만들고,

부디 행복하게 잘 살기를 축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5일 저녁 무렵, 동자동 골목에 두 노인이 나와 계셨다.
이홍렬(78), 김원호(73)씨 였는데, 두 분 다 당뇨로 고생하는 분들이다.
막걸리 한 병을 보약처럼 아끼며,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드시며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팔았지만, 배우기 위해서도 몸을 팔았어." 
이홍렬씨는 ‘네가 청량리 사창가를 찍었지만, 이런 것은 모를 것’이란 투의 말씀이셨다.






이 분은 황해도에서 피난 오신 분인데, 자유당 말기의 청년 시절을 아현동 모 여대 부근에서 사셨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양동 등 도심의 음침한 뒷골목을 휘저으며 살아 일반인들이 모르는 것을 많이 보고 살았는데,

그 당시 등록금 마련을 위해 몸을 팔았던 여대생들 이야기를 했다.

돈이 필요한 여대생을 남자들과 연결시켜주는 뚜쟁이들의 벌이도 좋았다고 한다.





하기야, 그 당시는 어려운 고학생들이 많았던 시절이라, 여대생들 일자리 얻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지난한 매춘의 역사를 아무도 탓할 수 없겠으나, 아마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젠 역전 부근에 밀집된 사창가는 사라졌지만, 도처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일들이라, 별의 별 일이 다 있을 것이다,

크게 보면 돈보고 결혼하는 자체도 몸 파는 것에 다름 아니겠는가?





이 날은 ‘식도락’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한 시간 후에 세월호 리본을 만들기로 되어 있었다.
허구한 날 자는데도 졸음이 와, 한 시간만 잘 생각이었는데 일어나보니 오후3시였다.

하는 수 없어 컴퓨터를 열어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나 기웃거렸는데, 저녁거리가 없었다.

아침 겸 점심은 밥을 먹고, 저녁은 빵으로 때우는데, 지난 토요일 늦잠으로 빵 배급을 못 받은 것이다.

서울역에 있는 마트에서 일주일 분량의 빵을 사러 일어서려는데, 시나리오작가 최건모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전화였으나, 술 생각이 간절했던 터라 반갑게 맞았다.






동자동 ‘태향반점’에서 탕수육을 안주로 소주 한 잔 했다.
이 친구는 가끔 만나지만, 내 블로그를 샅샅이 보아 동자동 근황을 잘 알고 있었다.

힘이 미치는 한 도와주려 무던히도 애쓰는 고마운 친구다.

하는 일은 시나리오 작가지만,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어 사회기록과 관련되어 내가 모델이 되기도 했다.





노총각으로 힘겹게 살지만, 제 하고 싶은 일 열심히 하는 것 보니 참 보기 좋았다.

어쩌면 내가 동자동으로 들어오게 된 계기도 그가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찍은 처참한 동자동 기록을 본 후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다.






모처럼 만나 ‘인사동은 왜 나가지 않느냐?’, ‘여기서 언제까지 작업할 것이냐?’는 등 여러 가지 물어보았으나,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에 더 집중하기 위해 못갈 뿐이고, 여기가 마지막 자리 같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소주 한 병으로는 좀 아쉬웠지만, 담배를 피울 수가 없어 일어나야 했다.





남은 탕수육을 내일 먹으려고 싸 달랬는데, 방으로 가져 갈 겨를이 없었다.
커피 한 잔 마시려 매점으로 갔는데, 매점 앞에 이홍렬, 김원호씨가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김규수씨가 있었다. 안주를 펼쳐놓으니, 최건모씨가 막걸리를 사왔다.





덕분에 이홍렬씨의 몸 팔아 공부한 여대생들 이야기도 들었고, 김원호씨 사는 이야기도 들었다.

김원호씨는 젊은 시절 사고를 자주 쳐 교도소를 들락거려, 교회전도사가 사람 만들려고 그에게 시집왔다고 한다.

요즘은 서울근교의 기도소에서 사시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들린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김규수씨가 만나면 밤일도 하냐고 물었는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셨다.

그 몸으로 어려울 것 같았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거시기는 몇 센티냐? 어떻게 하느냐?‘등 원초적인 질문의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이 날은 처음부터 몸 파는 이야기가 나와서인지, 몸이 비비 꼬이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다들 독거로 외롭게 사니, 그리울 수밖에...






김규수씨는 힘든 일하다 다쳤다며, 큼직한 파스를 붙여 놓은 허리를 보여주었는데,

아마 밤일을 과격하게 치루어 다친 영광의 상처가 아닌지, 그렇다면 상대가 누군지도 궁금했다.

자기의 거시기는 가늘고 길어 여자 배꼽으로 나온 다는 우스게 소리도 했다.

지금은 마티아라는 세례명으로 착하게 살며 ‘식도락’의 설거지도 돕지만,

이자도 한 때는 교도소를 제집처럼 들락거린 별이 일곱 개나 되는 장군이다.






김용만, 홍홍임, 박희봉씨 등 여러 명이 애로영화의 액스트라 처럼 등장하였다가는 사라졌지만,

스토리가 음란비디오보다 훨씬 진해, 방으로 도망쳐야 했다.
“주여~ 더 이상 휴지에 말라죽는 자손들이 없도록 하소서”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5일 오후 늦게 인사동에 갔다.
지난 번 오프닝 때 못 갔던 김석주씨 전시도 보아야하지만, 시나리오 작가 최근모씨와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사동거리에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가 있었는지, 전경들의 행군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인사동에 중요한 사태라도 벌어질 것  처럼, 주말의 복잡한 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외곽 길을 두고 복잡한 길로 버젓이 활보하는 것은, 시민들이나 관광객의 불편도 불편이지만,

일종의 위압감을 조성한다.

    


 

전시가 열리는 나무화랑부터 들렸더니, 김석주씨를 비롯하여 춘천의 김윤기씨와 설치미술 하는 이혜련씨가 함께 있었다.

    







전시된 작품들은 몽따쥬와 꼴라쥬 기법을 통해 서로 어울리고 결합하는 뜻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수 없이 많은 손가락의 단절된 형상은 현 상황의 비유이자 단절을 넘어 통일에 대한 얽힘과 연대의

중요한 고리라고 작가는 말했다. 또한 사물과 지도의 병치를 통해 지역갈등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었다.

작품 하나하나에 작가의 통일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작품들을 둘러보고 나니, 김석주씨가 술 마시러가자며 서둘렀다.

이혜련씨와 함께 두대문집으로 옮겼는데, 좀 불편하지만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김석주씨는 물론 화가이자 설치미술가인 이혜련씨 까지 농아작가였기 때문이다.

수화라고는 술 마시는 흉내 정도이니, 사사건건 종이에 메모해 생각을 주고받은 것이다.

 

그런데, 김석주씨의 주량은 소주 다섯 병이라 했다.

얼마나 빨리 마셔대는지, 덩달아 취해버렸다.

















최근모씨로 부터 전화가 와 먼저 일어났으나, 약속장소인 유목민은 문이 잠겨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그 날이 휴일이었다.










최근모씨와 포도나무집’으로 옮겨 한 잔 더했다.


최근모씨는 인사동에 관한 시나리오를 준비한다며 자문의 자리를 만들었으나,

이미 인사동 사람들블로그를 통해 인사동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훤히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내가 몰랐던 은평구 청소년들의 오래된 사진아카이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음을 약속하고 헤어졌으나, 그가 내게 보여 준 책을 가져 와 버렸다.

술이 깨어 자세히 볼 작정이었으나, 아마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은 것 같다.

 

사진,/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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