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

손은영/ SONEUNYOUNG / 孫銀英 / photography

2023_0706 2023_0831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27_Ed.2/10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80×110cm_2020

손은영 홈페이지_soneunyoung.com

인스타그램_@_young_eye

 

주최,후원 / 서울대학교 유전공학연구소

 

초대일시 / 2023_0706_목요일_11:30a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_10:00am~04:00pm

 

 

서울대학교 유전공학연구소

Seoul National University

Institute of Molecular Biology and Genetics

서울 관악구 관악로 1 서울대학교 1051

imbg.snu.ac.kr

 

밤에 본 집 손은영은 서울과 군산 등 한국의 도시 주변의 자리한 작고 납작한 집들을 촬영했다. 어두운 밤으로 둘러싸인 집의 외관을 인공의 빛이 환하게 비춰주고 있어서 마치 인물을 촬영하듯 하나씩 집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로인해 집은 인격을 부여받은 존재가 되어 자립한다. 누군가의 초상처럼 자리한 낮은 집들은 낡고 누추한 대로 기꺼이 사람의 보금자리를 기품 있게 만들어 보인다. 가능한 자신의 정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는 이 정직한 집은 가장 기본적인 집의 외관과 구조만을 뼈처럼 드러낸다. 지붕과 벽, 창문 이외의 다른 장식은 거의 없는 집이다. 도로나 길가와 인접한, 그렇게 무방비로 노출된 집들은 출입구를 숨긴 체 밋밋한 벽만을 창백하게 보여줄 뿐이다. 다만 몇 개의 창이 있고 외부의 시선과 접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구조물이 창문으로 붙어 일종의 방어벽을 만들고 있다. 이 어설프고 불안한 시설물은 기능적인 역할보다는 심리적인 방어기제로 작동하는 편이다. 기이한 색상의 페인트로 칠해진 벽은 그만한 강도를 지닌 지붕 색과 강렬한 대조를 이루면서 너무 얇고 평면적으로 펼쳐져있다. 벽은 그 집에 사는 누군가의 등을 연상시킨다. 혹은 타자의 시선에 대책 없이 드러나 버린 살처럼 민망하면서도 관능적으로 빛난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37_Ed.3/15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0

사진이란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다시 보여주는 일일 텐데 그렇게 자리한 대상 자체가 지닌 묘한 시각적인 힘을 작가는 날카롭게 찍어낸다. 비록 더없이 소박하지만 충분히 흥미로운 구조와 형태, 매력적인 색채를 품고 있는 레디메이드로서의 이 건축물/집의 외관은 그 자체로 당당한 회화작품처럼 다가온다. 흡사 색채들의 콜라주로 이루어진 색면 회화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름의 조형적인 매력을 간직한 오브제를 선명하고 밀도 있게 건져 올리는 감각이 돋보인다. 이 사진은 그러한 작가의 안목이랄까, 미에 대한 묘한 감수성의 결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사진에 들어와 박힌 대상보다도 그것을 다시 보여주는 작가의 시선, 안목, 조형감각이 우선하는 사진이라는 생각이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45_Ed.2/5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20×160cm_2020

고층 건물 아래에 마지못해 끼여 있거나 허름한 골목길 모퉁이 어딘가에 뜬금없이 박힌 이 작은 집들은 길옆에 바짝 붙어 서서 각박한 생애의 고단함을 스스로 방증하고 있다.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다소 생뚱맞은 색채와 기이한 형태가 역설적으로 빚어내는 조형도 정형화된 질서에서 벗어난 낯선 미감을 발화한다. 그것은 소외되고 주변부화된 것들의 간절한 반짝임이고 이는 집과 창문으로 발광하는 따스한 빛이 포개지면서 보다 강화된다. 지붕과 벽,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몇 개의 창문만이 집을 집이게 한다. 이 집들은 현재 번화한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가옥구조이자 아파트와 고층 건물의 현란함 속에서 뒷걸음질 친, 지난 시간대의 집들이자 서서히 사라져가는 건축이다. 이상하고 키치적인 건물이자 주어진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필사적으로, 불가피하고 요령껏 만든 집이다. 그래서인지 사진으로 다시 보게 되는 이 집들은 현실감이 줄어들고 마치 영화나 드라마세트장과도 같은 느낌을 부여한다. 사람이 거주하는 현실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거의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장면이다. 밤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기에 그러한 느낌은 보다 더 고양된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53_Ed.2/10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80×110cm_2021

동시에 이 사진은 평범한 주변의 일상 풍경이 특별한 존재로 탈바꿈 하는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작가는 일상적으로 접하는 현실 안에서 어딘지 이상한 파열음을 내는 순간, 장면을 만났고 이를 관찰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익숙한 공간 안에서 마주한 집의 외관에서 어떤 낮설음과 이상한 욕망과 충격을 건져 올려 찍는다. 눈에 보이는 광경을 넘어선 다른 어떤 것을 암시해주는 순간을 사진으로 재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찰나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가깝다. 작가는 밤에 유독 특별한 순간, 장면이 되어버린 것을 건져 올리고 일상과 일상 너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느낌이 사진 속에서 공존하도록 배려한다.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늘상 현실의 풍경을 바라보지만 그 안에 감춰진, 그것이 두르고 있는 독특한 순간의 모습은 잘 보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란 그것을 보게 하는 이들이고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일상속의 비일상, 현실 속의 비현실, 사물 속의 꿈, 풍경 속의 또 다른 세계가 이어져있는 것을 보는 일, 보게 하는 일이다. 작가는 그렇게 현실계에 은밀하게 숨겨진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55_Ed.2/5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20×160cm_2020

도시 공간에 자리한 모든 사물들은 침묵하는 부동의 것들이다. 몸은 있지만 입을 가지지 못해 발화하는 음성은 없지만 그래서 고막에 와 닿는 소리는 없지만 분명 사물은 표면과 질감으로 인간의 말과는 다른 말을 건네기도 한다. 문법과 규칙이 소거된 그 상형문자 같기도 한 이상한 문자, 말은 차갑고 완고하게 사물의 피부에 문질러져있다. 낯선 집의 외벽은 다양한 흔적과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잔뜩 서려있고 그것과 함께 했던 누군가의 체취와 지문이 저부조의 층을 만들며 눌려있다. 그래서 사물의 피부에 눈을 주면 사물의 생애는, 그 역사는 매개 없이 그대로 다가와 안긴다. 무수한 사물들로 채워진 도시는 그런 의미에서 거대한 텍스트이자 관능적인 몸들이다. 시선으로 읽고 마음으로 상상하는 텍스트로서의 풍경이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사물들 속에서 사는 일이고 사물을 관찰하는 관찰자가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자신을 둘러싼 공간, 환경을 질문하는 일이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61_Ed.2/5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20×160cm_2021

작가는 적극적으로 그 도시의 내부로 잠입하면서 무엇인가를 관찰하고 찾아낸다. 그녀가 찾아낸 것은 어둠 속에 박힌 작은 집들이다. 밀폐된 벽을 성처럼 두르고 소박한 불빛을 등댓불처럼 방출하는 그 집들의 벽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삶의 뒷면을 보여줄 뿐이다. 앞이 부재한, 따라서 표정이 지워진 뒷모습은 보는 이의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그것은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져야 하는 정면보다 더 정직하다. 집이란 공간도 그 내부의 인테리어나 살림살이보다 그 모든 것을 보자기처럼 죄 감싸버린 벽에서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을 볼 수 있다. 작가는 그 벽 앞에서 들리지 않는 음성을 듣고 보이지 않는 집 안 사람들의 몸의 놀림을 보고 있다. 상상하고 있다. 침묵으로 절여진 집의 외벽이란 경계를 마주하면서 그 피부와 피부 너머를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64_Ed.2/10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60×120cm_2021

인간의 자취가 사라진 이 빈 풍경에는 이상한(?) 건물과 집의 내부에서 부드럽게 빛나는 불빛을 전해주는 창문만이 무거운 침묵 속에 놓여있다. 풍경이라기보다는 차갑고 즉물적인 정물의 느낌을 받는다. 다만, 보는 이들은 밝은 창문으로 인해 살림살이의 흔적, 사람의 자리를 은연중 상상하게 한다. 햇빛이 모였던 창이 밤이 되면 다시 안의 빛을 밖으로 방사한다. 그것은 막막하고 절대 암흑의 공간에 고립된 집들이 외부에 보내는 구원의 신호와도 같다. 생각해보면 모든 집들은 타인에게는 무척이나 완강하고 폐쇄적이다. 사람들의 최종 귀착점은 결국 각자의 집이지만 그것은 지극히 사적이고 그만큼 내밀하고 고독하다. 그래서 타자의 집은 타자만큼, 그보다도 타자적이다. 더구나 전통사회와 같은 공공의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 모호한 공동체가 무너진 이후 도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타자에 대한 의구심과 경계심을 보이면서 이를 집의 구조를 통해 반영한다. 아파트 공간이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아파트는 기계와 같은 기능 복합체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85_Ed.2/10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60×120cm_2021

반면 손은영이 사진으로 담은 집은 단독주택이자 현재의 거주 공간에서 낙후되어 밀려나고 퇴락한 것들, 빈한했던 지난 시절의 흔적을 아직도 간직한 것들로서 가난하고 소박한 살림을 숨기지 않는다. 벽으로 감싸인 납작한 집들은 방이 있음을 암시하는 창문과 그 안에서 사람이 살고 있음을 발신하는 불빛이 새어나온다. 작가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 저런 집들이 존재하고 그 집에 분명 사람이 살며 생을 영위하고 잠이 들고 꿈을 꾸고 내일을 도모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는 작가가 보여주는 세상의 이 집들, 밤을 배경으로 고독하게 직립한 집의 외관을 통해 그 안에 있는 누군가의 삶과 생애를 기억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이 사진들이 "상처 입은 인간에 대한 위로"가 되고 싶다고 한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89_Ed.2/5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20×160cm_2021

사실 작가는 이 빈집들을 촬영한 다음 후보정을 통해 창에 조명을 기입했다. 그래서 흡사 실제 전기불빛이 퍼지는 듯한 허구를 만든다. 집들은 정면에서 빛을 받고 있다. 지붕과 벽이 어둠 속에서 돌출하듯 밀고 나온다. 이 집들은 주변 풍경으로부터 고립되어 있거나 밀려나온 듯하다. 주변 풍경에 비해 이질적이고 생경한 외형을 간직하고 있는 어색하면서도 안쓰러운 이 집들은 또한 그런 사람의 초상, 생애를 대리한다. 반면 볼품없어 보이는 집의 외관과는 달리 작은 창문을 통해 나오는 조명의 불빛은 마냥 환해서 무척이나 당당하다. 그것은 자신의 가난에 기죽지 않는 자존심으로 견디고 있는 매 순간을 연장시킨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49_Ed.3/15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0

이처럼 작가는 이미 존재하는 도시의 풍경, 작은 집을 오브제 삼아 흥미로운 풍경, 정물을 구성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레디메이드미학과 연루되면서 절묘한 구성과 기이한 형태, 매력적인 색채들의 조화로, 이상한 조합으로 만들어낸 예기치 못한 미이고 조형이다. 사진이 란 이미 존재하는 것의 피부에 달라붙어 이를 떠내는 일이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너무 낯설고 이상한 아름다움을 무의식적으로 건져 올리면서 사진/회화의 구분을 무의하게 가로질러 가는 시각이미지를 선사한다. 벤야민이 언급한 것처럼 인간의 길들여진 시선과는 다른 사진이라는 기계적 시선으로 인해 가능한 초현실적인적인 힘을 누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진은 가장 보편적이고 익숙한 사진에서 출발하지만 동시에 그 비근한 소재에서 찾아낼 수 있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지점을 예민하게 지각시켜주는 사진이다. 무엇이라 설명하기 힘들고 규정하기 어려운 묘한 느낌과 모종의 기운이 어둠 속에서 밀도 있는 공기의 층으로, 몸으로 휘감기는 안개처럼 잔뜩 피어오르고 있다는 생각이다. 작가는 바로 '그것'을 찍고 싶었던 것 같다. 박영택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33_Ed.3/15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0

현대인들을 일컬어 집 잃은 존재 homeless being 라고 한다. 집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집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가 살기 위하여 지은 건축물 등을 말한다. 단지 생명 유지가 집의 역할의 전부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집이란 한 인간의 태어나고 성장하는 생물학적인 장소이자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사회의 규범과 질서를 배우고 세상을 알아가는 사회적 장소이다. 이와 더불어 집은 모든 개인적인 행위들이 일어나는 지극히 일상적 장소이기도 하다. 이처럼 주거 공간, 즉 집으로 불리는 건축물은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07_Ed.2/10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80×110cm_2020

집은 인간이 거주하는 물리적인 공간이지만 개인의 경험과 정서가 결합하면서 가족 구성원과 추억을 공유하고 미래의 꿈을 함께 하는 삶의 중요한 터전이다. 즉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인간 실존의 본질이자 존재의 기본적인 특성을 집에 거주하는 것으로 보았다. 집은 단순히 우연히 살게 된 가옥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에든 있는 것이거나 교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의미의 중심인 것이다. 따라서 집은 외부와 나를 구분 지어주는 경계이기도 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75_Ed.2/10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80×110cm_2021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집은 이런 정서적이고 정신적 의미보다는 경제적 가치의 척도가 되어버렸다. 젊은 세대는 삶의 목표를 집을 마련하는 것에 두었고 집을 마련하기 위해 일을 한다고 대답한다. 점점 갈수록 생업에서 돌아와 내 몸 편히 쉴 수 있는 집을 마련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집의 가치가 인간 실존의 문제보다 상위에 군림해버렸다. 몇 평의 집에 사는지, 자가인지 월세인지, 아파트인지 연립인지, 강남인지 어느 동네인지 등에 따라 한 인간의 능력과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었고, 부모 세대는 자식에게 집을 물려줄 수 있는지에 따라 능력의 지표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46_Ed.3/15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0

우리는 어떤 집을 욕망하는가. 비록 집이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건축물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삶에 있어서 가족 구성원들의 필수적인 정서적인 교류 공간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하면서 '밤의 집'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바슐라르가 지적한 대로 실제로 사람들이 거주하는 모든 공간은 본질적으로 집이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다고 했듯이 다양한 형태의 집들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기존에 생각하던 '전형적인' 주거 공간과는 달리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밤의 집'에서 일관되지 않는 거주 구조를 보여주고 싶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직업으로 인해 가족과 떨어져 지냈던 기억이 있어서 가족에 대한 애착과 온전한 가정에 대한 그리움이 적지 않았다, 어둠 속에 자리를 잡은 집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 사는 가족이 보이는 듯하다. 비록 화면에는 사람은 부재하지만, 창문 밖으로 새어 나오는 빛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족 간의 대화가 들리는 듯했다.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지만 엄마의 뱃속과 같이 평온하면서 가장 사적이고 소중한 공간으로 보이도록 충만한 색감을 많이 사용하였다. 밤의 공간 속에서 찬연한 익명의 집들은 아름답게 빛나는 존재의 집으로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 '밤의 집'은 소유의 대상으로 전락한 집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고 현재를 살아가는 집 잃은 영혼을 위로하는 따뜻한 빛을 담아내고 싶었다. 손은영

 

포토마가 주최하는 제2FNK PHOTOGRAPHY AWARD 순수부문 수상자 초대전인

손은영의 밤의 집2’가 지난 12일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에서 개막되었다.

 

오후 여섯시에 시상식이 있다기에 사람들을 피해 한 시간이나 빨리 갔는데,

일찍부터 사진가들이 여럿 와 있었다.

 

작가 손은영을 비롯하여 주최측인 '포토마' 하춘근대표, '갤러리 브레송' 김남진관장,

사진가 엄상빈, 정영신, 김영호, 곽명우씨 정도는 알겠는데,

다들 마스크 때문에 잘 모르겠더라.

 

빨리 빠져 나오려고 사진부터 돌아보았는데,

지난 번 보여 준 밤의 집보다 좀 더 정형화 된 것 같았다.

 

어둠이 깃든 집의 구조가 마치 집들의 초상사진처럼 존재를 드러냈다.

이전에는 어렴풋이나마 집에서 인적, 즉 사람의 체취가 감지되었으나,

이번에는 자로 잰 듯 수평과 수직으로 그려 진 구조물이

독특한 저마다의 색깔에 의해 마치 무대세트처럼 다가왔다.

 

의도된 작위였다.

점점 각박해지고 규격화되어가는 현대인들의 삶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촬영할 때부터 모든 것이 계산되어 있었다.

마땅한 집을 찾아내어 화면 구성에서 색조에 이르기까지...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받은 손은영씨, (손은영씨 페북에서 옮겼다)

촬영 후 후보정을 통해 또 다른 분위기의 집으로 바꾼 것이다.

사진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다시 말해 기록의 예술에서 표현의 예술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번에 발행된 손은영의 '밤 의집2' 사진집 표지 (손은영씨 페북에서 옮겼다)

우리전통가옥은 초가 능선처럼 어딘가 곡선이 있으나

서구의 건축들은 대개 직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령 같은 수직의 아파트가 점령한 현실에서 본 집의 형태는

옛날 달동네 집이나 마찬가지다.

 

포근한 인간의 정서가 풍기는 달동네를 대신하여

경제성장으로 발전한 삭막한 오늘의 달동네인 것이다.

시대성이 담긴 주택사의 한 단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적인 기록의 가치보다

작가의 주관에 따라 예술사진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 예술사진 또한 시대적 달동네를 조명하는 기록의 한 축이기도 하겠다.

 

작가는 오랜 나날을 밤에는 찍고 낯에는 후보정하며 올빼미처럼 작업했다.

다시 말해 밤에는 사진 찍고 낯에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색의 조화는 물론 창에 백열등 불빛을 삽입하는 등 미적 요소까지 끌어들였다.

 

사진들은 도식적이면서도 서정적이었다.

도식적인 형태가 정형화되긴 했으나

포근한 색감과 직선의 미가 어울려 관능적으로 다가왔다.

 

사진 속은 잠잠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 날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미에 대한 작가의 감수성과 조형감각이 돋보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듯, 21일까지 열리니 구경 한 번 하시라.

 

사진, / 조문호

 

손은영의 ‘밤의 집’은 보는 사람에 따라 생각하는 바가 다 다르다.

모든 작품이 다 그렇지만, 관람자의 눈높이나 생각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밤의 집' 손은영 사진집 표지 / 눈빛출판사 / 값 12,000원

 

 

며칠 전 정영신의 ‘장에가자’ 전시에서 다음 전시작가 손은영씨 작품을 알게 되었다.

전에 본 사진과는 또 다른 울림이 있었는데, 마침 인사동 갈 일이 생겨 충무로부터 들렸다.

사진전이 막을 올리는 날이라, 손님 몰리기 전에 빨리 보고 올 속셈이었다.

 

텅 빈 전시장에서 사방을 돌아보니 각양각색의 집들이 마치 무대세트 처럼 정렬되어 있었다.

인적 끊긴 집의 형태에서 텅 빈 무소유를 느끼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어떤 이는 밤의 집에서 사람의 체취나 온기를 느낀다고도 했으나

인간애가 담긴 삶의 공간으로서 보다 문명비판적 시각이 더 앞섰다.

 

요즘 치솟는 아파트 가격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집값 아니더냐?

벌집 같은 아파트 한 채가 몇 십억을 호가하니, 이미 집은 주거공간에 앞서 부의 상징이다.

사진을 보는 분의 평가도 다르듯이, 보는 입장에 따라 달라 보일 수밖에 없다.

 집 없는 서민의 입장에서는 납작한 지붕의 슬라브 집이 꿈의 궁전처럼 보일 것이고,

돈 많은 부자의 입장에서는 측은하면서도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정작 작가는 아무런 단정 없이 감상자들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내가 볼 때 손은영의 ‘밤의 집’은 기록에서 예술로 승화시킨 작업이다.

단순한 집의 외관을 통해, 삶의 회억에서 부터 사회적 경제논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각을 이끌어내며 반성의 단초를 제공한다.

 

마치 건축도면처럼 깔끔하게 보정한 작업에서 엿볼 수 있듯이,

차거운 톤을 이룬 밤의 색조와 집의 조형미가 어우러져 인간에게 보내는 경고 같았고.

집에 대한 향수도 집에 대한 욕심도 아닌 물질문명에 망가진 인간의 자화상이었다.

하나의 도구로 사진을 채용했을 뿐, 작가의 묵시적 메시지다.

 

작가는 한 때 고성에서 산불 난 집을 찾아다니며 찍은 적도 있고, ‘길에서 만난 사람’도 찍었다.

사람조차 집을 배경으로 한 사진이 많았는데, 유독 집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불 타버린 건물의 앙상한 자취를 특유의 인화로 황량한 느낌을 강조하기도 했고,

이 땅에 의지해 살아 온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과 강인한 정신력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작업은 또 다른 시도였다.

창으로 흘러나오는 불빛에서 희망의 여지는 남겨두었으나

어둠 속에 감도는 무거운 침묵, 바로 그 것이 이 사진의 매력이다.

 

작가의 창작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다.

여린 여성의 입장에서 밤 고양이처럼 밤에만 쫓아다녔다.

나즈막한 슬라브 집들을 초상사진 찍듯 다박다박 찍어 낸 것이다.

마치 파파라치가 사람 몰래 촬영하듯 남의 집들을 밤에만 기록했다.

그리고는 집의 조형미에 따라 도식화시켰다.

 

티끌 한 점 남기지 않는 후 보정 작업으로 사적인 감정이 개입할 여지를 없애 버린 것이다.

색깔도 창백한 톤으로 정리하는 등, 인간과의 연결고리나 단서조차 말끔히 지워버렸다.

집에서 번져오는 희미한 불빛으로 여운을 남겼는데,

그 여운은 작가가 부여잡고 싶은 실오라기 같은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손은영씨처럼 작업 한다고 한 번 가정해 보자.

늦은 밤까지 기다리다 지쳐 술부터 한 잔 마셨을 것이다.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집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빠진다.

 

다들 깊이 잠든 늦은 시간에 공부하느라 머리를 싸맨 학생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집은 불꽃 튀기는 사랑의 전쟁을 벌이는 곳도 있을 것이다. 

 

달콤한 생각에 이르니, 옛날 파출소 부근에서 민방위 보초 서던 시절이 떠오른다.

한 밤 중 보초서다, 신음소리에 끌려 보았던 귀가 막힌 장면이 생각나서다.

한 쌍의 야생마 같은 부부의 뒤틀린 몸짓과 거친 숨결에 온 몸이 달아올랐다.

그 깊고 오묘한 장면 장면을 어찌 세치 혓바닥으로 다 이야기 하겠나?

 

갑자기 이런 잡스러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잡놈은 잡것만 생각나고, 돈에 중독된 놈은 돈만 생각나고,

새로운 것을 찾는 작가는 오로지 작품만 생각한다는 말이다.

 

바로 손은영씨가 보여 준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낸 집은 무언의 시대적 증언이다.

물질문명에 의해 인간성이 상실된 오늘의 사회상이고, 묵시적 가르침이다.

비록 후 보정이라는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지만, 생각이 한 발자국 앞 선 것이다.

일 년 넘게 고생하며 이룬 손영은의 또 하나의 성과다.

 

미술평론가 박영택씨는 손은영 ‘밤의 집’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사진은 가장 보편적이고 익숙한 사진에서 출발하지만

동시에 그 비근한 소재에서 찾아낼 수 있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지점을

예민하게 지각시켜주는 사진이다. 무엇이라 설명하기 힘들고 규정하기 어려운

묘한 느낌과 모종의 기운이 어둠 속에서 밀도 있는 공기의 층으로,

몸으로 휘감기는 안개처럼 잔뜩 피어오르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 전시는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10일까지 열린다.

전염병으로 전시장 다니기가 불편하시다면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눈빛사진가선 시리즈66호 손은영의 ‘밤의 집’ 사진집을 보라.

 

사진, 글 / 조문호

 



손은영씨의 길에서 만난 사람들사진전이 오는 27일까지 충무로 갤러리브레송에서 열리고 있다.




요즘은 사진전에 아예 관심을 끊어 어디서 뭐가 열리는지 알려 하지도 않는다.

씨잘때기 없는 사진도 너무 많지만 뒷말은 또 얼마나 많은지, 사진전 소개 글은 일체 쓰지 않겠다고 작심했기 때문이다.



지난 23일 오후, ‘갤러리 브레송김남진 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별 일 없으면 술이나 한 잔하자기에, 방구석에 처박혀 있어 온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저녁이나 먹을 생각으로 털고 일어났다,

멀다면 모르겠으나 동자동에서 충무로까지는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 아니던가?


요즘 사회적 거리두기로 다들 집에서 도를 닦아 산중에 계신 도사들 자리가 위태로울 지경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김남진씨 혼자 텅 빈 전시장을 지키며 일하고 있었는데, 사는 게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유럽으로 유학 간 딸과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집에 가고 싶다는 내용인 것 같았다.

비행기 삯이 걱정되어 사지에 있는 딸을 못 오게 하는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전시장을 둘러보니, 손은영씨의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시골 사람들이 여기 저기 서 있는 정면 사진들인데, 돈 안 되는 사진 찍었구나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다른 사진이면 몰라도 사람 사진이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오로지 사람을 찍어 오기도 했지만, ‘두메산골 사람들을 비롯하여 인사동 사람들’, ‘장터 사람들에서는

손은영씨가 보여주는 정면사진을 채용했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이 집이나 일하던 자리에 담담하게 서 있었다.

한 인물의 정면사진이란 모든 걸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 많은 것을 감추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사진은 모든 걸 받아들일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이러한 정면사진은 독일의 아구스트 잔더가 대표적이다. .

그의 사진은 찍힌 개인보다 사람을 직업군으로 보아 작가는 존경하지 않는다.

아무리 사진이 좋아도 사람을 대하는 근본 자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국내 작가들도 작고하신 홍순태선생의 '농촌 사람들'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찍어왔으나,

모두가 시대적, 지역적 환경이 달라 백번이고 천 번이고 계속되어야 할 작업임이 틀림없다.

다들 찍는 스타일에 변별력을 가지려 애 쓰지만, 중요한 건 사람에 대한 정신이지 방법은 사족에 불과하다.



손은영씨의 사진은 여지 것 보아왔던 입상사진과는 사뭇 달랐다.

대개 보아 왔던 흑백사진과는 달리 컬러사진인데다, 색조도 강하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았다.

 

대개의 사진가들이 찍을 때, 장소와 화면을 이루는 구도, 그리고 사람의 자세나 표정에 신경쓰며 일관성을 유지한다.

그러한 의도적 개입보다 자연스러운 접근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다. 상황에 처한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일터인 밭이나 살고 있는 집 또는 만난 장소에서 찍은 사진들인데, 사람과 환경은 물론이고 자세나 표정이 모두 달랐다.

인물보다 주변환경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 가운데, 이 땅을 지키며 한 시대를 살아가는 농민들의 담담한 모습이 자리했다.



대부분의 다큐 사진가들이 흑백으로 기록했지만, 사실은 컬러사진이 훨씬 사실적이다.

부쩍 그런 생각이 앞서는 것은 50년대 찍은 컬러사진들이 요즘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이전에 보아왔던 흑백기록에 비해 더 진한 감명을 주었기 때문이다. 색이 더 해지니 당시의 분위기나 감성까지 읽혀졌다.

손은영씨의 사진 역시 세월이 한 참 지난 후에는, 오늘의 의상 감각까지 생생하게 보여주게 될 것이다

 

전시장을 장식한 사진들은 수레나 자건거를 끌고 가다 마주쳤거나, 텃밭에서나 제초잡업을 하다 멈춰 선 정지된 장면이었다.

급박하게 사라져가는 시간의 자취를 기억하려는 의도에 붙잡혀 있었다.

장소나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찾아 볼 수 없었으나, 오로지 사람과 자연, 삶의 공간, 노동의 현장만 함께 했다.

 

급속한 근대화 속에서 빠르게 망각되어가는 우리네 삶과 문화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시선도 깔려있다.

민초들의 순박한 모습에서 인간적인 비애도 느껴졌다.



손은영씨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이 땅에 의지해 살아 온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과 강인한 정신력일 것이다.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물은 그 시대에 대한 기록이며 표상이다.’작가의 한마디에 이 사진전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사람의 얼굴이란 세상의 시작이고 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를 만나지 못해 물어보지 못한 의문점도 몇 가지 있었다.

첫째, 기록이 우선인지 예술이 우선인지 묻고 싶었다. 기록이 먼저라면 찍힌 사람이나 찍은 곳의 이름과 지명은 밝혀야하기 때문이다.

둘째, 인화 작업할 때 인물을 강조하기 위해 주변을 흐리게 한 트릭을 발견했는데,

의도적 개입보다 자연스러운 접근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다.’처음의 내 말과 배치되는 유일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기록보다 말하기 좋은 예술을 원한다면 할 말 없지만, 예술도 기록에 충실해야 가능하지 않을까?

좌우지간, 손은영씨가 보여 준 민초들의 얼굴과 몸은 우리네 전통이며 역사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사유해 보는 일에 다름 아니다.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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